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급류를 타고 (1)
-부탁드려요.
-그래.
르네와의 통신을 마쳤다.
다행히도 부러진 건 잔가지 하나가 전부라고 한다.
저번처럼 시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냥 넘길 일은 아니었다.
리옐을 바닥에 내려 줬다.
‘몇 년간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영면의 저주로 신살을 늦췄다.
수년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불사의 괴물이 깨어남에 따라 신살이 강해지는 건 고려하지 않았다.
봉인이 옅어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급속도로 진행될 줄은 몰랐다.
‘교단이 뭘 한 모양이군.’
불사의 괴물이 봉인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집단은 하나.
불사의 교단이 뭔가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일단 세계수의 병세를 살피는 것이 먼저였다.
리옐에게 세계수의 나뭇잎을 받았다.
“성역 좀 다녀오마.”
“아빠! 나도 갈래!”
“안 돼. 오늘은 여기 있어.”
“엄마 보고 싶은데.”
리옐은 볼을 부풀렸다.
그래도 안 된다.
세계수도 리옐도 서로를 보고 싶어 하지만, 만약 신살의 진행으로 인해 세계수의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라면, 리옐의 정신에 좋은 영향을 끼치긴 어려울 것이다.
“리옐 님, 저랑 놀아 주실래요?”
“응?”
마리나가 리옐의 주의를 돌렸다.
내게 윙크를 보낸 걸 봐선, 눈치 빠르게 나선 것 같았다.
단도 합세했다.
둘이 리옐의 혼을 빼놓는 동안, 나는 세계수의 나뭇잎을 움켜쥐었다.
눈을 감고, 성역과 정신을 연결했다.
“아빠! 치사해!”
어렴풋한 리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꽃향기를 머금은 산들바람이 뺨을 스쳤다.
부드러운 풀이 발에 밟혔다.
나는 세계수의 하늘 정원에서 눈을 떴다.
늘 보이던 은방울꽃의 드라이어드, 정원지기는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 있나?’
원래는 귀신같이 알고 와서 손님맞이를 했는데.
나는 정원을 둘러보았다.
정원지기는 보이지 않았다.
세계수의 위치는 알고 있어, 크게 상관은 없었다.
-상쾌.
-신성?
어깨 위에서 신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작은 날개를 팔락거리며 꽃 위를 날아다녔다.
표정은 여전히 없었지만, 어째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성역이라서 그런가?’
비록 세계수의 성역이긴 하지만, 신성에게 있어서는 편한 공간일 수도 있다.
적어도 내 몸 속보다는 훨씬 활동하기 편할 것 같았다.
물고기가 물에 살듯이, 걸맞은 환경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너는 성역 없냐?
기분 좋게 날아다니던 신성이 우뚝 멈췄다.
휙 뒤를 돌아보더니, 내 코앞으로 다가왔다.
조그마한 손가락이 코끝을 콕 찔렀다.
-정정.
-뭐?
-우리.
지칭을 정정하라는 것 같았다.
너가 아니라 우리라는 얘기다.
하긴, 신성은 내 힘이니까 그렇게 지칭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성역 없냐?
-없음.
-그냥 그렇게 대답하면 될 것을.
-아직.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신성과 신은 조금 다른 개념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신성은 신의 힘이다.
신성이 독립적으로 분류되는 쪽이 이상한 것이지.
-하나 더 궁금한 게 있는데.
-질문.
-나는 신성을 지니고 있으니, 신인 건가?
-아님.
신성은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보류.
-보류? 설명을 보류한다는 건가?
-맞음.
그야 나도 정확히 모르는 사실을 두 음절로 설명하긴 어려울 것이다.
나는 신성을 지니고 있지만, 신은 아니다.
사실이 확인됐으니, 이유는 대충 유추할 수는 있었다.
아마 신은 신이지, 신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다.
‘사람 말을 하는 고블린이, 사람은 아니니까.’
대표적인 예로 슈퍼 고블린 롭이 있었다.
