2
접촉
콰아아아아앙!
요르문간드는 드래곤처럼 브레스를 쏜다거나, 마법을 쓰지 못한다.
대신 내가 7서클에 다다르며 어느 정도 되찾은 거대한 본신이 있었다.
육탄 돌격만으로 그렇게 많던 몬스터를 전부 괴멸시켰다.
요르문간드가 지나간 길은 그야말로 지옥도가 됐다.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던 국왕, 볼프강 웨스트리아가 중얼거렸다.
“방금 마족이 하나 나왔던 것 같은데.”
“기분 탓입니다.”
“그, 그런가?”
나도 본 것 같긴 한데, 설령 나왔다고 해도 죽었을 것이다.
하필 그때 나오다니, 운이 심하게 없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어쩐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저 뱀은 뭡니까?”
“애완동물 비슷한 거야.”
몬스터들을 깔아뭉개고 돌아온 요르문간드가 혀를 날름거렸다.
요르문간드와 눈이 마주친 이안은 풀썩 주저앉았다.
볼프강은 그나마 멀쩡해 보였으나, 내심 긴장한 듯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요르문간드는 지그문트에게 핀잔을 줬다.
-나는 그대의 애완동물이 아니다.
-비슷한 거라니까.
-계약만 아니었다면, 낮잠이나 자고 있을 텐데.
-낮잠은 개뿔. 바라한테 처맞고 영원한 잠에 들었겠지.
-심히 거슬린다만, 맞는 말이긴 하군.
혓바닥을 날름거리던 요르문간드의 크기가 줄어들었다.
15센티 정도의 작은 뱀으로 변한 요르문간드는 지그문트의 손을 타고 올라갔다.
몸으로 손목을 감싸더니, 제 꼬리를 물고 팔찌 같은 형상을 취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충분해.
-그대가 빨리 원래 힘을 되찾았으면 좋겠군. 잠깐 본신을 드러냈다고 이리 피곤해지니.
-그거 그냥 네가 잠이 많은 거 아니냐?
-그대가 환생할 때, 내게도 적잖은 영향이 있었거든. 어쩔 수 없다.
-그래. 수고했다. 자라.
나는 요르문간드가 지나간 길을 바라보았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몬스터였던 것들이 가득했다.
뜨거운 피가 사방으로 튀어 벽이 붉게 물들었다.
그야말로 악마나 거닐 법한 길이었다.
“보기는 좀 그런데, 지나가야겠습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으.”
볼프강과 이안은 영 꺼려 하면서도 길에 발을 들였다.
이안은 몇 번이고 헛구역질을 했지만, 볼프강은 담담한 눈치였다.
오랫동안 왕좌를 지킨 만큼, 볼 꼴 못 볼 꼴 다 봤을 테니.
찰박. 찰박.
우리는 말없이 핏길을 걸었다.
나는 국왕의 머리 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폐하, 왕관은 어디다 두고 오셨습니까?”
“이곳에 올 때 떨어트렸네.”
“그렇다면 러셀 놈이 들고 있겠군요.”
“그렇겠지.”
“흠, 웨스트리아에 전쟁이 났다는 건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던 이안이 눈을 깜빡였다.
“결론이 왜 그렇게 나옵니까?”
“웨스트리아 왕관에는 상처의 조각이라는 보석이 박혀 있거든.”
이번에는 볼프강이 기겁했다.
“자네, 어찌 국가 기밀을 알고 있나?”
“대놓고 왕관에 장식하시면 어떻게 모릅니까.”
“저, 근데 상처의 조각이 뭡니까?”
상처의 조각.
오팔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굳이 따지자면 보석보다는 마석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의 상처에 떠도는 힘이 결정화된 것이다.
그 안에 담긴 힘이 마석의 수백, 수천 배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러셀은 저희를 이곳, 틈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 그렇지.”
“몇 마리 기어 나온 걸 보면 애초에 공간과 공간을 연결할 능력이 있긴 한데.”
“상처의 조각을 사용해 그것을 극대화시켰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지금 서쪽이 조금 불안정한 상태라, 아마 대규모 포탈도 열 수 있을 겁니다.”
볼프강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것이다.
국왕이 부재한 국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어째서 마족과 관련도 없는 웨스트리아를…….”
“추측일 뿐이지만, 거래가 아닐까 싶습니다.”
“거래? 누구와 말인가?”
“있지 않습니까. 웨스트리아를 공격해야 하는데, 공격할 수 없는 나라가.”
나는 제국과 마족 간의 거래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순히 페러시트 공수를 위해 헤르창과 거래한 것이 아니라면.
황제 그놈이라면 마족을 좀 더 다방면으로 활용할 것이 분명했다.
“팔베르크 제국……!”
