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69/134)

4

끔찍한 혼종

“허억, 허억.”

“내가 미안하다. 괜찮냐?”

“도련님, 저는 괜찮, 우웁.”

하멜의 빈민가에 도착한 나는 괴로워하는 단의 등을 두드려 줬다.

단이 멀미가 심하다는 것을 깜빡했다.

텔레포트를 유독 힘들어하던 단이다.

요즘 곧잘 마차를 타길래 잊고 있었는데, 이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

밤말을 듣는 쥐의 수하들은 나와 단을 바라보았다.

잘 훈련 받은 암살자답게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어쩐지 못미더운 눈치였다.

앞서 갔던 정찰대가 밤말을 듣는 쥐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이윽고 밤말을 듣는 쥐가 정보를 전달해 줬다.

“백 남짓한 무장 세력들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전부 훈련 받은 자들 같다고 합니다.”

“위치는?”

“혹시 보이실지는 모르겠지만, 저 멀리, 붉은 간판의 작은 노점상이 있습니다.”

“어. 보여.”

밤말을 듣는 쥐는 눈을 깜빡였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왜 보이십니까?”

“보이면 안 되나?”

“밤눈이 굉장히 밝으시군요.”

“내가 시력이 좀 좋아.”

마나 번(Mana Burn)으로 강화된 시력에 밤눈(Night Vison)까지 썼다.

빈민가 전체가 훤히 보였다.

심지어 쥐가 말한 무장 세력으로 보이는 놈들도 몇 명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인근에 잠복하고 있는 인원이 다섯에…….”

밤말을 듣는 쥐는 배치된 인력의 위치와 인원까지 정확히 얘기해 줬다.

나는 지형지물과 위치를 머리에 담았다.

어두운 골목이나 숨을 만한 곳이 지천에 깔려 있는 곳이 이곳, 빈민가다.

기습에 유의할 필요가 있었다.

“예상 피해 규모는?”

“저것뿐이라면, 1분 내로 무혈입성이 가능합니다.”

“매복이 있을 확률은?”

“무조건 있습니다. 전력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아까 말한 노점상 쪽?”

“그렇습니다.”

“이쪽은 매복을 맡지.”

지붕 위나, 하수구 아래, 심지어는 쓰레기 더미 안쪽까지.

놈들은 기상천외한 곳에서 퍼져 있었다.

그것들은 암국의 암살자들에게 맡긴다.

밤말을 듣는 쥐는 조금 고민했다.

“혹시, 조용히 처리 가능하시련지요?”

“쉽지.”

“신호 드리겠습니다.”

밤말을 듣는 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암살자들이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나는 나아진 단과 함께 빈민가로 들어섰다.

무언가 우리를 덮치려 한 순간.

“컥!”

“억!”

위에서 단말마가 들려왔다.

대기하고 있던 쥐의 암살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암국의 암살자들은 살벌한 뒷세계에서도 최정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팔베르크 제국 측의 병력도 만만치 않았지만.

밤말을 듣는 쥐 직속이라면, 당연한 결과다.

“멀미는?”

“그럭저럭 괜찮아졌습니다.”

“좋아.”

단과 나는 밤말을 듣는 쥐가 말한, 붉은 간판의 노점상 앞으로 갔다.

퍽 멀쩡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무기를 뽑아 들었다.

“누구냐.”

나는 놈들의 무기를 살폈다.

검이나 창 등 제각각 다양한 무기를 들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모두 제국의 정규군에게 주어지는 양산품이라는 것.

실랑이 할 시간이 아까웠다.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무기를 뽑은 남자가 낮은 음색으로 경고했다.

나는 손뼉을 쳤다.

마나가 노점상 일대를 감쌌다.

무향실(Anechoic Room).

남자는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말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사일런스(Silence)를 변형한 마법이다.

일대의 소리를 완전히 차단했다.

뭘 하든 아무런 소리가 나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검 뽑는 소리도 안 들리네.’

검날이 검집을 스치며 나는 쇳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남자가 수신호를 보냈다.

나와 단을 가리키더니, 제 목을 긋는다.

저건 나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둘 다 죽여라.’

상대는 다섯 남짓.

명령을 내린 남자를 포함해서, 검을 든 셋이 우리 쪽으로 달려들었다.

검날 위로 떠오르는 오러.

셋 모두, 기사였다.

‘단.’

단의 등에 손을 올렸다.

내 의도를 간파한 단이 앞으로 나섰다.

그사이, 나는 기사들의 뒤편을 확인했다.

‘하나는 마법사, 다른 하나는 마법사의 호위, 궁병이군.’

