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96/134)

5

기만자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여관 내부를 살폈다.

한 남자를 제압한 무연과, 그를 둘러싼 웨스트리아의 병사들.

사제로 보이는 이들이 그들을 만류하고 있었다.

“무연. 이것들 뭐냐?”

“오해가 있었다.”

무연은 제압하고 있던 남자를 풀어 줬다.

남자는 재빨리 검을 들고 일어나, 병사들과 합류했다.

나와 루터의 복장을 살피더니, 살짝 굽히고 나온다.

“일행이십니까?”

“그래. 뭐 문제 있나?”

“이자가 팔베르크 제국 소속은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왜? 얼굴을 가려서?”

“그렇습니다. 얼굴을 보여 주지 않고, 말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무연은 동대륙인이기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꺼렸다.

동대륙인은 보통 마녀와 비슷한 취급을 받으니까.

편견이지만, 배움이 부족한 평민들은 모를 수도 있다.

반응을 보건데 한 번 된통 당한 적이 있겠지.

“오해가 있었군. 이자는 내가 고용한 용병이다. 출신은 레온하트 왕국이 확실하다.”

“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고, 말은 왜 어눌한지 설명해 줄 수 있으시겠습니까?”

“간단하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건 단순히 트라우마 때문이다.”

나는 무연에게 다가갔다.

샌딩으로 내 생각을 전한 뒤, 헬름을 잡았다.

무연의 헬름을 위로 올려 벗겼다.

-너 때문에 귀찮아지기 싫으니, 협조해라.

“응?”

“생각보다 멀쩡하군.”

확실히 특징 잡힌 레온하트 왕국 출신의 인물.

환상 마법을 통해 얼굴을 바꿔 놨다.

남자가 인상을 찡그리더니, 다가왔다.

“만져 봐도 괜찮겠습니까? 환상 마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입니다.”

“마음대로 해.”

남자는 조심스럽게 무연에게 다가갔다.

무연은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지만, 내 환상 마법으로 가려져 표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남자는 무연의 볼에 손을 올렸다.

평범한 일루전(Illusion)은 단순히 만져 보는 것으로 파훼할 수 있다.

허공에 그림을 띄워 놓은 격이었기에, 만져지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의 대처는 확실히 적절했지만.

“음, 진짜군.”

확실히 촉감이 느껴졌는지, 남자는 납득했다.

전에야 서클이 낮아 인식 방해나 일루전 정도가 한계였겠지만, 7서클 정도면 환상 마법도 꽤 정교하게 만들 수 있다.

외관을 변경하는 마계 마법, 트랜스폼(Transform)을 기초로 했다.

일루전(Illusion), 센스 오브 터치(Sense of Touch), 페이크 페이스(Fake Face) 등.

열 종류 가까운 마법을 추가로 사용했으니, 마탑주도 주의 깊게 안 보면 속을 것이다.

“그렇다면, 말이 어눌한 이유는 뭡니까?”

“배를 타다가 큰 사고가 난 뒤, 머리를 다친 뒤로 그러더군. 여기, 상처 보이지?”

나는 무연의 머리카락을 들췄다.

실제로는 상처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으나, 이미 가짜 상처는 만들어 둔 상태다.

남자는 더 트집 잡을 것이 없는지 입술만 달싹였다.

“……송구합니다. 현재 시국이 시국인지라.”

“이해하네. 하지만 불편해진 건 사실이니, 자리를 피해 줄 수 있겠나?”

“기꺼이 그러지요. 실례했습니다.”

* * *

“도련님께서 이토록 평화롭게 일을 해결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뒤집어엎었어야 했냐?”

“그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러시지 않습니까.”

“비겁하게 진실을 들이밀다니. 쯧.”

여관 1층.

오자마자 몸통박치기를 하는 리옐을 안아 들고,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왔다.

단과 마리나는 이제 나와 식사하는 것도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루터 레온하트는 자극적인 음식이 새로운지, 눈을 빛냈다.

맞은편에 무연만 조금 불안한 기색으로 있었다.

“이건 뭐지? 인피면구인가?”

평소와 달리 헬름을 안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얼굴을 만져 보다가 깜짝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또 올라가서 식사를 하려고 하길래, 내가 마법을 유지해 주고 있었다.

마리나가 내 쪽으로 눈을 돌렸다.

“도련님, 인피면구가 뭔가요?”

“인피면구(人皮面具)? 사람 얼굴이랑 똑같은 가면. 근데 얘한테 물어보지. 왜 날 보냐?”

