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95/134)

4

“지형적 이점을 활용한다면 몇 달은 버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오래 시간을 끈다고 해도 승산이 없습니다.”

“경께서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 겁니까?”

“아무도 피를 흘리지 않는 항복을 고려하는 것도…….”

“그 무슨 망발입니까! 지금 웨스트리아 왕국을 팔베르크 제국에게 바치라는 겁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상대는 팔베르크 제국입니다. 승산 없는 싸움이란 말입니다.”

대마법사 델 로안의 장례식에서 있었던 팔베르크의 선전포고 이후.

웨스트리아 왕성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늙은 국왕, 볼프강 웨스트리아는 높아지는 중앙 귀족들의 언성에 머리를 짚었다.

“폐하! 이 비겁한 자들의 말은 들을 가치도 없다 사료되옵니다!”

“그렇다면 승리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보시란 말입니다.”

중앙 귀족은 크게 두 파벌로 나뉘었다.

하나는 팔베르크 제국에게 순순히 투항하고, 안위를 보장 받자고 말하는 온건파였다.

고위 관료로 이루어진 문가(文家)의 귀족들이 주를 이뤘다.

그들은 제국의 압도적인 전력에 압도당한 상태였다.

다른 국가였다면 그들도 이러지 않았겠지만, 팔베르크 제국은 다르다.

크기만 수십 배가량 차이가 난다.

“거북이 어찌 용을 이긴단 말입니까. 아무리 등껍질이 단단하다고 한들, 으스러질 것입니다.”

“현 황제는 아직 큰 전쟁에 참여한 경험이 없습니다. 승산은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인구수만 수십 배가량 차이가 난단 말입니다.”

“저희 측에는 왕국의 방패 휘하 일당백의 전력들이 있습니다.”

“제국 측에는 불패의 기사가 있지요.”

“월베른 경께선 렘센 밖으로 나오지 않으십니다. 전쟁에 가담할 거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온건파에게 계속 반박하고 있는 건, 맞서 싸워야 한다는 강경파.

주로 기사들로 이루어진 무가(武家)의 귀족들이었다.

양쪽의 의견 모두 일리가 있었기에, 중간에 낀 볼프강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조용히들 하시오. 쿨럭. 짐이 경들을 싸우라고 이 자리에 부른 줄 아시오.”

볼프강 웨스트리아는 상당히 나이가 있는 편이었다.

오랜 지병으로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예전 같은 카리스마는 없다곤 하나, 국왕이다.

단 한마디에 모든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황탑주를 찾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 생각하오.”

“국왕 폐하, 황탑주께서는…….”

“실종되었지. 생사도 불분명하고.”

볼프강은 아직 확실히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상태였다.

중앙 귀족이 거의 비슷하게 절반으로 갈라진 상황.

그의 결정에 따라 왕국의 명운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수색에는 진전이 없었소. 지금 와서 황탑주를 쳐 낸들,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

전쟁의 명분이 된 황탑주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어떻게든 그를 찾는다면 전쟁을 피한다는 제3의 선택지가 열렸을 터였지만.

델 로안의 장례식 이후로 곧장 서대륙 전체를 수색했음에도, 황탑주는 찾지 못했다.

황탑에도 연락이 끊긴 상태였기에, 생사조차 불분명했다.

“너희들은 어찌 생각하느냐?”

국왕은 왕좌 바로 옆에 있는 둘에게 눈을 돌렸다.

웨스트리아 왕가의 첫째 왕자 프레드와, 첫째 왕녀 엘레너가 자리하고 있었다.

프레드야 그렇다 치고, 왕녀가 이런 자리에 참여하는 건 다소 이례적인 일이다.

엘레너 왕녀가 이곳에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렘센에서 직접 황제와 대면하고, 선전포고를 들었던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첫째 왕자, 프레드 웨스트리아였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번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프레드. 투항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냐?”

“너무 많은 피를 흘릴 것이 뻔한 싸움입니다. 투항하고 실권을 챙겨 둔 뒤, 훗날을 기약하는 편이 맞다 사료되옵니다.”

프레드는 자신의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펼쳐 놓았다.

전력상, 팔베르크와 웨스트리아는 너무 큰 차이가 났다.

일단 고개를 숙이고 속국이 되어, 국가를 존속시키는 것이 먼저다.