아주 기본적인 전술이다.

전위가 시간을 버는 동안, 마법사가 공격 마법을 캐스팅한다.

마법사들은 마법 하나를 캐스팅하는데 몇 초, 길게는 몇 분을 소모한다.

여태껏 발레리아나 렘브란트 같은 탑주급 마법사들을 많이 봐서 그렇지.

저게 보통이다.

‘기사들은 소드 익스퍼트 초급 정도, 마법사는 3서클인가.’

그렇게 약하다고 부를 수는 없는 전력이었다.

환생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면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귀여운 수준이다.

더미(Dummy).

블링크(Blink).

공간을 이동하는 동시에, 원래 있던 자리에 더미(Dummy)를 세웠다.

동시에, 마법사 옆에 있던 궁병이 화살을 쐈다.

화살은 더미의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

나는 궁병의 등 뒤로 이동한 뒤, 놈의 발목을 걸었다.

소리가 없었기에, 궁병이 엎어졌음에도 마법사는 눈치채지 못했다.

마법사가 캐스팅한 마법은 파이어 볼(Fire Ball).

아주 기본적이고, 효과적인 3서클의 공격 마법이었다.

‘단은…….’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그렇지, 단은 기사 셋과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기사들은 단의 방어를 뚫어 내기는커녕, 오히려 역공까지 허용하고 있었다.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마법사의 목덜미를 잡고, 뒤로 당겼다.

불시에 뒤를 잡힌 마법사가 벌러덩 넘어졌다.

‘파이어 볼 하나 쓰는데 이렇게 오래 걸려서 쓰나.’

아마 흑탑 소속인 것 같은데, 렘브란트도 참 물러 터졌다.

이런 걸 전투 마법사라고 보내다니.

나는 똑같이 파이어 볼을 사용해서 마법사를 침묵시켰다.

퉁!

들리진 않았지만, 공기가 터지는 듯한 느낌이 얼굴에 와닿았다.

단이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발동시킨 것이다.

다행히 조금 일찍 발동한 덕분에 모인 충격이 크진 않았지만.

갑옷 없는 기사 셋을 기절시키기에는 차고 넘쳤던 모양이다.

짝!

손뼉을 쳐서 무향실을 해제했다.

먹먹했던 귀에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밤말을 듣는 쥐와 암살자들이 땅에 내려와 있었다.

밤말을 듣는 쥐는 조용히 감탄했다.

“인상적이군요.”

“뭐가?”

“전면전에서 소리를 전혀 내지 않은 것이 말입니다. 마도구입니까?”

“영업 비밀이야.”

* * *

밤말을 듣는 쥐는 노점상 밑의 헝겊을 치웠다.

철문이 드러났다.

암살자 둘이 힘을 합쳐 철문을 치웠다.

밑으로 가는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하여튼 무슨 바퀴벌레도 아니고, 지하를 참 좋아한다.

암살자들을 위에 대기시키고, 셋만 진입하기로 했다.

“안에 구조는 어떻게 되지?”

“구조랄 것도 없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면 거대한 공동이 있을 뿐이니까요.”

“원래 암국의 하멜지부가 이곳이었나?”

“그렇습니다.”

“그런 정보를 쉽게 말해도 되는 건가?”

“하멜을 탈환하면 위치를 옮겨야겠지요. 가시죠.”

방어가 가장 탄탄한 단이 선두에 섰고, 내가 바로 뒤를 따랐다.

그 뒤로 밤말을 듣는 쥐가 따라왔다.

계단이 상당히 좁았기에, 이렇게 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인공적으로 심어 둔 건지, 발광 이끼가 천장을 따라 피어 있어 어둡지는 않았다.

‘이상하군.’

하멜의 빈민가에 있던 전력은 그리 약하지 않았다.

문제는, 암국의 전력이 그것을 압도적으로 상회했다는 것이다.

암국 전체가 나선 것도 아닌, 밤말을 듣는 쥐의 직속 부하들만 나섰다.

그런데 우리가 처리한 것이라고는 꼴랑 다섯.

‘이게 전부였다면, 하멜을 탈환 당한 쪽이 오히려 이상한데.’

물론 어트 한넬이라는, 자그만치 소드 마스터씩이나 되는 적이 있긴 하지만.

어트 한넬은 여태껏 숨어 있었다.

밤말을 듣는 쥐도 어트 한넬이 배신했다는 것을 몰랐던 눈치였으니까.

그렇다면, 왜 암국은 하멜에서 무기력하게 패배했는가.

돌연 눈앞에서 빛을 발하는 페어리가 나타났다.

신성이었다.

-무슨 일이야?

