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76/134)

3

로브의 주인

나는 녹색 두건을 향해 다가갔다.

접객원이 뒤를 쫓아왔으나, 단이 눈치 있게 그를 막아섰다.

녹색 두건을 두른 남자는 까칠한 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양쪽에 여자를 끼고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내가 말이야……! 으응? 넌 뭐냐?”

붉게 달아오른 얼굴, 굴러가는 발음.

적잖이 취한 듯한 남자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로브 차림이 아닌 걸 보면, 두목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 산적이 언급했던 간부 같았다.

“합석해도 괜찮겠나?”

“허, 나, 참! 큭, 이 꼬맹이가 뭐래는 거야? 꺼져.”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놈의 반대쪽에 앉았다.

간부는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나를 노려봤다.

양옆에 끼고 있던 여자들을 밀어내더니, 책상을 내리쳤다.

쾅!

술병이 옆으로 굴러떨어지며, 술이 쏟아졌다.

목소리를 낮게 깔고 으르렁거렸다.

“꺼지라는 말. 못 들었어?”

“그린 포레스트의 일원 아닌가?”

“그걸 어떻게 알지?”

“너네 본진 털고 오는 길이거든.”

“뭐라고?”

나는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그린 포레스트 목책에서 뽑아 온 녹색 깃발을 책상에 올렸다.

간부는 깃발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 봤다.

“되도 않는 거짓말을…….”

깃발을 확인한 간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진품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돌연 독한 술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개자식이!”

“꺄아아악!”

간부가 검을 뽑아 들었다.

손님과 직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검날을 둘러싸고 있는 희미한 오러가 보였다.

간부는 내게 검을 휘둘렀다.

캉!

순식간에 반응한 단이 검을 막아 냈다.

나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간부를 바라보았다.

오러로 취기를 지운 듯, 취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빛이 반짝이더니, 옆에서 신성이 나타났다.

신성은 나를 따라 하듯 눈을 게슴츠레 뜨고 간부를 바라보았다.

-같음.

-뭐가?

-오러.

-오러?

신성은 간부의 아랫배를 가리켰다.

잠깐 눈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곧 나는 간부의 단전에서 오러가 끓어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신성이 수를 쓴 모양이었다.

-위치.

시야는 곧 정상으로 돌아왔다.

신성은 제 할 일은 끝났다는 듯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간부의 얼굴을 살폈다.

조금 야비하게 생기긴 했지만, 전형적인 서대륙의 사람이었다.

단전에 오러를 형성하는 것은 동대륙의 방식이다.

얘는 왜 단전에 오러를 둔 걸까.

나처럼 심장에 마나 서클을 만들 것도 아니면서.

“단.”

“네. 도련님.”

간부의 오러 수준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취기를 지우는 등 잡기술을 쓰지만, 기껏해야 소드 러너 수준이다.

쾅!

단과 역량 면에서 너무 차이가 났다.

맥없이 튕겨나간 간부는 벽에 부딪치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식탁을 짚고 일어나려다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다.

충격이 꽤 심했던 모양이다.

“끄으…… 이 자식이!”

그나마 내가 만만했는지, 내게 달려들었다.

간부는 흥분한 나머지 밑을 살피지 않았다.

“억?”

바닥을 구르던 술병을 밟고, 뒤로 자빠졌다.

뒤통수를 바닥에 찍은 간부는 그대로 눈을 까뒤집은 채 기절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손을 쓰지도 않았다.

“지 혼자 제압 당하는 놈은 또 처음이네. 신선한데?”

손뼉을 쳤다.

각성(Awaken).

정신을 억지로 깨웠다.

분명 일어났을 텐데, 간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나는 간부의 옆구리를 툭툭 찼다.

“야, 야, 쪽팔리냐? 왜 안 일어나?”

“으윽. 무, 무서운 놈. 이것까지 계산하고……!”

“뭔 개소리야. 지 혼자 술병 밟고 넘어져 놓고.”

“……빌어먹을! 취한 탓에!”

“오러 써서 취기 없앴잖아.”

분명 취기는 없을 텐데,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지간히도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가까이 있던 직원의 손에 금화를 얹었다.

“부서진 물건은 이걸로 충당하게.”

“아이고! 그럽죠!”

“소란 피워서 미안하군. 나가겠네.”

“아닙니다! 나리! 언제든지 찾아 주십쇼!”

나는 굽실거리는 직원을 뒤로하고 가게를 나섰다.

단은 산적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 골목으로 이동했다.

단이 간부를 벽에 던졌다.

“크헉! 원하는 게, 뭐냐!”

