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97/134)

6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케인 바그너…… 황탑주가 돌아왔다고?”

다시 한번 루터 레온하트와 함께 엘레너를 찾았을 때, 의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황탑주, 케인 바그너의 귀환이었다.

엘레너 왕녀는 이를 희소식이라 여겼는지, 얼굴이 밝았다.

“네! 황탑주님께서 대마법사 델 로안 대공을 살해했다는 오명만 씻으신다면…….”

“그 부분은 포기하는 편이 좋을 거야.”

“네? 어째서죠?”

“라그힐 팔베르크를 너무 물로 보는군.”

전쟁이 일어난다는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제국은 이미 황탑주를 범인으로 단정 짓고, 증거 조작까지 완료한 상태다.

“누명을 벗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점은 없어.”

“동의합니다. 제국의 증거는 너무 명료합니다.”

루터 레온하트가 동의를 표했다.

만약 장례식 때 나타났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엘레너도 머리를 조금 굴려 보더니, 납득하고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래도 전력이 늘어났다는 점은 긍정적이군요.”

“그렇죠. 이로써 아바마마께서도 좀 더 연합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실 거예요.”

케인 바그너는 웨스트리아 왕국에서 가장 큰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머리도 명석하고, 방어 마법에 한해서는 다른 마탑주들과 견줄 수 없는 능력을 보인다.

한 명에 불과하지만, 그 한 명이 막을 수 있는 병력의 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아마 황탑주의 몸에 문제가 없다면 웨스트리아 왕국은 몇 달 정도 버텨 낼 수 있을 것이다.

‘문제가 없다면 말이지.’

팔베르크 제국은 내 죽음에 대한 용의를 황탑주에게 뒤집어 씌웠다.

단순히 웨스트리아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 죽음 당시 황탑주의 행방이 묘연했던 것도 있겠지만.

‘너무 당당하게 움직였어. 황탑주가 장례에 참여하지 않을 걸 알았다는 듯이.’

그 누구도 아닌 라그힐 팔베르크의 수.

쉽게 넘어가기에는 의심 가는 부분이 많았다.

황탑주에게 손을 썼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것이 어떤 방식일지를 몰라서 그렇지.

“황탑주는 지금 어디 있지?”

“아바마마와 대화를 나누시고 황탑으로 가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번 만나 봐야겠는데.”

“예?”

* * *

이안이 정신을 차린 곳은 낯선 방이었다.

척 봐도 값이 나갈 것 같은 목제 책상과, 고서가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장.

램프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조금 은은했다.

발 아래로 닿는 양탄자는 무척 부드러웠다.

‘묶여 있는 것만 빼면 좋을 텐데.’

이안은 그 방 한가운데 의자에 묶여 있었다.

언타이(Untie)를 시도하려고 했지만, 눈앞의 인물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빛바랜 황색의 로브 차림의 노인, 황탑주.

허튼짓을 하면, 반드시 저지당할 것이 분명했다.

“흥미롭군.”

황탑주는 이안을 등지고 창가에 안경을 비춰 보고 있었다.

직접 써 보기도 하고 마나를 불어넣기도 하는 모습이었다.

이안이 깨어났다는 걸 눈치챘는지, 황탑주가 고개를 돌렸다.

“적탑의 마법사여, 이 마도구는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이안은 인상을 찡그렸다.

마탑주씩이나 되는 인물이 어떻게 마도구에 걸린 마법을 모른단 말인가.

‘아, 혹시…….’

발레리아 로안은 말한 적 있다.

대마법사 델 로안이 사용하던 고대 마법을 재현해 마도구에 담아냈다.

델 로안이 사용하던 마법인 만큼, 세간에 알려진 마법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더욱이, 저 마도구는 어설픈 재현으로 마나 서클이 반대로 돌아야 사용할 수 있는 물건.

이안 같은 특수한 마법사를 제외하면 사용할 수 없다.

‘운이 좋았다!’

이안은 운이 억세게 좋았다.

잘만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머리를 굴리는데, 황탑주가 대답을 재촉했다.

“사일런스(Silence)는 사용하지 않았는데 어찌 대답이 없느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연히 주운 물건이라.”

“그래? 이상할 따름이군. 이런 마법은 처음 보는데.”

“저, 황탑주님. 저는 어째서 묶여 있는 것입니까?”

이안은 황탑주와 눈을 마주치고 정신을 잃었다.

