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9/134)

6

바라

나는 마리나와 함께 퀸틴 서부 해안으로 향했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기에, 아직 사람이 꽤 지나다녔다.

룬달은 보이지 않았다.

“아, 여기 있었군.”

“이렇게 빨리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도 마찬가지다. 지그문트 마이어.”

대신, 아노르가 마중을 나왔다.

말끔한 제복 차림이었는데, 걸레짝처럼 바다에 떠다닐 때와는 사람이 달라 보였다.

뒤에는 경비대의 일원으로 보이는 인어 둘이 작살 같은 창을 들고 서 있었다.

“동행은 한 명뿐인가?”

“그래.”

“따라 와라.”

아노르의 안내를 따라, 항구로 걸음을 옮겼다.

끓어오르는 바다 탓인지, 출항하지 않고 정박한 배가 많았다.

아노르는 해안 경비대의 것으로 보이는 선박에 올랐다.

뱃머리에 로브를 뒤집어쓴 룬달이 서 있었다.

“오셨군요.”

“생각했던 것보다 인원이 있는데.”

“항해를 위한 최소 인원만 동행했습니다.”

“항해를 위한 최소 인원이라.”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전쟁을 가는 게 아니고?”

내 시선 끝에는 노인이 한 명 앉아 있었다.

감출 생각도 없다는 듯한 푸른색 로브 차림.

완드를 지팡이 삼아 짚었다.

노인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룬달이 다급히 노인을 소개했다.

“이쪽은 청탑주, 가우스 경이십니다. 가우스 경. 이쪽은 지그문트 마이어 님이십니다.”

“……반갑네. 젊은이.”

퀸틴은 도시를 표방할 수 있을 만큼 작다.

그럼에도 한 국가로 취급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퀸틴의 전력은 트리옌 왕국과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평가 받기도 한다.

규모 면에서 큰 차이를 보임에도, 그렇게 평가 받는 이유는 하나.

청탑주 가우스 때문이다.

‘괴물이 둘이라.’

가우스.

서대륙의 모든 탑주를 통틀어, 가장 8서클에 인접해 있다는 평가를 받는 마법사다.

마법뿐만이 아니라, 정령술에도 어느 정도 소질이 있는 다재다능한 인물이기도 하다.

가우스는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청탑주님.”

나는 손을 마주잡았다.

가우스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맞잡은 손을 타고 마나가 흘러 들어왔다.

간단한 탐색 마법이었다.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지만.

-차단!

눈치 빠르게 나타난 신성이 마나를 막아 버렸다.

마나는 그대로 가우스에게 되돌아갔다.

조금 당황했는지,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인 만큼, 크게 티내지는 않았다.

“재밌는 젊은이군.”

“과찬이십니다. 어쩐 일로 동행하게 되셨는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룬달과 가우스.

레온하트 왕국으로 따지자면 레드라인 후작과 발레리아가 동행한 꼴이다.

퀸틴 최고 전력 둘이 한 배에 올랐는데,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제가 설명드릴게요. 먼저 양해를 구하지 못한 점은 사과드립니다.”

룬달이 설명했다.

바라를 만나기 위해서는 암초 지대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그러나 남부 해안은 바다가 끓어오르는 이상 현상으로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상태.

해서 어쩔 수 없이 서부 해안의 암초 지대, 우회로를 이용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크라켄.

“그 때문에 청탑주님을 모신 겁니다.”

“크라켄 정도는 너 혼자서도 충분하지 않나?”

“미지수입니다. 저 혼자서는 선박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하기도 하고요.”

룬달은 정령술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다.

그 무력은 탑주급이라고 평가 받으나, 범용성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무 탐탁지 않게 여기지 말게, 젊은이. 이 늙은이는 암초 지대를 지나는 대로 빠져 줄 테니.”

퀸틴은 서대륙과 거리를 둔 외딴섬과 같았기에, 대체로 평화롭다.

서대륙이 크고 작은 전쟁으로 시끄러울 때도, 큰 영향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청탑주는 해상 도시 퀸틴에 탑을 세웠다.

조용히 마법을 연구하고,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고자 하는 전형적인 학구파 마법사였다.

‘의회와의 관계는 애매한 상태일 텐데.’

렘브란트 님푸스처럼 소속된 국가에 충성을 바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발레리아처럼 관여하길 꺼려 하는 것도 아니다.

의견이 조율된다면 협력적인 태도를 취하고, 그렇지 않으면 관여를 거부한다.

융통성이 있다고 할 수도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애매한 태도를 일관하고 있었다.