“아? 도련님께선 거의 모르는 게 없으시니까, 저도 모르게 그만.”

원래는 사람 얼굴을 뜯어서 만드는 건데, 리옐 정서 교육에 안 좋을 것 같아 생략했다.

무연은 조금 익숙해진 듯 식기에 얼굴을 비추며 표정을 바꿔 보고 있었다.

“그래서, 넌 왜 여기 있어? 우연인가?”

“난 너희들이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현지인의 조언에 따랐을 뿐이다.”

“여기가 괜찮은 여관은 맞지. 이안은?”

“황탑에 갔다.”

나는 솔직히, 무연이 눈에 밟혔다.

동대륙에서 건너온 점도 그랬지만, 특히 신을 찾고 있다는 것이 걸렸다.

그 신이 어떤 신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나는 아닐 거고.’

무연은 녹림왕 유수와 같은 시기에 서대륙으로 왔다고 했다.

즉, 내가 반의 반쪽이지만 신이 되기 전이라는 뜻이다.

자연스럽게 무연이 찾는 신 후보에서 나는 제외된다.

‘리옐일 가능성이 솔직히 높다고 보는데.’

리에이트의 경우 하늘에 사는 신인지라, 직접적으로 관여하기가 힘들다.

더군다나 교국이 내전 중인 지금, 동대륙에 신경을 쓸 겨를은 없을 것이다.

이미 땅에 뿌리를 내린 세계수는 동대륙으로 건너갈 수 없다.

애초에 세계수가 그쪽으로 건너가면 서대륙이 망한다.

자연스럽게, 세계수의 후계자인 리옐이 남지만.

‘너무 일러.’

리옐은 아직 뿌리를 내릴 시기가 아니다.

외관상으로 볼 때도 아직 유아기에 가깝다.

신인 만큼 성장 속도는 예측할 수 없었으나, 만약 뿌리 내릴 때라면 세계수가 언질을 줬을 것이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답하겠다.”

“서쪽에서 신을 찾으라고 한 것은 누구지?”

“무림맹에 소속된 고명한 무녀가 있다. 그녀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무녀라면, 아마 사제보다는 신의 대리인과 비슷한 개념일 것이다.

여러 의문점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대륙에 손을 뻗칠 생각은 없었다.

리옐의 거주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겠지만 말이다.

“다행히, 단서를 찾았다.”

“단서?”

“이곳에 신이 있다고 하더군.”

“누가?”

“아까 전에 있었던 목오의 사제들이 그랬다.”

목오의 사제들은 내가, 정확히는 신성이 에노드 내부로 들어온 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

단과 마리나, 리옐은 짐작 가는 부분이 있다는 듯 내 얼굴을 빤히 봤다.

나는 솔직히 의문스러웠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목오지, 내가 아니다.

-신성.

-부름?

-지금 넌 목오의 신성이냐?

-아님.

신성은 자신이 ‘지그문트 마이어의 신성’이라 주장했다.

내 힘인 만큼, 이는 나도 자각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의문점이 생겼다.

-근데 걔네들은 왜 너한테 신성력을 받지?

-모름!

당당하기도 하다.

모른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설마 힘을 나눠 주거나 그러는 건 아니지?

-맞음.

-그걸 왜 나눠 줘. 아깝게.

-쪼잔.

-쪼잔 하고 자시고, 얼마나 나눠 줬는데?

-먼지.

-그 정도면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네.

신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강대하다.

내가 반신화하더라도, 신성의 힘은 절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제들이 거기서 받아 쓰는 신성력은, 정말 먼지 정도일지도 모른다.

“사제들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신성력이 사라졌다가 되돌아왔다고 하더군.”

“그래?”

루터 레온하트와 엘레너 왕녀가 의견을 조율하는 동안 할 것도 없었는데, 조금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 * *

웨스트리아 왕성, 긴 식탁에는 화려한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엘레너는 가만히 눈치를 살폈다.

왕가의 인물들이 모인 식탁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마, 나랑 프레드 때문이겠지.’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상황에, 두 명이 의견을 대립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둘이 인망이 두터운 왕녀와 왕세자 책봉이 예정되어 있었던 왕자였다.

일각에서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프레드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프레드 의견도 충분히 일리가 있으니.’

엘레너는 국왕이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웨스트리아 왕국이 팔베르크 제국과 싸워 이길 승산은 없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프레드의 말이 옳았다.

‘명분 때문에 도움을 바라기도 어려워.’