만약 황탑주가 마법을 사용해 이안을 기절시켰다면, 명백히 켕기는 점이 있다는 뜻이다.

황탑주는 뚜벅뚜벅 이안에게 다가왔다.

‘그 형상.’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리는 듯한 모습.

정확히는 보지 못했지만, 확실히 인간은 아니었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황탑주는 허리를 숙여 이안과 눈높이를 맞췄다.

“내가 두려운가?”

“……그야, 갑자기 이렇게 결박당하면 두렵지 않겠습니까.”

황탑주는 한참 동안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목숨을 걸고 태연한 척을 했다.

“이해해 주게. 적탑주가 암살자라도 보낸 것이라 생각했으니.”

“왜 적탑주님께서 황탑주님을 해하려 한단 말씀이십니까?”

“내가 대마법사 델 로안 대공을 살해했다는 용의를 받고 있지 않나.”

“적탑주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자네가 적탑주를 몰라서 하는 소리야. 그녀는 대마법사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더군.”

문득 이안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로안 아카데미의 델 로안 조각상이었다.

심지어 아카데미 이름도 로안 아카데미다.

발레리아의 수업에서는 항상 ‘스승님’이라는 단어가 빠짐없이 등장했다.

마냥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3서클 마법사입니다. 황탑주님을 해할 만한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마도구가 의심스러웠는데 말이야. 영 작동을 안 하는군. 돌려주지.”

황탑주는 손수 이안에게 안경을 씌워 줬다.

이안은 내심 안도했다.

세심하게 각도까지 맞춰 준 황탑주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자, 이제 한번 안경에 마나를 불어넣어 보게.”

“네?”

“나를 해할 만한 마도구가 아니라면,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이 마도구가 뭔지는 저도 모릅니다. 주운 물건이라…….”

“자네가 1층 계단에서 안경에 마나를 불어넣고 있는 걸 봤다네.”

이안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가장했다.

또 저 감정이 빠져나간 눈빛을 보였다.

젊은 이안은 아직 마주해 본 적 없는 눈이었다.

“어서 하는 편이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죽을 테니.”

* * *

에노드 시내.

로브를 뒤집어쓴 엘레너는 혼란에 빠졌다.

대뜸 레온하트의 수호자, 지그문트가 자신을 왕성 밖으로 빼 왔기 때문이다.

이유인즉슨, 황탑주를 만났을 때 협상할 웨스트리아 왕국 측 인물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주, 죽는 줄 알았네요. 살면서 성벽을 뛰어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저도 처음에는 두려웠는데, 익숙해지더군요. 왕녀님도 그럴 겁니다.”

“전 절대 안 그럴 것 같은데…….”

루터는 태연한 얼굴로 뻗친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이윽고 여관에 도착한 지그문트는 단과 마리나, 리옐을 데리고 나왔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루터와 엘레너를 지킬 인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째선지 무연도 끼어 있었다.

“황탑으로 간다고 들었다. 이안이 돌아오지 않았기에, 찾으러 갈 생각이다.”

“그래? 전력에 보탬은 되겠지.”

엘레너는 조금 당황했다.

헬름만 덜렁 뒤집어쓴 남자와, 아름다운 시녀, 귀여운 어린아이.

전력이 될 법한 인물은 기사, 단 록벨런 하나뿐이었다.

“인사해. 여기, 엘레너 웨스트리아 왕녀다.”

“아, 그렇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엘레너 왕녀님. 기사, 단이라고 합니다.”

“마리나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리옐! 아빠 딸!”

갑자기 왕녀와 마주해 당황했을 법도 한데, 그런 눈치는 없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나 왕자를 모시고 있어 그런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아니었다.

트리옌에서 지그문트가 국왕을 납치한 전적 때문에, 왕족을 대하는 데 조금 익숙해진 것이다.

“……엘레너 웨스트리아예요.”

그렇게 지그문트 일행을 추가해서 총 일곱 명이 황탑으로 향하게 됐다.

엘레너 웨스트리아는 앞장서서 황탑으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왕성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왔던 길을 돌아가기만 하면 됐다.

‘황탑주님께 뭐라고 설명드려야 할지 모르겠네.’

대뜸 찾아가는 건 무례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상황이 워낙 급박했다.

이 정도는 이해해 줄 것이다.

연합에 대해 어떤 의견일지 모른다.

적어도 누명을 쓴 황탑주가 온건파와 같은 의견을 낼 가능성은 적었다.