그 존재와 비슷한 무언가는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신이 된다는 건 조금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하나 더 궁금한 게 있는데, 너는 왜 두 음절로만 말하냐?
-부족.
-내가 부족하다고? 뭐가?
-능력.
신성은 나를 탓하듯 톡톡 때렸다.
전혀 아프진 않았다.
신성이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원인이 나일 줄은 몰랐는데.
-그럼 내가 능력이 된다면, 말을 길게 할 수 있는 건가?
-맞음.
-그거 참, 상상이 안 가는군.
-실례.
신성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세계수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신성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더니, 내 가슴팍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곧바로 정원지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지그문트 님?
-뭔 일이냐?
-직접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원지기는 조심스레 나를 안내했다.
으레 세계수가 앉아 있던, 덩굴이 스스로 엮여 만들어진 의자.
그 위에는 앉은 채 잠들어 있는 세계수가 있었다.
하지만, 뭔가 조금 이상했다.
-얘 왜 이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작스레 이렇게 되셨습니다.
잠든 세계수는, 원래 모습보다 어려져 있었다.
몸 전체의 크기가 줄어들었고, 머리카락도 조금 짧아졌다.
외관상 나이대는 십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로 추정됐다.
목을 타고 올라온 신살의 흔적은 확실히 짙어져 있었다.
-장난으로 변한 건 아닐 텐데.
-예. 지그문트 님과 리옐 님이 떠나신 후로, 세계수님은 잠에서 깨신 적이 없습니다.
-무의식 상태에서 모습이 변했다. 잔가지 하나가 떨어진 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
비록 화신체라고는 하나,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일단 깨워 보기로 했다.
손가락을 튕겨 영면의 저주를 해주했다.
느릿하게 눈을 뜬 세계수가 배시시 웃었다.
-으음, 여보. 좋은 아침. 우리 딸은?
-안 왔다. 콩트 말고, 설명부터 해.
-뭘?
-니 모습, 안 보이냐?
잠이 덜 깬 세계수는 상황 파악이 안 됐는지,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의자 옆에서 꽃으로 장식된 대거울 하나가 나타났다.
의자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가며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어려졌네? 몇 세기쯤 전까지만 해도 이랬는데. 시간 참 빨라.
-자의로 외형을 바꾼 건 아닐 텐데.
-으음.
-뭔가 알 것 같나?
-뭐 어때! 어린 아내, 좋지 않아?
세계수는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다.
나는 세계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원지기도 합세해서 세계수를 추궁하듯 바라보았다.
딴청을 피우던 세계수가 결국 실토했다.
-아마 힘이 줄어든 영향일 거야.
-힘이 줄어들어?
-신살 때문에 자연적인 회복이 억제되고 있는 상황이거든.
세계수는 서대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평범한 나무는 땅에서 양분을 얻지만, 세계수는 반대다.
원래대로라면 힘을 소모한 만큼 자연스레 힘을 회복하지만, 신살의 영향으로 소모만 되고 회복이 안 되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힘을 소모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럴 수는 있지만, 자연재해로 수천만 명 정도 죽을 것 같은데?
-그건 그렇군. 왜 힘이 줄어들었는데 외관이 어려진 거지?
-화신체를 원래 모습대로 유지하기 어려워졌으니까.
-한계에 가까워졌다는 건가?
세계수는 팔뚝에 뱀처럼 퍼진 신살을 내려다보았다.
별로 좋아 보이진 않았다.
-맞아.
-예상보다 훨씬 빠른데.
-……불사의 괴물의 기색이 짙어졌어.
-퀸틴에 가 봐야겠군.
-어쩌려고?
-다시 봉인해야지.
신살의 진행을 멈추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시 봉인을 거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불사의 교단도 살짝 손봐 주면 된다.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만의 하나, 깨어난다면?
-최악의 가정이군.
기어코 신 하나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이 불사의 괴물이다.
만약이라고는 하나, 봉인에서 풀려나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정말 불사의 괴물이 완전히 깨어난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죽여야겠지.