-대기.

신성은 앞으로 훨훨 날아갔다.

코를 킁킁거리는 것이, 뭔가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나는 앞서 가던 단의 어깨를 두드리고 수신호를 보냈다.

계단을 내려가던 일행이 잠시 정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상을 팍 찡그린 신성이 돌아왔다.

-왜 그래?

-냄새.

-무슨 냄새?

-마족.

마족.

일찍이 하멜에는 마족이 출현한 적이 있다.

최면을 걸어 사람을 조종하는 놈이었다.

요안을 비롯한 리에이트 교국의 집행자들이 고전하던 기억이 났다.

‘시노드 교구에서 봤던 그놈도.’

클레이먼 주교에게서 부패한 성배를 받아, 기어코 준귀족급 마족 몰렉을 소환했던 놈.

놈도 아마 이곳, 트리옌에서 기어 나왔을 확률이 높았다.

팔베르크 제국과 마계가 연관이 된 만큼, 트리옌에도 그 마수가 뻗어 있었다.

‘제국에는 아예 마계와 연결된 통로, 심연이 있었지.’

정확히는 마계가 아닌 틈으로 이어진 통로였다.

그렇기에, 귀족급 마족이 기어 나오는 대참사가 벌어지진 않았다.

틈은 아주 좁은 공간의 균열이다.

존재 자체가 거대한 것들은 그 틈을 쉽게 지나오지 못한다.

‘죽음이 그랬듯이.’

하늘에서 빠져나오려던 죽음이 떠올랐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족은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신성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따뜻한 온기가 온몸으로 퍼졌다.

-조심.

-오냐.

신성이 사라졌다.

나는 일행에게 마족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단은 마족과 마주한 경험이 몇 번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밤말을 듣는 쥐는 마족을 본 경험이 없는 모양이었다.

조금 긴장한 듯 숨을 들이쉬었다.

이윽고, 계단이 끝났다.

콰앙!

단이 클레이모어를 세로로 세워 뭔가를 막았다.

누군가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단은 혀를 차고 검을 튕겨 냈다.

터엉!

그 틈을 타서, 좁은 계단을 빠져나왔다.

단에게 검을 내지른 것은 헐벗은 남자였다.

검은 씨앗이 몸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페러시트에 기생 당한 것이 확실했다.

‘폭주? 다르다.’

단순한 폭주가 아니었다.

고개를 까딱이자, 밤말을 듣는 쥐의 형체가 사라졌다.

고속으로 남자에게 접근한 밤말을 듣는 쥐는 허리에서 단도를 뽑았다.

서걱!

단이 무심코 감탄할 정도의 깔끔한 솜씨.

남자의 목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그러나 남자의 팔이 불현 듯 밤말을 듣는 쥐의 어깨를 잡아챘다.

“무슨!”

밤말을 듣는 쥐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목이 날아간 놈이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듀라한도 아니고.

‘이거 혹시.’

뭔가 떠올랐다.

불사의 잔재, 아그나의 고기를 먹고 괴물이 된 인간들.

죽어도 죽지 않으며, 상식을 벗어난 괴력을 발휘하는 것들.

‘불사자?’

놈은 우악스럽게 밤말을 듣는 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팔이 뒤틀릴 판이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워터 폴(Water Fall).

불사자의 머리 위로 물이 쏟아졌다.

뜨거운 무언가에 물이 닿은 듯,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크아아아악!

놈은 괴로워하며 몸을 뒤틀었다.

그 틈에 겨우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밤말을 듣는 쥐가 거리를 벌렸다.

자신의 어깨를 주물러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며, 인상을 팍 찡그린다.

“지그문트 님, 저건.”

“글쎄다.”

불사자에 페러시트를 심어 넣었다.

이교도와 마족의 합작이라고 해야 할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끔찍한 혼종?”

시야를 가린 하얀 수증기 속에서, 놈의 모습이 드러났다.

물에 닿으면 맥을 못 쓰는 아그나와 달리, 불사자는 물에 어느 정도 저항한다.

이미 네르갈에서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

아마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덕분이리라.

과연 놈은 괴로워할 뿐, 멀쩡히 서 있었다.

“비켜 봐.”

단을 옆으로 밀어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내가 나서는 쪽이 편했다.

이름 없는 검을 뽑아 들었다.

“후우.”

마나의 잔재를 내뱉었다.

아직 마나 번(Mana Burn)이 활성화된 상태였다.

놈이 본능적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머리 위로 살짝 드러난 페러시트가 보였다.

‘신성으로 페러시트를 제거한다고 한들…….’