지그문트가 계획을 설명했다.

“일단 엘레너 왕녀를 앞세운다. 너희들은 밖에서 대기해.”

“어감이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죠?”

“걱정 마. 나랑 같이 들어갈 거니까. 황탑주와 접선해 보고, 괜찮다 싶으면 다 들어오는 걸로 하지.”

“황탑주님은 온화한 분이십니다. 분명 괜찮을 거예요.”

“황탑주가 맞다면, 그렇겠지.”

이윽고 일행은 황탑에 도착했다.

루터를 비롯한 일원들은 말했던 대로 맞은편 가게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지그문트와 엘레너는 탑 내부로 들어갔다.

접수처로 가기 무섭게, 지그문트가 손을 움직였다.

개인 공간(Pricate Space).

수습 마법사가 환하게 웃으며 둘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무슨 용무신가요?”

엘레너는 말없이 로브를 젖혔다.

눈을 깜빡이던 수습 마법사가 기겁했다.

“어헉! 엘레너 왕녀님?”

“쉿. 황탑주님 계신가요?”

“아, 옙. 지금 최상층에 계실 겁니다.”

“제가 왔다고, 말씀 좀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여,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수습 마법사는 삐걱거리며 헐레벌떡 계단 위로 올라갔다.

머지않아, 거의 구르다시피 내려온 수습 마법사가 말을 전했다.

“올라오시라고 합니다. 안내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엘레너와 지그문트는 수습 마법사를 따라 황탑의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황탑은 꽤 들뜬 분위기였다.

약 1년 만에 탑주가 귀환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윽고 셋은 최상층, 마탑주의 방에 도달했다.

수습 마법사는 노크를 하며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투로 고했다.

“황탑주님. 엘레너 웨스트리아 왕녀님이십니다.”

“열려 있다.”

방문이 열렸다.

꽤 오래 방치됐을 것이 분명함에도 깨끗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창가에 서 있던 황탑주는 엘레너를 보고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엘레너 웨스트리아 왕녀님.”

“오랜만이에요. 황탑주님.”

“실로 오랜만이군요. 그사이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한데, 옆에 그분은 누구십니까?”

“어, 호위 기사예요.”

엘레너는 지그문트의 눈치를 살폈다.

지그문트는 유심히 황탑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탑주는 자리를 권했다.

“무슨 연유로 황탑을 찾으신 건지 모르겠으나, 일단 앉아서 얘기하시지요.”

엘레너는 손님용 소파에 앉았다.

지그문트는 호위 기사 시늉을 하는 듯 그 뒤에 섰고, 황탑주는 엘레너의 맞은편에 앉았다.

인자한 황탑주는 떠나기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안심하고 연합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직전.

스릉.

지그문트 마이어가 검을 뽑았다.

“……젊은 기사여,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갑자기 왜 그러세요?”

엘레너는 기겁했다.

갑자기 황탑주에게 무슨 무례란 말인가.

지그문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기어코 검을 황탑주에게 겨눴다.

황탑주는 아무런 제재 없이 인상을 찡그리고 지그문트를 바라보았다.

지그문트가 입을 열었다.

“너 누구야.”

* * *

과거, 팔베르크 황성의 작은 방.

델 로안의 앞에는 어린아이 셋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어린 소녀, 발레리아 로안.

그 양옆에 앉아 있는 것은 황자 라그힐과, 블랙 드래곤 벨수스였다.

“자, 내가 아까 뭐라고 했지?”

“낯선 사람 말고, 익숙한 사람도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기다리고 있던 발레리아가 냉큼 대답했다.

라그힐이 손을 들었다.

델 로안은 라그힐에게 질문하라는 듯 턱짓했다.

“익숙한 사람이라면, 어색한 점을 찾기도 쉽지 않나요?”

“글쎄다.”

델 로안은 직접 보여 주려는 듯, 자신에게 마법을 걸었다.

수십 개의 마법진이 순간적으로 델 로안의 몸을 감쌌다.

“어, 어머니?”

벨수스가 화들짝 놀랐다.

델 로안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린시스 화이트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평균보다 큰 키에, 하얀 머리카락과 피부, 조금 내려다보는 듯한 눈까지.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면 깜빡 속았을 정도로, 외관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런 식으로, 감각은 생각보다 현혹되기 쉽거든.”

그러나 얇은 입술 사이에서 나온 목소리는 분명 델 로안의 것이었다.

