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2/134)

7

나는 미혼이다

화려한 트리옌 왕성의 응접실.

내 맞은편에는 제프 트리옌이 앉아 있었다.

나는 국왕과 독대를 하는 중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독대는 아니었다.

“우와.”

걱정됐는지, 기어코 나를 따라온 리옐이었다.

리옐은 응접실을 장식하고 있는 예술품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너그러운 성격인지, 제프가 허락한 덕분에 응접실 안까지 들어왔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리옐이 꼼지락거리다가, 폴짝 의자에서 내려왔다.

제프에게 다가가서, 빤히 올려다본다.

눈이 마주쳤다.

“앉아도 돼?”

“그러려무나.”

제프는 자신의 옆에 있는 의자를 빼 줬다.

리옐은 그 의자 위로 기어 올라가더니, 옆에 있는 제프의 무릎 위로 넘어간다.

제프는 조금 당황했지만, 곧 리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식이 많아서 그런지, 익숙해 보였다.

리옐은 머리를 스치는 제프의 수염을 덥석 잡았다.

“왕 할아부지. 수염 길다!”

“흠, 꽤 공들여서 길었단다. 멋지지 않으냐?”

“내가 더 멋지게 만들어 줄게!”

리옐은, 제프의 긴 수염을 땋았다.

저번에 마리나에게 머리 땋는 법을 배우는 걸 본 적 있다.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꽤 솜씨가 좋았다.

문제는 국왕의 체면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는 것이다.

졸지에 예쁘게 땋은 수염을 가지게 된 국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몸은 좀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제프는 헛기침을 하며 내 안부를 물었다.

밑에서 리옐이 제프의 땋은 수염을 가지고 놀았다.

솔직히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나는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했다.

“트리옌 왕가를 대표하여 감사를 표하는 바일세.”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해야 할 일이라. 레온하트의 수호자인 자네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아니었지.”

제프는 눈을 감았다.

그도 아마 궁금했던 모양이다.

자칫하면 레온하트 왕국과 트리옌 왕국의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나는 위험을 감수하고 트리옌 왕국을 구했다.

“제국 때문인가?”

“헨드릭 왕세자 전하께 들으신 모양이군요.”

“그래. 전염병이라고 생각했는데, 마계의 기생 생물이었다지.”

“그렇습니다. 아마 폐하께서는 느끼셨을 거라고 사료됩니다.”

“느꼈네.”

제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찝찝한지, 목과 가슴 언저리를 쓸어내렸다.

“몸속에서 손가락 크기의 벌레가 기어 다니는, 기분 나쁜 감각이었다네.”

“그건, 확실히 상상하기도 싫군요.”

“헨드릭에게 들었는데.”

제프는 진지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땋은 수염이 턱 아래로 흔들리고 있어서, 그리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둘째 아이와 내게 기생하고 있는 것들을 자네가 제거했다는 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부디 왕비를 비롯한 다른 왕족들의 것도 제거해 줄 수 있겠나?”

대답하려는 순간, 국왕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맨입으로 부탁하는 건 아닐세.”

“맨입으로 부탁하셔도 됩니다.”

“뭐라고?”

“제거해 드리겠습니다. 원래 할 생각이었으니까요.”

트리옌 왕가의 정상화는 내가 바라마지 않는 상황이었다.

팔베르크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만큼, 최고의 상황이었으면 했다.

어트 한넬이라는 전력을 잃은 건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국왕을 제외한 왕가의 인물에게 기생한 페러시트는 잠들어 있다.

신성의 손에 닿기만 해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진다.

신성이 말하길, 내 몸에 부담은 전혀 없는 일이라고 했다.

아마 리옐이나 마리나도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가시죠.”

“그, 그러세나.”

* * *

제프 트리옌을 제외하면 내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주변인이 알려지는 것도 곤란했기에, 리옐과 단, 마리나도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나와 같은 가면이었는데, 리옐이 쓰니 사뭇 깜찍하게 보였다.

“국왕 폐하. 그 아이는.”

“신경 쓰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리옐은 페러시트 제거에 동행했다.

기력이 쇠한 제프가 걱정됐는지 손을 잡고 있었다.

체면 구기는 걸 개의치 않는 건지, 리옐의 마성에 홀린 건지.

제프는 리옐의 손을 잡은 채 별궁으로 향했다.

