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렇게 됐다
단은 갑옷의 표면을 쓰다듬었다.
여태껏 입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금속제라고 생각되지 않는 가벼움.
관절 부분이 걸리지 않아 움직이는 데도 불편함이 없었다.
값비싼 소재에 장인의 손길이 어우러진, 명품이라고 부를 만한 물건이었다.
“집을 몸에 걸치고 다니는 기분이군요.”
“마찬가지예요.”
“비싼 게 좋은 거야.”
마리나는 평소에 입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느낌의 천 옷을 받았다.
당연하게도, 평범한 옷은 아니었다.
빌 페일의 설명에 의하면, 강철 거미의 실을 엮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부드러운 데도 불구하고 갑옷과 비슷한 방어력을 지닌 신기한 옷이었다.
물론 가격은 단의 갑옷과 마찬가지로, 억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정말 괜찮을까요?”
“지금이라도 가서 환불을 하는 편이.”
둘은 시종일관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지그문트는 짜증 난 기색으로 휙 뒤를 돌아보았다.
“사 줘도 투덜대는 것들은 처음이네. 입으라면 그냥 좀 입으면 안 되냐?”
“도련님은 아무것도 사지 않으셨잖습니까.”
“난 내 아티팩트 있어. 네 갑옷보다 수천 배는 좋은 물건이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들면 버리든가.”
“그, 그건 아닙니다!”
갑옷은 단의 마음에 쏙 들었다.
평생을 번 금액보다 비싼 갑옷을 몸에 걸쳐서 마음이 조금 불편할 뿐이었다.
여태껏 마신 영약까지 합하면, 평생의 빚을 진 기분이었다.
마리나도 비슷한 감상이었다.
단은 마리나 들으라는 듯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충의로 보답해야겠지요.”
“그럼요. 저희 도련님만 한 분이 또 없으셔요.”
“동감입니다.”
여관으로 돌아간 지그문트는 단과 마리나의 새로운 옷에 마법을 부여했다.
상회에서 옷뿐만 아니라 마석을 비롯한 여러 재료를 샀다.
중앙총상회에서 자신의 신용을 올릴 목적도 있었기에, 아낌은 없었다.
“흠.”
지그문트는 익숙한 듯 단의 갑옷에 마석을 박아 넣었다.
멀거니 구경하던 단은 몰랐지만, 지그문트의 인챈트 솜씨는 최상급이었다.
“어떤 마법이 내장된 겁니까?”
“그냥, 이것저것.”
“발동시켜야 하니, 알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처럼 따로 발동시키는 마법은 없어.”
지그문트는 인상을 찡그렸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갑옷에 걸린 마법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경도 강화, 온도 조절, 부식 방지, 화염 저항, 정신 마법 방어, 형상 기억…….”
지그문트는 수십 가지 마법을 말하고 나서야 손가락을 멈췄다.
“아직 서클이 부족해서, 이 정도밖에 못했다.”
마법사들이 들으면 뒷목 잡고 쓰러질 일이었다.
일반적인 마도구는 하나의 마법을 담고 있다.
그마저도 사용 횟수가 정해져 있거나 시간이 지나며 사라지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런데 지그문트는 수십 종류의 마법을, 거의 영구적인 형태로 한 물건에 담아낸 것이다.
“대단하군요. 천군만마를 입은 기분일 것 같습니다.”
“우와…….”
단과 마리나는 인챈트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그저 대단한 물건이구나 하고 감탄할 뿐이었다.
드래곤도 탐낼 법한 국보급 갑옷이 뚝딱 완성됐다.
지그문트가 마리나의 옷에 마법을 전부 부여했을 때였다.
통신구가 깜빡였다.
* * *
저녁 무렵.
나는 레온하트의 수호자 가면을 뒤집어썼다.
환상 마법을 통해 눈에 띄는 머리색이나 체형을 바꾼 뒤, 트리옌 왕성으로 향했다.
