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악마 소환
“큭!”
루터 레온하트는 휘두르던 검을 멈췄다.
검을 부딪치던 기사가 대뜸 제 목을 들이 댔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잠든 영향인지, 동작이 굼뜨고 뻔한 경향이 있었다.
문제는, 웨스트리아 왕국의 기사와 병사들은 모두 조종당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
“제압해야 합니다!”
연합의 일원이 될 가능성이 큰 전력을 제 손으로 줄일 수는 없었다.
멜릭도 그것을 아는지, 병사와 기사들의 목숨을 방패로 굼뜬 동작을 만회했다.
한편, 단 록벨런은 리옐을 안아 든 채 기사와 병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캉!
리옐을 노리고 동시에 들어온 검격은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에 의해 튕겨 나갔다.
단은 가장 먼저 눈앞에 있는 기사 하나를 노렸다.
루터 레온하트의 말마따나, 죽이면 안 된다.
사람 기절시키는 방법은 이미 지그문트에게 배운 바 있다.
쩌엉!
클레이모어의 손잡이 끝으로 관자놀이를 내려찍었다.
헬름이 우그러들 정도의 일격에, 기사가 왼쪽으로 휘청거리더니 결국 넘어졌다.
‘정확했다!’
뇌를 흔들어 기절시킨 것이다.
하지만 기사는 또다시 좀비처럼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단은 그제야 자신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루터 왕자님! 이놈들, 기절도 안 합니다!”
이미 기사와 병사들은 잠에 든 상태.
즉, 의식은 없는데 몸만 움직이고 있다.
의식을 잃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몸을 묶어야 했다.
‘젠장! 도련님이 계셨더라면!’
지그문트 마이어가 있었다면 홀드(Hold)로 간단하게 처리했을 일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여기에 지그문트 마이어는 없었다.
루터 레온하트는 버티는 것도 벅차 보였기에, 실질적인 전력은 단 혼자뿐.
밧줄 같은 물건도 없는데, 많은 수를 다 제압할 수는 없었다.
그때, 지그문트의 조언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네크로맨서처럼 따까리를 앞세우는 놈들은, 약점도 뚜렷해.
-약점 말입니까?
-그래. 술자 본인이 더럽게 약한 경우가 태반이거든. 예외도 있지만.
-그럼 술자부터 공략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가급적이면. 술자만 잡으면 따까리들도 힘을 잃는 경우가 많으니까.
멜릭에게는 무연의 검도, 마리나의 화살도 통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던 멜릭은 분명 환상이었다.
-그러면, 술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찾아서 족쳐야지.
-찾는 게 문제 아닙니까?
-하멜에서 겪어 봤잖아. 조종하는 놈은 근처에 있기 마련이야.
조종하는 놈은 근처에 있기 마련이다.
단 록벨런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병사와 기사 뒤에는 허허벌판이었다.
하지만 환상 마법을 사용했던 만큼, 투명화했을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었다.
“리옐 아가씨, 혹시 저 뒤에 뭐가 있습니까?”
“안 보여!”
단은 리옐을 신뢰했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완벽한 투명화도 꿰뚫어 봤던 리옐이다.
분명 리옐이라면 뭔가를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단은 루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가 길을 뚫겠습니다. 리옐 아가씨와 함께 반대편을 확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 하지요.”
단은 클레이모어를 움켜쥐었다.
잠든 기사와 병사들은 비틀비틀 다가왔다.
“후우.”
오러가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감쌌다.
잠깐의 공방으로, 클레이모어에는 어느 정도 충격이 쌓인 상태였다.
단이 앞으로 뛰쳐나감과 동시에 손목을 틀었다.
“흐읍!”
간격을 좁힌 단은 검을 크게 휘둘렀다.
날카로운 날 부분이 아닌, 면 부분으로.
쩌어어억!
기사와 병사들을 쳐 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동시에,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에서 충격이 터졌다.
-단. 무기에 의존하고 싶지 않으면, 무기를 완벽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무기를 완벽하게 다루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티팩트도 적절하게 활용한다면 힘의 일부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거지. 나도 숨결 쓰잖아.
단은 여태껏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에 쌓인 충격을 한 번에 폭발시켰다.
파괴력은 확실했으나, 지그문트는 이를 낭비라고 하곤 했다.
부서졌던 클레이모어가 수리된 후, 엘비아에서 단은 무기를 완벽하게 다루기 위해 노력했다.
펑!
단은 클레이모어 안에 쌓인 충격을 나눠 쓰는 법을 익혔다.
검 면으로 가격해 밀어냄과 동시에, 충격을 일부만 폭발시킨다.