“두목 어디 있어?”

“두목님? 네놈이 두목님을 왜……!”

“혀가 길다.”

“킥! 모른다! 어디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겠지!”

“거처는?”

“그런 거 안 정했다!”

단은 연민 어린 눈으로 간부를 바라보다가, 슥 골목 입구를 막아섰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뱉었다.

순순히 협조하면 이런 그림이 안 나올 텐데.

손목을 풀고, 중지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왜 맨날 구도가 악당처럼 잡히는지 모르겠다니까.”

“무, 무슨 짓을……!”

* * *

화이트웨일 항구 외곽, 해안가.

구멍이 송송 뚫린 현무암이 가득한 암석 지대 너머 외딴 곳에는 작은 부둣가가 있었다.

긴 시간 비워진 듯한 낡은 오두막 한 채와 구멍 난 작은 배 한 척.

오래 전 바다에서 죽은 어부의 집이었다.

“사라, 괜찮으냐?”

“전 괜찮아요. 아저씨들은요?”

“우리도 그럭저럭 괜찮다.”

먼지 쌓인 오두막 내부.

포박 당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워베어 용병단과 상인들을 포함한, 그린 포레스트에게 붙잡힌 사람들이었다.

모두 산적단에서 지급한 가죽 튜닉 차림이었다.

상인 하나가 울상을 지었다.

“젠장, 무능한 용병들 같으니.”

“좀, 말할 거면 조용히 하쇼.”

“내가 지금 조용히 하게 생겼어? 전 재산을 뺏긴 것도 모자라, 이젠 팔려 나가게 생겼는데!”

“우리라고 다른 줄 압니까? 환장하겄네. 똑같은 처지란 말이오.”

“똑같은 처지? 내가 이러려고 비싼 돈 주고 너희들을 고용한 줄 알아?”

“에라이. 말은 똑바로 해야지. 하르만 대장한테 들어 보니, 아주 후려쳤드만.”

“뭐야?”

용병과 상인이 투덕거렸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말다툼을 그만뒀다.

며칠을 굶었기에 싸울 힘도 없었다.

사라의 눈에서는 아직 희망이 남아 있었다.

용병단장, 하르만이 풀려났기 때문이다.

“아빠가 어떻게든 조력을 요청하시지 않을까요?”

“너를 저당 잡혔는데, 그 양반이 이성적으로 판단할까?”

“맞아. 마이어 저택에 쳐들어갔었다는 얘기 못 들었냐?”

그때, 오두막 문이 열렸다.

녹색 두건을 두른 산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여자 목소리가 들리던데.”

산적은 인상을 찌푸리고 사라를 향해 걸어왔다.

목을 움츠린 사라의 면전에 대고 이빨을 드러냈다.

“왜 자꾸 떠들어. 죽어서 팔리고 싶냐?”

산적의 손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쥐여져 있었다.

사라는 단검을 내려다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힘껏 고개를 뒤로 젖혔다.

퍽!

사라는 과감하게도 산적에게 박치기를 감행했다.

그리 강하진 않았지만, 산적을 당황하게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다.

“끄악! 이년이!”

동시에, 나무 기둥 옆에 묶여 있던 한 용병이 벌떡 일어났다.

밧줄이 잘려 있었는데, 나무 기둥의 뾰족한 모서리에 갈아 낸 것이다.

“흡!”

“억!”

용병은 산적에게 달려들었다.

몸통박치기에, 산적이 들고 있던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용병은 산적이 말하지 못하도록, 입에 주먹을 쑤셔 넣었다.

사라가 단검을 걷어찼다.

“아저씨!”

단검을 낚아챈 용병은 단검 손잡이 끝으로 산적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퍽!

산적은 그대로 기절했다.

재빨리 주변을 살핀 용병이 움직였다.

화색이 된 상인이 재촉했다.

“나부터 풀어라! 당장!”

“쉿! 좀 조용히 말하라니깐!”

용병은 먼저 다른 용병들부터 풀어 주기 위해 움직였다.

상인은 입에 게거품을 물 기세로 난리를 피웠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고용주부터 풀어 줘야지!”

“전투를 할 수 있는 사람부터 풀어 준 뒤에 풀어 줄 테니! 조용히 좀 하쇼!”

“아까 한 소리 했다고 지금 안 풀어 주려는 거 아니야!”

“아! 진짜!”

용병은 다른 용병의 밧줄에 단검을 올렸다.

톱을 쓰듯이 밧줄을 잘라 내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상인이 난리를 피우는 것이 다른 산적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용병은 톱질에 속도를 붙였다.