통신구를 통해 루터 레온하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왕성도 안전하지 않다.’
헨드릭 왕세자를 제외한 모든 왕족들이 페러시트에 감염됐다.
팔베르크 제국의 마수는 트리옌 왕성 깊숙한 곳에 뻗어 있는 상태였다.
‘레온하트 왕국도, 가만히 뒀다면 트리옌처럼 됐겠지.’
중앙 귀족을 한 번 물갈이한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발레리아가 주기적으로 제국의 끄나풀을 찾아내 처리했다.
‘방법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페러시트를 통해 트리옌 왕국을 지배한 것과 달리, 레온하트는 불사의 신자를 이용했다.
그 필두에 있던 것은 둘째 왕자, 시프 레온하트였다.
세계수가 시프를 거의 홀리다시피 신자로 만든 것이, 아주 유효했다.
나는 높은 벽을 올려다봤다.
왕성과 거리를 구분 짓는, 거대한 성벽.
마나 번(Mana Burn), 점프(Jump).
연달아 마법을 사용했다.
플라이(Fly)는 너무 느리고, 블링크(Blink)는 마나의 흔적이 남는다.
단숨에 빠르게 넘어가는 편이 좋았다.
툭, 툭, 툭.
흉벽을 차고 올라갔다.
헨드릭 왕세자는 내가 공식적으로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신분인 만큼, 여러모로 덜미를 잡히기 쉽다는 이유였다.
대신 약 5분 정도, 성벽의 한 부분에만 경계를 서지 않도록 바꿔 놨다고 했다.
“후우.”
푸른 숨을 토해 냈다.
그 말대로, 동쪽 성벽의 순찰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헨드릭 왕세자는 안뜰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경계가 강화되어 있군.’
순찰로 아래를 보니, 기사와 마법사가 주기적으로 순찰하는 것이 보였다.
헨드릭을 제외한 왕족의 상태는 명백히 정상이 아니다.
아마 그것을 빌미로 경계를 강화했을 것이다.
문제는 누가 경계를 강화했느냐다.
헨드릭 왕세자는 적법한 왕의 혈통이긴 하지만, 아직 왕성을 좌지우지할 권한은 없을 테고.
‘군사 쪽을 담당하고 있는 놈이 제국에 닿아 있다는 건데.’
유추일 뿐이지만,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나는 안뜰 쪽으로 잠입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몰래 다닐 일이 부쩍 많아진 것 같았다.
어째 또 나쁜 일을 하는 기분이었다.
“흠.”
헨드릭 왕세자가 보였다.
누가 봐도 어색하게 벤치에 앉아,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시종은 보이지 않았다.
수풀에서 나오려는데, 목에 칼이 들어왔다.
“천천히 일어나도록.”
나는 검날을 내려다보며 수풀에서 일어났다.
여차하면 마법을 사용해 반격할 수 있으니, 두 손을 들어 보였다.
헨드릭이 검을 겨눈 자를 진정시켰다.
“한넬 경, 그만두게.”
어둠 속에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두꺼운 눈썹과, 고집 있게 앙 다문 입술을 가진 중년의 기사.
트리옌의 소드 마스터, 어트 한넬이었다.
“내가 일찍이 말했던 레온하트의 수호자니.”
“흠.”
어트는 미심쩍은 듯 나를 살펴보다가, 검을 거뒀다.
나는 보이스 체인지(Voice Change)를 쓰고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헨드릭 왕세자님. 그리고 한넬 경.”
“반갑군. 레온하트의 수호자여. 내 오매불망 기다렸다네.”
종자를 전부 물린 줄 알았더니, 호위를 한 명 두고 있었다.
그것도 소드 마스터를 말이다.
물론 나는 만난 적 없는 타인.
완전히 신뢰하긴 어렵다는 걸 이해한다.
“지켜보겠다.”
어트는 검을 거뒀지만, 나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페러시트를 적출하기 위해선 부득이하게 왕족에게 근접해야 한다.