결과적으로, 병사들을 쓸어 버리는 듯한 모양새가 됐다.
클레이모어에 의해 밀려난 병사들은 저만치 뒤로 튕겨 나갔다.
“왕자님!”
진형이 붕괴된 틈을 타, 루터가 리옐을 데리고 반대편으로 갔다.
근처에 있던 병사가 공격했으나, 루터가 어떻게든 쳐 냈다.
반대편에 다다른 리옐은 눈에 힘을 주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없는데!”
조종당하는 이들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뒤를 돌아본 루터가 뭔가를 찾아냈다.
“리옐 님. 그렇다면, 저쪽은 어떻습니까?”
단과 루터, 리옐은 볼 수 없었던 진형의 반대편.
마찬가지로 잠들어 있는 병사와 기사들이 서 있었다.
그사이에는 잠든 프레드 웨스트리아도 섞여 있었다.
리옐이 눈을 깜빡였다.
“찾았다!”
* * *
찬란하게 빛나는 왕성의 홀에서는 대관식이 한창이었다.
황제는 한쪽 무릎을 꿇은 프레드 웨스트리아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웠다.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짐과 동시에, 프레드는 고개를 들었다.
시야 한편에는 웨스트리아 왕국의 전 국왕과, 엘레너 왕녀도 있었다.
‘비록 속국의 왕일지언정.’
죽었어야 할 수많은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모두 살아남았다.
프레드 웨스트리아는 그렇기에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최선이다.’
속수무책으로 제국의 전력에 밀려 전멸할 바에, 이편이 나았다.
지금은 제국의 위상이 드높아 고개를 숙일 뿐이다.
언젠가, 프레드는 웨스트리아 왕국을 되찾을 생각이었다.
프레드가 죽을 때까지 기회가 찾아오지 않더라도, 그 후대가 있다.
‘목숨이 붙어 있어야 후세를 도모할 수 있는 법이다.’
프레드 웨스트리아는 선택했다.
망국의 왕자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 속국의 왕으로서 삶을 이어 가는 것을.
훗날, 반드시 팔베르크 제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겠다고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즉위를 경하드립니다. 국왕 폐하.”
“고맙네. 멜릭 경.”
기사로 위장한 멜릭은 프레드에게 경의를 표했다.
멜릭은 프레드 웨스트리아의 최측근이었다.
제국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탓에, 나라를 팔아먹는 비겁한 왕자라는 오명을 썼다.
그러나 멜릭만큼은 프레드 웨스트리아의 곁을 지키며, 그를 지지했다.
프레드는 멜릭이라는 충신이 있음에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멜릭 경?”
“소, 송구합니다. 감정이 복받치는 바람에.”
고개를 숙인 멜릭이 몸을 들썩였다.
프레드는 잠깐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정작 멜릭은 프레드에게 보이지 않게 고개를 파묻은 채, 그를 비웃고 있었다.
‘너무 멍청해서 웃음을 참기가 힘들군.’
프레드 웨스트리아는 수년 전부터 같은 꿈을 꿨다.
웨스트리아 왕국이 멸망하고, 참수대 앞에서 황제를 만나는 꿈.
초기에는 황제의 얼굴에 침을 뱉고 목이 잘려 죽었다.
그 꿈은 수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됐다.
프레드는 절망했고, 이후에는 고민했으며, 지금에 와서는 수긍해 버렸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니, 알아채기도 힘들었겠지.’
정작 프레드는 팔베르크의 황제는 본 적도 없었다.
또한 팔베르크 제국의 황제도 이런 선택지를 준 적 없다.
하지만 프레드는 이런 미래가 찾아올 거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프레드 웨스트리아는 반복된 꿈으로 인한 세뇌된 상태였다.
‘멍청한 놈.’
세뇌에는 정말 긴 시간이 걸렸다.
정신 상태를 극단적으로 바꾸지는 못했지만, 방향을 트는 정도는 성공했다.
이제 멜릭이 할 일은 몽계에 숨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밖에 있는 놈들은…….’
프레드 웨스트리아는 엄연히 왕족이다.
웨스트리아 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다면, 죽일 수 없다.
즉 프레드가 잠에서 깨지만 않는다면 멜릭은 몽계에 쭉 숨어 있을 수 있었다.
마법사도 없으니, 멜릭의 능력으로 잠든 프레드는 몇 시간 동안은 깨울 수 없을 것이고.
‘신은 좀 무서운데.’
어린 신, 리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리옐은 어린 만큼 경험도 부족하고, 신성력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신의 대리인과 따로 떨어진 것을 목격했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남아서 병사들을 상대하고 있는 두 남자, 단과 루터가 몽계에 들어올 수도 없을 테니.