‘크라켄 제거를 위해 일시적으로 협력한다라.’

중요한 건 가우스가 완전한 룬달의 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작당 모의를 했을 가능성은 적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룬달이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청탑주님,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룬달은 나를 뱃머리 끝자락으로 이끌었다.

사람들과 상당히 거리를 벌린 뒤, 조용히 속삭였다.

“저, 대리인이라는 분은 어디 계신가요?”

“여기 있잖아.”

“어디…… 아?”

뒤에 있던 마리나가 허리를 숙여 인사해 보였다.

룬달은 입을 살짝 벌렸다가 황급히 다물었다.

“설마 신의 대리인을 시녀로 삼으신 건가요?”

“아니. 시녀가 신의 대리인이 된 건데. 인사해.”

“지그문트 님의 시녀이자, 리옐 님의 대리인. 마리나라고 합니다.”

룬달은 황당한 눈치였으나, 납득했다.

퀸틴 못지않게, 이쪽에도 조금 특이한 인물이 많았다.

* * *

배가 부드럽게 밤바다를 가로질렀다.

비가 갠 바다는 온순했고, 정규 훈련을 받은 선원들은 능숙하게 움직였다.

룬달은 ‘항해를 위해 필요한 최소 인원’이라고 표현했으나, 역시 아니었다.

전부 수십 년 동안 바다에서 살아남은 엘리트 선원일 것이다.

의회장과 청탑주가 탄 배인데 아무 선원이나 차출했을 리 없다.

‘잭도 나름 괜찮은 선장이었지만, 아무래도 차이가 나는군.’

얼마나 움직였을까.

돛대 위에서 위치를 살피던 선원이 소리를 질렀다.

“서부 암초 지대가 보입니다!”

“정지!”

배는 바다 위에서 멈춰 섰다.

룬달과 청탑주가 갑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키를 잡고 있던, 선장으로 추정되는 늙은 인어가 룬달에게 다가갔다.

“의회장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청탑주님도 함께 가시니까요.”

“하지만, 아무래도 지원 가능한 거리까지는 좁히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파에 휩쓸릴 겁니다. 여기서 대기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암초 지대를 점령하고 있는 몬스터가 크라켄 하나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경계를 철저히 해 주시길.”

“명 받들겠습니다.”

무슨 소린가 싶어서 보고 있으니, 청탑주와 룬달의 몸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청탑주는 플라이(Fly)를 사용했고, 룬달은 바람의 정령을 탔다.

마법사와 정령사의 최대 장점은, 장거리에서 화력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공중에서 화력을 퍼부어 사냥하려는 속셈 같았다.

아노르가 경고했다.

“놈은 선박의 잔해를 던져 공격합니다. 주의해 주십시오.”

“걱정 마세요. 문제없습니다.”

“그럼, 구경하고 있게나들.”

밤하늘 위로 떠오른 둘은 암초 지대로 날아갔다.

이내 거리와 어둠에 잡아먹혀 모습을 감췄다.

마리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 두 분은, 괜찮으실까요?”

“걱정할 사람이 없어서 저것들을 걱정하냐?”

“하지만, 그 괴물은…….”

“괴물이라는 칭호가 더 적합한 건 크라켄이 아니라, 저 둘일 거다.”

멀리서 마나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수면 밑에서 지진이라도 난 듯, 잔잔했던 바다가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멀리서 물줄기가 튀어 오르며 크라켄이 모습을 드러냈다.

콰앙……!

상당히 먼 거리였지만, 폭음이 들려왔다.

마나가 진동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조금 감탄했다.

청탑주는 나이가 상당한 편이다.

그가 탑주 중에서도 가장 8서클에 인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월이다.

아직 전투할 기력이 남아 있을까 솔직히 궁금했는데.

‘아직 팔팔한가 보군. 서부 암초 지대는 쉽게 통과할 수 있겠어.’

* * *

퀸틴 서부 암초 지대.

청탑주 가우스와 룬달은 아주 간단한 작전을 세웠다.

공중에서 화력을 퍼부어 제압하는 것.

크라켄 토벌을 위한 계획이라기에는 터무니없이 단순 무식 했다.

하지만 둘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문제는 의외의 부분에서 발생했다.

“의회장.”

“네. 청탑주님.”

“저놈, 생각보다 영악한 것 같은데 말일세.”

“동감이에요.”

크라켄은 수면 밑에서 나오지 않았다.

청탑주의 공격에 어느 정도 피해를 입자, 숨어 버린 것이다.