팔베르크 제국이 내세운 명분은 정복 전쟁을 정당화시켰다.

황탑주가 델 로안을 살해했다는 것과, 그에 대한 증거 자료들은 너무 명료했다.

설령 그것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이미 웨스트리아는 코너에 몰린 상황이었다.

황제의 수는 너무 교묘했다.

‘레온하트에서 손을 내밀었다고 해도…….’

선뜻 믿기 어려울뿐더러, 불리한 입장인 건 사실이다.

루터 레온하트가 언급했던 연합에 일원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최상의 수를 선택하더라도,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엘레너.”

“네. 아바마마.”

“무얼 그리 오래 생각하느냐?”

엘레너는 문득 자신이 식기를 멈추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인지, 음식은 통 입에 들어오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프레드가 엘레너를 주시했다.

“아니요. 입맛이 없어서요.”

“팔베르크 제국의 문제라면, 아직 상의할 여지가 있으니 걱정 말거라.”

“감사합니다. 하나, 그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다행이구나.”

엘레너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루터 레온하트의 제안은 지나치게 매력적이었다.

렘센에서 이미 한 번 호의를 보였던 만큼, 사실일 가능성도 높았다.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최종적인 결정권은 국왕, 볼프강에게 있다.

문제는 볼프강의 성향이었다.

‘아바마마께서 전쟁에 동의하실까?’

만약 루터 레온하트의 손을 잡게 된다면,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서 한층 더 발전된다.

제국과 전면전으로까지 흘러갈 수 있다.

인자하고 평화주의적인 볼프강이 이에 동의할지 의문이었다.

‘여기서는 말씀드릴 수 없으니…….’

엘레너의 동생이자, 첫째 왕자 프레드는 명백히 엘레너를 견제하고 있었다.

렘센에 다녀오기 전부터 그랬다.

프레드는 평판이 좋은 엘레너를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꽤 친했는데 말이다.

프레드가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께선 무엇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앞서 말했다시피, 실종된 황탑주를 찾는 것이 먼저겠지. 전력에 보탬이 될 테니.”

볼프강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황탑주는 도통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찾기만 한다면, 상황은 급변할 것이다.

돌연,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실례하겠습니다, 폐하. 급하게 전해야 할 사항이 있어 보고드립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기사가 무릎을 꿇었다.

이곳에 있는 건 모두 왕가의 인물들이었다.

거리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볼프강이 명했다.

“말하라.”

“예, 폐하. 약 5분 전. 남문에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이라? 무슨 일 말이더냐?”

기사는 고개를 숙였다.

“황탑주께서 돌아오셨습니다.”

* * *

목오의 신전, 예배당.

거북의 신상을 앞에 둔 장소에는 두 명의 사제가 마주 앉아 있었다.

늙은 대사제 오베이어와, 술 취한 남성과 다퉜던 하만이었다.

오베이어는 목오의 사제 중 유일무이하게 신성력을 되찾았다.

하지만 다른 사제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돌연 희소식이 들려왔다.

“신성력이 돌아왔다고?”

“네.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 신성력이 돌아온 사제가 생긴 것이다.

하만은 오베이어에게 신성력을 보였다.

그 빛은 사라지기 전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베이어와 동일하게 신성력이 한층 강해진 게 체감됐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 또한 느낄 수 있겠구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사제님 말씀대로, 이곳에 계십니다.”

“정말 다행이야. 목오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군.”

하만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신성력을 잃었을 때, 사제들이 느낀 비통함이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실제로 당시 사제직을 내려놓은 이들이 전체 사제 중 절반이 넘었다.

무한한 신뢰와 호의를 보이던 사람들은 사제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엘레너 왕녀의 호의가 아니었다면 신전도 진작 철거당했을 것이다.

“저, 대사제님.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만은 한참 주저했다.

자신이 목격한 것이 진실인지, 아니면 신앙이 빚어낸 환상인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 중대한 사항이었다.

오베이어는 끈기 있게 기다렸고, 하만은 이내 입술을 달싹였다.

“신을 뵌 것 같습니다.”

* * *

세계수의 성역, 하늘 정원.

나와 리옐은 정원지기의 안내에 따라 세계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원에 워낙 진귀한 식물이 많았기에, 눈이 심심할 일은 없었다.

꽃 한 송이가 땅에서 튀어나오더니 책상 위로 올라와 탭댄스를 추는데 심심할 수가 없다.

리옐을 품에 안고 맞은편에 앉은 정원지기가 질문했다.

