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해상 도시 퀸틴
“나리, 곧 암초 지대에 접어들 겁니다.”
잭이 넌지시 소식을 전해 왔다.
드디어 퀸틴에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갑판으로 나갔다.
흐린 하늘 아래, 잔뜩 긴장한 듯한 선원들이 나와 있었다.
“지그문트 마이어, 이쪽으로 와 보겠나?”
인어, 아노르가 기다란 장대를 뻗어 바다에서 무언가를 건져 냈다.
물을 흠뻑 머금은 천 조각이었다.
아노르는 천 조각을 갑판에 대충 늘어놓았다.
찢어진 일부로 보였음에도 크기가 상당한 편이었다.
“이건?”
“돛의 일부. 퀸틴의 선박이 사용하는 재질이다.”
“난파인가?”
“이쪽으로 와 보면 알 거다.”
나는 아노르 곁으로 갔다.
거세게 출렁이는 바다에는 선박의 잔해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아노르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나를 지원하기 위해 뒤따라온 퀸틴의 추가 병력 같다.”
“상선이나 정기선일 가능성도 있지 않나?”
“동료 백부장의 사체를 봤다. 퀸틴의 동부 해안을 담당하던 자였지.”
“유감이군.”
“익숙한 일이다. 바다는 위험한 곳이니.”
아노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담담한 척 연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전방을 살폈다.
수면 위로 툭 튀어나온 바위가 드문드문 보였다.
화이트웨일 항구에 있는 것과 같은,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
암초 지대였다.
“그래서, 갈 건가?”
“가야지.”
“만일 난파한다면, 나는 전력으로 도망칠 것이다.”
“그러든가.”
잭이 직접 키를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입하겠습니다!”
배가 암초 지대에 들어섰다.
정기선을 제외하면, 퀸틴을 오가는 선박은 드물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악명 높은 암초 지대 때문이었다.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바다의 덫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갔다.
“비? 갑자기?”
“날씨도 참.”
물방울이 머리 위로 툭툭 떨어졌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바다는 배를 집어삼킬 듯 사납게 출렁였다.
우르릉.
바다의 날씨는 알 수 없다더니.
비와 함께, 거센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돛이 팽팽하게 늘어났다.
팡!
배가 앞으로 튕겨 나가듯 가속했다.
갑판에 있던 선원 몇 명이 넘어졌다.
비에 흠뻑 젖은 잭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돛 내려!”
배는 단숨에 선회할 수 없다.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암초에 부딪칠 것이다.
선원들은 이를 악물고 움직여 돛을 내렸다.
하지만 한 번 가속이 붙은 배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움직였다.
“닻도 풀어!”
“수심이 너무 깊습니다!”
“이런 젠장!”
닻을 풀어 속도를 늦추려 했으나, 수심이 너무 깊어 그것도 무리였다.
잭은 힘껏 키를 돌렸다.
배가 좌현으로 기울었다.
자질은 있으나, 선장으로서 항해한 경험은 부족한 잭이다.
처음부터 어느 정도 도와줄 생각이었다.
“부딪칩니다!”
전방의 암초가 보였다.
나는 암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척력(Repulsive Force).
배와 암초가 서로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배의 무게와 속도가 더해져, 아주 밀려나진 않았으나, 적어도 배의 속도를 줄이는 데에는 성공했다.
“크윽!”
아주 약간의 시간 벌이.
그 틈에, 잭은 키를 완전히 좌현으로 돌렸다.
왼쪽으로 크게 기운 배는 암초를 피해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놈이다!”
뱃머리에 있던 아노르가 소리쳤다.
검은 바다 밑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언뜻 보기에도 보트 이터의 수십 배에 달할 듯한 크기.
“이쪽으로 온다! 잭 스왈로우!”
“암초 때문에, 방향 못 틉니다!”
해도에 의하면, 현재 배의 양옆은 보이지 않는 암초로 들어차 있었다.
이 좁은 암초 지대에서 뱃머리를 돌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답은 정면 돌파밖에 없었다.
‘저걸 어쩐다.’
크기를 봤을 때, 보트 이터처럼 쳐 내는 건 무리였다.
설령 지금 나서서 죽인다고 해도, 사체가 떠오르며 길이 막혀 버릴 것이다.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잭!”