손질이 제대로 안 된 단검은 그리 날카로운 편이 아니었다.

밧줄을 다 잘라 내기 전에, 산적이 열린 문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이것들이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젠장!”

용병은 밧줄을 자르는 걸 포기하고, 산적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산적에게 닿지는 못했다.

쾅!

돌연 나무 벽을 뚫고 들어온 팔이 용병의 얼굴을 부여잡았기 때문이다.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두꺼운 팔이 용병을 그대로 들어 올렸다.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용병은 팔목을 붙잡고 발버둥을 쳤다.

숨이 막혔는지, 이윽고 축 늘어지고 말았다.

“아저씨!”

용병이 바닥에 떨어졌다.

팔의 주인이 문 쪽으로 돌아서 들어왔다.

녹색 두건을 두른 거구의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검은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두목님!”

“시끄럽다.”

발음이 조금 어색했지만, 목소리는 무거웠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산적과 용병을 내려다봤다.

생사도 확인하지 않고, 턱을 까딱였다.

산적이 둘을 끌고 오두막 밖으로 나갔다.

“한 번 더 떠들면, 죽이겠다.”

두목은 나가기 전에 낮은 경고를 날렸다.

기가 눌린 사람들은 침묵했다.

쾅!

문이 닫혔다.

* * *

“늦는다. 곧 축시(丑時)일 텐데.”

“바다가 사납습니다. 조금 지연될 수도 있지요.”

“술.”

“여기 있습니다.”

두목은 산적이 가져다준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덩치가 워낙 큰 편이었기에, 비우는 건 금방이었다.

산적은 두목의 눈치를 봤다.

“이것들은 어떡할까요?”

기절한 산적과, 용병.

두목은 둘을 내려다보더니,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죽여라.”

“알겠습니다.”

간부였음에도, 둘의 판단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산적은 둘을 질질 끌고 오두막 뒤편으로 사라졌다.

두목은 멀거니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일렁이는 검은 바다는 절경이었다.

“그립군.”

두목은 한동안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등 뒤에 매여 있던 거대한 검의 손잡이를 쥐고,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냐.”

“네가 그린 포레스트의 두목이냐?”

해안가 위에 두 그림자가 서 있었다.

지그문트 마이어와 단 록벨런이었다.

두목은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린 포레스트가 아니다.”

“그럼?”

“녹림(綠林)이다.”

“녹림?”

지그문트는 해안가로 내려왔다.

이름 없는 검을 뽑아 들었다.

“이름이 뭔지는 별로 상관없고.”

“누구냐.”

“로브 주인.”

“로브?”

“네가 입고 있는 검은 천 쪼가리.”

그가 두르고 있는 로브는 분명 지그문트의 것이었다.

두목은 로브를 매만졌다.

지그문트는 가장 궁금했던 것부터 물어봤다.

“숨겨 놨는데. 어떻게 찾았지?”

“바다에 떠다니고 있었다.”

“뭐? 심해에 박혀 있던 게 아니라?”

“그렇다.”

“그게 왜 튀어나왔지……?”

지그문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유추를 포기했는지, 아무렴 어떻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미안하게 됐는데, 그거 내 거거든. 혹시 돌려줄 수 있냐?”

두목은 등 뒤의 검을 뽑아 지그문트에게 겨눴다.

무식하게 큰 그레이트 소드를 한 손에 들었다.

지그문트는 흥미롭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나, 녹림왕 유수의 것이다.”

“녹림왕?”

“그래.”

녹색 두건 밖으로 언뜻 보이는 검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어둠을 담은 듯한 새까만 눈동자까지.

스스로 녹림왕이라고 소개한 그린 포레스트의 두목, 유수는 동대륙 사람이 분명했다.

간부가 오러를 단전에 두고 있던 것도 이해가 갔다.

“대화로 해결하는 거 어떻겠나? 로브를 넘기면 값을 지불하지.”

“약육강식. 원한다면, 빼앗아라.”

“그래. 산적다운 논리군.”

동대륙의 검사와 한 번쯤은 검을 섞어 보고 싶었다.

서대륙과 다른 방법으로 검술이 발달했다고들 하니까.

나는 지체 없이 앞으로 나섰다.

호흡을 가다듬고 오러를 끌어 올렸다.

유수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너, 다른 색목인들과 다르다.”

“뭐가?”

“내공을 단전에 쌓았다.”

내공.

동대륙에서, 체내에 있는 오러를 이르는 말이었다.

나는 마나 서클을 만들기 위해 오러를 심장에서 단전으로 옮겼다.

