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방패를 두른 거북이
“엘레너 왕녀님을 뵙습니다.”
“국왕 폐하께서는 안에 계십니까?”
“예. 황탑주님과 대면하신 뒤, 업무를 처리하시는 중입니다.”
“큭. 들어가겠습니다.”
“왕녀님?”
“아바마마!”
엘레너 웨스트리아는 국왕의 집무실을 열어 젖혔다.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 둘이 당황했다.
집무실 책상 앞에는 국왕, 볼프강 웨스트리아가 앉아 있었다.
고개를 든 볼프강이 엘레너를 발견했다.
“쿨럭, 엘레너. 무슨 일이더냐.”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급히 찾아뵙게 됐습니다.”
“아니다.”
한편, 엘레너 왕녀의 뒤를 따르던 무연은 집무실을 지키던 기사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마리나는 어딜 봐도 시녀였고, 용모도 특출나게 빼어나 왕성에 있음에도 어색함이 없었다.
반면 특이한 모양의 검을 들고 헬름만 덜렁 뒤집어쓴 무연은 어딜 봐도 수상했다.
마리나는 엘레너의 뒤에 서서 가만히 국왕을 바라보았다.
왕성 복도를 지나며 나눈 짧은 대화가 떠올랐다.
-아바마마께서는 황탑주님과 조우하셨습니다. 그 점이 조금 불안해요.
-걱정하시는 바를 알겠습니다. 제가 꿰뚫어 볼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떻게요?
-저도 일단 사제 비슷한 사람이라서요.
-사제…… 비슷한 사람?
마리나는 엘비아에서의 훈련을 기억했다.
눈앞에 있는 국왕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고, 눈을 깜빡였다.
마리나의 눈동자 색이 순간적으로 에메랄드와 같은 밝은 녹빛으로 바뀌었다.
한순간이었지만, 마리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엘레너 왕녀님, 저자는 국왕 폐하가 아닙니다.”
“흠? 지금 저 시녀가 뭐라고 한 것이냐?”
“마리나, 확실합니까?”
“확실합니다.”
마리나는 국왕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두 손을 맞잡았다.
인상을 찡그린 볼프강이 목소리를 높였다.
“저 시녀가 정녕 미쳤구나. 여봐라! 뭣들 하느냐!”
“무연!”
국왕의 목소리를 들은 두 명의 기사가 마리나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움직인 무연이 한 명을 제압했다.
다른 한 명은 엘레너가 직접 나서서 막았다.
“와, 왕녀님!”
기사는 아무래도 왕녀를 해할 수는 없었기에 잠깐 당황했다.
그 틈을 탄 마리나가 기도를 시작했다.
“커헉!”
“국왕 폐하!”
국왕이 피를 토해 냈다.
기겁한 기사가 엘레너를 지나 마리나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무연이 몸을 던져 기사를 막았다.
복도 쪽에서 소란을 들은 왕실 기사들이 몰려왔다.
“마리나!”
마리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에 있는 건 분명 국왕이 아니었다.
그 본모습은, 언젠가 지그문트 마이어가 설명했던 도플갱어와 비슷했다.
하지만 놈은 가증스럽게도 피를 토하는 척 연기하며 버티고 있었다.
자칫하면 엘레너 쪽이 반역자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
‘제발!’
손목에 채워진 나무 팔찌에서 푸른 나뭇잎이 자라났다.
동시에, 국왕의 얼굴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캬아아아아악!
뒤늦게 도착한 기사들은 끔찍한 비명에 놀랐다.
국왕이 녹아내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촛농이 녹아내린 듯한 형상의 살덩어리였다.
무연에게 제압당했던 기사는 질겁했다.
“괴, 괴물!”
도플갱어는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엘레너에게 던졌다.
사람의 얼굴과 비슷한 형상을 한 희뿌연 물체가 튀어나왔다.
원념이었다.
끼에에에엑!
기사들이 앞으로 뛰쳐나와 온몸으로 원념을 막았다.
그러나 원념은 아주 작은 틈을 통과해 그대로 엘레너에게 쇄도해 왔다.
원념이 평범한 사람에게 들어가면, 흔히들 말하는 귀신 들린 상태가 된다.
도플갱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러셀이 국왕을 가둬 놓았고, 프레드는 멜릭에게 세뇌 당했다.
엘레너만 미치게 만들면, 실질적으로 왕가는 거의 무력화된다.
“안 돼! 이리 와!”