수많은 호위 기사가 뒤를 따랐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수염 땋은 건 좀 풀지.’

별궁으로 가자, 시종들이 국왕을 맞이했다.

페러시트에 감염된 왕족들은 거의 의식불명 상태였다.

처음 치료했던 왕녀처럼, 요양을 명목으로 별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실례지만 슬하에 몇 분이나 계십니까?”

“헨드릭을 포함하면, 열둘이 있다네.”

그렇다는 건, 열이 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페러시트 제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왕성이 큰 만큼, 이동에 상당한 시간을 쏟아야 했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들어가겠다.”

시작은 둘째 왕자였다.

페러시트는 잠들어 있는 도중에도 숙주의 힘을 빼앗는다.

꽤 시간이 경과한 탓인지, 둘째 왕자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가장 증세가 심했던 국왕과 비슷한 정도로 팔다리가 말라 있었다.

“잠시 살피겠습니다.”

“부탁하겠네.”

나는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신성을 불렀다.

-신성. 부탁한다.

-간단.

신성이 자그마한 손을 왕자의 머리에 올렸다.

빛 알갱이가 반짝이고, 페러시트가 사라졌다.

너무 간단한 일이었다.

임무를 마친 신성이 내 몸 속으로 돌아갔다.

“됐습니다.”

“뭐? 벌써 끝났단 말인가?”

“예. 하지만 쇠하신 기력을 되찾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아빠, 내가 도와줘도 돼?”

리옐이 눈을 깜빡였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제프에게 그랬던 것처럼, 기력을 나눠 주려는 모양이었다.

리옐은 평범한 아이가 아닌 세계수의 후계자다.

흘러넘치는 생명력을 조금 나눠 주는 걸로 몸에 지장이 생기진 않으리라.

“마음대로 해.”

“알았어! 왕 할아부지. 잠시만!”

리옐은 신성이 그랬던 것처럼 왕자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눈을 감자, 머리 위 새싹이 흔들렸다.

풀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왕자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호흡이 안정되고, 혈색이 돌아왔다.

“……아바마마?”

왕자는 이내 힘겹게 눈을 깜빡이며, 미약한 목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오랫동안 의식이 없던 탓인지, 목이 다 쉬어 있었다.

국왕이 왕자에게 다가갔다.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한데, 수염은 왜 그러십니까?”

“내가 했어!”

둘째 왕자는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틀었다.

리옐이 우쭐한 듯 허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가면에 가려져서 보이진 않았지만, 필시 득의양양한 표정일 터였다.

둘째 왕자가 눈을 감았다.

“송구합니다. 아바마마. 너무 졸려서, 헛것이 보이나 봅니다.”

“쉬거라.”

둘째 왕자는 국왕의 말을 듣자마자 잠들었다.

국왕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리옐은 심통이 난 듯 복어처럼 볼을 부풀렸다.

“헛것 아닌데!”

* * *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울었다.

막내 왕자를 끝으로, 트리옌 왕가 전원의 페러시트를 제거했을 때였다.

신성이 팔락팔락 들어가고, 나는 선언했다.

“끝났습니다.”

“정말 감사하네. 한시름 덜었어.”

제프 트리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국무도 미뤄 두고 나와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시종일관 혹시나 잘못되지는 않을까 마음을 졸이는 모습이었다.

국왕이기 이전에 아버지라는 것이다.

방에서 나오니, 리옐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빠, 나 졸려.”

리옐은 자꾸 눈을 감았다 뜨며 꾸벅꾸벅 졸았다.

넘어질 것 같아 업어 주니, 등에 얼굴을 묻고 잠들어 버렸다.

아마 기력 전달로 평소보다 빠르게 체력을 소모한 모양이었다.

제프 트리옌은 유심히 리옐을 바라보았다.

“자네 딸인가?”

“그렇습니다.”

“귀엽군.”

“자주 듣습니다.”

“혹시, 친딸인가?”

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외관상 나와 리옐의 부녀 관계가 성립하긴 어렵다.

드라이어드라는 것을 밝힐 수도 없는 노릇.

오해를 산 적도 있었기에,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었다.

“수양딸입니다.”

“그렇군.”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리옐이 세계수의 후계자라는 것은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만 알아야 했다.

제국과 불사의 신자들이 세계수의 후계자를 찾고 있는 지금, 더욱 그랬다.