단전에 오러를 쌓는 것은 동대륙의 방식이다.

그러나 서대륙에서는 심장에 두는 것이 정설.

서대륙에서 나처럼 단전에 오러를 쌓은 이들은 찾기 어려웠다.

아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것보다 궁금했던 건.

“어떻게 알았냐?”

일전에 신성이 말하길, 나를 꿰뚫어보는 건 설령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도 힘들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내 오러가 단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걸까.

유수는 별 고민 없이 내 검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

“검기의 모양이 다르다.”

“그래? 모르겠는데.”

오러의 외형은 단순히 제어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유수의 그레이트 소드에 오러가 피어올랐다.

저 거대한 검을 다 감싸다니, 무식하게 많은 양이었다.

최소 소드 익스퍼트 상급 이상.

“이름은?”

“지그문트 마이어.”

“어려운 이름이지만, 기억했다. 지그문트 마이어.”

나는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마나 서클이 회전하며, 마나가 타들어 갔다.

피부를 찌르는 차가운 밤공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오감이 명료해지는 감각.

마나 번(Mana Burn).

내가 전투태세를 갖추기 무섭게, 유수가 모습을 감췄다.

마나 번으로 상승한 동체 시력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 거구가 움직이는 것을 놓쳤을 리 없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

뒤를 돌아보니, 그레이트 소드를 높이 치켜세운 유수가 있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발이 모래밭을 박찼다.

콰앙!

그레이트 소드가 땅을 내리쳤다.

모래가 폭발하듯 튀어 올랐다.

제대로 맞았다면 베이기보다는 곤죽이 됐을 것이다.

나는 유수와 거리를 벌렸다.

유수는 멀거니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역시, 로브가 문제군.’

마법사는 로브를 입는다.

이는 기사가 갑옷을 입는 것과 같이 보편적인 사실이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천 옷이나 다름없어 보이지만, 당연하게도 이유가 있다.

색상이나 문양을 통하여 자신이 소속된 마탑을 드러내고, 마나 전달을 도와주기도 한다.

‘원래대로라면, 기사에게는 쓸모없는 물건.’

접근전에서 한 번의 타격이라도 막아 내야 하는 기사와는 전제가 다르다.

하지만 내 로브, 여로는 조금 다른 물건이다.

네 번째 아티팩트, 여로(旅路).

이름에 걸맞게, 그 능력은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었다.

“후우.”

유수는 양손 검, 그레이트 소드를 쥐고 있었다.

저 무식하게 큰 대검은 단단한 갑옷도 간단하게 찌그러트리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공격력이 강한 만큼, 리스크도 있었다.

‘무게.’

그레이트 소드는 근력을 앞세운 기사도 제대로 다루기 어려울 만큼 무겁다.

검보다 쇳덩어리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연히 속도가 굼떠질 수밖에 없고, 공격도 느리다.

전투에서 속도에 상당히 비중을 두고 있는 내게는, 대처하기 쉬운 무기였다.

그러나 여로를 입은 유수는 달랐다.

“흡!”

기껏 벌린 거리를 공간 이동을 통해 좁혀 버린다.

미리 검을 휘두르며 공간 이동을 해, 공격의 간격을 최소화한다.

여로를 자주 사용한 건지, 꽤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이었다.

‘이건, 못 피한다.’

막아야 했다.

나는 이름 없는 검을 바닥에 꽂아 넣었다.

유수의 그레이트 소드가 이름 없는 검을 강타했다.

쩌엉!

손바닥과 손목을 넘어, 몸 전체에서 충격이 느껴졌다.

검이 아니라 무슨 공성 병기로 내리찍은 듯했다.

무식할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이름 없는 검이 아니었다면, 무기가 부서졌을 것이다.

버텨 보려고 했으나, 발이 멋대로 공중에 떴다.

카가가가각!

나는 모래사장 바깥쪽으로 쭉 밀려났다.

검을 땅에 박고 있어서 그나마 여기서 멈춘 것이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유수가 공간을 뛰어넘었다.

아까와 같은, 간격을 최소화한 공격.

이번에는 사선으로 올려 긋기다.

“큭!”

나는 한 손으로 땅을 짚고, 순간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그레이트 소드가 머리카락을 잘라 내고 지나갔다.

텅!

그레이트 소드의 넓적한 면 부분을 걷어찼다.

힘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무게와 힘이 실린 그레이트 소드를 제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수는 졸지에 그레이트 소드를 하늘 높이 쳐들고 있는 모양새가 됐다.

‘빈틈!’

이름 없는 검을 휘둘렀다.