마리나가 다급히 강아지를 부르는 듯한 명령조로 말했다.
도플갱어는 마리나를 비웃었다.
원념 같은 악의 덩어리가 사제의 말을 들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변이 발생했다.
키엑?
원념은 방향을 틀어 마리나에게 돌진했다.
마리나로 목표를 바꾼 것인 줄 알았는데, 그 앞에 멈춰 서서 가만히 마리나를 올려다봤다.
도플갱어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돌아가!”
마리나의 명령에, 원념은 도플갱어 쪽으로 방향을 빙글 틀었다.
저 원념은 유사시를 대비해 멜릭이 구해 온 강력한 놈이다.
아무리 몬스터인 도플갱어라도 저 원념에 들리면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원념은 그대로 도플갱어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끼에에에에엑!
* * *
“허억, 허억.”
“괜찮으십니까?”
“괜찮, 습니다.”
루터 레온하트는 반쯤 널브러진 상태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단은 팔뚝으로 슥 땀을 닦아 냈지만, 그리 지친 기색은 아니었다.
그들을 공격하던 기사와 병사들은 모두 제압당한 상태였다.
리옐이 왕성 벽면에 있던 담쟁이덩굴을 끌어와 묶은 것이다.
“잠든 자들이라 그런지, 힘이 그리 세지 않아 다행이군요.”
“그것보다, 프레드 왕자님이 조금 걱정입니다.”
루터는 프레드를 살폈다.
메어리 남매가 몽계로 들어간 상태였다.
꿈속에 숨어 있는 멜릭을 밖으로 쫓아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프레드는 악몽을 꾸듯 간간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고 있었다.
“저도 꿈의 정령이라는 게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착한 애들이야!”
퀸틴에 다녀온 뒤로, 지그문트는 메어리 남매를 리옐의 호위로 붙였다.
처음에, 나고와 얘야 남매는 리옐을 많이 어려워했다.
리옐이 지그문트 마이어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옐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남매와 금세 친해졌다.
메어리 남매는 자진해서 리옐의 몽계에 머무르게 됐다.
“이길 거야!”
“그럼 다행이군요. 일단 여기서 대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엘레너 왕녀님과 합류하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왕성 상황은 모르지만, 저희가 섣불리 들어갈 수 있는 입장은 아닙니다.”
단은 루터의 의견에 동의했다.
대뜸 루터가 왕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때, 리옐이 목을 쭉 빼고 한 방향을 응시했다.
“리옐 아가씨?”
왕성 정문 방향에서 누군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말을 타고 있었는데, 제대로 보이진 않았다.
단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검을 뽑아 들었다.
히히힝!
왕성 정문에 다다르자, 말이 속도를 늦추며 방향을 틀었다.
단은 그 위에 탄 인물의 얼굴을 확인했다.
“놀가드 백작님?”
“미안하오. 비켜 주시겠소?”
놀가드 백작은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안색은 금방 쓰러질 것처럼 창백했고, 단 일행을 알아본 기색도 없었다.
정신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몸이 옆으로 기우는가 싶더니, 기어코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얍!”
리옐이 주먹을 움켜쥐자, 말 옆에서 무성한 풀이 자라났다.
놀가드 백작은 풀 위로 엎어지듯 떨어졌다.
단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놀가드 백작의 등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 꽂혀 있었다.
가시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미 피가 흥건하게 번진 뒤였다.
놀가드 백작은 기침과 함께 까맣게 죽은피를 토해 냈다.
“쿨럭!”
“리옐 아가씨!”
“응!”
리옐이 환부에 손을 올렸다.
단이 가시를 뽑기 무섭게, 짙은 혈향을 묻어 버릴 정도로 강렬한 풀 내음이 터져 나왔다.
놀가드 백작은 그제야 게슴츠레 눈을 뜨고 단의 얼굴을 확인했다.
“은인……?”
“놀가드 백작님, 어떻게 된 겁니까?”
“마족, 입니다.”
놀가드 백작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남쪽을 가리켰다.
“남문 너머에, 마족의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 * *
왕성이 발칵 뒤집혔다.
국왕의 실종과 왕자 프레드의 혼절.
황탑주는 진짜가 아닌 마족이었다.
놀가드 백작의 증언으로, 에노드 남부에 마족의 군대가 나타났다는 것까지 확인됐다.
“마족군 측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전열을 정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이 사실을 이제야 알았단 말입니까.”
