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88/134)

6

잡혀 사는 대마법사

리옐은 세계수의 성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세계수의 유일무이한 딸이자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리옐이 단과 마리나를 데리고 온 걸 세계수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성역은 세계수의 영역이니까.

즉, 다분히 의도된 전개였다.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훈련을 하다가 우연히 이렇게 된 거다.”

“맞아요. 정말이지…… 격렬한…… 훈련이었어요.”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세계수가 촉촉하게 덧붙인 한마디로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말았다.

나는 세계수를 쏘아봤지만, 세계수는 도리어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리옐이 묘하게 연기에 소질이 있더라니.

결국 나는 설명을 포기했다.

“농담은 여기까지 할게요. 두 분은 성역이 처음이죠?”

땅에서 올라온 나무뿌리가 엮이며 의자와 테이블을 만들었다.

세계수의 권유에, 단과 마리나가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리옐은 세계수의 무릎 위로 꾸물꾸물 올라갔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왜 이이가 깨어나지 않느냐는 거죠?”

“그, 그렇습니다.”

나도 좀 내보내 줬으면 좋겠다.

세계수의 훈련은 너무 실전 지향이다.

내가 질릴 정도로 강도가 높기도 했다.

“호칭이 이상한 거 같은데.”

“당신은 좀 조용히 해요. 손님들 앞에서.”

“너 일부러 그러지?”

세계수는 만족했다는 듯 쿡쿡 웃었다.

아무래도 단과 마리나는 세계수와 만날 때 상당한 압박감을 느낄 것이다.

이번만큼은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한 농담으로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반신화는 생각보다 복잡한 개념이랍니다. 원래 이이의 힘으로는, 반신화는 어림도 없어요.”

“하지만, 도련님께서는 반신화를 통해 죽음을 쫓아냈다고 들었습니다.”

“반신화가 아니라, 일시적인 반신화죠. 이 이의 신성이 억지로 힘을 쏟아 벌인 일이에요.”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가 반신화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신성 덕분이다.

나는 9서클, 대마법사의 경지에 다다랐을 때도 인간이었다.

“지금 이 이의 육체는 인간이에요.”

“그렇다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갔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아닙니까?”

“아니요. 있어요. 전부 설명 드리긴 어렵지만요.”

세계수는 잠깐 리옐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단과 마리나가 들어도 괜찮을 정도로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성역에서 하고 있는 건 일종의 적응 훈련이에요.”

“적응 훈련?”

나도 금시초문이었다.

세계수가 나를 아무 생각 없이 굴리진 않았겠지만, 다짜고짜 굴려서 물어볼 틈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세계수가 손뼉을 쳤다.

쿵!

1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

지나치다고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힘이 어깨를 짓눌렀다가, 사라졌다.

죽음과 비슷한 막연한 압도감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더 힘에 노출됐다면 머리가 이상해졌을지도 모른다.

딸꾹.

놀란 마리나가 딸꾹질을 했다.

리옐의 대리인이라서 그런 걸까.

단보다 조금 더 민감하게 힘을 느낀 듯 보였다.

“바, 방금 그건 뭐 였나요? 히끅.”

“제 신성이랍니다.”

“그게…… 신성?”

“신성은 원래 인간의 몸으로 담을 수 없는 힘이에요.”

“확실히 알았습니다. 너무…… 거대하군요.”

시노드 교구에서 최초로 마주쳤을 때, 신성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빛이었다.

내 신성 또한 편의 때문에 페어리의 모습을 띠고 있을 뿐이다.

“도련님께서는 어떻게 그 거대한 힘을 품으신 겁니까?”

“신성이 스스로 힘을 제한했거든요.”

당연히 힘을 담는 그릇인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제한을 조금씩 풀고 있긴 했으나, 본래의 힘은 아직 반의반도 드러내지 않았다.

“사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많이 놀랐어요. 신성이 스스로를 억제할 줄은.”

“도련님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맞아요. 역시 두 분은 잘 아시네요. 이이는 좀…… 이상하잖아요.”

“음, 그건 맞죠.”

단과 마리나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억울할 따름이었다.

“나는 지극히 정상인데.”

“아빠…… 그건 좀.”

단, 마리나, 세계수, 신성은 물론이고 리옐까지 측은한 눈으로 나를 봤다.

심지어는 멀리서 정원을 가꾸던 정원지기도 그랬다.

그냥 다물고 있기로 했다.

세계수는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오러, 마나, 신성. 세 힘을 몸에 담고 있던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요.”

“기사면서 마법사인 동시에 사제인 격이니까요.”

“그 세 힘이, 동시에 한 단계씩 상승했어요.”

실제로 내 오러와 마나, 신성은 각각 한 단계씩 올랐다.

마나 서클은 완전히 동화가 끝났지만, 오러와 신성은 아직이었다.

“음식도 급하게 먹으면 체하기 마련. 힘도 급성장시키면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거든요.”

“도련님께서는 그동안 힘을 매우 빠른 속도로 상승시켰습니다.”

