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헬름
생물은 대체로 목이 잘리면 죽는다.
하지만 분명히 예외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아그나, 듀라한이나 마족 같은 경우였다.
마족 중에는 심장이 여럿 있거나, 목이 잘려도 죽지 않는 해괴망측한 놈들이 있다.
아무래도 헤르창 또한 그런 경우인 것 같았다.
‘죽은 체하고 있는 거군.’
숨도 멈추고, 눈을 감은 채 시체인 척을 하고 있다.
아마 몸이 없어 움직일 수 없으니, 죽은 체하며 훗날을 도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애석하게도 리옐의 눈을 피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목이 떨어졌음에도 저렇게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니.
나는 헤르창을 가만히 응시했다.
‘글러터는 이놈과 같이 휘말려 들어온 건가?’
마족은 종종 지상을 침범하곤 한다.
그 과정에서 힘을 대부분 잃어버리긴 하지만 말이다.
아마 헤르창 정도 되는 마족이 파이스 백작에게 목이 잘린 것도 그 탓일 것이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파이스 백작은 노심초사한 기색이었다.
전시품에 대한 욕심이 있는 인물이다.
마족의 머리, 그것도 틈의 주인의 것은 탐이 날 만도 했다.
그렇다고 이걸 그대로 방치해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있습니다. 역시 마기의 근원은 이 마족의 머리거든요.”
“그게 무슨 문제가…….”
“괜찮습니다. 사제님이 계시거든요. 마기를 완전히 지울 수 있을 겁니다.”
“아! 그거 정말 잘됐군! 감사를 표하오.”
“마리…… 사제님.”
마리나는 사제가 아니지만, 마기를 지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엘비아에서, 세계수는 나를 안정화시키는 동시에 리옐에게 힘을 쓰는 법을 가르쳤다.
원래 리옐은 감각에 의지해 힘을 사용했고, 대리인인 마리나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대리인을 통한다면 힘의 효율은 확실히 상승한다.’
리옐이 직접 힘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마리나를 통한다면, 들어가는 힘은 확실히 줄어든다.
즉 마나를 적게 사용하고 최대 효율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개입이 너무 잦으면 흐름에 휩쓸릴 우려가 있다.
그 때문에 세계수는 리옐에게 대리인을 통한 힘의 행사를 적극 권장했다.
“언니! 샤라라!”
“샤라라. 알겠어요.”
도대체 샤라라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둘이 통하는 뭔가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인 마리나가 앞으로 나섰다.
헤르창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헤르창은 인간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
사제가 나섰으니, 무방비 상태로 있으면 죽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으리라.
쿵! 쿵! 쿵!
그때, 저택이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발소리에, 파이스 백작이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 너머는 철 부딪치는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저, 저게 뭐야?”
“막아!”
“으악!”
파이스 백작의 사병들이 움직였으나, 속수무책으로 뚫리고 있었다.
마리나와 리옐이 고개를 돌렸다.
단은 말없이 클레이모어를 뽑아 들었다.
루터 레온하트는 불안한 듯 주변을 살폈다.
콰앙!
문을 부수고, 무언가 튀어나왔다.
거대한 상체에 비해 턱없이 평범한 하체.
언젠가 봤던 헤르창의 몸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몸에 달라붙는 이상한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 저, 저건!”
“마족의 몸입니다.”
“용병들은 이런 말 없었는데!”
“용병?”
전시되어 있던 헤르창의 머리가 번쩍 눈을 떴다.
머리 바로 앞에 있던 파이스 백작은 헤르창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흰자를 드러내며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버렸다.
“크하하! 이번에는 집행자들인가! 지상에는 즐거운 상대가 많군!”
눈을 뜬 헤르창이 입을 열었다.
전과 달리 말까지 하는 모습이었다.
헤르창이 목이 잘려도 살아 있는 모습에, 루터가 질색했다.
파이스 백작처럼 심약하진 않은지, 기절하지는 않았다.
“지그문트 님?”
“괜찮아. 별거 아니니까.”
헤르창의 몸이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한쪽 팔이 잘려 있었는데, 재생하진 못한 모습이었다.
“비켜라. 인간.”
“네가 돌아서 가면 되잖아.”
“열등한 종족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헤르창의 몸은 남은 손으로 거대한 봉을 들고 있었다.
