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9/134)

7

세 명의 기사

서걱!

하얀 눈밭 위로 붉은 피가 흩날렸다.

파울 레드라인은 검을 집어넣으며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렸다.

얼마나 움직인 건지, 추위에도 불구하고 땀으로 얼굴이 번들거렸다.

파울의 발치에는 붉은 들개 수십 마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쪼그려 앉은 파울은 죽은 들개의 머리통을 들어 올렸다.

“이건 뭐지?”

미간에 눈이 하나 더 달렸다.

이빨은 지나치게 날카로웠고, 가죽은 검이 잘 들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무엇보다, 머리가 잘려도 움직일 정도로 생명력이 질겼다.

“몬스터인가?”

“프라우드 산맥에 출몰하는 몬스터는 아닙니다.”

“그럼, 용의 산맥에서 내려온 건가?”

“잘 모르겠습니다. 용의 산맥은 워낙 미지의 장소인지라.”

“바로 옆에 있으면서 미지의 장소라.”

“드래곤님들이 수시로 날아다니는 곳에 발을 들이고 싶은 드워프는 없습니다.”

드워프, 모루모루는 파울의 기에 눌리지 않고 대답했다.

파울은 입김을 내뿜으며 붉은 털의 들개, 헬 하운드의 머리통을 떨궜다.

소형 아공간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들어 확인한다.

“용의 산맥이라.”

“설마, 가실 건 아니지요?”

“가야 돼.”

“은인이라 알려 주는 건데, 저기 올라가면 죽습니다!”

“닥쳐. 난 안 죽으니까.”

“와, 돌겠네.”

파울은 용의 산맥을 올려다봤다.

파란 기운이 도는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모루모루는 잠깐 주저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약해서 죽는다는 게 아닙니다. 그 복장으로 가면 얼어 뒈집니다.”

파울의 복장은 지나치게 평범한 상태였다.

프라우드 산맥의 기온을 생각하면, 언제 저체온증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파울은 오러를 태워 체온을 높이고 있었으나, 오러가 계속 소모됐다.

전투가 벌어지면 체온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데, 용의 산맥에서는 위험할 것이 분명했다.

“저희 마을로 오십시오. 방한구를 드리겠습니다.”

“마을? 드워프는 인간들을 마을에 들이는 걸 꺼리지 않나?”

“이미 선례가 있거든요. 아마 장로님께서도 별로 개의치 않으실 겁니다.”

“가깝나?”

“멀진 않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파울은 결국 모루모루를 따라가기로 했다.

지그문트에게 지도를 건네받은 후로, 쭉 여행을 해 온 파울이다.

잠깐 휴식이 필요하긴 했다.

“은인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레온하트 왕국에서.”

“전에 마을에 다녀가셨던 분의 동료분들이 거기 출신인 것 같던데 말입니다.”

“드워프 마을에 다녀갔다라. 이름은 기억하고 있나?”

모루모루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인간 이름은 이상해서 못 외우겠습니다.”

“네 이름이 제일 이상한 것 같은데.”

“인상착의라면 기억합니다. 무한의 장갑을 찾으러 온 분들이었고. 음.”

모루모루는 파울에게 자신이 봤던 것들을 설명했다.

붉은 로브 차림의 여자 마법사.

클레이모어를 든 기사와, 귀여운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시녀.

파울은 묘하게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

뒤의 셋은 좀 애매했지만, 붉은 로브 차림의 여자 마법사라면 적탑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금발 남자는 없었나?”

“그, 금발 말입니까?”

“그래. 좀 재수 없게 생겼는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던 모루모루는 파울에게 바짝 다가갔다.

주변에 누가 없는지 몇 번이고 경계하더니, 은근한 투로 입을 열었다.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기억합니다. 지그문트 마이어라고 하더군요.”

“역시 그놈이군.”

“그놈이라니. 큰일 날 소리. 그자는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란 말입니다!”

“망상이 지나치군. 그놈은 인간이다.”

“내가 똑똑히 봤단 말입니다.”

“뭐를? 지그문트가 드래곤이 되는 거라도 봤나?”

“그, 그건 아니지만. 화이트 드래곤님과 친구 먹는 걸 봤습죠.”

파울은 할 말을 잃었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규격 외의 존재라는 건 알고 있었다.

던전의 위치가 상세하게 묘사된 지도만 해도 그렇다.

한 나라의 국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물건을 선뜻 넘겼다.

하지만, 도대체 뭘 하면 드래곤과 친구를 먹는단 말인가.