-서쪽으로 가셨다 들었는데, 어찌 오신 겁니까?

-저번에 세계수가 내 입속에 지 열매를 넣더군. 그게 매개가 됐나 봐.

나는 성역에 올 의사가 없었다.

잠깐 졸았는데 눈 뜨고 보니 여기였다.

어째선지 리옐도 함께 온 상태였다.

-단란한 시간을 자주 보내야 화목해져!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리옐 님.

-에헴!

리옐을 무릎에 둔 정원지기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보였다.

나는 말없이 정원지기가 내온 허브티를 마셨다.

어차피 서쪽의 마족 건에 대해서 물어볼 것도 있었다.

그리고 동대륙에 대해서도 말이다.

-뭐 하는데 이렇게 안 와?

-어머니께서는 최근 부쩍 바쁘십니다.

-하긴. 바쁘긴 하겠다만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서대륙을 지탱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른다.

지상의 신학은 신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지 않았으니.

어쨌든 간에 넷이서 나누고 있을 만큼 버거운 일을 홀로 처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하는 아내. 멋있지 않아?

-엄마!

-딸!

마침 세계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힘을 모두 회복했는지, 외관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조금 아쉬운 듯한 정원지기의 무릎에서 내려온 리옐이 세계수에게 안겼다.

세계수는 처음에 그랬듯이 리옐을 안아 들고 볼을 마구 문질렀다.

-우리 딸은 왜 점점 더 귀여워질까?

-엄마 닮아서!

-말도 예쁘게 해!

세계수는 리옐을 꽉 끌어안고 자리에 앉았다.

정원지기는 차를 가져오겠다며 물러났다.

-그래서, 왜 불렀냐?

-가족이 이유가 있어야 모여?

-맞아!

리옐은 이 문제에 있어서는 대체로 세계수의 편이었다.

비겁하게 둘이서 하나를 몰아붙이다니.

리옐에게는 하멜에서의 기록도 있기 때문에,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세계수는 이겼다는 듯 빙글빙글 웃었다.

-서쪽은 어때?

-내가 서쪽에 간 건 어떻게 알고 있어?

-우리 딸이 거기 있는데, 어떻게 몰라? 설마 혼자 보내진 않았을 거 아니야?

-쯧. 개판이더군. 차원 간 간격이 이상해진 것 같아. 마족이 기어 나와 있던데.

-그래? 설마 귀족급은 아닐 테고.

-틈의 주인들이었으니 준귀족급이지.

-몇 마리?

-두 마리. 다 잡긴 했는데, 더 있을 수도 있어.

세계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를 계산하는 듯, 손가락으로 리옐의 머리를 톡톡 두드린다.

-아무리 내 힘이 닿지 않고 있어도, 목오의 신성이 사라지고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맞음!

여로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신성이 끼어들었다.

신성은 내 허브티 찻잔 옆에 풀썩 주저앉고, 팔짱을 꼈다.

-이상!

-초신성 때 여파를 줄이기 위해서 힘을 억제했더라도, 어느 정도 잔존하고 있을 텐데.

-소환?

-문제는 누가 어떻게 알고 소환했는지야. 서쪽에 내 힘이 미치지 않는다는 걸 누가 알고?

나는 문득 오릭에게서 들었던 말을 기억했다.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자겠지.

-나를 인식하는 것과, 내 힘이 닿는 범위를 아는 건 달라.

-목오의 죽음은 이미 알려졌어. 서쪽은 원래부터 취약한 지역이었으니까.

세계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틈의 주인 중 계급이 조금 높은 놈이 나를 알아 봤어. 불완전한 신이라더군.

-그건…… 바라와 이그룬타가 죽었다는 것에 더해서, 신이 둘 출현했다는 것도 안다는 건가?

-리옐에 대해서는 알려졌을 거야. 몇 번 노린 적 있으니까.

리옐은 이미 그 존재가 알려졌을 확률이 높았다.

물론 정보를 아는 자가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불사의 교단에 관련됐다면 이에 대해 알 확률이 높았다.

-내가 반의반이지만 신이 된 건 퀸틴에 있을 때 일이니까.

-사제들이 관련됐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세계수가 말한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자’는 둘을 뜻한다.

사제나, 신의 대리인처럼 신과 직접 관련이 된 이들.

그리고 힘이나 지식의 수준이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이들.

대표적으로 드래곤이나, 나 정도가 있다.

후자에 속하는 건 극단적으로 적었기에, 일반적으로 전자를 뜻한다.