‘러셀이 신호를 보냈으니, 기다리기만 하면 돼.’
성벽도 장악 당한 상태다.
엘레너 왕녀가 왕성에서 증원을 요청한들, 늦을 확률이 높았다.
또한 그때는 프레드의 목숨을 빌미로 그들의 속도를 늦출 수도 있었다.
그때까지만 유유자적 버티면 그만이었다.
그때였다.
‘저것들은 뭐야?’
꽃을 뿌리는 화동(花童) 두 명이 프레드에게 다가갔다.
멜릭은 조금 당황했다.
프레드의 꿈은 멜릭에 의해 완벽하게 장악 당한 상태다.
왜 제멋대로 움직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왕자님!”
“왕자님?”
두 아이는 당돌하게도 프레드에게 말을 걸었다.
프레드도 아이들을 인식했는지, 아래를 내려다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귀여운 아이들이구나. 하나, 짐은 이제 왕자가 아닌데.”
“왕자잖아?”
“왕자잖아!”
“뭐라고……?”
프레드는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멜릭이 앞으로 나섰다.
“국왕 폐하께 무슨 무례를 범하는 것이냐. 이리들 오너라.”
“싫은데? 쟤 뭐야?”
“왜 명령이야. 웃겨 정말.”
화동 둘은 멜릭의 명령에 불응했다.
심지어는 콧방귀를 뀌면서 무시하는 발언까지 했다.
멜릭은 크게 당황했다.
프레드의 꿈은 멜릭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안에 있는 인물들이 멜릭에게 불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너희들, 뭐야.”
“얘야. 나 하기 싫은데.”
“진짜 안 할 거야?”
여자아이는 조금 신나 보였다.
한숨을 내쉬고 체념한 남자아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어색하게 이상한 포즈를 취했다.
“알았어……. 할게.”
“너희들 뭐야! 라고 물으신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이상한 꿈에서 깨기 위해?”
“어, 어. 그다음 뭐였지.”
남자아이가 말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여자아이가 볼을 부풀리고, 찰싹 남자아이의 등짝을 때렸다.
어정쩡한 포즈가 된 남자아이가 말을 이었다.
“나, 나고!”
“나, 얘야? 우리들이 정의의 이름으로…….”
“이 꼬맹이들이 지금 장난하나!”
참다못한 멜릭이 둘에게 손을 뻗었다.
두 명의 주위로 수백 개의 창이 만들어졌다.
나고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말하는 중에 공격하면 매너 없다고 그랬는데!”
“자기 소개랑 변신 중에는 건드리는 거 아니야?”
“어떻게 들어온 건지 모르겠지만…… 죽어라.”
수백 개의 창이 나고와 얘야 남매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나고가 슥 손을 휘저었다.
동시에, 창들이 멈췄다.
그리고 창끝은 방향을 바꿔 멜릭을 향했다.
멜릭은 창을 조종하려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어, 어떻게…….”
“얘야, 쟤 좀 봐. 몽계에서 메어리를 이기려고 하네!”
“나고. 자기가 무슨 린시스 님인 줄 아나 봐?”
“몽계에서 우릴 이긴 건 두 명밖에 없는데!”
메어리.
악몽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태어난 반정령들.
멜릭은 꿈을 다룰 수 있는 마족이다.
그러나 꿈에서 태어난 존재들을 꿈속에서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얘야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상관님이 이럴 때 어떻게 하라고 했지?”
“죽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죽일까?”
“죽이자!”
메어리 남매의 해맑은 사형 선고와 함께, 왕성이 뒤집혔다.
* * *
나는 여로를 통해 만들어 낸 균열 속으로 발을 들여야 했다.
러셀이야 나중에 잡아다가 족치면 그만이니 일단 화를 삭였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자, 공간이 전환됐다.
-여긴 어디지?
렘센에서 집행자들을 돕다가 한 번 들어갔던 심연처럼 어둠으로 들어찬 공간이었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 라이트(Light)를 쓰려는데, 신성이 몸에서 빛을 뿜어냈다.
이제 보니, 시야를 가리고 있던 것은 어둠이 아니라 농축된 마기였다.
신성의 빛에 마기가 사그라지며, 풍경이 드러났다.
-이건 뭐야?
10미터 정도 간격으로, 양쪽에 거대한 벽이 세워져 있다.
가시 덩굴이 뒤덮은 벽의 높이는 까마득했다.
비명을 들어 보니, 위로는 밴시들이 날아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주위를 살피던 신성이 결론을 내렸다.
-미로?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곳은 미로였다.
그 증거로, 앞에는 갈림길이 있었다.