신뢰하지도 않는 인간을 왕족 가까이 가게 할 수 있다는 건가.
‘아니면, 그만큼 절박하다는 거겠지.’
어트는 여차하면 베겠다는 듯, 검에 손을 올리고 나를 주시했다.
레드라인 후작의 살기에 눌리던 예전의 내가 아니다.
어느 정도 힘을 되찾은 만큼, 이 정도는 거뜬하다.
“가시죠. 시간이 급박합니다.”
“그래. 그랬지. 알겠네.”
트리옌은 왕족이 많은 나라다.
방계까지 합하면 열이 넘을 것이다.
전부 페러시트에 감염됐다고 가정하면, 시간이 빠듯했다.
“가급적이면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가능한가?”
“물론입니다.”
인비지빌리티(Invisibility)와 무취(Odorless)를 사용했다.
말로 소통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음소거(Mute)는 예외로 뒀다.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는지, 헨드릭은 눈을 깜빡였다.
어트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걱정할 건 없겠군. 가세나.”
* * *
헨드릭은 나를 별궁으로 이끌었다.
종종 다녀가는지, 시녀들은 익숙한 눈치였다.
헨드릭과 어트는 나와 함께 누군가의 처소로 들어섰다.
화려한 침대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헨드릭이 중얼거렸다.
“……누이 동생이라네.”
트리옌 왕가의 차녀로 보였다.
가쁜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헨드릭은 땀에 젖어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줬다.
“가까이서 살펴도 괜찮겠습니까?”
“그래야겠지. 상관없네.”
어트는 여차하면 베겠다는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다.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소드 마스터를 이길 수 있을까는 아직 미지수지만.
도망치는 건 아주 여유롭게 가능했다.
-신성.
-부름?
여느 때와 같이 페어리의 모습을 한 신성이 나타났다.
얼마 전 알게 된 사실인데, 나 이외의 사람들은 신성을 보지 못했다.
세계수의 후계자인 리옐이나, 성자 말론은 어렴풋이 존재를 느끼긴 한 모양이었지만.
단이나 라스처럼 신성력과 관계가 일절 없는 이들은 느끼지도 못했다.
그 증거로, 헨드릭과 어트는 나만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부작용 없이 제거할 수 있어?
-충분.
다행히 긍정적인 답변이 나왔다.
제국의 목적은 트리옌 왕가를 제압하는 것이지, 몰살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여 페러시트에도 조치를 취한 모양이었다.
‘그대로 뒀다면 죽었겠지만.’
리로이처럼 마기에 노출되어 날뛰는 상황이 아니다.
나 혼자서도 충분히 적출할 수 있지만,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 제거해.
-부탁.
-제거해 줄래?
-갸륵.
콧대를 세운 신성이 침대 머리맡으로 날아갔다.
이미 합의가 끝난 일이었기에, 굳이 부탁하지 않았어도 해 줬겠지만.
저번에 한 번 화나게 한 적이 있으니 장단을 맞춰 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하멜로 오는 길에, 신성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페러시트를 제거하는 건 힘을 소모하지 않는다고 했지.’
신성은 제 힘을 사용하는 것을 꺼렸다.
내 몸에 부담이 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페러시트처럼 마계 생물을 제거하는 건 힘이 드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
신성의 손에 닿기만 해도 그냥 저절로 정화된다든가.
-제거.
신성은 손가락 마디 하나보다 작은 손바닥을 왕녀의 이마에 올렸다.
일전에 시노드 교구에서 그랬던 것처럼, 빛 알갱이들이 반짝였다.
이건 일반인 눈에도 보이는지, 헨드릭과 어트가 조금 긴장했다.
-완료.
불과 1초도 지나지 않아, 신성이 손을 뗐다.
왕녀는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색색 숨을 쉰다.
신성은 사라지지 않고 내 주위를 얼쩡거렸다.
-고맙다.