제프 트리옌은 확실히 팔베르크 제국과 대립하는 인물이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이런. 회복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식사도 못 하게 했군.”

“괜찮습니다.”

“아닐세. 짐이 직접 대접하지.”

제프는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명목으로 거절했지만, 제프는 나를 설득했다.

여러 조건을 붙인 끝에, 결국 저녁 식사에 참석하게 됐다.

나는 잠든 리옐을 마리나에게 맡겨 두고, 제프가 보낸 시종을 따라갔다.

“앉게나.”

제프는 왕가의 일원들이 사용하는 듯한 식탁의 상석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제프의 맞은편에 앉았다.

곧 요리사들이 전채요리를 내왔다.

아까 전까지는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았는데, 요리를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먹은 음식이라곤 리옐이 입에 넣어 준 사과가 전부였다.

“가면은 벗어도 좋네. 종을 울리기 전까지 다시 들어오지 않을 테니.”

나를 배려한 것인지, 시종이나 호위 기사도 없었다.

나는 가면을 벗었다.

이미 여관에서 내 정체를 확인했기 때문에, 숨길 이유도 없었다.

제프 트리옌은 영민한 왕이다.

내 정체를 공표하거나 떠벌릴 인물은 아니었다.

“들게.”

국왕은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국왕이 나를 이 자리에 초대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보상의 문제였다.

‘뭐라도 쥐여 주려고 하겠지.’

이는 비단 제프 트리옌이 은혜를 갚으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나는 지그문트 마이어가 아닌 레온하트의 수호자로서 트리옌 왕국을 위해서 헌신했다.

여기서 트리옌 왕국이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는다면, 외교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제프 트리옌은 영민한 왕이다.

그것은 원치 않을 것이다.

“그대는 트리옌 왕국의 구원자일세.”

“과찬이십니다.”

“빈말이 아니야. 해서, 적절한 보상을 생각해 봤네.”

역시나였다.

제프 트리옌은 식전주를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였다.

“작위를 수여하면 받을 생각이 있나?”

“죄송합니다. 저는 레온하트 왕국민입니다.”

“그렇겠지.”

작위를 받는다는 건, 이 국가에 예속되라는 뜻이다.

나는 레온하트 왕국을 벗어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제프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 보는 건지 모르겠다.

예법도 확실히 지키고 있었고, 얼굴에 뭐가 묻은 것도 아닌데.

“짐이 여러 번 생각해 보았는데. 자네가 받아들일지 모르겠군.”

“혹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보상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둘째 왕녀일세.”

“예?”

제프 트리옌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 내 사위가 되지 않겠나?”

제프 트리옌은 정략혼을 제안했다.

대상은 처음에 헨드릭과 치료했던 둘째 왕녀였다.

확실히 ‘지그문트 마이어’는 혼기를 넘은 젊은이다.

관자놀이 옆으로 땀 한 방울이 흘러가는 게 느껴졌다.

“트리옌 국왕 폐하.”

“이 정도라면 적절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한낱 남작가 출신입니다. 왕가와 혼인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요정족의 은인, 지그문트 마이어. 자네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 들었네.”

지그문트 마이어라는 존재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선언식 때다.

당시 제프 트리옌은 페러시트에 감염되어 있어, 정세에 어두웠을 터.

호구조사를 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기어코 한 모양이었다.

“능력이 출중하더군.”

“신분은 변치 않습니다.”

“자네는 이미 자네 능력만으로 작위를 받을 만한 공적을 세웠네.”

“작위는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한낱 남작가의 자제에 불과합니다.”

“소드 마스터를 물리치고, 트리옌 왕가를 구한 남작가의 자제지.”

“제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겸양 떠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으나, 내 의도는 완만한 거절이었다.

그러나 제프 트리옌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보셨다시피 딸이 하나 있습니다.”

“수양딸이라고 하지 않았나.”

“수양딸이라고는 하나, 내칠 생각은 없습니다.”

“누가 내치라고 하던가? 짐 또한 그런 귀여운 손녀는 바라마지 않던 바일세.”

왕가에 수양딸이라니.

터무니없는 얘기였지만, 제프는 진심 같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른 방법으로 거절했다.

“또한 저는 검 수련에 시간을 쏟아, 예법에 익숙지 못합니다.”

“자네가 식기를 잡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네. 어지간한 왕가의 자제보다 기품 있군.”

나는 내 손에 들린 식기를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치밀한 인간이다.