벽의 크기를 보면 미로 자체의 크기는 심상치 않을 것 같았다.
-일단 틈 같은데. 몇 번째인지 모르겠군.
텔레포트(Teleport)는 공간을 이동하는 마법이지, 차원을 건너는 마법이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마법을 통한 복귀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둘을 구한다고 해도,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그거?
신성이 내 로브를 가리키며 대안을 제시했다.
로브, 여로는 차원을 넘나들기 위해서 고안이 된 아티팩트다.
당연히 도움이야 되겠지만.
-이건 이제 못 써.
-왜임?
-여로는 차원을 넘나드는 것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아티팩트야. 포털이 아니라고.
비유하자면 여로는 마차다.
여행을 확실히 편하게 만들어 주는 물건.
하지만 정작 여행길을 모르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어떻게든 차원을 넘어오긴 했으나, 내가 아는 길은 일방통행이었다.
되돌아가는 길은 모른다.
‘연결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리무아르와 제대로 연결하려면 8서클은 필요했다.
안전도 확보되지 않은 미지의 공간에서 사용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내가 여기서 빠져나갈 때까지는, 버텨 주겠지.’
나는 그들에게 있어 너무 큰 변수다.
어쩌다 보니 내가 내 발로 나를 가둔 셈이 됐다.
그래도 러셀의 말에 따르는 것보단 나았다.
놈은 마족인 만큼, 터무니없는 걸 시켰을 테니.
솔직히 이안과 볼프강을 버릴까 고민했지만.
‘쯧. 나도 참 물러졌군.’
볼프강 웨스트리아는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패다.
이안도 일단 제자의 제자기도 하고.
또, 러셀이 생각대로 놀아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상황이 워낙 최악이었다.
-그 기분 나쁜 놈. 나가면 죽인다.
-어케?
-균열만 찾으면 나갈 수 있어.
-균열?
-나를 여기에 집어넣었으니까, 어딘가에 공간이 벌어진 구간이 있을 거야.
그 구간만 찾으면 여기가 어딘지도 알 수 있고, 여로를 사용해 돌아갈 수도 있다.
러셀이 두 번째 틈의 주인이라고 한 만큼, 두 번째 틈일 확률이 높았지만, 확률에 걸고 이동했다가 차원 사이에 끼면 대참사다.
아마 반신화 한다고 해도 위험할 테니, 균열을 찾는 편이 확실했다.
그때였다.
콰앙!
먼 앞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이름 없는 검에 아우나(Aunar)를 불어 넣었다.
뭔가 오고 있었다.
“죽는다! 진짜 죽는다!”
“마법으로, 쿨럭, 뭐라도 좀 해 보게!”
“송구하오나 저는! 서클이 그리 높지 않아아아!”
젊은 마법사 하나와 멋들어진 수염의 노인 하나.
둘 다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수호자 가면을 뒤집어쓴 마법사 이안과, 웨스트리아 왕국의 국왕 볼프강이었다.
뭔가에 쫓기는지,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펄럭!
공기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둘의 위로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단한 회색 돌로 이루어진 몬스터, 가고일이 쫓아오고 있었다.
박쥐같은 날개를 펄럭이며 둘의 뒤를 바짝 쫓는다.
“파이어 볼(Fire Ball)!”
이안은 다급히 파이어 볼을 사용했지만, 빗나가고 말았다.
술자도 이동 중인 데다가, 상대는 날아서 쫓아오고 있다.
이제 막 수습 딱지를 뗀 마법사가 맞힐 만한 건 아니었다.
설령 맞았더라도, 저 돌가죽에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겠지만 말이다.
“빗나가지 않았는가!”
“폐하! 망했습니다!”
“흠! 거기 자네!”
“어? 지그문트 님!”
그래도 차라리 일찍 만나서 다행이었다.
저 둘을 찾아서 이 미로를 다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니까.
나는 가고일에게 손을 뻗었다.
바위 깨기(Rock Smash).
펑!
가고일이 폭발했다.
* * *
프레드 웨스트리아의 꿈은 엉망진창이었다.
왕성에서 전쟁터로, 마계로, 설산으로 공간이 전환됐다.
메어리, 나고와 얘야 남매는 멜릭을 상대로 꽤 고전하고 있었다.
“얘 뭐야?”
“좀 하네!”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라고, 천둥 번개가 멜릭을 향해 몰아쳤다.
하지만 멜릭은 땅을 뒤집어 낙뢰를 막아 냈다.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방어에 집중한 것이다.
“미친 꼬맹이들 같으니!”
시간은 멜릭의 편이다.
러셀이 합류할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된다.
