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94/134)

3

신을 찾는 자들

-이제 땅에 남은 신은 나 하나야.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지?

몇 주 전, 엘비아.

보상이라는 명분으로 개입을 최소화하며 내게 열매를 주려고 부른 줄 알았더니.

세계수는 진지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퀸틴에서 상당히 힘을 쓴 상태라 말을 아껴야 하는 것 같았다.

대강 말하면, 어차피 내가 유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이제부터 네가 서대륙을 혼자 지탱해야 한다는 거겠지.

-거의 맞아. 바라의 신성을 일부 흡수한 덕분에,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럼 문제 될 것도 없는 거 아닌가?

-애석하게도, 있어.

세계수는 눈앞에 서대륙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듯한 환상을 만들어 냈다.

특히 강조되어 있는 곳은 세계수가 있는 태초의 숲이었다.

-나는 서대륙 동쪽 끝에 뿌리를 내렸어. 원래 땅에 사는 신들은 사방을 나누어 맡았으니까.

땅에 사는 네 신은 각각 나뉘어 자리를 잡았다.

세계수는 동쪽의 숲, 목오는 서쪽 끝 사막, 바라는 북쪽 바다, 이그룬타는 남쪽 불모지.

아마 효율적으로 서대륙을 지탱하기 위해, 협의하에 분산 된 것으로 추정됐다.

-알고 있는데. 그게 뭐?

-서쪽이 문제야.

세계수가 손을 움직이자, 축소판 서대륙이 바뀌었다.

녹빛의 힘이 세계수를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며 퍼져 나갔는데, 그 색은 멀어질수록 옅어졌다.

서쪽 끝자락, 목오 사막이나 웨스트리아 왕국 쪽에는 거의 색이 닿지도 않는 수준이었다.

-웨스트리아 왕국과 목오 사막도 지탱할 수 있긴 한데, 시간이 좀 걸려.

-얼마나?

-임시로 벽을 칠 때까지는 한 달, 안정되려면 1년.

-길군.

-이것도 무리해서 단축한 거거든? 열심히 일하는 아내를 칭찬해 주지는 못할망정.

-누가 아내야. 그리고 목오는 진즉 죽었잖아. 그럼 여태껏 이 상태였던 건가?

-아니. 죽었어도 신성은 품고 있었으니까. 똑바로 신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거야.

목오는 죽었음에도 신성을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사체 또한 상당한 힘을 지녔다.

팔베르크 제국이 발락을 파견한 목적도 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성을 확보하면서, 서쪽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신성이 내게 온 것이 문제가 되는 건가?

-그건 아니야. 신성이 서쪽에 남아 있었더라면, 결국 나까지 죽었을 테니까.

퀸틴에서 불사의 괴물을 막지 못했더라면, 필시 세계수도 위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고 볼 수 있었다.

바라가 사망하는 등 다소 희생이 있었으나 이게 활로였다는 소리다.

신성도 고개를 마구 끄덕이면서 동의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다행인 건, 신이 둘 추가됐다는 거야.

-신이 추가 돼?

-당신이랑, 우리 딸.

-둘 다 아직 신이라고 하긴 뭐하지 않냐?

-그렇긴 한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거든. 당신은 모르겠지만.

-요아힘, 그 늙은이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군.

-불패의 기사, 요아힘 월베른?

-그래. 요아힘도 격이 중위라고 들었는데.

세계수는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눈으로 나를 보다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내 가슴팍을 쿡 눌렀다.

여로 사이에서 신성이 미간으로 세계수의 손가락을 밀어내며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얘. 잘 가르쳤어야지.

-미숙.

-조금 착각할 수도 있는데, 격은 신과 다른 개념이야. 격이 높다고 신이면, 드래곤들도 반신이게?

-학생?

자책하는 척하던 신성이 고개를 들고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내가 너 때문에 한 소리 들었다고, 질타하는 눈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러면 설명을 제대로 해 주든가.

격이 오른다고 다 신의 역할을 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전생에 나는 신이 됐다고 느끼진 못했다.

몇몇 마법사들이 마법의 신이라고 떠받들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당신도 이제 신의 범주 안에 들어왔으니까, 앞으로 주의해서 움직이긴 해야 돼.

-설마 나도 너나 리에이트처럼 개입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야. 당신은 변수인 동시에 신이 된 유일무이한 존재거든.