“드래곤의 감시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니, 외부 세력을 이용한 것이겠지요.”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건가.”
“애초에 용의 산맥이 제국을 감시하고 있는 이유는 마계와의 내통 의심 때문입니다.”
“감시가 있는데, 어찌 거래를 했단 말인가?”
“그건 모릅니다. 감시망을 피했을 수도 있고, 먼저 수를 읽고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지요.”
내가 추측하면서도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황제는 어떻게 마계와 연이 닿았단 말인가.
일단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정말 전쟁이 났다면…….”
“대규모 포탈은 넓은 공간을 요구하니, 남문 밖에서 열었겠지요. 수성 중이겠군요.”
“웨스트리아의 병력 대부분은 제국과의 대치로 남동부에 배치되어 있는데.”
“러셀이 얼마나 병력을 끌어모았든 간에, 어느 정도는 버틸 겁니다.”
이 부분에서는 내가 단언할 수 있었다.
지상에 있는 전력은 결코 만만치 않다.
애초에 수성에 특화된 웨스트리아의 병력도 그렇고.
본인들은 자각하지 못하겠지만, 마리나와 단도 상당히 보탬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마족과 몬스터의 극상성이라고 할 수 있는 리옐이 있다.
“수비가 뚫리기 전에, 제가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 * *
왕성 내부, 무장한 병력이 지키고 있는 별실.
방 안에는 전혀 연관이 없을 법한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레온하트 왕국의 셋째 왕자, 루터 레온하트.
목오의 사제 오베이어와, 웨스트리아의 놀가드 백작.
그리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리옐이었다.
“설마, 프레드 왕자님께서 마족에게 당하셨을 줄은.”
“저희가 신성력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눈치챌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놀가드 백작은 근심 어린 얼굴로 프레드를 내려다봤다.
침대에 누운 프레드는 악몽이라도 꾸는 듯 뒤척이고 있었다.
설명에 의하면, 꿈속에 들어간 마족을 끌어내고 있다고 한다.
“오베이어, 지금 마족을 제거할 수는 없는 거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놈이 몸부림치면 왕자님의 정신에도 문제가 생길 겁니다.”
“그렇다면, 예의 정령들이 해결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건가.”
둘의 시선이 루터 레온하트에게 모였다.
임기응변으로, 루터는 정령사 행세를 하고 있었다.
마족군과 전쟁이 한창인 지금, 신분이 드러나면 오해를 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걱정 마십시오. 금방 해결될 겁니다.”
“긴장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정령이 마족을 끌어내면, 곧장 처리해야 하니.”
“알고 있소.”
셋은 오묘하게 긴장된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프레드를 주시했다.
그 가운데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리옐이 있었다.
탄생초가 담긴 화분을 품에 안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잠 들 것 같은 모습이었다.
* * *
-리옐?
-리옐.
리옐은 눈을 떴다.
풍경은 순식간에 변해, 마이어가의 저택이었다.
눈앞에는 메어리 남매, 나고와 얘야가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두리번거린 리옐이 물었다.
-이거 꿈이야?
-응. 꿈이야.
-꿈? 몽계 아니야?
-그게 꿈이잖아.
나고와 얘야는 리옐의 양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데려갔다.
완벽하게 재현된 마이어가를 지나, 안쪽 지그문트 마이어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지그문트 마이어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빠다!
지그문트가 뒤를 돌아봤다.
뛰어가 안기려던 리옐은 잠깐 주춤했다.
지그문트는 가만히 있으면 상당히 유순한 인상이다.
몇몇 이들은 기생오라비라고 불렀을 정도였으니까.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그 인상이 많이 흐려지긴 했으나, 외관 자체는 같았다.
그런데, 눈앞의 지그문트는 유독 사나워 보였다.
눈매가 약간 위로 올라간 것 같기도 했다.
-……나쁜 아빠?
-아니. 얘네가 이상하게 만들어서 그래.
지그문트는 나고와 얘야를 노려보았다.
둘은 잽싸게 리옐의 뒤로 숨었다.
-악마?
-마신.
지그문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리옐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쁜 아저씨는?
-멜릭?
-불쌍한 마족.
나고와 얘야의 반응으로, 멜릭이 지그문트에게 무슨 짓을 당했다고 유추할 수 있었다.
아직 프레드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걸로 보아, 살아는 있는 것 같았다.
-놈한테 중요한 정보를 뜯어냈거든. 진짜 나한테 전달해 줄 수 있냐?
-아빠 지금 어딨는지 몰라.
-아마 금방 돌아올 테니까, 일단 알아 둬. 나는 여기를 나갈 수 없어서.
-왜?
-만들어진 존재니까. 태어난 김에 이 왕자님도 정상으로 되돌려 놓으려고.