꿈을 조종하는 능력은 확실히 메어리들이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멜릭은 메어리들의 약점을 알아차렸다.
‘어리다!’
둘은 어린아이의 외관을 하고 있는 만큼, 말투나 행동이 어린 편이었다.
이는 경험의 부족을 의미했다.
몽계에서는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공격할 수 있음에도, 둘의 공격은 뻔한 경향이 있다.
반면 오랜 시간 살아온 멜릭은 몽계에서 전투를 한 전적이 꽤 많았다.
경험에서 나오는 대처 능력 덕분에, 메어리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었다.
“잘 버티는데?”
“짜증 나는데!”
멜릭은 인상을 찡그렸다.
경험차로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지만, 한 번 삐끗하는 순간 패배할 것이 뻔했다.
역량 차이도 났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상대가 둘이라는 사실이었다.
메어리 남매는 일심동체가 되어 연계 공격을 했는데, 대처가 까다로웠다.
‘여기서 죽으면, 나도 죽는다!’
이곳은 프레드 웨스트리아의 꿈이다.
하지만 멜릭은 추적과 전투를 피하기 위해 본신을 몽계로 이동시킨 상태.
여기서 피해를 입으면 본신에도 고스란히 영향이 전해진다.
물론 그건 메어리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나갈 수도 없고!’
몽계 밖은 웨스트리아의 병사들과 단 일행의 전투로 한창이었다.
기사, 단 록벨런과 검을 쓰는 소년, 루터 레온하트만 있었다면 밖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리옐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어린 신이지만, 신은 신이다.
본신 자체는 그리 강하지 않은 멜릭이었기에, 나가는 순간 바로 정화될 것이 뻔했다.
‘어쩔 수 없군.’
멜릭은 비장의 수를 쓰기로 했다.
체념한 듯 눈을 감는 멜릭에, 메어리들은 의아한 얼굴이 됐다.
“왜 저래?”
“포기했나 봐!”
“죽인다?”
얘야의 손짓에, 방패처럼 멜릭을 지키던 땅덩어리가 두 개의 손으로 바뀌었다.
흙으로 이루어진 손이 멜릭의 몸을 붙잡았다.
나고가 손을 뻗어, 멜릭의 머리 위로 셀 수도 없는 수의 무기들이 만들어 냈다.
“잡고 있을게?”
“쏠게!”
나고가 사격을 명령하듯 손을 내리자, 아래를 향하고 있던 무기들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멜릭은 끝까지 눈을 감은 채 저항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기들은 멜릭을 향해 꽂혔다.
파바바바박!
먼지바람이 터져 나왔다.
그 무기들은 모두 린시스의 레어에서 봤던 아티팩트를 재현한 물건이었다.
정통으로 맞았다면, 고슴도치 신세를 넘어서 아예 소멸됐을 것이다.
“죽었나?”
“죽었을걸.”
“그랬겠지?”
나고와 얘야는 멜릭이 있던 곳을 주시했다.
곧 시야를 가리고 있던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얘야가 눈을 깜빡이고, 나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으엑. 저게 뭐야.”
“멍멍이?”
“멍멍이 아니야.”
멜릭을 감싸고 있는 건 새까만 털의 거대한 개였다.
몹집이 워낙 커, 등에 박힌 무기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특이한 점은.
“머리가 세 개잖아.”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셋이라는 것.
세 머리는 모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두 메어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목 안쪽에서 개과 동물 특유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몬스터?”
“괴물.”
궁지에 몰린 멜릭은 수를 늘리는 쪽을 선택했다.
마계에서 언젠가 마주했던 가장 강한 몬스터를 재현한 것이다.
마계 대공 베르제가 기른다는 지옥의 수문장, 케르베로스였다.
컹! 컹!
자세를 낮춘 케르베로스는 금방이라도 메어리들에게 달려들 듯 짖으며 적의를 드러냈다.
멜릭은 제 몸을 감싼 흙의 손을 제거하고, 메어리 남매를 향해 턱짓했다.
동시에 케르베로스가 메어리 남매에게 달려들었다.
“개한테 목줄도 안 채웠어! 몰상식한 놈!”
“나고. 우리도 필살기 써야 될 것 같은데?”
나고와 얘야가 한손을 마주 잡았다.
깍지를 끼고, 눈앞에 무언가를 구현하는 모습이었다.
멜릭은 씩 웃었다.
“뭘 만들든지, 못 막는다!”
“나 이거 만들기 무서운데?”
“그래도 해야 돼!”
케르베로스가 메어리 남매를 향해 아가리를 벌린 순간.
메어리 남매는 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뭔가를 만들어 냈다.