바다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 공격을 최대한 완화하고자 했다.

“수면 바로 위까지 내려가는 게 어떨까요?”

“마법으로 위치는 특정 지을 수 있지만, 놈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는 꼴이야.”

“여기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잖아요.”

“물의 정령을 다룰 수 있지 않은가.”

“저 크기를 끌어내려면, 으음.”

룬달은 고민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청탑주와 사전에 이야기가 끝난 상태였다.

위험을 감수하고자 한다면, 청탑주는 이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 했다.

“어쩔 수 없네요. 몸체만 드러내면, 처리하실 수 있죠?”

“묶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거기까진 바라지 않네.”

“알겠어요! 정말!”

룬달은 바람과 물, 두 종류의 정령과 계약한 수준급 정령사다.

하지만 비단 그것이 전부라면, 탑주급으로 평가 받진 않았을 것이다.

룬달의 무력이 높게 평가 받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소환하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해요.”

“견제 정도는 맡아 주겠네.”

중간계에서도 살 수 있는 하급 정령과는 달리, 강한 정령은 정령계에 상주한다.

룬달이 계약한 정령은, 조금 많이 강한 정령이었다.

룬달은 눈을 감고 알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촤악!

그때, 거대한 돌덩어리가 포탄처럼 위에서 솟아 올라왔다.

크라켄이 투척한 것이었다.

돌덩어리가 아슬아슬하게 룬달을 스쳐 지나갔다.

룬달을 받치고 있던 바람의 정령이 스스로 움직여 피한 것이다.

“그 인어의 말이 사실이었군.”

캐스팅을 마친 청탑주가 바다를 향해 완드를 뻗었다.

익스플로전이 터지며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룬달이 눈을 떴다.

“넵투누스 님!”

룬달을 이르는 별칭은 많았다.

퀸틴의 의회장, 이중 계약자 등.

그중 단연 유명한 것은 ‘정령왕과 계약한 인어’였다.

물의 정령왕, 넵투누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존재감은 확실하게 드러났다.

쿠구구구구……!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언가 양손을 꽂아 넣고, 억지로 벌린 듯이.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수면 밑에 숨어 있던 암초와 젖은 모래 바닥이 보였다.

그리고 바다 밑에 붙어 있던 크라켄의 전신이 무방비 상태로 드러났다.

청탑주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지, 감탄했다.

룬달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

“탑주님!”

“아, 곧 올 걸세.”

청탑주, 가우스는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머리 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새까만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섬광이 터져 나왔다.

충분히 구름이 모여들자, 가우스는 크라켄을 향해 완드를 겨냥했다.

7서클 전격 마법.

“제네시스 라이트닝(Genesis Lightning).”

먹구름에서 폭발한 빛줄기가 갈라진 바다 안쪽으로 뻗어 나갔다.

뒤늦게 하늘을 찢을 듯한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꽈릉!

* * *

마리나가 여태껏 알고 살던 세상은 몹시 작았다.

마이어 저택에서 청소와 빨래를 하고, 지그문트 마이어의 시중을 든다.

남는 시간에는 다른 시녀들과 대화를 나눴다.

때때로는 윌리엄에게 호신술을 배우기도 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근 1년 사이에, 마리나의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정말 작은 세상에서 살고 있었구나.’

지그문트 마이어를 따라다니며 만난 사람들은, 모두 경이로울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당장 바다 위에서 크라켄을 사냥하고 있는 두 인물도 마찬가지였다.

청탑주 가우스와, 정령왕과 계약한 인어 룬달.

자연재해라고 봐도 무방할 수준의 공격이 이어졌다.

바다가 열리질 않나, 먹구름이 모여들더니, 거대한 번개가 내리친다.

‘저게 마탑주의 마법…….’

지그문트를 따라다니면서 적탑주, 발레리아 로안과 만날 기회는 몇 번 있었다.

그러나 발레리아가 전력을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막연히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피부로 와닿으니 느낌이 달랐다.

‘천재지변이라는 게, 인간의 손으로도 일으킬 수 있는 거였구나.’

가우스가 펼치는 마법은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로 강력했다.

지그문트가 말하길, 수준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모든 마탑주는 7서클이라고 했다.

당연하게 의문이 따라왔다.

“도대체 도련님께서는 얼마나 강하셨던 건가요?”

마리나는 마법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래서 여태껏 대마법사라는 이름을 제대로 체감하지 못했다.

지그문트 마이어는 전생에 9서클의 대마법사였다.

