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내 걸 건드려?
화이트웨일 항구.
아닌 밤중에 희소식이 들려왔다.
퀸틴과 연결된 우회로가 뚫렸다는 이야기였다.
본래 몬스터가 막고 있었는데, 의회장과 청탑주의 활약으로 토벌에 성공했다고 한다.
며칠간 항구에 묶여 있던 정기선이 분주하게 출항을 준비 했다.
“잭, 이 자식은 어디로 간 거야?”
“죄송합니다만, 인원 제한 때문에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안 되겠나? 내 이렇게 부탁함세.”
떠들썩한 정기선 위.
발레리아 로안은 통신구를 들고 있었다.
지그문트 마이어와 연결된 것은 불의의 사고로 깨졌다.
다른 사람과 연결된 물건이었다.
“정기선 운행도 정상화된 것 같아요.”
“……대로 곧장 이동하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연결을 끊은 발레리아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고요한 바다가 늘어져 있었다.
저 어둠 너머에 있는 해상 도시 퀸틴에, 지그문트 마이어가 있을 터였다.
‘스승님 성격이면, 분명 며칠 내로 불사의 교단과 부딪치실 텐데.’
발레리아는 지그문트를 잘 알고 있다.
지그문트는 한가롭게 휴양이나 하자고 퀸틴에 간 게 아니었다.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할 텐데, 분명 빠른 시일 내에 전면전이 일어날 것이다.
발레리아는 이번만큼은 지그문트가 실수를 하길 바라마지 않았다.
‘아무리 스승님이라지만.’
탑주 회의에서, 발레리아는 의외의 인물에 대한 단서를 잡았다.
불사의 교단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개인적인 시간을 들여 추적한 결과, 프라우드 산맥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불사의 교단 본거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발레리아는 불사의 교단 본거지를 파괴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아직은 안 돼.’
발레리아는 불사의 교단을 전두지휘하고 있는 우두머리와 조우했다.
치열한 전투 결과, 양측 모두 어느 정도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통신구가 깨지기 직전, 지그문트에게 전하고자 했던 한마디.
불사의 괴물을 신으로 모시는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 * *
단 록벨런은 차분히 상황을 살폈다.
침입한 인원은 셋이었다.
모두 불사의 교단을 상징하는 표식이 그려진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확연히 덩치가 큰 자가 앞에서 단을 막아섰다.
뒤에 있는 인물은 조용히 주문을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단을 젊은 기사라고 칭한 노인은 리옐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가만둘까 보냐!’
단은 양손으로 클레이모어를 움켜쥐었다.
발이 나무 바닥을 찼다.
덩치는 그런 단에게 정면으로 돌격했다.
무기도 없는데, 대단한 담력이다.
“멈추지, 못할까!”
단은 습관적으로 검을 세워 막으려다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수비해서 뭐 어쩌겠다고!’
단의 검술은 극단적으로 방어에 특화된 경향이 있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성향이 검술에 반영되어 있었다.
그것이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라는 무기를 사용하게 된 영향으로 더욱 발전한 것이다.
지그문트가 그렇듯 단 또한 무기에 의존하는 것을 피하려 했다.
무기에 의존하면 결국 검술과 오러의 증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힘의 격차를 메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 경우가 잦았다.
‘지금은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도 없다!’
수비를 하며 시간을 끌어 봐야 의미는 없다.
애초에 덩치와 마법사의 목적은 단을 저지하고 시간을 끄는 것일 터.
단은 리옐에게 다가간 저 노인을 막아야 했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뚫어 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단의 수비적인 검이 아니었다.
“흡!”
단의 몸이 땅바닥에 거의 밀착하듯, 아래로 꺼졌다.
지그문트가 선호하는 자세였다.
부웅!
덩치가 팔을 크게 휘둘렀다.
로브 자락 너머로 기괴한 모양의 검이 보였다.
살갗이 변형된 듯한 모습.
단이 예상했던 대로, 전위는 불사자였다.
‘이놈은 제쳐 두고, 마법사부터!’
일반적으로, 마법은 캐스팅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캐스팅을 마친 마법은 치명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공간 이동 마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어딜!”
불사자의 다리가 땅을 찍었다.
몸으로 단의 경로를 차단한 것이다.