세계수는 아리송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어느 정도 유추한 부분이 있었다.

-나는 사제로 유추하고 있는데. 확증은 없지만.

-불사의 사제들?

-걔네들은 중심축을 잃었으니 와해됐을 거다. 마족과 연관이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럼 리에이트의 사제들? 교국에 타락한 애들이 몇 있을 텐데.

-아니. 마신의 사제.

* * *

웨스트리아 왕성, 중앙 홀.

황탑주, 케인 바그너는 눈동자를 굴렸다.

네 명의 기사가 사방에서 검을 겨누고 있었다.

심지어는 황탑 출신의 왕실 마법사 또한 마법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평생을 웨스트리아 왕국을 위해 살았는데. 이런 대접이라니. 너무하는군.”

“송구합니다. 현재 탑주님께서는 너무 위험하십니다.”

그 상태는 경비병들이 순간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황색의 로브는 색이 바래 희뿌옇게 변색됐고,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산발에 가까운 푸석푸석한 머리카락과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

적어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케인 바그너.”

“국왕 폐하!”

얼마 지나지 않아, 웨스트리아 왕국의 국왕이 행차했다.

케인 바그너는 곧장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그는 황탑주인 동시에, 웨스트리아 왕국의 공작이기도 했다.

“케인 바그너, 뒤늦게 귀환하였습니다!”

국왕은 라만 바그너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온갖 역경을 헤쳐 나온 듯, 얼굴에는 전에 없던 긴 흉터가 생긴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케인 바그너가 웨스트리아 왕국을 떠난 것은 약 1년 전.

공교롭게도 대마법사 델 로안 대공이 살해당한 시기와 겹쳤다.

케인은 왕가에 이르길 서대륙 동쪽 끝, 화이트웨일 항구를 향해 갔다고 했다.

이유인즉슨, 서대륙과 동대륙 사이에 있는 세계의 상처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저는, 델 로안 대공을 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에야 귀환한 건가?”

“습격이 있었습니다.”

“습격?”

“팔베르크 제국이었습니다.”

* * *

한참 후, 케인 바그너의 설명을 들은 국왕은 납득했다.

팔베르크 제국의 습격으로, 그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가까스로 세계의 상처 속에 숨은 덕분에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상대로, 모든 것이 팔베르크 제국의 계획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황탑주 케인 바그너는 누명을 썼을 뿐, 무고한 인물이었다.

완전히 몰입한 볼프강은 케인의 손을 잡았다.

“지금이라도 돌아와서 다행이네.”

“전력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습니다.”

“남동부 전선에 병력을 추가로 보내야겠어. 자네가 있다면 가능하지.”

볼프강은 지체할 생각이 없는지, 곧장 편지를 써서 기사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에노드의 가장 큰 전력이 돌아왔으니, 위태로운 남동부 전선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기사가 나가고, 케인 바그너는 볼프강 웨스트리아와 독대하게 됐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폐하, 프레드 웨스트리아 왕자님이십니다.”

“프레드가? 들라 하라.”

왕자, 프레드 웨스트리아가 중앙 홀로 걸어 들어왔다.

조금 몽롱한 듯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는 모습이었다.

볼프강은 이상함을 감지했다.

“프레드. 무슨 일이더냐?”

“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볼프강은 뜬금없는 프레드의 말에 당황했다.

갑자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느니, 변수가 개입했다느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게 무력으로 밀어 버리자니까.”

“위험을 동반할 겁니다.”

“떨거지들 앞세우면 되잖아.”

프레드의 말에 대답한 것은 황탑주였다.

국왕, 볼프강 웨스트리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바그너 경?”

“아, 폐하. 멍청하기도 하시지. 혀 좀 굴렸다고 속는 꼴이란. 상황이 파악 안 되십니까?”

“뭐라?”

“멜릭. 대역은?”

“준비해 왔습니다.”

프레드가 손뼉을 치자, 그 옆에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볼프강 웨스트리아와 외관과 복장까지 정확히 일치했다.

도플갱어.

볼프강이 벌떡 일어났다.

“어허.”

황탑주는 볼프강 웨스트리아에게 손을 뻗었다.

볼프강은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탱그랑.

남은 건 바닥에 떨어진 왕관뿐이었다.

황탑주는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생각보다 더 멍청하군. 인간들은 외관에 너무 신경을 쓴다니까.”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동태를 좀 지켜봐야지. 걸리지만 않으면 되니, 평소대로 행동해.”