‘미친놈이군.’

파울 레드라인은 지그문트 마이어가 리에이트 교국으로 갈 무렵부터 움직였다.

홀로 꽤 많은 던전을 돌파했으며, 수없이 많은 역경을 헤쳐 나갔다.

많은 영약을 손에 넣었고,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그문트는 더욱 터무니없는 짓을 벌이고 있었다.

‘지금쯤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는 도달했겠지.’

파울은 지그문트 마이어의 괴랄한 성장 속도를 알고 있었다.

조금 예상이 빗겨가긴 했으나, 파울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파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모루모루, 속도를 높이겠다.”

“댁이랑 내 다리 길이 차이를 생각 좀 해 보십쇼! 아! 같이 가! 길도 모름서!”

* * *

“그러니까, 웨스트리아 왕국과 통신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아예 통신구 자체가 차단된 것 같습니다.”

“그쪽에서 안 받는 거 아니에요?”

이튿날, 적탑 최상층, 마탑주의 방.

발레리아 로안은 루터 레온하트와 마주 앉아 있었다.

루터 레온하트가 가져온 통신구를 건네받아, 이리저리 돌려봤다.

웨스트리아 왕국의 엘레너 왕녀와 연결된 것이었다.

“통신구 자체에는 이상이 없네요. 아, 통신 연결해 봐도 괜찮을까요?”

“예. 상관없습니다.”

발레리아는 통신구를 연결했다.

통신구가 검게 물들더니, 침묵했다.

엘레너 왕녀가 통신에 응답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마나 가로채기네요.”

“마나 가로채기요?”

“네. 이 통신구의 중간에서 마나를 가로챈 거예요.”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가능해요. 제 스승님이 고안한 기술이거든요.”

“대마법사, 델 로안 경이…….”

가능할까 의심이 드는 기술이었지만, 델 로안이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루터 레온하트는 초조한 듯 입술을 씹었다.

“이런 짓을 할 만한 건…….”

“위치와 의도, 방법을 고려하면 팔베르크 제국뿐이죠.”

북서쪽의 웨스트리아 왕국은 남동쪽의 레온하트 왕국과 정반대에 위치해 있다.

그 중간에는 트리옌 왕국과 팔베르크 제국이 있었다.

하지만 트리옌 왕국은 이런 일을 할 기술력도, 동기도 없었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직접 움직인 덕에, 트리옌 왕국과는 이미 성공적으로 교섭했다.

당연하게도 남는 건 팔베르크 제국이었다.

“마나 가로채기를 했다는 건, 통신구 자체가 간파됐다는 거예요. 여분은 없나요?”

“엘레너 왕녀님과 연결된 건 이것이 전부입니다.”

“웨스트리아 왕국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엘레너 왕녀밖에 없어요?”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발레리아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루터 레온하트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전령을 통해 통신구를 전달하는 건 어떨 것 같습니까?”

“통신구를 전달하더라도, 또 마나 가로채기를 당할 확률이 높아요.”

“그것이 왕녀님과 연결된 통신구의 마나인지, 어떻게 알고 가로챈단 말입니까?”

“레온하트 왕국과 웨스트리아 왕국 사이로 오가는 마나를 전부 가로채면 그만이지요.”

팔베르크 제국에는 흑탑주, 렘브란트 님푸스가 있다.

흑탑의 마법사를 포진시킨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루터 레온하트는 곤란해졌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웨스트리아 왕국이 전멸하는 순간,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어떻게든 연합에 끼워 넣어, 이쪽에서 조력해야 한다는 얘기군요.”

“그렇습니다. 용의 산맥이 개입한 덕에 잠시 시간을 벌었다지만.”

언제까지 드래곤들이 팔베르크 제국을 견제해 줄지 모를 일이다.

지그문트의 지시대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엘레너 왕녀를 바깥으로 불러들이는 건 어떨까요?”

“위험부담이 큽니다. 적탑주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팔베르크 제국이 사이에 껴 있으니까요.”

“마찬가지의 이유로, 이쪽에서 웨스트리아로 가는 것도 안 되겠네요.”

“텔레포트는 불가능한 겁니까?”

“애석하게도 저는 웨스트리아 왕국에 발을 디딘 적이 없어요.”

텔레포트의 가장 큰 맹점은, 자신이 발을 디뎌 보지 못한 곳에는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루터도 수긍했다.

“설령 이쪽에서 텔레포트를 한다고 해도 문제예요.”

