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트리옌의 구원자
검붉은 피가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기사는 검을 집어넣었다.
마법사가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군요.”
“레온하트의 수호자도, 역추적은 염두해 두지 못했던 거겠지.”
“기껏 공격 마법을 메모라이즈 해 뒀는데, 쓸모가 없게 됐군요.”
“돌아간다.”
국왕, 제프 트리옌은 죽었다.
어트 한넬에게 받은 임무를 마친 것이다.
제프 트리옌의 죽음은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뒤집어쓸 것이다.
“복귀한다.”
“머스는 어떻게 할 겁니까?”
“숲 밖에서 대기하고 있지 않다면, 따로 수색대를 편성해야겠지.”
기사들과 마법사는 발걸음을 돌렸다.
사냥꾼이 만든 길을 따라 돌아가면 될 것이다.
문득 한 기사가 발걸음을 멈췄다.
“뭡니까?”
“저, 저거.”
수풀 너머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길을 잃었던 기사, 머스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화려한 왕관을 쓰고, 청록색 망토를 둘렀다.
많이 야위긴 했지만, 알아 볼 수 있었다.
트리옌 왕국의 국왕, 제프 트리옌이었다.
“국왕 폐하?”
“그런, 있을 수 없다!”
“어찌…….”
기사가 고개를 돌렸다.
나무에 묶여 있던, 기사가 직접 베어 낸 제프 트리옌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죽어 있는 것은, 그와 같은 갑옷 차림의 남자.
사라졌던 기사, 머스였다.
“이게, 어떻게 된……?”
“환상 마법이었나? 마법사, 뭘 한 거지?”
“마법이 아닙니다! 마나 반응은 없었습니다!”
“그럼 뭐란 말이냐!”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국왕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포기한 듯이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어트 한넬이 왕가를 배신했다는 것을.”
자조적인 목소리였다.
실망이 담긴 눈동자가 기사들과 마법사를 향했다.
어트 한넬은 왕가를 섬기는 검이었다.
제프 트리옌은 그 누구보다 그를 신뢰했다.
“기억을 조작 당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짐은 끝까지 믿었느니라.”
목소리에는 어느덧 자조 대신 통한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지그문트의 말을 들은 제프 트리옌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한 가지를 요청했다.
만약 어트 한넬이 부하 기사들을 시켜 자신을 죽이고자 한다면, 그것을 확인하고 싶다고.
“그러나 네놈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짐의 목을 베는구나.”
기사들이 숲을 지날 때, 밤말을 듣는 쥐는 머스를 조용히 빼냈다.
마리나는 저주를 걸어 머스의 외형을 제프 트리옌의 것으로 바꿨다.
마녀가 가장 먼저 가르친 저주 중 하나, ‘아르테미스의 저주’였다.
“어트 한넬뿐만 아니라, 네놈들도 역모를 꾀한 역적이다.”
기사들은 검을 뽑아 들었다.
마법사는 메모라이즈 해 뒀던 마법을 캐스팅했다.
국왕, 제프 트리옌은 오러를 다룰 수 있는 기사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 수준은 진짜배기 기사에 미치지 못한다.
무기도 없고, 페러시트에게 힘을 빨려 쇠약해진 상태.
“죽여.”
선두에 선 기사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사들이 제프를 향해 달려들었다.
제프는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옆에 서 있던 나무가 옆으로 기우뚱 휘었다.
“뭐?”
가장 먼저 달려들었던 기사는 멍하니 나무를 바라봤다.
기이할 정도로 휘어진 나무는, 탄성을 받아 기사를 내리쳤다.
쾅!
나무에 머리를 강타 당한 기사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수풀 속에서 뱀처럼 기어 나온 덩굴이 발목을 잡았다.
숲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뭐야!”
“수풀이 없는 쪽으로 모여!”
“마법사!”
마법사는 중얼거리며 마법을 캐스팅했다.
메모라이즈 해 뒀던 마법이 아니었기에,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기사들은 마법사를 노리는 덩굴을 베어 냈다.
“으악!”
“큭! 빨리! 뭐라도!”
“보채지 좀 마! 네가 마법사 하든가!”
마법사는 식은땀을 흘렸다.
대체로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마탑에 틀어박혀 있다.
그는 실전 경험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이었지만, 이런 기괴한 현상은 처음 경험해 봤다.
“월 오브 파이어(Wall of Fire)!”