탑주보다 한 단계 위인 8서클도 아니고, 그 위라고 한다.

마리나로서는 감도 잡히지 않는 경지였다

“말해 줘도 못 믿을 텐데.”

“드래곤도 보고, 신도 봤는걸요. 믿을 수 있어요.”

지그문트는 대답 없이 한동안 전투를 구경했다.

이윽고 폭음이 멈췄다.

크라켄 사냥이 끝난 것이다.

제 손을 내려다본 지그문트가 대답했다.

“나중에 직접 확인해.”

* * *

갑판 위로 복귀한 룬달이 기지개를 켰다.

청탑주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으랏챠챠! 힘들었다.”

“청탑주님께서는 어디 가셨습니까?”

“아, 청탑주님이시라면 돌아가셨어요.”

“도, 돌아가셨다고요? 그런 변고가.”

안색이 새파래진 아노르는 헛숨을 들이쉬었다.

이야기를 듣던 선원들도 크게 놀라 웅성거렸다.

멍한 얼굴로 아노르를 바라보던 룬달이 화들짝 놀랐다.

손을 내저었다.

“아니! 텔레포트를 써서 청탑으로 돌아가셨다고요! 죽었다는 게 아니에요!”

“아, 저는 또. 송구합니다.”

“어휴, 깜짝이야.”

사소한 해프닝이 지나가고, 배는 서부 암초 지대로 나아갔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크라켄의 사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암초에 걸렸는지 고정되어 있었는데, 새까맣게 탄 모습이었다.

수면 밖으로 드러난 크기만 화이트웨일 항구에서 봤던 정기선 정도였다.

“이걸 사냥하다니.”

“룬달 님이 강하신 건 알았지만, 이건.”

“사체는 어떡하지?”

“나중에 퀸틴으로 끌고 와야겠지. 이대로 둘 수는 없으니.”

배는 크라켄을 지나쳐 나아갔다.

선원들이 감상평을 내놓는 가운데, 마리나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크라켄은 무슨 맛일까요?”

“그냥 오징어 맛이더라. 조리해도 질기고 단단해서, 식재료로는 별로야.”

“도련님께선 드셔 보셨나요?”

“옛날에 실험 차원으로.”

룬달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크라켄을 사냥하고도 멀쩡한 모양새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나요?”

저 나이대에 저토록 강한 무력을 지닌 인물은 드물었다.

내가 아는 바로는 발레리아 정도밖에 없을 정도였다.

‘발레리아는 조금 특수한 케이스고.’

발레리아 같은 경우에는 여러 조건이 들어맞았기에,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다.

배움을 흡수하기 좋은 어린 시절부터 내 가르침을 받았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영약도 많이 먹었고, 재능도 있었다.

반면, 룬달은 그냥 순수한 재능으로 저렇게 강해졌다.

아무리 인어가 정령 친화적인 종족이지만 세상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세다고.”

“칭찬이겠죠?”

“칭찬 맞아.”

힘을 쥐고 인성까지 겸비한 부분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룬달은 남에게 칭찬을 듣는 것이 어색한지 어쩔 줄 몰라 했다.

“불사의 교단에 대해서는 어떻게 됐지?”

“아, 해안 경비대가 전담해서 수색하고 있습니다.”

“경과는?”

“실종자 명단을 확인해 봤지만, 해상에서 실종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내가 넘긴 중개업자에 대한 조사도 끝났나?”

“네.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불사의 교단은 제 세력을 불리는 데 꽤 적극적인 집단이다.

암국처럼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비밀 집단이 아닌, 종교 단체.

꼬리가 긴 편이었기에 마음먹고 수색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건만.

퀸틴에서는 꽤 몸을 사리는 편일지도 모른다.

‘제국이 퀸틴을 우선시한 거 보면, 있긴 할 텐데.’

룬달은 왕이 아니라 의회장이다.

병력을 움직이는 데 한계가 있었으니, 경과가 지지부진할 수 있었다.

신어의 상태를 확인하는 대로, 직접 뒤져 봐야 할 것 같았다.

* * *

순항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암초 지대에서 잠깐 멈춘 것을 제외하면, 배는 밤바다를 매끄럽게 가로질렀다.

간혹 보트 이터를 비롯한 바다에 사는 몬스터가 튀어나오긴 했지만, 룬달과 아노르, 선원들은 능숙하게 대처했다.

항해 내내 배에 다다른 데 성공한 몬스터는 없었다.

“흐암.”

“졸리면 자.”

“아니요. 제가 도련님을 두고 어떻게.”