웨스트리아 왕국는 팔베르크 제국에 의해 철저히 고립된 상태.

트리옌 왕국처럼 내부에 적이 숨어들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자칫하면 적진에 발을 들이는 꼴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저는 당분간 레온하트에서 움직이면 안 돼요.”

탑주 회의와 불사의 교단 때문에 이미 한 번 장시간 자리를 비웠다.

팔베르크 제국은 레온하트 왕국의 전력이 조금이라도 약화됐을 때를 노릴 수 있다.

당분간, 레온하트 왕국의 최고 전력 중 하나인 발레리아 로안은 왕국에 머물러야 한다.

“가장 좋은 건, 웨스트리아 왕국에서 이쪽으로 텔레포트 해 오는 건데.”

“얼굴을 마주하고 하는 교섭이 신뢰할 수 있긴 합니다만. 방법이 없습니다.”

발레리아 로안은 잠깐 주저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요한 대화 중입니다. 잠시 기다려 달라고 전해 주세요.”

“그, 지그문트 마이어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사실 수다 떨고 있었어요. 당장 들이세요.”

* * *

“내가 가면 되겠네.”

“하지만, 팔베르크 제국은 어떻게 건너가시려고요?”

“목오 사막으로 이어진 전송 장치. 안 부서졌잖아.”

목오 사막에서 곧장 북쪽으로 올라가면 웨스트리아 왕국이 나온다.

프라우드 산맥과 이어진 남부 국경선은 제국과 대치 중이라고 들었다.

팔베르크가 웨스트리아를 포위하고 있어도, 사막을 건너올 거라고 생각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왕녀님을 목오 사막까지 데려올 생각이십니까?”

“나 얼마 전에 7서클 찍었거든. 웨스트리아에서 텔레포트 하면 돼.”

발레리아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루터 레온하트도 뒤늦게 내 말뜻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7서클요? 지그문트 님께서 탑주급 마법사란 말이십니까?”

“그래. 블리자드라도 보여 주랴?”

“괘, 괜찮습니다.”

여기서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발레리아가 질문 있는 학생처럼 번쩍 손을 들었다.

“왜?”

“제국에서 마나 가로채기를 진행 중이에요. 웨스트리아에서 텔레포트 하면, 들킬 거예요.”

“그래? 그러면 루터 레온하트. 동행해.”

“네? 하지만, 공석이.”

“어차피 집무실에 처박혀 있을 테니, 안 들켜. 업무는 시프를 잠깐 불러들이면 그만이다.”

엘비아에 뼈를 묻으려는 시프 레온하트지만, 세계수를 운운하면 기꺼이 올 것이다.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하는 건 조금 귀찮았지만.

이쪽은 극적으로 인력이 부족했다.

정확히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인력이 부족했다.

뭐든 간에 내가 가는 편이 제일 확실했다.

발레리아가 중얼거렸다.

“역시, 방랑벽이…….”

* * *

네르갈, 레온하트 왕성.

국왕, 파서벌 레온하트는 뒷짐을 진 채 정원을 거닐었다.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하네스 레드라인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작은 호수 앞에서 멈춰선 파서벌이 중얼거렸다.

“수호자 경의 말마따나, 짐은 정말 인복이 있는 모양이야.”

레온하트 대청소 이후로 많은 인재가 발굴됐다.

불안정하던 레온하트 왕성은 불과 수 개월 만에 평화를 되찾았다.

잘 시간도 부족하던 파서벌에게 산책할 여유가 생길 정도였다.

“늘 이렇게 평화로우면 좋으련만.”

파서벌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얀 구름 무리가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린 나무가 녹색 잎사귀를 떨어트렸다.

호수에는 물고기 몇 마리가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겠지.”

팔베르크 제국은 웨스트리아 왕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럴싸한 명분은 제쳐 두고, 제국이 본격적으로 몸을 일으킨 것이다.

언제 서대륙을 집어삼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무력을 지닌 것이 팔베르크 제국이다.

대마법사 델 로안의 죽음으로 잠시 주춤했으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퀸틴이 준동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요하네스 경.”

“예, 폐하.”

“자네 아들, 파울은 뭐 하고 지내는가?”

“수개월 전,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이라. 무얼 위해?”

“……강해져서 돌아오겠다더군요.”

요하네스 레드라인은 조금 겸연쩍다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대뜸 찾아와서는 아무 설명도 없이 강해져서 돌아오겠다고 한 파울이다.

그리고 여태껏 편지 한 통이 없었다.

“그래. 아이들은 결국 부모 손을 떠나는 모양이야.”