세 아이는 형용할 수 없는 괴리감을 느꼈다.

이어서, 린시스로 변한 델 로안이 목에 손을 올렸다.

“음, 음.”

“목소리도 똑같아졌어!”

“우와.”

“신기하다.”

발레리아가 직접 나서서 촉감과 향기까지 확인했지만, 그 또한 똑같았다.

초롱초롱한 눈을 한 아이들을 앞에 둔 채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다리를 꼬며 앉는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린시스 화이트였다.

“버릇이나 말투에서 어색한 부분을 찾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연기가 좀 되면 소용없겠지?”

“그러면, 어떻게 구분해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 마나 체크도 있고, 진실의 눈 같은 마법으로 간파해도 되고.”

델 로안은 잠시 고민했다.

제자인 발레리아는 마법사고, 드래곤인 벨수스 또한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라그힐 팔베르크에게는 마나를 다루는 능력이 없었다.

또한 라그힐은 이런 위장으로 위험해질 수 있는 직위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마법 말고 다른 방식도 알려 주고자 했다.

“가장 직관적인 방법은…….”

* * *

환상 마법이란 기본적으로 미술적 소양을 요한다.

이는 마법뿐만 아니라, 변신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사항이다.

폴리모프라는 예외가 있지만, 폴리모프는 다른 누군가로 변하는 마법이 아니다.

폴리모프의 경우, ‘만약 술자가 이 종족으로 태어났다면’이라는 전제로 종족을 바꾸는 마법.

이런 상황에서 고려할 만한 마법이 아니었다.

‘환상 마법을 통한 변장의 한계는, 변화에 있다.’

마법을 유지하는 건 쉬우나, 변칙에 대응해 마법을 조정하는 건 어렵다.

특히 대상의 모습을 그대로 복제하는 마법의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마법의 조정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만큼 예상치 못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거기서 어색한 점을 찾을 수 있다.

워터(Water).

즉 간단하게, 물을 뿌리는 것 정도로 파훼할 수 있다.

물을 쏟은 것도 아니고, 물방울을 얼굴을 비롯한 피부에 튀게 한 것이 전부.

그러나 관찰력이 좋으면, 이상한 점을 바로 발견할 수 있다.

엘레너 왕녀도 이를 발견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어?”

물방울은 분명 황탑주의 얼굴에 몇 개씩이나 닿았다.

하지만, 그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황탑주는 기사로 보이는 내가 갑자기 물을 뿌릴 줄은 몰랐는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무슨 짓을!”

“피부가 상당히 건성인가 봐. 스펀지처럼 물을 흡수하는 걸 보면.”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꽤 공을 들인 위장인 만큼, 디스펠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마나를 느낀 건지, 놈도 대항했지만.

“마나 컨트롤로 나를 이기려고?”

에인션트 드래곤을 데려와도 어림없는 짓이다.

마법이 풀리며, 놈의 본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왜소한 체구의 노인은 점점 부풀어 올랐다.

창백해진 엘레너가 뒤로 물러났다.

“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죠?”

“저거 황탑주 아니야. 황탑주인 척하는 무언가지. 아마 진짜는 죽었을 거다.”

“그럴 수가. 돌아가셨다니…….”

“추측일 뿐이야. 여긴 위험하니까 일단 나가서 루터 쪽과 합류해.”

“수호자님은요?”

“찾은 김에 잡고 가야지.”

이 시기에, 황탑주로 위장해서 웨스트리아 왕국 내부로 들어왔다.

당연히 팔베르크 제국의 짓으로 의심이 갈 수밖에 없다.

만약 잘 족쳐서 제국 소속이라는 것이라는 점이 확정 난다면.

‘드래곤에게 협조 요청이 가능할지도 모르고.’

관절이 거꾸로, 뒤틀리고 황탑주의 껍데기가 녹아내렸다.

꿈틀거리며 형체를 변화하던 놈이 괴성을 질렀다.

벤시의 단발마와 비슷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키야아아아아아아악!

탑이 뒤흔들리며 검은 기운이 새어 나왔다.

마기였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엘레너에게 손을 뻗었다.

추방(Deport).

* * *

“응?”

“엘레너 왕녀님?”

“엘레너 언니다!”

엘레너 웨스트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지그문트가 자신에게 손을 뻗는가 싶더니 풍경이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탑 안에 있었을 텐데, 어느새 마탑이 보였다.