그 이후, 제국이 틈을 보일 때를 노리자는 이야기였다.

강경파 귀족들이 조금 위축됐고, 반대로 온건파 귀족들이 기를 폈다.

“흠, 엘레너. 네 생각은 어떻더냐?”

국왕은 분명 ‘너희들은 어찌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다.

즉, 엘레너 왕녀에게도 발언권을 준 셈이었다.

허리를 똑바로 펴고 바른 자세로 기다리던 엘레너 왕녀가 운을 뗐다.

“저는 프레드와 반대 의견이옵니다. 아바마마.”

강경파 귀족들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프레드에 비하면 실권 자체는 터무니없이 약한 엘레너 왕녀다.

그러나 왕국민들에게 평판도 좋고, 국왕에게도 어느 정도 신임을 얻고 있다.

만약 강경파의 의견을 지지한다면, 해 볼만 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맞서 싸워야 한단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저는 렘센에서 레온하트의 수호자를 만났습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라면.”

레온하트의 수호자를 모르는 귀족은 없었다.

건국제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 여러 차례 활약한 레온하트 왕국의 영웅이었다.

그 실체는 베일에 싸여 있었던 만큼, 꽤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프레드 웨스트리아가 이견을 제시했다.

“누님, 어찌 그토록 중요한 사항을 이제야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정이 있었습니다. 현재, 용의 산맥이 팔베르크 제국을 견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 덕에 대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지.”

“제국이 마족과 연관되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 드래곤을 움직인 것은 수호자입니다.”

엘레너의 말 한마디에, 귀족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이야기였다.

웨스트리아 왕국은 적국도 동맹국도 없는 나라였다.

그런데, 레온하트 왕국의 영웅이 선뜻 웨스트리아를 도왔다니.

“하지만, 엘레너 왕녀님.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어째서 웨스트리아를 돕는단 말입니까?”

“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고 사료됩니다.”

“혹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북서쪽에 위치한 웨스트리아 왕국과, 남동쪽에 레온하트 왕국.

물리적인 거리만큼이나 웨스트리아 왕국과는 크게 연관이 없는 국가였다.

그런데, 이렇게 선뜻 도움을 준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정확한 것은 없습니다. 어쩌면 수호자 개인이 움직였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요.”

“맞서 싸운다고 하신 건 레온하트 왕국이 조력한다는 전제하에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현재 레온하트 왕국은, 결코 약소국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약 1년 전부터, 레온하트 왕국의 상황은 급변했다.

이를 갈던 국왕, 파서벌 레온하트가 중앙 귀족을 싹 뒤집어엎었다.

그뿐이랴, 태초의 숲에 사는 요정족들의 국가 엘비아와 동맹까지 맺었다.

언데드가 출현하는 등 몇 번의 위기가 있었으나, 모두 별 피해 없이 넘겼다.

“레온하트 왕국은 현재 엘비아뿐만 아니라 트리옌 왕국과도 우호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군.”

“그렇습니다. 소드 마스터 어트 한넬을 저지하고 트리옌 왕가를 구한 것은 레온하트의 수호자입니다.”

“트리옌에서 구원자라는 별칭과 훈장까지 내렸다고 들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엘레너 왕녀는 엄지와 검지, 중지를 차례대로 접어 보였다.

“레온하트 왕국의 조력을 얻어 낸다면, 레온하트뿐만 아니라 엘비아와 트리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자그마치 네 개 국가의 거대한 연합 전선의 구성.

현재 궁지에 몰린 웨스트리아 왕국으로써는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시나리오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존재했다.

프레드가 이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말해 보세요. 프레드.”

“첫째, 레온하트와 접촉이 불가능합니다.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어도, 웨스트리아는 봉쇄당한 상태입니다.”

남동부 국경선을 비롯해, 제국은 그 압도적인 물량으로 웨스트리아를 둘러싸고 있었다.

사실상 지금 외부로 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동맹 협약에 참여할 만한 주요 귀족이나 왕족은 더욱 그랬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엘레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시도해 볼 가치는 있습니다.”

“둘째, 설령 접촉한다고 해도, 레온하트가 웨스트리아 왕국과 동맹을 맺을 이유는 없습니다.”