얼마 전, 루터 레온하트가 파서벌을 찾아왔다.

웨스트리아 왕국에 다녀오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위험하기에 말리고 싶었지만, 설명을 들으니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 레온하트도 목숨을 걸었다.

“아들 낳아 봐야 소용없어. 딸자식 하나 있었으면 하는군.”

“라스가 부러울 따름입니다.”

“마이어 남작에게 딸이 있던가?”

“아니요. 손녀딸이 있습니다. 어찌나 자랑을 해 대는지. 귀가 아플 지경이지요.”

“손녀딸이라. 부럽군.”

파서벌 레온하트는 요하네스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눈을 감았다.

집무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벌써 산책을 끝내시렵니까?”

“아들이 목숨을 걸고 있는데, 부모가 가만히 쉬고 있을 수 있나.”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

파서벌의 말투가 바뀌었다.

왕의 위엄이 서린 한마디.

요하네스는 저절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중앙 귀족들을 소집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 * *

라이트(Light).

어둠이 빛무리를 피해 도망쳤다.

흙냄새가 가득한 습하고 좁은 공간.

우리는 웨스트 던의 전송 장치로 이동한 상태였다.

다행히 전송 장치는 멀쩡했고, 발레리아의 텔레포트는 제대로 작동했다.

‘역시 멀쩡할 수가 없나.’

문제가 있다면, 전송 장치가 있던 방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이다.

마법진 자체는 멀쩡했으나, 방은 거의 무너져 돌 따위로 들어찬 상태였다.

나는 로케이트(Locate)를 통해 사람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전송된 것은 단, 마리나, 리옐과 루터 레온하트.

모두 멀쩡했으나, 각각 좁은 틈에 갇힌 것 같았다.

“도련님? 리옐 아가씨?”

“꺼내 줄 테니까, 기다려 봐.”

가장 근처에 있는 건 마리나.

나는 디그(Dig)를 사용하려다가 멈췄다.

머리 위로 돌조각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주변을 살폈다.

“도련님?”

“전원.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 마리나.”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방을 이루고 있던 벽의 잔해가 교차해 서로 지탱하고 있는 상태다.”

“그 말씀은.”

“겨우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모래성이야. 자칫하면 무너진다.”

섣불리 디그(Dig)를 사용할 수는 없다.

한쪽은 어떻게 파내도, 다른 쪽이 무너진다.

‘파내는 동시에,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한다.’

지하인 만큼 위에서 짓누르고 있는 무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아무리 7서클이라고 한들 오래 유지하는 건 어렵다.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가장 가까이 있는 마리나부터.

디그(Dig), 공간 유지(Space Maintenance).

마리나와 내 사이에 있는 잔해들을 전부 파냈다.

공간 유지를 통해 무너지려는 천장과 벽면을 멈췄다.

역시, 위에서 짓누르는 힘이 지나치게 강했다.

공간 유지는 즉석으로 만들어 낸 마법.

오래 버티진 못한다.

“도련님!”

“바짝 붙어서 따라와.”

유지할 필요 없는 공간은 월 오브 스톤(Wall of Stone)으로 메웠다.

계속 지탱하며 마나를 소모하는 건 미련한 짓이다.

몇 분에 걸쳐서 마지막으로 루터 레온하트까지 구출했다.

좁은 공간에 다섯 명이 모였다.

디그(Dig) 변환 마법, 비상구(Emergency Exit).

벽면에 문이 만들어졌다.

내 수신호를 따라 모두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루터는 이동하자마자 죽을 뻔한 것이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단과 마리나는 익숙한 듯 불평 하나 없이 계단을 올랐다.

체온 유지는 시켜 뒀으니, 생명의 샘물 없이도 괜찮을 것이다.

덜컥.

바깥으로 이어진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마주친 광경에, 루터는 아연실색했다.

“이건…….”

웨스트 던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어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막던 높은 장벽은 완전히 무너져 산산이 조각났다.

건물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졌고, 흙과 모래가 뒤섞인 먼지바람이 불었다.

“이곳이, 웨스트 던입니까?”

“그래. 웨스트 던이었던 곳이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마리나와 단은 어색하게 루터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운석을 떨어트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메테오라이트(Meteorite)의 여파만으로 이렇게 된 건 아니었다.

아무리 8서클 대규모 공격 마법이라지만, 이 정도 위력은 내지 못한다.

마나를 추가해 위력을 늘릴 수는 있지만, 나는 기억에 딱 8서클의 메테오라이트를 부여했다.