리옐이 친딸인지 물어본 것도, 식사 자리에 초대한 것도, 모두 이를 위해서였다.

“둘째 왕녀님의 의사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아이는 승낙했네.”

“정신을 차리셨습니까?”

“그래. 자네를 언뜻 본 모양이야. 오히려 좋다고 하더군.”

둘째 왕녀의 페러시트를 제거했을 때, 국왕 때문에 잠깐 소란이 일어났었다.

아마 그때 잠시 깨어났던 모양이다.

“얼굴도 보지 못했을 텐데요.”

“외면은 중요한 요소가 아닐세.”

“이야기를 나눠 본 것도 아니고요.”

“원한다면 자리를 만들어 주겠네. 당장 부를 수도 있어.”

“사양하겠습니다.”

제프 트리옌은 집요했다.

레온하트 왕국에서도 이런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다.

왕가나 라스 마이어가 있었기에, 내가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완곡한 거절을 포기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국왕 폐하.”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어딘가에 묶여 있을 수 없는 몸입니다.”

“데릴사위가 되라는 것이 아니네. 원한다면 둘째 아이를 레온하트로 왕국으로 보내지.”

“폐하.”

제프 트리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어트 한넬이라는 인력의 손실은 트리옌 왕국에게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소드 마스터는 단순히 한 나라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지대한 상징이 된다.

또한 그는 트리옌 왕가의 신임을 받던 귀족이기도 했다.

‘오히려, 칭찬해 주고 싶긴 한데.’

나를 끌어들이려 하는 건 아주 영민한 판단이었다.

영웅의 존재는 국가의 단합을 불러일으킨다.

어트의 빈자리를 메꿈과 동시에, 세대교체도 염두해 두고 있을 것이다.

소극적인 파서벌 레온하트와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래서, 트리옌에 머무를 필요가 없는 거지만.’

트리옌 왕국은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갈 것이다.

헨드릭 왕세자가 마냥 무력한 인물이 아니기도 하고, 한 번 비바람을 견딘 만큼 왕가도 굳건해졌을 것이다.

제프 트리옌의 판단력이나 안목은, 걱정할 수준이 아니다.

고집 있는 성격도 이점으로 작용할 확률이 높았다.

“너무 성급하게 판단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 집요한 이빨이, 나를 잡고 늘어지는 점이 문제였지만.

* * *

‘이래서 트리옌 왕국을 빨리 떠나려고 한 건데.’

불편한 식사를 마친 뒤, 나는 바람이나 쐴 겸 정원으로 나왔다.

원래라면 발을 들이기 어려운, 왕가의 인물들이 사용하는 정원이었다.

제프는 나를 트리옌의 구원자라는 이유로 왕성을 자유롭게 드나들게 했다.

식사할 때 정원을 한 번 구경하라고 했기에, 찾아온 것이었다.

‘자랑할 만하군.’

길을 따라 핀 들꽃이 바람에 흔들렸다.

달빛이 일렁이는 호수는 꽤 운치 있었다.

낮에 왔다면 리옐이 광합성이랍시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인기척은…… 없군.’

나는 이름 없는 검을 뽑아 들었다.

며칠간 요양한답시고 침대에만 앉아 있었다.

매일 하던 훈련을 안 하니 몸이 근질거렸다.

환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나도 어느 정도 기사가 된 모양이야.’

아직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불과했지만, 나름 기사의 버릇이 몸에 배인 모양이었다.

항상 훈련에 매진하는 단의 영향이 컸다.

-신성.

-응답.

새하얀 페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심장에서는 마나 서클이 회전하고, 단전에서는 오러가 끓어올랐다.

이름 없는 검에 아우나(Aunar)가 피어올랐다.

“흐읍.”

하지만 아우나는 얼마 지속되지 못했다.

순식간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탈력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확실히 아우나에 담긴 힘은 가공할 정도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힘의 소모가 너무 컸다.

어트 한넬과의 전투에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실전에서는 두 합이 한계.

‘너무 비효율적이다.’

그마저도 상당한 준비 시간을 소모했다.

첫 번째는 마법으로 허를 찔렀다.

두 번째는 마리나와 단의 도움으로 발을 묶었다.

그러나 반드시 맞힐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빗맞혔을 때 리스크를 생각하면, 도박성이 너무 짙은 기술이었다.