“웨스트리아는 유일하게 제국의 등에 있는 나라입니다. 위치적으로, 제국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다른 국가들 입장에서도 존속되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이유로 팔베르크를 적으로 돌린다는 리스크를 감수할 것 같진 않습니다.”

프레드의 말은 논리적이었다.

엘레너 왕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겨우 동아줄 하나를 찾아왔더니, 저건 썩은 동아줄이라고 욕하는 것 같았다.

“설령 모든 일이 잘 풀렸다고 해도, 지원군을 보내기에는 거리가 너무 멉니다.”

“하여 증원이 올 때까지 최대한 버티자는 말이었습니다.”

“황탑주도 없는 지금,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용의 산맥은 아직 제국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충분합니다.”

“용의 산맥이 언제까지 버텨 줄지도 미지수입니다. 위험 부담이 큽니다.”

“그렇다면 순순히 항복하는 건 위험 부담이 아예 없는 이야기입니까?”

“저항하는 것보다는 협상을 벌일 여지가 있겠지요.”

“그만.”

볼프강의 중재로, 둘의 치열한 설전이 멈췄다.

늙은 국왕은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미간을 꾹 눌렀다.

“너희들의 의견은 잘 알았으나, 섣불리 결정을 내리기엔 고려해야 할 문제가 너무도 많구나. 추후에 다시 논의해 보자꾸나.”

* * *

“으으윽. 담 걸린 것 같아.”

“괜찮으세요?”

“로넬, 어깨 좀 주물러 줄래?”

“그럼요.”

엘레너 왕녀의 방.

엘레너는 그녀의 측근 중 하나인 시녀, 로넬에게 어깨 마사지를 받았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두터운 둘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으허어, 좋다. 음, 방금 좀 늙은 사람 같았나?”

“전혀요. 왕녀님께서는 풀어지신 모습도 아름다우시답니다.”

“칭찬하면 뭐 나올 줄 아니? 맞아. 보너스를 주든지 해야겠어.”

시시콜콜한 농담을 나누고 있었지만, 엘레너는 매우 심란한 상태였다.

렘센에서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넘겨준 통신구 때문이었다.

레온하트 왕국의 셋째 왕자, 루터 레온하트와 연결된 물건.

“저건 왜 안 될까?”

“고장이라도 난 거 아닐까요?”

“황탑주님이라도 계셨으면 고쳐 볼 텐데…….”

동맹에 대해서는 루터 레온하트와 긍정적인 이야기를 나눴지만, 확정된 사항은 없었다.

그런데 뚝 통신이 끊겨서 먹통이니 미칠 지경이었다.

설마 레온하트 왕국에서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은 것 아닐까.

불안감이 점점 머리를 좀먹었다.

프레드의 말도 마냥 틀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통신구가 연결됐다면 어떻게든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겠지만.

“렘센에서처럼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뿅 하고 나타나 주면 얼마나 좋을까.”

“뿅.”

“꺄악!”

노곤한 얼굴로 마사지를 받던 엘레너 왕녀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고꾸라졌다.

시녀, 로넬이 왕녀를 지키듯 앞으로 나섰다.

왕녀의 방에는, 어느새 낯선 남자 둘이 서 있었다.

“뿅 하고 나타나면 좋겠다더니, 왜 저래?”

황당하다는 듯 엘레너를 내려다보는 건, 레온하트의 수호자 가면을 쓴 지그문트 마이어.

“하하…… 아무래도 정말 나타날 줄은 모르셨겠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엘레너 왕녀님. 루터 레온하트입니다.”

상황에 안 맞게도 정중하게 인사하는 소년은 셋째 왕자, 루터 레온하트였다.

* * *

엘레너 웨스트리아는 두망방이질하는 가슴을 억누르고 심호흡을 했다.

가까스로 진정하고 눈을 뜨자,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두 남자가 보였다.

조금 체격이 커진 듯한, 레온하트의 수호자.

렘센에서 만났을 때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옆에는 통신구로만 보던 레온하트 왕국의 셋째 왕자, 루터 레온하트.

이쪽은 엘레너의 생각보다 더 어렸다.

“귀한 걸음해 주신 점,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는 길에 고생 좀 했지.”

기다렸다는 듯 생색을 내는 지그문트에, 엘레너는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왕가에서 자라, 일찍 사교계에 발을 들인 엘레너로선 이해할 수 없는 직설적인 화법이었다.