남매의 앞으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멜릭이 그랬던 것처럼, 메어리 남매가 생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건 뭐야.”
남자는 주먹으로 어퍼컷을 날리는 시늉을 했다.
동시에, 땅에서 기둥이라고 부를 만한 두께의 세 개의 주먹이 치솟았다.
주먹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던 케르베로스의 턱을 각각 강타했다.
아그작!
돌연 강한 힘으로 입이 닫힌 탓에, 케르베로스의 이빨 몇 개가 깨져 나갔다.
나고와 얘야는 자기들이 소환한 존재를 보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진짜도 아니고 제 힘으로 만들어 낸 인물일 텐데, 반응이 과했다.
특히 나고는 안색이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결국 만들어 내고야 말았어.”
“꼭 이렇게까지 했어야 됐어?”
“최후의 수단이었는데.”
무슨 마신이라도 만들어 낸 반응에, 멜릭은 내심 긴장했다.
경계심을 느낀 케르베로스가 뒤로 물러서 짖었다.
컹!
우렁찬 울부짖음에도, 남자는 시끄럽다는 듯 귀를 후비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 덕분에, 멜릭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야!”
남자는 대뜸 멜릭에게 호통을 쳤다.
케르베로스보다 훨씬 왜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죽지 않은 모습.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멜릭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심지어 남자의 뒤에 있던 나고와 얘야도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
“우리가 악마를 소환했어.”
“악마? 마신 아님?”
남자는 검을 뽑아 들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나고와 얘야가 만들어 낸 것은, 몹시 사납게 생긴 지그문트 마이어였다.
* * *
귀가 간지러운 게, 누가 내 욕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가면을 쓴 이안과 국왕, 볼프강 웨스트리아가 내 뒤를 따라왔다.
볼프강 웨스트리아는 내가 지그문트 마이어라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란 듯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둘이 설명한 자초지종을 요약하면 이랬다.
‘요컨대 러셀. 그놈이 다 여기로 보냈다.’
볼프강은 가만히 있으면 죽진 않을 거라는 말과 함께 이곳으로 보내졌다.
이안의 경우에는 적탑주의 명령으로 정체를 간파한 뒤, 그것을 들키는 바람에 끌려왔다.
볼프강은 추후 협상을 위해서 죽이지 않은 것 같았다.
이안은 아마 동료가 있을 경우 정체가 탄로 날 것을 대비해 실종처럼 만들었을 테고.
나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테니 시간을 끌기 위해서 보냈다고 보는 편이 타당했다.
“해서, 여기가 어딘지 짐작 가는 바가 있나?”
“아무래도 틈이라고 불리는 공간일 겁니다.”
마기가 어느 정도 있으나, 그 농도는 사람을 해할 정도로 짙지 않다.
러셀에게 인간 세 명을 마계까지 데려 갈 힘이 있을 리도 없다.
그 이외에도 전반적으로 틈이라고 생각할 만한 부분이 많았다.
볼프강 웨스트리아는 드높은 미로의 벽을 올려다보았다.
“저 위에 있는 건?”
“밴시입니다. 아마 시야를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배치해 둔 것 같군요.”
“완벽하게 갇혔다는 거군요. 빠져나갈 방법은 있습니까?”
“균열.”
나는 균열과 여로에 대해 설명했다.
러셀을 잡아 족치는 방법이 가장 끌리긴 했으나.
이곳에 러셀이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볼프강 웨스트리아가 기침을 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 균열이라는 것은 어떻게 생겼나?”
“공간의 뒤틀림입니다. 물체 따위가 비상식적으로 어긋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의외의 인물에게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볼프강은 애초에 그 균열 근처에 던져진 듯했다.
아마 러셀이 ‘가만히 있으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희망이 생겼다.
“어딥니까?”
“유감스럽지만, 방향을 잃었네.”
희망은 나타났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이안과 볼프강이 조우하는 과정에서, 둘은 전력을 다해 미로의 괴물에게서 도망 다녔다.
그 결과, 현재 자신들이 있는 위치를 잊은 것이다.
이안이 왼쪽 손을 번쩍 들었다.
“저, 지그문트 님!”
“뭐지?”
“균열이 어딘지는 정확히 몰라도, 폐하와 제가 조우한 곳은 알고 있습니다!”
이안은 왼손을 벽에 붙였다고 가정하고 움직였다고 했다.
미로 탈출의 간단한 해법 중 하나인 좌수법이었다.
반대로 돌아 오른손을 벽에 붙였다고 가정하고 움직이면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좋아. 잘했어. 혹시 계속 뛰어왔나?”
“아니요.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잠시 쉬기도 했습니다.”
“그래?”