마침내 마법이 완성됐다.
4서클 마법, 월 오브 파이어.
불의 벽이 공터를 둘러쌌다.
공세를 이어 나가던 식물들이 주춤했다.
기사들은 마법에 감탄했다.
“이게 마법인가!”
“대단하군. 오래 걸리는 이유가 있었어.”
“허억.”
마법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월 오브 파이어는 4서클 마법.
그가 낼 수 있는 최고위 마법을, 공터를 전부 둘러쌀 정도의 범위로 사용했다.
당연히 서클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불이 사라지기 전에, 빨리!”
“알았다.”
기사들은 검을 고쳐 잡았다.
식물들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국왕의 목을 치는 건 쉬운 일이었다.
힘이 부족했던 나머지, 마법사는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땅바닥에서 뭔가 뽈뽈 움직이는 것을 목격했다.
‘……이게 뭐지?’
물방울처럼 생긴 몸에, 깨처럼 자그마한 눈코입이 콕콕 박혀 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불 쪽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은, 물의 하급 정령들이었다.
옹기종기 모인 정령들의 머리 위로 물이 모여들었다.
치이이이이익!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다시 한번 국왕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떨어진 누군가 기사의 검을 막았다.
“이건 또 뭔……!”
단검을 든 밤말을 듣는 쥐였다.
쥐는 교묘하게 검을 흘렸다.
오러가 실린 검을 정면에서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켜!”
기사는 악을 썼다.
밤말을 듣는 쥐는 암살자.
기사에 비하면, 전면전에는 약한 면모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밤말을 듣는 쥐는 노련하게 검을 피해 내며 기사의 복부를 걷어찼다.
퍽!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기사를 밀어낼 정도는 됐다.
밤말을 듣는 쥐가 시간을 버는 동안, 불의 장벽은 점점 사그라졌다.
조급해진 기사는 밤말을 듣는 쥐를 몰아붙였다.
“전면전에서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이길 생각은 애초에 없습니다.”
밤말을 듣는 쥐는 뒤로 밀려나며, 검을 흘리기만 했다.
이윽고, 불이 꺼졌다.
수증기 속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나무줄기가 튀어나왔다.
낭창낭창한 채찍처럼 휘어진 줄기가 기사를 때렸다.
쩌엉!
막아 내긴 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힘에 다시 한번 뒤로 밀려났다.
불이 꺼지자,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웠다.
족히 수백 년은 산 듯한 거목 한 그루가 보였다.
기사는 넋을 놓고 그것을 올려다봤다.
“저건 또 뭐야……?”
거목은 뿌리를 밖으로 드러낸 채, 걸어 다니고 있었다.
나무껍질이 기묘하게 일그러져 절규하는 사람의 표정처럼 보였다.
머리 위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마리나 언니! 됐어!”
“성공이네요!”
활짝 웃은 리옐과 마리나가 하이파이브를 했다.
리옐의 힘을 불어넣은 나무에, 마리나가 원념을 부여함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사역마.
악령 나무.
나무는 기사들을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는 듯, 길게 포효했다.
쿠오오오오오!
원념의 원한이 담긴, 끔찍한 비명이었다.
마법사는 사타구니가 뜨뜻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질겁했다.
득의양양한 표정의 리옐이 척 기사들과 마법사를 가리켰다.
“나아쁜 아저씨들! 혼날 준비 해!”
* * *
단 록벨런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뿌연 시야가 흔들렸고, 머리가 핑 돌았다.
온몸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클레이모어를 들고 있는 것도 이제는 한계였다.
“네가 말하는 도련님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트 한넬이 롱소드를 털었다.
검날에 붙어 있던 피가 땅바닥에 흩뿌려졌다.
어트는 딱하다는 듯 단을 바라보았다.
“너는 여기서 죽을 것 같은데 말이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어느새 원래 말투가 돌아온 것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단은 지쳐 있었다.
고작 몇 합을 막아 냈을 뿐인데, 단은 온 힘을 다해야 했다.
반면에 어트 한넬에게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저는 죽지 않습니다.”
“방어 하나는 인정해 주지. 하지만, 방어만 해서는 이길 수 없는 법이다.”
“반격도 나름 했는데, 한넬 경이 너무 강하신 겁니다.”
“알긴 아는군.”
어트 한넬은 검을 고쳐 잡았다.
그는 레온하트의 수호자를 막지 못하고, 국왕을 납치당했다.