“이번에는 그 힘의 규모 또한 현격히 높아졌어요. 소화 능력이 뛰어나다지만, 소화시킬 시간은 필요하다는 거죠.”

발레리아나 렘브란트가 그렇듯 7서클 마법사는 국가 최고 전력으로 분류된다.

6서클과 7서클은 그 대우가 다른 만큼 큰 간극이 있었다.

7서클은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한계 정도로 취급되는 경지니까.

“오러도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서 마스터까지 올라갔으니.”

“……잠깐. 소드 마스터 말입니까?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은 건너뛰신 겁니까?”

나는 청탑주, 가우스와의 전투 때만 해도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었다.

소드 마스터와 소드 익스퍼트 상급 사이에는,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라는 경지가 존재한다.

사실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은 명확히 분류되는 오러 등급은 아니었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 중에서도, 마스터를 목전에 둔 이들.

벽을 깨지 못하고 머무르는 기사가 많았기에, 최상급을 따로 분류했을 뿐이다.

내 감상을 설명하니, 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더 노력해야겠군요.”

“부담 가지지 마라. 돌아가면 도와줄 테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스스로 해 보겠습니다.”

단은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이었다.

요아힘 월베른의 경우는 전생의 나처럼 논외로 강한 경우고, 소드 마스터는 기사들이 궁극적으로 다다르고자 하는 경지다.

그런데 내가 덜컥 소드 마스터가 됐다고 하니, 기분이 묘할 것이다.

‘나도 정진해야겠지.’

솔직히 나는 스스로를 소드 마스터라고 부를 수 없었다.

구색만 갖췄을 뿐, 신체 능력 따위는 눈에 띄게 부족했다.

마나와 신성, 아우나, 아티팩트 등을 배제하고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과 겨룬다면 필패다.

세계수는 손뼉을 쳐서 주목을 끌었다.

“어쨌든, 지금 이이는 소드 마스터 겸, 탑주급 마법사 겸, 반의 반신이거든요.”

“반의 반신은 또 뭐야?”

“반의반이지만 신은 신. 미약한 육체에 있기에는 지나치게 강한 존재가 된 거랍니다.”

“요점은?”

“이대로라면 육체가 폭발할 테니, 힘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얘기죠.”

내가 폭탄도 아니고, 걸핏하면 몸이 폭발할 위기다.

처음 마나와 오러를 동시에 받아들였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그만큼 불안정한 상태라는 거겠지.

“마나의 경우는 문제없다고 생각해요. 다른 건 몰라도 마나 컨트롤에 한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니까요.”

“그렇다면 문제는…….”

“오러와 신성. 둘인데. 신성의 경우는 아까 해결됐어요.”

세계수는 내 어깨에 걸터앉아 있던 신성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신적인 존재끼리 뭔가 통하는 것이 있었는지, 신성은 눈을 피했다.

신성이 내게 힘을 맡겼을 때, 뭔가 바뀐 모양이었다.

“남은 건 오러군요.”

“맞아요. 그러니까 오러의 안정만 시키고 돌려보낼게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나는 혀를 찼다.

“쯧. 내가 알아서 할 것을.”

“쑥쓰럽나 봐요. 남편이 호의에 영 익숙지 않아서.”

“어지간히…….”

세계수에게 한 소리 하려다가, 밑에 있던 리옐과 눈이 마주쳤다.

리옐은 조금 짓궂은 미소와 함께 기록구를 들고 있었다.

트리옌에서 했던 실언이 담겨 있는 기록구였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저게 세계수에게 넘어가면, 코 꿰이는 건 확정이다.

“……맞는 말이지.”

“어머, 여보도 자각하고 있었어요?”

“하아.”

* * *

단과 마리나는 안심하고 돌아갔다.

심지어는 정원지기와 함께 하늘정원 구경까지 하고 갔다.

성역에 오래 머무르는 건 상당히 정신에 부담이 가는 일이었다.

리옐과 세계수가 배려했기에 오래 머무를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리옐은 어떻게 할 거니?

-훗, 이 딸내미는 눈치껏 저기서 기다리겠다!

-세상에. 누구 딸인데 이렇게 착해?

-엄마 아빠 딸!

-으이구! 예뻐 죽겠어! 이리 온!

-히히!

리옐은 세계수와 격렬한 포옹을 한 뒤, 정원지기에게 갔다.

정원지기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리옐을 안아 들었다.

-매번 미안해.

-아니요. 리옐 님을 돌본다니,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정말, 정원지기 하길 잘했어요.

-그럼, 부탁 좀 할게. 시간 나면 정령술도 좀 가르쳐 줘.

-맡겨만 주세요!

세계수는 공간을 바꿨다.

연무장을 연상케 하는 곳이었는데, 세계수답게 조금 더 자연친화적이었다.

울창한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궁금했던 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너, 오러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

-땅에 존재하는 힘을 내가 모르겠어?

-그것도 그렇군.

-오러를 안정시키는 법은 비교적 간단해.

세계수는 손뼉을 쳤다.

동시에, 내 몸 속에 있던 신성이 튕겨 나왔다.

신성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와 세계수를 바라봤다.