“루터 레온하트 왕자님,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한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이렇게 무례하게 찾아뵙게 된 점 용서를 구해야겠지요.”

“괜찮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공식적인 방문은 어렵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요.”

짧은 통신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루터 레온하트와는 말이 잘 통했다.

격양됐던 마음이 조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지그문트가 산통을 깼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시간 없어.”

엘레너는 한순간 욱했으나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지그문트와 루터는 몰래 왕성에 들어온 상태다.

오래 머물다간 들킬 가능성도 있었고, 왕녀 또한 그리 한가한 직책은 아니다.

제한된 시간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편이 맞았다.

둘이 몰래 들어온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이야기에 앞서 한 가지 여쭙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무엇인지요?”

“루터 왕자님께서는 웨스트리아 왕국과의 협의안에 대한 결정권을 레온하트 국왕 폐하께 양도 받으셨습니까?”

이 자리에서의 이야기는 곧 국가 간의 협약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루터 레온하트는 왕이 아니며, 국가적인 문제의 결정권이 없다.

이는 엘레너도 마찬가지였지만, 엘레너는 언제라도 볼프강을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루터의 경우는 아니었다.

결정권이 없다면, 의미 없는 협의가 될 수도 있다.

“아닙니다. 물론 폐하께 최종 승인은 받아야겠지요.”

“그렇다면, 협의는 아무런 결론도 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폐하의 뜻을 모두 알아왔습니다.”

“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에 대한 답변을 받아 왔습니다.”

“그건……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네요.”

루터와 엘레너는 본격적으로 정보 교환을 시작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서로 완전히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기에, 적절한 심리전이 오고 갔다.

개인이 아닌 한 국가를 대표해서 말하고 있는 만큼, 발언에 있어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동맹을 맺는다는 가정하에, 물자의 분배를 요청할 수 있을까요?”

“지원은 가능하나, 운반이 문제입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병력의 지원도…….”

“트리옌을 관통해서 올 수 있다면 얼마나…….”

“남동부 전선이…….”

엘레너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와는 이미 통신구로 대화한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어린 나이치고 상당히 비범한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준비를 했다는 듯, 엘레너의 질문에도 술술 대답하는 모습을 보였다.

‘……응?’

열띤 토론을 하고 있던 엘레너의 눈에 지그문트 마이어가 들어왔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한가롭게 허공을 보며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지휘를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뭔가를 잡으려는 것 같기도 했다.

“저, 이야기 도중에 죄송합니다. 수호자 경,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응? 나 신경 쓰지 말고 얘기들 나눠. 듣고 있으니까.”

“하아.”

지그문트는 신성과 놀아 주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지금 끼어들어 봤자 무의미하게 시간만 낭비할 거라고 판단해, 간섭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엘레너 왕녀는 지그문트를 좋게 볼 수 없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루터는 불현듯 뭔가 떠올랐다는 듯, 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아, 왕녀님. 동맹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미루고, 이것 좀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이건 놀가드 영지의……. 마족?”

“그렇습니다. 혹시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한데, 어찌 이것을 왕자님께서 가지고 계신 겁니까?”

“에노드로 오던 도중 우연찮게 영지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럼 여기 쓰여 있는 은인이 혹시…….”

“제가 아니라 수호자 경입니다.”

엘레너는 다시 레온하트의 수호자를 봤다.

편지에는 지원 및 수사 요청과 함께 은인에 대한 극찬에 가까운 칭송도 적혀 있었다.

하긴 드래곤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긴 했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모습이었다.

‘안하무인인 것만 빼면 좋은 사람인 것 같은데.’

어쨌든 일찍이 렘센에서 궁지에 몰린 자신을 구해 준 이력이 있다.

심지어 레온하트 왕국은 웨스트리아 왕국 정반대에 있는 국가.

더군다나 마족과 조우까지 했다면, 오는 길에 고생 좀 했다는 말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았다.

“요즘 서대륙에 마족 출현이 잦다고는 하나, 웨스트리아에까지 출현할 줄은 몰랐습니다.”

“마족은 혼자서 지상에 나올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아. 차원 이동을 매개할 마법진도 필요하고, 소환술식도 필요하지.”