즉, 2차적인 폭발이 있었다.

‘목오가 완전히 죽으면서 초신성이 일어난 건가.’

바라의 죽음과는 조금 차이를 보였다.

아마 신성을 내게 보냈기에 죽은 육신에 잔존하던 힘이 터져 나온 것으로 추정됐다.

사람 하나 없는 사막이라 다행이지, 여파는 웨스트 던보다 더 멀리 퍼졌을 것이다.

여로 밖으로 신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신성?

불러 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하염없이 슬픈 눈으로 목오가 죽은 장소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래 지낸 탓인지, 신성의 감정은 점점 풍부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여로를 양탄자처럼 펼쳤다.

크기는 인원수에 맞춰 늘어났다.

“타.”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걸어가고 싶으면 말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날아다니는 로브는 처음 타 봤는지, 루터가 조금 불안한 기색을 비췄다.

그래도 막상 타고 보니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는 그렇게 여로를 타고 목오 사막 횡단을 시작했다.

* * *

키에에에에에엑!

웨스트리아 왕국 남서부, 파이스 영지의 작은 숲.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몬스터가 잘려 나갔다.

아귀처럼 생겼는데, 몸뚱이의 크기는 호랑이에 근접하게 컸다.

몬스터의 정면에 있던 기사가 검을 집어넣었다.

특이하게도 갑옷은 입지 않았으면서, 머리에는 헬름만 덜렁 쓰고 있었다.

“이안.”

“잠시만요, 찾아보고 있습니다.”

기사 옆에 있던 붉은 로브 차림의 청년, 이안이 책을 팔락팔락 넘겼다.

그리고 한 페이지에서 멈추더니, 죽은 몬스터와 책을 대조했다.

책의 표지에는 몬스터 대백과라고 쓰여 있었다.

“찾았습니다. 글러터(Glurter)라고 하는 몬스터군요. 끊임없는 허기에 시달리며 눈에 보이는 걸 죄다 먹어 치운다고 합니다.”

“범인이다.”

“전부 어디로 훔쳐 갔다고 생각했는데, 먹어 치운 거였을 줄은 몰랐군요.”

“일은 끝났다. 밥을 먹을 수 있다.”

“그렇겠지요. 아, 이번에도 제가 나설 기회는 없었군요. 기사님께선 지나치게 강합니다.”

“고맙다.”

기사는 익숙한 듯 한쪽 무릎을 꿇고 글러터의 몸 일부를 잘라 냈다.

영주에게 이것을 보이면, 보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몬스터 대백과를 읽던 이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계 사이에 있는 틈에서만 발견되는 몬스터라고?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안, 뭔가 온다.”

기사의 경고에, 이안은 다급히 책을 집어넣었다.

완드를 꺼내 들고, 사주를 경계했다.

기사도 이안과 마찬가지로 집어넣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좋은 근육이다. 내가 추구하는 미와는 조금 다르지만 말이야.

괴랄한 목소리와 함께, 기사가 즉각 움직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검을 휘두른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에 의해 간단히 저지되고 말았다.

‘팔?’

그것은 보기 흉할 정도로 비대한 근육질의 팔이었다.

검을 간단하게 잡아낸 팔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근육으로 가득한 상체와 달리 터무니없이 일반적인 하체.

“이안.”

기사는 이건 또 뭐냐는 듯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눈앞의 존재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거대한 몸체에 비해 앙증맞을 정도로 작은 검은색 날개.

괴상한 생김새였으나, 공포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입소문으로나 듣던, 마족이 분명했다.

“마, 마족이 어떻게 여기에……?”

“그래. 너희들이 인간이듯 나는 마족이다. 그래도 이름으로 불러 줬으면 좋겠군.”

“지금,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다. 알아들을 수도 있다. 저번에 조금 실수를 해서 배워야 했지.”

마족은 가슴을 펴고, 둘을 내려다봤다.

“나는 스물네 번째 틈의 주인, 단속하는 자 헤르창이라고 한다.”

이안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감각을 느꼈다.

헤르창은 너무 강했다.

어떻게 이토록 강한 마족이 지상에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이안.”

“도망치십시오! 당장! 이거 보통 마족이 아닙니다!”

이안은 곧바로 마나 서클을 회전시켰다.

캐스팅을 마친 이안이 완드를 땅바닥을 향해 뻗었다.

“그리스(Grease)!”

눈에 딱 보였다.

눈앞의 마족, 헤르창의 약점은 하체가 분명했다.