“예! 나리!”
“암초가 없는 곳!”
“저기! 솟아오른 바위! 오른편입니다!”
나는 허리에 있던 그리무아르를 꺼냈다.
빗방울이 가죽 표지로 떨어졌다.
표지의 세로선이 벌어지며 입이 나타나더니, 물을 퉤퉤 뱉어 냈다.
“젖는다.”
“시끄러워.”
나는 그리무아르의 불평을 무시하고, 페이지를 넘겼다.
마도서는 일반적인 서적처럼 젖었다고 손상되진 않는다.
“뭐 하는 건가!”
“있어 봐.”
아노르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빠르게 그리무아르의 페이지를 넘겼다.
마도서란, 마법이 기록된 책이 아니다.
각 탑주가 하나 정도 소유하고 있을 만큼 희귀하며, 그 능력 또한 기괴한 것이 많다.
그중에 하나가, 연결.
‘연결까지는 아직 무리고.’
나는 현재 6서클 마도사.
그리무아르를 제대로 사용하기에는 마나 서클과 마나 총량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대신, 도움 정도는 받을 수 있었다.
괜히 고생하면서 얻어 낸 물건이 아니었다.
‘마나를 빌린다.’
대규모 마법은 무식할 정도로 마나를 많이 소비한다.
지금 내가 사용하면 뒷감당이 안 된다.
그래서 그리무아르에게 마나를 빌리기로 했다.
그리무아르 안에 기록된 마법을 사용해, 보조를 받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나를 무한정으로 빌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추후에 갚을 수 있는 만큼만 빌려야 했다.
안 그러면 그리무아르에게 잡아먹힌다.
“큭.”
그리무아르를 잡은 손을 타고 마나가 빠져나갔다.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마법을 사용했다.
서클 부스트(Circle Boost).
마나 서클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바다에서 무언가 솟구쳐 올라왔다.
바닷물이 배 위로 쏟아져 들어왔다.
“저건!”
“크라켄이다!”
“저거 전설 아니었습니까?”
“나도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란 말이다!”
“나리! 뭐라도 좋으니 부탁드립니다!”
소형선을 이어 놓은 수준으로 크고 긴, 문어의 다리.
뱃사람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지는 몬스터, 크라켄이었다.
아노르가 나를 닦달했다.
“이제 어떡할 거냐!”
저걸 잡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방법은 하나.
“도망쳐야지.”
“왼쪽도 오른쪽도 막혀 있는데! 어디로 말이냐!”
크라켄의 다리가 위로 솟구쳤다.
마법이 아슬아슬하게 완성됐다.
배가 박살 나기 전, 나는 고개를 쳐들고 대답했다.
“위로.”
블링크 강화 마법, 그레이트 블링크(Great Blink).
대규모 마법을 사용할 때 느껴지는 특유의 탈력감이 느껴졌다.
시야가 바뀌었다.
보이는 것은, 하늘.
발이 공중에 떠올랐다.
“어, 어?”
“이게 무슨!”
“뭐든 붙들어라! 뒈지기 싫으면!”
배가 하늘을 날았다.
블링크는 시야 내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마법.
이동 거리나 이동시키는 물체의 크기에 따라 마나 소모량이 달라진다.
배를 통째로 이동시키는 건 극단적으로 비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배를 박살 내지 않고 크라켄을 피해 내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잭!”
“네!”
“착륙, 해 본 적 있냐?”
“어, 없는데요! 배가 착륙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참에 해 봐!”
“으어어어어어어억!”
이대로 수면에 곤두박질치면, 당연히 배는 부서진다.
속도를 줄여야 했다.
나는 연이어 캐스팅한 두 번째 마법을 발동시켰다.
페더 폴 강화 마법.
그레이트 페더 폴(Great Feather Fall).
텅!
낙하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물론 떨어지는 건 변함없었다.
잭이 명령을 내렸다.
“돛 올려어어!”
혼비백산했던 선원들이 돛을 올렸다.
죽기는 싫었던 모양인지 빠르게 움직인다.
겨우겨우 돛을 올리니, 바람을 받은 돛이 팽팽하게 늘어났다.
펑!
낙하하던 배가 바람의 방향을 따라 활공하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는데, 꼭 공중을 항해하는 것 같았다.