프레드 웨스트리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홀을 나갔다.

황탑주는 왕관을 집어 들었다.

“황탑주를 아직도 살려 뒀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국왕이란 작자가 이렇게 물러 터져서야.”

혀를 찬 황탑주는 국왕으로 변한 도플갱어에게 턱짓했다.

도플갱어는 왕좌로 뚜벅뚜벅 걸어가, 앉았다.

“목소리는?”

“문제없습니다.”

“좋아. 그럼, 문제 만들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명 받들겠습니다. 러셀 님.”

* * *

로안 아카데미, 원장실.

발레리아 로안은 책상에 누워 손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공중에서 수십에 달하는 서류와 펜들이 움직였다.

옆에 놓여 있던 과자를 집어먹으며 눈을 끔뻑였다.

그 시선은 책상 한쪽에 소중하게 놓여 있는 통신구로 향했다.

“아, 나도 스승님 따라 다니고 싶다. 꼬맹이 너무 부럽다.”

지그문트를 따라갔더라면, 분명 이렇게 심심할 일은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용의 산맥에서도 발레리아는 나설 기회가 없었다.

퀸틴에서는 봉인에 일조한 정도가 전부지만, 정작 중요할 때는 아무것도 못했다.

“일 끝내고 뭐 하지. 내가 이러려고 탑주 했나.”

발레리아는 잠깐 자리를 비울 때마다 어마무시한 양의 업무를 소화해야 했다.

이는 적탑과 로안 아카데미에 대한 모든 사항을 검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인적인 업무량이 아닐 수 없었지만, 발레리아는 기준이 조금 이상했다.

표준이 지그문트 마이어, 그러니까 델 로안으로 맞춰져 있기 때문이었다.

우웅.

그때, 원장실 내부의 마나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발레리아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를 정리했다.

평소에는 크라우드 컨트롤(Crowd Control)을 통해 공간 이동을 막고 있지만, 지그문트가 웨스트리아 왕국에서 일을 마치고 텔레포트 할 공간을 이곳으로 상정해 뒀다.

하여 지금은 누구든지 원장실 내부로 텔레포트할 수 있었다.

‘벌써 오셨다고?’

발레리아는 혼날까 싶어 후다닥 서류를 정리하고, 책상에서 내려가 의자에 앉았다.

머리카락과 옷매무새까지 완벽하게 가다듬었을 때, 캐스팅이 완성됐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두 남자였다.

“적탑주님?”

“아이 씨, 뭐야. 파울?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얼떨떨한 눈의 파울 레드라인.

그 옆에는 흑발의 남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동대륙인인가 싶었는데, 분위기가 낯설지 않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발레리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벨수스?”

“리아, 오랜만이네.”

페러시트의 변종, 살아 있는 갑옷 실험체 17호에게 정신을 장악 당했던 블랙 드래곤.

현재는 프라우드의 악룡이라고 불리는 벨수스 블랙이었다.

벨수스는 발레리아를 보자마자 화색이 됐다.

발레리아가 책상을 박차고 벨수스에게 뛰어들었다.

“야, 이 개자식아! 스승님인 줄 알았잖아!”

“커헉!”

깔끔한 동작으로 두 발을 모은 드롭킥이 날아왔다.

발레리아의 드롭킥을 정통으로 맞은 벨수스는 뒤로 날아갔다.

“잠시 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가만히 있다간 말려들 것이 분명하다고 예감한 파울은 눈치 빠르게 제 집으로 돌아갔다.

로안 아카데미의 원장실에는 발레리아 로안과 벨수스 블랙 둘만이 남았다.

“너는 도대체가 생각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드래곤이라는 놈이 뒤통수나 맞고.”

“아니…….”

“아니? 지금 스승님한테 드래곤 브레스를 쏴 놓고, 아니?”

발레리아의 잔소리를 듣던 벨수스는 입을 닫고 명치를 문질렀다.

폴리모프(Polymoph)했다지만 벨수스는 드래곤이다.

당연히 어지간한 타격으로는 느낌도 오지 않아야 정상이다.

마법사인 발레리아의 완력이 그렇게 강할 리 없었는데, 드롭킥은 진심으로 아팠다.

“그나저나 왜 아픈 거지? 너 마법사 아니냐?”

“마나를 실은 드롭킥인데. 스승님이 안 가르쳐 줬어?”

“도대체 뭘 가르치신 거지……?”

“에휴, 그래서 너 뭐야. 왜 왔어.”