눈앞에서 유수의 신형이 사라졌다.

공간 이동으로 거리를 벌린 것이었다.

블링크(Blink).

저만치 물러나 자세를 고치려는 유수의 뒤로 이동했다.

예측하고 있었다.

블링크를 피하려면, 시야 바깥, 오두막 너머나 바위 뒤로 이동했어야 했다.

짐승 같은 반응속도로 뒤를 돌아본 유수는 눈을 부릅떴다.

“공간 이동, 너만 할 수 있을 줄 알았냐?”

“큭! 어떻게!”

당황한 것도 잠시, 유수가 발을 움직였다.

퍽!

유수가 걷어찬 것은 내가 아니라 모래였다.

거칠게 솟아오른 모래가 시야를 가렸다.

그 틈을 타, 자세를 고친 유수가 그레이트 소드를 휘둘렀다.

철저하게 실전으로 다져진 검술.

그레이트 소드가 모래를 갈랐다.

부웅!

솔직히, 마음에 들었다.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것도 그렇고, 철저하게 실전 전투를 염두해 둔 검술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큰 공격에는 맹점이 있지.’

시야를 가렸다는 건, 상대도 시야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큰 공격을 감행한 것일 테지만, 악수(惡手)였다.

나는 되레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검날 안쪽, 손잡이와 팔이 있는 곳까지.

유수와 눈이 마주쳤다.

초근접전.

‘잡았다.’

나는 유수의 멱살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공간 이동을 저지하는 동시에 균형을 잃도록 만든 것이다.

유수는 그레이트 소드를 바닥에 꽂아 넣어 버텼다.

검을 지지대 삼아서 넘어지는 것을 면한 것이다.

“흡!”

유수는 반격을 시도했다.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방법으로.

‘이건 또 뭐야?’

잡힌 이상 공간 이동도 불가능하고.

검도 지지대 삼는 바람에 공격 수단으로 쓰기 어렵다.

그렇기에, 유수는 남은 손을 내게 뻗었다.

문제는.

‘손가락?’

유수는 검지와 중지를 앞세워, 찌르기를 시도했다.

눈도 아니고, 노리는 건 어깨 부분이다.

가볍게 상체를 틀기만 한다면 피해 낼 수 있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궁금증이 앞섰다.

저 거구라면, 사람 하나는 너끈히 기절시킬 수 있는 주먹을 휘두를 수 있다.

왜 손가락을 앞세운 걸까.

약간의 부상을 감수하기로 하고, 공격을 허용했다.

툭!

예상대로, 힘을 실은 타격은 아니었다.

거의 눌렀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약한 찌르기.

동시에, 전격이라도 맞은 듯한 저릿한 통증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오?’

근육들이 제 멋대로 모여들어 온몸을 조이는 듯한 기괴한 감각.

다리에 힘이 너무 들어간 나머지,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 * *

‘이겼다!’

유수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가 사용한 것은 점혈이었다.

인간의 몸에는 기가 흐르는 365개의 혈도가 있다.

점혈은 그 혈도를 내공으로 막는 기술이다.

그중, 유수가 짚어 낸 것은 마혈.

막힌 순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혈이었다.

‘고수라면 단시간 안에 풀어낼 수도 있으나……!’

그 짧은 순간도, 이와 같은 초근접전에서는 크게 다가온다.

지그문트 마이어는 여태껏 싸워 왔던 서대륙의 검사 중에서 손을 꼽을 정도로 강했다.

특히 움직임은 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효율적이었다.

하나, 승리는 유수의 것이었다.

지그문트는 뒤로 넘어가며, 인상을 확 찡그렸다.

“어우씨, 아파라.”

유수는 속으로 질겁했다.

마혈을 찔린 상태라면 말도 할 수 없을 텐데.

‘풀어냈다고?’

지그문트는 마나를 이용해 점혈을 풀어 버렸지만, 유수가 그것을 알 리 없었다.

하지만, 지그문트는 이미 균형을 잃은 상태.

‘승기는 이미 내 쪽으로 기울었다!’

유수는 그레이트 소드를 모래에서 뽑았다.

꽤 날래게 움직이지만, 넘어진 상태에서 큰 공격을 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레이트 소드를 치켜세웠다.

“죽어라!”

지그문트는 한 팔을 뒤로했다.

푸시(Push)를 통해, 튕겨 나가듯 일어나 균형을 되찾았다.

마법을 모르는 유수가 보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뭐?’

마무리를 위한 큰 동작이 실책으로 변질됐다.

지그문트는 유심히 유수의 몸 한 곳을 응시했다.