부웅!
동시에, 선박 옆으로 뭔가 스쳐 지나갔다.
창인 줄 알았는데, 커다란 돛대였다.
아래를 보니, 크라켄이 선박의 잔해를 다리로 꼬나 쥐고 있었다.
파공음과 함께, 선박의 잔해가 연속해서 날아왔다.
돛을 펴지 않았더라면, 적중당해 낙하했을 것이다.
경사를 이루며 내려간 선박은 이윽고 수면에 착륙했다.
쾅!
바닷물이 폭발이라도 하듯 좌우에서 터져 나갔다.
잭이 말했던 솟아오른 바위 오른쪽보다 약간 앞이었다.
크라켄이 방향을 틀어, 이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으악! 저거 쫓아온다!”
“전속력으로 튀어라!”
* * *
아침이라고 부르기는 모호한, 늦은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항구를 살피던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저거, 저거! 배 아니야?”
“어! 진짜네?”
퀸틴의 서부 항구로 배 한 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항구에 배가 들어오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서부 항구에는 수많은 배가 정박한 상태였다.
온갖 이상 현상 때문에 출항이 전면 금지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건너온 거지?”
“암초 지대 방향에서 오는 걸 보니, 경비대의 배 같은데.”
“아니. 경비대의 배는 저렇게 까맣지 않잖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항구로 몰려들었다.
이윽고 검은 배가 정박했다.
가장 먼저 배에서 내린 것은, 초췌한 안색의 단이었다.
“육지다. 육지……! 하하……!”
체면은 내려놨는지, 바닥에 엎어져 흐느끼기 시작했다.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조금 뒤로 물러났다.
뒤이어, 리옐과 마리나가 내렸다.
“재밌었어!”
“그런가요? 저는 조금 무서웠는데.”
“괜찮아! 내가 지켜 줄게!”
“감사해요. 리옐 님만 믿을게요.”
잭과 선원들, 그리고 아노르도 내렸다.
지그문트는 선원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들이 배에서 다 내기 무섭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다른 항로를 찾은 겁니까?”
“바다는 어때요?”
“어? 잭!”
지그문트는 인상을 찡그렸다.
인어와 사람들은 질문 공세를 시작했다.
다행히도, 해안 경비대로 보이는 인어들이 찾아와 소란을 중재했다.
“아노르 님! 살아계셨군요!”
“음, 그래.”
“이분들은……?”
“내 생명의 은인이다.”
“아, 모시겠습니다!”
지그문트 일행은 아노르를 따라 항구를 빠져나왔다.
잭은 지그문트에게 검은 진주를 양도 받았다.
애석하게도, 선원들은 모두 퀸틴의 해안 경비대에게 압송됐다.
생사고락을 함께했어도, 어쨌든 인신매매범이었으니까 말이다.
“수고가 많았다. 잭.”
“아닙니다. 흐하하! 누가 하늘을 항해해 보겠습니까!”
“연이 닿는다면 또 보지.”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잭과 헤어진 후, 아노르도 이별을 고했다.
생환 신고와 크라켄에 대한 보고를 위해서였다.
그 전에 자신의 거처를 알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곤란한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찾아오도록.”
“그러지.”
“다시 한번, 목숨을 구해 줘서 고맙다.”
정중하게 인사한 잭은 해안 경비대의 인어들을 따라 사라졌다.
지그문트는 기지개를 켰다.
옆에 있던 리옐이 그것을 따라 했다.
마침내, 퀸틴에 다다른 것이었다.
“여기가 퀸틴이군요.”
“아름다운 도시네요.”
“예쁘다!”
해상 도시 퀸틴은 섬이면서, 거대한 언덕과 같은 모양새였다.
중심으로 갈수록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높아지는 구조다.
가장 높은 중심부에서는 물이 쏟아지는데, 그 물을 따라 퀸틴 전역으로 수로가 이어져 있다.
인어들이 이동하기 용이하게 건설된 일종의 길이었다.
‘다 수복됐군.’
요르문간드에게 한 차례 반파된 적 있는 퀸틴이다.
그때는 피해가 말도 아니었는데, 어느새 복구를 완료한 것 같았다.
퀸틴은 평화로웠다.