“망루를 지키던 병사들이 모두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마법이나 약에 당한 것 같습니다.”
악재가 겹친 상황에서도 다행인 점은, 웨스트리아의 병력이 집결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팔베르크 제국의 선전포고로 웨스트리아는 항상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엘레너 웨스트리아는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목오의 사제들을 전부 불러들이세요. 상대가 마족이라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목오의 사제들은 신성력을 잃었을 텐데요.”
“두 명, 신성력을 되찾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라도 필요합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황탑의 마법사를 긴급 소집하겠습니다. 비전투 인원은 후방에 배치하세요.”
국왕과 왕자의 부재로, 임시지만 엘레너는 지휘권을 양도 받았다.
최대한 냉정하게 생각하려 하고 있지만, 머릿속은 혼란으로 들어찬 상태였다.
“퇴각도 고려하셔야 합니다.”
“어디로요? 에노드는 웨스트리아 왕국 최후방입니다.”
“산을 넘어 항구로 가 배를 타는 것도…….”
“수성합니다. 이에 대한 반론은 듣지 않겠습니다.”
엘레너는 피부가 하얗게 물들 정도로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공포에 질렸을지언정 물러서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마족이 침입했습니다. 비록 열세라고는 하나, 버티다 보면 조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조력이라니요?”
“용의 산맥입니다.”
실질적으로 레온하트 왕국의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건 무리였다.
바랄 수 있는 건, 마족이 관련되면 움직인다는 드래곤들.
귀족들의 얼굴에 조금 화색이 돌았다.
“그러고 보니, 왕녀님께서는 화이트 드래곤과 연락을…….”
“취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분과 짧게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입니다.”
“그, 그렇다면 막연히 용의 산맥에서 눈치챌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겁니까?”
“아니요. 드래곤 측과 연락할 수 있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화이트 드래곤 린시스가 직접 벗이라고 칭한 인물이다.
그라면 분명 용의 산맥에게 조력을 요청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문제는 연이어 발생하기 마련이다.
“왕녀님! 단 록벨런과 그 일행입니다.”
“들여보내세요.”
지그문트 마이어를 찾아 황탑으로 갔던 단 일행이 돌아왔다.
문제는, 그사이에 지그문트 마이어가 없었다는 것이다.
“설마, 수호자 경께서 당하신 겁니까?”
“아니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리옐은 자기 입으로 직접 지그문트의 생사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지그문트 마이어는 분명 살아 있었다.
“황탑주로 위장하고 있던 마족이 모종의 방법으로 가두거나, 이동시킨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은 결코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엘레너 왕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막중한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자신의 판단으로, 웨스트리아 왕국의 명운이 갈릴 수도 있었다.
“……왕국의 방패를 소집하세요.”
“왕녀님.”
“레온하트의 수호자께서 오실 때까지만 버티면, 승산은 있습니다.”
* * *
“팔베르크 제국 측과 대치하고 있는 국경의 병력을 끌어올 수 있나요?”
“에노드 남부가 완전히 장악됐습니다. 아무래도 어려울 겁니다.”
“일단 연락은 시도해 보세요. 마족이 산지 측에서 내려올 가능성은요?”
“가파른 절벽을 올라야 합니다. 그 경우 망루에서 확인 가능할 겁니다.”
남문을 경계로 전선이 구축됐다.
벽 안에서, 엘레너 웨스트리아는 적군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드넓은 들판이 검은 괴물들로 들어찬 상태였다.
몸집이 5미터는 족히 넘을 법한 거인부터, 하늘을 날아다니는 가고일과 밴시.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괴물들이 가득했다.
“병력의 대부분은 몬스터군요.”
“어떤 방식으로 한 건진 모르겠으나,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화공에 대비해야 합니다. 성벽 안쪽에 수통을 배치해 두세요.”
엘레너 웨스트리아의 명령을 듣고 있던 기사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왕족이라는 이유로 지휘권을 쥐고 있지만, 엘레너는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엘레너는 차분하게 수성을 준비할뿐더러, 맞는 말만 하고 있었다.
기사는 엘레너가 평소 전술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엘레너 웨스트리아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설마 그게 도움이 될 줄이야.’
엘레너는 작은 책자를 쥐고 있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지그문트 마이어가 선물이랍시고 대뜸 넘긴 전술 교본이었다.
화려한 필기체로 쓰여 있었는데, 잉크 상태로 보아 직접 쓴 것 같았다.