-죽지 않는 괴물을 죽이겠다고?
-아그나들은 잘만 죽던데?
-그런 불완전한 불사를 가진 존재가 아니야. 알 텐데.
알고 있다.
땅에 사는 신들조차 결국 불사의 괴물을 죽이지 못하고, 봉인했다.
그런데 소드 마스터 하나 상대하기도 벅찬 내가 그것을 죽일 수 있을까.
냉정하게, 가능성은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생각이 있어.
-투소메스의 레어에서 구한 독만 믿는 거라면, 차라리 리옐을 성장시키는 편이…….
-난 내가 한 말은 지키거든.
나는 세계수의 미간을 눌렀다.
뒤로 밀려난 세계수는 의자에 앉았다.
-나중에 지원 요청할 수도 있다.
-……알았어. 르네에게 말해 놔야겠네.
-자고 있어라. 수명 아까우니까.
-잠깐만 얘기 좀 해도 괜찮을까?
-누구랑?
내 옷의 가슴께 부분에서 신성이 머리를 내밀었다.
어째선지 밖으로 나와 날아다니는 대신, 나와 붙어 있었다.
-네가 목오의 신성이구나. 안녕?
-아님.
-아니라니, 무슨 뜻이니?
-지그문트 마이어의 신성.
신성이 처음으로 두 음절 이상 말했다.
동시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왜 말을 아꼈는지 알 수 있었다.
‘의지를 언어화하는 것도 개입으로 치는 건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심호흡을 하고 있으니, 곧 현기증 같은 감각이 가셨다.
신성과 세계수는 치열하게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까칠한 페어리네.
-신성.
-그래. 신성이지. 아직 조그맣지만.
-댁도.
-어머? 얘 봐라?
발레리아와 리옐이 떠올랐다.
포지션이 겹치면 어째 다투는 것 같다.
둘 다 신적인 힘을 가진 만큼, 눈싸움에서 진짜 번개가 튈 정도였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 * *
왕성의 귀빈실로 돌아오자마자, 삐진 리옐부터 달래 줘야 했다.
다음에는 꼭 같이 보러 간다고 손가락 걸고 약속을 해야 했다.
도장 찍고 복사까지 한 뒤에야, 리옐은 빵빵한 볼에서 공기를 빼냈다.
애가 성격이 좋아서, 그나마 금방 풀린 것이었다.
“해상도시 퀸틴, 들어 본 적 있냐?”
“언젠가 도련님이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바다 위에 떠 있는 국가라고.”
“그래. 지들은 도시라고 주장하지만 말이다.”
“다음 행선지는 거기인 건가요?”
“……그래.”
단도, 마리나도 당연하다는 듯 퀸틴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얘네 데리고 너무 돌아다니는 건 아닐까, 조금 고민됐다.
‘퀸틴도 장악 당한 상태라는 게 조금 걸리는데.’
팔베르크 제국은 암국을 밀어내고 퀸틴을 장악했다.
불사의 교단이 위치하고 있을 확률이 높은 만큼, 유의해야 했다.
밤말을 듣는 쥐에게 협조를 구해야 할까 고민했다.
‘암국은 하멜 안정에 투입하는 쪽이 맞겠지.’
제국이 비록 드래곤의 견제로 웨스트리아 공격을 멈추긴 했으나, 은밀하게 하멜을 재탈환하려고 시도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어트 한넬이라는 방파제도, 제국 편이었으니, 암국은 무조건 트리옌 왕국에 남아야 했다.
“도련님, 또 통신입니다.”
통신구 하나가 반짝였다.
이번에는 발레리아와 연결된 것이었다.
나는 통신구를 집어 들었다.
“스승님!”
발레리아의 얼굴이 드러났다.
머리카락이 조금 헝클어져 있었고, 급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뒤를 살폈지만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네르갈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냐?”
“찾았어요!”
“찾았다고? 뭘 말이냐?”