수로를 오가던 인어들이 몸을 반쯤 육지에 걸치고,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리옐이 눈을 빛내며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빠! 아빠! 저것 봐 봐!”
한 인어가 수로에서 나와 육지에 올라섰다.
물로 이루어진 덩어리가 꾸물거리며 인어의 하반신을 받쳤다.
그리고 인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녀가 검은 안개에 의지해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마리나도 궁금증이 일었는지, 물었다.
“저게 뭔가요?”
“정령.”
“정령요?”
“얘도 쓰잖아. 못 봤냐?”
리옐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리옐은 왜 제 머리에 손이 올라갔는지 영문도 모른 채 마냥 좋다고 히히 웃었다.
인어가 타고 다니던 것은 물의 하급 정령이었다.
본래 조그마한 물방울 같은 모양새였지만, 수로의 물을 흡수하여 크기를 늘린 것이었다.
“정령사는, 마법사보다 희귀하다고 들었는데요.”
“맞아. 마나를 느끼는 사람보다 정령의 호의를 얻는 사람이 더 드물지.”
“그럼 저분이 특별한 건가요?”
“아니. 인어는 대부분 정령술을 사용할 수 있어.”
인어는 정령, 그중에서도 물의 정령과 상당히 친화적인 종족이다.
드물지만 정령의 말을 알아듣는 인어가 나타나기도 한다.
“어떻게 그러죠?”
“대다수의 엘프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거랑 같은 이치야. 종족 특성이지.”
“아.”
퀸틴에서는 인간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폐쇄적인 엘비아와 달리, 외부와 교류가 활발한 퀸틴이다.
섬인 만큼 육지에서 자원을 수입하는 것이 반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종종 상선이 오가기도 하는데, 정착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만큼 살기 좋은 곳이었다.
“단, 마리나. 불사의 교단이 퀸틴에 주둔해 있을 확률은 상당히 높다.”
그렇다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해상 도시 퀸틴은 불사의 괴물이 봉인된 곳과 상당히 가까운 위치에 있는 육지다.
불사의 교단이 괴물의 봉인을 풀고 있다면, 이곳에 거점을 뒀을 확률이 농후했다.
“가급적이면 리옐에게서 떨어지지 말도록.”
“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일찍이, 리옐은 불사자에게 노려진 적 있다.
불사의 괴물과 신목은 상성에 가까운 존재다.
경계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었다.
‘선공을 가하는 것이 제일 좋지만…….’
퀸틴은 도시를 표방하는 것과 달리 네르갈의 수배에 달하는 크기를 자랑한다.
여기서 숨어 있는 불사의 신자를 찾으라니.
막막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트리옌에서와 달리, 암국의 도움을 바라기도 요원한 일이었다.
암국은 퀸틴에서 철수했으니까.
“신어의 상태부터 확인하는 게 1순위겠군.”
“신어라고 하면, 세계수님과 같은 땅에 사는 신입니까?”
“그래. 땅이 아니라 물에 살긴 하지만, 동류지.”
신살이 발현되었고, 그 정도는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이는 불사의 괴물의 봉인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봉인을 담당하고 있는 신어에게 이상이 생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신어라면, 물고기인가요?”
“신목이 나무고, 신수가 거북이라고 하면, 물고기라고 할 수 있겠네.”
* * *
“크라켄? 지금 크라켄이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아노르는 뒷짐을 진 채 보고를 마쳤다.
상당히 긴장한 모양새로, 자세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볼을 타고 흐른 땀방울이 턱 끝에 맺혔다.
어느 정도 나아졌다고 생각한 복부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확실히, 예삿일은 아니군요.”
“선박을 너무 많이 잃었습니다.”
“남부 블루홀이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거기서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하필 우회로에 자리를 잡다니.”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꼴이군요.”
“지금 당장은 문제가 없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이 수면 위로 드러날 겁니다.”
“그렇겠지요. 하루라도 빨리 대안을 찾아야 하는데.”
해상 도시 퀸틴의 의회.
각 지구의 결정권자들이 전원 모인 상태였다.
모두 심각한 얼굴이었다.
“아, 아노르 경은 어떻게 퀸틴으로 복귀한 겁니까?”
“예! 서부 암초 지대를 가로질렀습니다!”
“하지만 방금 크라켄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아노르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고민했다.