양쪽에는 무거워 보이는 쇳덩어리가 달려 있었는데, 무기 보다는 운동 기구 같았다.
단에게 상대를 시킬까 했지만, 내 쪽도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나는 단에게 턱짓했다.
단이 고개를 끄덕이고 루터를 비롯한 이들을 지키듯 뒤로 물러섰다.
“음? 그 몸! 본 적 있다.”
“나를 기억하나?”
“그래! 그 균형 잡힌 몸! 마족의 언어를 사용했던 인간 아닌가!”
“정말 알아볼 줄은 몰랐는데.”
“너 때문에 인간의 언어를 배워야 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동안 근손실이 일어났지!”
“뭐?”
“용서할 수 없다!”
헤르창의 몸은 부들부들 떨더니, 봉을 쳐들었다.
무게에 따른 파괴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지상에 온 만큼 힘이 제한 당했을 터.
콰앙!
쇳덩어리가 바닥을 내리쳤다.
벽이 흔들리며, 돌조각이 폭발하듯 튀어 올랐다.
시야의 주체인 머리가 뒤에 있으니, 제대로 조준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피하지 않았으나, 빗맞았다.
“다음에는 맞히겠다!”
헤르창은 다시 봉을 들어 올렸다.
이번 공격으로 대충 헤르창의 힘을 알았다.
이제는 내 힘을 시험할 차례였다.
이름 없는 검을 뽑아 들었다.
마나 번(Mana Burn)은 사용하지 않았다.
숨을 깊게 들이쉰다.
이름 없는 검은 아직 검집 상태였다.
그러나, 오러는 분명히 검 속으로 스며들었다.
검을 부수는 검.
후두둑.
헤르창의 몸이었던 것이 바닥에 흩어졌다.
나는 이름 없는 검을 집어넣었다.
아직 불안정하긴 하지만, 소드 마스터다.
반대로 헤르창은 중상급 마족이었으나, 힘을 제한 당한 데다가, 큰 부상까지 입었다.
결과는 한참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아빠 멋있어!”
마리나에 의해 눈이 가려진 리옐은 엄지를 치켜세웠다.
단은 자극을 제대로 받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루터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흠칫 놀랐다.
-안 돼애애애! 내 완벽한 몸이이이!
헤르창의 머리가 울부짖었기 때문이었다.
몸을 잃은 것이 그토록 슬픈지, 거의 통곡을 했다.
나는 사일런스(Silence)를 사용해 헤르창의 목소리를 차단했다.
리옐이 보기에 안 좋아 보였기에, 헤르창의 몸이었던 것들도 마법으로 치웠다.
“이제 어쩌죠?”
“잠깐 얘기 좀 해야겠다.”
헤르창은 팔베르크 제국과 페러시트를 거래하던 마족이다.
팔베르크 제국은 현재 웨스트리아 왕국과 대치 상태.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맞아떨어지는 감이 있었다.
-이봐.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
헤르창은 대답하는 대신 비명만 질렀다.
몸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강했다.
빈약한 몸을 타고났으나, 몸을 단련하여 강자의 자리에 올랐다.
자연스럽게 몸에 대한 집착이 강해졌다.
이런 뻔한 스토리일 것 같아,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대신 정신을 안정시키기 위해 머리에 손을 올렸다.
‘몸은 열심히 단련했지만, 머리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군.’
머리가 따로 움직이는 놈도 있는 반면, 이놈은 머리가 떨어져도 살아 있기만 했다.
몸에 올인한 모양이었다.
마나 서클을 회전시켰다.
모디파이 메모리(Modify Memory).
헤르창이 울음을 뚝 그쳤다.
몸이 산산조각 난 기억을 지웠다.
헤르창은 줄줄 흐르는 눈물을 멈추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어라. 어째서 눈물이?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묻는 말에 대답해 주겠어?
-음? 그 몸! 본 적 있다!
-그 대사 아까 했잖아.
* * *
헤르창에게서 생각보다 흥미로운 정보 몇 개를 얻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헤르창을 베어 낸 것은 파이스 백작이 아니라 황금 등급의 용병이라는 것이었다.
역시 눈 마주쳤다고 기절하는 파이스 백작이 한 짓은 아니었다.
아마 허세였으리라.
‘황금 등급의 용병이라.’
연이 닿는다면 만날 테니, 머릿속 한편에 기억해 두기로 했다.