이미 손쓰기에는 너무 늦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자아를 잃은 괴물이었다.

어느새 밤말을 듣는 쥐가 잘라 버렸던 머리까지 붙어 있었으니까.

발끝으로 놈의 관자놀이를 내리찍었다.

쩌억!

옆으로 넘어간 놈은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오러가 검날 위로 피어올랐다.

검을 부수는 검.

콰아아아아앙!

잘 벼려진 검조차 산산조각 내는, 레드라인가의 무기 파괴술.

거기에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오러까지 들어갔다.

아무리 육체가 강화된 불사자라고 한들,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놈은 그대로 곤죽이 되어 버렸다.

워터 폴(Water Fall).

그 와중에도 다시 재생하려고 꿈틀거린다.

사체 위로 물을 흘려 넣었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놈이 침묵했다.

나는 이름 없는 검을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걸로 제국이 이쪽에 있다는 것은 확인됐군.”

“페러시트와 불사자, 이것보다 확실한 물증은 없겠군요.”

“잠깐 대기하시죠. 앞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정찰을 나갔던 밤말을 듣는 쥐가 돌아왔다.

표정으로 드러나진 않았으나, 안색이 썩 좋지는 않았다.

“어떻던가?”

“제가 알던 지부와 다릅니다. 실험 시설로 개축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손으로 벽을 쓸었다.

암국의 시설답게, 잘 만들어져 있었다.

깊이까지 고려하면 틀을 잡는 데만 적게는 수개월, 많게는 수년이 걸렸을 것이다.

팔베르크 제국 쪽에서도 이처럼 잘 만들어진 지하 공간을 버리긴 아까웠던 모양이다.

“실험이라면, 어떤 것?”

“인체 실험입니다.”

“최악이군.”

실험 내용은 대충 예상이 갔다.

앞에서 본, 페러시트가 심어진 불사자.

즉 페러시트와 불사자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었다.

‘페러시트를 제어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내가 진행했던 ‘적응하는 갑옷’ 실험의 실험체, 17호가 그 예시다.

만약 불사자가 페러시트에 의해, 명령을 내린 대로 완벽히 통제된다면.

“불사의 군대라도 만들 셈인가.”

“끔찍하군요.”

간단한 방법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놈들이다.

저런 것들이 군대를 이뤄, 전쟁에 투입된다면, 안 그래도 강력한 전력을 지닌 팔베르크 제국에 날개를 달아 주는 셈이다.

“몇이나 있던가?”

“다행히 많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100은 될 것 같더군요.”

“양산 단계는 아니라는 거군.”

이 실험은 아주 극비리에 이뤄지고 있었다.

제국 내에서 이런 실험을 벌였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대참사다.

서대륙의 모든 국가를 적으로 돌리게 될뿐더러, 명분까지 쥐여 주게 된다.

그러니까 다소 불편하더라도 트리엔에서 이 실험을 진행 중일 터.

‘하멜에 오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어.’

트리옌 장악에 더불어,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그런 것이 100이 넘는다면, 아무리 나라도 조금 시간이 걸린다.

“일이 좀 귀찮아지겠는데, 추가 보수를 줄 테니……”

“아닙니다.”

밤말을 듣는 쥐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쥐를 바라보았다.

쥐는 단검을 뽑아 들었다.

“제국 병력의 몰살은, 암국의 일이기도 하니까요.”

“따로 움직이자는 말인가?”

“아니요. 힘을 합치자는 얘기지요. 괜찮으십니까?”

“방향을 고용 대신 협력으로 잡으면 나야 나쁠 게 없지.”

굳이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다.

밤말을 듣는 쥐 정도면 알아서 잘할 거다.

과정이 갈릴 수는 있어도, 목표는 같다.

* * *

휴이는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좁디좁은 철제 동물 우리에 사람 다섯이 뒤섞여 있었다.

처음 보는 여자, 부부로 보이는 두 노인, 심지어는 어린아이까지.

그들은 무기력하게 자신의 차례가 안 오길 기도하고 있었다.

카아아아아악!

잡혀 있는 동안, 휴이는 몇 번이고 정체불명의 핏덩어리를 먹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 중 열에 아홉은 몸이 끓어오르더니,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죽었다.

소수는 죽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났는데, 그들은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곧 내 차례군.’

휴이는 동물 우리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우리에 들어왔던 순서대로 실험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휴이의 예상이 맞다면, 다음은 휴이의 차례였다.

공포와 무기력함이 온몸을 감쌌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반항하는 것보단, 차라리 응하는 쪽이 나아.’

반항한 자의 끔찍한 말로를 수도 없이 봐 왔던 휴이다.