배가 하늘을 날았다고 하면, 과연 이들이 믿을까.
그렇다고 거짓을 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모두 토로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의원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배가 하늘을 날았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잠시만요. 다들 조용히 해 보세요.”
그때였다.
의회 상석에 앉아 있던 여자 인어가 입을 열었다.
소란스럽게 의견을 나누던 의원들이 침묵했다.
그녀는 퀸틴의 최고 결정권을 쥐고 있는, 의회의 핵심.
의회장이었다.
“아노르 경, 아까 말씀하셨던 생명의 은인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첫 번째는 지그문트 마이어라는 인간 남성입니다. 금발에…….”
의원 하나가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끼어들었다.
“지그문트 마이어라면, 요정족의 은인 아닙니까! 다들 들어 본 적 있으시지요?”
“우리도 다 알고 있으니, 말 끊지 말고 가만히 좀 계십쇼.”
“끙.”
아노르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의원장이 다시 턱짓하자 말을 이었다.
“단이라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뱃멀미로 시종일관 고생하더군요.”
“그리고요?”
“마리나라는 이름의 시녀였습니다. 용모가 빼어난 것 외에는 특별한 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음, 마지막 한 사람요.”
“리옐이라는 이름의 어린 여자아이였습니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딸로 추정됩니다.”
“……자세히 설명해 보세요.”
* * *
화이트웨일 항구는 정기선 출항 정체로, 사람들이 붐볐다.
본래 퀸틴으로 가고자 했던 사람들의 발이 묶여 버린 것이다.
성질 급한 몇몇 사람들은 출항하라고 성을 냈지만, 선장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출항을 왜 못 한단 말입니까! 수온 조금 상승한 게 대수야?”
“대수입니다. 몬스터의 등장 빈도가 확연히 상승한 상태에서…….”
“몬스터고 나발이고, 나는 지금 퀸틴에 가야 한다니까?”
“방금 말씀드렸지만, 갈 수 없습니다.”
“아! 지금 못 가면 손해가 얼만지 알아!”
로브 차림의 여자 하나가 걸어왔다.
적탑의 마법사를 상징하는 붉은 로브.
적탑주 발레리아 로안이었다.
눈에 띄는 붉은 머리카락을 알아본 사람들이 주춤 물러섰다.
방금까지 선장을 잡아먹을 듯 항의하던 사람도 입을 닫고 옆으로 물러났다.
“출항은 정말 불가능한가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정기선을 제외하고 퀸틴으로 향하는 배편이 있나요?”
“없습니다.”
발레리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7서클 마법사는 텔레포트로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인식이 있다.
이는 상당히 잘못된 상식이다.
장거리 이동 마법, 텔레포트(Teleport)에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다.
직접 가 본 곳을 제외하면,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목오 사막 때처럼, 전송 장치의 도움을 받으면 모를까. 끙.’
발레리아는 한숨을 폭 내쉬고 수평선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배가 출항하지 않는다면, 갈 방법이 없었다.
비 때문에 불의 서와 연결도 불가능한 상황.
“큰일 났네.”
발레리아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항해하라고 강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 시가 급한데, 이렇게 허무하게 발을 묶이게 될 줄은 몰랐다.
플라이(Fly)로 날아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지.’
지그문트 마이어가 움직이는 시기까지 모두 계산하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발레리아 로안으로서는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퀸틴에는, 적어도 지금 지그문트 마이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것들이 있었다.
‘스승님이라면 어떻게든 하겠지만.’
발레리아는 지그문트의 능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최근에는 검으로 소드 마스터를 이겼다는 소식도 있었다.
발레리아는 지그문트를 신뢰하는 동시에, 걱정했다.
‘왜 하필 통신구를 깨 먹어서는!’
이미 조력을 요청한 상태였지만, 그들이 언제 올지는 미지수였다.
발레리아는 막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력감에 휩싸였다.
렘센에서, 죽음이라는 것이 지그문트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한 번 죽었다 살아난 만큼, 발레리아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제발, 제가 갈 때까지만!’
* * *
단은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훈련으로 보낸다.
트리옌 왕국에서 어트 한넬과 검을 부딪친 후로, 그 시간은 확연히 증가했다.