다시 내 몸 속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더군다나, 마나 서클도 회전을 멈췄다.

-오러를 제외한 모든 힘을 차단했어.

-아무리 성역이라지만, 이런 일까지 할 수 있는 건가?

-현실이 아니니까.

-불공평하군.

신성은 조금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세계수가 양해를 구했다.

-이이를 위해서니까, 참아 줄 수 있지? 목오가 아닌, ‘지그문트 마이어의 신성’이니까!

-……물론!

-이런 부분은 또 묘하게 협조적이구나? 좋아.

능숙하게 신성을 구슬린 세계수가, 내 손 위에 제 손을 포갰다.

손 위로 검이 생겨났다.

이름 없는 검과 똑같은 외형이었는데, 뭔가 달랐다.

-당신의 오러는 정교해. 장점이지. 하지만, 정교한 것에 비해 강도는 그리 강하지 않아.

-내 오러의 강도가 강하지 않다고?

-그래. 아마 검을 잡고 얼마 되지 않아 이름 없는 검을 잡아서 그렇게 된 걸 거야.

-이름 없는 검이 뭐 어쨌길래…… 아.

-그 검은 이상할 정도로 단단하잖아.

무기에 의존하는 것은 결코 좋은 버릇이 아니었다.

활용하지 않는 건 미련한 짓이지만, 의존한다면 그 무기가 없을 때 힘을 쓸 수 없다.

내가 완드를 좀처럼 활용하지 않는 이유도 이에 있었다.

-손에 익은 감각이겠지만, 강도는 그렇지 않을 거야. 부서지지 않게 유의하길 바라.

-부서지지 않게 유의하면서, 뭘 하라는 거지?

-오러에 익숙해질 때까지 싸울 거야.

-상대가 없는데.

세계수가 손을 까딱이자, 나무 위에서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검을 쥔 엘프들이 보였다.

전부 나이대도, 얼굴도, 검의 모양도 달랐다.

-요정족 중에서 소드 익스퍼트 중급 이상에 도달했던 이들이야. 아, 전부 환영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말고 베어도 괜찮아.

-……백은 넘겠군. 나 혼자 상대하라고? 왜 너는 항상 무식한 방법을 선호하나?

-무식하긴 하지만 효율적이잖아. 그리고 내 남편인데, 이 정도는 기본으로 해야지.

-나는 네 남편이 아니고, 이건 기본도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할 거잖아.

-하아, 그래. 하긴 해야지.

신성과 마나가 없어도, 나는 이들보다 강하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대신, 저쪽은 수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다.

내 체력이나 오러에는 한계가 있다.

정신은 육체와 비슷한 한계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도 성역에서는 죽어도 죽지 않으니까, 해 볼만 한가.’

신성과 내면세계에서 했던, 나 자신과의 싸움.

그 연장선상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적응할 것이다.

세계수는 연무장 바깥으로 물러나다가, 뭔가 잊었다는 듯 멈춰 섰다.

-아 참, 말하는 걸 잊었는데, 지금 당신 정신체는 현실의 육체와 동기화된 상태야.

-뭐?

-이러지 않으면 여기서 익숙해져 봤자, 현실에서 아무런 변화가 없잖아?

-그렇다는 건.

불길함이 엄습했다.

아니나 다를까, 세계수는 상큼하게 웃었다.

-조심해. 여기서 죽으면, 당신 진짜 죽을 테니까.

-야, 잠깐만.

세계수가 훌쩍 연무장 바깥으로 나감과 동시에, 수십 개의 검 끝이 나를 향했다.

* * *

검은 땅.

희미한 형체들이 허공을 떠돌았다.

발밑에는 수백에 이르는 기사들이 죽어 있었다.

가까스로 검을 쥔 채 서 있는 기사는 한 명뿐이었다.

쩌억.

헬름이 갈라지며, 얼굴이 드러났다.

땀에 흠뻑 젖은 백발이 얼굴에 달라붙었다.

이마에서 흐른 피 때문에 왼쪽 눈을 감고 있었다.

자글자글한 주름과, 얼굴의 상처는 그가 백전노장이라는 것을 알렸다.

팔베르크 제국의 늙은 기사, 옥스였다.

“헉, 허억, 헉.”

옥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힘을 다한 손발은 한계라는 듯 덜덜 떨렸다.

등을 맡기던 동료는 싸늘한 주검이 된 지 오래였다.

모두, 눈앞의 마족이 저지른 짓이었다.

“당신은 너무 강해. 난 죽을 거야.”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것은, 마족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소년 같았으나, 옥스는 그 본체를 이미 목도했다.

저 모습은 위장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마족은 한 손으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기사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다.

우둑.

기사를 죽인 마족은 슬프다는 듯 흐느꼈다.

옥스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싼다.

공중을 떠돌던 희미한 형체, 밴시 하나가 날아와 마족의 귓가에 속삭였다.

-가셔야 합니다.

마족이 고개를 끄덕이게 무섭게, 옥스가 움직였다.

밴시가 마족과 옥스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더군다나 마족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천재일우의 기회.

스릉!

