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비 효과
-신성. 시험을 보고 싶은데.
-시험?
신의 힘을 인간이 오롯이 다루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신성은 제 힘의 상당한 부분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 제한을 푸는 방법이 신성의 시험이었다.
-그래. 트리옌에서 못 봤잖아.
-지금?
신성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간헐적으로 굉음과 함께 땅이 뒤흔들렸다.
불사의 괴물은 이미 상당히 퀸틴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인어들은 전력으로 항전하고 있지만, 약화 정도가 한계일 것이다.
전력을 끌어 올려야 했다.
지금 상태로는, 불사의 괴물에게 다가가는 것도 어렵다.
-아직 자격이 부족한가?
-아님.
-그럼 부탁한다.
리에이트 교국에서, 신성의 시험은 시간을 소모하지 않았다.
설령 시간을 잡아먹는다고 해도, 불사의 괴물이 퀸틴에 다다르기 전까지 마치면 된다.
지금까지는 신성을 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언젠가 나도 모르게 조건을 충족한 모양이었다.
‘트리옌에서 넌지시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고 말해 줬지.’
신성은 강하다.
비단 아우나(Aunar)에 일조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내 몸에 부담이 갈지언정, 발휘하는 힘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제한을 푼다면, 필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팔락팔락 내 얼굴 앞으로 날아온 신성은, 작디작은 손가락으로 내 미간을 꾹 눌렀다.
“허억.”
머릿속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나는 내면세계로 들어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초원.
저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거대한 반구형의 장막이 초원을 감싸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건 뭐지?”
“장벽.”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페어리 모습을 한 신성이 나타났다.
저번에 봤던 큼직한 본체는 보이지 않았다.
“뭘 막으려고?”
“시선.”
상대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고 할지라도, 나를 꿰뚫어 보지 못한다고 했다.
죽음 또한 내 위치를 특정하지 못한다.
아마 저 장막이 나를 숨겨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장막을 구경하다가, 몸을 풀었다.
“그래서, 이번 시험은 뭐냐?”
저번 시험은 오러와 마나 없이 나 자신을 이기는 것이었다.
무력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각을 바라는 문제 풀이에 가까웠다.
그 전에는 신성에 대해서 잘 몰랐으니 무식하게 부딪쳤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간단.”
신성은 휙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신성의 앞에서 무언가 나타났다.
내가 종종 사용하는 수통이었다.
신성이 다시 한번 손을 움직이자, 수통이 내 손으로 유유히 날아왔다.
나는 수통을 받아 들었다.
물이 가득 차 있는 듯, 약간 무게감이 있었다.
“끝임.”
신성은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신성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설마 수통을 받아 드는 것이 시험의 내용일 리는 없다.
아니나 다를까, 수통이 사라졌다.
신성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뭐 함?”
“뭐, 시험이 뭔지 알려 달라니까?”
“다시?”
신성은 다시 한번 제 앞에 수통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휙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설마 지금, 나보고 창조를 해 보라는 거냐?”
“못 함?”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신성이 신의 힘이라고 한들, 신이 하는 일을 하라니.
나는 신성이 건넨 수통을 내려다보다가, 막막한 느낌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험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 * *
나는 즉석에서 수통을 생성하는 마법을 만들어 냈다.
마법으로 만든 수통을 신성에게 보여 줬지만, 신성은 양팔을 교차해 엑스를 만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다음에는, 저번 시험을 생각해서 신성에게 부탁을 해 봤다.
“신성, 수통 만들어 줘.”
“싫음.”
이것도 아니었는지, 실패했다.
나는 다시 골똘히 고민해 보기로 했다.
단순히 수통을 만드는 것이 시험의 내용이라면, 첫 시도에서 성공했을 것이다.
‘신성의 시험에는 어떤 깨달음이 뒤따랐다.’
이를테면 저번 시험에서는, 신성이 내 힘이라는 자각을 일깨웠다.
그것은 정답으로 이어졌고, 시험에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뭔가를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수통 말고, 다른 건 만들어 줄 수 있나?”
“뭐를?”
“이를테면…….”
“가능.”
굳이 말하지 않아도, 신성은 내가 원한 것을 척척 만들어 보였다.
대장간과 여러 도구를 비롯한, 온갖 물건들.
가죽이나 금속도 뚝딱 나타났다.
나는 팔을 걷어붙였다.
“주조는 오랜만인데.”