기어코 내 인사를 듣고 나서야 제 일을 마쳤다는 듯 사라졌다.
어째 내 힘이라는 녀석이 저런 성격인지 모르겠다.
나는 왕녀의 동태를 살폈다.
“페러시트를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저, 정말인가?”
“예. 하지만 흡수당한 힘은 돌아오지 않기에, 기력이 쇠하셨을 겁니다.”
“그런, 그건 어떻게 해야 하지?”
“잘 먹고 잘 자면 몇 달 내로 돌아오실 겁니다.”
“살펴봐도 괜찮겠는가?”
“얼마든지요.”
헨드릭은 왕녀에게 다가갔다.
달라진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어 있었다.
헨드릭의 볼을 타고 눈물을 흘러내렸다.
“고맙네. 내 정말. 이 은혜는…….”
목이 메는지, 말을 이어 가질 못한다.
페러시트를 제거했다는 것을 믿는 눈치였다.
아주 순조로웠다.
이대로 왕족만 전부 치료한다면, 트리옌도 이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똑똑.
그때, 조금 급박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모습을 감추자, 헨드릭이 숨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달려온 듯, 땀을 뻘뻘 흘리는 시종이 보였다.
성에서 달릴 정도면 보통 급박한 일이 아니라는 건데.
“무엇인가?”
“헨드릭 왕세자 전하. 큰일 났사옵니다!”
“큰일? 무슨 큰일?”
“국왕 폐하께서……!”
* * *
헨드릭과 어트는 달렸다.
나는 그 뒤를 쫓으며 계획을 수정했다.
웬일로 일이 술술 풀리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꼬여 버렸다.
‘국왕의 상태가 제일 심각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른 왕족들은 방금 치료한 왕녀처럼 페러시트에게 힘만 빨리고 있었다.
그러나 국왕은 아니었다.
루터 레온하트의 말에 의하면, 트리옌 왕국의 국왕은 반쯤 미쳐 있었다.
페러시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가장 큰 증거, 광증이었다.
“비켜라!”
본궁 안쪽, 국왕의 침소 문 앞에 시종과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헨드릭과 어트가 나타나자, 벽 쪽으로 붙어 길을 만들었다.
다급히 달려간 헨드릭이 문을 열어 젖혔다.
“아바마마!”
화려한 침소.
복도의 불빛이 머리에 왕관을 쓴 국왕을 비췄다.
청녹색의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팔다리가 지나치게 앙상했다.
전체적으로 야위어 핼쑥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국왕의 눈이 헨드릭 쪽으로 돌아갔다.
초점은 맞춰져 있지 않았다.
“헨드릭.”
국왕은 헨드릭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이상한 조짐을 느꼈는지, 어트가 둘을 갈라놓듯 막아섰다.
국왕은 어트를 올려다보았다.
“어트, 비켜라.”
“송구합니다. 폐하. 그럴 수는 없습니다.”
“비키라 하지 않았느냐! 어명이다!”
국왕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어트를 몰아붙였다.
어트는 잠깐 주저하다가, 헨드릭의 뒤로 물러났다.
헨드릭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국왕을 바라보았다.
“아바마마, 괜찮으십니까?”
“헨드릭, 나는 괜찮다.”
“정말이십니까?”
“가까이 와 보려무나.”
헨드릭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국왕은 헨드릭에게 손을 뻗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그의 손에는 보석이 박힌 은장도가 들려 있었다.
살의가 일절 없었다.
어트도 헨드릭도 반응하지 못했다.
“쯧.”
나는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왕의 손목을 붙잡았다.
“큭……!”
손이 덜덜 떨렸다.
힘이 장사였다.
마나 번(Mana Burn)을 사용하면서 막아야 했다.
꽉 문 이빨 사이로 마나의 잔재가 흩어져 나왔다.
‘모든 힘을 내보내서, 숙주의 힘을 빼는 단계.’
국왕은 페러시트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이었다.