또한, 글러터는 헤르창의 애완동물이었다.
다행히 차원 간에 문이 열리거나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나 걸리는 점이 있긴 한데.’
지상에 발을 들인 마족은 힘을 제한 당하는 페널티를 떠안는다.
부패한 성배 같은 마신의 성물이 없다면, 이는 억제할 수 없다.
헤르창은 그런 페널티가 상대적으로 적어 보였다.
스물네 번째 틈에서 헤르창과 직접 전투를 해 보지 못해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예의 용병이 목과 팔을 잘라 약화된 게 아닌가 추측했다.
‘그놈도 보통내기가 아니군.’
용병은 거의 완전한 상태의 헤르창의 목을 베어 냈다.
마무리는 조금 어설펐지만, 솜씨는 칭찬할 만했다.
루터 레온하트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지그문트 님, 마족의 말을 믿으십니까?”
“진실일 거다. 터치 오브 트루스(Touch of Truth)를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진실 외에는 말하지 못하도록 하는 마법 말이군요.”
“맞아. 기억력 좋네.”
아무리 박식하다고 해도 고대 마법의 능력을 외우고 있을 리는 없다.
레온하트 왕국 대청소 당시, 발레리아가 설명했던 것을 전해 들은 거겠지.
이런 사소한 것을 기억하는 능력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상황이 변했다.”
헤르창이 말한 것을 토대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아직 확증은 없지만, 제국은 마계와 단순히 페러시트를 거래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연합’을 만들고 있듯이, 그쪽도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불안 요소가 많다고는 하나, 만약 제국과 마계가 정말 손을 잡는다면, 내 손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다.
“웨스트리아 왕국 포섭은 더욱 중요해졌군.”
“서대륙의 북부를 그냥 넘겨주는 꼴이 되기에, 이 말씀이십니까?”
“아니. 웨스트리아 왕국에는 조금 더 중요한 게 있어. 아마 마족이 탐낼 만한 물건이.”
황제의 수는 하나가 아니었다.
웨스트리아 왕국이 밀리는 순간, 우리 쪽이 떠안아야 할 디메리트는 너무 많았다.
하루라도 빨리 엘레너 왕녀와 접촉하고, 안전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기절한 파이스 백작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각성(Awaken).
파이스 백작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리는 척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정신이 깨어났는 데도 일어나지 않는 걸 보아, 안전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백작님, 다 끝났습니다.”
“으음……? 어떻게 된 일이지?”
방금 일어났다는 듯 상반신을 일으키고, 주변을 살핀다.
헤르창이 쇳덩어리로 내려쳐 부서진 것 말고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마족에게 당했던 건가. 사술? 아니면, 마법인가?”
개뿔.
그냥 쫄아서 기절한 거다.
나는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그렇습니다. 마족은 처리했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큭. 내게 검이 있었다면, 내가 베어 냈을 텐데.”
“물론 그렇겠지만, 저희들의 의무는 마족을 말살하는 것이니까요.”
“그렇군. 보수는……”
“필요 없습니다. 마족의 팔과 목이 잘려 있었던 덕분에 피해 없이 사냥할 수 있었습니다. 백작님 덕분이지요.”
“큼, 별것 아니었소. 나야말로 고마울 따름이오.”
집행자 행세를 계속하며, 파이스 백작과 악수를 나눴다.
긴장한 파이스 백작의 손에서 떨림이 전해졌다.
“파이스 백작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큼.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해 드리리라.”
“혹시, 그릇 좀 있으십니까?”
“그, 그릇?”
* * *
“도련님.”
“왜?”
루터가 잠시 쉬고, 단이 훈련을 하는 동안.
나와 마리나, 리옐은 파이스 백작의 저택 주방을 찾았다.
마리나는 수북하게 쌓인 식기들을 바라보았다.
파이스 백작에게 한 요청으로, 하인들이 내온 것이었다.
대체로 그릇이나 잔이었는데, 촛대 따위도 섞여 있었다.
“이걸 전부 어디다 쓰시려고 그러시는 건가요?”
“전부 쓸 건 아니야. 몇 개만 골라 갈 거니까.”
나는 수제로 만들어진 것 중에서도, 질이 좋은 것들을 찾고 있었다.
모두 파이스 백작 수중에 있었던 고가품이었으나, 그중에서도 특출난 것들만 쓸 것이다.