오러를 담은 검이 밴시의 목을 잘라 냈다.

밴시는 높은 비명과 함께 소멸했다.

하지만, 옥스의 목적은 밴시가 아니었다.

‘마족은……!’

검의 사정거리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밴시의 죽음과 함께, 희뿌연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마족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옥스는 한계에 가까운 몸을 채찍질했다.

‘끝내야 한다!’

숨은 쉬어지지 않았고, 팔 다리의 근육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진다면, 동료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이다.

옥스는 전심전력을 다하여 검을 휘둘렀다.

가슴 속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마족의 눈동자가 손가락 틈으로 옥스를 응시했다.

동시에, 옥스는 오른쪽 어깨에서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눈 깜짝할 새, 당했다.

옥스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견갑을 꿰뚫은 것은, 기다란 송곳이었다.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검을 놓쳤다.

텅!

옥스는 힘없이 고꾸라졌다.

다시 일어날 힘은커녕,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마족은 옥스의 바로 앞으로 걸어갔다.

“커헉!”

송곳 하나가 왼쪽 어깨에 박혀, 옥스의 몸을 땅에 고정했다.

옥스의 머리 앞에 쪼그려 앉은 마족이 옥스의 머리채를 잡고 강제로 고개를 들게 했다.

옥스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마족을 바라보았다.

무구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괴물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인 뒤 슬퍼하는 체했다.

기이한 생물이었다.

“너는…… 누구냐.”

“비관자, 두 번째 틈의 주인, 러셀.”

“어째서, 팔베르크 제국에…… 숨어든 거지?”

“나는 숨어든 적 없어. 인간들이 멋대로 마계를 침입한 거야.”

“헛소리를. 쿨럭.”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러셀이 꿇어 앉아 옥스의 머리를 껴안았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옥스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불쌍한 사람.”

“읍, 흡!”

옥스는 발버둥을 쳤다.

러셀의 복부가 안면을 압박해 호흡을 막았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질식해서 죽고 말 것이다.

그러나 양 어깨는 창과 같은 송곳에 단단히 고정된 상태.

러셀은 마족인 만큼 인간의 것을 벗어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 전력을 다한 옥스는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

“큽!”

팔베르크 제국을 위해, 황제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수많은 전투를 경험했고, 죽음에 대한 각오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명예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옥스가 상상한 최악의 죽음보다, 몇 배는 더 끔찍했다.

꼴사납게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툭.

발버둥 치던 옥스가 움직임을 멈췄다.

러셀은 옥스가 죽자마자, 머리통을 툭 바닥에 버렸다.

종아리에 묻은 흙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공을 떠돌던 밴시 한 마리가 러셀에게 다가왔다.

-가셔야 합니다.

-알아. 가자. 명분은 처리했다고 전해 줘.

-전하겠습니다. 저 기사는 어떻게 할까요?

밴시는 죽은 옥스를 바라보았다.

러셀이 소중한 듯 껴안았기에 신경을 쓴 듯했다.

반면, 러셀은 왜 이상한 걸 물어보냐는 듯 밴시를 바라봤다.

-내버려 두면 헬 하운드들이 먹지 않을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마지막까지 버텼으니까, 기념으로 묘비라도 세워 주자.

러셀이 공중을 움켜쥐었다.

손아귀 안에서 옥스를 꿰뚫었던 기다란 송곳이 나타났다.

러셀은 송곳을 옥스의 머리에 내리꽂았다.

* * *

스릉!

검날이 머리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머리를 옆으로 틀었기에 망정이지, 자칫 했으면 미간이 뚫렸을 것이다.

이름 없는 검을 휘둘러 대응했다.

화악!

검이 엘프를 베어 냄과 동시에, 엘프의 몸이 안개처럼 공중으로 흩어졌다.

치명상을 입히면 곧바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한 번에 달려들 수 있는 수는 열이 채 안 된다는 것.

불행인 점은 열을 베어 내도 열이 다시 달려든다는 것이었다.

“하아, 하아.”

마나 번(Mana Burn)으로 강화하지 않은 신체는 굼뜨게만 느껴졌다.

검날은 오러를 버티지 못하고 부러질 것처럼 불안하게 울었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빠르다!’

엘프들은 타고난 신체 자체가 가는 편이다.

태생적으로 근육의 양이 많지 않기에, 힘이 강한 부류는 없었다.

대신, 마이어가의 검술처럼 빠른 검을 사용했다.

상대하기는 더없이 까다로웠다.

“큭!”

피하기만 해서는 바로 추가 공격이 이어진다.

하나의 군락이라도 되는 듯, 엘프들은 서로의 움직임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피할 틈이 있으면, 그 틈을 노리고 있는 엘프도 있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신경을 차단했겠지만.

‘오러만으로는……!’

오래 전부터 자각하고 있었다.

내 검술은, 결코 마법과 동등한 수준이 아니다.

전생의 전부, 그리고 지금까지 쭉 다룬 것이 마법.

반면 검술은 환생한 후부터 조금씩 익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대련한 건데.’

단과의 대련에서, 나는 마나와 신성을 배제했다.