이야기를 듣는 시늉도 안 하던 지그문트가 대답했다.

엘레너가 질문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악의적으로 소환했다는 얘기인가요?”

“악의를 지니고 있을지는 미지수다.”

“네? 마족을 소환했는데, 악의가 없을 리가 없잖아요.”

“혼란을 야기하고자 했다면 에노드에 소환했겠지. 그런 변두리가 아니라.”

마족 하나는 때때로 엄청난 혼란을 불러오기도 한다.

헤르창은 아니었어도, 데스 나이트와 리치를 다루던 오릭이었다면, 에노드에 풀어놓기만 했어도 일이 많이 커졌을 것이다.

지그문트의 의견에 루터가 반론을 제시했다.

“위험 부담을 감수하지 않은 것 아니겠습니까?”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야. 하지만, 나는 다른 이유로 소환됐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이유라니요?”

“시기를 생각하면, 실험일 거다. 아마 배후에는 팔베르크 제국이 있을 거고.”

“실험……요?”

“내 생각에는. 이 일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불안정한 상태거든.”

“불안정한 상태라니……. 아.”

불현듯 엘레너는 목오의 사제들이 신성력을 잃어버린 것을 떠올렸다.

아마 그와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지그문트는 통신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통신구 문제도 마찬가지야.”

“통신구. 그러고 보니, 왜 갑자기 통신이 두절된 거죠?”

지그문트는 설명하라는 듯 루터에게 시선을 돌렸다.

루터는 발레리아에게 들었던 마나 가로채기에 대해 설명했다.

엘레너는 책상에 놓여 있는 통신구를 보며 납득했다.

“그것 때문이었군요. 팔베르크 제국이…….”

“아니. 처음엔 나도 제국에서 통신구의 존재를 파악하고 마나 가로채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

“네? 하지만, 마나 가로채기는 제국의 기술이라고.”

“팔베르크 제국은 맞을 거야. 하지만, 마나 가로채기를 하고 있는 놈은 제국에 없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는 목오 사막으로부터 올라왔거든.”

목오 사막은 웨스트리아 왕국 남부.

그사이에는 팔베르크 제국이 없다.

병력이라고 해도, 남동부 전선에서 웨스트리아 왕국군과 대치하고 있을 터.

그런데.

“거기서도 통신이 안 됐단 말이지.”

곡창 지대인 파이스 영지에서도, 천둥고원 너머의 놀가드 영지에서도.

조금이라도 빠른 협의를 위해서 루터 레온하트는 지속적으로 통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통신은 연결되지 않았다.

“여기서 연결되는 걸 보면, 통신구 문제가 아닌 건 확실하고. 무조건 마나 가로채긴데.”

지금 통신구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책상에 올려진 통신구에 불이 깜빡이는 모습을 보였다.

“마나 가로채기를 하고 있는 인물이 에노드 내부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남부 벽을 넘어온 직후, 우리는 한 번 더 통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렇게 신호가 오진 않았는데요. 설마…….”

지그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가로채기를 한 놈은 왕성 안에 있을 거다. 아마 높은 확률로, 마족을 소환한 놈과도 관련이 있겠지.”

* * *

웨스트리아 왕성에서 빠져나온 루터와 나는 단에게 얘기해 뒀던 여관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눈 탓에, 벌써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나와 루터는 그 무리에 섞여 들어갔다.

루터 레온하트는 기진맥진한 얼굴이었지만,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그문트 경 덕분에 일이 잘 풀릴 것 같습니다.”

“엘레너 왕녀와는 이미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야기가 오고 갔으니까. 변수는 국왕이지.”

“웨스트리아의 국왕 폐하는 온건하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게 문제야. 투쟁심이 거의 없거든. 지금은 중립을 지키고 있는 것 같지만, 굳이 성향을 따지자면 온건파 쪽에 가깝지.”

엘레너의 말에 따르면, 현재 중앙 귀족들의 의견은 반반이다.

왕가의 후계도 둘로 갈라진 상태니 중요한 건 국왕이다.

엘레너가 어떻게든 국왕의 마음을 사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며칠은 더 머물러야겠군요.”

“국가 간 협약이 그리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지는 건 바라기 어려우니.”