아쉽게도 고가의 물품인 만큼, 은 따위로 만들어진 금속제가 많았다.
목제로 만들어진 것도 있었지만, 매우 드물었다.
“식기라면 도련님의 아공간 주머니에도 있지 않나요?”
“그건 거리에서 산 것들이라 그다지 질이 좋지 못해.”
“질 좋은 식기는 어디다가 쓰시려고…….”
산더미처럼 쌓인 식기를 추리고 추려 냈다.
아쉽게도 질 좋은 물품 중 목제로 만들어진 것은 그릇 하나와 잔 하나가 전부였다.
다행히 인원수에도 맞으니까, 크게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성물을 만들 거다.”
“성물요?”
“성배 비슷한 것들이지. 마법 대신 신성력이 부여된 아티팩트라고 생각하면 돼.”
“그런 걸 만들어 내는 게 가능한 건가요?”
“가능하지. 이쪽에는 신이 있잖아.”
“아.”
리옐은 제 얘기를 하는 줄도 모르고, 식기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림이 그려지거나 문양이 새겨진 것도 있었으니, 신기했던 모양이다.
나는 턱을 까딱여 마리나의 팔목에 채워진 엘프의 팔찌를 가리켰다.
“그것도 성물이야.”
“예? 이 팔찌가요?”
“원래는 아니었는데, 언제부턴가 성물이 됐더라고.”
리옐은 단이나 마리나에게 가호를 부여하곤 했다.
힘을 다루는 법을 몰랐을 때니,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리옐은 나 또한 죽음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특별히 리옐과 자주 붙어 다닌 마리나다.
엘프의 팔찌는 신목의 후계자인 리옐과 상성이 좋으니, 성물이 된 것이겠지.
“리옐. 이리 와 봐.”
“응! 아빠!”
“손.”
“손!”
리옐은 해맑은 얼굴로 내 손에 손을 올렸다.
이건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마리나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웃음을 꾹 억눌렀다.
손을 달라는 의미는 맞았지만.
나는 리옐의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뒤집었다.
그 위에 목제 그릇과 잔을 올렸다.
“밥?”
“아니야.”
지금부터 만들 것은 성배처럼 대단한 물건이 아니다.
마법으로 비유하자면, 아티팩트보다는 마도구에 가까운 것이다.
일회용이라도 좋으니 임시로 신성력을 부여한 물건을 지니게 할 심산이었다.
마족과 마주쳤을 경우, 나와 마리나, 리옐 같은 경우에는 대항하기 편하지만, 신성력과 연관이 없는 단과 루터 레온하트 경우에는 대처가 어렵다.
“할 수 있겠어?”
“응!”
리옐은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내게 건네받은 나무 그릇과 잔을 꼭 껴안았다.
그릇과 잔에 조금씩 신성력이 돌기 시작했다.
생기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
“몇 개나 할 수 있어?”
“많이 많이! 그런데, 그러면 약해져.”
“음, 일단 두 개만 해 보자.”
“응!”
잠깐의 휴식 후, 단과 루터가 합류했다.
목오 사막 횡단으로 지쳐 있던 루터는 한결 나아진 기색이었다.
나는 루터에게 잔을 넘겼다.
“이거, 가지고 있어.”
“이게 뭡니까?”
“좋은 거.”
루터는 군말 없이 허리에 달린 작은 주머니에 잔을 넣었다.
잔이 들어갈 리 없는 크기의 작은 주머니였는데, 아공간 주머니인 듯했다.
그래도 왕자씩이나 되면 여행 갈 때 아공간 주머니 하나는 챙겨 주는 것 같았다.
“단, 너도 받아라.”
“예? 아, 감사합니다. 한데 이건, 도련님의 주머니 아닙니까?”
“난 이제 필요 없어. 아공간을 열 수 있으니까.”
단에게는 내가 쓰던 아공간 주머니를 넘겼다.
물론 안에 있던 물건들은 전부 아공간으로 옮긴 후였다.
그 과정에서 실험체 1호도 잠깐 봤는데,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클레이모어는 무거우니까, 검집 빼고 거기에 넣고 다니면 편할 거야.”
“도련님이 하시는 것처럼, 주머니에서 바로 뽑으라는 거군요.”
“무기를 숨길 수 있다는 점도 좋고, 여러모로 유용할 거다.”