부여술을 배울 때 흥미가 생겨, 주조술도 어느 정도 익혀 두길 잘했다.
몇 시간에 걸쳐, 나는 주어진 재료로 수통을 하나 만들어 냈다.
신성이 만들었던 것과 재료도 크기도 모양도 완벽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수통을 건네자, 신성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님.”
“그러면 만들기 전에 말해 줘도 되잖아?”
“심사.”
자기는 심사위원이라는 듯, 어디선가 안경을 꺼내 쓰고 공중에서 다리를 꼬았다.
그다지 얄밉지는 않았다.
저번 시험처럼 거듭해서 죽을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 시험은 더 막막했다.
신성이 원하는 걸 알 수가 없었다.
‘저번과 달리, 시험을 정확히 말로 명시하지 않았어.’
신성은 행동으로 시험 내용을 보였다.
휙 손을 내젓는 일련의 동작으로 수통을 만들었다.
마법을 사용한 것도, 누군가에게 부탁한 것도, 직접 공을 들여 주조한 것도 아니다.
하늘에 사는 신들이 할 법한 창조였다.
‘이게 가능한 얘긴가?’
나는 인간이다.
신을 따라할 수 있을지언정, 신이 아니다.
신성의 힘을 빌린다면 가능하겠지만, 신성은 이를 거부했다.
‘잠깐.’
이곳은 내 내면의 세계지, 현실이 아니다.
신성도 지상에서 못 하는 일을 척척 해 보이곤 했다.
목오를 만들어 보여 준다든가, 내 분신을 만들어 낸다든가.
‘분명, 몽계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다.’
프라우드 산맥, 청동 협곡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메어리 남매에 의해 끌려간 몽계.
거기서 메어리들이 힘을 쓰는 방식은, 상상 이상으로 독특했다.
몽계에서 힘을 사용하는 방법은 지상과 달랐다.
꿈을 조종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강한 의지가 필요했다.
‘굳이 말하자면, 의지보다는 상상력인가.’
실현을 할 수 있는 굳은 믿음과, 그것을 연상하는 능력.
온갖 조건을 맞춘 끝에, 나는 몽계에서도 힘을 쓸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면세계에서도 비슷하지 않을까.
시도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 * *
세계수는 복잡한 눈동자로 불사의 괴물을 올려다봤다.
증오와 연민,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 쳤다.
달싹이던 입술이 열렸다.
-이그룬타.
세계수의 부름에, 불사의 괴물이 고개를 내렸다.
증기 사이로 드러난 붉은 눈과 시선이 교차했다.
한때 신이었던 괴물, 남쪽의 신인(神人).
이그룬타와 세계수가 다시 한번 조우했다.
팔을 멈춘 이그룬타는 대답 대신 특유의 하늘이 울리는 듯한 괴성을 내질렀다.
-이제 말하는 법조차 잊은 건가요.
세계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불사의 괴물은 세계수를 향해 맹렬한 적의를 드러냈다.
퀸틴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고, 세계수를 향해 똑바로 섰다.
괴물의 손바닥이 다시 한번 태양을 가렸다.
쿠구구구……!
낮은 파공음과 함께, 불사의 괴물의 손바닥이 정기선을 향해 내려왔다.
그 여파만으로 수면이 움푹 파이며, 옆에 있던 다른 정기선 하나가 옆으로 크게 기울었다.
세계수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닙니다.
세계수의 분위기가 완전히 변모했다.
평소의 온화하고 장난스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모르는 것 같으니, 알게 해 드리죠.
그 순간, 서부 해역에 있는 모든 이들이 느낄 수 있었다.
신이, 이곳에 강림했다는 것을.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바다에서 무언가 솟구쳐 올라왔다.
그것은 불사의 괴물의 머리를 관통해, 하늘에 드리운 먹구름을 꿰뚫었다.
인어들도, 엘프들도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한 드라이어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무?
바다에서 솟아오른 건 한 그루의 나무였다.
두께는 작은 마을 하나를 아우를 수 있을 정도였고, 높이는 하늘에 닿을 정도의 거목.
머리가 산산이 조각난 불사의 괴물은, 잠시 멈췄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기선을 내리치려던 손으로 거목을 덥석 붙잡았다.
우드득.
완력으로 나무가 부러지며, 불사의 괴물의 열기로 불타올랐다.
머리가 폭발해도 움직이는 모습에, 엘프들은 질색했다.