마탑 맞은편에서 대기한다던 루터 레온하트를 비롯한 일행도 있었다.

다리가 풀린 엘레너가 풀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수호자 경은요?”

이어지는 질문에, 뒤늦게 상황을 자각했다.

안색이 새파래진 엘레너가 말을 더듬었다.

“황탑주. 황탑주는 황탑주가 아니었어요.”

“황탑주가 아니라니요?”

“괴물.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황탑주는 황탑주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였다.

얼핏 봤을 뿐이지만, 확실히 인간은 아니었다.

루터 레온하트가 인상을 찡그렸다.

“마탑으로 가야겠군요.”

“아닙니다. 왕성으로 가는 것이 먼저입니다.”

단은 즉각 부정하며, 언제든지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아공간 주머니를 정비했다.

마리나도 이동을 준비하듯 리옐을 안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침착한 기색이다.

무슨 백전노장 같은 반응에, 엘레너와 루터는 꽤 당황했다.

“물론 왕성에 이 사실을 알리기야 해야겠지만.”

“수호자님이 언질을 주셨습니다. 곧장 두 분을 모시고 왕성으로 가라고.”

“하지만, 상대는 괴물이에요. 걱정 되지도 않나요?”

“괴물이 좀 걱정되는군요.”

엘레너는 얼핏 단의 눈에서 무한한 신뢰를 읽을 수 있었다.

무력이 상당하다는 건 전해 들은 말로 얼핏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괴물을 걱정할 정도라니,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걸까.

“일단 알겠습니다. 왕성에서 증원을 요청하는 편이 더 현명할 수 있겠군요.”

“곧장 이동하시죠.”

왕성은 황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동하려는데, 다시 한번 황탑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키야아아아아아악!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얼마나 목청이 큰지, 마탑 밖에서도 명료하게 들릴 정도였다.

헬름 때문에 소리가 울렸는지, 고개를 저은 무연이 중얼거렸다.

“고통스러워하는 건가?”

“아니야.”

마탑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리옐이 대꾸했다.

마리나가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리옐 님, 고통스러워하는 게 아니면, 뭔가요?”

“으음. 신호?”

* * *

에노드 남쪽은 상징과도 같은 거대한 장벽이 지키고 있다.

그 위에는 망루가 있는데, 높은 만큼 날씨만 좋다면 먼 거리까지 관측할 수 있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내릴 때 무척 힘든 데다가,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렇기에 경비병들은 망루에 서는 것을 끔찍하게 기피한다.

“학, 칵. 커흐윽. 죽겠다.”

“말할, 여유, 있냐?”

말단 경비병들은 반쯤 정신을 놓고 계단을 올랐다.

선두로 가던 상급 경비병이 그를 타박했다.

그냥 오르기도 버거울 정도로 많은 계단이다.

거기에 갑옷으로 완전 무장하고, 무기까지 든 채로 올라가는 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말단이 교대 시간에 늦을 수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몇 번, 올라가면, 익숙해져.”

“헤엑, 그렇습니까?”

“거의, 다 왔다.”

여유로운 척했지만, 상급 경비병 역시 호흡이 거칠어진 나머지 말이 뚝뚝 끊겼다.

그렇게 경비병들은 남벽의 가장 높은 곳, 벽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크어어어…….”

“미친. 자고 있네.”

교대 예정인 경비병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잠들어 있었다.

워낙 오고 가며 피로가 쌓이기에, 장시간 근무하다 보면 잠들기도 한다.

보는 눈도 없을뿐더러, 경치 구경이나 카드 게임 말고는 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상급 경비병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깨워.”

“일어나십쇼.”

“커허어…….”

“허, 참. 아주 꿀잠을 주무시는구먼.”

욱한 상급 경비병은 갑옷에 창대를 부딪쳐서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하지만 잠든 이들은 몸만 뒤척일 뿐, 도통 깨어날 생각을 안 했다.

말단들이 몸을 흔들거나 뺨을 찰싹찰싹 때리기도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뭔가 이상한데…….”

“저, 저기 좀 보시지 말입니다!”

말단 경비병 하나가 먼 벽을 가리켰다.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길이 나 있었는데, 경비병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있었다.

이상한 점은, 모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잠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상급 경비병이 소리를 질렀다.

“야, 다 일어나!”

“아, 아니. 하암, 저도 졸리지 말입니다.”

“뭐? 너 미쳤냐?”

“죄송한데, 정말…….”

말단 경비병 하나가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풀썩 고꾸라졌다.