즉, 어느 정도 고전하는 연기를 펼칠 필요가 있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너무 약하면, 의심 받을 수도 있으니까.
“다른 한 놈은 어디 있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네놈이 도련님이라고 하는, 빠른 놈 말이다. 국왕을 지키고 있나?”
“글쎄요.”
단은 숨을 고를 틈을 벌 수 있었다.
텅 비었던 머리가 다시 돌아갔다.
이제 검 한 번 휘두를 힘이 전부였다.
하지만 두렵진 않았다.
어트 한넬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큭!”
언제 달려든 건지, 정면에서 자세를 낮추고 있는 어트와 눈이 마주쳤다.
어트는 롱 소드를 단의 목을 향해 찔러 넣었다.
일반적으로 찌르기는 막기보다 흘리거나 피하는 쪽이 정석적인 대처였다.
공격 면적이 좁은 만큼, 방어하기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의 판단은 달랐다.
‘못 피한다! 그렇다면……’
단은 지그문트와 수없이 대련하며, 적을 분석하는 버릇이 생겼다.
지그문트의 검술 패턴은 매우 다양했으며, 온갖 이상한 전법을 단에게 시험했다.
단은 머리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그문트에게 맞설 도리가 없었으니까.
‘막는 수밖에!’
단은 클레이모어를 똑바로 세웠다.
당연히 흘리기라고 생각한 어트는 멈추지 않고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단은 순간적으로 손목을 비틀어, 검날의 면 쪽이 앞을 향하게 했다.
어트의 롱소드 끝이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의 검 면을 찔렀다.
스릉!
단의 클레이모어에서 오러가 사라졌다.
어트는 그것을 인식했지만, 오러가 떨어진 것이라고 판단하고 검에 힘을 가했다.
오러가 피어오르는 롱소드는 단의 클레이모어를 깔끔하게 뚫고 들어갔다.
오러로 보호되지 않는 검을 이런 식으로 절단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카가각!
손바닥을 타고 느껴지는 반동에, 어트는 눈살을 찡그렸다.
클레이모어를 뚫고 들어간 롱소드가 단을 찌르기 직전, 단은 클레이모어에 다시 오러를 불어넣었다.
검날 전체가 아닌, 롱소드가 뚫고 들어간 부분에 오러가 집중됐다.
카가가가가각!
전진하던 롱소드가 단의 미간 바로 앞에서 멈췄다.
오러를 이용해 어트의 롱소드를 붙잡은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기예였다.
흘리거나 피했다면, 그대로 검로를 틀어 베어 냈을 것이다.
그냥 막았더라면, 클레이모어가 부서졌을 것이다.
어트조차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건, 인상적이군.”
단은 이를 악물고, 클레이모어를 틀었다.
어트가 검을 놓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단은 힘을 거의 다한 상태.
반면에 어트는 아직 힘에 여유가 있었다.
어트는 남은 손으로 검 자루를 짓눌렀다.
“하지만, 네가 죽는다는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아니. 변해.”
낯익은 목소리가 어트에게 태클을 걸었다.
짧은 점멸과 함께, 어트의 옆에서 지그문트 마이어가 나타났다.
“도련님!”
“잡고 있어.”
나는 이름 없는 검을 뽑아 들었다.
어떻게 했는지, 단은 어트의 롱소드를 오러로 붙잡고 있었다.
덕분에, 공격할 틈이 생겼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흠!”
어트는 검을 놓고 양팔을 교차했다.
기사라면 쉽게 할 수 없는 과감한 판단이었다.
건틀릿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한 모양이지만, 이쪽은 파괴력이 조금 세다.
검을 부수는 검.
콰아아아앙!
레드라인가의 무기 파괴술이 어트의 팔을 강타했다.
이름 없는 검에 부딪친 건틀릿은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어트는 멀쩡했다.
순식간에 롱소드를 회수한 뒤, 훌쩍 뒤로 물러났다.
‘무슨 반응속도가.’
마나 번으로 강화된 시력으로 똑똑히 보았다.
어트는 순간적으로 건틀릿에 오러를 부여해 강도를 높였다.
그 찰나의 순간에, 검에서 건틀릿으로 오러를 옮긴 것도 놀라울 지경인데, 모든 피해를 상쇄할 만큼의 경도를 부여했다.
“처음에 봤던 놈이군.”
“오냐. 처음에 봤던 놈이다.”