웬만해서는 정신 바짝 차리고 있는 마리나가 하품을 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시간대는 새벽이었고, 바닷바람은 조금 더 차가워졌다.

배는 서쪽을 향해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들이 보였다.

“저게 뭔가요?”

“얼음.”

바다 위로 떠다니는 물체의 정체는 얼음 덩어리였다.

퀸틴의 서부 바다는 프라우드 산맥으로 이어진다.

만년설이 쌓일 만큼 추운 용의 산맥과도 인접해 있다.

그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뱃사람은 이 구간부터 죽음의 바다라고 하던데.”

“죽음의 바다요? 왜요?”

“들어서면 높은 확률로 죽거든.”

암초 지대와 비슷한 수준으로 선박 사고가 많은 해역이다.

룬달이 직접 온 만큼, 선원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우려되는 부분도 있었다.

난파라도 한다면 낭패였다.

‘로브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보험은 있었다.

아노르가 룬달의 말을 전해 왔다.

“곧 배를 갈아타야 한다고 한다. 준비하라는군.”

“배를 갈아탄다고?”

“그래.”

“그게 무슨 소리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의회장님의 말씀을 전했을 뿐이다.”

아노르는 영문 모를 말을 남기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배를 갈아탄다니,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룬달이 헛소리를 했을 리도 없다.

‘대형선이 따로 준비되어 있기라도 한 건가?’

일단 잠자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선박은 수면 위로 솟아오른 현무암 옆에서 멈춰 섰다.

배 끝자락으로 간 룬달은 물의 정령을 내려보냈다.

이윽고, 나는 룬달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저게 뭐지?’

수면 아래에 검은 그림자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점 위로 올라오듯 크기를 키웠다.

처음에는 몬스터인가 싶었지만, 생물체가 아니었다.

이내 배 한 척이 수면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촤악!

반응은 둘로 갈렸다.

룬달과 선원은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반대로 아노르와 마리나는 깜짝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녹조와 따개비로 뒤덮인 배는 난파선 같은 모양새였다.

‘유령선?’

소설에서 나오는 유령선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실제로 배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유령선은 이쪽으로 느리게 다가왔다.

텅!

나무판자가 배와 배를 연결했다.

룬달은 나와 마리나를 유령선으로 안내했다.

선원들이 경례를 해 보였다.

“저희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부탁해요. 금방 올게요. 자, 타세요.”

유령선에 승선했다.

다행히 몬스터는 없었다.

마나로 배 전체를 훑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생명 반응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움직인 걸까.

“바라 님께서 보내신 겁니다.”

“난파선을 재활용한 건가. 쓸데없이 알뜰하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배를 바치려고 한 적도 있는데, 거절하셔서.”

우리는 룬달을 따라갔다.

마리나는 조금 불안해 보였다.

“왜?”

“혹시, 이거 바다 밑으로 들어가는 건가요?”

“맞을걸?”

땅에 사는 신은 제 영역에 상주한다.

목오는 목오 사막에, 세계수는 태초의 숲 한가운데에 있었다.

신어 바라의 경우에는, 바다 밑 깊은 곳에 가라앉은 상태였다.

마리나는 기겁했다.

“저, 저 도련님, 의회장님. 송구하지만, 저는 수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 괜찮아요. 이 수온에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인어도 죽을걸요?”

룬달이 설명하려는 찰나, 배가 크게 앞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수직으로 잠수했다.

놀란 마리나가 나를 부여잡았다.

물에서 숨을 쉴 수 있도록 만드는 마법이 있지만, 굳이 쓸 필요는 없었다.

“숨 쉬어.”

“푸하, 어? 괜찮네요?”

“설마 바라가 우리를 바다에 담가 죽이겠냐?”

선박 내부는 바깥에 있을 때와 똑같았다.

숨을 쉴 수도 있었고, 물에 잠긴 것도 아니었다.

유령선은 유유히 하강했다.

룬달은 그동안 내게 주의 사항을 상기했다.

“지그문트 마이어 님의 말씀대로 가디언을 모두 물린 상태입니다만, 위협으로 간주되는 행동을 보이시면 멋대로 난입할 수 있어요. 그건 제가 못 막아 드려요.”

“나는 별로 신어와 적대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신어를 경계하는 건 이미 룬달에게도 드러낸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신어를 적대하진 않는다.

불사의 괴물이라는 공동의 적을 둔 만큼, 협력할 수 있다면 우호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다.

룬달은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으로, 바라께서 계신 심해는 일종의 성역이에요.”