발레리아가 대답을 위해 입을 연 순간, 등 뒤가 조금 일렁였다.
아지랑이가 아니라, 마법이다.
일렁이는 걸로 보아, 최소 5서클 이상.
뒤이어 뭔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공격 마법.
쾅!
미쳐 경고할 틈도 없이, 폭음과 함께 통신구의 연결이 끊겼다.
“발레리아?”
통신구는 완전히 먹통이 됐다.
저쪽에서 큰 손상을 받은 것이다.
분명 탑주 회의 갔다고 했는데.
어디서 마법전을 벌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도련님.”
단은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트리옌 왕가에서 지급한 클레이모어까지 들었다.
“뭐 해?”
“도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괜찮아. 쟤 안 죽어.”
평소 모습이 그래서 그렇지, 명색이 탑주다.
7서클 마도사는 소드 마스터와 같은 국가급 전력.
탑주 회의에 간 만큼 마찰이 생긴 상대도 탑주일 확률이 높았지만.
“난 내 제자를 그렇게 약하게 키우지 않았거든.”
발레리아는 죽지 않았다.
이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다.
통신구의 연결이 끊기기 직전, 발레리아는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법은 상쇄했지만 통신구가 여파를 버티지 못했을 확률이 농후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가?”
“그건…… 그렇군요.”
단은 미처 그건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통신으로 얻은 정보가 너무 단편적이었다.
마법사와 전투 중이었고, 내게 뭔가를 찾았다고 전하려 했다.
‘발레리아에게 뭔가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 기억이 없는데.’
샌딩(Sending)이 오지 않는 걸 보면, 적어도 근처는 아니다.
도대체 뭘 찾았다는 걸까.
물건일 수도, 인물일 수도 있었다.
안전 확보 전에 급하게 통신부터 한 걸 봐선 꽤 중요한 것 같았다.
‘다시 연락하겠지.’
* * *
“떠나겠다고?”
“그렇습니다.”
“어째선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제프와 헨드릭은 몹시 아쉬워했지만, 나를 막지는 못했다.
둘째 왕녀를 통해서 잡아 둘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틀어진 이상, 나를 막을 명분이 없었다.
“아이들이 모두 회복되는 대로, 식사나 한번 했으면 했는데.”
“송구합니다. 다음을 기약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 상관없네. 자네는 명실상부한 트리옌의 구원자니까.”
헨드릭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구원자라는 칭호가 낯간지럽긴 했지만, 연결점을 만들어 두는 건 좋았다.
헨드릭이 내게 뭔가를 건넸다.
“받게나.”
“왕세자 전하.”
나는 얼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잘 접힌 벨트였다.
설명을 요구하듯 바라보니, 헨드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프 트리옌이 대신 대답했다.
“트리옌 왕가에서 구원자에게 전하는, 작은 성의의 표시일세.”
“살펴봐도 괜찮겠습니까?”
“이미 자네의 것인데, 왜 허락을 구하나?”
나는 벨트를 살폈다.
감촉으로 보아, 만티코어의 가죽으로 만든 것 같았다.
잔가지처럼 뻗어나간 금속제 양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푸른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냥 보석이 아니었다.
‘정령석?’
정령계 깊은 곳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정령석이 박혀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품질의 물건이었다.
‘아티팩트, 국보급 물건이군.’
헨드릭 왕세자가 설명했다.
트리옌 왕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라고 한다.
내 예상대로, 국보였다.
이 정도 물건을 내줄 줄은 몰랐는데,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 벨트를 차고 있으면 수중에서 호흡이 가능해진다네.”
“대단한 물건이군요.”
하지만 헨드릭은 벨트의 정확한 쓰임새를 모르고 있었다.
수중 호흡은 단순한 부가 기능.
벨트 안쪽에 박힌 마석의 효과였다.
중요한 건 겉면의 정령석이었다.
‘정령 친화력을 높여 주는 물건이잖아.’
단순히 착용하고 있는 것만으로, 정령의 호의를 얻을 수 있는 물건이다.