세계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로 신경도 안 쓰는 모습이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불사의 괴물을 응시했다.
무언가 올라오기를 독려하듯, 내렸던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쾅! 쾅! 쾅! 쾅! 쾅!
각기 다른 방향에서, 다섯 그루의 거목이 연달아 올라왔다.
거목이 창처럼 불사의 괴물을 꿰뚫었다.
교차하듯 얽힌 거목 사이로, 불사의 괴물이 경련했다.
몸은 꾸역꾸역 재생됐으나, 신체를 관통한 나무가 그것을 막았다.
“허.”
압도적인 힘 앞에, 퀸틴의 인어들이 말을 잃었다.
세계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무언가를 잡아당기듯, 살짝 든 손을 뒤틀었다.
까드드득!
수직으로 뻗어 있던 거목들이 휘어지며, 불사의 괴물을 옥죄기 시작했다.
나무에 짓눌려 온몸이 뒤틀린 불사의 괴물이 낮은 포효를 내질렀다.
쿠오오오오오!
불사의 괴물을 중심으로 물결이 퍼져 나갔다.
청력이 민감한 엘프들은 인상을 쓰며 귀를 틀어막았다.
세계수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힘을 준 양손을 뒤틀었다.
그럴 때마다 거목이 불사의 괴물을 더욱 강하게 죄었다.
뚝.
돌연 불사의 괴물이 움직임을 멈췄다.
서부 해역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든 이들이 거목에 갇힌 불사의 괴물을 주시했다.
-쿨럭.
-어, 어머니!
세계수가 기침을 하며 풀썩 주저앉았다.
입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흰 팔뚝 위로 검은 잔가지 같은 무언가 올라왔다.
신을 죽이는 힘, 신살이었다.
-역시, 상성이 안 좋네요.
세계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개입도 한계를 넘어섰고, 신살까지 나타났다.
더 이상의 강림은 너무 위험했다.
더 지체한다면 세계수뿐만 아니라 르네의 육체에도 영향이 갈 것이 분명했다.
-큭. 아직…….
이내, 르네의 눈동자가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팔뚝을 좀먹던 신살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림이 풀린 것이다.
쿠구구구!
불사의 괴물 또한 이를 느낀 모양이었다.
거목 사이로 용암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무가 불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사이 진형을 갖춘 인어들이 정령술을 사용한 포격을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하지만 불사의 괴물에게서 뿜어 나오는 열기는 더욱 강해진 상태였다.
정령의 물은 나무에 붙은 불을 끄기도 전에 증발해 버렸다.
한편, 엘프들과 가디언들은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다.
자칫 거목에게서 불사의 괴물이 풀려나는 걸 돕는 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쿵……!
그때, 지축이 뒤흔들렸다.
불사의 괴물은 묶여 있기에, 그 발소리는 아니었다.
진형을 갖춘 인어들의 선박 뒤쪽에서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신?”
불사의 괴물에게 한 차례 밀린 뒤, 바닷속으로 모습을 감춘 숲의 거신이었다.
하늘 위에 있던 룬달은 거신의 머리 위에 올라탄 누군가를 볼 수 있었다.
어째선지, 요정족의 증원이 왔을 때보다 더한 든든함이 가슴에 들어찼다.
“지그문트 님!”
지그문트 마이어가, 전장에 발을 들였다.
항구 앞으로 마중을 나온 거신의 머리 위에 올라, 서부 해역으로 향했다.
불사의 괴물, 이그룬타가 거목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숲의 거신이 여기까지 왔나 했는데.
‘세계수.’
평범한 드라이어드의 힘으로는, 저런 걸 만들 수 없다.
리옐이 종종 식물을 급속도로 성장시키는 것과 같은 종류의 힘.
하나, 그 규모 면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아마도 하이엘프, 르네의 몸을 빌린 세계수가 한 일이겠지.
‘결국 나섰나.’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닌 데다가, 제 영역도 아닌지라 힘을 제대로 발휘하진 못한 것 같았다.
개입할 수 있는 선도 한계를 넘어섰을 것이다.
강림도 진즉에 끝난 듯, 신의 존재감 대신 은은한 꽃향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 정도로 타격을 줬다는 건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몸을 꿰뚫은 거목 때문에 재생이 상당히 지연된 상태였다.
나는 통신구를 꺼내 들었다.
“발레리아.”
-네, 스승님. 신호 주시면 가동할게요.