뒤따라 계단을 올라왔던 경비병들이 차례차례 쓰러지기 시작했다.

잠든다기보다 기절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큭.”

혼자 깨어 있게 된 상급 경비병에게도 이상하리만치 갑작스레 잠이 몰려왔다.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어, 일부러 통증을 만들었다.

“종. 종을 쳐야……!”

이는 명백히 긴급 상황이었다.

망루에 있는 줄을 당겨, 아래에 이를 알려야 했다.

상급 경비병은 쏟아지는 졸음을 참기 위해 손등을 씹으며, 망루로 향했다.

통증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눈꺼풀이 계속 감겨 왔다.

키야아아아아아악!

멀리서 들려오는 괴성.

계단을 반쯤 기어오르던 상급 경비병은, 누군가의 다리를 볼 수 있었다.

확실히 서 있는 모습에 반색한 상급 경비병이 위를 올려다봤다.

“주, 줄을 당겨.”

“그럴 수는 없지.”

상급 경비병은 이상함을 느꼈다.

그 다리는 경비병의 갑옷이 아니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졸린 듯 반쯤 눈을 감은 남자가 보였다.

“겨우 다 재웠는데.”

“너…… 뭐야…….”

“여섯 번째 틈의 주인, 꿈꾸는 자, 멜릭.”

“멜릭……?”

살면서 경험해 본 적 없을 정도로 강한 졸음이 쏟아졌다.

상급 경비병은 잠에서 깨기 위해 손등을 씹었지만, 턱 힘도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멜릭은 쪼그려 앉아 상급 경비병을 내려다봤다.

상급 경비병은 그제야 멜릭이라는 자의 머리 위에 있는 뿔을 볼 수 있었다.

멜릭은 직접 손을 쓸어내려, 상급 경비병의 눈을 감겨 줬다.

“자고 일어나면, 재밌는 걸 볼 수 있을 거야.”

* * *

엘레너를 마탑 밖으로 내보내기 무섭게, 놈에게서 마기가 느껴졌다.

인상을 구긴 신성이 여로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지지!

손을 한 번 휘두르니, 내 몸 전체가 신성에 휩싸였다.

마기를 따로 차단한 것 같았다.

신성을 품고 있으나 육체는 인간의 것이다.

마기는 몸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다.

-뭐임?

-마기 보니까 마족 같은데.

-저게?

신성은 앞을 바라보았다.

황탑주의 형체는 이제 없었다.

대신 내 앞에 서 있는 것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는 괴물이었다.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길어, 천장에 머리가 닿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다.

등에는 검은 날개가 달려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거대한 손바닥이었다.

확실히 마족이라고 보기에도 조금 특이한 외관이었다.

-변종이잖아.

-그래?

-마족, 특히 틈의 주인 중에는 기상천외한 외관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 많거든.

대체로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한 경우가 많지만, 이상한 놈들도 많다.

‘마족’은 하나의 큰 분류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수없이 많은 종족이 분포되어 있다.

지상과 달리, 마계에선 마족이라면 종족에 크게 관계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두 종족의 피가 섞인 하프도 많은데, 그만큼 돌연변이 또한 다수 있다.

“……당신이 헤르창과 오릭을 죽였나?”

“요새 마계에서 인간 언어 교육이 열풍인가 보군.”

“당신 때문에 우리 계획이 많이 틀어졌단 말이야.”

황탑주로 변장해 있던 마족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신성을 분명 목격했을 텐데, 생각보다 태연한 눈치였다.

눈앞의 마족은 분명 상당히 강하다.

어림짐작이지만, 오릭보다 위에 있다.

하지만 어쨌든 마족인 만큼, 신성을 사용할 수 있는 내 쪽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

소멸시키는 건 일도 아니다.

“필시 불완전한 신. 그분이 그토록 경고했던 변수겠군.”

그분은 또 누군지.

영문을 모를 소리만 중얼거리는 놈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일단 대화는 시도해 보기로 했다.

“너도 틈의 주인인가?”

“맞아. 비관자, 두 번째 틈의 주인, 러셀이야.”

“두 번째라. 그럼, 첫 번째. 왜 틈의 주인들만 나오는 거지?”

헤르창, 오릭, 그리고 눈앞의 러셀까지.

서쪽에서 만난 마족은 전부 틈의 주인이었다.