물론 리옐처럼 맹목적인 사랑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정령의 경계심을 풀 정도의 물건은 됐다.
정령석의 색깔을 봐선, 물의 정령과 관련된 물건 같았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 * *
프라우드 산맥의 동쪽 끝은 해안가로 이어진다.
만년설의 영향으로 얼어붙은 바다 위, 붉은 머리칼의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텔레포트를 통해 이동한 적탑주, 발레리아 로안이었다.
“아아! 스승님이 주신 건데!”
울상이 된 발레리아의 손바닥 위에는 통신구 조각들이 올려져 있었다.
마법은 막아 냈지만, 애초에 목적은 발레리아가 아닌 통신구였다.
한숨을 내쉰 발레리아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것들은 또 어떻게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역삼각형을 가로지르는 세로선.
불사의 교단의 사제들이 발레리아를 쫓아오고 있었다.
불사자와 아그나 군대를 대동한 상태였다.
그 수는 언뜻 보기에도 수백에 달했다.
발레리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상성 최악이네.”
지그문트에게 들은 바로, 아그나와 불사자의 약점은 물.
불속성의 마법을 주특기라고 단언할 만큼, 불에 친화적인 발레리아다.
그 대척점에 해당하는 물 속성의 마법은 별로 자신이 없었다.
잘 사용하지 못하는 환상 마법보다 쓰는 빈도가 낮았다.
“콜 라이트닝(Call Lightning)!”
불사의 사제 하나가 캐스팅을 마쳤다.
먹구름 낀 하늘에 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발레리아는 혀를 찼다.
‘왜 하필이면 전격이야!’
콜 라이트닝은 하늘에서 벼락을 불러들이는 마법이다.
발레리아는 플라이(Fly)를 사용해 공중에 떠 있는 상태.
당연히 최우선 목표는 발레리아가 된다.
높은 서클의 마법이 아님에도 괴랄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어, 막기도 어려웠다.
땅에 내려가자니, 아그나와 불사자들이 우글거렸다.
“죽어라! 적탑주!”
“싫어!”
오래된 기억이 발레리아의 뇌리를 스쳤다.
델 로안이 저위 전격 마법을 무효화할 때 자주 사용하던 고유 마법이 있었다.
술식은 배웠지만,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은 없는 마법.
“피뢰침(Lightning Rod)!”
발레리아의 손에서 수십 미터에 이르는 쇠꼬챙이가 출연했다.
숨을 크게 들이쉰 발레리아는 쇠꼬챙이를 얼어붙은 바다에 꽂아 넣었다.
콰강!
쇠꼬챙이가 얼음을 파고 들어갔다.
콜 라이트닝은 장점이 뚜렷한 만큼, 여러 단점이 있는 마법이다.
야외가 아니거나, 이런 날씨가 아니라면 쓰기 어렵다.
또한, 캐스팅 후에 벼락을 불러오는 시간이 필요하다.
꽈릉!
먹구름이 번쩍이더니, 낙뢰가 피뢰침에 빨려들어 갔다.
뒤늦게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번쩍이는 빛에 몸을 움츠렸던 발레리아는 슬쩍 눈을 떴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시간은 없었다.
아그나들이 서로를 밟고 올라가, 계단처럼 발레리아를 향해 뻗어 나갔다.
불사자 하나가 아그나를 밟고 뛰어 올랐다.
발레리아는 반사적으로 플레임 스피어(Flame Spear)를 만들어 던졌다.
화악!
화염의 창이 불사자에게 꽂혔다.
그러나 불사의 잔재들은 불에 강했다.
불길을 뚫고 나온 불사자가 팔을 길게 뻗었다.
“아차.”
발레리아의 몸이 반짝이더니 사라졌다.
곧 불사자의 사정거리 밖에서 다시 나타났다.
블링크(Blink).
불사자는 그런 발레리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팔을 변형했다.
우득!
길게 늘어난 팔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발레리아는 반응하고 피했지만, 완전히 회피하진 못했다.