지그문트는 손뼉을 쳤다.
동시에, 풍경이 바뀌었다.
웨스트리아 왕국 남쪽 벽이었다.
전쟁 중인 현실과는 달리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지금 웨스트리아 왕국 남부를 치고 있는 군대가 있을 거다.
-마족군?
-맞아. 아마 몬스터를 앞세우고 마족은 몇 없을 거야.
-으음……. 세 명 있어! 한 명은 여기 있는 아저씨.
-멜릭 이놈은 걱정할 거 없고, 남은 두 마리가 문젠데.
지그문트는 눈앞에 어떤 형상을 만들어 냈다.
손바닥 같은 날개를 가진 마족, 두 번째 틈의 주인, 러셀이었다.
-이게 마신의 사제다. 직접 전투에 나설지는 모르겠지만, 마족군을 불러들인 놈이지.
-나빴어!
-그래. 나쁘니까 잡아야 하는데, 얘는 연결점이거든. 지금은 중요하지 않아.
지그문트는 그 옆에 무언가를 하나 더 만들어 냈다.
단이 전장에서 마주했던 인간의 모습을 한 마족이었다.
-사람?
-마족이야. 뿔 달렸잖아.
-나빠?
-무진장 나쁘지. 몬스터가 군대처럼 움직일 수 있는 게 이놈 때문인 것 같거든.
-이름이 뭐야?
-첫 번째 틈의 주인, 조종하는 자, 마누엘.
-마누엘. 마누엘.
리옐은 꼼지락거리며 이름을 되뇌었다.
지그문트는 뒤이어 왕관 하나를 만들어 냈다.
웨스트리아의 왕관이었다.
-마족군 끄트머리에 이거 있을 거거든?
-왕관!
-정확해. 이게 지금 대규모 포탈을 만드는 매개니까, 이걸 부숴야 하는데.
-그거 전달하면 돼?
-아니. 아마 나니까 이건 눈치 깠을 거야.
지그문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고와 얘야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이었으나, 리옐은 인정했다.
그럴 법했다.
-그러면?
-이것들은 선발대다.
-선발대?
-본대는 따로 있어.
지그문트는 인상을 찡그렸다.
선발대는 에노드 내부에 숨어들어 있는 일부 마족을 칭하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 쳐들어오고 있는 마족군까지 통틀어서 전부 선발대였다.
-지금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말이다. 가능하면 찾아보려무나.
-왜?
-정말 그것들이 나오면 웨스트리아가 지도에서 지워질 테니까.
* * *
목오의 사제, 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에노드 남부 성벽은 수초 만에 장악 당할 수도 있었다.
손바닥 같은 날개를 가진 마족, 러셀은 그만큼 강했다.
성벽 위로 배치된 병력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모두 한 시녀 덕분이었다.
“모두 제 뒤로!”
살아남은 병력은 당연하다는 듯 마리나의 뒤로 모여들었다.
마리나가 보여 준 능력들은 경이로웠고, 순식간에 신뢰감이 생겼다.
수천 개에 달하는 가시가 똑바로 쇄도해 왔다.
마리나가 손을 들어 올리자, 덩굴이 벽을 이루며 가시와 병사들 사이를 갈라놓았다.
파바바바바박!
덩굴 벽에 박힌 가시의 끝이 마리나의 눈앞에서 멈췄다.
갑옷도 꿰뚫어 버리던 가시임에도 완전히 뚫지 못하는 걸 보면, 평범한 나무는 아닌 듯했다.
하만은 덩굴 틈으로 얼핏 러셀을 볼 수 있었다.
“어린 신의 대리이이인!”
격분한 듯 외치는 러셀은 끔찍한 몰골이었다.
특징이라고 할 수 있었던 손바닥 모양의 날개는 다 타고 뿌리밖에 안 남았다.
안면을 비롯한 상반신도 새까만 장작처럼 변한 상태였다.
마리나가 리옐의 성물을 이용해 만들어 낸 작은 신성 폭발 때문이었다.
러셀은 가까스로 방어에 성공했지만, 그 대가는 적지 않았다.
‘어린 신의 대리인이라고 했지.’
사제인 만큼 하만은 신의 대리인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직접적으로 신의 은총을 받아 그 의지를 대신하여 움직이는 인물들.
리에이트의 성자나 엘비아의 하이 엘프가 이에 속했다.
어린 신이 어떤 신을 가리키는 말인지는 몰라도, 과연 신의 대리인이었다.
‘대단하다. 하지만…….’
여태껏 잘 버티던 마리나지만, 지금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호흡은 거칠었고,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장벽을 향하고 있는 손은 잘게 떨렸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용할 따름이야.’