원래대로라면 휴식도 훈련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며 쉬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몸을 혹사시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후욱, 후욱.”
식사와 휴식을 위해 머무르게 된 여관, 뒤뜰.
단은 가쁜 숨을 내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땀으로 젖은 옷이 살갗에 달라붙어 불쾌했다.
시야는 흐렸고, 팔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배에서 하지 못했던 훈련을 보충한다는 이유도 있었으나, 비단 그 때문은 아니었다.
‘뭔가 잡힐 것 같은데, 잡히지 않는다.’
단은 소드 익스퍼트 초급의 기사였다.
지금은 지그문트의 도움으로 소드 익스퍼트 중급에 도달한 상태.
단 본인도 체감할 수 있을 만큼, 그릇이 눈에 띄게 커졌다.
모두 지그문트 마이어가 영약을 아낌 없이 지원한 덕분이었다.
‘더 강해져야 하는데.’
전에는 다 찬 독에 물을 끼얹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조금씩일지언정, 독이 채워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단은 충분히 강한 상태였다.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기사는 왕실에서 주목할 정도의 인재다.
그러나 단은 안주하지 않았다.
유일한 비교 대상이 지그문트 마이어였기 때문이다.
“하아.”
단의 성장 속도도 충분히 괴물 같았으나, 지그문트는 상식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단은 더욱 노력하고, 피나게 훈련했다.
간격을 좁히는 방법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거의 탈진 직전까지 몸을 움직인 단은 바닥에 널브러져 숨을 돌렸다.
단의 눈이 이상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음? 저건…….”
정체불명의 인물이 공중에 떠 있었다.
그는 여관의 벽을 따라 창문 안쪽을 살피고 있었다.
단은 조용히 그자가 살피고 있는 여관의 층수를 세었다.
3층, 지그문트 일행이 머무르고 있는 층이었다.
‘설마!’
지그문트의 경고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불사의 교단이 퀸틴에 주둔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목표는, 리옐.
단은 황급히 여관 내부로 뛰어 들어갔다.
“리옐 아가씨!”
단 록벨런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몸을 혹사시킨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이었기에, 허벅지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단은 멈추지 않았다.
성큼성큼 3층에 도달한 단은 가장 가까운 창문을 열어 젖혔다.
“거기! 멈추십시오!”
단은 창틀을 짚고, 창밖으로 나갔다.
벽에 툭 튀어나온 부분이 있어, 창틀을 잡은 채 그곳을 밟고 섰다.
로브를 둘러쓴 정체불명의 인물은 단을 보고 크게 당황한 듯 뒤로 물러섰다.
‘마법사!’
단은 그를 마법사로 단정 지었다.
지그문트가 플라이(Fly)를 사용하는 것을 자주 본 적 있기 때문이었다.
지그문트 마이어는 단에게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을 알려 준 적 있다.
블링크(Blink)를 사용할 수 없는, 5서클 아래의 마법사라면.
‘우선 거리를 좁혀라!’
대다수의 마법사는 접근전에서 약한 면모를 보인다.
마법을 캐스팅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방어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마이어 같은 특수한 케이스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그랬다.
단은 과감하게도 정체불명의 인물을 향해 뛰어들었다.
“어?”
붙잡아, 함께 떨어질 요량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녹록지 않았다.
부드럽게 손을 휘저으니, 단의 앞에 무언가 희미한 형체를 드러냈다.
공기가 일그러져 새의 모양이 만들어진 듯했다.
단은 그것의 정체를 쉽게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정령술?’
아무래도 부유하고 있었던 것도, 정령이 받쳐 줬던 것 같았다.
새가 날갯짓을 하자, 거센 바람이 불어 단을 밀어냈다.
공중에서 단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대로 창문 안쪽으로 밀려난 단은 복도를 굴렀다.
“큭!”
뒤이어 로브를 둘러쓴 인물이 유유히 날아 들어왔다.
이번에는 바람의 정령들이 밑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인물이 사뿐히 내려앉기 무섭게, 바람의 정령이 단의 목에 날개를 겨눴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목에 얕은 상처를 만들었다.
‘힘이 안 들어간다.’
단은 훈련으로 지친 상태기에, 간단하게 제압당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정령을 다루는 데 있어서 능한 인물이었다.