제목이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전술 교본, 기초편’ 인 점은 마음에 안 들었다.
처음에는 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읽기 쉽게 쓰여 있어 첫 장을 펼친 순간 빨려 들어갔다.
어려운 이야기는 거두절미하고 실전에서 쓸 수 있는 전술과 대처법 등이 압축되어 있었다.
“엘레너 왕녀님! 황탑의 마법사들이 도착했습니다.”
“전투 가능한 마법사들은 전부 성벽 위로 올려 보내세요.”
“예? 아래쪽에서 대처하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성벽에는 궁병들을 배치하는 편이.”
“마법사들은 전황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그에 맞춰 마법을 쓸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몬스터도 다수 포착됐습니다. 마법사들을 노릴 겁니다.”
“목오의 사제들을 같이 올려 보냅니다. 궁병이 격추하지 못한 몬스터로부터 마법사를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전투가 불가능한 마법사들은…….”
“디그(Dig)와 그리스(Grease)로 적군이 성벽에 도달하는 시간을 늦춥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귀족들도 엘레너의 대처에 믿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했으면 전술을 담당하는 온건파 측 참모진이 엘레너에게 확인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정작 엘레너는 본인 입에서 너무 술술 이야기가 나오자 당황하는 중이었다.
전술 교본에 나온 이야기만 하는 중인데, 귀족들이 자신에게 의지를 하기 시작했다.
책임감이 양 어깨를 짓눌러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엘레너는 결의를 다졌다.
‘버티기만 하면 된다. 할 수 있어.’
* * *
“젠장. 전쟁이라니.”
“몬스터면 차라리 우리가 더 대응하기 쉽지 않을까?”
“마족이 섞여 있다고 하니까, 조심해야지.”
“제국보다는 살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단은 에노드에 머무르고 있던 전쟁 용병들과 같은 부대에 배치됐다.
지그문트가 돌아올 때까지 웨스트리아 왕국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해 지원한 것이다.
마리나는 사제들과 합류했고, 리옐은 루터와 함께 후방으로 빠졌다.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으나, 프레드에게서 아직 멜릭과 메어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리나와 리옐 중 하나는 프레드를 주시할 필요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무연, 당신도 참전할 줄은 몰랐습니다.”
“마물은 내 원수다. 또한, 신도 찾지 못하고 물러날 수는 없다.”
무연 또한 단의 옆에 있었다.
무연은 황금 등급 용병이었기에 전쟁 용병 신분으로 참전 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많은 용병들은 조금 불안한 기색이었다.
심지어는 무연까지도 불안한 듯 다리를 떨며 검을 점검하고 있었다.
“단. 너는 어째서 태연하지?”
“도련님 오실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전황을 바꿀 수는 없어.”
“무연 님께서 아직 저희 도련님을 몰라서 하시는 소리입니다.”
단은 지그문트의 무용담을 늘어놓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참기로 했다.
지그문트는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을 무연에게 숨기고 있었다.
자칫 무연에게 단서를 줄 수도 있었기에, 단은 인내력을 발휘했다.
무연은 단을 응시하다가, 벽을 살피고 있는 황탑의 마법사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군.”
“황탑에 갔다면, 도련님과 함께 있을지도 모릅니다.”
* * *
시원하게 드래곤 브레스로 길을 뚫은 것까지는 좋았다.
미로의 길은 악랄할 정도로 꼬여 있었다.
최단거리로 가더라도 한참 시간이 걸렸을 거다.
“큰일 났네.”
나는 정면을 쳐다보았다.
드래곤 브레스가 휩쓸고 지나가, 미로에는 거대한 원통형 구멍이 뚫렸다.
미로에 갇혀 있었던 틈의 몬스터들이 드래곤 브레스가 뚫고 지나간 곳으로 모여들었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수천 마리가 넘는 몬스터가 득실거리게 됐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
이안과 국왕은 미로에 몬스터들이 우글거린다고 경고했으니까.
“이건 예상 못 했는데.”
틈과 마계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은 극단적으로 공격성이 높다.
제 영토만 침범하지 않으면 먼저 공격하지 않는 청조나 그리핀과 다르다.
그냥 동족이든 뭐든 간에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거해서, 서로를 죽이고 먹는다.
상대적으로 지상에 비해 먹을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몬스터가 모여들더라도 서로 싸울 거라고 생각했다.
“죽겠군.”
“폐하, 단념하시면 안 됩니다. 아까 그걸 한 번만 더 쓰면.”