애초에 사제는 전투를 생업으로 삼는 직종이 아니었다.
리에이트 교국에는 집행자라는 이름 아래 성기사들과 함께 활동하는 전투 사제가 있긴 했다.
하지만 전투 사제들은 특수한 임무를 맡기 위해 따로 훈련을 받는다.
마리나도 상당히 선전했지만,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는 못한 것 같았다.
‘아까 그 공격에 승부수를 걸었을 터.’
하만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마리나는 성물로 추정되는 잔을 이용한 폭발에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조금씩 반격을 시도했던 전과 달리, 방어에 치중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떻게든 남은 이들이 반격을 시도해야 했다.
“시녀……님? 혹시 이 장벽, 얼마나 유지할 수 있습니까?”
“지금도, 아슬아슬……!”
마리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가시 세례가 멈추기 전까지는 버텨야 했다.
가까스로 벽을 유지하고 있을 무렵.
돌연 침묵이 내려앉았다.
병사들은 두리번거리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소리가 멈췄다.”
“뭐지?”
계속해서 벽에 박히던 가시도 잠깐 멈췄다.
러셀 또한 전장 아래를 확인하고 있었다.
하만은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러셀의 방어책, 날개는 마리나의 공격으로 불타 버렸다.
즉, 러셀 또한 무방비 상태.
“지금이 기회입니다.”
벽 뒤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무기를 들었다.
마법사는 조용히 영창을 시작했다.
거친 숨소리 외에 들리는 것은 없었다.
쾅!
시간이 멈춘 듯한 전장에서 돌연 폭음이 들려왔다.
그것을 신호로, 마리나가 유지하고 있던 덩굴 벽을 눌러 내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트이며, 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러셀이 눈에 들어왔다.
“쏴라!”
가시 세례에 화답하듯, 수백 발의 화살이 러셀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전장의 상황을 확인하던 러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화살 세례를 향해 손을 뻗는다.
웅!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들이 허공에서 멈췄다.
하지만, 확실히 기습은 효과가 있었다.
푹! 푹! 푹!
세 발의 화살이 러셀에게 명중한 것이다.
오른쪽 어깨, 왼쪽 허리와 다리에 각각 하나씩.
러셀은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으려 했다.
“캐터펄트(Catapult)!”
황탑의 마법사가 마법을 완성했다.
투석기처럼 돌덩어리를 쏘아 내는 마법, 캐터펄트.
이미 한 번 날개에 막힌 적이 있지만, 지금은 달랐다.
방패와 같은 역할을 하는 날개도 없고, 균형까지 잃은 상태.
퍽!
정통으로 캐터펄트에 맞은 러셀이 휘청거렸다.
마법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대로 한 방 먹인 것이다.
마리나의 신성 폭발 이후로 유의미한 공격은 처음이었기에, 모두 화색이 됐다.
러셀은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확인해 보도록.”
기사의 명령에, 병사 하나가 성벽 쪽으로 뛰어갔다.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손을 휘저었다.
“떨어진 것 같습니다!”
“음? 아니! 뒤에!”
“예?”
병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손바닥이 병사의 안면을 감쌌다.
그대로 당겨진 병사는 균형을 잃고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끄아아아아아악!”
멀어져 가는 병사의 비명을 뒤로하고, 러셀은 비척비척 성벽 위로 올라왔다.
마리나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정도로 당하고도, 러셀은 살아 있었다.
-어린 신의 대리인.
러셀은 제 어깨에 꽂힌 화살을 뽑으며, 마리나를 응시했다.
-생포하고자 했는데, 아무래도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구나.
러셀이 손을 움직였다.
그 순간, 땅바닥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늘을 올려다본 하만은 경악했다.
“이건…….”
하늘 위에는 촘촘한 가시들이 군체처럼 모여 있었다.
수백만 발은 족히 넘을 것 같은 끔찍한 수.
손발이 떨리는 지경에 이른 마리나가 감당할 만한 숫자가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하만은 풀썩 주저앉았다.
-거래가 조금 어긋나더라도, 변수는 확실히 제거하는 편이 옳았는데.
러셀은 손을 들어 올렸다.
마치 공격을 준비하듯 가시에 예기가 더해졌다.
마리나에 비하면 미약하기만 한 하만의 신성력으로는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 뻔했다.
-죽어라.
* * *
단과 무연은 지옥도 속에서 분투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나마 버티고 있는 기사들도 하나둘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성벽을 향하던 몬스터들이 달려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미노타우로스의 허벅지를 차고 올라 어깨에 안착한 무연이 뒷목에 검을 꽂아 넣었다.
“큭!”
데스나이트와 비슷하게 생긴 저위 언데드, 드라우그가 무연의 등을 노리고 창을 꽂았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단이 클레이모어를 휘둘러 드라우그를 쳐 냈다.