그는 차라리 살 확률이 있는 쪽을 택했다.

휴이는 동물 우리 속 사람들 중 가장 건강했고, 그만큼 살 확률도 높으리라 판단했다.

“다음.”

기계적인 부름에, 허리에 검을 찬 두 남자가 동물 우리를 열었다.

그리고 휴이의 양 어깨를 붙잡더니, 연구자 앞으로 끌고 갔다.

휴이는 연구자 앞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매번 사람들에게 핏덩이부터 먹이던 연구자다.

그는 종이에 뭔가를 기록하더니, 휴이에게 검은 씨앗을 내밀었다.

“입 벌려.”

휴이는 조금 주저했다.

순순히 응하기로 했어도, 저것을 삼키는 건 꺼려졌다.

입을 벌렸다가, 본능적으로 입이 닫혔다.

연구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에라이, 니들이 인간이냐?”

나무라는 듯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이는 어느새 여자 뒤에서 나타난 가면 쓴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가면을 쓴 지그문트였다.

빡!

지그문트의 손바닥이 연구자의 뒤통수를 때렸다.

단순히 후려쳤을 뿐인데, 연구자의 머리가 급속도로 내려갔다.

쾅!

연구자는 그대로 얼굴을 지면에 처박고 기절했다.

뒤통수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휴이를 끌고 갔던 두 남자가 검을 뽑아 들었다.

지그문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웬 놈이냐!”

“그런 거 말고, 좀 참신한 대사 없어?”

휴이는 경악했다.

두 남자의 검에서 피어오르는 오러.

둘은 단순히 검을 찬 무뢰배들이 아니었다.

오러를 다루는 기사들이었다.

“끄억!”

지그문트는 휴이가 앉아 있던 의자를 발로 넘어트렸다.

휴이도 자연스럽게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동시에, 기사들의 검이 휴이가 있던 곳을 베었다.

“병력 배치를 이따위로 한 걸 보니, 실험체들만 믿고 있었나 보군.”

“혀가 길구나!”

기사는 휴이를 넘어서 지그문트에게 달려들었다.

지그문트는 검을 뽑아 들었다.

휴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기사 둘의 협공을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다.

카캉!

지그문트의 검이 빠르게 두 기사의 검을 내리쳤다.

동시에, 기사들의 검이 부서졌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두 기사의 입이 벌어졌다.

빠박!

동시에, 지그문트는 둘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쾅! 쾅!

두 기사의 머리가 연구자의 맞은편에 처박혔다.

마찬가지로 땅에 박힌 머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지그문트는 손을 탁탁 털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휴이는 경악했다.

‘무슨 사람이 저렇게 세?’

* * *

“이거 아무래도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네 도련님이 발의한 작전이라네. 난 말렸어.”

단과 밤말을 듣는 쥐는 달렸다.

둘은 상당히 빠른 편이었지만, 쫓아오는 쪽도 만만치 않았다.

100여 마리의 불사자들.

페러시트에 의해 폭주한 놈들은 좀비처럼 둘을 쫓아오고 있었다.

‘잡히면 죽는다!’

단은 확신했다.

밤말을 듣는 쥐는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가볍게 달렸지만.

단은 아무래도 암살자가 아닌 기사다 보니, 그에 비해 느렸다.

전력으로 달려야만 했다.

다행인 점은, 단도 어찌어찌 잘 도망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매일 아침 하던 달리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저쪽입니다.”

살짝 앞장 서 있던 밤말을 듣는 쥐가 돌연 방향을 틀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앞에는 길 대신 벽이 있었다.

단은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벽에 부딪쳤다.

“큭!”

어깨로 부딪쳐 충격을 최소화한다.

손으로 벽을 짚고, 밀어내듯 방향을 틀어 달렸다.

앞으로 나감과 동시에, 불사자들이 벽에 부딪쳤다.

쾅! 쾅! 쾅!

불사자들도 둘을 따라 방향을 틀었다.

단과 쥐는 커다란 공동으로 나왔다.

밤말을 듣는 쥐는 모습을 감췄다.

단은 공동의 반대쪽 벽으로 달렸다.

미리 파 둔 땅굴이 보였다.

‘저기로 들어가기만 하면……!’

단은 전력을 다해 땅굴로 미끄러졌다.

선두를 달리던 불사자의 팔이 변형했다.

쭉 늘어난 손끝이 단의 목덜미를 잡으려는 순간.

팍!

위에서 쏘아진 단검이 손등에 박히며, 저지당했다.

단은 땅굴 속으로 미끄러져 들었다.

“지금입니다!”