처음에는 틈이라는 공간이 마계에 비해 지상으로 빠져나오기 쉬워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틈에는 주인 이외의 마족도 체류한다.

그 틈의 주인들만 나와 따로 움직이는 건 명백히 이상했다.

“선발대니까.”

의외로 러셀은 순순히 대답했다.

선발대라는 얘기는 본대도 있다는 건가.

나는 머릿속에 그것을 기억해 뒀다.

러셀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 여기서 나는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제안? 네가 지금 나한테 제안할 상황인 것 같냐?”

“당신한테 덤비면 죽겠지. 그래도 들어는 보라고.”

러셀의 등에 달린 두 손바닥 같은 날개가 공간을 찢어 냈다.

차원 간의 벽을 찢은 것 같았는데, 저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필시 심연에 무슨 장치를 해 뒀거나, 벽에 상처를 내 뒀을 것이다.

‘저건.’

이상한 공간에 국왕, 볼프강 웨스트리아와 이안이 있었다.

어째선지 레온하트의 수호자 가면을 뒤집어쓴 이안은 전력으로 볼프강을 보호하고 있었다.

“자, 얘네가 무사하길 바라면,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인질인가. 내가 그렇게 이타적인 성격은 아닌데 말이야.”

볼프강 웨스트리아가 죽는다면 조금 곤란했다.

프레드나 엘레너는 아직 전쟁에 나서기에는 너무 어렸다.

또한, 계승 문제로 부딪치면 제국과 마찰이 있을 때 쉽게 무너질 테니까.

이안도 제자의 제자인 만큼 가급적이면 살리고 싶었다.

나는 이름 없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래도, 네가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워, 나 죽이면 저 공간 무너진다? 잘 생각해.”

“흠, 그래? 꽤 철저히 준비 했군.”

러셀은 꽤 머리가 돌아가는 마족이었다.

이길 수 없는 상성이니, 미리 준비해 둔 인질로 협상을 제의한다.

꽤 괜찮은 방법이었지만, 순순히 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됐어. 대충 하는 법은 알았으니까.”

“뭐?”

나는 러셀이 했던 것처럼, 공간을 찢었다.

여로 덕분에 한결 수월하게 균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저것들 구하고 와서, 너도 죽인다. 이게 내 결론이다.”

* * *

웨스트리아 왕국의 유일한 왕자, 프레드 웨스트리아는 수 년 전부터 줄곧 같은 꿈을 꿨다.

그는 불타고 있는 에노드에 있었다.

그 어떤 공격에도 버틸 것 같은 장벽은 무너진 지 오래였다.

왕국민들은 학살당했고, 왕성은 파괴됐다.

정신을 차려 보면, 그는 단두대 앞에 있었다.

“아바마마! 누님!”

국왕과 엘레너 웨스트리아는 이미 목이 잘려 죽었다.

구속당한 프레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제국의 병사들이 프레드를 단두대로 끌고 갔다.

“아아! 아악!”

눈물을 흘리며 몸부림 쳤지만, 병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단두대에 서게 된 프레드는 공포와 절망에 정신을 반쯤 놓았다.

목 뒤가 서늘했고, 병사들의 무감정한 눈이 두려웠다.

“집행하라.”

기사 하나가 명령을 내리기 무섭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병사가 칼날을 묶어 놓은 밧줄을 끊으려 했다.

저 밧줄을 끊는 순간, 칼날은 프레드의 목을 내리칠 것이다.

프레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멈춰라.”

그때였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프레드의 귀를 파고들었다.

한참이 지나도 칼날이 목을 자르는 느낌은 없었다.

프레드가 힘겹게 눈을 떴다.

눈앞에는, 태양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

“아, 아아…….”

“프레드 웨스트리아.”

화려한 왕관을 쓴 남자는 자비롭게도 프레드에게 손을 뻗었다.

부드럽지만 무거운 목소리에, 주변에서 울려 퍼지던 비참한 비명이 묻혔다.

어느 순간, 머리 위에 칼날이 있다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

“누, 누구십니까?”

“알고 있을 텐데.”

왕관을 쓴 남자의 갑옷에는, 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이 새겨져 있었다.

팔베르크 제국의 문양이었다.

그곳에서 왕관을 쓰고 있는 자는 하나뿐.

황제, 라그힐 팔베르크였다.

“선택할 기회를 주지.”

“선택할 기회……?”

“그래. 망국의 왕자로써 죽음을 맞이할 것이냐.”