이렇게 하나하나 수를 줄인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몬스터들은 어느새 주위를 빽빽하게 메운 상태였다.
막무가내로 돌격하지 않았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도련님께서 주신 걸……!’
단은 아공간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안에는 리옐이 만들어 낸 성물이 하나 들어 있었다.
그걸 활용하면 어떻게든 퇴로를 확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호시탐탐 단을 노려보고 있던 레드 캡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어딜!”
노리는 것은, 아공간 주머니.
단은 바로 반응했으나, 다른 몬스터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블랙 트롤이 큼직한 할버드를 내리쳤다.
레드 캡을 막고 할버드에 머리가 깨질 것인가.
아니면 도끼를 막고 주머니를 내줄 것인가.
단이 선택한 것은 당연하게도 후자였다.
텅!
무릎을 굽히고, 클레이모어로 할버드를 막아 낸다.
블랙 트롤의 괴력에도 불구하고 단은 그 충격을 비교적 간단하게 받아 냈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두 손을 써야 했기에, 레드 캡까지는 막지 못했다.
“무연!”
단에 비해 몸놀림이 재빠른 무연이 레드 캡 포획을 시도했다.
레드 캡은 다른 몬스터의 가랑이 사이로 미끄러져 종적을 감춰 버렸다.
무연은 그 뒤를 따르려고 했으나, 몬스터들을 뚫고 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 * *
“꼭 꿈속을 걷는 것 같군요.”
이안은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드래곤 브레스로 부서진 길을 지나고 몇 분 동안 더 걸었을까.
공간이 묘하게 틀어지기 시작했다.
평면에 가까웠던 길에 경사가 생기고, 허공에 없던 벽이 나타났다.
“균열에 가까워졌다는 거지.”
“음, 맞네. 짐이 처음에 떨어진 곳도 이랬으니.”
다행히, 요르문간드의 활약으로 주변에 있던 몬스터는 대부분 정리됐다.
식인 식물처럼 벽에 고정된 몬스터나, 함정을 몇 번 만났을 뿐이다.
그 정도는 힘들일 필요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균열을 발견했다.
“마나? 아니, 이게 뭐죠……?”
“이게 아무래도 균열이라는 건가 보군.”
공간의 뒤틀림이라고 설명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텔레포트의 상위 마법, 포탈과 비슷하게 생겼다.
유유히 움직이고 있는, 차원과 차원 사이가 이어진 일종의 구멍이다.
“여길 통과하면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가?”
“그냥 통과하면 죽습니다. 이걸 사용하시면 될 겁니다.”
“……로브?”
나는 여로를 펼쳐 이안과 볼프강에게 둘렀다.
여로는 크기를 키워 두 사람을 둘러쌌다.
“아티팩트인가?”
“차원 간 이동을 도와주는 로브입니다. 반납하셔야 합니다.”
“물론 그러겠네.”
볼프강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성격에 여로를 강탈하지 않겠지만, 나는 일부러 반납을 강조했다.
이유인즉슨, 추후에 볼프강과 만날 여지를 열어 둔 것이다.
내가 찾지 않고, 볼프강이 나를 찾아오도록.
“먼저 가십시오.”
“자네는 어찌하고?”
“저는 이곳에서 뒤를 봐 드리겠습니다. 자칫 균열이 무너질 수 있거든요.”
“설마, 희생할 셈은 아니겠지?”
“저 그런 성격 아닙니다. 뒤따라갈 방법이 있으니 걱정 말고 가시지요.”
7서클에 오른 지금, 균열이 열려 있다면 차원 이동 정도야 여로 없이도 할 수 있었다.
볼프강과 이안은 주춤주춤 균열에 접근했다.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따 뵙겠습니다. 강사님.”
“그러지.”
수호자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던 이안이다.
요르문간드를 보고 내가 레온하트의 수호자라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이제는 감출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일부러 드러낸 것이다.
이안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볼프강과 함께 균열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둘 다 갔으니까, 이제 나와.”
대답은 없었다.
나는 조금 전부터 느껴졌던 시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오라고 할 때 나와라. 죽기 싫으면.”
“송구합니다. 불완전한 신이시여.”
그제야 인간의 모습을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점이라면 머리에 있는 뿔.
뿔 모양이나 복장으로 미루어 볼 때 귀족, 적어도 준귀족 출신 마족이었다.
언어도 능숙하게 사용하고, 굽히고 들어오는 거 보니 주제 파악도 할 줄 안다.
“너 뭐야?”
“첫 번째 틈의 주인, 조종하는 자 마누엘이라고 합니다.”
마누엘은 격식을 갖춰 인사했다.