어깨와 팔 사이, 마혈이 있는 부분이었다.

“이렇게 하는 건가?”

지그문트가 손을 뻗어 유수의 마혈을 찔렀다.

유수는 당황했다.

전신에 퍼지는 고통.

제 의지와 달리,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유수가 앞으로 고꾸라질 판이었다.

‘어떻게?’

유수는 경악했다.

혈도술은 한 번 봤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주 미세한 차이라도 있으면, 혈도는 막히지 않는다.

더군다나 절묘한 힘 조절까지 요구하기 때문에, 결코 간단한 기술은 아니었다.

심지어 유수는 팔을 크게 움직이는 도중이었다.

움직이는 상대의 혈을 짚어내는 건, 고수 중에서도 실력이 절정에 달한 이들만 가능한 기예.

‘하지만, 서대륙에는 점혈이 없다!’

이미 부하들에게 확인한 사실이었다.

서대륙에는 점혈이라는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그문트도 아주 잠깐이지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즉, 점혈을 보는 것도 겪은 것도 처음일 가능성이 높았다.

당연히 시도한 것도 처음이리라.

‘무슨 이런 괴물이……!’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애송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붙어 보니, 내공은 나이대를 아득히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검술에 대한 이해나, 대처 능력도 마찬가지였다.

유수는 쓰러지면서 지그문트와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다.

깊은 눈동자는 무심히 유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의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깊이였다.

‘반로환동(返老還童)한 고수구나!’

그제야 모든 것이 설명됐다.

기연을 얻었다고 해도, 그 움직임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반로환동한 고수라면 모든 것이 설명됐다.

비록 내공의 양은 유수와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모든 힘을 쓰지 않았다.’

유수는 지그문트 마이어가 전력을 내지 않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지그문트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실제로 지그문트는 아티팩트도, 아우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반면에 유수는 로브의 능력을 적극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히 말려들었다.

‘내가 졌다.’

* * *

“벗겨.”

단은 마비된 유수의 로브를 벗겨 낸 뒤, 오두막에서 가져온 듯한 밧줄로 그를 포박했다.

여로를 잘 개어서 내게 가져온 단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 도련님. 도련님께는 너무 크지 않겠습니까?”

나는 나름대로 키가 큰 편에 속한다.

하지만 유수처럼 2미터를 훌쩍 넘는 거구는 아니다.

여로는 유수가 입을 수 있을 만큼 상당히 컸다.

“괜찮아.”

여로는 애초에 내가 입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크기 조절 기능 정도는 달려 있었다.

여로를 입자, 내 몸 크기에 맞게 줄어들었다.

단은 짧은 탄성을 흘렸다.

“마법이란.”

“신기하지? 배울래?”

“저는 몸이 폭발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습니다.”

단은 포박 당한 유수를 내려다봤다.

입은 막지 않았건만,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다.

“한데, 이자는 왜 못 움직이게 된 겁니까? 마법입니까?”

“몰라. 몸의 흐름을 막은 건가?”

“도련님께서 이렇게 만든 거 아닙니까?”

“맞아.”

“근데 왜 모르십니까?”

“얘가 하는 거 그대로 따라 했거든.”

꽤 쓸 만한 기술을 하나 배운 것 같았다.

신체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부분에서 홀드(Hold)와 비슷했지만, 개념이 조금 달랐다.

홀드는 외부에서 마나로 상대를 옥죄어 움직임을 차단하는 마법.

반대로 이건, 몸 내부의 흐름을 차단해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정거리 면에서 조금 아쉽긴 해도, 쓸데가 있겠지.’

손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정확히 한 점을 노려야 한다.

조건이 꽤 까다로운 편에 속했지만, 최근 들어 부쩍 근접전의 횟수가 늘어났다.

분명 언젠가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유수의 녹색 두건을 벗겼다.

“아무리 이름이 녹림이어도, 이 두건은 많이 촌스럽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왜 쓰십니까?”

* * *

몇 분이나 지났을까.

멀리서 배 한 척이 보이기 시작했다.

밤바다에 녹아들기 위해서인지, 새까맣게 칠한 모습이었다.

배는 부자연스러울 만큼 멀찌감치 돌아서 부둣가에 정박했다.

“어이! 거기!”

오두막 앞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단이 앞으로 나섰다.

초록 두건을 둘러쓰고, 녹림의 일원처럼 위장한 상태였다.

지그문트의 마법 덕분에 얼굴은 조금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늦으셨군요.”

“미안하군. 요즘 바다가 말도 안 되게 거칠어서 말이야.”