어트 한넬을 건틀릿 조각을 툭툭 털어 냈다.
언뜻 보기에는 빈틈투성이 같은 동작.
그러나 눈동자는 내게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달려들었다면 반격 당했을 것이다.
어트가 입을 열었다.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뭐냐?”
“목적이 뭐지?”
“목적이라.”
어트 한넬은 내 존재가 아주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가만히 뒀으면 황제의 손아귀에 넘어갔을 트리옌 왕가였다.
그런데 웬 가면 쓴 놈이 나타나 페러시트를 치료하고, 국왕을 구하니, 제국 편에 붙은 놈 입장에서는 거슬렸겠지.
“나는 뒤통수 때리는 놈들만 보면, 뒤통수를 때려 주고 싶어서 참을 수 없더라고.”
“배신당한 경험이 있나 보군.”
아주 제대로 뒤통수를 맞고 죽은 경험이 한 번 있었다.
어트는 롱소드를 집어넣었다.
“하지만, 사람 하나 추가됐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어트가 한 손을 높이 들었다.
나와 단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던 궁병들이 시위를 쭉 당겼다.
병사들이 창을 세우고, 기사들이 검을 들었다.
‘병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세우지 않았지.’
여태껏 어트는 단과 팽팽한 전투를 유지했다.
단이 잘 버틴 것도 있지만, 어트가 전력을 내지 않은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자신이 국왕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소드 마스터에 필적할 정도로 강해야 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이제 정당성 입증은 끝냈으니, 죽이겠다는 거냐?”
“알면 죽어라.”
어트가 손을 내리려는 순간.
“멈춰라! 어트 한넬!”
우렁찬 목소리가 왕성에 울려 퍼졌다.
왕성의 정문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등장한 남자는, 왕세자 헨드릭이었다.
“왕세자 전하?”
“여긴 위험합니다!”
“경들은 조용히 하시오! 전원, 무기를 내려라!”
어트 한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헨드릭 왕세자는 별궁에 기절한 채 구금되어 있었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한 건지, 아주 단단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사단과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헨드릭에게는 페러시트와 저주, 약까지 부여된 상태였다.
“어떻게…….”
“날 막으려거든, 네가 직접 지키고 있었어야지.”
기사단과 마법사들은 나를 막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페러시트는 신성의 협력으로 제거했다.
저주와 독을 해주, 해독하는 건 내게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죄인이 아니다!”
헨드릭 왕세자의 선언에, 병사들이 주춤주춤 무기를 내렸다.
하지만 아직은 확신치 않은지, 무기를 놓진 않았다.
귀족들도 웅성거리며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쯧.”
어트는 롱소드를 다시 뽑아 들었다.
사람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움직이려는 속셈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녹록한 사람이 아니었다.
끼익!
성문이 열리고, 한 인영이 천천히 왕성 내로 들어섰다.
빛을 반사하는 화려한 왕관과, 눈에 띄는 청록색 망토.
헨드릭 왕세자를 비롯한 귀족들이 자세를 낮췄다.
“국왕 폐하!”
국왕, 제프 트리옌이 등장했다.
뒤를 잘 보니, 가면을 쓴 리옐이 제프의 망토 속에 숨어 있었다.
접촉을 통해 기력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드는 바람에, 하마터면 다른 이들에게 들킬 뻔했다.
“헨드릭의 말이 맞다. 죄인은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아니다.”
아무리 허약한 상태더라도, 한 나라의 왕은 왕이었다.
근엄한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죄인은, 어트 한넬이다.”
국왕의 눈동자가 어트를 향했다.
분노와 원한,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의문.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낄 수 있었다.
믿고 있던 자에게 맞는 뒤통수는 두 배로 아픈 법이다.
“어트 한넬은 트리옌 왕가에 알 수 없는 병을 퍼트리고, 짐의 살해를 도모하였으며, 헨드릭 왕세자를 억류했다.”
팔베르크 제국의 소행이라는 것은 뚜렷하게 밝힐 수 없었다.
헨드릭 왕세자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증거가 너무 부족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어트 한넬이 죄인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현 시간부로, 어트 한넬을 트리옌 왕국의 역적(逆賊)으로 규정하겠다.”
어트 한넬은 내게 죄를 뒤집어씌워 고립시키려고 했다.
나는 받은 건 그대로 돌려주는 타입이다.
둘 중 하나였다면 모를까.