봉인에 필요한 마법사는 최소 둘이다.
봉인술식을 가동하는 마법사와, 대상과 술식 간의 매개 역할을 할 마법사.
청탑의 마법사들이 없다고 해도, 퀸틴에 마법사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발레리아와 합을 맞출 만한 수준의 마법사는 나뿐이었다.
‘저거에 가까이 간다는 점이, 조금 부담스럽긴 하다만.’
아직 불사의 괴물과 거리가 꽤 있건만, 벌써부터 열기가 느껴졌다.
몸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바다에 부딪치며 유독 가스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봉인술식은 직접 접촉해 매개하는 것이 제일 좋았다.
“할 수 있겠냐?”
-할 수 있어요.
“무리는 하지 마라.”
-걱정 마세요. 제가 누구 제잔데요.
발레리아는 사뭇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통신구를 확인해 보니, 표정에는 언뜻 초조함이 드러나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주춤할 수도 없다.
불사의 괴물이 이만한 타격을 입은 지금이야말로, 최적기였다.
다 재생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
‘가면으로.’
살아 있는 갑옷, 실험체 17호는 브로치로 의태해 로브에 붙어 있는 상태였다.
롭이 지니고 있다가 다시 내게 넘긴 것이었다.
브로치에 손을 올리고 중얼거리자, 17호가 목을 타고 올라왔다.
디자인은 가장 친숙한 레온하트의 수호자 가면이었다.
유독 가스에 대한 대책이었다.
‘여로.’
로브, 여로의 능력으로 공간을 뛰어넘었다.
불사의 괴물 머리 위 5미터 부근.
재 타는 냄새와 함께, 밑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열기 대책으로 마법을 사용했는 데도 이 정도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고 밟을 곳을 찾았다.
“큭.”
막 폭발한 화산의 표면이 연상되는 모습이었다.
붉게 빛나는 용암이 꿀렁거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열기로 일대가 일렁거려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나는 타르처럼 굳은 용암 위로 올라섰다.
치이익.
그 짧은 순간에, 세계수의 거목은 거의 녹아내려 있었다.
몸도 조금씩 움직이는 걸로 보아 곧 완전히 회복할 것이 분명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봉인술식을 연결해야 했다.
카아아아악.
어디선가 가래 끓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옆을 보니, 아그나 한 마리가 있었다.
무시하고 봉인 술식을 새기려고 했는데, 아그나가 내게 달려들었다.
오래 전 불사의 괴물에게서 떨어져 나온 찌꺼기가 아니었다.
지금 막 만들어진 따끈따끈하고 생기 넘치는 놈이었다.
서걱!
이름 없는 검을 휘둘러 목을 쳤다.
적정량의 워터(Water)로 재생을 저지시켰다.
아그나는 재생하지 못하고 용암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아그나 한 마리는 이제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카아악, 카아아악.
집중하려는데, 또다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봉인술식을 매개하는 건 상당한 집중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지금 나는 발레리아보다 서클이 하나 낮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방해가 들어오면 조금 곤란했다.
‘뭐 이렇게 많아?’
눈에 들어오는 아그나만 수십 마리에 육박했다.
거목이 몸을 꿰뚫으며 만들어진 것 같았다.
처리는 어렵지 않지만, 그사이 불사의 괴물이 완전 회복할 수 있었다.
더블 캐스팅으로 막으면서 술식을 가동하자니, 불안정했고.
‘비가 좀만 더 퍼부었다면.’
비가 내리고 있긴 했지만, 빗줄기가 약해진 탓에 아그나를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괴물의 열기 탓에 내리는 동시에 증발한 것 같았다.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공중에서 빗줄기가 멈췄다.
‘화살?’
뭉글뭉글 모여든 비는 물 화살이 되어, 아그나를 향해 정확히 쏘아져 나갔다.
물 화살에 관통 당한 아그나가 증기를 뿜어내며 녹아내렸다.
마법이 아니라, 상당히 숙련된 정령술이다.
“지그문트 님!”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목소리에 하늘 위를 올려다봤다.
멀리서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정령왕과 계약한 인어, 의회장 룬달이었다.
열기에 대한 대책인지, 바람의 장막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맞네요! 엄호하겠습니다!”
나는 곧장 그리무아르를 펼쳤다.
정면에서 나를 향해 달려들던 아그나 두 마리가 물 화살에 적중 당해 죽었다.