발레리아는 벨수스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벨수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어머니께서 가라 하셔서.”

“린시스 님이? 스승님께 사죄하래?”

“그것도 있고, 다른 일도 있고.”

“다른 일?”

벨수스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발레리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벨수스는 웃어넘기려다가, 결국 멱살이 잡혔다.

멱살이 잡힌 벨수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드래곤 피어를 뿌렸다.

“이거 놓지 못할까.”

“뭐?”

“보자보자 하니 더 이상은 못 참겠군. 나는 드래곤이다. 발레리아 로안. 아직도 내가 너한테 맞고 살던 그런 애로 보이는 건가?”

“응.”

“어? 이게 아닌데.”

소심한 반항은 실패로 끝났고, 벨수스는 결국 몇 대 더 맞았다.

거의 장난식이라고는 하나, 아프긴 정말 아팠다.

발레리아는 혀를 차며 벨수스를 놓아줬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으면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되지.”

“알고 있으면 안 때려도 되는 거 아니냐?”

“그것보다, 왜 여기로 왔어? 지금 스승님 여기 안 계신데.”

“논의할 게 조금 있어서.”

“뭔데?”

“나, 적탑 소속 마법사 좀 시켜 주라.”

* * *

레드라인가의 저택.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은 몹시 당황했다.

레온하트 왕국을 떠났던 파울 레드라인이 돌아왔다.

이는 경사였으나, 뒤에 딸려 온 인물이 둘 더 있었다.

“안녕하세요, 레드라인 후작님.”

“적탑주. 간만이오.”

먼저 적탑주, 발레리아 로안.

발레리아와는 지그문트 마이어의 일로 친분이 생겨,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제 아들이 어떻게 발레리아와 알게 됐는지는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 지그문트 마이어가 연결 고리였을 것이다.

“한데, 이분께서는 누구신지?”

“아, 이번에 적탑에 들어온 마법사예요. 벨수스, 뭐 해?”

“왜 때……리십니까. 큼, 안녕하십니까. 벨수스라고 합니다.”

요하네스는 벨수스와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깔끔한 예법을 보아 귀족 출신인 것 같았으나, 성은 없었다.

요하네스는 그를 파문당한 귀족 출신 마법사로 추정했다.

“어쩐 일로 오셨소?”

“정말 외람된 말씀이지만, 신세 좀 질 수 있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잠깐 머무르는 건 어렵지 않소. 한데, 왜 적탑이나 아카데미로 가지 않고.”

벨수스는 푹 눌러쓰고 있던 로브를 뒤로 젖혔다.

요하네스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드러났다.

“……동대륙인?”

“예. 지금은 가명을 쓰고 있지만, 전 동대륙 출신입니다.”

“레드라인 후작님 저택에는 동대륙인이 머물렀다고 얼핏 들어서요.”

“잠깐 머무르긴 했는데…….”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군요. 그에 대한 얘기도 조금 듣고 싶고요. 아. 평소에는 마법으로 염색하고 지내겠습니다.”

“적탑과 아카데미는 왕래가 많아서요. 실례가 안 된다면 잠깐 머무르게 해 줄 수 있으실까요?”

벨수스와 적탑주의 부탁에, 요하네스 후작은 흔쾌히 수락했다.

적탑주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건 생각보다 큰 메리트가 있었다.

더군다나 파울 레드라인과 연도 있어 보였다.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운 파울인 만큼, 믿어 볼 만할 것 같았다.

“좋소. 방을 내어주지.”

“정말 감사합니다. 사례는 꼭 하겠습니다.”

“사례라면 괜찮소.”

“아니요. 받으시는 편이 저도 마음이 편하고 좋습니다.”

“맞아요. 무상이면 얘도 마음이 불편할 거예요. 맞죠? 파울.”

“아버지.”

적탑주와 벨수스는 마치 사례가 목적이라는 것처럼 이를 강조했다.

파울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은 일단 수긍했다.

“마음대로 하시오.”

* * *

황탑.

이안은 황탑의 마법사를 따라 탑을 안내 받고 있었다.

황탑주가 부재중이었기에, 예의상 구경이라도 시켜 주는 모양이었다.

“여기가 연구실입니다.”

적탑과 비교하면 시설이 상당히 낙후되어 있었다.

이는 적탑이 여러 차례 신축되었기 때문이다.

발레리아의 마법으로 한 번, 요르문간드의 출현으로 한 번.

근 1년 사이에 무려 두 번씩이나 무너진 것을 감안하면 그럴 만도 했다.