베어도 죽지 않는 불사자이기에 가능한, 무식한 방어법이었다.
단은 짧게 혀를 찼다.
‘도련님께서는 마법을 사용하셨지만……!’
단은 불사자를 무력화시킬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잠깐 정도 멈추게 하는 법은 알고 있었다.
‘불사자도, 재생에 시간이 필요하다.’
아주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몸이 붙고 재생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일단 베어 낸다.
오러를 두른 클레이모어를 휘둘렀다.
불사자는 팔을 뻗어 검을 막으려 했다.
일순간 검로가 바뀌었다.
서걱!
지그문트의, 대처하기 어려운 검로 전환.
지그문트와 셀 수도 없이 많이 검을 나눈 단이다.
그렇기에, 엉성하게나마 따라 할 수 있었다.
단의 클레이모어가 불사자의 몸을 양분했다.
“어떻게!”
단은 잘린 몸뚱이를 걷어차 버렸다.
최대한 재생을 늦춘 것이다.
동시에, 마법사에게 달려들었다.
마법사가 땅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스(Grease)!”
바닥을 미끄럽게 만드는 마법.
접근하는 상대를 저지하는 마법 중, 가장 기본적인 수 중 하나였다.
물론 낮은 서클의 마법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지그문트인 만큼, 단도 겪어 본 바 있다.
마법의 이름만 듣고, 무슨 마법인지 미리 간파한 단이 한 발 먼저 뛰어올랐다.
텅!
선반을 발로 차고, 마법사에게 손을 뻗었다.
단이 미끄러지는 대로, 마나 애로를 사용해 목숨을 끊으려던 마법사다.
하지만 단이 너무 쉽게 대처하자, 당황해 눈을 부릅떴다.
텁!
단의 손아귀가 마법사의 얼굴을 잡았다.
무게와 반동을 이용해, 단은 마법사를 뒤로 밀어냈다.
제 꾀에 제가 걸린다고, 마법사는 미끄러운 바닥에서 중심을 잡지 못했다.
다리가 허공에 뜨며, 머리가 뒤로 넘어갔다.
쾅!
뒤통수를 바닥에 찍은 마법사는 그대로 기절했다.
단은 마법사를 밟고 서,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리옐의 팔뚝을 잡고 있었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법을 거절하다니. 신목의 아이는 신기한 능력을 지니고 있구나.”
노인이 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단은 본능적으로 노인이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허한 눈동자는 단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둘이서 하나를 못 막다니. 한심한 일이로고.”
노인은 무언가를 꺼내 단에게 겨눴다.
완드였다.
단은 속으로 승리를 확신했다.
상대는 마법사.
지그문트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접근한 상태에선 단이 우위다.
단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곧장 검을 휘둘렀다.
“호위로, 쓸 만한 놈을 두고 있구나.”
노인은 아까 전 마법사처럼 주문을 중얼거리지 않았다.
완드 끝이 미세하게 일렁거렸다.
꽈릉!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ing).
완드 끝에서 쏘아진 번개가 단에게 적중했다.
‘고속 영창?’
단은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지만, 멈추지 않았다.
갑옷에 걸린 지그문트의 마법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노인은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완드를 한 번 가볍게 휘저었다.
꽈릉! 꽈릉! 꽈릉!
번개는 한 번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그문트의 보호 마법을 뚫고, 갑옷을 뚫고, 단에게 직접적으로 파고들기에 이르렀다.
크게 놀란 리옐이 노인을 때렸다.
“하지 마! 단 아저씨!”
그러나 노인은 멈추지 않았다.
체인 라이트닝은 수십 번 단에게 내리쳤다.
이윽고 노인을 노려보던 단의 눈에서 초점이 꺼졌다.
앞으로 고꾸라진 단은 포기하지 않고 손을 침대를 향해 뻗었다.
“……아가씨.”
“근성 하나는 괜찮구나.”
노인은 쓰러진 단을 향해 담담히 완드를 뻗었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죽겠지만, 아예 확인 사살을 할 생각이었다.
울상이 된 리옐이 작은 주먹으로 노인을 투닥투닥 때렸다.
쨍강!
리옐의 의지에 반응한 나무 한 그루가,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가지가 길게 늘어나며 창처럼 노인을 향해 쏘아졌다.