팔베르크식이다.
내가 델 로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계속 까불어 봐. 죽는 수가 있으니까.”
“불완전한 신께 있어서 저는 한낱 개미에 지나지 않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개미가 담이 좀 크네.”
마누엘은 최대한 동요하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머리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까지는 조절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단순히 힘만 센 놈은 내가 힘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격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쫄았다는 건, 전력의 차이를 느낄 정도로 강하다는 뜻이다.
이상한 점은 그것 하나뿐이 아니었다.
‘변종이 아니군.’
틈으로 밀려나는 마족은 헤르창이나 오릭, 러셀과 같은 변종이 대다수다.
그런데 마누엘 이놈은 확실하진 않지만 순혈 마족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니 틈에서도 마계와 가장 인접한, 첫 번째 틈을 먹었겠지만.
“여태까지 나를 뒤따라온 이유가 뭐지?”
마누엘은 요르문간드가 팔찌로 되돌아간 이후로 줄곧 나를 쫓아왔다.
저지할 셈인가 싶어 틈을 보이기도 했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볼프강과 이안이 떠날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즉, 내게 볼일이 있다는 건데.
“베르제 대공의 전언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 * *
수초 간의 침묵에, 하만은 슬며시 감았던 눈을 떴다.
병사들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만은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저건…….”
찬란하게 빛나는 장벽이 그들을 보호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가시들은 장벽에 닿기 무섭게 녹아내렸다.
하만은 마리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곳에서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마리나와 하만 둘뿐이다.
그러나 마리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이 정도 방어를 펼칠 여력이 없을 터였다.
“이놈의 관절염 때문에 한참 걸렸구먼.”
“오베이어 님!”
지상으로 이어진 계단 앞에 선 노인.
목오의 대사제, 오베이어였다.
러셀은 오베이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만이 기겁했다.
“조심하십시오!”
“괜찮네.”
오베이어의 어깨 위에서 뭔가 폴짝 뛰어내렸다.
그것은 작은 도마뱀이었다.
목오의 신전에서 키우고 있는, 평범한 사막 도마뱀.
그런데 그 도마뱀의 몸 크기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살란?”
마리나의 중얼거림으로 하만은 그 정체를 깨달았다.
살란, 목오의 말씀 중에 분명 언급된 적 있는 이름이었다.
목오의 권속, 살라맨더.
화악!
살란은 불덩어리를 토해 냈다.
이대로라면 서로 공격에 적중 당할 터가 분명했다.
하지만 살란 측에는 방어가 가능한 사제, 오베이어가 있는 상황.
러셀은 쏘아 보낸 가시를 세로로 세워 촘촘한 벽을 만들었다.
벽에 부딪친 화기가 양옆으로 퍼져 나갔다.
-별 더러운 것들이 웨스트리아에 발을 들이는구나.
콧김을 뿜어낸 살란이 중얼거렸다.
어째선지, 마리나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살란은 벽 너머에 있는 마리나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이상하군. 처음 보는 인간인데.
마리나는 대마법사의 던전에서 살란을 만난 적이 있다.
물론 그것은 과거의 재현이었기에, 직접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살란은 코를 벌름거리더니 마리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와…… 왕을 만나 뵌 적이 있는 모양이구나. 어찌?
목오 사막의 왕.
땅거북 목오를 칭하는 말이었다.
마리나가 고개를 주억거리니, 살란은 혀를 날름거렸다.
-궁금한 게 많지만, 일단 이 잡종부터 잡고 이야기하지.
* * *
마누엘은 식은땀을 흘렸다.
마계 대공, 베르제는 신신당부했다.
불완전한 신, 지그문트 마이어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된다고.
아무리 그래도 인간 출신이었기에, 마누엘은 지그문트를 얕봤다.
그러나 지그문트의 무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어떻게 이런 존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신이니만큼 신성은 물론이고, 마나와 오러까지 품고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규격 외의 존재였다.
귀족급 마족 중에서도 이렇게 많은 힘을 보유한 이는 없었다.
가기 전에 유서 써 놓고 가라는 베르제의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드래곤을 마주한 개미가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거짓말이면 혀 뽑아 버린다.”
“거짓은 간파하실 수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일단, 날 불러들인 방법은 마음에 안 들거든.”
“……무례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지상에서는 긴밀한 대화를 나누기 어려웠으니까요.”
두 번째 틈의 주인, 러셀은 이곳으로 지그문트 마이어를 유도했다.
러셀은 변수를 잡아 두고 시간을 끌기 위해서 미로에 가뒀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마누엘이 지그문트를 만나기 위해서, 러셀을 이용해 끌어들인 것이었다.
지그문트는 마누엘과의 대화 몇 마디로 그것을 간파한 듯했다.