페러시트에게 기생 당한 이는 이지를 잃고, 광전사처럼 파괴 본능만 남는다.
하지만 간혹 의지가 강한 이들은 이처럼 의식을 지닌 채, 정신이 나가기도 한다.
장례식이 끝나고, 헨드릭이 트리옌 왕국에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
치밀하게 계산됐다.
노한 기색이 역력한 국왕은 나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놓아라! 이 역적 놈이!”
“무슨 짓인가!”
나는 국왕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은장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을 본 헨드릭은 경악했다.
“페러시트 제거, 바로 시도하겠습니다.”
힘을 다 소모하는 순간, 페러시트에게 장악 당한다.
그러면 정말 되돌릴 수 없게 된다.
속으로 신성을 불렀다.
불러 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머리 옆에서 신성이 나타났다.
신성은 나오자마자 조용히 경고했다.
-위험.
-뭐?
등을 찌르는 서늘한 감각.
나는 국왕의 손목을 붙든 채 뒤를 확인했다.
트리옌의 소드 마스터, 어트 한넬이 검을 쥐고 있었다.
오러가 피어올랐다.
명백한 전투태세.
‘미친!’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한 발 앞서 반응했다.
블링크(Blink).
시야가 잠깐 꺼지면서, 뭔가 잘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워우 씨. 놀래라.”
옷자락이 잘려 나갔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상체와 하체가 분리됐을 것이다.
질겁한 헨드릭이 어트 한넬을 다그쳤다.
“한넬 경!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지는 않았거늘.”
어트는 나와 함께 이동한 국왕을 노려보았다.
국왕은 그 와중에도 내 목을 조르려 했다.
홀드(Hold)로 묶어 두고, 어트 한넬을 주시했다.
“최악이군.”
의심에 불과하던 것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내가 올 것을 대비하듯이, 왕성의 경계를 강화했던 군사 관계자.
“소드 마스터가 적이라니.”
트리옌의 소드 마스터, 어트 한넬은 검을 쥔 손에 힘을 가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그럼 봐주라.”
어트 한넬은 대답하는 대신,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나는 혀를 찼다.
‘마법사를 상대해 본 적이 있는 건가.’
블링크(Blink)를 염두해 둔 듯, 등에 벽을 붙이고 광범위한 검격을 펼친다.
방 전체를 부수기라도 하겠다는 듯한 공격이었다.
한 손으로 마법을 캐스팅하며, 다른 손으로 아공간 주머니에서 이름 없는 검을 뽑았다.
‘딱 한 합만!’
마나가 순식간에 타들어 가며, 마나 번 특유의 고양감이 머리를 때렸다.
과도하게 사용했는지,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신성이 내 손등에 손을 올리고 힘을 보탰다.
검과 검이 부딪쳤다.
콰아아앙!
여파만으로 방의 가구들이 산산조각 났다.
손목부터 시작된 저릿한 감각이 팔뚝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왔다.
이름 없는 검이 부서질 듯 떨렸다.
막을 건 예상하지 못한 듯, 어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왕세자님! 이쪽으로!”
블링크의 캐스팅이 끝났다.
적어도 지금 상태에선, 승산은 0에 가까웠다.
뒤로 빠져야 했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블링크 같은 경우 텔레포트와 달리 한 사람만 이동시킬 수 있다는 것.
헨드릭과 눈이 마주쳤다.
“아바마마를 부탁하겠네.”
헨드릭은 어트에게 달려들었다.
귀찮다는 듯 헨드릭을 베려던 어트가 검을 멈췄다.
잠깐의 주저는 틈으로 이어졌다.
퍽!
헨드릭은 무려 소드 마스터에게 몸통박치기를 감행했다.
심지어, 제대로 들어갔다.
어트의 자세가 살짝 틀어진 사이, 나는 판단을 내렸다.
나는 국왕의 뒷덜미를 붙잡고, 블링크를 사용했다.
훅.
시야가 반전하며, 테라스 밖으로 이동했다.