“여기서 보면 잔잔한데요.”

“멀리 나가면 말도 아니야. 그런데, 어째 못 보던 얼굴인데……?”

남자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단을 살폈다.

단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새로 들어왔습니다.”

“그렇군. 녹림왕께서는 어디 계시지? 항상 직접 오셨는데.”

“말도 마십쇼.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두목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아, 그렇군. 이거 미안하게 됐어.”

단은 녹림의 본진에서 잠깐 대화를 나눴던 산적 흉내를 내고 있었다.

여러 차례 연기할 기회가 있었고, 틈틈이 지그문트에게 개인 지도까지 받은 단이다.

이제는 거의 배우 못지않은 연기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깜빡 속아 넘어간 남자는 단과 함께 오두막 쪽으로 이동했다.

“수는? 할당량은 채웠겠지?”

“직접 확인하십쇼.”

단이 오두막 문을 열었다.

포박된 사람들이 한가득이었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머릿수를 센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할당량보다 많은데.”

“알면 조금만 더 챙겨 주십쇼. 두목님은 화가 나면 비싼 술을 퍼마신단 말입니다.”

“우리가 하루 이틀 거래하는 사이도 아닌데, 이럴 건가?”

“하루 이틀 거래하는 사이도 아닌데, 늦으셨잖습니까.”

“끙, 그래. 그건 그렇지.”

남자는 단의 손에 묵직한 주머니를 얹어 줬다.

단은 슬쩍 주머니를 열어서 금액을 확인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단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신입이면서 수완이 좋군. 적당히 넉살도 있고.”

“윗분의 성격을 닮아 가게 되더군요.”

“그래? 녹림왕은 그다지 수완이…… 큼.”

남자는 입을 다물고 단의 눈치를 봤다.

단은 별로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눈치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그런가? 내 실언을 했는데.”

“정말 괜찮습니다. 제가 모시는 분은 녹림왕이 아니니까요.”

“뭐라고?”

* * *

배는 여러 사람을 수송할 만한 크기의 중형선이었다.

정기선 정도로 크진 않았지만, 어지간한 사람 수십 명은 너끈히 태울 수 있었다.

당연히 방금 내린 남자 혼자서 타고 온 것은 아니었다.

나는 녹색 두건을 두르고 정박된 배에 다가갔다.

“응? 뭐지? 그린 포레스트의 일원인가?”

“촌스러운 두건, 안 보입니까?”

“푸하하! 저 두건이 좀 촌스럽긴 하지.”

과연 예상대로, 배에는 사람이 더 있었다.

뱃사람으로 보이는 여섯과, 전투 가능한 인원 다섯.

병력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안전장치 수준이었다.

배 안에서 선장으로 보이는 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용건이 뭔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배에 좀 올라가 봐도 괜찮겠습니까?”

“궁금한 거? 거기서 해결하면 될 텐데, 뭘 올라오려고 그러나?”

“배에 타야지 알 수 있습니다! 두목님의 명령입니다.”

“……쯧, 녹림왕이? 올라오도록!”

선장이 내 손을 잡아 배 위로 끌어 올려줬다.

나는 배에 올라탔다.

“그래. 뭐가 궁금해서 배에 타려고 한 건가? 녹림왕이 뭐라고 했길래.”

“잠깐, 선장.”

웃통을 벗고 있는 근육질의 남자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상하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저 로브, 녹림왕이 허구한 날 입고 다니던 거 아닌가?”

부둣가에서는 어두운 밤이라 보이지 않았을지도 몰라도.

배 위에 올라오니 선명한 달빛이 내려앉아 드러난 것이다.

선장은 내 로브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왜 그걸 네가 입고 있는 거지?”

“상황 파악이 많이 느리네.”

나는 가장 가까이 있던 선장의 어깨를 툭 찔렀다.

선장은 턱을 안쪽으로 힘껏 당긴 채 뻣뻣하게 굳었다.

몸이 기우뚱 옆으로 넘어가더니, 쓰러졌다.

소스라치게 놀란 사람들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누구냐!”

“그렇게 물어보면, 대답하겠냐?”

“어. 그건 그러네.”

“그치?”

나는 목을 좌우로 꺾었다.

배를 완전히 제압하는 데에는 1분도 필요하지 않았다.

* * *

사라는 눈치를 살폈다.

녹림왕이 바깥으로 나가고 수분 후, 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곧 녹색 두건을 쓴 그린 포레스트의 간부가 한 남자와 함께 오두막 내부로 들어왔다.

노예상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잡혀 있는 사람의 머릿수를 셌다.