“용의 산맥이 언제까지 팔베르크 제국을 견제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아페 백작 관련 수사는 끝났을 거다. 다른 걸 빌미로 시간을 끌고 있는 거야.”

“시간을 끌고 있다니요?”

“친구가 하나 있거든.”

드래곤 측에서 팔베르크 제국을 조사하는 이유는 둘.

첫 번째는 아페 백작과 틈의 주인 간에 있었던 페러시트 거래.

두 번째는 블랙 드래곤 벨수스에게 있었던 일련의 사건이다.

아페 백작 같은 경우 확실한 자백을 받았기에 수사에 착수할 수 있었겠지만.

두 번째의 경우, 어째선지 벨수스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만약 제대로 기억했다면, 용의 산맥 측에서 진즉에 황성을 박살 냈을 테니까.

“수호자 경께는 궁금한 점이 참 많습니다.”

“알면 다쳐. 적당히만 알면 돼.”

“마지막에 엘레너 왕녀님께 드린 책은 뭐였습니까?”

“수제 전술 교본. 기초편.”

“전술 교본요……?”

“우방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웨스트리아는 버텨 주는 편이 좋거든.”

이야기를 하며 조금 걷다 보니, 미리 단에게 얘기해 둔 여관에 다다랐다.

아마 먼저 방을 잡아 두고 있었을 텐데.

뭔가 조금 이상했다.

구경꾼들로 보이는 이들이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루터 레온하트가 그 주위를 기웃거렸다.

“조금 소란스럽군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들어가 보면 알겠지.”

* * *

동대륙.

무연은 집의 밑바닥에 있는 작은 공간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중요한 물건을 넣어 놓던 아이 하나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창고였다.

작은 틈으로 빛이 새어 나왔다.

부모님의 그림자가 보였다.

“어떻게 이곳까지……!”

“안 돼!”

단발마와 함께 무연의 얼굴 위로 뜨거운 피가 흩뿌려졌다.

이어서 들려온 무언가를 뜯어먹는 소리에, 어린 무연은 눈을 감았다.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하기 힘들었지만, 어머니의 조언대로 숨을 참았다.

끼익, 끼익.

오래된 바닥에 한계에 가까운 하중이 가해지며 비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바닥 틈으로 새어 나오던 빛을 가렸다.

소리가 멈추자 무연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틈 사이로 힘줄이 드러난 창백한 피부가 보였다.

그것은 무연이 있는 틈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숨바꼭질에서 이겼다는 듯 핏덩어리가 묻은 이빨을 드러내 보였다.

사람이 웃는 것을 따라 하는 것 같아, 기괴하고 공포스러웠다.

까득! 까드득!

마물이 긴 손톱을 틈 사이에 박아 넣고, 바닥을 뜯어냈다.

위에 고여 있던 피가 무연의 머리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동시에, 무연은 마물의 전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아아…….”

10척은 될 법한 크기의 마물이었다.

피로 칠해진 몸의 색깔은 사람의 피부색과 같았는데, 푸른 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눈은 없었고, 양팔 이외에도 가슴 위로 여러 개의 팔이 꿈틀거렸다.

투박한 어금니와 날카로운 송곳니 사이에는 핏덩어리가 끼어 있었다.

마물은 흥미를 보이듯 무연의 얼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끼이익…….

마물의 목 안쪽에서 유리를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절로 구토감이 일어날 정도로 심한 악취가 났다.

눈도 코도 귀도 없는 얼굴 너머에서 핏줄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겁먹은 무연이 뒤로 물러나자, 마물의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낯선 것에 대한 공포로 들어찬 수십 명의 서대륙인들이 자신에게 무기를 겨눴다.

“허억!”

헛숨을 내쉰 무연은 잠에서 깨어났다.

상반신을 일으키고 현실을 자각하려는 듯 방을 살폈다.

웨스트리아 왕국의 여관이었다.

땀에 온몸이 젖은 상태였다.

‘꿈인가.’

무연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시간이 꽤 지났는지, 해가 저물고 있었다.

황탑에 간 이안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후우.”

몸은 피곤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무연은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땀으로 젖은 와중에도 헬름을 뒤집어쓰는 걸 잊지 않았다.

검까지 확실히 챙긴 뒤에야 방을 나섰다.

* * *

“도련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요?”

“무슨 일 말입니까?”