그리고 아우나가 안정되지 못하는 이유는.

-이게 한계인가?

신성력의 부족이다.

촉매가 부족하니, 오러와 마나 양이 터무니없이 많이 소모됐다.

하지만 신성은 일정량 이상의 힘을 풀어내지 않았다.

만약 조금만 더 있다면,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터.

-경고.

신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짧은 한마디지만,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신성은 내가 끝을 알기 어려운 정도의 힘을 지녔다.

자의를 가지고 그것을 제어하고 있긴 하지만.

끌어다 쓸수록 내 몸에 가는 부담이 강해진다는 것이겠지.

-시노드 교구에서 첫 번째 시험을 봤었지.

-맞음.

-아직 두 번째 시험을 보긴 이른가?

신성은 조그마한 턱을 잡고 고민했다.

나는 팔베르크 제국에 가기 전에 오러와 마나를 한 단계 씩 끌어올렸다.

신성이라는 힘도 그에 맞춰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가능.

-그럼, 두 번째 시험도 보겠다.

-거절.

-왜?

-시선.

신성은 날개를 팔락이더니, 홀연히 사라졌다.

시선이라니, 무슨 뜻일까.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나는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누군가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밤말을 듣는 쥐는 아니었다.

‘수풀?’

무성한 수풀이 부자연스럽게 흔들렸다.

나는 모른 척 수풀을 향해 다가갔다.

이름 없는 검을 겨눴다.

“나와라.”

수풀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데, 뻔뻔하기도 했다.

적어도 이렇게 어설프다는 건, 암살자는 아니란 것 같은데.

“셋 셀 때까지 안 나오면 베겠다.”

“어흠, 큼.”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제프와 같은 갈색 머리카락에는 나뭇잎이 붙어 있었다.

화려한 장신구가 달빛을 반사해 빛났다.

“왕녀님?”

“처음 뵙겠습니다.”

트리옌 왕국의 둘째 왕녀였다.

너무 의외의 인물이었다.

나는 검을 거뒀다.

‘잠깐, 이거 혹시.’

달빛이 내려앉은 정원.

왕녀와 독대하고 있는 나.

문득 언젠가 읽었던 소설의 한 장면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렸을 적, 발레리아가 몰래 숨겨 두고 읽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었다.

‘아, 젠장.’

* * *

트리옌 왕성의 귀빈실.

침대에서 얌전히 잠들어 있던 리옐이 번쩍 눈을 떴다.

의자에 앉은 단이 팔짱을 끼고 졸았다.

마리나는 침대 옆에 앉아 잠들어 있었다.

하멜 탈환전은 오밤중에 일어났다.

트리옌으로 오는 길에 자주 비박을 했기에, 피곤했던 것이다.

“아빠?”

리옐은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그문트 마이어는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감각이 엄습했다.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린 리옐은, 옆 선반에 놓여 있던 가면을 뒤집어썼다.

늘 마리나가 들고 다니는 탄생초를 직접 들었다.

“끙.”

작은 화분이었지만, 흙이 들어 있어 나름 무거웠다.

리옐은 탄생초를 품에 안고 귀빈실을 나섰다.

귀빈실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깜짝 놀랐다.

“어, 작은 수호자님?”

트리옌 왕국에서 가면을 쓰고 활동한 것은 지그문트뿐만이 아니었다.

단과 마리나, 리옐까지도 가면을 쓰고 움직였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였지만, 같은 가면이었기에 편의상 이렇게 불렸다.

리옐은 위를 올려다봤다.

가면 너머의 말똥말똥한 눈이 기사와 마주쳤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아빠가 없어!”

“구원자님이라면 국왕 폐하와 식사 중이실 겁니다.”

“왕 할아부지?”

“그렇습니다.”

리옐의 고개가 옆으로 갸우뚱 기울었다.

그리고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예? 아니라니요.”

“아빠는 정원에 있어!”

“정원요?”

기사는 고민했다.

확실히, 식사가 끝날 무렵이긴 했다.

하지만 정원에 있다는 걸 이 조그마한 아이가 어떻게 아는 걸까.

리옐은 정원에 심어진 식물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면, 구원자…… 아빠를 찾으러 가시는 겁니까?”

“응!”

“방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머지않아 돌아오실 텐데요.”

“아빠는 내가 지켜야 돼! 엄마가 그랬는걸!”