내 안위를 신경 쓸 만한 여유는 없었다.
마나로 마법진을 그렸다.
퀸틴에 새겼던 마법진과 정확히 같은 마법진이었다.
“리아!”
-네!
통신구는 여전히 연결된 상태였다.
발레리아 쪽도 마법진을 발동시켰는지,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꽤 오래 걸렸겠지만, 발레리아와 나는 합을 맞춰 시간을 최소한으로 단축했다.
연결은 즉각 완료됐다.
‘다음은 봉인술식을 가동인데.’
여기가 문제였다.
내 봉인술식이 아무리 효율적으로 짜였다고는 하나.
신들도 나눠서 봉인한 괴물을, 나와 발레리아 둘이서 봉인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서대륙에 살아 있는 탑주가 전부 달라붙어도 무리였다.
그래서 나는 퀸틴에 있는 봉인석을 이용하기로 했다.
‘봉인석의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퀸틴의 봉인석은 땅에 사는 세 신이 힘을 모아서 만들어 낸 성물이다.
지금 날뛰고 있는 불사의 괴물은 절반에 불과했다.
나머지 절반은, 봉인석에 의해 잡혀 있는 상태였다.
이미 무언가 들어찬 봉인석에, 몸뚱이를 하나 더 욱여넣을 수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통신구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제가 생겼어요!
* * *
하늘에서 지그문트를 노리는 아그나를 저격하던 룬달이 깜짝 놀랐다.
세계수의 공격에 정통으로 당했던 불사의 괴물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을 옥죄고 있던 거목은 괴물에게서 나온 용암과 화기에 재가 되었다.
“이런!”
지그문트 마이어는 여전히 똑같은 자리에 서서 집중하고 있었다.
불사의 괴물이 움직이자, 바다가 흔들리며 선박 수 척이 뒤집혔다.
아무래도 불사의 괴물 또한 무언가 느낀 모양이었다.
자유로워진 손을 들어, 지그문트가 있는 곳을 내려찍으려고 했다.
“지그문트 님!”
룬달은 경악했다.
그러나 괴물의 손은 지그문트에게 닿지 못했다.
콰아아아앙!
새하얀 장막이 지그문트 마이어를 둘러쌌다.
룬달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지그문트의 머리 위로 작은 생물 하나가 보였다.
‘페어리?’
앙증맞은 크기와 달리,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의 페어리가 오른팔을 뻗고 있었다.
거의 자연재해에 가까운 일격을 가뿐히 막아 내는 걸 보아, 평범한 존재는 아닌 듯했다.
도리어 괴물의 손에 이상이 생겼다.
장막의 빛이 괴물의 손을 파고들더니, 손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쿠오오오오오……!
낮은 포효를 내지른 불사의 괴물이, 몸을 크게 한 바퀴 돌렸다.
지그문트는 이름 없는 검을 괴물의 몸체에 박아 넣고 버텼다.
이윽고 불사의 괴물은 룬달이 예상치도 못한 행동을 보였다.
‘달린다?’
느릿하게 이동하던 불사의 괴물이, 퀸틴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바다가 뒤흔들렸으나, 아직 괴물을 막아선 퀸틴의 선박은 어느 정도 남은 상태.
물의 정령들이 다시 한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쿠구구구……!
룬달은 피부가 익을 듯한 열기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리 가까이 있다지만, 바람의 정령 덕분에 열기를 튕겨 내고 있었는데, 룬달의 주위를 날아다니던 바람의 상급 정령이 날갯짓을 했다.
‘정령이 힘을 다한 게 아니야!’
단순히 괴물의 열기가 강해진 것이다.
다수의 물의 정령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역소환됐다.
정면에서 버티고 서 있던 숲의 거신이 앞으로 나섰다.
콰아아앙!
숲의 거신은 불사의 괴물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불사의 괴물은 숲의 거신의 목을 잡아챘다.
쿠오오오오오……!
포효와 함께, 숲의 거신을 바다에 담가 버렸다.
하얀 증기와 함께, 바다가 크게 흔들렸다.
이윽고 숲의 거신이 침묵하자, 불사의 괴물은 다시 퀸틴으로 눈을 돌렸다.
‘봉인술식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지, 지그문트는 여전히 버티고 있는 모습이었다.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불사의 괴물은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퀸틴에 도달했다.
노리는 건 아마도.
‘봉인석!’
지그문트와 발레리아는 룬달에게 당부한 바 있었다.