-제약에 묶이지 않으면 되긴 하는데.

제약에 묶이는 순간, 힘이 있음에도 일정량 이상 소모할 수 없게 된다.

지금의 나는 그 일정량에 다다를 정도로 많은 힘을 소유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내심 걸리던 문제였다.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이들도, 똑바로 인식하진 못할걸?

-인식은 되고 있다는 거군. 똑바로 인식하지 못하면, 어떤 식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아마, 정확하진 않지만 이렇게 불리고 있을 거야.

-어떻게?

-불완전한 신이라고.

* * *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지?

-역시 그랬군.

불완전한 신.

오릭이 꺼낸 말은 분명히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단언할 수 있는데, 오릭은 신의 존재를 인식할 만한 존재가 아니다.

힘으로 미루어 볼 때 마신과 연관된 것 같지도 않은데.

오릭은 뻥 뚫린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보이는 것을 볼 수 없게 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정글 도는 수도승이 할 법한 소리군.

-많은 힘을 품고 있어 알아보지 못했는데, 께름칙한 빛 또한 품고 있었어.

자기 얘기 하고 있는 걸 알았는지, 여로 사이에서 신성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신성과 직접 마주한 오릭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원래 신성은 관련 없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를테면 리옐과 마리나는 신성을 볼 수 있었으나, 단은 알고만 있을 뿐 보진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 제한이 한 단계 풀리면서, 제 모습을 보이도록 하게 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실례.

신성은 내가 자주 하는 것처럼 오릭의 미간에 딱밤을 때렸다.

께름칙한 빛이라고 표현된 것에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페어리의 작은 손이 때린 딱밤이 얼마나 아프겠냐만은.

오릭은 그렇지 않았는지, 고개를 들고 울부짖었다.

-쿠오오오오오!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놀가드 남작과 영지민들이 질겁했다.

내 등에 가려져 신성을 보지 못했는지,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래도 은인이라 아주 질린 건 아니었지만, 조금 무서웠던 모양이다.

이번엔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억울했다.

신성이 안 했다면 내가 때리긴 했겠지만 말이다.

-불완전한 신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냐는 말이었다.

-후욱. 흐흐. 알면 안 되나?

-안 되는 건 아닌데. 궁금해서.

이놈은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누군가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서쪽이 현재 불안정하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니 마계와 지상의 틈에 사는 주인들, 헤르창과 오릭을 보낸 것이겠지.

‘그게 누구냐가 문젠데.’

적어도 팔베르크 제국 측 인물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제국에는 유독 신과 연관된 인물이 적었다.

신전도 있고, 리에이트의 신자도 꽤 있긴 하지만.

고명한 사제나 신의 대리인은 없다.

-알려 주고 죽으면 안 되냐?

농담조로 물어봤으나, 오릭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원래 반쯤 죽어 가고 있는 상태였는데, 신성의 딱밤이 결정타가 된 모양이었다.

-신성. 얘 죽었잖아.

-억울.

-범인은 보통 처음에 그렇게 말하지.

-놀림?

-맞아. 농담이야.

어차피 이놈에게서 뽑을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신성이 딱밤을 때리지 않아도 머지않아 죽었을 놈이다.

* * *

“대접을 제대로 하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오.”

“괜찮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까요.”

“이해해 주어 고맙소. 이런 시대에 보기 드문 영웅이오.”

놀가드 백작과 그 수하들이 감사를 표했다.

막 저택을 찾았을 때 본 행보로 지레짐작할 수 있었지만.

보기 드물게도 정말 영지민을 아끼는, 제대로 된 귀족이었다.

지금도 영지 내부의 생존자를 찾고 있었고, 부상자 치료를 최우선 목표로 두고 있었다.

“사제님도, 정말 고맙소. 평범한 시녀인 줄 알았더니, 위장일 줄은 몰랐소.”

“저, 저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마리나는 이런 대접이 익숙하지 않은지 크게 당황했다.

영지 내에는 사제가 없었기에, 부상자 치료에는 마리나가 발 벗고 나섰다.

리옐이 충분히 힘에 여유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놀가드 백작은 일행 하나하나에게 직접 감사 인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루터 레온하트와 마주했다.

“음?”

놀가드 백작은 루터 레온하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긴가민가한 얼굴이었다.