기사는 곤란한 듯 투구 밖으로 드러난 눈가를 긁었다.

최대한 수호자 일행의 편의를 봐주며, 자유롭게 왕성을 오가게 하라고 했지만, 아이를 혼자 돌아다니게 해도 괜찮은 걸까.

‘아내와 딸이 있다. 트리옌의 구원자는 기혼자셨군.’

사소한 것 하나까지 보고하라는 국왕, 제프 트리옌의 명령이 떠올랐다.

교대할 때 보고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살폈다.

마침 다른 병사 하나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보게.”

기사는 병사를 불러 세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병사에게 리옐을 따라가며 호위하도록 했다.

병사는 때아닌 근무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다.

기사는 계속 귀빈실 앞을 지키기로 했다.

리옐이 병사의 옷자락을 두 번 잡아당겼다.

“병사 아저씨, 정원이 어디야?”

“안뜰을 말하시는 겁니까?”

“으음, 이따만한 호수가 있는 곳!”

리옐은 탄생초를 내려놓고 두 팔을 한껏 벌려 보였다.

호수가 있는 정원.

길을 알고 있었지만, 가 본 적은 없는 곳.

왕가의 개인 정원이었다.

병사는 혹시나 싶어 리옐에게 물었다.

“그곳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겁니까?”

“엄마가 범행은 현장에서 덮쳐야 한다고 그랬어!”

* * *

제프 트리옌의 개인 서재, 테라스.

의자에 앉은 제프는 망원경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 끝에는 다름 아닌 왕가의 개인 정원이 있었다.

식사 중에 지그문트가 추천한 간식인 튀긴 옥수수를 입에 넣었다.

“음, 이거 맛있구먼.”

“더 준비하겠습니다. 폐하.”

“부탁하네. 아, 캐러멜도 입혀 보라고 했는데, 가능하겠나?”

“주방장님께 전하겠습니다.”

“부탁하네.”

시녀는 꾸벅 인사를 하고 뒤로 물러났다.

제프는 손가락에 남은 소금기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이보다 더 좋은 구경거리가 없었다.

“좋아. 순조롭구먼. 역시 밀회는 달밤에 해야지. 껄껄.”

“옛날 생각나네요.”

“그러게나 말이야. 사랑에 신분이 중요한가! 마음이 중요하지!”

“그럼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폐하.”

제프 트리옌은 말을 멈췄다.

시녀는 주방장에게 갔는데, 그럼 지금 대꾸하고 있는 인물은 누구란 말인가.

뒤를 돌아보니, 왕비가 생긋 웃고 있었다.

제프는 기겁했다.

“언제 일어났소?”

“바로 방금 전에요.”

“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오.”

제프는 왕비를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슬금슬금 왕비를 테라스 밖으로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왕비는 녹록지 않았다.

부드럽게 제프를 밀어낸 뒤, 테라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제프는 비지땀을 흘렸다.

“아직 거동이 불편할 텐데, 어찌 이곳까지 왔단 말이오.”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왕비는 아래를 살폈다.

지그문트와 둘째 왕녀가 조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왕비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국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분께서 트리옌의 구원자시군요.”

“흠, 그렇소.”

“폐하.”

“왜 그러시오?”

“제프.”

왕비는 제프를 추궁하듯 빤히 바라보았다.

제프 트리옌는 눈을 피했다.

“당신이 벌인 짓인가요?”

“큼…… 그렇소.”

이 모든 건 제프의 연출이었다.

지그문트에게 왕가의 정원으로 가 보라고 한 것도.

둘째 왕녀에게 지그문트 마이어의 행적을 알려 준 것도.

전부 제프 트리옌의 치밀한 계산하에 나온 것이었다.

“어떻게 알았소?”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운명적인 만남 같은 장면이 안 나오죠.”

“둘째 아이도 좋다고 했소.”

“하아, 당신이란 사람은.”

왕비는 엄지로 미간을 꾹 눌렀다.

그녀는 제프 트리옌의 까다로운 성격을 알고 있었다.

아마 온갖 시험과 조사를 통과한 끝에 맺어 주려는 것일 터.

“여간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능력, 성품, 모든 부분에서 완벽하더군.”

“당신이 그런 평을 할 정도면. 으음.”

“직접 만나 보면 나와 같은 생각이 들 거요. 반드시 잡아야 할 인물이야.”

왕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이들에게 저런 장면을 연출하다니.