창문 깨지는 소리에 반응한 노인이 거절하듯 한 손을 들었다.
캉!
마나 배리어(Mana Barrier).
뾰족한 나뭇가지 끝이 푸른 마나의 벽에 저지당했다.
가지는 뻗어 나가려는 듯 파르르 떨렸지만, 마나의 벽을 뚫어 내지 못했다.
노인은 인상을 찡그리고 리옐을 내려다봤다.
“앙큼한 꼬마로고.”
처음에는 텔레포트(Teleport)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리옐은 텔레포트를 거부해 버렸다.
슬립(Sleep)도 마찬가지였다.
드래곤의 마법도 무용지물인데, 인간인 노인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쯧.”
노인은 혀를 찼다.
근처에서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단의 전투와, 창문 깨지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깨어난 것이다.
“일어나라. 무능한 것들.”
뒤통수를 찍었던 마법사는 노인의 마법으로 의식을 되찾았다.
불사자는 재생을 마쳤다.
둘이 노인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노인은 아등바등 저항하는 리옐을 불사자에게 넘겼다.
“텔레포트를 쓸 수 없게 됐다. 일단 돌아가자꾸나.”
“알겠습니다. 이 기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두거라. 자연히 죽을 것이다.”
“따르겠습니다. 청탑주님.”
* * *
단 록벨런은 주마등을 경험했다.
자신이 천천히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자각할 수 있었다.
또렷한 생각을 하기 어려웠고, 머릿속으로 흐릿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마침 잘됐군. 이리 와 봐.
처음으로 떠오른 기억은 지그문트 마이어와 연무장에서 마주쳤을 때였다.
대뜸 연무장에 나타난 지그문트는 단에게 검을 배우고자 했다.
그때만 해도, 단에게 있어 지그문트는 철부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가르쳐 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뭐, 문제라도 있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못 따라오실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오는 말들이었다.
그때, 단은 진심으로 지그문트가 따라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의지 없는 철부지 도련님은 강도 높은 훈련에 질려 포기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은인의 아들.
단은 별 기대 없이 지그문트를 가르쳤다.
-못 따라온다더니, 넘어서 버리시면 어떡합니까.
지그문트는 불과 1년도 못 되어 단을 넘어섰다.
입장은 역전된 지 오래였고, 이제는 지그문트가 단을 끌어올려 주고 있었다.
빠르게 지난 일들이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로브 차림의 셋이 리옐을 끌고 여관방을 나가는 장면이었다.
지그문트를 따라가기는커녕, 리옐을 지킨다는 간단한 명령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무력감에 눈물이 나왔다.
어째선지,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가운데, 지그문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 봐라. 왜 질질 짜고 난리야.”
지그문트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죽을 때가 다가오니,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단은 몸속으로 따뜻한 기운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다시 한번, 다소 강압적인 지그문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으면 죽여 버린다. 얼른 안 일어나?”
* * *
단의 상태는 결코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갑옷에 부여된 방어 마법이 전부 뚫렸다.
높은 수준의 전격 마법을 연달아 맞은 것 같았다.
나와 마리나가 도착했을 때에는, 삼도천에 발을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리옐은 어디로 간 거지?’
리옐은 온데간데없었다.
방 안에 흩뿌려진 피는 단의 것이 아니었다.
단의 몸에서는 절상을 찾을 수 없었다.
자세한 경위는 모르겠지만, 일단 단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응급처치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겠군.’
의학에 어느 정도 지식은 있지만, 약제학으로 치료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다.
신의 힘, 기적이 필요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마리나에게 눈이 갔다.
“마리나, 혹시 리옐의 힘, 쓸 수 있냐?”
“모, 못 할 것 같아요. 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
마리나는 아직 대리인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힘이 적었다.
신, 리옐이 제 힘에 대한 자각을 못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리인에게 힘을 빌려주는 방법도 잘 모른다.
기껏해야 의지 전달 정도가 전부였다.
-신성.
-부름?
-이거, 살릴 수 있냐?
-시체?
신성은 단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
-그럼 살려 줘. 부탁한다.
-부담.
신성은 나를 가리켰다.
일전에도 경고한 적 있다.
신성은 신의 힘인 만큼,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사용할수록 몸에 부담이 온다.