실로 무서운 자가 아닐 수 없었다.
“상황이 조금 복잡합니다.”
“뭘 복잡해. 대충 보이는구먼.”
“무엇을 보셨다는 겁니까?”
“마누엘 너는 귀족 출신이다. 멀끔한 순혈 마족인 데다가, 베르제와 접점까지 있는 놈이 틈에 있다? 말이 안 돼. 아마 일부러 좌천당했겠지. 큰 죄를 지을 때 마족은 뿔이 잘릴 텐데, 넌 안 잘린 걸 보면 베르제가 좌천되도록 손을 쓴 것 같고.”
마누엘은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지그문트의 유추는 너무나도 정확했다.
“그런데 이 전언을 위해서 좌천까지 될 이유가 있을까. 여기서 만날 거였으면 그냥 틈으로 건너오면 될 일이잖아. 마계에서 틈으로 오는 건 비교적 간단하니까. 그럼 왜 틈의 주인이 됐을까? 웨스트리아를 먹기 위해서? 아니지.”
“……흠.”
“틈의 주인들은 내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근데 그것들은 베르제 소속이라 밝히고 내게 접선을 시도하진 않았지. 즉 너를 제외한 다른 틈의 주인들은 베르제 소속이 아니었다는 거고.”
“맞습니다. 그들과 사이가 썩 좋지는 않지요.”
“너는 내 정보로 신임을 사고 선발대의 주역을 맡았군. 그러니 다른 틈의 주인들이 불완전한 신에 대해 알고 있지. 베르제의 입김이 들어간 좌천이었으니 네가 독단으로 정보를 팔아넘긴 건 아닐 테고. 베르제와 대립하는 척하며 다른 세력에 잠입한 거겠군. 베르제와 대립하고 있는 다른 마족의 세력. 아마 지금 팔베르크 제국과 결탁해 웨스트리아를 침공하고 있는 놈이겠지. 걔가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맞나?”
마누엘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베르제가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는 말과 함께했던 추가 조언이 떠올랐다.
자신의 패를 함부로 드러내지 마라. 전부 읽힐 테니.
지그문트 마이어는 강한 것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지나칠 정도로 비상했다.
‘……베르제께서 극찬과 쌍욕을 동시에 하신 이유가 있었군.’
마누엘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순순히 긍정했다.
여기서 부정해 봤자, 다 들킬 것이 뻔했다.
“솔직하군. 부정했으면 죽였을 텐데. 그래서, 베르제의 전언이 뭐지?”
“이미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만.”
“헷갈려서 그래. 밖에 나가서 마족군을 쓸어 달라는 건지, 웨스트리아를 내주라는 건지.”
“웨스트리아 왕국을 포기해 줄 수 있겠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하군. 내가 얻는 이득은?”
“대공과 신뢰 관계를 구축하시면, 제국에 협력하고 있는 마족에 대응하기 편할 겁니다.”
“그럴 거면 웨스트리아를 살리는 게 낫지. 내가 작업 쳐 놓은 게 얼만데.”
마누엘은 당황했다.
베르제는 이미 지그문트와 연이 있다며, 제국식으로 인사하라는 등 몇 가지 조언을 했다.
워낙 생각이 비범하여 따르지 않을 수 있으나, 이 정도 조건이면 수락할 거라 했다.
하지만 지그문트는 베르제의 제안을 거절했다.
웨스트리아를 점령하지 않는다면, 일이 꼬인다.
“그렇게 되면 저는 신분을 감추기 어려워집니다.”
“단순히 지금 잠입하고 있는 곳에 신뢰를 주려면, 아예 패퇴해 버려.”
“예?”
“네 가치가 조금 떨어지긴 하겠다만, 어느 정도 납득할 테니까.”
“하지만 웨스트리아를 점령해야만, 현재…….”
“제국과 웨스트리아를 두고 거래를 했다는 거겠지. 그 점이 마음에 안 들어.”
지그문트는 인상을 찡그렸다.
“패퇴해도 제 신뢰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나, 저희 쪽 손해가…….”
“웨스트리아를 살려 두면 내 쪽에서 이득을 가져가니까, 살려 두는 쪽으로 하지.”
“……저희 쪽 손해가 문제인 겁니다.”
“너네 손해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라고? 너 미쳤냐?”
“지금의 작은 손해가 추후의 큰 이득으로 이어질 겁니다.”
“내가 지금 이득 보고 나중에도 이득 볼라니까. 손해는 네가 봐라. 어차피 짝짜꿍한다며.”
“짝, 짝짜꿍……? 손을 잡는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래. 합쳐서 플러스, 마이너스가 제로면, 내가 마이너스를 감수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마누엘이 입을 열려는 순간, 지그문트는 검을 뽑아 들었다.