나는 미로의 벽에 손을 얹었다.
아주 미세한 수준의 마나가 벽을 타고 흘러 들어갔다.
마나의 움직임을 통해 미로의 구조를 예측하는 것이었다.
나는 땅바닥에 검으로 슥슥 미로의 지도를 그려 냈다.
“그게 뭔가?”
“이 미로의 지도입니다.”
“어떻게…… 아니, 그보다 이렇게 복잡하단 말인가?”
“일대만 파악했을 뿐이니, 실제로는 더 클 겁니다.”
하지만 균열이 근처에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부분이었다.
아무래도 균열 멀리까지 보내기에는 힘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나는 바닥에 그린 미로의 구조를 보고, 대충 선을 그었다.
“대략 이 근처겠군요.”
“폐하와 제가 그것밖에 이동 안 했습니까?”
“이 미로는 축소판이니까, 실제로는 꽤 장거리를 이동한 셈이지.”
“그렇군요. 그럼, 위치도 알았으니 이동하죠!”
탈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이안은 의욕을 보였다.
골골대던 국왕, 볼프강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좌수법을 쓰다 보니, 꽤 빙 돌아왔습니다.”
좌수법.
왼쪽 벽을 짚고 이동하다 보면 언젠가 출구에 도달한다는, 간단한 미로 탈출 방법이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가?”
“놈의 목표는 시간을 끄는 겁니다. 여기서 정직하게 왔던 길을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안과 볼프강의 설명에 의하면, 이 미로에 있는 괴물은 가고일뿐만이 아니었다.
자이언트 네펜데스로 추정되는 식인 식물부터, 온갖 몬스터가 배치되어 있다.
거기에 시간을 소모하면 러셀의 의도대로 되는 셈이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직선으로 간다.”
나는 미로의 벽을 무시하고, 균열이 있을 것 같은 일대 쪽으로 선을 죽 그었다.
이안과 볼프강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상적인 방법이지만, 이 두꺼운 벽들을 뚫어 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뚫어 내면 됩니다.”
나는 손을 털었다.
7서클로 올라오면서, 큰 이점이 하나 더 생겼다.
발레리아가 없어도 숨결을 충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퀸틴에서 전부 사용해 버렸지만, 오는 길에 충전해 뒀다.
“지그문트 님,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무리입니다.”
“이안, 뒤로 가서 마나 실드 써라.”
“네?”
“돌 튄다.”
일단 다 뚫어 놓고, 직선으로 근처에 가서 찾는다.
가장 이상적이고 빠른 방법이다.
숨결 하나를 소모하는 건 좀 아쉬웠지만.
밖에 있는 애들이 더 중요했다.
“아, 미리 말해 두는데, 저 드래곤 아닙니다.”
일단 지켜 볼 요량인지, 이안이 뒤로 물러났다.
볼프강도 한 발자국 물러났다.
반신반의하는 기색이었지만 확실히 마나 실드를 펼치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땅을 단단히 딛고, 벽을 향해 한쪽 손을 뻗었다.
드래곤 브레스(Dragon Breath).
* * *
마차 안, 놀가드 백작은 편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엘레너 웨스트리아에게서 회신을 받은 것이다.
병력 분산의 위험이 있어, 지원 병력을 보내는 건 실질적으로 어렵다.
영지의 피해를 복구할 때까지 에노드 내부에 거처를 마련해 주겠다는 것이다.
“영주님, 에노드의 남문이 보입니다.”
“잠깐 멈추게. 쉬고 가지.”
“너무 자주 쉬는 것 같습니다. 곧 도착할 텐데.”
“영지민들은 걷고 있네. 어린아이나 노인들도 있는 걸 고려하면 적절한 휴식이야.”
“알겠습니다. 정지!”
놀가드 백작은 마차 밖으로 내렸다.
마차 뒤로 짐을 바리바리 싸든 영지민들이 보였다.
영지민들은 멈추기 무섭게 주저앉아 쉬기 시작했다.
발을 주무르기도 했고, 간단하게라도 식사를 하는 모습이었다.
말을 몰던 기사가 놀가드 백작에게 다가왔다.
“백작님도 쉬시지요.”
“나는 마차 안에서 충분히 쉬었네. 앞을 정찰하고 오지.”
“동행하겠습니다.”
“말은 한 필뿐이네. 뛰어서 쫓아올 셈인가?”
“백작님.”
“몬스터가 있는지 없는지만 보고 오는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네.”
“제가 가겠습니다.”
“자네도 여태껏 말을 몰지 않았는가. 또한, 영지민을 보호할 인원도 필요하다네.”