단은 무거운 물건을 생각보다 많이 소지하고 있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에, 오시아드에서 구매한 중갑도 있었다.
편의를 위해 작정한 전투가 아니라면 경갑을 입었는데, 중갑은 대체로 내가 보관했다.
언제까지 내가 물건을 대신 보관해 줄 수는 없다.
마리나에게 줄까 생각해 봤지만, 상대적으로 무거운 것을 많이 들고 다니는 단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가, 감사히 받겠습니다.”
“지금 아공간 주머니를…… 주신 겁니까?”
루터 레온하트는 경악했다.
아공간 주머니는 그 가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다.
편의성과 실용성은 물론이거니와, 여러모로 사용할 구석이 많은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었기에 가격은 더욱 올라갔다.
“소형이야.”
“그렇군요.”
대충 소형 아공간 주머니라고 얼버무렸다.
드래곤이나 대마법사가 아니라면 만들지 못하는 중대형과 달리, 소형은 꽤 물량이 있었다.
서대륙의 탑주들이 때때로 만들어 내곤 하기 때문이었다.
단은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아공간 주머니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소형치고는 꽤 많이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만.”
내 아공간 주머니는 8서클 당시 연습 삼아 만들었던 중형이다.
중형이라고 하면 루터가 당황할 것 같아 얼버무렸을 뿐.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안에 그릇 하나 들어 있지?”
“예.”
“마족 만나면 써라.”
“알겠습니다.”
상당히 설명을 생략했음에도, 단은 수긍했다.
우리는 파이스 백작에게 인사를 한 뒤, 영지를 떠났다.
* * *
파울 레드라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와 달리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겨우 들개 몬스터를 전부 베어 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훨씬 더 강대한 것이 나타났다.
‘젠장,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들개 무리의 습격으로, 파울은 드워프 전사들과 함께 마을 밖에서 항전해야 했다.
드워프들을 도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나, 혼자서 싸우기에는 너무 많은 수였다.
그렇다고 마을 안에 숨어 있기도 자존심 상해서, 드워프들을 도왔다.
드워프들은 몬스터들로부터 침략에 잘 대비를 해 놓았으나, 몬스터의 수는 너무 많았다.
열세에 몰렸을 무렵, 돌연 하늘에서 나타난 것이 눈앞의 존재였다.
크르르르…….
이빨 사이로 잔열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새어 나왔다.
하얀 눈밭과는 정반대로 새까만 비늘을 가진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은 상공에 출현하기 무섭게, 브레스로 몬스터 무리를 쓸어 버렸다.
전부 다 죽이지는 못했으나, 전력의 상당수를 잃은 몬스터 무리는 후퇴했다.
그리고 이렇게 됐다.
“은인! 거기서 뭐 합니까?”
“닥쳐. 모루모루. 지금 눈앞에 있는 거 안 보이나?”
“아, 드래곤님 때문에 그러시는 거군요? 괜찮습니다. 우리 편이니까요.”
“뭐?”
드래곤이 드워프의 편이라니.
이건 무슨 생뚱맞은 소리일까 인상을 찡그렸다.
블랙 드래곤, 벨수스는 날개를 펄럭였다.
폴리모프(Polymoph).
벨수스의 몸이 줄어들었다.
은색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섞인 청년으로 바뀌었다.
파울은 경계를 풀지 않고 벨수스를 응시했다.
벨수스의 파충류처럼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가 파울을 노려보았다.
-무기를 내려라.
용언.
파울은 눈을 부릅떴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팔이 아래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다시 검을 올리려고 했지만, 팔만 덜덜 떨릴 뿐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게…… 드래곤.’
요하네스 레드라인, 발레리아 로안.
파울은 레온하트 왕국의 두 강자와 상당히 자주 마주쳤다.
요하네스는 파울의 아버지였고, 발레리아와는 함께 레온하트의 수호자 노릇을 했으니까.
그러나 눈앞의 생물은 그 둘에 비해 하염없이 거대했다.
드래곤 피어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어 그렇게 느낀 것이다.
파울의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퍽!
벨수스가 돌연 앞으로 고꾸라졌다.
등 뒤에서 나타난 묘령의 여성이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다.
동시에 파울에게 가해졌던 드래곤 피어가 풀렸으나, 파울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백발의 여성, 린시스가 파울이 잠깐 넋을 놓을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린시스는 다짜고짜 뒤통수부터 후려갈긴 것과 달리, 부드럽게 벨수스를 타일렀다.