“저, 황탑주님께서는 부재중이라고 하셨지요?”

“예. 이런 말씀드리긴 뭐하지만, 1년 반 전부터 자리를 비우신 상태십니다.”

“어떤 연유로 그렇게 장기간 자리를 비우신 겁니까?”

“연구 목적이라고 하더군요.”

마법사는 자세한 이유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황탑주는 현재 대마법사 살해 용의를 받고 있는 상태다.

대마법사의 제자가 탑주로 있는 적탑의 마법사에게 정보를 가르쳐 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발레리아 로안이 대마법사 델 로안에게 딸과 같은 존재라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런 이안 님께서는 적탑주님의 명으로 황탑을 찾으셨다고 하셨죠?”

“예.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황탑주님을 뵈러 왔습니다.”

“적탑에 어지간히 인재가 없나 보군요.”

“네?”

이안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안은 황탑에 자신이 3서클 마법사라는 것을 밝혔다.

마법사에게 마법사로서 자신을 소개할 때는 서클을 밝히는 것이 예의다.

이는 자신의 전력을 알리며 적의가 없다고 표현하는 것이라 배웠다.

그런데, 황탑의 마법사들은 이안을 영 탐탁지 않아 하며 견제했다.

지금도 은근히 무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끙. 참자.’

정식으로 적탑에 소속된 만큼 경거망동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잘못 행동하면 적탑에 위상에 먹칠하는 꼴이다.

물론 발레리아의 성격을 생각하면, 에라 모르겠다 엎으라고 했겠지만.

이안에게는 그럴 만한 힘도 배포도 없었다.

“……!”

밑층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탑의 1층은 접수를 비롯한 여러 업무를 보기 때문에 항상 떠들썩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위층에서 고위 마법사로 보이는 늙은 마법사 하나가 급하게 내려왔다.

이안을 안내하던 마법사가 그를 붙잡았다.

“무슨 일인데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타, 탑주님께서 돌아오셨네!”

안내를 맡은 마법사가 기겁을 했다.

“시, 실례. 저도 내려가 봐야 될 것 같습니다.”

“같이 가도 괜찮겠습니까?”

마법사는 대답도 않고 1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이안은 손바닥 크기의 작은 함을 꺼냈다.

다행히 따로 보관하고 있었기에 그리핀에게 빼앗기지 않은 물건이었다.

“큼.”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작은 함에서 무언가를 꺼내 썼다.

안경이었다.

‘보기만 하고 인파에 섞여 빠져나가자.’

이안은 심호흡을 했다.

적탑에는 분명 자신보다 더 나은 마법사도 많았다.

하지만 적탑주는 마나 서클이 반대로 형성된 이안이기에 할 수 있는 임무라고 했다.

적탑에서 맡은 첫 임무이며, 꽤 중요해 보였기에 확실히 처리할 생각이었다.

천천히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가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황탑주님!”

“그래. 고생이 많았군.”

빛바랜 로브 차림의 노인.

황탑주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이안은 안경을 고쳐 쓰는 척하며, 마나를 불어넣었다.

적탑주에게 전해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했다.

-이거 받으렴.

-안경…… 모양의 마도구입니까?

-그래. 아쉽게도 나는 재현밖에 못하긴 했지만. 원래 스승님께서 만드신 거란다.

-대마법사 델 로안 님이요? 무슨 마법이 담겨 있길래?

-고대 마법, 아이 오브 트루스(Eye of Truth).

아이 오브 트루스는 상대의 정체를 간파하는 마법이다.

적탑에 이 마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은 이안밖에 없었다.

어설픈 재현으로 마나 서클이 반대로 돌아야 사용이 가능하게 됐다고 한다.

-만약 마법이 발동했는데 똑같으면, 회의장에서 보자고 전해 주렴.

-알겠습니다.

-만약…… 황탑주가 황탑주가 아니라면, 즉각 빠져나와야 한다.

-황탑주가 황탑주가 아니라니요?

마나를 불어넣은 안경은 진실을 비췄다.

발레리아가 일러준 사용법대로, 이안은 황탑주를 응시했다.

‘똑같잖아?’

황탑주는 그대로였고, 황탑의 마법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이상이 없자 마법을 풀고 다가가려는데, 돌연 그 모습이 기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억.”

화들짝 놀란 이안이 숨을 들이쉬며 안경을 위로 올렸다.

황탑주가 감정이 빠져나간 듯한 눈동자로 이안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