왕족 둘의 증언이 겹치는 상황.
상황이 반전됐다.
이제 고립된 쪽은, 어트 한넬이었다.
* * *
어트 한넬의 시선은 지그문트 마이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혼수상태로 만들어 가둬 놓았던 헨드릭이 풀려났다.
페러시트에 의해 미쳐 가던 국왕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저놈이군.’
어트 한넬의 계획은, 더 큰 계획에 잡아먹혔다.
국왕과 왕세자가 모두 적대를 표출한 상태.
상황을 반전시킬 여지는 없다.
지그문트가 말을 이었다.
“포기해. 네 부하들도 전부 제압당했어.”
“그 많은 수를 언제…….”
“쥐 한 마리가 찍찍거리니까, 금방 끝나더라고.”
지그문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믿는 구석이 있었던 어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몇 달 전 있었던 대규모 암투로, 제국의 병력이 빈민가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이 조력을 구한다면 다시 한번 왕성 탈환을 꾀할 수 있었다.
그런 어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지그문트가 핀잔을 줬다.
“빈민가 지하에 박혀 있던 놈들한테 일러바치려고?”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안 거지?”
“에이, 소드 마스터 체면이 있지. 좀 많이 추한 거 아니냐?”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데 어떻게 모르냐.”
지그문트는 그를 나무라듯 핀잔을 줬다.
어트 한넬을 고개를 들었다.
지그문트와 단을 향하던 무기의 끝은 어느새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 외통수군.”
“잘 아네.”
어트는 롱소드를 꼬나 쥐었다.
오러가 피어올랐다.
지그문트는 목 뒤를 스치는 섬뜩한 감각에, 몸을 긴장시켰다.
기세가 달라졌다.
헨드릭 왕세자가 명령을 내렸다.
“쏴라!”
어트를 향해 수백 발의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춘 어트가 땅을 박찼다.
파바바바박!
어트가 있던 자리에 화살이 연달아 박혔다.
가공할 정도의 속도로 나아간 어트는 한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트의 목표를 가장 먼저 알아 차린 한 사람.
지그문트가 소리쳤다.
“국왕 폐하를 지켜!”
제프의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어트 한넬은 확실히 뚜렷한 강점이 없는 기사다.
요하네스 레드라인과 같은 파괴력도, 라스 마이어 같은 속도도 없다.
그러나 어트 한넬은 소드 마스터.
기본적으로 평범한 기사들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괴물이었다.
“비켜라.”
제프는 기사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기사들이 미처 반응하지도 못한 속도.
오러를 머금은 롱소드가 갑옷을 잘라 냈다.
“막아아!”
수십의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상대한다기보다는, 몸으로라도 틀어막겠다는 일념이 느껴졌다.
어트는 그들을 모조리 베어 냈다.
기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커헉!”
“억!”
국왕과 왕세자의 등장은, 확실히 어트로선 예상치도 못한 수였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어트 한넬이 소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간과했다고 판단했다.
‘국가급 전력 앞에 무방비 상태인 왕이 모습을 드러낸다라.’
호위랍시고 옆에 기사 몇 명을 붙여 둔 모양이지만, 적어도 여기 있는 기사들만으로 어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아주 약간의 지체는 있었을지언정,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약간의 지체가, 틈을 만들었다.
빛이 점멸했다.
“안 되지!”
지그문트는 이름 없는 검을 휘둘렀다.
블링크(Blink)를 통해, 정확히 어트 한넬의 측면으로 이동했다.
옆구리 안쪽을 깊게 파고드는 베기.
지그문트와 어트의 눈이 마주쳤다.
“내가 이런 잔재주를 막지 못할 것 같았느냐.”
어트 한넬은 지그문트 마이어가 마법을 쓰는 걸 한 번 본 적 있다.
어디서 파고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충분히 경계를 하고 있었다.
검을 거꾸로 잡고 세로로 세워, 이름 없는 검을 막았다.
쩌엉!
손목을 때리는 묵직한 감각에, 어트의 인상이 구겨졌다.
건틀릿을 부쉈을 때 대충 예측했던 바였지만.
‘상대하기 까다로운 검술이지만……’
레온하트 왕국의 소드 마스터, 요하네스 레드라인의 검술, 검을 부수는 검.
무기 파괴에 특화된 검술인 만큼, 그 파괴력은 어트에게도 와닿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그문트의 오러는 아직 익스퍼트급이었다.