“일대가 정령계와 중간계가 뒤섞인 듯한 성질을 가지고 있고, 정령들이 살고 있고.”

“어, 네. 그리고…….”

“정령들이 장난을 칠 수도 있고?”

“……맞아요. 어떻게 아시죠?”

“몰라야 하나?”

“그건 아니지만요. 으음.”

어차피 바라의 영역에 있는 정령은 전부 온순한 물의 정령이다.

불의 정령처럼 머리카락을 태운다든가, 그런 도를 넘는 장난은 안 한다.

얼마나 바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을까.

선실의 문이 열렸다.

“두 분, 나오시라고 하네요.”

“너는?”

“저는 여기서 대기하겠습니다.”

나는 마리나와 함께 갑판 밖으로 나갔다.

수중이면서, 수중이 아니었다.

보기에는 물속이 분명했는데, 숨도 쉴 수 있고 물의 저항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빛이 닿지 않는 심해 깊숙한 곳이었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라이트(Light).

빛무리를 만들어 주변을 밝혔다.

수중을 유유히 움직이던 물의 정령들이 호기심을 보이며 빛무리로 몰려들었다.

배는 수면 아래에 가라앉은 상태였는데, 옆에는 산호나 해초가 있었다.

마리나는 조용히 내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도련님, 신어께서는 어디 계시죠?”

“바로 앞에 있잖아.”

“네?”

나는 빛무리를 뱃머리 쪽으로 날려 보냈다.

검은 절벽이 보였다.

그것은 절벽처럼 보일 만큼 거대한 어떤 존재였다.

신어, 바라가 눈을 떴다.

* * *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한 마리나가 주춤 뒷걸음질 쳤다.

저 크기를 마주하면 아무래도 압도되기 마련이다.

라이트의 빛무리로는 다 비춰지지도 않았다.

심해의 어둠에 잡아먹힌 몸은 그 크기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건 진귀한 광경이군.”

고래와 비슷한, 물을 울리는 듯한 느낌의 울음소리.

알아들을 수 없어야 정상이건만 그 의사는 똑똑히 머릿속으로 전달됐다.

바라는 눈을 끔뻑이며 나와 마리나를 번갈아 보았다.

“목오의 신성을 품은 대마법사와, 어린 신목의 대리인이 된 마녀의 후예라.”

이미 신성까지 꿰뚫어 본 것 같았다.

신성이 로브 밖으로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가, 쏙 들어갔다.

세계수한테는 말만 잘하더니, 뭔가 느낌이 다른 것 같다.

옅게 느껴지는 신성의 감정은, 공포에 가까웠다.

“먼저, 죽음을 거스른 대마법사여. 묻겠다. 대답하라.”

“들어 보고.”

“어찌 인간의 몸으로 신성을 품은 것인가?”

예상외의 질문이 나왔다.

나는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목오가 소멸하며 넘겼다. 이유는 몰라.”

“죽음을 거스르기 위해서, 갈취한 것이 아닌가?”

“뭐?”

아무래도 내가 수명을 억지로 늘렸던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바라를 경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라 또한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이유는 신성을 몸에 품었기 때문인데,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설마 너, 지금 내가 불사의 교단과 한패라고 의심하는 거냐?”

“그렇다. 그대는 필멸자이면서 불사를 소망하지 않았더냐.”

“내가 그쪽 편이었다면, 불사의 괴물은 진즉에 봉인에서 풀려났을 거다.”

나는 확실히 전생에 수명을 늘렸다.

지금도 환생하여 삶을 이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오롯이 내 능력으로 이뤄 낸 일이다.

불사의 괴물의 힘을 빌리고자 생각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거 몇 백 년 못 살고 죽었다. 수천 년을 넘게 살면서, 쩨쩨하게 그걸로 꼬투리를 잡냐?”

“얼마 전, 죽음이 지상에 도래했다.”

“아, 그건 나 잡으러 온 거 맞아.”

“제아무리 변수라고 할지라도, 절대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그런데, 짜잔. 절대라는 건 없더군.”

“말장난은 하지 말아 줬으면 하는군. 나는 세계수처럼 너그럽지 않다.”

바라는 나를 응시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인데 뭐 어쩌겠는가.

결국 포기했는지, 바라가 눈을 끔뻑였다.

“어떻게 죽음을 거스른지는 모르겠으나, 그대는 변수의 범위에서도 벗어난 상태다.”

“흐름에 다시 들어왔다는 건 아닐 텐데.”