루터 레온하트는 현재 맨얼굴을 드러낸 상태였다.

루터는 첫째 왕자 제임스의 눈을 피해 별궁에 숨어 지냈던 만큼, 드러나지 않은 인물이다.

‘설마, 알아보는 건가?’

대외적으로 루터가 모습을 드러낸 건, 내 장례식 때.

만약 루터 레온하트를 알아본다면, 렘센에서 있었던 내 장례식에 참가했다는 건데.

내 장례식에서는 놀가드 백작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놀가드 백작은 게슴츠레 눈을 떴다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미안하오. 노안이 와서 말이오. 누구와 닮았군.”

“제가 말입니까?”

“그렇소. 내가 십수 년 전에 레온하트의 국왕을 본 적 있는데, 아주 빼다 박았어.”

그야 그 아들이니까, 빼다 박았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어렸을 적 파서벌 레온하트는 루터 레온하트와 똑 닮았었다.

내 기억에도 그랬으니.

“하여, 은인들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이었소?”

“웨스트리아의 수도, 에노드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에노드로? 설마, 천둥고원을 넘어온 것이오?”

“그렇습니다.”

통상적으로 에노드로 가려면, 이곳을 지날 리 없다.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허, 위험했을 텐데. 고원에 그리핀과 또 다른 영물이 자리를 잡았단 건 알고 있소?”

“청조 말이군요.”

“청조? 그것을 청조라 하오?”

“짹짹이!”

타고 왔다고 하면 너무 비범해 보일 것 같았다.

청조와 그리핀이 세력 다툼을 하는 틈을 타 지나왔다고 얼버무렸다.

그나마 납득이 되는지, 놀가드 백작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마침 잘됐군. 혹, 한 가지 일을 부탁해도 괜찮겠소?”

“일이라니요?”

“잠시 기다리시오.”

놀가드 백작은 저택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놀가드 백작은 마차와 함께 다시 등장했다.

꽤 큰 마차여서, 마부석에 두 명이 탄다는 전제 하에 여덟 명까지도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웬 마차입니까?”

“에노드로 간다 하지 않으셨소. 부디, 왕가에 이 서찰 좀 전달해 주실 수 있겠소?”

놀가드 백작은 내게 밀봉된 편지를 건넸다.

놀가드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양이 찍혀 있었다.

아마 위험을 알리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일 것이다.

영지의 꼴이 말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대신, 이 마차를 드리겠소.”

“……마차를요?”

내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나, 경제관념은 제대로 박혀 있었다.

이렇게 귀족용으로 제작된 큰 마차는 생각보다 값이 나갔다.

적어도 집배원 역할을 하고 받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에노드로 갈 생각이라면, 걸어가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오.”

“이런 걸 덜컥 내주셔도 괜찮겠습니까?”

“은인들께서 빨리 에노드에 도착해야, 우리 영지도 지원을 받을 수 있지 않겠소?”

놀가드 백작이 빙그레 웃었다.

점점 더 마음에 드는 인물이었다.

나는 편지를 품에 넣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 * *

마차를 타고 며칠을 달렸을까.

웨스트리아 왕국의 수도, 에노드는 멀리서부터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루터 레온하트와 이안은 조금 압도되는 듯한 탄성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웨스트 던에서 본 것과 같은 거대한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과 마리나, 리옐은 이미 한 번 본 적 있어서 그렇구나 하는 반응이었다.

무연은 조금 다른 감상이었다.

“명당이군.”

“지리적 조건이 좋긴 하지.”

“그게 아니다. 이곳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를 하고 있다.”

“동대륙의 풍수지리학인가. 그것도 맞는 말이야.”

세 개의 산이 천연의 요새처럼 수도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뻥 뚫린 남쪽에는 거대한 벽을 세워 외세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벽 아래로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아마 저 강은 에노드 내부까지 이어질 것이다.

확실히 이상적인 지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건 뭡니까?”

이안은 벽을 지키듯 서 있는 거대한 조각상을 가리켰다.

단단한 등딱지를 지고 전면을 향해 울부짖고 있는 거북이다.

그냥 거북이가 아니라, 드래곤과 버금갈 정도로 거대한 크기에 용맹한 얼굴이 인상적이다.

“웨스트리아 왕국의 상징이잖아. 거북이.”