아우나(Aunar)를 썼을 때, 확실히 그것을 느꼈다.
-괜찮아. 아직 버틸 만해.
-후회.
-해도 내가 할 테니, 걱정 마.
-경고.
신성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단에게 휙 날아가더니, 가슴팍에 손을 얹는다.
그것만으로, 다 죽어 가던 얼굴에 어느 정도 생기가 돌아왔다.
단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것 봐라. 왜 질질 짜고 난리야.”
신성의 자그마한 손바닥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주변 공기가 따뜻해졌다.
하얀 기운이 단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신성이 힘을 씀에 따라, 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죽으면 죽여 버린다. 얼른 안 일어나?”
이내 신성은 있지도 않은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이 눈을 떴다.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듯,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전전긍긍하고 있던 마리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도련님? 마리나? 여긴…… 천국입니까?”
“천국에 내가 있겠냐?”
“리옐…… 리옐 아가씨께서는?”
단은 벌떡 일어났다가, 균형을 잃고 옆으로 넘어졌다.
내 몸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성은 딱 단을 살리기만 했다.
당분간 움직이기는 힘들 것이다.
“커헉!”
“차분하게 설명해. 무슨 일이 있었고, 리옐은 어디 갔어?”
“……습격이 있었습니다.”
바라와 조우하고 있던 심해에서, 마리나는 막연히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모시는 신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으니, 대리인이 뭔가를 느낀 것이다.
바라 또한 말했다.
퀸틴에 돌연 불사자가 들어왔다고.
“불사의 신자들이었나?”
“예. 그렇습니다. 불사자도 하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놈들이 리옐 아가씨를 데려갔습니다.”
“불사자 하나 정도는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괴물이 하나 섞여 있었습니다.”
단은 ‘노인’에 대해서 설명했다.
완드에서 번개를 연달아 쏘아 낸 마법사.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마법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족속이 아니었다.
“제가, 꿈에서 들은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얘기해.”
“그 노인에게, 청탑주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단의 입에서 최악의 수가 흘러나왔다.
* * *
나는 마리나와 함께 청탑을 향해 달렸다.
퀸틴 북부에 위치한 청탑은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청탑주는 리옐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고 데려갔다.
‘목적은, 아마 제물.’
세계수나 바라 같은 거대한 신은 제물이 될 수 없다.
역으로 불사의 괴물이 잡아먹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리옐은 아직 어린 신이다.
세계수에 비해서는 미약하지만, 자각하지 못한 힘을 확실히 지니고 있다.
불사의 괴물에게 있어서 최적의 제물일 것이다.
‘불사의 신자들은 네르갈에서도 한 번 리옐을 노린 적이 있다.’
내가 리옐을 바라에게 데려가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바라 또한 리옐을 노리고 있었을 확률이 있었으니까.
실제로 바라에게 그런 생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닌 것 같았다.
신성은 바라에게서 포식자의 느낌이 난다고 두려워했다.
‘청탑주가 관여되어 있을 줄은.’
단은 누군가를 지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어지간한 전력은 물리칠 정도로 강했다.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도 시간을 끌었던 전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마탑주를 상대하는 건 조금 다른 일이다.
“도련님! 저기요!”
멀게만 느껴졌던 청탑이 보였다.
나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쾅!
청탑의 문을 부술 작정으로 걷어찼다.
문짝이 떨어져 나가며, 청탑의 1층이 드러났다.
라이트(Light)를 사용해, 빛무리로 1층 전체를 비췄다.
텅 빈 청탑 1층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없어?’
로케이트(Locate)를 사용해서 확인했지만, 리옐은 없었다.
아니, 청탑 전체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급하게 어디론가 이동하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나는 혀를 찼다.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놈이 청탑을 떴다면, 어디로 갔을까.
통신구를 꺼내 들었다.
“룬달!”
“네, 네!”
자칫하면 불사의 괴물이 깨어날 수도 있었다.
바라 또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룬달에게 나를 도우라고 한 상태였다.
나는 단에게 가기 전, 룬달에게 통신구를 건네고 봉인 확인을 부탁했다.
“그쪽은 멀쩡한가?”
“네. 이상 없습니다.”
“지금 출항 금지 풀렸어?”