“못 써. 한 짝밖에 충전 못 했거든.”
아우나(Aunar)를 완성하기 위해서 실험차 마나를 상당히 자주 소모했다.
결국 충전된 숨결은 한 짝뿐, 이제 드래곤 브레스는 못 쓴다.
다시 쓰려면 또 충전해야 했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아주 조금이나마 희망적이던 이안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뚫으려면 뚫을 수 있겠지만.’
예전의 내가 아니다.
서클도 7개나 되찾았고, 오러 수준도 소드 마스터다.
마족의 천적에 가까운 신성도 있으며, 최후의 보루인 반신화까지 가능하다.
아무리 적의 수가 많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걸리는 점이 있었다.
‘러셀이 나를 여기에 가뒀다는 건, 밖에서 뭘 하고 있다는 뜻인데.’
필시 미로를 빠져나가더라도 전투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나 혼자 빠져나가는 것도 아니기에, 여로에 쓸 마나도 여분을 남겨 둬야 한다.
여기서 힘을 소모하는 건 러셀이 바라마지 않는 바였다.
마음 같아선 7서클 대규모 공격 마법으로 싹 쓸어 버리고 싶었지만.
‘쯧. 어쩔 수 없군.’
나는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뜯어냈다.
자신의 꼬리를 문 흰색 뱀 모양의 팔찌.
-나 좀 도와줘라. 요르문간드.
* * *
해가 기울며, 하늘은 불길한 적색으로 물들었다.
전열을 정비한 웨스트리아 왕국군은 마족군을 주시했다.
난생 처음 보는 몬스터부터, 인간처럼 무장한 것들까지.
수많은 몬스터들이 남부 들판을 가득 채웠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찾아올수록, 붉은 눈동자가 더욱 선명해졌다.
뿌우-!
고막을 때리는 뿔피리 소리와 함께, 마족군이 진군을 시작했다.
중앙에는 덩치 큰 몬스터들이 공성 병기로 보이는 물건들을 들고 있었다.
몬스터들의 전열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성벽 위에 있던 병사가 종을 쳤다.
댕! 댕! 댕!
에노드 내부에 있던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 있던 궁병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긴장한 듯, 병사들은 숨을 멈추고 아래를 주시했다.
지휘관의 목소리가 성벽 위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쏴라!”
한껏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궁병들이 시위를 놓았다.
불붙은 화살이 유성우처럼 남부 들판으로 쏟아져 내렸다.
파바바바박!
앞서 진군하던 몬스터들은 고슴도치 신세를 면치 못했다.
적잖은 피해가 있었음에도, 마족군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진군했다.
이미 죽은 몬스터를 밟고 성벽을 향해 똑바로 다가온다.
마치 하나의 군체가 움직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족군 측 후방에서 무언가 날아올랐다.
불화살 덕분에 시야가 확보되어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고일과 드레이크, 밴시들이 뒤섞여 있었다.
“온다!”
“요격하라!”
활시위에 새로 화살을 물린 궁병들이 활을 높이 쳐들었다.
불화살 세례가 다시 한번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공중을 나는 몬스터들에게 큰 타격을 주진 못했다.
가고일의 경우 원체 몸이 단단했고, 밴시는 영체다.
드레이크 몇 마리가 화살에 적중 당해 격추되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마법사!”
궁병들과 교대하듯, 캐스팅을 마친 황탑의 마법사들이 나섰다.
성벽 위에 늘어선 마법사들의 손 위로 마법진이 나타났다.
적군이 틈에서 빠져나와 전열을 가다듬는 동안, 웨스트리아에게도 시간이 주어졌다.
마법사들은 이미 캐스팅을 마친 상태였다.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수십에 달하는 거대한 돌덩어리가 폭발적인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퍽! 퍽! 콰앙!
돌덩어리에 적중 당한 드레이크가 목이 꺾여 죽고, 가고일은 산산조각이 났다.
빗나간 것들도 중력에 영향을 받아 땅에 떨어져, 마족군에게 큰 피해를 줬다.
문제는 밴시였다.
꺄아아아악!
목오의 사제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밴시들을 바라보았다.
신성력이 돌아온 것은 정말 일부에 불과했다.
즉, 이쪽에는 영체를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저, 정말 할 수 있나? 수가 좀 많은데.”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돌연 찾아온 시녀 하나가, 영체를 맡겠다고 단언했다.