“아빠, 저거 목오 아저씨야?”

“그래. 정확하네.”

그냥 거북이가 아니라 신수, 땅거북 목오였다.

웨스트 던의 주민들은 목오를 섬겼다.

그 후예인 웨스트리아 왕국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리에이트의 신자도 상당히 있었지만, 아마 대부분은 목오를 섬길 것이다.

목오는 오래 전 죽은 신인 만큼, 지금은 종교라기보다 거의 민속신앙에 가깝지만 말이다.

‘불사의 괴물이 가장 먼저 노린 것은 목오였다.’

결과적으로 웨스트 던은 멸망했고, 목오는 불사의 괴물에게 죽었다.

하지만 목오의 희생으로 죽을 운명이었던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그 사람들이 북쪽으로 올라와 터를 잡은 것이 바로 이곳, 웨스트리아 왕국이었다.

사막의 민족다운 특유의 생존력이 인상적인 이들이다.

“곧 도착할 것 같은데. 무연, 이안. 너희들은 어떻게 할 거지?”

“신전을 찾을 생각이다.”

무연은 헬름을 뒤집어쓰며 대꾸했다.

무연이 찾는 신이 나나 리옐일 수도 있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동대륙을 갈 여유는 1초도 없었다.

꼭 동대륙에서 내려온 예언이 목오라는 보장은 없다.

내 조언에 따른다면, 리에이트가 알아서 처리하겠지.

“우리는 왕성으로 향할 테니, 갈라지겠군.”

“덕분에 편히 왔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니. 동향 사람끼리 돕는 건 당연한 일이지.”

“같이 여행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이안이 꾸벅 인사했다.

그렇게 우리는 에노드의 남쪽 벽에 다다랐다.

* * *

무연은 지그문트 일행과 헤어지기 무섭게 에노드 내부로 들어섰다.

이안은 적탑의 마법사였고, 무연은 황금 등급의 용병이었다.

신분 하나는 확실했기에, 지그문트 일행보다 더 빠르게 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무연은 에노드에 들어서자마자 신전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안, 이쪽이다.”

“겨우 왔는데, 좀만 쉬면 안 됩니까?”

“쉬어 갈 시간은 없다.”

“으휴. 그래요! 갑시다! 가!”

이안은 못 이기겠다며 무연을 따라갔다.

헬름만 덜렁 뒤집어쓴 무연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상태였다.

이안은 무연을 쫄래쫄래 따라가며 질문했다.

“신전 위치는 아십니까?”

“모른다.”

“근데 어딜 그렇게 당당하게 가고 있는 겁니까?”

“찾고 있었다.”

“신전을요?”

“그래.”

이안은 황당한 나머지 말을 잃었다.

어떻게 이렇게 무식한 방법을 쓴단 말인가.

황금 등급 용병이라면 무릇 머리가 좋기 마련이다.

몬스터 사냥이나 의뢰 해결은 단순히 무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잠깐 좀 멈춰 보십쇼.”

“시간이 없다.”

“좀! 현지인에게 물어보면 더 빨리 갈 수 있습니다.”

무연은 마지못해 걸음을 멈췄다.

이안은 지나가던 사람을 하나 붙잡고 길을 물었다.

“여기가 아니라는군요.”

“근처에 있다고 하지 않나?”

“정반대라는군요.”

“내 감이 틀릴 리가 없는데.”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안이 옳았다.

무연은 고개를 들었다.

사암이 뒤섞인 듯 황색을 띤 석재로 만들어진 신전이었다.

“여긴가.”

“길 어렵잖습니까. 그런 식으로 헤맸으면 몇 시간은 족히…….”

“들어간다.”

“아오! 진짜 한 대 때리고 싶네!”

무연은 뚜벅뚜벅 신전 내부로 들어섰다.

이안은 투덜대면서도 무연의 뒤를 따랐다.

대체로 밝은 백색으로 이루어진 리에이트의 신전과는 대조적으로, 어두침침했다.

신전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기에, 이안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경계했다.

“사람이 없는 건가.”

“신전이라면 사제가 상주할 텐데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인기척이 있군.”

무연은 뚜벅뚜벅 신전 안쪽으로 나아갔다.

너무 어두운 나머지, 이안은 라이트(Light)까지 동원해 길을 밝혔다.