“아니요. 화이트웨일 항구는 풀린 상태지만, 퀸틴은 내일 아침 중으로…….”
“밖으로 나간 배 있는지 확인 부탁한다.”
리옐은 텔레포트를 거부할 수 있다.
제 의지로 화이트 드래곤 린시스의 텔레포트를 거절했던 리옐이다.
드래곤의 마법도 안 먹혔는데, 청탑주라고 도리가 있을 리 없었다.
‘프라우드 산맥 연안.’
바라가 수색하라고 한, 프라우드 산맥 연안.
만약 불사의 교단 근거지가 그곳에 있다면, 청탑주와 리옐 또한 그곳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본래라면 텔레포트로 곧장 이동했겠지만, 그것이 통하지 않았으니.
배편을 이용할 것이다.
* * *
서부 항구에 다다랐을 무렵, 룬달에게 연락이 왔다.
내 예상대로, 대형 선박 하나가 막 출항했다는 소식이었다.
청탑의 선박이었다.
‘아, 빌어먹을.’
정확한 위치를 모르니, 로브를 이용하는 것도 요원한 일이었다.
정직하게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배편이다.
‘지금 당장 출항 가능한 배……!’
출항 금지가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출항을 준비하는 배가 있을 리 없었다.
일은 꼬일 대로 꼬였다.
불현 듯,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검은 중형선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그 앞에는 일렬로 선 낯선 선원들과, 잭이 보였다.
“흠, 너는 뭘 할 수 있지?”
“죽음의 바다를 항해한 경력이 있습니다.”
“좋아. 채용하지!”
한 손에 술병을 든 잭은 실시간으로 선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임시로 함께했던 선원들이 전부 감옥에 갔으니, 본격적으로 선장 노릇을 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잭에게 달려갔다.
“잭!”
“어? 음? 지그문트 나리 아니십니까!”
“지금 당장, 프라우드 산맥 연안으로 갈 수 있나?”
“예? 예?”
뜬금없는 의뢰에, 잭은 당황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여기서 프라우드 산맥 연안으로 가려면, 필연적으로 죽음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
계산이 빠른 놈인 만큼 그것도 바로 떠올린 듯, 꺼리는 눈치였다.
“죄송합니다만, 아직 선원도 전부 고용하지 못했고…….”
나는 잭의 팔을 잡아챘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잡히는 대로 금화를 한 움큼 꺼내 올렸다.
잭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금화와 내 얼굴을 번갈아 봤다.
“다시 한번 묻지. 지금 당장, 프라우드 산맥 연안으로 갈 수 있나? 최대한 빠르게.”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나리께서 어떤 분이신데! 바로 모시겠습니다! 오르시죠!”
내가 마음을 바꿀세라, 잽싸게 말을 바꿨다.
선원들을 한 번 보더니, 에라 모르겠다 팔을 휘저었다.
“아, 몰라! 전부 고용한다! 타! 출항 준비!”
“우와악!”
“출항 준비이이!”
순식간에 일자리를 찾은 선원들은 좋다고 선박에 오르기 시작했다.
척척 출항 준비가 끝났다.
해상 도시 퀸틴 출신인 만큼, 즉석에서 고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부 제 일을 찾아 했다.
키를 잡은 잭이 소리쳤다.
“목적지는 프라우드 산맥 연안이다! 직통으로 간다!”
“선장님! 그러면 죽음의 바다를 가로질러야 합니다!”
“마! 내가 배 타고 하늘도 날아 본 사람이야! 나만 믿어!”
“바람이 영 안 좋습니다! 역풍입니다!”
선원의 말마따나, 항해하기 썩 좋은 바람은 아니었다.
저번 항해 때는 굳이 도와줄 필요가 없어서 손 놓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청탑의 선박은 진작 출항한 상태인 만큼, 거리가 벌어졌을 것이다.
어떻게든 거리를 좁혀야 했다.
“도와주지.”
돛대에 손을 올렸다.
윈드(Wind) 변환 마법.
순풍(Fair Wind).
바람의 방향이 바뀌며, 돛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잭은 하늘도 날아 본 경험이 있는 만큼, 그러려니 넘어갔다.
아니면 방금 받은 금액에 흥분해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걸 수도 있었다.