그런데, 돌연 그린 포레스트의 간부가 그를 제압해 버렸다.

단은 벙한 용병단들을 안심시켰다.

“안심하십시오. 저는 그린 포레스트의 사람이 아닙니다.”

“네?”

단은 워베어 용병단과 상인들의 밧줄을 풀어 줬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단을 바라보았다.

사라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구출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여기서 잠시만 대기해 주시겠습니까?”

“우리도 싸울 수 있네. 녹림왕은 어떻게 됐나?”

“녹림왕이라면, 이미 도련님께서 제압하셨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도련님?”

“예.”

단은 전투할 생각이 가득한 용병단을 오두막에 두고, 홀로 밖으로 나왔다.

열댓 명의 사람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모두 점혈에 의해 몸이 돌처럼 굳은 상태였다.

지그문트는 손을 탁탁 털었다.

“단, 뭣 좀 건졌냐?”

“금화를 조금 받았습니다.”

“정체는?”

“알아낸 바가 없습니다.”

지그문트는 그린 포레스트와 거래하고 있는 이들의 정체를 캐내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노예상은 정기적인 거래를 꺼린다.

특히 이렇게 치안 시설이 있는 도시 내부에서 거래할 과감한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뭔가 냄새가 났기에, 수고를 감수하고 뒤를 캐내려고 한 것이다.

“그래? 하나 잡아다가 심문해야겠네.”

“잡혀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알아서 잘 먹고 잘살라고 그래라. 금화 좀 쥐여 줘서 보내.”

지그문트는 워베어 용병단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직책이 높아 보이는 자를 하나 골라서, 뒷덜미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머지않아, 맑고 청량한 딱밤 소리와 고통에 들어찬 비명이 울려 퍼졌다.

단은 오두막 내부에 있던 사람들에게 고지했다.

“나오셔도 됩니다.”

용병이 앞장서서 오두막 문을 열어 젖혔다.

완벽하게 제압이 끝난 노예상 패거리들이 보였다.

오두막 뒤편에서 제압당한 녹림의 간부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괜히 긴장했다는 걸 깨달은 용병들이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었다.

사라가 대표해서 단에게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기사님.”

“저는 한 일이 없습니다. 모두 도련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도련님? 그 도련님이라는 분은 어디 계신가요?”

“아, 잠시 용무가 있으셔서.”

늙은 용병 하나가 나섰다.

“그럼, 우리는 이제 자유인 건가?”

“예.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단은 난처한 듯 감사 인사를 사양했다.

정말로 자신이 한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용병들은 기어코 그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단은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모두 가죽 튜닉 차림이었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듯 핼쑥했다.

“산채를 찾아가시면 될 겁니다.”

“산채를 찾아가라니. 그린 포레스트의 산채를 말하는 거요?”

“예. 그곳 또한 도련님께서 모두 정리하셨으니, 아마 물건이 남아 있을 겁니다.”

“그거 정말 다행이군!”

“아, 그리고 이걸 받으십시오.”

단은 대표 격으로 보이는 늙은 용병에게 금화 몇 닢을 건넸다.

용병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단을 바라봤다.

“끼니도 해결하시고, 옷도 사 입으십시오.”

“이, 무슨. 허, 참.”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도련님의 명령대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감사를 하려거든, 추후에 도련님께 하시지요.”

“이 은혜는 반드시,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분 성함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그문트 마이어입니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이름에, 워베어 용병단은 인상을 찡그렸다.

사라가 크게 놀랐다.

“기사님! 왠지 낯이 익더라니! 마이어가의 기사셨군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걔는, 으음…… 이런 일을 못 할 텐데. 검도 잘 다루지 못하고.”

단은 씁쓸하게 웃었다.

지그문트가 검을 다루지 못한다니.

확실히 그럴 때도 있었다.

“한번 보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송구합니다.”

“흐흠, 나중에 찾아뵙죠.”

사라가 지금의 지그문트를 본다면 크게 놀라겠지만.

지그문트는 일부러 자리를 피한 것 같았다.

사라는 조금 아쉬워하며 용병단을 이끌고 떠났다.

상인들도 눈치를 보다가 용병단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거, 같이 갑시다!”

“아, 따라오든가!”

한편, 지그문트는 배에 올라 있던 선장을 심문하고 있었다.

심문 방법은 당연하게도 딱밤이었다.

물론 상상을 초월하게 아팠기에, 선장은 모든 걸 술술 불었다.

선장의 이야기를 들은 지그문트는 인상을 찡그렸다.

“뭐? 그게 무슨 소리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