‘막을 수 있다.’
돌연 지그문트가 자세를 크게 낮췄다.
한쪽 손바닥이 땅을 짚었다.
정면에서 들려오는 파공음에, 어트의 눈이 돌아갔다.
‘큭, 이건 또 무슨……!’
파일 벙커(Pile Bunker) 변환 마법.
리버스 아이언 메이든(Reverse Iron Maden).
거대한 송곳 수십 개가 어트의 사방에서 솟구쳤다.
콰앙!
어트는 검을 휘둘러 송곳들을 부숴 버렸다.
하지만, 조금 당황한 나머지 동작이 컸다.
‘마법 사용 속도가 어찌!’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지그문트가 푸른 숨을 뱉었다.
‘저건.’
이름 없는 검에 오러가 깃들어 있었다.
어트는 그것이 단순한 오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나로 추정되는 푸른 기운이 섞여 있었다.
뭔지 알 수 없는 빛 알갱이들이 검날에서 투둑 투둑 튀었다.
‘피해야 한다!’
기사의 날카로운 기감이 경고했다.
이름 없는 검 안에서 일렁이는 힘의 규모는, 어트가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설령 막는다고 해도, 큰 낭패를 볼 것이 분명했다.
피해야 했지만, 어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지그문트가 리버스 아이언 메이든을 사용할 때, 땅을 뒤집어 발을 묶었기 때문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검이 어트 한넬의 롱소드와 격돌했다.
* * *
나는 일찍이 신성에게 언질을 들은 바 있다.
오러와 마나를 융합시켜라.
언질을 듣기 전부터 몇 번이고 시도한 일이다.
오러와 마나가 반발하는 성질을 이용해, 폭발을 일으킨 적이 있다.
하지만 이는 신성이 원했던 융합과는 많이 달랐다.
‘두 힘은 서로 상극이다. 이걸 어떻게 섞으라는 건지, 원.’
애초에 두 힘이 섞일 수 없기에, 따로 몸속에서 분리한 것이다.
이제 와서 그것을 합치라니.
신성이 터무니없는 말을 했을 리도 없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던 도중.
지그문트는 의외의 인물에게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바로 마리나였다.
‘마리나는 어떻게 두 가지 힘을 동시에 받아들인 거지?’
마녀의 원념과 리옐의 신성.
상극이라고 부를 만한 두 힘을 동시에 얻게 된 마리나다.
마리나는 별문제 없이 두 종류의 힘을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선천적인 축복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쿼터엘프인 동시에, 마녀의 핏줄을 이어 받았으니까?’
생각해 볼수록 이상했다.
아무리 선천적인 그릇이 완벽하다고 하나, 두 힘의 충돌을 피할 수 있을까.
심지어 마리나는 지그문트처럼 의도적으로 힘을 분리한 것도 아니었다.
-……어?
-도련님, 왜 그러세요?
-나 잠깐 뭐가 생각나서. 연구 좀 하러 가야겠다.
나는 내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성은 자신의 몸속 중앙에서 오러와 마나를 갈라놓고 있다.
두 힘 모두와 직접적으로 맞닿고 있음에도, 전혀 반발이 없었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오러와 마나, 두 힘을 어떻게 뒤섞을까 궁리만 했지.
두 힘에 반발이 적은 신성을 융합의 촉매로 사용할 생각을 못한 것이다.
몇 번의 폭발이 있었고, 마이어가를 통째로 날려 버릴 뻔했다.
그 끝에, 오러와 마나를 융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오러와 마나를 반씩 섞어 이름 붙이길.
아우나(Aunar).
* * *
“크윽!”
내 오러 수준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다.
소드 마스터와 두 단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는 검을 모르는 자들의 생각이다.
익스퍼트와 마스터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다.
내 오러는 어트 한넬의 오러를 결코 뚫어 낼 수 없었다.
카가가가각!
하지만, 내 검을 두르고 있는 것은 오러가 아니었다.
오러와 마나가 한데 뒤섞인, 힘의 소용돌이.
그것을 신성으로 안정화시킨 것이 아우나다.
내가 으레 사용하던 마나 폭발의 파괴력을 압축, 강화한 것이다.
그 파괴력은 소리 없는 폭풍과도 같았다.
캉!
부러진 롱소드의 파편이 하늘을 날았다.
어트의 검이 부러진 것이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대로 빈틈을 파고들어, 검을 대각선 방향으로 그었다.