“좋아! 닻을 올려라! 출항이다!”
* * *
청탑주, 가우스는 뒷짐을 지고 뱃머리에 서 있었다.
짠 내 섞인 해풍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청탑 소속의 대형 선박은 죽음의 바다를 지나치고 있었다.
“푸시(Push)!”
배 양쪽에 선 청탑의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얼음 덩어리를 밀어냈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프라우드 산맥 연안에 도착할 것이다.
텔레포트가 먹히지 않는 건 상정하지 못했던 수였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가우스의 눈은 열망으로 들어차 있었다.
“탑주님.”
“무슨 일이냐?”
“녹림과 닿아 있던 중개업자들과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됐다. 제물은 이제 필요 없으니. 이참에 아예 정리해라.”
“알겠습니다.”
더 이상 제물이 될 인간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팔베르크 제국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혹시 계획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전력을 지닌 인물은 의회장 룬달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최근에 크라켄 토벌을 위해서 정령왕을 소환했다.
당분간은 정령왕의 힘을 빌릴 수 없을 것이다.
‘신목의 후계자를 제물로 바침으로, 그분께서 긴 잠에서 깨어나시리라.’
긴 염원이 곧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청탑주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래서 갑판 위 한구석에 있는 통 안에 무언가 숨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 * *
리옐은 선실 내부에 있는 침대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벌떡 일어난 리옐이 혹시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까, 방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창문과 문은 단단히 잠겼고, 각각 마법사가 지키고 서 있었다.
천장이나 바닥, 침대 밑도 뒤져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드르륵.
서랍장을 열어 봤지만, 나온 거라고는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뿐이었다.
리옐은 울상이 됐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청탑주가 드라이어드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리옐의 탄생초는 서랍장에 올려져 있었다.
‘아빠가 올 거야.’
리옐은 지그문트가 구하러 올 거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의 대리인인 마리나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박은 퀸틴에서 멀어지고 있었으나, 마리나와의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말인즉슨, 지그문트와 마리나가 리옐을 뒤따라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전에,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덜컥.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니, 단에게 뒤통수를 찍혀 무력화됐던 청탑의 마법사가 들어왔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를 벗으니, 멀쩡하게 생긴 젊은 청년이었다.
마법사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리옐은 본능적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겁먹지 않아도 괜찮단다. 음식이니까.”
마법사가 들고 있는 것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 한 접시였다.
보란 듯이 리옐에게 보여 줬는데, 전부 아이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이었다.
리옐은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바짝 물러났다.
“해치지 않아. 뭘 넣지도 않았어.”
“나쁜 아저씨. 저리가.”
“으음. 너, 어린애치고 똑 부러지는구나? 알겠다.”
마법사는 뒤로 물러났다.
청탑주의 명령에 따라 여러모로 리옐의 편의를 봐줄 생각이었다.
청탑주는 수고를 감수하면서도 굳이 녹림에게서 사람들을 사들였다.
제물은 상태에 따라 그 값어치가 결정된다.
인간을 바칠 거라면 건강한 산 제물이 제일이다.
리옐 또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알았어. 불편하다면, 나가 줄게. 필요한 거 있니?”
“오지 마!”
“그래.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문을 두드리려무나.”
마법사는 리옐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했다.
선반에 음식을 두고, 선실을 나갔다.
리옐은 또다시 혼자 남겨졌다.
불현 듯 느껴진 위화감에, 시선을 들었다.
선실 천장,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 * *
해상 도시 퀸틴의 북부 지구, 청탑 정면.
수로에서 한 손에 작살을 든 인어들이 올라왔다.
모두 해안 경비대의 제복 차림으로, 선두에는 아노르가 있었다.
“의회장님!”
룬달과 호위대가 청탑 앞에 서 있었다.
아노르는 문이 열린 채 방치된 청탑을 확인했다.
주변에 있던 물건들도 사라진 상태였다.
아예 작정하고 나간 것 같았다.
룬달은 텅 빈 청탑을 올려다보았다.
“아노르 경.”
“예.”
“현 시간부로 해상 도시 퀸틴에 경비 계엄령을 선포하겠습니다.”
해안 경비대들의 얼굴이 굳었다.
몇몇 인어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작살을 고쳐 쥐었다.