라그힐 팔베르크는 프레드의 머리 위에 무언가를 올렸다.

예상치 못한 무게감이 있는 그것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왕관이었다.

웨스트리아 왕국의 국왕만이 쓸 수 있는 물건.

“아니면, 속국의 왕으로서 삶을 이어 갈 것이냐.”

* * *

“엘레너 웨스트리아 왕녀님을 뵙습니다!”

웨스트리아 왕성 정문.

대낮에 돌연 엘레너 웨스트리아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이방인인 줄 알았더니, 로브를 젖히자 익숙한 얼굴이 드러난 것이다.

보통 왕족이 올 때는 사전에 통보가 있기 마련이라, 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크게 당황했다.

일단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아바마마…… 국왕 폐하는 어디 계시죠?”

“예? 국왕 폐하 말씀이십니까?”

“아니, 아닙니다. 제가 직접 찾아야겠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아니요. 멈추십시오.”

왕성에서 한 청년이 기사들을 대동하고 걸어 나왔다.

무릎을 꿇고 있던 병사들은 청년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프레드 웨스트리아 왕자님을 뵙습니다!”

프레드 웨스트리아.

제국의 문제로 엘레너와 대립하고 있는 왕족이 우연찮게 등장했다.

병사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정작 프레드는 병사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엘레너에게 다가갔다.

“누님, 어찌 그리 급하게 아바마마를 찾으십니까?”

“긴급한 상황입니다. 길을 비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프레드가 대동한 기사들은 마치 길을 막아서듯 일렬로 선 상태였다.

두 왕족의 시선이 교차했다.

엘레너는 초조한 기색인데, 반면 프레드는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뒤에 계신 분들은 누구신지요? 소개 부탁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럴 여유가 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서운하군요. 멜릭?”

프레드의 옆에 있던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엘레너는 인상을 찡그렸다.

기사, 멜릭은 꾸벅 예를 표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엘레너 웨스트리아 왕녀님.”

“엘레너 언니!”

다급한 리옐의 부름에, 엘레너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풀썩!

멜릭을 중심으로, 주변에 있던 모든 인물이 쓰러졌다.

눈을 돌린 엘레너와 단 일행을 제외하고 말이다.

“왕녀님! 물러서십시오! 적입니다!”

단과 무연이 동시에 검을 뽑았다.

마리나가 급히 엘레너를 뒤로 끌어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프레드 웨스트리아를 포함해, 기사들과 병사들도 모두 쓰러졌다.

자세히 보니, 모두 잠들어 있었다.

단 일행을 제외하고 서 있는 인물은 멜릭 혼자였다.

“저자가 무슨 짓을 했다는 겁니다.”

“아하, 어떻게 멀쩡한가 했더니.”

멜릭은 리옐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설마 어린 신이 불완전한 신과 같이 다닐 줄은 몰랐군요.”

이어서 마리나에게 시선을 돌린다.

“심지어 대리인까지 두고 있고…….”

“지금!”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단이 소리쳤다.

동시에, 무연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단은 엘레너와 루터를 보호하고, 무연이 전방을 맡은 것이다.

스릉!

무연의 검이 멜릭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검은 허상을 벤 듯 그대로 멜릭을 통과했다.

“어?”

“말하는 중에 공격하다니. 인간들은 매너를…….”

“도련님께서 그런 거 지키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멜릭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마리나가 쏜 화살이 미간을 관통했기 때문이다.

신성력이 담긴 화살은 확실히 효과적이었는지, 멜릭의 모습이 사라졌다.

단은 인상을 찡그리며 주위를 살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본체가 아닌 것 같습니다.”

루터의 의견에 리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잠들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엘레너는 화색이 됐다가, 순식간에 표정이 굳었다.

“자, 자고 있어?”

그들은 모두 눈을 감고 잠든 상태였다.

문제는, 각각 무기를 잡고 단 일행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프레드 웨스트리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둘로 나뉘겠습니다.”

루터가 재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저들에게 발을 묶여 있을 시간은 없었다.

애초에 프레드와 멜릭은 엘레너를 조금이라도 더 잡아 두려는 속셈 같았으니까.

“무연 님, 마리나 님. 엘레너 왕녀님과 함께 왕성으로 진입하십시오.”

“세 분께서는?”

“저희는 여기서 이자들을 막겠습니다.”

루터는 땅에 떨어져 있던 검 한 자루를 주웠다.

상황이 급박한 만큼,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엘레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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