이윽고 무연이 걸음을 멈춰선 곳에는, 꽤 큰 문이 있었다.

무연의 말대로 안쪽에서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누구 안 계신가요?”

대뜸 들어가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아니었다.

안쪽에서 예배라도 진행되고 있으면, 불청객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이안은 꽤 큰 소리로 물었지만, 안쪽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들어가겠다.”

“무연 님!”

이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연은 문을 밀었다.

큰 문이 조금 열리며, 그 틈으로 예배당으로 추정되는 큰 방이 드러났다.

황색의 사제복을 입은 수많은 사제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목오의 신상과, 제단의 근처에는 지위가 높아 보이는 늙은 사제가 앉아 있었다.

늙은 사제를 비롯한 모든 사제들은 전부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돌아왔다!”

“오오!”

“드디어!”

“마침내! 감사합니다!”

침을 튀겨 가며 사제들에게 열변을 토한다.

감격하는 사제들의 모습은 어쩐지 이교도를 연상케 했다.

노인이 이안과 무연을 발견하고, 시선을 돌렸다.

침묵하는 노인에,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사제들도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예배당 내부에 있던 모든 이들의 이목이 무연과 이안에게 쏠렸다.

“방해했군. 그냥 나가겠다.”

대체로 막 나가는 무연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문을 닫으려고 했다.

가장 근처에 있던 사제가 달려와, 문 사이로 손을 넣었다.

무연은 꽤 힘을 줬지만 사제의 힘은 장사가 따로 없었다.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사제는, 무연과 이안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랍니다.”

* * *

신전, 예배당.

이안은 말없이 무연을 노려보았다.

무연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떨궜다.

무연이 늙은 사제, 오베이어에게 ‘신을 찾으러 왔다’고 한 것이 화근이었다.

“웨스트리아 왕국의 상징인 거북 또한, 신께서 땅거북의 형상을 띠고 계셨기에…….”

오베이어는 정말 마르고 닳도록 신에 대해 설명했다.

강제적인 포교는 아니었고, 무연도 바라마지 않던 정보였다.

문제는 그 내용이 어마무시하게 길었다는 것이었다.

무연과 이안이 신전에 찾아오고 쭉, 심지어는 저녁을 대접하면서도 신의 말씀을 읊었다.

이안은 귀에서 피를 흘릴 지경이었지만, 좋은 뜻만 가득한 사제에게 모질게 대하진 못했다.

‘처음에는 흥미로웠는데.’

무연은 신을 찾기 위해서 서대륙에 찾아왔다.

이안은 사제가 아니었지만, 적탑주는 신학에 대해서도 능통했기에 자신도 들어 볼까 했다.

오베이어는 조리 있게 말을 잘했고, 지루하지 않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이안은 오베이어의 이야기를 듣고 지식이 늘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어떻게 5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말만 할 수가 있는 거지?’

오베이어는 물을 꿀떡꿀떡 마시면서까지 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열정을 보여 줬다.

그만큼 신실한 것이라는 거겠지만, 이건 좀 심했다.

도망칠 수도 없었던 것이, 어쨌든 무연이 필요한 정보가 어느 정도 섞여 있었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는 잠시 볼일이 생겨서.”

“아, 정말 아쉽게 됐군요. 아직 반도 말씀 못 드렸는데.”

“하하, 괜찮습니다. 여기 기사님께서 들어 주실 테니까요. 나중에 전해 들으면 됩니다.”

헬름 너머에서 무연의 원망 섞인 눈빛이 느껴졌지만, 이안은 애써 무시했다.

자신도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아카데미에서도 나름 모범생이었던 이안이었지만, 이건 무리였다.

의외로 발레리아는 아카데미생들에게 휴식 시간을 확실히 보장했다.

“아니. 무슨 일이 있다고 나가나?”

“저, 지그문트 님께 인사라도 드리려고 그럽니다.”

“좀만 기다려라. 나도 그에겐 은혜가 있으니, 이야기가 끝나면 나도 같이 가지.”

이안은 눈으로 무연에게 욕을 했다.

무연은 뻔뻔하게도 ‘나만 죽을 수 없지’라는 생각으로 물귀신처럼 이안을 끌어들였다.

다른 변명이 생각이 나지 않았던 이안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때, 예배당 밖에서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틈으로 보니, 사제들이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저분들께선 어디 가시는 겁니까?”