“벨수스, 내가 인간 겁주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하니?”
“아! 어머니! 좀!”
“어머, 얘 좀 봐.”
얼굴부터 눈에 처박혔던 벨수스가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린시스의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입가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한없이 차갑기만 한 눈동자에, 옆에 있던 파울이 오한을 느낄 정도였다.
“죽을래?”
“잘못했습니다.”
벨수스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파울은 더 긴장해야 했다.
어머니라는 말로 린시스 또한 드래곤이라는 것을 유추한 것이다.
벨수스를 갈구던 린시스가 파울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구나. 우리 애가 좀 철이 덜 들어서.”
“……아닙니다.”
“이해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구나. 얘, 벨수스.”
벨수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 아공간을 열어 파울에게 뭔가를 건넸다.
파울은 어리둥절하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파울이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규격의 검이었다.
“이건?”
“별건 아니고, 드래곤 이빨로 만든 검이란다. 사과의 의미로 받아 주렴.”
파울은 말을 잃었다.
그다지 사과할 일도 아니었는데, 드래곤 이빨로 만든 검을 덜컥 주다니, 웬만한 국보급 아티팩트보다 더한 물건을 대뜸 받아 버린 것이다.
린시스는 정말 별것 아니니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덧붙였다.
파울은 평생 드래곤의 경제관념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가 파울 레드라인. 맞니?”
“……맞습니다.”
“역시, 지그문트가 얘기한 아이가 너였구나.”
“지그문트? 지그문트 마이어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맘때쯤 네가 올 것이라고 했거든.”
파울은 지그문트를 떠올리고 인상을 찡그렸다.
경로와 움직일 시기까지 완벽하게 예측 당했다는 것이다.
“던전에 갈 필요는 없단다. 보상은 내가 줄 테니까.”
“예? 하지만.”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겠니?”
파울은 대답하지 못했다.
말이 부탁이지, 드래곤의 말을 거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린시스는 빙글빙글 웃었다.
“좋아. 착한 아이구나.”
이어지는 린시스의 말에, 파울의 입이 벌어졌다.
* * *
꺄아아아아!
웨스트리아 왕국, 남서부 산지에 여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우나(Aunar)에 허무하게 반으로 갈라진 밴시는 허공에서 흩어지듯 사라졌다.
파이스 영지를 떠나온 뒤, 이런 몬스터와 여러 차례 조우했다.
우리는 통상적인 길 대신 최단 거리인 직통 경로를 택했다.
산지가 많은 웨스트리아 왕국의 지형상, 마차를 이용하면 빙 돌아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이 아니니, 몬스터와 빈번하게 조우할 수밖에 없었다.
‘아우나도 괜찮군. 위력도 확실히 뛰었고.’
그 과정에서 나는 오러, 마나, 신성과 아우나를 모두 시험할 수 있었다.
세계수의 훈련이 효과가 있었는지, 모두 다루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마나와 오러의 절대량이 조금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아마 성장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던 탓일 테니,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였다.
“다시 이동한다.”
나는 리옐을 등에 업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밴시 때문에 잠깐 휴식하던 루터와 단, 마리나도 이동을 시작했다.
우리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길고 곧은 나무가 창대처럼 박혀 있었는데, 태초의 숲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괜찮냐?”
“괜찮습니다.”
“저도요. 그런데…….”
단은 꾸준한 훈련 덕분에 체력 면에서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마리나는 쿼터라고는 하나 엘프의 피를 이어받은 탓인지, 생각보다 잘 따라왔다.
리옐은 종종 나와 단에게 업히면서 왔기에, 마찬가지로 멀쩡했다.
문제는 루터 레온하트였다.
“후우, 후우.”
루터 레온하트는 허벅지에 손을 얹고 억지로 다리를 움직였다.
골방에 틀어박혀 자신을 숨기던 왕자가 운동과 친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군말 없이 따라오는 점은 칭찬할 만했다.
나는 루터 레온하트의 체력이 한계에 다다랐을 무렵 멈췄다.
“여기서 잠깐 쉬고 간다. 밴시도 잡았으니, 큰 위험은 없을 거다. 식사도 하고.”
“허억.”
일행이 멈추기 무섭게, 루터 레온하트는 곧바로 주저앉았다.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대(大) 자로 드러누워 숨만 쉬는 모습이었다.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이다.