서걱!
어트 한넬이 순간적으로 몸을 한계까지 틀었다.
원래 목표했던 것과 달리, 이름 없는 검은 어트의 어깻죽지를 베어 내는 데 그쳤다.
치명상은 입히지 못했다.
내가 검로를 틀기 전에, 어트는 자세를 고치려고 했다.
틈을 줄 생각은 없었다.
“흡!”
헨드릭이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앞세워 몸통박치기를 감행했다.
깊게 파고든 상태에서 감행한 몸통 박치기.
예측하기도, 대처하기도 어려운 수였다.
푸시(Push)의 반동을 받아, 상반신을 밀어낸다.
터엉!
어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평범한 기사였다면 그대로 넘어져서 결착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어트 한넬은 오러만 소드 마스터인 것이 아니었다.
어트는 과감하게 땅을 발로 찼다.
‘이런, 미친!’
땅을 짚고, 뒤로 한 바퀴 돌아 거리를 벌렸다.
그 와중에 기사가 떨어트린 검까지 한 자루 챙겼다.
그래도 국왕에게 돌진하는 것을 저지하는 건 성공했다.
곧장 마법을 캐스팅하려는데, 머리가 핑 돌았다.
“어?”
자세가 무너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었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런 기술을 쓰고 몸이 멀쩡할 거라고 생각했나?”
아우나는 내가 가진 모든 힘을 이용하여 구성하는 것이다.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당연히 실전에서 사용했을 때 반동이 오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급속도로, 강력하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길동무는, 네가 되겠군. 도련님.”
어트가 내게 빠른 속도로 돌진해 왔다.
뒤에는 국왕이 있어, 피할 수도 없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발로 땅을 디뎠다.
마나 번(Mana Burn)을 한계까지 사용해서 버텼다.
‘조금만!’
오러나 마나처럼 익숙한 힘이 아니었다.
미완성된 힘에 가까운 만큼, 아우나를 다시 발현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새 내 앞에 다다른 어트가 검을 내리그었다.
그 순간, 검은 형체가 나타나 어트의 검을 붙잡았다.
‘저주?’
마리나의 저주였다.
그러나 마리나의 저주는 아직 부족했다.
검을 붙잡은 건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형체는 오러에 찢어져 소멸했다.
“도련님!”
옆에서 단이 치고 들어왔다.
리옐의 힘으로 기력을 어느 정도 되찾은 모양이었다.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지,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올려 베었다.
콰아앙!
쌓여 있던 충격이 폭발했다.
어트의 검은 그 충격마저 베어 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속도를 늦추는 데 성공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름 없는 검이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서걱!
결착이 지어졌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국왕 제프 트리옌이 기력을 되찾음에 따라, 트리옌 왕국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헨드릭 왕세자의 적극적인 조력으로, 어트의 편에 섰던 귀족들은 전부 작위를 잃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에게 씌워졌던 누명도 벗겨졌다.
당연히 수배도 풀렸다.
“그들을 국가 귀빈으로 대우하겠다. 이견은 받지 않겠다.”
트리옌 왕가는 지그문트의 공적을 알리고, 그를 국빈으로 대우하겠다고 선포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국왕의 목숨을 두 번이나 지켜 냈다.
어트 한넬을 제압하는 데 지대한 공언을 한 것은 물론, 헨드릭 또한 구해 냈다.
그래서 새롭게 별칭이 하나 붙었다.
“아빠는 트리옌의 구원자야!”
“으.”
트리옌 왕성의 귀빈실.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지그문트가 몸서리를 쳤다.
팔뚝에는 소름이 돋아나 있었다.
지그문트의 배를 차지하고 누워 있던 리옐은 해실해실 웃었다.
“그런 오글거리는 별명은 누가 짓는 건지 모르겠군.”
“그럼 레온하트의 수호자야!”
“그것도 자칭할 때마다 버겁다. 하지 마라.”
“왜 그러세요? 둘 다 멋지기만 한데요.”
옆에 앉아 사과를 깎던 마리나가 거들었다.
클레이모어를 살피던 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옐은 마리나에게서 사과 조각을 받았다.
제 입으로 가져가는 대신, 지그문트의 입에 쏙 넣었다.
지그문트는 얌전히 사과를 우물거렸다.
“멋지긴. 에라이.”
“이렇게 대접도 해 주시고, 정체도 밝히지 않으셨잖아요.”