신성력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사제는 확실했는데, 리에이트의 사제가 아니었다.
목오의 사제들과 성벽 위에 있는 병력은 시녀, 마리나를 믿지 못했다.
그러나 엘레너 웨스트리아의 강력한 주장으로 최전선에 서게 됐다.
“후우.”
마리나는 밴시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긴장한 듯 왼쪽 손목을 잡았다.
엘프의 팔찌가 채워져 있는 곳이었다.
돌연 아무것도 없는 손에 석궁이 출현했다.
옆에 있던 마법사들이 조금 놀라 중얼거렸다.
“아티팩트?”
마리나는 온 신경을 밴시들에게 집중했다.
일전에 사용하던 저주 화살과 같은 맥락이다.
화살 안에 담는 것이 저주가 아니라 신성력이 됐을 뿐이다.
순간적으로 마리나의 눈동자가 에메랄드 색으로 물들었다.
푹!
석궁에서 쏘아진 화살은 빛줄기를 남기고 밴시를 정확히 꿰뚫었다.
밴시는 영체였기에, 당연히 화살에 맞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직진했으나.
키에에에에엑!
마리나의 화살은 달랐다.
화살에 맞은 밴시가 빛과 함께 비명을 터트리며 소멸됐다.
궁병들이 환호성을 질렀고, 마리나는 차분하게 화살을 장전했다.
푹! 푹! 푹!
그러나 희망은 얼마 가지 못했다.
가시에 목이 꿰뚫린 궁병 수십이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마법사들도 사제들도 대처하지 못했다.
“기습이다!”
“뭔가 했더니.”
손바닥을 연상케 하는 기괴한 날개의 마족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쭉한 팔다리를 허공에 늘어트린 모습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 번째 틈의 주인, 비관자 러셀은 마리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어린 신의 대리인이었구나.”
* * *
“엘레너 왕녀님,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아니요. 해야만 합니다.”
참모진은 엘레너 웨스트리아의 강력한 주장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엘레너가 제시한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남문을 개방하고, 병력을 투입해야 한다.
회의에 참여하고 있던 기사단장이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었다.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여태껏 인상적인 지휘를 보여 준 엘레너였다.
남문을 개방할 만큼 큰 리스크를 동반하는데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엘레너 웨스트리아는 책상에 올려진 몬스터 그림 하나를 짚었다.
화가가 직접 성문 밖의 몬스터들을 그려 온 것이었다.
“이 몬스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림에 쏠렸다.
엘레너가 짚은 종이 위에는 모두 처음 보는 몬스터가 그려져 있었다.
아가리가 유독 큰, 네 발 달린 아귀처럼 생긴 몬스터였다.
다른 몬스터들은 완벽하게 제어되고 있어, 별다른 장치를 해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몬스터에게는 특이하게도 재갈 같은 것이 물려져 있었다.
“왕녀님께서는 이게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글러터라는 몬스터입니다.”
“처음 들어 보는데요.”
“마계의 몬스터입니다. 이것이 성벽에 도달하면, 위험합니다.”
“어째서입니까? 확실히 위험한 놈 같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성벽을 부수는 공성병기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황탑의 늙은 마법사가 한쪽에 쌓여 있던 고서를 넘기더니, 글러터에 대한 정보를 찾아냈다.
경외심 섞인 눈으로 엘레너를 쳐다보았다.
책을 얼굴 가까이에 바짝 대고 글을 읽었다.
“기록에 의하면, 글러터는 석재로 이루어진 건물도 순식간에 먹어 치운다고 합니다. 마족이 성벽을 공격할 때 풀어 둔다는군요.”
“어찌 그것을 엘레너 왕녀님께서 알고 계신 겁니까?”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저 몬스터가 성벽에 도달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저격은 불가능합니까?”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적의 동태는 파악해 둔 상태였다.
“저 몬스터는 중갑으로 무장한 다른 몬스터들이 지키며 운반되고 있습니다.”
“왕녀님 말씀대로, 성벽에 다다르기 전에 병력을 보내 뚫어 낼 수밖에 없다는 거군요.”
“돌파하기 위한 별동대를 편성해야 하는데, 이놈이 몇이나 있습니까?”
그때, 한 병사가 헐레벌떡 회의실 내부로 들어왔다.
“엘레너 왕녀님! 나타났습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왕녀님께서 말씀하셨던, 손바닥 같은 날개를 지닌 마족입니다!”