마누엘은 크게 당황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아마 베르제가 너 시험한 것 같은데. 내 기준에선 탈락이야.”
“예?”
“주도권은 나한테 있어. 지금 나가서 저것들을 쓸어 버리든, 웨스트리아를 버리고 떠나든 내 선택하에 달라지거든.”
“마족군의 수는 그렇게 적지 않습니다. 또한, 저들은 선발대에 불과합니다.”
“나랑 타협할 생각하지 마. 그럴싸한 대안을 가져올 거 아니면, 그냥 수긍해.”
마누엘은 말을 잃었다.
“최소한, 너는 안 죽여 줄 테니까 알아서 튀어라.”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시간 없어. 애들 고생하고 있거든.”
지그문트는 여태껏 말을 속사포처럼 빨리 뱉어 냈다.
지상에 있는 누군가를 걱정한 모양이었다.
이 부분은 베르제가 말한 것과 조금 차이를 보였다.
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필요할 때는 한없이 냉철하다고 했는데.
“나 나가야 돼. 이제 비켜.”
* * *
-늙은 도마뱀. 너는 나를 막을 수 없다.
성벽 위.
러셀이 마기를 폴폴 흘리며 앞으로 걸어왔다.
마리나를 비롯한 성벽 위의 잔존 병력을 보호하듯 선 살란이 불덩어리를 쏘아 냈다.
러셀은 가시 벽을 만들어 그것을 막아 냈다.
걸음의 속도를 잠깐 늦췄을 뿐이었다.
-잔챙이가 아무리 모인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이 있을 것 같으냐.
살란이 잠깐 주춤하기 무섭게 기회만 노리고 있던 러셀이 반격에 나섰다.
오베이어가 신성 방어를 시도했지만, 아무래도 살짝 늦은 감이 있었다.
방어막보다 먼저 쏘아진 가시 몇 발이 살란에게 적중했다.
하만은 안색이 창백한 마리나에게 다가갔다.
“시녀님, 아까와 같은 공격, 한 번 더 불가능하십니까?”
마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만도 무리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러셀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힌 것은 마리나 혼자였다.
희망을 걸 수 있는 건 그녀뿐이라고 생각했다.
“비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저에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무력감에 치가 떨렸고, 누군가에게 의존해서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하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만은 약했다.
그의 신성력으로는 러셀에게 타격을 주기는커녕, 가시를 막는 것조차 버거웠다.
마리나는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였다.
“버텨 주세요.”
“……버티라고요?”
“곧 오실 거예요.”
하만은 마리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온다니, 무엇이 온다는 걸까.
그때, 오베이어의 신성 장벽이 부서졌다.
“하만!”
오베이어의 부름에, 하만은 남은 신성력을 쥐어짜 냈다.
‘만약 신께서 계시다면.’
하만은 아직도 그 느낌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페어리와, 그 위에 있던 존재를.
오베이어가 말한, 에노드 내부로 들어왔다는 신을.
하만은 눈을 질끈 감고, 기도했다.
“부디 저희를 구원하소서.”
그때였다.
돌연 공격을 멈춘 러셀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경계하는 야생동물처럼 어느 한 점을 노려본다.
-마리.
하만은 러셀의 시선 끝에 있는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 위로 빛 가루를 흩뿌리며 날아다니고 있는, 작은 페어리 하나.
하만이 에노드에서 목격했던 그 페어리였다.
-다침?
마리나는 러셀과의 전면전을 치른 만큼, 여기저기 다친 상태였다.
지그문트가 오시아드에서 구입한 시녀복 덕분에 경상에서 그쳤지만.
러셀의 가시는 몸 곳곳에 상처를 냈다.
그것을 확인한 신성은 드물게도 화를 내고 있었다.
-쟤임?
신성은 무감정한 눈으로 러셀을 노려보았다.
그 어떤 공격에도 물러서지 않던 러셀이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조그마한 몸에서 새어 나오는, 밀도 높은 신성력.
그 존재를 마주한 것만으로, 러셀은 버거웠다.
-저, 저게 뭔.
-하만.
하만이 화들짝 놀랐다.
육성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한 대화에 당황하고 있었다.
갑자기 자신한테 말을 걸 줄은 몰랐기에, 페어리를 올려다봤다.
어떻게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기도.
신성은 자신을 가리키며 기도하라고 했다.
사제는 자신이 모시는 신 이외의 존재에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만이 갈등하고 있는 사이, 신성이 팔락팔락 내려왔다.
그것을 바라보며, 하만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해 줌.
해 준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
하만은 혀끝에서 맴도는 질문을 삼켰다.
머릿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신성이 대답했다.
-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