페더 폴(Feather Fall)을 사용해 안뜰에 착지한 나는, 곧장 달렸다.
국왕은 숨이 막힌 듯 켁켁 댔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헨드릭이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어 줬다.
왕성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빠져나가야 했다.
* * *
어트 한넬은 테라스 밖을 바라보았다.
지그문트의 흔적은 이미 없었다.
기절한 헨드릭을 잠시 바라보다가, 검을 집어넣었다.
‘일이 꼬였군.’
병사들에게 걸린다면, 적당한 구실을 대서 죽이려고 했는데.
기어코 헨드릭과 수호자가 조우하는 바람에, 일이 틀어졌다.
심지어는 국왕도 죽이지 못했다.
문 밖이 어수선해지는가 싶더니, 기사들이 벌컥 문을 열었다.
“국왕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들은 난장판이 된 방을 보고 당황했다.
서 있는 인물은 오직 어트 한넬뿐이었다.
기사들은 어트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어트 경! 이게 지금 무슨 상황입니까?”
“국왕 폐하가 납치당하셨다.”
“예?”
“또한, 놈은 헨드릭 왕세자 전하를 시해하려 했다.”
“누가 그런 짓을……!”
어트 한넬은 조용히 대답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다.”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어째서……?”
“모른다.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어트는 상황을 교묘하게 뒤바꿔 놓았다.
“지금 당장 수배령을 내리고, 수색을 시작해라. 국왕 폐하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 * *
똑, 똑똑, 똑, 똑!
여관.
경쾌하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마리나는 눈을 깜빡였다.
창문 너머로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단 님?”
“지그문트 님입니다. 열어 주시죠.”
단은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그문트 마이어와 미리 약속해 둔 일종의 암구호였다.
마리나는 창문을 열었다.
재주 좋게 창틀에 앉아 있는 지그문트가 인사했다.
“안녕.”
“도련님? 왜 멀쩡한 문을 두고 창문으로 오세요?”
“일이 좀 복잡해져서 말이다.”
지그문트는 방 안으로 남자 한 명을 던져 넣었다.
침대에 엉덩방아를 찧은 남자는, 뭔가에 묶인 듯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그의 몸을 결박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과 마리나는 어렴풋이 마법이구나 생각했다.
“저분은 누구신가요?”
마리나는 남자를 살폈다.
긴 수염의 노인이었다.
청녹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정말 잘 어울렸다.
언뜻 보기에도 평민은 아니었다.
“머리 위에, 안 보이냐?”
“왕관이 있네요.”
“그래. 트리옌 국왕이야.”
“네?”
마리나는 제 귀를 의심했다.
단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마리나,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겁니까?”
“분명 구, 국왕 폐하시라고…… 트리옌 왕국의?”
대뜸 한 나라의 왕을 데리고 왔다.
정중히 모시고 온 것도 아니고, 거의 납치와 비슷한 수순이었다.
지그문트는 한숨을 내쉬고 방으로 들어섰다.
문에 손을 얹더니, 방어 마법을 사용했다.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단과 마리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인다.
“그렇게 됐다.”
“도련님! 그렇게 됐다라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도련님이어도, 이건…….”
지그문트도 난감하긴 매한가지인지, 뒤통수를 긁었다.
마리나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구, 국왕 폐하를 납치하시다니요.”
“납치가 아니라, 임시 보호라고 해 줄래?”
“임시 보호요?”
지그문트는 상황을 설명했다.
헨드릭 왕세자와의 조우, 왕녀의 정화와 국왕의 폭주.
그리고 소드 마스터, 어트 한넬의 배반.
“헨드릭 왕세자님께서는 무사하실까요?”
“아마도. 검을 멈춘 걸로 봐서는 함부로 건드리긴 어려운 입장인 것 같다.”
“어째서요?”
“앞세울 말이 필요하니까.”
왕족 중 하나를 남겨 둔 이유.