국왕의 성격도 참 고약했다.

문득, 천천히 둘에게 접근하는 조그마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데, 저 아이는 누구죠?”

“음?”

* * *

리옐은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나아갔다.

바닥에 깔린 카펫 덕분에 발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병사가 리옐의 뒤를 따랐다.

눈치 없이 갑옷 부딪치는 소리가 나자, 리옐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검지를 작은 입술 위에 올렸다.

“쉬잇.”

“알겠…….”

“쉬잇!”

병사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리옐은 안심하고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트리옌 왕가의 개인 정원이 드러났다.

병사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저건…….”

“아이참! 쉬잇!”

둘째 왕녀와, 구원자가 함께 있었다.

명백한 밀회의 현장.

리옐의 눈에 불이 켜졌다.

탄생초가 담긴 화분 밑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작은 수정 구슬을 하나 쏙 빼냈다.

병사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작은 수호자님, 그건 뭡니까?”

“기록구야.”

“본격적이군요.”

“엄마한테 받았어.”

“그분은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길래…….”

리옐은 기록구를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기록구가 가동되자, 병사에게 손짓했다.

병사에게 기록구를 쥐여 주고, 다시 고양이 걸음으로 정원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흠.”

한편, 지그문트는 어떻게 이 상황을 빠져나갈까 궁리하고 있었다.

제프 트리옌에게 악의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의도대로 일이 흘러갔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그문트는 결혼은커녕 연애에도 관심이 전혀 없었다.

“구원자님께서 한넬 경을 이기셨다면서요?”

“아니. 무서워서 튀었다.”

“아바마마를 지키기 위해서. 멋져요.”

“추한 거지.”

“겸손하기까지 하시네요. 저와 결혼을 전제로……”

“거절하지.”

지그문트는 최대한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둘째 왕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재잘재잘 떠들었다.

지그문트는 적당한 변명거리를 떠올렸다.

“사실 나는 백 살이 넘는 노인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걸요.”

“딸도 하나 두고 있지.”

“수양딸의 이야기라면 들었어요. 친해지면 좋겠네요!”

“방랑벽이 있어서, 한곳에 머무르지 못한다.”

“제가 집 지키기는 참 잘하거든요.”

누구를 닮았는지, 쉽게 고집을 꺾지 않았다.

지그문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프 트리옌과 비슷한 성격이라면, 직설적인 거절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구실이 필요했다.

사실을 조금 왜곡해서, 거절하기로 했다.

“숨겨 왔는데, 아내가 있다.”

아무리 둘째 왕녀라도 이건 곤란한지, 대꾸하지 못했다.

지그문트는 옳다구나 하고 말에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사실 아이도 수양딸이 아닌 친딸이지.”

“음, 혼례를 올리지 않으셨다고 들었는데요.”

“혼례를 올리기 전에 아내가 몸져누웠거든. 약을 구하기 위해 서대륙을 떠돌고 있는 거고.”

“첩 한 분 정도는…….”

“나는 그녀 외에는 아내를 들일 생각이 없어.”

둘째 왕녀는 고개를 떨궜다.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울지는 않았다.

결국 둘째 왕녀는 지그문트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어깨를 늘어트리고, 정원 밖으로 나갔다.

지그문트는 왕녀의 등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아이니까, 금방 회복하겠지.’

이런 곤혹을 치르게 한 제프 트리옌을 가만 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뒤늦게 인기척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렸다.

“……네가 왜 거기 있냐?”

눈을 크게 뜬 병사 하나가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 옆에는, 기록구를 확인하고 있는 리옐이 있었다.

리옐은 아주 흡족한 기색으로 웃었다.

“으히히.”

* * *

“도련님.”

“왜?”

“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리나의 시선은 내 머리 위에 머물러 있었다.

목말을 탄 리옐이 내 정수리를 톡톡 두드렸다.

“아빠.”

“왜 그러냐?”

“나 목말라!”

나는 마리나가 들고 있던 탄생초를 받아 들었다.

워터(Water)를 사용해 물을 뿌렸다.

리옐은 히히 웃으며 좋아했다.

작은 악마가 여기 있었다.

“도련님께서 리옐 아가씨 응석을 이렇게 받아 주실 줄은 몰랐네요.”

“아빠 착해!”

“인생이란.”