저 비대한 상체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이안의 마법으로, 헤르창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미끄러진 김에 푸시 업! 후욱!

헤르창은 앞으로 고꾸라지기 무섭게,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장난처럼 엎드려 팔굽혀펴기까지 했다.

‘어떻게?’

헤르창의 손은 바닥을 뚫고 반쯤 박혀 있었다.

손을 땅에 박아, 그리스(Grease)에도 미끄러지지 않은 것이다.

시선을 이안과 기사에게 고정한 헤르창은 팔로 땅을 밀어냈다.

동시에, 날아들 듯 이안에게 돌진했다.

기사는 이안을 뒤로 밀어냈다.

“기사님!”

헤르창의 주먹이 기사를 강타했다.

-호오.

헤르창은 솔직히 감탄했다.

눈앞의 기사는 생각 이상으로 강했다.

비록 힘이 상당 부분 제한됐다고는 하나, 헤르창은 틈의 주인.

마계 외곽의 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지주다.

-처음으로 만난 상대가 이 정도로 실력자일 줄은 몰랐군.

헤르창의 손목이 잘려 나갔다.

기사가 눈 깜짝할 사이에 검으로 올려 베어 낸 것이다.

본인도 타격을 입긴 했으나, 팔을 내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만치 밀려난 기사는 헬름 너머로 헤르창을 응시했다.

“이안, 저것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생물이다. 죽여야 한다.”

“저희 둘이서는 무리입니다. 영주에게 증원을 요청하는 것이.”

“여기서 끝낸다.”

기사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본능적으로 헤르창을 지금 죽이지 않는다면, 일이 커질 거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안도 비슷한 감상이었으나, 상대는 현실적으로 너무 강했다.

‘그 기사님이.’

이안은 헬름을 쓴 기사가 워베어를 한 번에 베어 내는 것을 본 적 있다.

등급은 비록 황금이나, 이안은 확신하고 있었다.

눈앞의 기사는 황금 등급 이상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

검에 피어오르는 기운은 분명 오러였다.

‘할 수밖에 없다.’

이안은 허리에서 하얀 가면을 꺼내 들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가면이었다.

기묘하게 생긴 물건을 본 헤르창이 흥미를 보였다.

“그건 뭐지?”

“마, 마족에게 가르쳐 줄 이유는 없습니다!”

가면은 이안에게 있어서 부적 같은 것이었다.

로안 아카데미에서 한 차례 강의한 대타 강사.

훗날 레온하트의 수호자로 알려진 그에게 이안은 구원을 받았다.

지그문트는 모르고 있었지만, 이안에게 있어서 일면식도 없는 그는 정신적 지주였다.

해서 전투를 할 때면 용기를 내기 위해서 가면을 쓰곤 했다.

“후우, 준비됐습니다.”

“함께 싸운다.”

남자에게 기발한 작전 같은 건 없었다.

이안은 어차피 자신의 실력이 남자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대한 남자에 맞춰 마법으로 보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헤르창은 그들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재밌군!

검은 갑옷이 헤르창을 둘러쌌다.

갑옷이 저절로 입혀지는 모습에, 이안은 기겁했다.

평범한 갑옷이 자동으로 입혀질 리 없었다.

즉, 아티팩트였다.

“기사님!”

이안이 소리치기 전부터 기사는 움직이고 있었다.

발로 땅을 찬 기사는 헤르창을 향해 똑바로 나아갔다.

무방비한 상태로 갑옷을 입던 헤르창은 조금 당황한 듯 소리쳤다.

“인간들은 매너도 없나! 변신하고 있을 때는 공격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런 거 모른다!”

헤르창이 눈을 부릅떴다.

기사와 헤르창은 격돌했다.

카앙!

뒤로 밀려난 기사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초점이 흐려져 헤르창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일순간, 무언가로 헬름을 얻어맞은 것이다.

“아래의 갑옷에 이어, 바까지 꺼내게 만들다니.”

헤르창에 손에는 거대한 봉이 들려 있었다.

붉은색 철로 만들어졌는데, 양 끝에 무언가를 달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또한, 갑옷으로 완전 무장까지 끝난 상태였다.

방어력을 위해 무겁게 만들어진 중갑옷이 아니었다.

몸에 딱 달라붙어, 상반신의 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안 돼!”

기사는 어째서 이안이 다급하게 소리쳤는지 알 수 없었다.

블링크(Blink)라도 한 듯이 순식간에 이동한 헤르창에게 한 번 더 얻어맞기 전까지는.