트리옌 왕국을 피해 없이 그대로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국왕이 이런 상태인데 헨드릭을 죽여 버리면, 앞세울 말이 없어진다.
지그문트는 트리옌의 국왕을 내려다보았다.
“일단 이것 좀 정상으로 돌려놔야겠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상당히 진전된 상태라,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알아봐야지. 신성.”
지그문트는 신성을 불렀다.
단은 신성을 보지 못했지만, 마리나는 신성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리옐의 대리인이 된 덕분이었다.
신성은 국왕에게 날아갔다.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며 상태를 확인했다.
-불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페러시트가 조금씩 힘을 흡수하고 있던 다른 왕족과는 달랐다.
국왕의 몸속에 있는 페러시트는 이미 활동을 시작한 상태다.
지그문트는 국왕의 상태를 정확히 짚어 냈다.
“이미 거의 모든 힘을 흡수당한 만큼, 제거해도 사망할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
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그문트가 인상을 찡그렸다.
영초라도 남아 있으면 모르겠지만, 이미 다 써 버렸다.
“어떻게든 기력을 회복시켜야 하는데.”
“중앙총상회에서, 영초를 판매하지 않습니까?”
“시간이 없어. 지금 당장 페러시트를 제거해도 간당간당한데.”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데, 가만히 지켜보던 리옐이 끼어들었다.
“아빠!”
“할 수 있냐?”
“응!”
지그문트는 뭔가 짐작 가는 구석이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리옐은 머리 위 새싹을 흔들며 국왕에게 다가갔다.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지그문트는 국왕을 슬립(Sleep)으로 아예 재워 버렸다.
조금씩 몸부림치던 국왕이 천천히 눈을 끔뻑이더니, 잠들었다.
리옐의 작은 손이 국왕의 손가락을 꼭 쥐었다.
화악.
풀 내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세계수의 후계자로서가 아닌, 드라이어드가 가진 능력.
자신의 양분을 타인에게 나눠 준 것이다.
지그문트의 시선이 신성에게 돌아갔다.
신성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조막만한 입술이 열렸다.
-가능.
페러시트로 인한 폭주가 진행되어, 제거가 어려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신성에게서는 긍정적인 답변이 나왔다.
내가 몇 차례 시도한 적출과, 신성을 통한 제거는 다른 개념일 테니.
신성은 왕녀에게 했던 것처럼 국왕의 이마에 손바닥을 올렸다.
다른 점이라면, 왕녀의 페러시트는 신성의 손에 닿자마자 사라졌고.
키아아아악!
이번에는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을 지르며 발광을 한다는 점이었다.
리로이의 페러시트를 제거할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잠들었던 국왕에게도 자극이 갔는지, 몸이 들썩인다.
-힘듦.
신성은 인상을 찌푸렸다.
페러시트가 숙주의 머리 쪽으로 이동한 상태.
너무 긴 시간 동안 기생했기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자칫하면 날뛴 페러시트가 국왕을 죽일 수도 있었다.
나는 곧장 신성의 보조를 시작했다.
홀드(Hold).
진정(Calm Down).
통증 차단(Pain Killer).
이에 그치지 않고, 마나를 불어넣어 페러시트와 국왕을 분리했다.
구겨졌던 신성의 얼굴이 한결 나아졌다.
신성력을 불어넣길 수 초.
신성은 국왕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됐다.”
“휴, 다행이다.”
“돌아가시면 어쩌나 했습니다.”
“왕 할아부지, 이제 안 아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페러시트는 완전히 제거됐다.
이제 겨우 첫 번째 고비를 넘어선 것이다.
“일단 국왕은 됐고.”
“문제는 소드 마스터군요.”
“그래.”
트리옌의 소드 마스터, 어트 한넬.
정황상 놈은 팔베르크 제국과 손을 잡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팔베르크 제국이 이용하기 좋도록, 왕족의 상태를 국민에게 숨긴 것도.