“송구, 합니다. 제가, 짐 덩어리군요.”
“고산병의 위험이 있으니, 원래 쉬어 갈 거였어. 그 정도면 잘 따라오는 거다.”
“아닙니다. 제가 체력이 많이, 약한 모양입니다. 끙.”
단은 곧바로 적당한 위치에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마리나는 단에게 아공간 주머니를 넘겨받아, 척척 식사를 준비했다.
쉬지도 않는 모습에 루터는 나지막이 감탄했다.
머리는 좋으나, 별궁에서만 지내던 루터 레온하트다.
이런 경험은 훗날 왕세자가 됐을 때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에노드까지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지금 이동 속도라면, 아직 멀었어.”
웨스트리아 왕국은 생각보다 넓다.
왕성이 위치한 수도 에노드는 웨스트리아 왕국 안쪽,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남쪽에서 올라온 우리와는 거리가 상당했다.
가파른 지형 때문에 체감 거리는 훨씬 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험난하군요.”
“레온하트 왕국은 대체로 경사가 완만하니까. 이런 높은 산지는 드물지.”
평탄한 레온하트 왕국은 어디든 간에 마차를 통해 다닐 수 있다.
반면 웨스트리아 왕국은 정반대였다.
때때로 말을 타고 다니는 정도지, 불안정한 마차가 다닐 만한 지형은 거의 드물었다.
나무 탓에 플라이(Fly)를 사용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엘레너 왕녀와 교섭은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였지?”
“거의 막바지였습니다.”
“웨스트리아 왕국의 상황이 워낙 급박하니.”
“그것보다, 렘센에서 지그문트 님께서 뭔가 손을 써 두셨던 덕분이지요.”
린시스가 말을 잘해 둔 것 같았다.
“공식적으로 웨스트리아와 접촉하는 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뤄야겠지요.”
“잘 아는군. 제국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다.”
“아직 트리옌 왕국과도 구두로 손을 잡았을 뿐입니다. 반도 안 왔습니다.”
“트리옌과도 선언식 같은 공식적인 절차가 필요하겠지. 시기는 맞출 수 있나?”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제국은 용의 산맥을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요.”
가만히 내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리옐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식사하세요!”
마리나의 부름에, 나와 루터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식사를 했다.
여행 도중인 만큼 메뉴는 한정됐는데, 오늘은 스튜였다.
루터는 불평하기는커녕 오히려 만족하기까지 했다.
“맛있군요. 왕성의 요리와는 다른 맛이 있습니다.”
“마리나는 이런 요리에 도가 텄습니다. 오늘도 맛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루터의 칭찬과 단의 동조에, 마리나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서대륙을 여행하며, 마리나는 쭉 식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평범했으나, 날이 갈수록 맛이 발전했다.
식사할 필요가 없는 리옐도 매일 식사를 챙길 정도였다.
“맛있어! 그치? 아빠!”
“부정할 수 없군.”
나는 식사를 대충 챙기는 경향이 있었다.
연구에 몰두할 때는 거르는 것이 다반사였다.
전생에 혼자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행이 생기며 이런 이점이 생긴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팅.
그때, 알람(Alarm)이 울렸다.
휴식을 취할 때 깔아 둔 것이었다.
이 인근은 밴시 때문에 산짐승이 없을 텐데.
단도 뭔가를 느꼈는지, 식사를 하다 말고 주변을 살폈다.
“왜 그러세요?”
“뭔가 오고 있긴 한데. 별로 신경 쓸 건 없다.”
단은 말없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뽑았다.
나도 마찬가지로 유사시를 대비해 아공간을 옆에 띄웠다.
고작 한 단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드래곤 같은 것이 아닌 이상, 별문제 없으리라.
부스럭.
나뭇잎 밟는 소리와 함께, 위쪽에서 두 인영이 내려왔다.
* * *
“좀 멈추시라니까요! 여기가 거기라고요! 귀신 나오는 숲!”
“이안, 저기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
“이건 무슨 짐승도 아니고!”
이안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겨우 고원에서 도망쳐 숲으로 들어왔다.
거의 망신창이가 된 몸을 좀 추스를까 싶었는데, 기사가 갑자기 홀린 듯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말이다.
‘맛있는 냄새가 어디서 난다고!’