헤르창은 일부러 노린 것처럼 기사의 헬름을 가격했다.

쩌엉!

속도도, 힘도 순식간에 증가했다.

아무래도 헤르창이 말한 ‘아래의 갑옷’의 효과인 것 같았다.

공중을 날아간 기사는 나무에 부딪쳐 멈췄다.

헬름 밖으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기사님! 괜찮으십니까?”

기사는 대답 없이 헬름을 벗었다.

기사의 얼굴을 본 헤르창이 흥미로운 듯한 시선을 보였다.

“후우.”

기사는 자세를 고치고 크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오러가 순간적으로 검속에 스며들었다.

* * *

웨스트리아 왕국 남서부 끝자락.

여로에서 내린 우리는 곡창 지대 사이로 뻗은 긴 길을 걸었다.

루터는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살폈다.

“신기하군요. 사막 바로 위에 논밭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오면서 강 봤잖아. 사막과 왕국령을 나누는 강인데, 그걸 토대로 만들어진 거야.”

“지그문트 님께서는 박식하시군요.”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단과 마리나와는 달리, 루터 레온하트는 소소한 부분에서도 감탄했다.

레온하트 왕성에 스스로를 가뒀던 루터다.

가장 긴 외출이라고 해 봐야 렘센에서 있었던 내 장례식에 다녀갔던 것이 전부.

그것도 대부분의 시간은 황성에서 보냈기에, 바깥을 쏘다니는 경험은 처음일 것이다.

“도련님, 저건 뭘까요?”

마리나가 가리킨 방향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무언가 농작물을 먹어 치운 것 같았다.

“들짐승 아니겠습니까?”

“아닐 거다. 들짐승 소행이라기에는 피해 규모가 너무 커.”

“그럼, 몬스터? 농작물을 터는 몬스터라…… 그런 게 있습니까?”

“있지. 드라우트 브링어라든지.”

“드라우트 브링어라. 들어 본 것 같기도 합니다.”

루터가 멈춰 서서 심각한 얼굴로 밭을 바라보았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뭐지?”

“아. 아닙니다. 레온하트에 저런 피해가 생기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드라우트 브링어는…….”

나는 걸음을 멈췄다.

희희낙락 내 손을 잡고 걷던 리옐이 덩달아 멈춰 섰다.

드라우트 브링어는 리에이트 교국 남서부의 습한 기후에서만 서식한다.

지금은 개체수도 극단적으로 적어졌을 텐데, 여기에 있는 건 명백히 이상했다.

건조할뿐더러 먹이도 물도 없는 사막을 지나왔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리나, 리옐 좀 맡아라.”

“네. 도련님. 어? 어디 가세요?”

나는 논밭으로 직접 들어갔다.

잘려 나간 작물의 잔해를 살폈다.

드라우트 브링어의 짓이라면, 갉아먹은 흔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잘려 나간 작물의 단면은 낫으로 베어 낸 듯 깔끔했다.

‘드라우트 브링어가 아니다. 그럼?’

밭의 피해 규모는 꽤 컸는데, 난잡하지 않고 일정한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마치 한 입에 집어삼킨 것처럼.

‘글러터? 하지만 그놈은 마계에 사는 놈인데.’

마계에서는 꾸준히 마족이 기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놈들은 제 몸을 깎아 가며 억지로 침입하는 것.

마계의 몬스터가 지상에 출현한 것은 다른 문제였다.

확실히 확인해야만 했다.

-신성, 이 근처에 마기가 남아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겠냐? 부탁하지.

-확인.

오랜만에 불려나온 신성이 팔락팔락 앞으로 날아갔다.

신성을 중심으로, 잔잔한 물에 돌을 던져 넣어 만들어진 듯한 파장이 퍼져 나갔다.

파장은 곡창 지대를 넘어 파이스 영지까지 닿았다.

좀 과하게 힘을 준 것 같은데.

-찾음.

-어딘데?

-저기.

신성은 드넓은 곡창지대 너머, 우뚝 서 있는 저택을 가리켰다.

파이스 영주의 저택이었다.

* * *

파이스 저택.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는 한 무리의 외지인을 발견했다.

평화로운 영지에서 이런 근무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외지인의 등장은 기사에게 있어서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어디 보자. 교국 소속인가?’

외지인들은 모두 하얀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셋은 성기사로 보였는데, 그중 젊은 둘은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잘 생겼다.

소년 성기사에게서는 차분한 위엄이 느껴졌다.