놀가드 백작의 고집에, 기사는 어쩔 수 없이 수긍하고 말았다.
인자한 미소를 지은 놀가드 백작이 말에 올랐다.
“쉬고 있게. 혹 몬스터나 마족이 나온다면, 목숨을 걸고 지키게.”
“명 받들겠습니다.”
놀가드 백작은 말을 타고 전방으로 향했다.
기사의 말마따나, 동산의 능선 너머로 얼핏 에노드 남문이 보였다.
탁 트인 공간인 만큼 몬스터가 있을 가능성은 적었다.
그러나 이미 한 번 오릭에게 습격당한 적 있는 놀가드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몇 시간 내로 도착하겠어.’
영지 내의 말이 거의 다 죽어 버리는 바람에, 속도가 많이 늦어졌다.
설령 더 있었다고 해도, 생존한 영지민들을 전부 태울 수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동산을 더 올라가자 남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목오의 상이 보였다.
‘은인들께서도 저기에 계시겠군.’
놀가드 백작은 지그문트 일행의 얼굴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찾아서 대접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이미 엘레너 웨스트리아 왕녀가 보상을 내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보은을 하고 싶었다.
‘흠, 저건 뭐지?’
그런 놀가드 백작의 눈에 무엇인가 들어왔다.
손바닥 같은 거대한 날개를 지닌 마족.
두 번째 틈의 주인, 러셀이었다.
* * *
-아무리 그래도, 보자마자 눈치를 까? 환상 마법은 완벽 했는데.
에노드 남부, 들판.
러셀은 제 모습을 감출 생각도 없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웨스트리아 왕국의 국왕, 볼프강 웨스트리아의 왕관이었다.
러셀은 볼프강을 미로로 보내기 전에, 왕관을 뺏었다.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고작 한 놈이 다 망칠 줄이야. 변수를 상정해서 여러 계획을 세우길 잘했어.
러셀의 옆으로 균열이 열렸다.
동시에,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황무지와 비슷한 곳이었는데, 마족이 우글우글 몰려 있었다.
균열 너머에서 누군가 목소리를 냈다.
-러셀? 생각보다 너무 이르군.
-어쩔 수 없습니다. 변수가 아주 제대로 개입했거든요. 제 정체까지 까발려졌다고요.
-그걸 대비해서 미끼를 뿌려 둔 것 아닌가?
-헤르창이랑 오릭요? 걔네 전부 다 뒈졌어요.
-헤르창은 몰라도, 오릭까지 당했다고?
균열 너머의 인물은 꽤 의외라는 듯 놀랐다.
하지만 지그문트 마이어를 직접 본 러셀은 납득할 수 있었다.
-변수는 틈의 틈 속에 가둬 뒀으니, 빠져나오기 전에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거기를 진짜 쓰게 될 줄은 몰랐군. 그 미로는 메이저 담당이니. 버틸 수 있겠지.
-계획을 일찍 진행하면 손해긴 한데.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멜릭도 걸린 것 같거든요.
-항복시키는 건 실패라는 거군. 네가 이르게 진행시킬 만도 해.
-차라리 잘됐죠. 사제들도 골골대고 있던데. 교국의 사제들이라도 올라오면 짜증 나잖아요.
-알겠다. 병력은 준비됐으니, 네 쪽에서 균열만 벌려라.
-진짜 손해 보는 역할 맡았네.
-동참한 틈의 주인 중 사제는 너밖에 없다. 감수해라.
투덜대던 러셀이 눈을 감으려 하자, 균열 너머의 인물이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
-아, 전쟁할 거면 화끈하게 합시다. 왜 불러요. 당신이 첫 번째 틈의 주인이라고 해도…….
-변수를 가뒀다면, 직접 봤다는 얘긴데. 얼마나 강한지 짐작할 수 있나?
-변수요? 음, 글쎄요. 부딪치지는 않았는데, 아마 정면으로 싸웠으면 저도 뒈졌을걸요?
-그 정도라고?
-네. 존나 쎄요. 괴물이던데.
-……알았다. 출정을 준비하지.
균열이 닫혔다.
러셀은 왕관을 평편한 돌 위에 올렸다.
그 앞에 양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제단 앞에서 사제가 신에게 기도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부패한 성배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상처의 조각으로 끌고 올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으니.
돌 위에 올려진 왕관이 덜덜 진동하기 시작했다.
중앙에 박혀 있는 특이한 보석이 왕관에서 뽑혀, 공중으로 떠올랐다.
사방에서 압박을 받듯 부르르 떨린 보석이 순식간에 바스라져 가루가 됐다.
빛나는 가루가 허공에 흩뿌려짐과 동시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전쟁의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