“이를테면, 적과 조우하였다든지.”

“그랬더라면 적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런데요.”

단과 마리나, 리옐은 여관의 방에서 지그문트와 루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마리나는 석궁에 쓰는 화살촉에 무언가를 부여했다.

단은 착실히 창가와 문을 오가며 주변을 경계했다.

리옐은 잘 자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리옐 아가씨께서 알아차릴 겁니다.”

“퀸틴에서처럼요?”

퀸틴에서, 지그문트 마이어가 죽음에게 끌려가기 직전이었을 때, 리옐은 이를 알아차리고 강력하게 회항을 주장해, 지그문트를 살려 냈다.

리옐의 설명에 의하면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데, 뭐가 연결되어 있는지는 알 방도가 없었다.

똑똑.

돌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과 마리나는 말을 멈추고 시선을 교환했다.

마리나는 묵묵히 석궁에 화살을 메겼고, 단은 한 손에 클레이모어를 들었다.

퀸틴에서 리옐이 한 번 납치당한 후로, 지그문트가 없을 때 둘은 경계심이 부쩍 강해졌다.

벌컥.

단은 검을 휘두를 기색으로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사제복 차림의 두 남자가 있었다.

검을 보고 꽤 놀랐는지,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기사님.”

“무슨 용무십니까?”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들어가서 얘기해도 괜찮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정말 잠깐이라도 괜찮습니다. 확인할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단은 잠깐 뒤를 돌아봤다.

사제들의 시야 밖에서 석궁을 겨누고 있던 마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사제라고 해도,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시노드 교구에서 부패한 사제의 모습을 몇 번 목격한 적 있다.

“죄송합니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실례했습니다.”

두 번의 거절에, 사제들은 순순히 물러났다.

오히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다는 듯 거듭 사과를 했다.

사제들이 1층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단은 긴장을 풀었다.

“후우.”

“누구였나요? 사제?”

“그런 것 같습니다. 문양을 보니 리에이트의 사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순순히 돌아가서 다행이네요.”

둘은 안심하며 무기를 내렸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따로 움직일 때, 둘의 최우선 임무는 리옐을 지키는 것이었다.

특히 청탑주에게 한 번 된통 당했던 단은 사소한 것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리옐이 뒤척이자, 단과 마리나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목소리를 죽였다.

“근데 리에이트의 사제가 아니라면, 누구였을까요?”

“불사의 교단과는 문양이 달랐으니, 아마 웨스트리아 왕국의 신이겠지요.”

“웨스트리아 왕국의 신이라면 분명…….”

마리나가 말을 마치기 직전, 방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잡아!”

1층에서 소란이 일어난 것 같았다.

처음에는 취객 간의 분쟁인가 싶었지만, 소란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리옐이 인상을 찡그리고 침대에서 뒤척였다.

“제가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어쩌면 도련님일 수도 있으니까요.”

“아, 알겠어요. 저는 리옐 님을 지키고 있을게요.”

* * *

“언제 나오는 거지?”

“지금 창고로 사람을 보냈으니, 금방 올 겁니다. 좀만 기다리십쇼.”

여관 1층.

무연은 타는 듯한 목을 축이기 위해 술을 주문한 뒤 기다리고 있었다.

웨스트리아 왕국의 명물이라고 불리는 사막주였다.

서쪽에서만 나오는 선인장으로 만든 술로, 그 맛이 일품이라고 이안에게 들었다.

물론 방에 가서 마셔야겠지만, 무연은 나름 기대하고 있었다.

“저, 실례하겠습니다.”

무연의 옆으로 두 명의 사제가 다가왔다.

무연은 처음에 이를 무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일찍이 찾았던 신전의 사제들이었다.

‘이들은…… 신을 찾는 이들이군.’

늙은 사제는 신을 찾기 위해서 사제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아마 그들 중 하나인 것 같았는데, 무연이 신전을 찾았을 때는 못 봤던 이들이었다.

처음에는 무시하려고 했지만, 어쩌면 무연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인가.”

“혹시, 타지에서 오셨습니까?”

“그렇다.”

무연은 깨달았다.

외지인이 많이 머무는 여관부터 뒤진다.

즉, 이자들은 신이나 신과 관련된 인물을 찾고 있었다.