신호와 동시에, 바닥에 늘어져 있던 실들이 올라왔다.

실들이 그물처럼 교차한 형태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냥 실이 아니라, 강철 거미의 실이었다.

마리나의 옷 소재이기도 하며, 암살자들이 애용하는 무기이기도 했다.

실에 의해 저지당한 불사자들이 서로 뒤엉켰다.

카아아아악!

불사자들은 고개를 들었다.

공동 위쪽 벽을 둘러싼 암살자들이 실을 당기고 있었다.

뒤엉킨 불사자들이 그물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도련님!”

“오냐. 준비됐다.”

불사자들에게 손을 뻗은 지그문트가 보채지 말라는 듯 대답했다.

하얀 면장갑, 숨결에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렘센에 다녀올 때, 발레리아가 동행해서 다행이지.”

벨수스의 브레스를 막을 때 한 번.

시노드 교구의 늪에서 아그나들을 싹 밀어 버릴 때 한 번.

양쪽 모두 사용했던 숨결이다.

그러나 지그문트는 유사시를 대비해서 숨결의 충전을 완료한 상태였다.

거의 발레리아의 마나였지만 말이다.

“이거, 안 무너지는 거 맞지?”

“설계대로라면,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그래?”

밤말을 듣는 쥐에게 확인을 받은 지그문트는 땅을 단단히 밟았다.

숨결에 마나 섞인 화기가 모여들더니, 폭발했다.

드래곤 브레스(Dragon Breath).

콰아아아아아아앙!

그물에 걸려 있던 불사자들이, 용의 숨결에 휩쓸렸다.

지지해 주는 사람이 없었던 지그문트는 뒤로 쭉 밀려났다.

드래곤 브레스는 공동의 벽을 뚫고, 아예 전 하멜지부를 소멸시켜 버렸다.

“휴.”

드래곤 브레스가 멈췄을 때는, 불사자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워진 후였다.

밤말을 듣는 쥐는 경악했다.

솔직히 반신반의 했건만.

“진짜 드래곤 브레스군요.”

“그럼 가짜겠냐?”

지그문트가 어깨를 으쓱였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우르릉.

지반이 무너지는 듯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그문트는 쥐 쪽으로 눈을 돌렸다.

“설계대로라면 안 무너진다면서?”

“……드래곤 브레스급이라고 하시길래, 과장인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그문트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돌가루가 이마를 때렸다.

“튀어!”

* * *

“하멜을 탈환하면 지부 위치를 옮긴다고 했지?”

“예.”

“미리 허물었다고 생각해.”

“흠.”

빈민가에 지름 수백 미터의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지하 공동이 무너지면서 지반이 내려앉은 것이다.

단은 신발 속에 들어간 흙을 털어 냈다.

“그래도 아무도 다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저는 죽는 줄 알았습니다.”

“미리 퇴로를 확보해 둬서 망정이지.”

페러시트가 심어진 불사자, 혼종들은 드래곤 브레스에 소멸됐다.

증거가 소멸된 건 아쉬웠지만, 증인들이 있으니 문제될 건 없다.

위에 남아 있던 암살자들이 다가왔다.

하멜 지부 안쪽에 있던 연구자와 기사들의 심문을 맡았던 이들이었다.

“어떻게 됐나?”

“송구합니다.”

암살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팔베르크 제국은 금제를 걸어 정보를 감추고 있다.

심문으로 정보를 캐내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기사로 추정되는 둘은 자결했습니다.”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자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내가 나중에 도와주지.”

암살자들은 꾸벅 목례를 하고 물러섰다.

드래곤 브레스 쓰는 걸 보더니, 태도가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나는 구덩이를 내려다봤다.

“한데 이상하군.”

“무엇이 말입니까?”

“너무 약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암국의 하멜 지부는 팔베르크 제국에게 장악 당했다.

하나 걸린 점은 하멜 지부는 낮말을 듣는 새가 담당했다는 것이다.

낮말을 듣는 새는 암국의 왕과 모종의 방법으로 연결되어 있다.

필시 제국이 습격했을 때도 암국의 왕이 나섰을 텐데.

“이 정도 전력으로 하멜 지부를 밀어냈다기에는…….”

“예. 터무니없을 정도로 부족합니다.”

“낮말을 듣는 새를 제외하면 전멸한 걸로 알고 있는데.”

물론 암국이라고 전부 암살자와 같은 전투 가능 인원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특히 하멜 같은 중심지에는, 정보상 위주로 모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암국의 왕이 속수무책으로 밀렸다는 건,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암국의 왕이 모종의 이유로 대항하지 못했다거나.