룬달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또한, 청탑주 가우스 경에게 수배령을 내리겠습니다.”
수십 년간 온건한 모습을 보인 가우스였다.
룬달은 어린 시절부터 청탑주와 알고 지냈으며, 그의 이런 행보를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정황이 가우스가 불사의 교단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말에 의하면, 주모자일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내가 넵투누스 님의 힘을 빌리도록 한 것도. 모두 계산 내라는 건가?’
청탑주는 룬달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룬달이 정령왕의 힘을 한 번 빌리면 몇 주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도.
크라켄 토벌 당시, 청탑주는 이상하리만치 힘을 억제하는 느낌이 들었다.
룬달은 청탑주가 노화로 인해서 약해졌다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청탑주는 룬달이 힘을 더 사용하는 것을 유도한 것이다.
‘실수야.’
퀸틴 내부에 적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회에 있을 거라고 예상했을 뿐, 그 밖은 생각지도 못했다.
만약 지그문트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끓어오르는 바다를 제외한 암초 지대에 병력을 배치하겠습니다. 우회로에 집중해 주세요.”
“화이트웨일 항구에서 정기선이 출항했다는 소식이 있습니다만.”
“물자를 쥐여 주고 돌려보내세요. 외부로부터 출입은 당분간 완전 차단합니다.”
“알겠습니다.”
* * *
낮, 청탑의 선박이 프라우드 산맥 연안에 닿았다.
얼어붙은 바다 인근에는 수척의 선박이 정박한 상태였다.
화이트웨일 항구를 방불케 하는 규모의 마을.
불사의 교단, 그중에서도 선택 받은 이들만 모인 장소였다.
불사의 신자들은 이곳을 성지로 규정했다.
“저 배는?”
“청탑의 배. 교주님이시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사를 꿈꾼다.
그중에는 한 국가에 영향을 끼칠 만한 인물도 적지 않게 섞여 있다.
주요 관리직을 맡고 있는 귀족, 혹은 거대한 상단의 주인.
혁혁한 공을 세워 훈장을 받은 기사나, 불치병에 걸린 대부호도 있었다.
“청탑주님, 이게 무슨 소립니까? 교주라니요?”
“여긴 또 어디란 말입니까…… 억!”
청탑의 마법사들 중, 몇몇은 당황한 눈치였다.
청탑주는 교묘하게 마법사들을 불사의 교단에 끌어들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정직하거나, 마법에 대한 열망만 가득한 이들은 피했다.
그리고 그들은 곧장 다른 마법사들에게 제압당했다.
저들은 불사자로 다시 태어나거나, 제물로 쓰일 것이다.
“교주님!”
배 아래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뱃머리에서 뒷짐을 진 청탑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또한 상당히 고조된 상태였다.
목소리 증폭 마법을 거쳐, 근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침묵하라.”
한마디에, 웅성거리던 신자들이 입을 닫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청탑주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청탑주 스스로 불사의 괴물의 대리인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수많은 신자들이 배 아래로 모여들었다.
“오늘이다.”
마침내 입을 연 청탑주는 선언했다.
사람들의 눈에서 욕망이 번뜩였다.
청탑주는 양팔을 벌렸다.
“오늘, 우리의 신께서 지상으로 강림하실 것이다.”
청탑주는 등 뒤에 서 있던 마법사에게 눈을 돌렸다.
리옐의 편의를 봐주던 젊은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청탑주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선실로 이동했다.
끼익.
선실 문을 연 마법사가 인상을 찡그렸다.
선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와라. 장난치지 말고.”
대답은 없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좁은 선실에 숨을 곳이라고 해 봐야, 뻔하디뻔하다.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간 마법사가 이불을 홱 걷어 냈다.
“어?”
하지만 이불 속에는 가지런히 정리된 베개만 놓여 있었다.
당황한 마법사가 주변을 살폈다.
마법사의 등 뒤로 무언가 뚝 떨어졌다.
“쉬잇.”
주름진 녹색 손이 마법사의 입을 막았다.
놀란 마법사는 뻣뻣하게 굳어 눈을 돌렸다.
늙은 고블린 한 마리가 등 뒤에 있었다.
차가운 날붙이의 감촉이 목을 찔렀다.
“으읍…….”