“아. 아마 신을 찾으러 가시는 걸 겁니다.”

“신을 찾으러 간다니요?”

“저희가 신성력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지요?”

이안과 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는 신성력을 사용해 마(魔)를 물리치거나 상처를 치료한다.

이는 신을 믿음으로써 그 힘을 일부 나눠 받는 것이다.

“리에이트의 사제처럼 대단한 수준은 아니지만, 저희는 분명 신성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1년 전, 동시다발적으로 사라졌다 하셨지요.”

“맞습니다. 저희는 아마 신께서 완전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잠깐. 신은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닙니까?”

“저희가 모시는 신, 목오 님께서는 오래 전 돌아가셨습니다.”

신학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안과 무연에게는 의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무릇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오베이어는 쓸쓸하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신께서 돌아가셨으니, 신성력이 사라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단전을 파괴당하면 내공을 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군.”

“그런데 몇 주 전, 제 신성력이 일부 돌아왔습니다.”

“예? 신성력은 다 사라졌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너무 갑작스럽게 되찾았기에, 당황스러웠습니다.”

오베이어는 증거를 보이듯, 손 위로 빛을 띄워 보였다.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는데, 무연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리에이트의 신성력과 조금 다르군.”

“신성력은 모시는 신에 따라 조금 차이를 보입니다. 리에이트 님의 신성력은 조금 더 밝고 찬란한 느낌이지요.”

“아니, 풀 내음이 나는 맑은 느낌이었는데.”

“응? 그렇습니까? 그런 신성력은 처음 들어 보긴 합니다만.”

사제는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리면서도 말을 마무리했다.

“아무튼, 이로써 저희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요?”

“신께서 되살아나셨다는 것을요.”

* * *

바로 왕성으로 가려 했으나, 문제가 발생했다.

황탑의 마법사가 배치되는 등, 검문이 생각보다 훨씬 강화된 상태였다.

리에이트의 사제는 검문을 허술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대충 사제로 변장해서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건 안 될 것 같았다.

앞에서 대충 넘어가려던 사제 하나가 신분 증명을 하느라 골머리를 썩는 광경을 봤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너랑 마리나, 리옐은 큰 문제 없을 거다. 문제는 나랑 루터지.”

“두 분께선 은밀하게 진입해야 한다 하셨지요. 공간 이동을 통해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블링크(Blink)는 안 돼.”

남부 벽에 있는 유일무이한 문에는, 특수한 아티팩트가 연결되어 있었다.

마법을 통한 변장이나 이동을 감지하는 장치였다.

저지가 아니라 감지였기에 넘어갈 수는 있었어도, 아마 소동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

수비적인 성향을 보이는 만큼, 검문에서도 깐깐했다.

아마 팔베르크 제국과 대치 상태라서 더 그럴 것이다.

“벽에 구멍 뚫는 것도, 비슷한 이유로 어렵지.”

“벽을 뚫는 것이 안 된다면, 넘어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게 그나마 합리적이긴 한데.”

나는 높디높은 벽을 올려다봤다.

7서클로 올라서면서 마나 양은 꽤 늘어났지만, 시간적으로도 마나 소비 면에서도 비효율의 극치였다.

나와 루터 레온하트가 웨스트리아에 방문했다는 사실은 가급적 숨기고 싶었다.

이런 정보를 하나 차단함으로 추후에 전황을 뒤흔들 수도 있었다.

“에휴, 내 팔자야.”

결국 나와 루터 레온하트는 날아서 벽을 넘어가기로 했다.

단과 마리나, 리옐도 같이 날아가고 싶다고 했으나, 내가 거절했다.

들키지 않기 위해 인비지빌리티(Invisibility)를 비롯한 마법을 사용해야 했다.

인원수가 많아질수록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로를 사용하는 방법도 있긴 한데.’

가급적이면 여로를 통한 차원 이동은 자제할 생각이었다.

서쪽에는 아직 세계수의 힘이 닿지 않는 만큼, 차원 간 경계가 가까워진 상태다.

여기서 여로를 사용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럼, 먼저 가서 기다릴게요.”

“아빠! 오빠! 좀 이따 봐!”

“리옐 아가씨. 저는 아저씨면서, 왜 루터 왕자님께선 오빠입니까?”