리옐의 요구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자장가 불러 주기, 손잡고 산책하기 등.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만, 내가 절대 안 할 일을 해 달라고 보챘다.

기록구가 리옐의 손에 있으니, 내가 뭘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성역을 열다니.’

무력으로 가져가려고 시도를 해 봤다.

하지만 리옐은 무려 성역까지 열어 가면서 기록구를 숨겼다.

세계수의 하늘 정원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규모였으나, 수정구 하나 숨길 크기는 됐다.

내가 아공간 주머니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활용한 것 같았다.

“갑옷은 좀 어떠냐?”

“좋습니다. 하지만, 검은…….”

“일단 하우전드한테 보내 놨다.”

“드워프 장로님 말씀이시군요.”

단의 갑옷은 왕성 직속 대장장이를 통해 수리를 완료했다.

그러나 클레이모어는 아니었다.

인간 대장장이 중에서 아티팩트를 수리할 만한 인물은 드물다.

그것도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 정도 되는, 강력한 것이라면 더욱 그랬다.

‘전문가의 손에 맡기는 편이 좋겠지.’

밤말을 듣는 쥐에게 부탁해 프라우드 산맥으로 보내 놓은 상태였다.

오고 가는 데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확실한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단의 한숨이 깊어졌다.

“용무는 마쳤다. 오늘 중으로 떠날 거니까, 짐 넘겨.”

교섭은 루터 레온하트가 알아서 할 것이다.

‘암국이 병력을 집중한다고 했으니, 어트 한넬의 빈자리가 크다고 해도 탈환 당하진 않겠지.’

팔베르크 제국은 용의 산맥에게 견제를 받고 있으니, 당분간 트리옌은 안전하리라.

그사이에 루터 레온하트가 트리옌 왕국을 이쪽으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된다.

단시간에 동맹 체결까진 어렵더라도, 우방으로 만들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내가 트리옌 왕국의 보상을 거절했기에, 교섭에 있어서 루터가 우위를 가져갈 테고.

“마이어 영지로 갑니까? 네르갈로 갑니까?”

“글쎄다.”

귀빈 대접을 받으며 휴식도 충분히 취했다.

중간에 조금 귀찮은 일이 일어났지만, 기억하고 싶진 않았다.

앞으로 갈 행선지를 정리하고 있는 와중에.

리옐이 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아빠?”

“왜?”

“반짝이!”

책상에 정렬해 둔 통신구 중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여태껏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통신구.

엘비아와 연결된 것이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있는 르네가 보였다.

뒤를 지나가던 레골라스가 머리를 내밀었다.

-르네 님, 뭐 하십니까?

-지그문트 님과 연결된 물건이에요.

-통신구군요. 음? 연결된 것 같습니다만.

-아, 이거 연결된 건가요? 들리세요?

머리 위의 리옐이 붕붕 손을 흔들었다.

-르네 언니!

-어머, 리옐 님. 거기서 뭐 하시나요?

-아빠랑 놀아 주고 있어!

-잘됐네요. 후후.

누가 누구를 놀아 준다는 건지.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그렇다고 리옐을 내려놓을 수도 없었다.

세계수에게 그걸 보여 주는 날에는, 평생 놀림감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지그문트 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용건만 간단히 부탁한다.

-네. 혹시, 최근에 성역에 가신 적 있나요?

리옐과 눈이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성역에 갔던 건, 꽤 시간이 지나 있었다.

간혹 리옐이 세계수를 보러 가자고 보채곤 했지만, 계속 깨우는 건 세계수의 명을 재촉하는 일이었다.

-아니. 꽤 됐는데.

-그렇군요. 혹시, 확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왜?

-불안해서요.

-뭐가?

르네는 팔뚝 정도 크기의 작은 나뭇가지를 보였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어머니의 가지입니다.

-부러진 건가?

-네. 얼마 전, 잔가지 하나가 부러졌습니다.

생명의 근원이라는 신목의 가지가 부러지는 건,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주무시고 계신지, 어머니께선 응답이 없으십니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뼛조각 하나를 꺼냈다.

목오에게 채취한, 신살의 흔적이 남은 목뼈였다.

처음 채취할 때만 해도, 신살은 검은 혈관처럼 퍼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짙어졌다.’

이것으로 신살의 진행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틈틈이 확인했지만, 이처럼 명료하게 색이 변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북쪽을 바라보았다.

불사의 괴물이 깨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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