봉인술식을 가동할 때는 거의 무방비 상태에 가까워진다고.
즉, 발레리아가 괴물의 공격을 막기를 바라는 것도 불가능했다.
쾅! 쾅!
가디언과 남은 병력이 포격을 쏟아부었지만, 불사의 괴물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 어떤 공격을 당해도 죽지 않기에 무시하는 것이다.
세계수처럼 잠시나마 저지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힘이…….’
룬달은 물의 정령왕 넵투누스를 소환한 것으로 힘을 다했다.
요정족 측도 세계수 강림까지 소진한 상태.
불사의 괴물을 막을 만한 수단은 없었다.
우우우우웅……!
그때, 낮은 고래 울음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가디언의 그것보다 훨씬 낮고, 큰 소리.
퀸틴 상공에서, 또 하나의 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라 님!”
북쪽의 신어, 바라가 하늘을 헤엄쳐 왔다.
온몸이 검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전부 신살의 흔적이었다.
불사의 괴물은 기어코 퀸틴 서부 항구에 도달했다.
콰아아아아앙!
불사의 괴물이 접근하며, 항구가 산산조각이 났다.
어째선지 바라는 그것을 멀거니 관망하고만 있었다.
불사의 괴물은 퀸틴의 상층부, 봉인석이 있는 의회 건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라가 하늘을 향해 울었다.
고오오오!
바다가 솟아오르더니, 퀸틴을 가로막는 듯한 물의 장막이 만들어졌다.
동시에, 지그문트 머리 위에 있던 신성이 그것을 강화했다.
손이 장막에 가로막히자, 불사의 괴물은 장막을 짓눌렀다.
우득, 우득.
애석하게도, 바라는 세계수보다 훨씬 상태가 좋지 않았다.
물의 장막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됐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봉인술식에 있어서 걸림돌이 됐던 건, 봉인석과 봉인 대상의 거리.
매개가 있다지만 봉인할 대상의 크기가 크기다 보니, 조금 더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불사의 괴물은 봉인석으로부터 그 어떤 때보다 가까운 상태였다.
“발레리아!”
* * *
의회 건물의 구석진 곳.
한 인어가 통신구를 툭툭 치고 있었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말에 사사건건 토를 달던 늙고 뚱뚱한 의원이었다.
콰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머리 위에서 돌조각이 후두둑 떨어졌다.
놀란 거북이처럼 목을 한껏 움츠린 의원은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곧 통신구가 연결됐다.
통신구 너머의 인물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의원은 조용히 암호를 댔다.
“태양에게 불사를.”
-무슨 일이지?
“상황 보고입니다. 불사의 신께서 퀸틴에 도달했습니다.”
-그럼 문제 될 건 없을 텐데.
“아니요. 있을 것 같습니다.”
인어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지그문트 마이어. 그자가 무슨 짓을 벌일 것 같습니다.”
-부쩍 자주 들리는 이름이군. 그자가 뭘 한다는 건가?
“재봉인을 하겠다고 합니다.”
-청탑주는 스스로 제물이 되어 죽었다고 했을 텐데. 그럴 만한 마법사는…….
“적탑주가 찾아왔습니다.”
-적탑주가?
통신구 속 목소리의 톤이 살짝 올라갔다.
레온하트 왕국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한 적탑주가 퀸틴에 있을 줄은 몰랐다.
최근 청탑주와 충돌했다더니, 그것 때문인 것 같았다.
-적탑주라고 한들, 혼자서 봉인술식을 가동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교주님…… 청탑주는 세계수의 후계자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요점이 뭐지?
“신께서는 절반의 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래도 봉인석 정도는 부술 수 있을 터. 퀸틴에 도달했다 하지 않았나.
“예. 도달하시긴 했는데, 뭐가 자꾸 끼어드는 바람에.”
의원은 서부 해역에서의 전투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다.
확실히 퀸틴의 전력만으로는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의회장, 룬달은 강하긴 했으나 불사의 괴물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적탑주를 비롯해, 조력하는 인물이 대거 등장함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특히 요정족, 세계수의 강림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통신구 속 인물은 잠시 침묵하다가, 의원에게 말했다.
-네가 해야 한다.
* * *
차르르륵!
퀸틴 밑에서 튀어나온 사슬이 불사의 괴물을 묶었다.
양 손목을 묶인 불사의 괴물이 몸부림 쳤다.