* * *
마리나는 러셀을 겨누고 석궁의 방아쇠를 당겼다.
러셀이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신성력이 담긴 화살은 러셀에게 닿지 못하고 공중에서 정지했다.
‘마법!’
마리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신성력은 언데드나 마족에게 있어 상성에 가까운 힘이다.
하지만 신성력이 직접 닿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다.
‘공격을 읽혔어.’
러셀은 마리나가 화살에 신성력을 담아 밴시를 소멸시키는 걸 확인했다.
어떤 방식으로 공격하는지 먼저 확인하고, 대처를 준비한 후에 나타난 것이다.
러셀이 주먹을 움켜쥐자, 공중에서 멈춘 화살은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신의 대리인이 왔길래 긴장했는데. 너는 네 신 못지않게 어쭙잖구나.”
“당신이 황탑주로 위장하고 있던 마족이군요. 도련님은 어디에 계시죠?”
“도련님? 너 불완전한 신도 모시냐? 양다리야?”
러셀은 마리나를 조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알려 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마리나가 신성력을 끌어 올리자, 러셀이 겁먹은 아이 흉내를 냈다.
목을 움츠리고, 겁먹은 눈으로 눈치를 살핀다.
“힉. 화, 화났어?”
“거울 좀 보세요. 그 얼굴로 애처럼 굴면 징그럽거든요.”
“오, 혀가 꽤 날카로운데, 마계에서는 그거 포상이거든. 내 애인 할래?”
“드래곤 풀 뜯어먹는 소리 하고 계시네요.”
“앙칼진 것도 마음에 들어. 길들이는 매력이 있겠어.”
마리나는 인상을 썼다.
지그문트처럼 말로 상대를 건드려 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자신과는 맞지 않았다.
오히려 러셀은 여유롭게 되받아치며 마리나를 놀렸다.
하지만, 확실히 시간을 끌긴 했다.
마리나는 다시 한번 석궁을 들어 올렸다.
핑!
신성력이 담긴 화살이 러셀을 향해 날아갔다.
러셀은 딱한 눈으로 마리나를 바라보았다.
화살은 방금과 같이 러셀에게 닿기 전 공중에서 멈춰 버렸다.
“학습 능력이 없니? 아니면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
“아니요. 있는데요.”
“그럼 좀 참신한 공격 좀 해 봐.”
“했어요.”
“어?”
러셀의 눈이 옆으로 돌아갔다.
날개 끝에서부터 점점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한쪽 날개에서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화살은 눈속임이었고, 진짜 공격은 따로 있었다.
“저주? 신의 대리인이?”
러셀은 마리나를 어린 신의 대리인이라고만 생각했다.
석궁을 다루는 건 의외였지만, 딱 그 정도.
설마 신의 대리인이 저주를 사용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신성력만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탓에, 그 뒤에 있는 원념은 볼 수 없었다.
“네가 무슨 마녀야? 외톨이의 저주를 어떻게 써?”
러셀은 제 몸을 침식하는 저주의 정체를 깨달았다.
외톨이의 저주는 오감을 비롯한 온갖 감각을 지워 버리는 고위 저주다.
자질이 없다면 사용조차 불가능한 저주였다.
하지만 마리나는 이미 대화를 포기한 뒤였다.
“적의 감각을 차단했습니다! 화력 집중해 주세요!”
“쏴라!”
그제야 궁병들이 활을 당겼다.
러셀이 화살을 멈춰 세우는 것을 확인했기에, 활을 쏘지 않고 있던 것이다.
오감이 사라진 러셀에게 수백 발의 화살이 쏘아졌다.
* * *
끼이이익.
남문이 열렸다.
눈앞의 풍경을 보니, 단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시야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양의 몬스터가 들판에 득실거렸다.
옆에 있던 무연이 중얼거렸다.
“구역질 나오는 광경이다. 내 고향을 보는 것 같군.”
“고향이 저렇다니. 지옥 출신인가 보지?”
무연은 글러터를 베어 본 적 있다는 이유로 별동대에 차출됐다.
단도 고민 끝에 무연과 함께 별동대에 지원했다.
엘레너가 직접 작전의 목표를 밝혔는데,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작전이었다.
별동대를 지휘하는 기사가 마족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설명하겠다. 우리 두 번째 창의 임무는 목표를 처리한 뒤, 신속하게 귀환하는 것이다.”
기사는 마족군 사이를 가리켰다.
단의 눈에 빛으로 이루어진 기둥이 보였다.