로브를 뒤집어쓴 인물이 입을 열었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당신,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다짜고짜 습격을 하다니.”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수상하게 여관에 달라붙어서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저는, 찾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다면 1층에서 찾으면 될 텐데요.”
“사정이 있어요. 그것까지 설명해야 하나요?”
“정당하다면, 설명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단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여자의 로브를 살폈다.
불사의 신자들이 입는 로브에는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다.
역삼각형을 가로지르는 세로선.
하지만 여자의 로브에서는 그런 문양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닻과 비슷한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저건…… 퀸틴의?’
처음 항구에 도착했을 때, 언뜻 본 기억이 있었다.
“어쩔 수 없네요.”
여자는 주변을 살피더니, 머리를 가리고 있던 로브를 걷어 보였다.
바다와 같은 푸른색 머리칼의 인어가 얼굴을 드러냈다.
“저는 해상 도시 퀸틴의 의회장을 맡고 있는 룬달이라고 합니다.”
“의회장……?”
* * *
마리나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내 맞은편에는 푸른 머리칼의 인어, 룬달이 앉아 있었다.
단이 대뜸 데려왔는데, 정말 의회장이 맞는 것 같았다.
예전에 들었던 것과 생김새도 일치하고, 마법이나 아티팩트로 모습을 바꾼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어깨에 있는 바람의 상급 정령이 그 증거였다.
‘두 종류의 정령을 다룬다더니, 사실이었군.’
개개인마다 상성이 맞는 속성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
인어의 경우는 대부분 물이다.
정령사는 아니지만, 발레리아의 경우에는 불 속성을 선호하고 잘 다룬다.
퀸틴의 의회장은 드물게도 두 종류의 속성과 상성이 맞는 경우였다.
“그래서, 용건이 뭐지?”
“저기 계신 리옐 님입니다.”
리옐은 창가에서 노곤한 얼굴로 햇볕을 쬐고 있었다.
비 온 뒤의 맑은 하늘은 리옐이 좋아하는 날씨였다.
새싹이 기분 좋게 흔들렸다.
제 이름을 들었는지, 잠결에 감고 있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으응?”
“아무것도 아니니까, 계속해.”
“으응…….”
리옐은 다시 눈을 감고 광합성을 재개했다.
나는 룬달의 눈을 직시했다.
리옐을 지목한 걸 보면, 바다에서 있었던 일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지그문트 마이어 님께서는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거의 다.”
“너무 두루뭉술한 대답이군요.”
“네가 두루뭉술하게 물어봤잖아.”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식으로 유도하는 질문은 좋아하지 않는다.
“신어인가?”
룬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퀸틴의 의회장은 대대로 신어와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고 룬달이 신어의 대리인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신어는 따로 대리인을 두고 있지 않았다.
“리옐 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거절한다.”
“……네?”
룬달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거절당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로, 우리가 뭘 믿고 너를 따라가지?”
나는 룬달을 신뢰하지 않는다.
최악의 가정이지만, 불사의 신자일 수도 있는 노릇이다.
룬달은 상당한 강자다.
정확한 전력은 파악할 수 없으나, 최소 탑주급.
만약 함정을 파 놓고 유도하는 것이라면 곤란해진다.
“제가 다른 마음이라도 품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가능성은 있지.”
“그랬다면 제가 위험을 감수하고 혼자 찾아왔을까요?”
“그건 근거가 되지 못해. 제 몸을 미끼로 쓰는 걸 수도 있으니까.”
“의심이 많으시군요. 저를 못 믿으시겠다면, 바라 님을 믿으시는 건 어떤가요?”
땅에 사는 신, 신어, 바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두 번째 이유다.”
“두 번째 이유라니요?”
“나는 바라를 신뢰하지 않아.”
“그게 무슨 불경한……!”
“나는 인간이다. 인어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나는 신어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했지, 신어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리옐을 바라의 영역에 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바라는 목오나 세계수와는 조금 성격이 달랐다.
룬달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 위치에 있으면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면 안 되지.”
“유감스럽군요. 이렇게까지 의견이 안 맞을 줄은 몰랐는데요.”
“교섭을 하려거든, 제 요구만 들고 오면 안 되지.”
“바라 님께서 분쟁은 피하라 하셨습니다만.”