하지만 목숨을 건 전투는 대련과 큰 차이가 있었다.

멈출 생각을 안 하고 들어오는 검은, 속도부터 달랐다.

-화이팅!

나를 둘러싼 엘프들의 몸 사이로 연무장 바깥이 보였다.

그늘 아래에서 구경하고 있는 세계수와 눈이 마주쳤다.

세계수는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생고생하고 있는데, 그늘에서 신성과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눈다.

‘열받아!’

일부러 약 올리는 건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어떻게든 엘프들을 뚫고 나가리라 마음을 굳혔다.

-다 끝나면 상 줄게!

손에 뽀뽀를 하더니, 이쪽으로 날려 보내는 시늉까지 한다.

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꿀밤 한 대만 때리게 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검을 움켜쥐었다.

급할 필요 없다.

‘오러의 강도.’

세계수는 말했다.

내 오러는 정교한 것에 비해 강도는 그리 강하지 않다고.

이름 없는 검을 사용한 탓이었지만, 지금 잡은 검은 그렇지 않다.

아마 이대로라면 얼마 못 가 부러질 것이다.

스릉!

나는 가까스로 검을 피했다.

엘프들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싸우면서 안정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내적인 부분에 집중하니, 오히려 급급함이 사라졌다.

“후우.”

확실히 내 검술은 내 마법만 못 하다.

그렇다고, 내가 이들보다 검술을 못 쓴다는 건 아니다.

긴 교전이 예상되니, 호흡은 고르게.

상대가 많으니, 그 부분을 이용한다.

늙은 엘프 하나가 검을 높이 들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잡았다.’

가장 가까이 접근한 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쪽으로 잡아끌어 균형을 잃게 한 동시에 검로를 차단한다.

늙은 엘프가 검을 멈췄다.

잠깐의 틈.

‘기억해야 한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면세계에서 본, 이름 없는 검 안에 있는 또 하나의 검.

방패보다 단단하며, 검보다 날카로운 듯한 검.

오러를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머금은 듯한 감각.

우웅.

검날을 감싸고 있던 오러가, 검날에 흡수됐다.

검 손잡이와 손바닥이 달라붙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었다.

나는 검을 휘둘렀다.

스릉!

단숨에 수십에 달하는 엘프가 사라졌다.

개중에는 검으로 방어를 시도하는 엘프도 있었으나, 엘프의 검날을 감싼 오러는, 아주 간단하게 잘려 나갔다.

-멋지다! 내 남편!

연무장 바깥의 세계수가 어디선가 가져온 반짝이는 봉을 흔들었다.

응원하는 것 같긴 한데.

왜 이리 기분이 나쁠까.

-넌 끝나고 보자!

-어머. 끝나고 뭘 하려고. 짐승.

-콩트 좀 그만해!

제 몸을 감싸며 수줍은 채 하는 세계수.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직 엘프 검사들은 많았다.

나는 다시 분투를 시작했다.

* * *

-엄마!

정원지기의 손을 잡은 리옐이 연무장을 찾아왔다.

지그문트를 넋 놓고 구경하던 세계수가 깜짝 놀랐다.

-리옐!

-나도 아빠 훈련하는 거 구경해도 돼?

-상관은 없는데…… 으음.

세계수는 정원지기를 바라봤다.

정원지기는 난처한 듯 웃었다.

-정령술을 그렇게 빠르게 익히실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 리옐, 벌써 정령술 다 익혔어?

-응! 정원지기 언니가 나 재능 있대!

정원지기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옐은 물을 흡수하는 스펀지처럼 배우는 족족 완벽하게 해내 버렸다.

세계수는 그런 리엘이 기특하다는 듯 어쩔 줄 몰라 하며 입가를 씰룩였다.

그리고 잠깐 기다리라며 눈을 감았다.

-르네. 르네. 내 얘기 좀 들어 보려무나.

-네! 어머니! 무슨 일이신가요!

-아니, 우리 리옐이 글쎄……!

-아아, 또 이 얘기…….

세계수는 머릿속으로 르네에게 전언을 보냈다.

르네에게 온갖 주접을 다 떤 뒤, 전언을 끊었다.

그래도 감정이 주체되지 않아, 리옐의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었다.

-아빠 닮았나 보다!

-맞아! 아빠도 닮았고! 엄마도 닮았어!

-엄마의 어떤 부분이 닮았을까?

-귀여운 부분!

-으음? 자기가 귀여운 건 아는구나! 요 녀석!

리옐은 세계수의 무릎 위라는 특등석에서 지그문트의 훈련을 구경하게 됐다.

지금, 둘이 달리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며 응원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남편! 아내랑 딸내미가 응원하고 있어!

-아! 좀! 집중하고 있었는데!

리옐은 세계수가 지그문트를 놀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러다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세계수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엄마, 엄마는 왜 아빠를 놀리기만 해?

-응?

-아빠를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하면 되는데!

세계수는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뻐끔거렸다.

적당히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리옐의 순진무구한 눈을 보고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뭐라 말하려던 세계수는 몇 번이고 주저했다.