고블린, 롭은 조용히 눈동자를 굴렸다.
침대 밑에서 꾸물꾸물 리옐이 기어 나왔다.
롭은 잠시 고민 끝에 마법사를 기절시키기로 했다.
“컥. 커헉.”
목이 졸린 마법사는 버둥거리다가 이내 축 늘어져 버렸다.
롭은 마법사를 침대에 던져 두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가까이 하자, 리옐이 양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각지의 교단에 전하라. 때가 왔노라고…….”
뱃머리에 선 청탑주는 연설 중이었다.
롭은 리옐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다가온 리옐을 안아 든 뒤, 조용히 선실을 빠져나갔다.
동시에, 청탑주가 고개를 돌렸다.
“쥐새끼가 숨어들었구나.”
* * *
검은 중형선이 죽음의 바다에 진입했다.
돛대 위에서 상황을 확인하던 선원 하나가 소리쳤다.
“선장님! 얼음 덩어리가 많습니다!”
키를 잡은 잭도 조금 긴장한 눈치였다.
별거 아닌 얼음덩어리 같지만, 부딪친다면 암초에 부딪친 것과 같은 꼴이다.
이 차가운 바다에서 난파한다면, 생존 확률은 전무했다.
죽음의 바다를 항해한 전적이 있던 선원은 질겁했다.
“속도를 줄이십시오! 선장님!”
“안 돼. 곧장 간다.”
잭 옆에 선 지그문트가 조용히 대답했다.
선원은 지그문트를 보고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아무리 고용주라지만, 이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자살행위란 말입니다!”
“닥쳐!”
잭이 선원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딱딱한 무언가에 정통으로 맞은 선원은 이마를 붙잡았다.
잡힌 것은, 금화 한 닢이었다.
선원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잭을 바라보았다.
“내가 배 타고 하늘도 날아 봤다고 했지?”
“예? 예.”
“그게 다 이분 덕분이다. 나리께서 말씀하시면, 잠자코 따라라.”
항해에 있어, 선장은 그 누구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
배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인물이었기에, 당연한 처사였다.
그러나 잭은 광적으로 지그문트를 신임하는 경향이 있었다.
선원은 금화를 챙겨 넣고, 찜찜한 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잘했어.”
“아닙니다. 뭘요.”
“얼음덩어리는 내가 치워 주지. 곧장 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지그문트는 마법을 사용해 길을 만들었다.
잭이 선원으로 마법사를 고용할까 고려할 정도로, 효율적이었다.
순풍에 이어, 길까지 만들어 낸다.
‘이렇게 순조로운 건, 나리께서 수를 쓰신 거겠지.’
즉석에서 고용한 선원들이 이 정도 단합력을 보여 줄 리 없다.
배의 구조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지체될 경향이 보이면, 지그문트가 나섰다.
그 덕분에 처음 오는 바다도 순조롭게 항해할 수 있었다.
“나리.”
“왜.”
지그문트는 영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뭔가 고민하고 있는 듯 인상을 찡그리고, 손을 매만졌다.
잭은 심기를 건드리진 않을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프라우드 산맥 연안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지그문트는 드물게도 이름 없는 검을 직접 쥐고 있었다.
보통은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 휴대하는데, 드문 일이었다.
잭이 평범한 시녀라고 생각했던 마리나는, 선실 앞에서 석궁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출정 준비하는 모양새였다.
“주제도 모르는 놈들이 그쪽으로 도망쳤거든.”
“네? 그게 무슨.”
잭은 더 자세히 캐물어 보려다가, 입을 닫았다.
보트 이터가 나타났을 때도, 크라켄이 출몰했을 때도 항상 여유롭던 지그문트다.
그러나 잭은 지금 지그문트에게서 명백한 투기를 느낄 수 있었다.
짜증과 분노가 서린 눈동자로, 해안선을 가만히 응시한다.
언제라도 검을 뽑겠다는 듯 검 손잡이를 고쳐 쥔다.
“감히 내 걸 건드려?”
어느새 질문에 대한 답은 뒷전이었다.
폴폴 흘러나오는 살기에 잭은 목을 움츠렸다.
적의가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두려웠다.
마치 드래곤 한 마리가 서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잭은 결국 질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속으로 생각했다.
심기를 거스른 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죽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