“단 님. 아무래도, 단 님은 루터 왕자님과 비교하기엔 좀…….”

“나이가 있어!”

“따흑.”

셋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먼저 검문소로 향했다.

나와 루터는 검문을 기다리던 줄에서 이탈해, 벽 쪽으로 이동했다.

문 인근에 있던 경비병이 이상한 눈초리로 우리를 봤기에 벽을 구경하는 척해야 했다.

“지그문트 님.”

“왜?”

“이 높은 벽을 어떻게 넘으실 생각입니까?”

절벽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까마득한 높이였다.

크기가 크기인 만큼 단면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타고 올라갈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무슨 초인도 아니고, 도둑이 담 넘듯이 이 높은 벽을 훌쩍 넘을 리 없었다.

여로를 펼치고, 플라이(Fly)를 부여했다.

“날아가야지. 목오 사막에서 했던 것처럼.”

“아하.”

* * *

퍽!

에노드 시내.

돌멩이가 목오의 사제의 머리에 적중했다.

돌에 맞은 사제는 비틀거리며 돌멩이가 날아온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대낮부터 거하게 취한 듯한 남자 하나가 사제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물럿거라! 이 이교도야!”

“이교도라니요. 저희는 목오 님을 섬기는 사제들입니다. 엄연히 국가에서…….”

“신성력도 못 쓰는 것들이 사제는 무슨!”

몇 달 전, 목오의 사제들은 모두 신성력을 잃었다.

예상한 결과였지만, 그들을 불신하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팔베르크 제국의 전쟁 선포가 민심에 적잖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저건 좀 심하긴 했는데, 저 사람들은 정말 내쫓아야 하는 거 아니야?”

“신성력도 못 쓰는데, 몇 달째 신전까지 두고 있고. 세금도 안 낼 텐데. 쯧.”

“엘레너 왕녀님의 뜻이라던데? 난 솔직히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단 말이지.”

방법은 과격했으나, 남자에게 수긍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 증거로, 아무도 사제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걸 보고도 막지 않았다.

사제는 머리에서 아린 통증과 뜨거운 피의 감촉을 느꼈다.

젊은 사제의 이름은 하만.

대대로 목오를 섬기는 일족이었다.

‘어찌 사람들이 저렇게 한순간에 돌변한단 말인가.’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리에이트의 사제들과 달리, 목오의 사제들은 에노드에 상주했다.

평소에 그 신성력은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쓰였다.

리에이트의 사제들처럼 대단한 회복력을 지니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목숨을 연명시키거나 호전시키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설령 실력이 대단치 않더라도, 무상으로 남을 돕는 목오의 사제들의 평판은 좋았다.

“당신, 기억합니다. 몇 달 전에, 동생분을 데리고 신전에 오셨지요.”

한 나라의 수도에 산다고 해도, 상층민과 하층민은 나뉘기 마련이다.

저 남자도 막일을 하며 하루하루 굶지 않을 정도로만 버는 하층민에 속했다.

몇 달 전, 남자와 함께 막일을 하던 동생이 크게 다쳤다.

-누구 없습니까! 제발 좀 살려 주십쇼!

크게 놀란 남자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동생을 신전에 데려왔었다.

땅에 널브러져 있던 금속이 맨발에 박혀 피를 흘리면서도, 동생부터 봐 달라고 애원을 했다.

하만은 신전 앞에서 남자와 마주쳤고, 그것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하는군. 가증스러운 이교도들. 전부 너희들 때문이다.”

“불의의 사고였습니다. 저희도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리에이트의 사제였다면 살렸을 거야.”

“리에이트 교단의 사제들은 내전으로 대부분 교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걸 알고…….”

“시끄러워! 너희들 때문에 내 동생은 고통 속에서 죽었다!”

감정이 격양된 남자가 술병을 벽에 내리쳤다.

병이 깨지며, 날카로운 날붙이처럼 변했다.

술병을 쥔 남자가 하만에게 뚜벅뚜벅 걸어왔다.

시내 한복판에서 살인 사건이라도 일어날 판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냥 내가 돈이 없어서, 동생을 도와주지 않은 거라고.”

“저희 신성력은 일시적으로 사라졌습니다. 신께 맹세하건데, 이는 사실입니다.”