사슬의 당기는 힘이 아주 약간 더 우세했다.
통신구로 발레리아의 상황을 확인했다.
봉인석 앞에 선 발레리아는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큭…….
이를 악물고 마나를 짜내고 있지만, 역시 무리인 모양이었다.
단순히 저 만한 크기의 괴물을 봉인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봉인석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였다.
“도와주마.”
-저는 괜찮아요!
“술식 끊기면 더 귀찮아지니까, 미련한 소리 말아라.”
봉인술식의 연결은 거의 완료된 상태.
지금이라면 잠깐 손을 떼도 괜찮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검은색보다 어두운,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부패한 성배를 통해 만들어 낸, 불사의 괴물을 죽이는 독이었다.
‘투소메스의 이론은 완벽했다.’
불사의 괴물이 부활할 거라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염두해 뒀다.
그렇기에, 나는 철저하게 괴물 사냥의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정말 죽을지는 모르겠으나.’
불사의 괴물은, 말 그대로 죽지 않는다.
아그나나 불사자 따위와는 그 궤가 다른, 완전한 불사.
맹독이 부패한 성배의 힘을 지니고 있다지만, 죽지 않는 것을 죽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힘을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불사의 괴물은 아직 절반.
정말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이쪽에 손해는 없다는 거지.’
죽이든, 죽이지 못하든 간에 상관없다.
불사의 괴물을 약화시키면 봉인도 확실히 수월할 것이다.
처음에는 봉인에 실패하면 독을 쓸 생각이었지만.
‘어차피 봉인 당하면 쓸데도 없는 독이다.’
유리병 마개를 열었다.
이름 없는 검을 뽑아, 그 위에 독을 뿌렸다.
검날이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검 손잡이를 양손으로 쥐었다.
‘어디가 용암이고 몸인지는 모르겠으니.’
최대한 깊숙이 찌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력을 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여로를 사용해 괴물의 목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머리가 날아가도 멀쩡한 놈이지만, 기왕이면 급소를 찌를 요량이었다.
괴물의 목은 지옥의 용암 폭포를 떠오르게 했다.
용암 사이로 검은 돌덩어리가 느릿하게 떨어졌다.
‘화이트웨일에 있던 현무암도, 이놈의 여파겠지.’
모를 일이다.
나는 검을 고쳐 쥐고 자세를 낮췄다.
봉인술식을 연결하고 남은 마나를 쥐어짜 냈다.
마나 번(Mana Burn) 최대 출력.
‘그 노친네를 따라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렘센에서 봤던, 요아힘 월베른의 일격이 떠올랐다.
하늘을 잘라 내고, 그 죽음을 잠깐이나마 물러서게 만들었던 올려 베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따라할 수 없었다.
아우나(Aunar).
오러와 마나가 뒤섞이며, 하얀 빛을 뿜어냈다.
어트 한넬과 전투할 때만 해도 조금 거친 부분이 있었는데, 신성의 강화로 한결 안정성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숨을 들이쉬고, 자세를 낮췄다.
모든 오러와 마나, 신성을 다 쏟아붓는다.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과 검을 부딪쳤을 때의 감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검을 부수는 검.
* * *
의회 건물 정문.
의원은 멀거니 불사의 괴물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온몸을 휘감은 사슬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불사의 괴물은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었다.
“불사의 신이시여.”
조금만 더 버틴다면, 적탑주의 마나가 떨어질 것이다.
의원은 불사의 괴물이 봉인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불사의 교주, 청탑주가 제 몸을 희생하면서 풀린 봉인이었다.
자그마치 수십 년을 들여 가며 쌓아 온 탑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판.
쿠오오오오오……!
불사의 괴물이 기어코 오른팔에 있던 사슬 하나를 끊어 냈다.
화색이 됐던 의원은 뭔가 발견하고 눈을 게슴츠레 떴다.
괴물의 쇄골 부근.
하얀 증기 너머로 찬란하게 빛나는 빛이 있었다.
분명 지그문트 마이어가 봉인술식을 연결하겠다고 올라간 지점이었다.
의회장 룬달이 주위를 떠도는 것을 봤기에, 이는 확실했다.
서걱!
빛이 터져 나감과 동시에, 무언가 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괴물의 목에서 용암이 피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불사의 괴물의 낮은 울음소리가 퀸틴을 울렸다.
이번에는 포효가 아니라,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불안해진 의원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하, 하지만 신께서는 죽지 않으신다!’