그리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건 부……

-부?

-부, 부끄럽잖니……?

움츠러든 세계수는 안절부절못하며 지그문트의 눈치를 봤다.

정작 지그문트는 엘프들을 상대하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금 안도한 세계수는 손부채를 부쳤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진정한 세계수는 리옐에게 신신당부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람. 딸, 이건 아빠한테 비밀로 해 주지 않을래?

리옐이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마는 귀여워!

* * *

-정말 괜찮으신 거죠?

“그래. 멀쩡하다.”

-정말 정말 괜찮으신 거죠?

“그래. 정말 정말 멀쩡하다.”

-정말 정말 정말…….

“그만해.”

깨어나자마자 통신구로 연락을 해 온 발레리아에게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어째 입장이 뒤바뀐 것 같지만, 날 돕기 위해서 바다까지 건너온 제자다.

그 정도 권리는 있다고 생각했다.

“레온하트 왕국은 어떻더냐?”

-스승님께서 걱정하시는 게 기우라고 느껴질 정도로, 평온해요.

“팔베르크가 너무 조용한 점이 걸리는데 말이야.”

-불사의 교단과 이어져 있다고 했으니, 타격이 간 거 아닐까요?

“청탑주를 비롯한 불사의 신자들은 제국과 연관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불사의 신자들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손 안에 있는 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발레리아는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발레리아에게 불사의 군대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했다.

-그렇다면, 불사의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교단과 거래했다고 보는 편이.

“맞겠지. 아마 인간이나, 리에이트 교국에서 빼돌린 성물을 대가로 아그나를 받았을 거다.”

-으음, 단순히 아그나를 제공 받기 위해서 그런 손해를 감수했을까요?

“설마, 그놈이 그럴 리가 있나.”

-역시 그렇겠죠.

라그힐 팔베르크의 자세한 꿍꿍이는 알 수 없다.

전생의 나도 속인 놈이니, 그 의중을 파악하기 어렵다.

최대한 계획에 차질이 생기도록 움직이고 있지만.

“분명 뭔가 있을 거다. 너무 안일하게 있지는 마라.”

-괜찮아요. 레온하트 왕가에서도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으니까요.

“루터 레온하트?”

-맞아요. 어린애 주제에, 머리가 잘 돌아가더라고요.

루터 레온하트도 보통 인물은 아니다.

둘째 왕자인 시프 레온하트는 엘비아를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 왕세자 책봉은 거의 확정 사항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연합 건은 어떻게 됐지?”

-그 부분은 레온하트 왕가 쪽에 완전히 맡겼어요.

“정치적인 부분은 어쩔 수 없나.”

발레리아는 레온하트 왕국에 ‘위치’해 있을 뿐, 소속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에 왕가에서 내린 작위를 거부하고 로안이라는 성씨를 쓰는 것이었다.

레온하트 왕국 대청소에 손을 빌려준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발레리아는 정치적인 일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자 한다.

“그래도 네가 껴 있으면 좀 더 믿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으음, 나중에 스승님이 나라 하나 세우시면 생각해 볼게요.

“안 세울 거다.”

-왜요. 마법 왕국 같은 거 하나 세울 법한데! 멋지잖아요.

“싫어. 피곤한 건 질색이다.”

-그래요? 피곤한 일을 사서 하시길래, 즐기시는 줄 알았죠.

“어째 말에 뼈가 있다?”

-헤헤.

어쨌거나 엘비아까지 와서 단에게 ‘이름 없는 검’을 직접 가져다 준 것도.

청탑주와 맞서 싸우고, 봉인 술식 가동하느라 탈진한 것도 얘였다.

차마 내가 화를 낼 입장은 아닌 것 같았다.

“고맙다. 수고했어.”

-당신 누구야? 우리 스승님은 이런 말 안 해.

“통신 끊는다.”

-아아! 자, 잠깐만요! 기록 기능 켜 놓을걸! 한 번만 더……!

나는 통신을 끊었다.

연합 건에 대해서는 따로 왕가와 얘기할 필요가 있었다.

조만간 르네가 네르갈로 갈 일이 있다고 하니, 그때 따라가면 될 것 같았다.

‘2주.’

자그마치 2주일 동안 성역에 있었다.

성역과 현실의 시간은 뒤죽박죽이기에, 내가 느낀 시간은 훨씬 짧았다.

그러나 성역에서 얻은 것은 결코 적지 않았다.

오러와 신성의 안정화.

이것은 말처럼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미약한 육체에 있기에는 지나치게 강한 존재가 됐다고 했지.’

9서클, 대마법사의 경지에 올랐을 때가 떠올랐다.

내 심장은 아홉 개의 서클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했다.

그렇기에 마법을 통해 억지로 심장을 뛰게 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그보다 경지는 낮지만, 힘이 셋.’

육체는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건, 마나 컨트롤 능력 덕분이다.

신성은 애초에 충돌하는 힘이 아니니, 문제 될 건 사실상 오러뿐이었다는 얘기다.

지금은 세계수의 훈련을 통해 오러마저 안정시켰다.