뺨에 얕은 상처가 생겼다.
하얀 볼에 핏방울이 맺혔다.
피를 닦아 낸 발레리아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씨, 저것들이 진짜 죽을라고!”
발레리아는 허리에 있던 고서를 꺼내 들었다.
델 로안이 선물한 마도서, 불의 서.
화력으로 밀어붙이려는 심산이었다.
발레리아는 불의 서를 펼치려다가, 멈췄다.
“후.”
마도서에 의존할 정도는 아니었다.
발레리아는 차분하게 전황을 살폈다.
불사의 잔재들의 약점은 물.
하지만 발레리아는 물 속성의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평범한 마도사 수준이 최선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저 많은 수를 처리하는 건 어려웠다.
‘스승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스스로가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다.
지그문트가 늘 성격을 죽이라고 했던 것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감정에 휩쓸려서 주변을 살피지 못한 것이다.
‘멍청하긴!’
도망치듯 이동하던 발레리아가 방향을 틀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영창을 시작했다.
대기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불사의 사제 중, 콜 라이트닝을 사용한 마법사는 똑똑히 봤다.
“화염?”
발레리아의 주변에서 불똥이 튀었다.
고위 불 속성 마법을 캐스팅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는 속으로 발레리아를 비웃었다.
불은 아그나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
“막아!”
불사자들이 사제들을 보호했다.
아그나들은 몸뚱이로 벽을 세웠다.
발레리아는 탑주급 마법사답게, 수 초 만에 마법을 완성했다.
손바닥이 아래를 향했다.
멜트 다운(Melt Down).
뜨거운 열기가 아그나를 강타했다.
하지만 벽을 이룬 아그나들은 그것을 버텨 냈다.
화염과 마찬가지로, 열기에도 강했기 때문이다.
불사의 사제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하! 멍청한!”
효과는 전무했지만, 발레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불사의 사제는 신발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얼음 위로 차가운 물이 올라와 있었다.
뒤늦게 뭔가를 깨달은 사제는 멍청한 소리를 냈다.
“아.”
발레리아가 목적은 처음부터 불사의 잔재가 아니었다.
뜨거운 열기는 얼어붙은 바다를 녹이고 있었다.
아무리 만년설로 얼어붙었다고 하나, 얼음 밑은 바다.
아그나의 약점인 물이 들어차 있었다.
사제는 다급히 소리쳤다.
“후퇴!”
“하게 두겠냐!”
발레리아는 손을 움켜쥐었다.
열기가 강해짐에 따라 얼음은 점점 얇아졌다.
쩌억!
불안한 소리와 함께 녹아내린 얼음이 갈라지더니, 결국 무너져 내렸다.
얼음에 서 있던 불사의 잔재들이 바다에 떨어졌다.
치이이이익!
수증기가 올라왔다.
불사자들은 물에 어느 정도 저항이 있었지만, 아예 바다에 담가 버리면 수가 없었다.
불사의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끄아아아악!”
아그나와 불사자라는 방패를 잃고, 끓어오르는 바다에서 몸부림 쳤다.
이윽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발레리아는 얼음 바다 위로 내려왔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운 날씨에 비해 터무니없이 얇은 복장 탓이었다.
“으, 추워라. 하아.”
두 손을 모으고 입김을 불어넣었다.
손가락 틈으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멜트 다운에 마나를 쏟을 때, 효율을 뽑아내기 위해 체온 유지 마법을 포기했다.
하지만 다시 캐스팅할 수도 없었다.
텔레포트를 사용할 마나도 간당간당한 상태였다.
‘스승님을 찾아뵙는 게 먼저야.’
발레리아는 주위를 살폈다.
지그문트와 합류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잠시 쉬어서 마나를 회복한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얼음 바다를 벗어나야 했다.
발레리아는 해안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멈추게, 적탑주여.”
앞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과 눈을 마주쳤다.
발레리아는 골치 아파졌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 젠장.”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