죽지 않기에 불사의 괴물.
거목에 몸이 뚫리고 머리가 날아갔을 때도 결국 재생했다.
그에 비하면 저 상처는 미비한 수준이었다.
분명 금방 회복하여, 사슬을 끊어 낼 것이다.
하지만, 의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어째서?”
용암은 끊임없이 떨어졌다.
폭발하듯 튀어나오진 않았지만, 몸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마치 인간의 출혈을 보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도 그 상처는 재생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의원의 마음속에서 불신의 싹이 고개를 내밀었다.
“어, 어?”
기미가 이상했다.
불사의 괴물은 제 목의 일부를 뜯어냈다.
상처를 뜯어낸 뒤, 완전히 새롭게 재생시킬 요량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상처만 키운 꼴이 됐다.
쿠오오오오오오……!
괴물의 몸이 조금 아래로 끌려 내려왔다.
의원은 뒷걸음질 쳤다.
너무 힘을 준 나머지, 한 손에 쥐고 있던 통신구가 박살 났다.
손바닥에 상처가 생기며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의원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무서웠다.
의원은 희귀병을 앓고 있었다.
리에이트 교국의 저명한 사제도, 청탑주도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한 불치병.
그가 마지막으로 걸었던 희망이 불사의 괴물이었다.
신자들에게 불사의 축복을 내린다는 것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그런데, 불사의 괴물조차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인가.
“아, 신께서는 아직 완전하지 않으시다! 그것 때문이야! 분명히!”
의원은 지금 봉인 당하고 있는 것이 괴물의 절반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통신구 너머의 인물이 했던 말도 기억했다.
의원은 다급히 의회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내가 해야 한다!”
* * *
룬달의 눈동자에 희망이 들어찼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 같던 불사의 괴물이다.
심지어 세계수가 나섰음에도, 완전히 죽이지 못했다.
그런 불사의 괴물이 점점 바닷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봉인술식에 저항했으나, 지그문트가 일격을 먹인 후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아! 지그문트 님!”
불현듯 지그문트가 떠올랐다.
바람의 정령을 통한 장막을 강화하고, 지그문트 마이어가 있던 곳으로 이동했다.
열기에 살갗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 위에서 어떻게 버텼던 거야?’
단순히 가까이 갔을 뿐인데 이 정도다.
바람으로 시야를 가리는 하얀 증기를 날려 버렸다.
곧, 지그문트 마이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룬달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그문트는 양손으로 검을 쥔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모든 힘을 쏟아 내 반쯤 기절한 상태인 것 같았다.
그가 기사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 앞의 광경이 문제였다.
쿠구구구…….
움푹 파인 괴물의 목에서 용암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정말 검으로 만든 걸까 의문이 들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그 어떤 공격에도 재생하던 불사의 괴물이다.
하나 지그문트가 만들어 낸 상처는, 재생하는 대신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확대되고 있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최대 출력으로 끌어 올린 마나 번으로 신체 능력을 대폭 상승시켰다.
소드 마스터의 오러를 부쉈던 아우나(Aunar)는, 신성의 단계 상승으로 더 강해졌다.
거기에 불사의 괴물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독으로 이름 없는 검을 감쌌다.
더하여, 지그문트가 주력기로 사용하던 검을 부수는 검을 전력으로 사용한 결과였다.
‘이 사람.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걸까.’
룬달은 수백 년 만에 물의 정령왕과 계약한 인어였다.
나이는 결코 많지 않았지만, 타고난 무력과 통솔력 덕분에 의회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처음 지그문트 마이어를 봤을 때, 룬달은 동질감을 느꼈다.
단순히 언변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룬달과 청탑주와 마주하고도 의연한 모습을 봤을 때, 상당히 강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젊은 천재.
‘바라 님께서 왜 무조건적으로 도우라고 했나 했더니…….’
하지만 지그문트는 그 이상의 것을 보여 줬다.
룬달은 스스로가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것을 여실히 느꼈다.
그나마 정령왕을 소환하여 잠깐이나마 괴물을 저지하긴 했지만.
지그문트가 줬던 벨트가 없었다면, 그것조차 불가능했을 테니까.
“후우.”
어쨌거나, 이대로 별일이 없다면 봉인은 성공할 것이다.
지그문트 마이어를 데리고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때였다.
-그걸 부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건가요?
통신구 너머로 다급한 발레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