‘한계점이 높아졌다.’

육체라는 그릇 자체는 그대로였다.

다만, 힘 자체를 압축해서 더 많이 담을 수 있도록 여유 공간이 생긴 것이다.

세계수가 아니었다면 아마 7서클에서 한계에 부딪쳤을 것이다.

좀 심할 정도로 굴리긴 했지만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힘뿐만 아니라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방법도 생각해 봐야겠어.’

이미 반의반은 신이라지만, 인간을 포기하긴 싫었다.

내가 무슨 석가면 쓴 흡혈귀도 아니고.

“아빠!”

문 밖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칵 문을 열고 들어온 리옐이 쪼르르 다가와 대뜸 머리를 들이밀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가, 흠칫했다.

‘내가 왜……?’

언제부턴가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나를 세뇌하다니, 무서운 아이다.

일단 쓰다듬던 건 마저 쓰다듬기로 했다.

만족한 리옐이 내 무릎 위로 올라왔다.

“엄마가 와 보래!”

“근데 왜 올라오냐?”

“안 돼?”

“안 되는 건 아닌데.”

움직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리옐을 들어 올려야 했다.

올라오자마자 땅에 내려놓기는 좀 그래서, 안아 들었다.

리옐은 익숙한 듯, 한 팔을 내 목에 감았다.

‘설마, 이걸 노리고?’

나는 리옐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 치의 다른 의중도 없어 보이는 맑은 눈동자.

눈망울이 똘망똘망하니 커서 귀엽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설령 리옐이 모든 걸 노리고 움직였다고 해도, 깜찍하다는 감상 정도밖에 들지 않았다.

“아빠?”

“아니다. 가자.”

“좋아!”

* * *

발레리라 로안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뉘이고 쭉 기지개를 켰다.

퀸틴에서 귀환하고 2주가 흘렀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만큼 무지막지한 양의 업무가 쌓여 있었다.

마탑주의 방에 쌓여 있는 서류의 탑을 봤을 때, 괜히 따라갔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추호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좋은 거 봤다! 으헤헤!”

피곤이 싹 날아간 기분이었다.

의자가 기우는 것도 신경 안 쓰지 않던 발레리아는 결국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자빠진 뒤에도 허공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몸을 베베 꼬았다.

의자 넘어가는 소리에 놀란 적탑의 마법사들이 황급히 계단을 올라왔다.

비상사태라고 판단했는지, 다짜고짜 문을 열었다.

“적탑주님! 괜찮으십니까!”

“어? 괜찮아. 완전 괜찮아. 나가 봐.”

“저, 적탑주님?”

발레리아 로안은 극도로 낯을 가리는 경향이 있다.

딱 한 번, 스승의 부고를 들었을 때 외에는 감정을 드러낸 적 없다.

발레리아가 생글생글 웃는 걸 목도한 건, 적탑의 마법사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마탑주의 방에서 나왔다.

한 마법사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있잖아. 나 심장이 이상해.”

“그거 부정맥이야.”

* * *

엘비아는 축제 분위기였다.

원래는 세계수의 신살이 지워지는 것을 자축하는 축제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계수의 부군 격인 지그문트 마이어가 쓰러지며 예정이 취소됐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깨어나면서, 축제가 시작됐다.

“지그문트 공!”

“시프? 너는 여기 아주 눌러 사는구나.”

“하하! 신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어 영광일 따름입니다!”

지그문트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레온하트 왕국의 둘째 왕자, 시프 레온하트와 마주쳤다.

엘비아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기에 놀라진 않았으나, 경계를 허물고 얼큰하게 취한 시프는 처음 봤기에, 생소했다.

“한 잔 받으시렵니까?”

“됐다. 애도 있는데.”

“아아, 아쉽군요. 여기라면 독살 걱정 안 하고 마실 수 있는데 말입니다!”

“왕족도 보통 일이 아니군.”

술을 마시기 전에 독살부터 걱정해야 한다.

전생의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독을 확인하는 건 비교적 간단한 일이었다.

마법을 쓸 수 없고, 그렇다고 무력이 뛰어나지도 않은 시프다.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웠던 나와 비교하기는 어려웠다.

“술 냄새.”

“허윽, 리옐 님. 오늘도 귀여우십니다.”

콧잔등을 찡그린 리옐이 코를 잡았다.

시프는 그런 리옐이 귀엽다는 듯 몸을 꼬았다.

-큭.

-부럽다.

뒤에서 질투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깥에 나온 후로 지그문트를 따라다니는 요정족이 있었다.

세계수가 공인으로 인정한 리옐 팬클럽이었다.

“취했군.”

“기분이 좋아서 말입니다! 하하하!”

“왜?”

“불사의 교단이 박살 나고 세계수님께서 살아남으셨잖습니까!”

“너도 불사의 신자였잖아.”

“어리석은 과거의 시프 레온하트입니다! 저는 새로 태어났습니다! 세계수님의 은혜로!”

지그문트는 조금 죄책감을 느꼈다.

물론 불사의 괴물 같은 사이비를 섬기는 것보다는 나았으나, 시프는 조금 광적으로 세계수를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애 하나 망쳐 놨군.’