뒤이어 금발 성기사를 본 기사는 묘하게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하나 또한 남은 둘에 비해 나이가 있어서 그렇지, 멀끔한 인상의 남자였다.

“쯧. 야.”

“넵.”

“쟤랑 나랑 누가 더 잘생겼냐?”

“당연히 선배님이시지 말입니다.”

“그치? 나도 어디 가면 안 꿇린단 말이야. 훈련으로 좀 망가져서 그렇지.”

“좀 심하게 망가지셨지 말입니다…….”

“뭐?”

“예? 잘못 들었습니다.”

“그래? 뭐라고 말 했던 것 같은데.”

옆에서 같이 보초를 서던 기사에게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며, 관찰을 계속했다.

남은 건 여자 둘이었는데, 한쪽은 완전히 어린아이였다.

기사는 아닌지 비교적 가벼운 복장이었다.

아무래도 젊은 여자는 사제인 듯했다.

그 손을 꼭 잡고 걷는 어린아이는 견습으로 추정됐다.

“와, 저 사제님은 정말 예쁘지 말입니다.”

“그러네. 나도 수도로 가면 저런 여자…… 어? 이쪽으로 온다.”

외지인, 지그문트 일행은 문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 앞에 섰다.

기사는 후배 기사의 눈치를 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꿇리긴 싫었지만, 무례하게 대하기에는 너무 비범한 사람들 같았다.

저런 단촐한 옷을 입었는데도 느껴질 정도면, 필시 뭔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이곳은 파이스 백작님의 저택입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실례지만, 파이스 백작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연유를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사이한 기운이…… 이렇게 말하니 영 사기꾼 같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지그문트는 쓰게 웃더니, 파이스 저택을 올려다봤다.

“이 저택에서 마기가 느껴져서 찾아오게 됐습니다.”

“마, 마기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주 짙은 마기입니다.”

기사는 지그문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실제로 지그문트는 사실만 말했기에, 꿇릴 건 없었다.

신을 모시다 못해 아주 동행을 하고 있었고, 저택에서 마기가 느껴진 것도 사실이었다.

루터는 연기에 일가견이 있었고, 단과 리옐도 마찬가지였다.

지그문트가 말한 건 진실이었기에, 마리나 또한 기사의 눈을 피하지 않을 수 있었다.

“큼, 큼.”

오히려 기사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마리나는 객관적으로 빼어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후배 기사에게 가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백작님께 전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그문트 일행은 이윽고 돌아온 후배 기사의 안내를 받아, 저택 내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저택 내부는 네르갈에 있는 중앙 귀족의 저택 못지않게 잘 꾸며져 있었다.

곡창 지대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파이스 백작이었기에,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갑군. 조촐한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파이스 백작이라오.”

“안녕하십니까. 파이스 백작님. 저희는.”

“짐작하고 있으니, 소개는 괜찮소. 마기 때문에 오셨다고?”

“그렇습니다.”

파이스 백작은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나왔다.

지그문트가 선호하는 대화 방식이었다.

지그문트 일행은 몰랐으나, 파이스 백작은 조급한 상태였다.

팔베르크의 위스크 영지처럼 마족 숭배로 몰린다면, 사형 확정이었기 때문이다.

“자, 따라오시오.”

파이스 백작은 지그문트 일행을 한방으로 안내했다.

취미로 사냥한 동물의 머리가 박제되어 있는 방이었다.

리옐은 조금 질색하며 마리나에게 안겼다.

“아마 이것 때문일 거요.”

파이스 백작이 방 정중앙에 검은 천으로 둘러싸인 뭔가를 가리켰다.

검은 천을 젖히자, 루터와 마리나가 헛숨을 들이쉬었다.

“이건.”

“마족의 목이라오. 사제님들이 느낀 마기의 근원일 거라고 생각하오.”

눈을 감고 죽은 마족의 목이었다.

사냥이 취미인 파이스 백작은 마족의 목을 장식하고자 했다.

파이스 백작은 자신이 마족의 목을 베었다며, 경위를 설명했다.

“백작님께서 베었다고요?”

“그렇소.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

“대단하십니다.”

“과찬이군. 영지민들을 위해서 한 일이오.”

지그문트는 가만히 목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스물네 번째 틈의 주인, 단속하는 자 헤르창의 목이었다.

리옐이 지그문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빠.”

“응?”

지그문트는 리옐에게 귀를 가까이 했다.

까치발을 들고 지그문트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한 리옐이 속삭였다.

“이거, 살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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