“상도덕이라는 게 있으면, 그건 당연한 거 아니겠냐.”
지그문트 마이어는 어트 한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모든 힘을 쏟아부은 탓에 혼절한 것이다.
국왕과 왕세자 덕분에 정체는, 끝까지 감출 수 있었다.
“기절하셨을 때,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동감입니다. 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호들갑 좀 떨지 마. 정말 별것 아니었으니까.”
하루 정도 푹 잔 지그문트는 금방 기력을 회복하고 눈을 떴다.
그러나 두 부하에게 쓴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너무 자신을 혹사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심지어 리옐은 펑펑 우는 바람에, 지그문트는 얌전히 잔소리를 감내해야 했다.
‘아우나는 아직 완성된 힘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폭발적인 파괴력을 내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힘의 소모가 극단적이었다.
아직 아우나라는 개념을 완벽히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그문트는 리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당분간 아우나는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배시시 웃는 리옐의 눈가는 아직도 조금 붉었다.
‘신성도 뭐라고 쫑알쫑알하고.’
걱정을 샀는지, 신성도 지그문트를 타박했다.
몸에 가는 부담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장 소드 마스터에게 베이게 생겼는데,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지그문트는 자신의 몸을 꽤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때때로 물불 안 가리는 면이 있었다.
“단, 클레이모어는 좀 어떠냐?”
“그대로입니다.”
어트와 공방을 주고받을 때, 단의 클레이모어 검날에 구멍이 생겼다.
깔끔하게 뚫려 검날이 산산조각 나는 것은 면했지만, 충격을 흡수해서 반격하는, 클레이모어의 능력이 사라져 버렸다.
지그문트를 지킬 때 사용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마 그때 부하를 견디지 못한 것 같다.”
“설마 고칠 수 없는 겁니까?”
“알아보마.”
“……감사합니다.”
단은 클레이모어에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훈련이 끝난 뒤에 애지중지 손질을 하곤 했다.
여간 속상한 것이 아닌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하멜에는 언제까지 계실 예정입니까?”
“좀 쉬다가, 어느 정도 힘이 나는 대로 떠나야지. 솔직히 이런 대접은 부담스러워.”
“그렇군요. 도련님이라면 뭔가 익숙하실 줄 알았습니다.”
“익숙하긴 하지. 다만, 트리옌 왕가에서 이쪽에 부담을 줄 것 같단 말이야.”
“왕가에서요? 설마요.”
단과 마리나는 트리옌 왕가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접도 대접이었지만, 여러모로 그들을 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그문트의 생각은 달랐다.
“어트 한넬은 트리옌 왕국의 최고 전력이야.”
“알고 있습니다. 트리옌 왕국은 규모가 크지만, 소드 마스터는 하나뿐이었죠.”
“그럼, 그 빈자리를 새로운 인재로 채우려고 하지 않겠냐?”
“일리는 있습니다만, 도련님께선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아닙니까?”
“이제는 트리옌의 구원자이기도 하지.”
“아.”
덜컥 작위를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공적을 세웠다.
지그문트가 왕가의 페러시트를 아직 해결하지 않은 이유도 그것이었다.
이쪽에 페러시트 제거라는 패가 있는 이상, 섣부른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몸이 괜찮아지는 대로 레온하트로 돌아갈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리옐은 지그문트의 입속에 사과를 한 조각 더 집어넣었다.
지그문트는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신분으로 오길 잘했군.’
트리옌 왕가는 레온하트에 빚을 진 셈이 됐다.
이는 레온하트 왕국이 훗날 트리옌 왕국과 친교를 다질 때 이점이 될 것이다.
당장 동맹을 제안하더라도, 트리옌은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엘비아와의 동맹을 맺은 레온하트 왕국이다.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일이었다.
‘제프랑 헨드릭도 일단은 우호적인 것 같으니까.’
교섭은 루터 레온하트가 알아서 할 것이다.
내가 개입할 수도 있었지만, 더 이상 귀찮은 일은 사양이다.
이 정도 일을 벌였으면 족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단이 일어서려고 했지만, 마리나가 제지했다.
“제가 나가 볼게요. 계세요.”
가면을 쓴 마리나가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내밀더니, 누군가와 대화를 나눴다.
아마 말을 전달하는 시종인 것 같았다.
대화를 마친 마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뭐래?”
“국왕 폐하께서, 도련님을 찾으신다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