“혹시, 그 헬름 한 번만 벗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신이 아니다. 그와 관련되어 있지도 않다.”

“네? 저희는 신을 찾는다고 말씀드린 적이 없는데…….”

무연은 거절하고자 했지만, 이내 그것이 실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연은 늙은 사제에게 들어서, 신을 찾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제들은 무연을 모른다.

사제들은 기대와 흥분이 섞인 얼굴로 무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해다. 나는 우연히 신전에 들어가,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렇군요. 헬름 좀 벗어 줄 수 있겠습니까?”

“안 된다. 개인적인 문제다.”

무연은 사제들의 요구를 완강히 거절했다.

사제들은 무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신을 찾아다녔지만, 이번에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자신들이 신을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헬름을 뒤집어쓴 외지인.

당연히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무연은 서대륙인들이 동대륙의 사람에게 하는 차별을 겪어 봤다.

헬름을 벗으면 필시 더 곤란해질 것을 알고 있었다.

“미안하다.”

“거, 좀 벗어 줄 수도 있는 거 아니오?”

옆에서 술을 기울이던 남자 하나가 오지랖을 부렸다.

술기운이 돌았는지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단순히 웨스트리아 왕국의 사제들이라 편을 들어주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말투에는 무연에 대한 적대감이 묻어 있었다.

“뭐 켕기는 거라도 있나 보지?”

“켕기는 건 없다. ……종교적인 신념이다.”

“무슨 종교가 그리 얼굴을 가리고 다니도록 한단 말이오?”

“참견이 많군.”

“많을 수밖에. 나라가 지금 여간 뒤숭숭한 게 아니다 보니 말이오.”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무연을 가만히 응시했다.

사제들은 조금 당황한 눈치로 남자를 만류했으나,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말투도 조금 어눌하고, 얼굴을 가린 것도 수상한데. 출신이 어디요?”

“말할 수 없다.”

“아, 그러셔?”

남자는 돌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에 반응한 무연 역시 마주 검을 뽑았다.

놀란 사제들과 손님들이 뒤로 물러섰다.

“당신, 혹시 팔베르크 제국에서 온 거 아니야?”

“아니다.”

웨스트리아 왕국은 현재 팔베르크 제국과 분쟁이 있다.

당연히 이에 대해 예민한 상태였고, 외지인에 대한 경계가 한층 심했다.

“그럼 출신이 어딘지 말해 보라니까.”

“……레온하트 왕국이다.”

“레온하트 왕국? 그럼 적탑주님 존함도 알겠네. 말해 보쇼.”

생각나는 것이 이안과 지그문트의 고향밖에 없어 급한 대로 둘러댔다.

하지만 무연이 적탑주의 이름을 알 리 없었다.

이안은 때때로 적탑주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대체로 적탑주님이나 원장님이라고 칭했다.

“어어, 레온하트 왕국 사람이 적탑주님 존함을 몰라?”

“무지는 죄가 아니다.”

“그치. 그래도 댁은 지금 무진장 수상한 건 맞거든. 얼굴 좀 봅시다.”

“무슨 권리로?”

“내가 웨스트리아 왕실 소속 병사거든.”

남자는 검에 새겨진 웨스트리아의 문양을 보였다.

대치 상태에서 무연은 혀를 찼다.

꼼짝 없이 얼굴을 드러내야 할 판이었다.

“이렇게 나오신다면, 강제로라도 보는 수밖에.”

남자가 먼저 움직였다.

칼부림을 벌일 생각은 없는지, 검 손잡이로 가격하려는 듯했다.

훈련 받은 듯 정갈하지만 지나치게 정직한 동작이었다.

쾅!

남자의 손목을 잡아채 잡아당겨, 균형을 잃게 만든 뒤 팔을 뒤로 꺾었다.

깔끔한 솜씨로 남자를 제압한 무연은 다시 한번 교섭을 시도했다.

“오해다.”

하지만 서대륙어에 아직 어색한 감이 있던 무연이 할 수 있는 건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

논리적인 설득이나 변명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야! 왜 보고만 있어! 저거 잡아!”

제압당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혼자서 술을 마시러 온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열댓 명의 장정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연은 혀를 찼다.

낭패가 따로 없었다.

거의 동시에, 누군가 여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가 이리 시끄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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