세 개의 빛기둥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었다.
“성벽 위의 마법사가 글러터의 위치를 표시해 놓은 것이다. 세 마리를 죽여야 해. 우리는 중간 놈을 맡는다.”
“저기에 들어가고 생환할 가능성이 있나?”
“왕국의 방패가 남문을 지키며 시선을 분산시킬 것이다. 경계선으로 돌아오면 지원할 테니, 임무에 집중해라.”
“정말 저 수를 상대로 버틸 수 있는 건가?”
“글러터를 사냥한 용병. 쓸데없는 걱정이 많군.”
성문에서 중갑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들은 일정한 거리를 전진한 후, 정갈하게 가로로 줄지어 섰다.
등에 매고 있던 제 몸집만 한 크기의 방패를 꺼내, 차례차례 땅에 박아 넣었다.
쿵! 쿵! 쿵! 쿵!
마치 길고 굳센 벽을 형성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뒤로, 2미터는 훌쩍 넘을 듯한 기다란 장창을 든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창을 최대한 길게 잡은 병사들은 방패를 앞세운 기사 뒤에 섰다.
철컥, 철컥.
방패의 대각선 위쪽에는 작은 홈이 나 있었다.
병사들은 그사이로 창을 올려놓았다.
그제야 단은 왜 저들이 왕국의 방패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무연도 헬름 너머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용병을 앞세울 줄 알았는데, 인상적이군.”
“우리는 가장 앞에서 왕국을 지켜야 하는 방패다. 당연한 일이지.”
별동대의 지휘관 또한 왕국의 방패 출신이었다.
그도 방패를 들었다.
위는 사각형에 가깝고, 아래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형태의 카이트 실드였다.
클레이모어를 사용하는 단이 보기에도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방패들이 적군을 밀어내며 길을 만들고, 퇴로를 확보할 것이다. 우리는 창의 역할을 수행한다.”
지휘관은 별동대의 최선봉에 섰다.
그 뒤로 부지휘관과, 차출된 병력이 섰다.
왕성의 기사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약 100여 명.
모두 소드 익스퍼트 초급 이상의 실력자들이었다.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면 적군은 왕도 내부로 진입할 것이다. 저 괴물들 손에 무고한 생명들이 짓밟히게 하지 마라.”
한 치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에, 별동대의 인원들이 감화됐다.
단은 클레이모어를 움켜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놈은…….’
손바닥 모양의 날개를 가진 마족.
엘레너 웨스트리아가 말했던, 황탑주로 위장하고 있던 놈이었다.
단순히 목격한 것만으로 목 뒤가 저릿한 것이, 꽤 강한 것 같았다.
성벽 위에 있는 마리나가 신경 쓰였지만,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 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지그문트 마이어가 돌아올 때까지, 웨스트리아 왕국을 지킨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땅이 뒤흔들리며, 마족군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헬 하운드와 갑옷을 입은 오우거들이 선봉이었다.
오우거들의 갑옷에는 드문드문 화살이 박혀 있었다.
“웨스트리아를 위하여!”
왕국의 방패 하나가 포효했다.
이윽고, 마족군과 왕국의 방패가 격돌했다.
쾅! 쾅! 쾅!
육탄 돌격에도 불구하고 왕국의 방패들은 땅을 단단히 디딘 채 버텼다.
잘 보니, 오러로 방패 전면부를 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밀어내는 모습이었다.
“창!”
방패 뒤에 있는 병사들이 창을 내질렀다.
이미 수없이 많은 훈련을 거친 듯, 창들이 일제히 튀어나가 몬스터의 급소를 찔렀다.
지휘관이 앞으로 나섰다.
드물게도 웨스트리아의 기사가 아닌 무연과 단에게 눈을 돌렸다.
“전부 살아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 끝나면 술이나 한잔하지.”
“좋다.”
“저도 사양은 안 하겠습니다.”
쿠어어어어!
방패 하나가 오우거의 괴력을 이기지 못하고 밀려났다.
곧바로 옆에 있던 방패가 밀착하며 틈을 메꾼다.
희생이 있을지언정, 방패들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중앙에 있던 방패들이 치고 나가며, 마족군들을 순식간에 밀어냈다.
“가자.”
동시에, 아주 좁은 길이 열렸다.
지휘관이 방패를 앞세우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시선은 중앙부 빛기둥에 고정되어 있었다.
두 번째 창이 지옥에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