“더 이상은 말할 수 없다. 행동에 유의하라.”

“뭐 언제부터 신경을 썼다고.”

바라의 눈동자가 조금 움직였다.

마리나가 움찔 몸을 움츠렸다가, 심호흡을 하고 가슴을 폈다.

“반갑다. 어린 신목의 대리인이여. 추한 모습을 보여 미안하구나.”

“처음 뵙겠습니다. 마리나라고 합니다.”

“죽음을 거스른 대마법사보다는 예의가 있군.”

은근슬쩍 나를 까 내린다.

바라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요르문간드와 계약을 나눴을 때부터 그랬다.

“대마법사와는 어떤 관계지?”

“저는 지그문트 마이어 님의 시녀입니다.”

“대리인이면서 신 이외의 존재를 받드는 건가?”

“리옐 님의 대리인이 되기 전부터 시녀였습니다. 리옐 님도 받아들여 주셨고요.”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사담이 길군. 중요한 이야기인가?”

“이야기의 경중은 개인마다 다르다.”

“훈화 말씀 들으러 온 게 아니야. 본론으로 넘어가.”

“급한 성격은 여전하군. 죽음을 거스른 대마법사여.”

바라는 일부러 내 신경을 긁고 있었다.

묘하게 신성이 불편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순순히 의견을 수용하고 부른 것을 보면 협력을 요청할 줄 알았는데, 질질 끄는 이유를 모르겠다.

“시간 허비하지 말자는 거지. 너도 멀쩡한 상황은 아닐 텐데.”

바라는 백색의 고래와 비슷한 형상을 띠고 있다.

하지만 지금 빛무리에 비친 바라는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세계수의 팔을 타고 올라온 것과 같은, 신살이었다.

불사의 괴물을 억누르고 있었던 만큼,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을 터.

겉으로 보기에도, 세계수보다 더 심각한 수준인 것 같았다.

“그대들이 퀸틴을 찾은 이유는, 놈 때문이겠지?”

“그래. 맞다.”

비단 세계수 때문이 아니더라도, 불사의 괴물은 풀려나면 안 된다.

땅에 사는 신은 이제 고작 둘 남은 상황.

그 둘이 모두 신살의 영향을 받았다.

‘목오의 빈자리는 세계수가 어떻게든 메꿀 수 있는 수준이었다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

세계수와 바라가 죽음에 이르는 것은 막아야 했다.

하늘에 사는 두 신이 내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봉인이 점점 풀리고 있는 것 같은데. 문제가 뭐지?”

“놈의 의식이 깨어났다. 점점 힘을 되찾고 있는 상태지.”

“제 능력만으로? 신의 봉인이 그렇게 허술했나?”

“아니. 외부로부터 개입이 있었다.”

“불사의 교단이겠군.”

불사의 괴물을 신으로 받들어 따르는 광신도 집단.

발레리아의 도움으로, 그들의 성서를 읽어 볼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 쓰인 구절 하나가 떠올랐다.

‘불사의 괴물이 깨어나면, 신자들은 불사의 축복을 받는다.’

불사의 신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불사.

그를 위해서는 불사의 괴물을 봉인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야 했다.

당연히 바라가 말한 외부로부터의 개입은 불사의 교단일 터였다.

그런데, 한 가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불사의 교단은 불사를 갈망하는 인간으로 이루어진 집단이다.”

아그나를 부리기도 하고, 스스로 아그나를 먹어 불사자라는 괴물이 되기도 한다.

어느 정도 무력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바라에게 위해를 가할 정도의 힘은 없었다.

비록 봉인 때문에 묶여 있으나, 바라 또한 신이다.

신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수 있을 만한 인간은 극히 드물다.

전생의 나, 혹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 요아힘 월베른 정도.

‘설마 그 노친네가 불사의 교단에 개입하진 않았을 테고.’

불사의 교단이 팔베르크 제국과 결탁해 있는 만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요아힘 월베른은 불사의 교단과 손을 잡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 손을 잡았다면, 봉인 해제가 이토록 지지부진하게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요아힘 월베른은 나와 같은 변수니까.

“그럴 만한 힘은 없을 텐데.”

“내게 위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다. 놈에게 힘을 쥐여 주고 있는 것이지.”

“제물이라도 바치고 있다는 말인가?”

“바로 그렇다.”

“신의 봉인을 약화시킬 정도로 힘을 되찾을 제물? 타락한 성유물이라도 바쳤나?”

성배는 리에이트 교국의 성자, 말론이 쥐고 있다.