숲 특유의 풀 내음과, 안개 때문에 조금 물비린내가 나는 것이 전부였다.
적어도 이안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기사의 완력은 이안이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이안은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움직였고.
“어? 사람?”
식사 중인 지그문트 일행과 마주칠 수 있었다.
이안은 적잖이 당황했다.
산지 밑 마을에서, 사람들에게 들었던 이야기 때문이다.
이 숲에는 귀신이 나오니까,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람이…… 맞나?”
이안은 지그문트 일행을 하나하나 살폈다.
적어도 하나 확실한 점은, 전부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인상만 봐도, 뭔가 특별한 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안은 귀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경계했지만.
“밥.”
“아! 기사님!”
기사는 그렇지 않았다.
스튜의 냄새에 홀린 듯 이안을 두고 뚜벅뚜벅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이안은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혼자 남으니 숲이 어쩐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귀신 나오는 숲이라는 생각이 이안의 머릿속에 박힌 탓이었다.
결국 이안은 기사를 뒤따라 숲길을 내려갔다.
“가, 같이 가요!”
* * *
“이상해!”
리옐의 한마디로, 눈앞의 인물에 대한 평가가 내려졌다.
기사는 이상했다.
헬름만 덜렁 머리에 뒤집어쓰고 갑옷은 입지 않았다.
검을 들고 있는 걸 보면, 일단 일반인은 아니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음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돈은 넉넉히 지불하겠습니다.”
기사 뒤에 있던 청년이 차분하게 용건을 설명했다.
적탑의 붉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젊은 마법사.
내가 막 환생했을 무렵, 로안 아카데미에서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첫 번째 서클이 거꾸로 도는 마법사, 이안이었다.
‘그사이 적탑에 들어간 건가.’
세월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이놈은 아카데미에서 봤을 때부터 싹수가 있었다.
다만 자신의 문제를 자각하지 못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뿐이다.
마리나가 내 눈치를 살폈다.
루터 레온하트도 있긴 하나, 어쨌든 이 일행에서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건 나다.
“돈은 필요 없으니, 앉아. 마리나.”
“네. 바로 준비할게요.”
원래라면 귀찮게 마리나에게 식사 준비를 두 번 시키지는 않았겠지만.
이안은 어쨌든 적탑 소속의 마법사며, 발레리아의 밑에 있는 마법사다.
제자의 제자라는 점을 봐서 도와주기로 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마법사, 이안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헬름이다.”
“진짜 이름은 아닌 것 같은데, 그냥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확실히 직관적인 별명이었다.
이안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신분을 감출 이유는 없었기에, 그냥 말하기로 했다.
“지그문트 마이어.”
“지그문트 마이어? 어? 엘비아의 은인이십니까?”
“그렇게 부르기도 하더군.”
“운이 좋군요. 여기서 동향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동향의 왕자도 있는데, 안 보이나?”
“어? 어억!”
이안은 루터 레온하트를 보고 기겁해서 엎드렸다.
루터 레온하트는 어떻게 대응할까 눈을 굴리다가, 쓰게 웃었다.
“고개를 드세요.”
“소인이 지치는 바람에 그만, 왕자님을 알아보지 못하여, 큰 무례를……!”
“괜찮으니까, 어서요.”
루터는 부드럽게 이안을 타일렀다.
이안은 어찌나 놀랐는지 딸꾹질까지 했다.
옆에 있던 헬름은 가만히 서서 이안을 내려다봤다.
“기사님! 뭐 하십니까! 얼른 꿇으시지 않고!”
“내가 왜 무릎을 꿇어야 하지?”
“레온하트 왕국의 왕자님이십니다! 무지하게 높으신 분이라고요!”
“나는 레온하트 왕국 소속이 아니다.”
“통촉하시옵소서어어어!”
이안은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 통곡을 했다.
루터는 쓰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그냥 여행객 신분이니, 편하게 대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그럴 수는…….”
“부탁 좀 하겠습니다. 위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리나가 스튜를 내온 뒤에야 이안은 가까스로 진정할 수 있었다.
여전히 루터 레온하트를 흘끔흘끔 보는 것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긴 했지만.
반면 헬름은 투구 때문에 스튜를 좀처럼 먹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헬름을 구경하던 리옐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아저씨, 그거 쓰고 있으면 밥 못 먹어.”
“나도 알고 있다. 꼬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