하만은 차분하게 남자를 설득했다.

술에 취한 남자는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남자가 하만의 목에 술병을 들이밀었다.

붉은 피 한 줄기가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꺄악!”

“저, 저, 저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경비병 불러! 경비병!”

가만히 구경하던 왕국민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경비병을 찾기 시작했다.

하만은 마른침을 삼키며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동생 분 일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제발, 이성적으로 판단하세요.”

“써 봐.”

“예?”

“써 보라고. 신성력.”

“말씀드렸을 텐데요. 신성력은 일시적으로 사라졌습니다.”

“진짜 신이 있다면, 이런 상황을 두고 볼 리가 없잖아. 그치?”

일촉즉발의 상황.

하만은 신성력을 쓸 수 없었다.

이는 몇 달 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확인한 사실이다.

대사제 오베이어는 신성력이 돌아오긴 했으나, 그것도 극히 일부.

“쓸 수 없습니다.”

“역시. 신은 없군. 너흰 이교도야.”

“신께선 분명히 저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래? 내 동생이 죽는 것도 지켜보고만 있었나 봐?”

남자의 눈에서 눈물을 줄줄 흘러 내렸다.

하만은 조용히 남자를 응시했다.

술을 마셨다고는 하나, 감정이 너무 극단적이다.

그러나 신성력으로 진정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널 죽이고 나도 죽을 거야. 그럼 동생을 만나도 볼 낯이 있겠지.”

“제발. 그만두세요.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네 신을 원망해라.”

하만은 끝까지 설득을 시도했으나, 남자는 듣지 않았다.

날카로운 유리병이 하만의 목을 파고들었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순간, 하만은 이상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하늘에서 페어리 하나가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것을.

-빠샤!

페어리는 그대로 남자의 손목에 드롭킥을 날렸다.

작디작은 다리로 날린 발차기였지만, 예상치도 못한 불의의 일격이었다.

남자의 손에서 미끄러진 술병이 바닥에 떨어져 부서졌다.

쨍그랑!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이 된 하만은 페어리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페어리가 보이지 않는지 제 손목을 때린 사람을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어떤 새끼야!”

페어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남자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쳤다.

이번에는 꽤 힘이 들어갔는지,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박고 엎어졌다.

페어리 머리 위에서 질책하는 듯, 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뭐 해.

-혼냄!

-쓸데없는 곳에 개입하지 마.

-끝남!

페어리는 하늘을 보고 누군가와 대화했다.

하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갔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지! 동작 그만!”

멀리서 경비병들이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벌떡 일어난 남자가 하만에게 달려들었으나, 경비병들에 의해 제압당했다.

남자는 거의 발광을 했다.

“이거 놔! 아아악!”

“가만히 있어! 사제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네, 네. 저는 괜찮습니다. 여기 페어리가…….”

“페어리요? 페어리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어?”

하만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호기롭게 남자를 때렸던 페어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하만의 눈에만 보이는 빛의 가루가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건.’

하만은 얼핏 느낄 수 있었다.

뜨거운 기운이 가슴에 들어차는 듯한 감각.

신성력이 있을 때와 같은 감촉이었다.

-차라리 나한테 부탁을 하든가. 직접 나서면 힘만 쓰잖아. 이목도 끌어 버렸고.

-제한.

-말을 두 음절로밖에 못 하니까 부탁하기 어렵다고? 그래도, 대충 알아먹잖아.

-반성.

-쯧. 그러면 됐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여로 위에는 인지빌리티를 통해 모습을 감춘 지그문트 마이어가 있었다.

벽을 넘어온 지그문트는 에노드의 지리를 파악하며, 왕성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었다.

경비병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자리를 뜨고자 했다.

행여나 들킨다면 신분 증명이 귀찮아지기 때문이었다.

루터 레온하트와 함께 왕성 내로 들어가기도 해야 했다.

-으음.

신성은 지그문트의 속으로 되돌아가려다가, 잠깐 하늘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홀로 다급히 하늘을 살피고 있던 하만과 눈이 마주쳤다.

하만은 페어리에게 잠깐 기다리라는 듯 손을 뻗었다.

더 지체하면 지그문트가 뭐라 할 것이 뻔했기에, 신성은 기다리지 못했다.

대신 작은 손을 좌우로 흔들며 웃었다.

-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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