그 전에, 한 가지 떠오른 것이 있었다.

‘대사제?’

리에이트 교국을 타락의 길로 이끌었던 인물.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없지만, 그 수하인 클레이먼 주교는 만난 적 있었다.

그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마족과도 연루되어 있었다.

성유물 중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은 성배다.

그러나 성유물은 하나가 아니었고, 대부분은 리에이트 교국의 대신전에서 관리했다.

추측일 뿐이지만, 빼돌렸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꼬이는군. 어디까지 얽힌 거지?’

마족과 불사의 교단이 엮여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 사이에는 팔베르크 제국이 있으니까.

하여튼 모든 악의 축은 팔베르크 제국 쪽으로 이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황제 놈이 만악의 근원이다.

“룬달에게 수색은 요청했는데.”

“헛일이다. 퀸틴에는 없다.”

“어떻게 확신하지?”

“퀸틴은 내 영역의 일부다. 아그나 따위가 들어왔다면, 알 수 있다.”

세계수가 태초의 숲 각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 같았다.

설마 퀸틴에 없을 줄은 몰랐다.

봉인지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만큼, 거의 확정 사항이라고 생각했는데.

룬달이나 청탑주 같은 강자가 있어 몸을 사리고 있는 걸까.

“그러면 범위가 너무 넓어지는데.”

불사의 신자들이 목격된 국가는 차고 넘쳤다.

레온하트 왕국을 제외하더라도, 본거지가 어딘지 찾으려면 서대륙 전역을 뒤져야 했다.

롭이 수색하고 있지만, 아직 연락은 없고.

“인근에 있다. 미세하게 느껴지는 바로는, 서부다.”

“여기서 서부라면…… 프라우드 산맥 동부 연안?”

“그 근처를 수색하라.”

“쯧. 인어들한테 하라고 하면 될 것을.”

“퀸틴의 방어책을 외부로 돌릴 수는 없다.”

불사의 괴물을 직접적으로 봉인하고 있는 것은 바라다.

대부분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봉인에 있어서 중요한 물건이 퀸틴 상층부에 있다.

그것이 탈취되면, 제물이고 뭐고 바로 봉인 해제다.

룬달을 비롯한 인어들과, 청탑주가 버티고 있었기에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심부름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난 무료 봉사는 안 하는 주의인데.”

“도련님.”

마리나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목소리가 평소와 달라, 뒤를 돌아보니 몹시 불안한 듯한 눈이었다.

바라도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는지, 눈동자를 돌렸다.

* * *

단 록벨런은 지그문트의 명령대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리옐과 함께 좁은 2인실로 방을 잡았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리옐이 침대에서 자는 동안, 단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중이었다.

“흐아암.”

하지만 아무리 단이라도 졸음에는 어쩔 수 없었다.

강도 높은 훈련을 일상적으로 한다지만, 항해 도중에는 거의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그 울렁거리는 곳에서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단의 고개가 크게 기울었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헉.”

자칫하면 잠이 들 뻔했다.

단은 제 허벅지를 강하게 꼬집었다.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의 통증으로 잠을 어느 정도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잠보다 지그문트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지그문트가 보고 있지 않더라도,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때였다.

뚜벅. 뚜벅.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 새벽에 여관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은 드물었다.

평범한 손님일 수 있더라도, 경계는 철저히 해야 했다.

단은 클레이모어를 쥐고 문 쪽으로 다가가 소리에 집중했다.

뚜벅, 뚜벅.

잔뜩 경계했던 것이 무색하게, 발소리는 방문을 지나쳐 멀어져 갔다.

단은 긴장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걱정이었다.

혹시 지그문트나 마리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단은 섬뜩한 감각을 느꼈다.

부웅!

황급히 뒤를 돌아, 클레이모어를 크게 휘둘렀다.

오러 서린 검날이 허공을 갈랐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단은 무릎을 살짝 굽히고, 양손으로 클레이모어 손잡이를 쥐었다.

“……!”

리옐이 일어나도록, 일부러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아티팩트든 마법이든, 모종의 수로 입막음을 당한 것 같았다.

단은 지그문트가 사일런스(Silence)로 사람을 침묵시키는 것을 몇 번 본 적 있다.

그래서 당황하지 않았다.

쿵!

발을 굴러 큰 소리를 냈다.

간단한 파훼법이었지만, 효과가 있었다.

옆으로 누워 자던 리옐이 부스스 눈을 뜬 것이다.

섬뜩한 목소리가 단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감이 좋구나. 젊은 기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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