세계수에게 시프를 데려간 장본인은 지그문트였다.

진짜 신을 마주하고, 스스로 이단이라는 것을 깨우치길 바란 것이다.

세계수가 조금 과하게 힘을 주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

“나중에 연합 건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은데.”

“연합…… 아, 세수하고 오겠습니다.”

“천천히 해. 세계수 좀 만나고 와야 하니까.”

“무진장 부럽습니다. 아, 나도 세계수님이랑 독대하고 싶다.”

리옐은 성역의 문이 아닌, 르네의 방으로 지그문트를 안내했다.

르네의 방 앞에는 마리나가 대기하고 있었다.

“뭐야?”

“아빠, 내려 줘.”

리옐을 내려 주니, 이번에는 마리나에게 가서 안긴다.

마리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도련님, 저희는 바깥에 있겠습니다.”

“같이 들어가도 될 텐데.”

리옐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껌딱지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좀처럼 지그문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리옐이다.

그러나 세계수의 언질이 있었기에, 지금은 마리나를 따라가기로 했다.

지그문트는 르네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당신.

눈을 감고 있는 르네가 앉아 있었다.

슬며시 눈을 뜨자,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보였다.

세계수였다.

지그문트는 세계수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로 부른 거지? 할 말이 있으면 성역에서 했으면 됐을 텐데.

-어휴, 이렇게 무드가 없어서야.

-무드 같은 소리하고 있네. 뭔데?

-상을 준다고 했잖아.

세계수는 책상에 작은 열매를 올렸다.

자두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열매였다.

겉보기에는 보석 같기도 하고, 얼음 같기도 했다.

-이게 뭐지?

지그문트가 알고 있는 종류의 열매가 아니었다.

즉, 극도로 희소한 것이라는 얘기였다.

세계수는 살포시 얼굴을 붉혔다.

-이거라니. 우리 둘째한테.

지그문트의 얼굴이 썩어들어 갔다.

세계수는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장난이야. 화내지 마.

-이그룬타를 죽이는 게 아니었는데.

-마음에도 없는 말 하기는.

세계수는 손을 살짝 움직였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아공간 주머니가 스르륵 열렸다.

그곳에서 나온 건, 세계수의 나뭇잎이었다.

-달여 먹으라고 줬더니, 이상한 데 쓰고 말이야.

-그래서, 이건 뭔데?

-상이라니까, 상. 아, 해 봐.

-아?

지그문트가 잠깐 입을 벌리게 무섭게.

저절로 떠오른 나뭇잎과 열매가 지그문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지그문트는 놀라 반사적으로 입을 닫았다.

그러나 열매와 나뭇잎은 기체처럼 바뀌어 지그문트의 몸속으로 흡수됐다.

-후후, 방심했구나.

-뭐야?

-상이라니까. 상. 좋은 거야.

-내 몸에 뭐 했냐.

세계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묘하게 입꼬리를 씰룩이고 있었는데, 지그문트로서는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매번 나뭇잎으로 연결하기 힘들잖아.

-그래서, 몸에 아주 심었다? 리옐은 어쩌고?

-우리 딸한테는 더 좋은 걸 해 줬으니까 걱정 마셔.

-그럼 열매는 뭔데?

-내 열매야.

지그문트는 눈을 깜빡였다.

세계수는 자신의 씨앗이 담긴 아티팩트, 탄생을 건넨 적 있다.

-설마, 내가 지금 애를 먹은 건 아니겠지?

-아니거든? 열매 안에 씨앗 없었잖아.

-그도 그렇군. 그럼 뭐지?

-그릇이 부족해 보여서, 내가 한 단계 끌어 올려 줬어.

-영약 같은 건가.

-그거랑 비교하는 건 어떨까. 수준이 많이 다를 거야.

지그문트는 심장에 손을 얹었다.

힘이 올라가면 바로 알 수 있지만, 그릇의 크기가 늘어난 건 인식하기 어렵다.

당장 뭐가 달라졌다고 느끼긴 어려웠다.

-성역에서 이런 걸 줄 수는 없으니까.

-그도 그렇군. 용건은 이게 끝인가?

-이 무미건조한 사람 같으니. 하나 더, 당부하고 싶은 게 있어.

-뭐지?

-바라가 죽었다는 거, 알고 있지?

-들었어.

퀸틴의 신어, 바라는 불사의 괴물을 온몸으로 저지한 끝에 최후를 맞이했다.

성격에 안 어울리는 죽음이었으나, 그 덕에 불사의 괴물을 죽일 수 있었다.

애초에 불사의 괴물의 봉인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도 그놈이니까.

-이번 전투로 땅에 사는 신이 둘 죽었어.

-하나가 아니고?

-이그룬타는 신이 아니게 됐지만, 그 역할은 하고 있었거든.

-설마…… 죽이면 안 됐던 건가?

-그랬다면 내가 죽었겠지. 옳은 선택이었지만.

세계수는 눈을 감았다.

-이제 땅에 남은 신은 나 하나야.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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