“무력을 사용하겠다면, 퀸틴이 박살 날 각오는 해야 할 거야.”
빈말이 아니었다.
기억의 마법과, 숨결을 사용한다면 퀸틴을 반파시키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내 말이 진심이라는 걸 느꼈는지, 룬달은 한 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지그문트 마이어 님의 의견을 수용한다면, 협력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못 할 것도 없지.”
“말씀해 주십시오.”
“먼저 가디언은 전부 물린다.”
“그런. 반대로, 제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네가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어차피 결정하는 건 신어 아닌가?”
룬달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겠습니다. 파격적인 조건이라, 수용하실지는 의문입니다만.”
“아직 안 끝났어.”
“네?”
“리옐은 가지 않는다. 대화를 원하는 거라면, 리옐의 대리인과 내가 동행하지.”
나와 마리나만 가면 될 일이다.
마리나는 리옐의 대리인.
원하는 것이 대화라면, 안 될 이유는 없었다.
통신구를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무례하시군요. 바라께서 어떤 존재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너야말로, 리옐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나?”
“바라 님께서 말씀하시길, 신목의 후계자라 들었습니다.”
“그래.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이쪽도 신이란 말이지.”
나는 깍지를 끼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바라와 대등한 존재에게 오라 가라 하는 네 쪽이 더 무례한 것 같은데.”
“으음.”
룬달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스레 인정해 버린 것이다.
“확실히, 그렇군요.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 괜찮다. 내 쪽도 무례하게 나간 건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확실히 듣고 보니, 제가 성급했던 부분이 많았으니까요.”
의회장은 퀸틴에 있어서 국왕과 같은 존재다.
이렇게 선뜻 사과하는 건, 웬만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룬달은 빈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의자 손잡이를 잡았다.
“곧바로 바라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일어나기 전에 한 가지 더 논의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네?”
“혹시 불사의 교단에 대해서 알고 있나?”
* * *
녹림을 통해 사람을 잡아 파는 인신매매범 선장은 말했다.
그들은 노예상이 아닌, 중개업자라고.
실질적으로 녹림이 납치한 사람들을 받는 조직은 따로 있었다.
중개업자들은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나는 그들이 노예상이 아닌, 불사의 교단이라고 추측했다.
‘그것이 아니고서야, 굳이 바다로 나갈 이유가 없다.’
그들은 밀항을 통해 한 섬에서 거래를 한다.
물론 은밀한 거래를 원했을 수도 있지만, 화이트웨일 항구 인근은 오지가 많다.
굳이 섬까지 나갈 이유가 없었다.
납치된 사람들을 퀸틴에 들여왔다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트리옌에서, 무고한 사람을 잡아들여 실험체로 쓴 전적도 있고.’
불사의 신자들은 트리옌 왕국, 하멜의 사람들을 이용해 불사의 군대를 만들고자 했다.
퀸틴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수 있었다.
정확하진 않으나, 확인이 필요한 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직접 뒤져 보거나, 아노르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룬달이 먼저 찾아와서 편해졌군.’
불사의 교단이라는 잠재적 위협에 대한 정보를 넘겼다.
그 대가로, 실종된 사람을 비롯한 민간 종교 단체의 정보를 요구했다.
퀸틴의 의회장인 룬달이 이 거래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신어의 상태도 곧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일이 척척 풀리는 느낌이었다.
조금 걸리는 점은, 발레리아로부터 아직도 연락이 없다는 것.
그리고 바라의 속내였다.
‘과민반응일 수도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룬달에게 조금 예민하게 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바라는 세계수와 달리, 내게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이는 리옐에게도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신이라고 모두 이타적인 것은 아니다.
불사의 괴물을 여태 잡아 두고 있었던 점은, 자기희생적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도련님.”
“왜?”
“저거, 정령 아닌가요?”
마리나가 창가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룬달의 어깨 위에 있던, 바람으로 이루어진 새.
바람의 상급 정령이 쪽지 하나를 물고 창틀에 앉아 있었다.
창문을 열었다.
“귀여워라.”
“귀엽긴. 이거 무서운 놈이다.”
총총 들어온 정령은 쪽지를 내게 직접 건네주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쪽지 내용을 확인하고 불태웠다.
바라가 조건을 받아들였다.
신어를 마주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