제국의 전력이 암국의 왕을 압도할 수준, 소드 마스터 이상이었다든가.

단이 의견을 제시했다.

“도련님께서 말씀하신 ‘끔찍한 혼종’들을 믿고 철수한 거 아니겠습니까?”

“제어도 안 되는 실험체를 병력으로 취급했다고?”

“연구자에게 제어 방법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무차별적으로 폭력성을 드러내는 걸로 봐선 미완성이 확실해.”

최소한 군대의 구색을 갖추려면 폭주는 금물이다.

애초에 이 실험이 완성됐다면, 실험을 끝내고 양산을 시작했을 터.

계단을 처음 내려갔을 때 있었던 혼종도, 마치 버려진 실패작 같았다.

나는 연구자의 책상에서 찾은 서류를 꺼내 대충 훑었다.

“이 연구에 명명된 이름은 불사의 군대라고 하는군.”

“도련님께서 정확히 맞히셨군요.”

“죽지 않는 병사로 이루어진 군대니까, 적합한 이름이지.”

나는 서류를 팔락팔락 넘겼다.

실험은 불사자에게 페러시트를 심으려는 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불사자는 페러시트에 저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건부 불사라는 점을 이용해서, 스스로 페러시트를 적출하는 등.

페러시트에게 제어 당하는 것을 거부했다.

“흠, 이런 거 말고.”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연구가 다소 진행된 후의 일이 기록되어 있었다.

내 생각대로, 연구 시설에 있던 것들은 모두 실패작이었다.

불사자도 아니고, 페러시트에게 장악 당한 숙주도 아닌 것들.

말 그대로 ‘끔찍한 혼종’들.

‘실험 목표.’

페러시트를 심은 이유는 단순히 불사자를 조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기생 생물 페러시트는 숙주를 폭주시켜 일시적으로 광전사처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숙주는 죽는다.

‘하지만 불사자가 숙주라면 얘기가 다르지.’

죽어도 되살아나는 불사자의 육신에 페러시트를 심는다.

페러시트에 의해 광화하여 전력의 수배를 발휘한다.

여기서 부작용인 완전 탈력으로 인한 죽음이 불사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실험이 전부 실패해서 망정이지.’

문득 서류 넘기는 것을 멈췄다.

내가 잘못 읽었나 싶어서 뒤로 돌아갔다.

작성자가 흥분한 듯, 조금 떨리는 글씨체로 명료하게 적힌 문장.

-실험 성공 기록.

쾅!

무너진 건물 잔해가 위로 솟아올랐다.

구덩이에서 뻗어 나온 팔 하나가 땅을 짚었다.

재생한 것도 모자라, 자력으로 저기서 탈출한 것이다.

단과 쥐, 암살자들이 무기를 뽑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서류 쪽으로 눈이 갔다.

“최초의 병사라.”

평범한 사람 정도의 체구를 지닌 불사자와는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태초의 숲에서 봤던 아그나의 아종과 같이, 3미터는 훌쩍 넘길 듯한 거구다.

비약적으로 발달한 근육 위로 힘줄이 솟아나 있었는데, 솔직히 좀 징그러웠다.

흙먼지가 온몸에 칠해진 피에 엉겨 붙어 있었다.

“강할 것 같습니다.”

괴랄한 재생력을 지닌 불사자만 해도 상대하기 껄끄러운데, 거기에 페러시트를 섞어 광전사의 힘까지 부여했다.

단의 말마따나 분명 강할 것이다.

죽일 수 없는 건 아니다.

조건이 상당히 까다로울 뿐이지.

‘리에이트 교국은 어떤 일이 있어도 참전을 시켜야겠군.’

저걸 상대하려면 신성력을 사용하는 사제와 성기사들의 도움은 필수불가결 했다.

이미 성자, 말론에게는 어느 정도 지지를 받고 있으니,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단과 쥐는 나를 흘겨보았다.

“알아. 내가 처리하마.”

상성상, 내가 나서는 것이 맞았다.

실력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서 단을 투입시킬까 했지만, 단은 최초의 병사를 죽일 수단이 애매했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잘 쓰면 될 수도 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나는 이름 없는 검을 뽑아 들고, 구덩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 * *

기절해서 정신을 못 차리던 연구자가 눈을 떴다.

연구자는 한동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곧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암국의 방식대로 아주 철저하게 묶여 있었다.

“읍! 읍!”

“깼군.”

수수께끼의 인물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밤말을 듣는 쥐 직속 암살자들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연구자를 내려다봤다.

그중 한 명이 어디선가 작고 날카로운 단검을 뽑아 들었다.

“심문할까요?”

“대기한다.”

앞서 심문한 두 기사가 죽어 버리는 바람에, 암살자들은 섣불리 연구자를 심문하지 못했다.

지그문트 마이어에게 방법이 있는 것 같았으니, 쥐의 명령대로 대기해야 했다.

연구자는 눈동자를 굴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연구실이었는데!’

무언가에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고, 기절했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이 상태였다.

대충 큰일 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읍!”

눈을 부릅떴다.

빈민가 전체가 무너져 있었다.

지하 공동이 있던 자리에는 큰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하지만 연구자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그 구덩이에 서 있는 괴물이었다.

‘최초의 병사가, 어떻게!’

최초의 병사.

페러시트와 불사자의 합성에 성공한 최초의 실험체다.

문제는 저것의 힘이었다.

최초의 병사는 100에 가까운 기사와 마법사를 단신으로 전멸시켰다.

간신히 제압한 뒤, 페러시트를 재워 놓았는데.

‘저대로 두면, 하멜이 멸망한다!’

연구자는 몸을 뒤틀었다.

최초의 병사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 없었다.

제어 받지 않는 최초의 병사는 광전사처럼 무차별적으로 폭력성을 드러낼 것이다.

여기 있는 모두가 죽을 것이 뻔히 보였다.

‘나는 여기서 죽을 인재가 아니다!’

암살자들은 연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일반인의 힘으로는 암국의 속박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발버둥 치던 연구자가 무기력하게 늘어지자, 관심을 돌려 버렸다.

연구자는 경악했다.

‘저, 저, 멍청한 놈이!’

누군가 최초의 병사가 있는 쪽으로 내려갔다.

그것도 검 한 자루만 달랑 지니고 말이다.

지그문트였다.

기사 수십이 달려들어도 제압하지 못한 최초의 병사다.

혼자서 뭘 어쩔 수 있을 리 없었다.

‘괜히 성질 돋우지 말고! 나오란 말이다!’

최초의 병사와 마주한 지그문트는 검을 세웠다.

오러가 피어오르는 걸로 보아, 기사 같았다.

하지만 날붙이는 최초의 병사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

놈의 재생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니까.

베거나 찌르는 것은 하등 무의미한 짓이었다.

그어어어!

최초의 병사가 거대한 손을 들어 올렸다.

지그문트는 피하지 않고, 빤히 손바닥을 올려다봤다.

쾅!

폭음이 귀를 때렸다.

연구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괴력에 짓눌려 압사했을 것이 뻔했다.

“와.”

옆에서 나지막하게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했더니, 암살자들이었다.

여간해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잘 훈련받은 암살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살짝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연구자는 눈을 살짝 뜨고, 구덩이 쪽을 내려다봤다.

‘헐.’

분명 최초의 병사의 손바닥이 지그문트를 짓누르고 바닥을 내리친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반대였다.

지그문트는 검을 집어넣었다.

최초의 병사는 온데간데없었다.

아니, 발목 아래로는 남아 있었다.

‘폭발? 검으로?’

형체는커녕, 아예 소멸한 수준이었다.

아무리 최초의 병사라도, 저건 재생 불가였다.

지그문트는 검을 집어넣었다.

연구자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소드 마스터?’

* * *

여관.

의자에 앉은 마리나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동은 피로를 동반할 수밖에 없었기에, 방심하자 금방 잠들어 버린 것이다.

방문이 열리고,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끙.”

어디선가 제 몸보다 커다란 이불을 들고 나타난 리옐이었다.

이불이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팔을 번쩍 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워낙 키가 작은 탓인지, 이불 끝이 바닥에 스쳤다.

뒤뚱뒤뚱 마리나에게 다가간 리옐은 겨우겨우 마리나에게 이불을 덮어 주는 데 성공했다.

“휴.”

리옐은 뿌듯한 듯 웃었다.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리옐은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었다.

워낙 평소에 많이 자던 탓에, 잠을 못 잤다.

무엇보다, 침대에 낯선 이가 누워 있었던 탓이 컸다.

“으…… 헨드릭…… 안 된다…….”

트리옌 왕국의 국왕.

제프 트리옌은 인상을 찡그리고 신음했다.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리옐은 낯가림이 거의 없었다.

총총 침대 쪽으로 가더니, 제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웅.

다시 한번 기분 좋은 풀 내음이 방에 들어찼다.

제프 트리옌의 신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이윽고 표정도 풀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 잠이 다 깬 건 아닌지,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깜빡였다.

손에 닿는 따뜻한 감각 탓이었는지, 옆을 돌아보았다.

제프와 눈이 마주친 리옐은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왕 할아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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