왕족 전체에게 페러시트를 퍼트렸을 왕가의 측근도, 아마 그일 터.
“헨드릭은 거의 인질 상태고, 왕성은 아마 어트가 장악했을 거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어트가 함부로 왕가의 혈통을 죽이지 못한다는 점이다.
헨드릭이 돌진했을 때, 잠깐 주저했던 모습이 기억났다.
아마 죽이고자 했던 것은 국왕뿐이었을 것이다.
마리나는 흘끔 잠든 국왕을 내려다봤다.
“국왕 폐하께서 일어나시면, 병력을 이쪽으로 돌릴 수 있지 않을까요?”
“트리옌 왕국에서 국왕의 권력은 한없이 낮아.”
요 근래 제정신이 아니었던 국왕이다.
대뜸 나타나서 어트 한넬이 적이라고 주장한들, 설득력이 썩 없어 보일 것이다.
더군다나, 국왕은 페러시트가 제거됐음에도 눈을 못 뜨고 있었다.
리옐 덕분에 육신은 활력을 되찾았지만.
페러시트에 의해 정신이 피폐해진 상태일 터.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했다.
“밤말을 듣는 쥐.”
“부르셨습니까.”
밤말을 듣는 쥐가 창문 너머에서 대답했다.
기겁한 단이 검을 뽑아 들었다.
“내가 고용한 사람이야. 경계할 거 없어.”
“고용한 사람……?”
“들어와.”
밤말을 듣는 쥐가 방에 들어섰다.
단과 마리나는 쥐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화상에 일그러진 얼굴을 가진 굽은 등의 노인.
아무래도 좀 흉흉하게 생기긴 했다.
“찍찍이! 안녕!”
리옐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뭔가 했더니, 밤말을 듣는 쥐의 어깨 위에서 생쥐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밤말을 듣는 쥐가 곧잘 연락책으로 쓰던 녀석이었다.
코를 씰룩이던 녀석은 후다닥 밤말을 듣는 쥐의 몸을 타고 내려갔다.
그리고 리옐의 몸을 타고 올라가, 냉큼 손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찍.
“헛. 그래?”
찍찍.
“진짜? 으헤헤.”
찍!
뭔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생쥐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밤말을 듣는 쥐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 들었겠지만, 일이 좀 많이 꼬였다.”
“원래 말씀하셨던 계획과 상당히 어긋나는군요.”
순조롭게 왕가에 기생 중인 페러시트를 모두 제거했다면, 왕가에 협력을 받아 뒷세계를 장악한 팔베르크 제국을 몰아낼 생각이었다.
이쪽 전력도 상당했기 때문에, 어려울 일 없을 거라 판단했다.
‘이쪽은 거의 군대급 전력이니까.’
일단 나, 소드 익스퍼트 중급으로 올라간 단, 그리고 신목의 후계자까지.
마녀의 말에 의하면 마리나도 충분히 전투에 참여할 수준이다.
밤말을 듣는 쥐까지 합하면, 기사단 하나 정도는 상대할 수 있다.
거기에 왕국의 병력까지 지원을 받을 생각이었는데.
“계획의 순서를 바꾼다.”
소수 정예 인원으로, 뒷세계부터 먹는다.
왕성으로 쳐들어가기에는 전력도 부족했고, 뒤통수가 허전했다.
먼저 뒷세계부터 장악한 뒤, 암국을 끌어들여야 했다.
“말을 바꾸게 돼서 미안한데, 병력 지원 가능할까?”
“알아보겠습니다. 연락에는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아, 어트 한넬의 정보도 사지.”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 * *
“어트 한넬.”
밤말을 듣는 쥐는 어트 한넬의 정보를 즉석에서 서류로 작성해 줬다.
나는 서류를 훑어보았다.
어트 한넬은 트리옌 왕국의 유일무이한 소드 마스터다.
사용하는 검은 표준 규격의 롱소드로, 별명은.
“균형의 검이라.”
“어트 한넬 경은 예로부터 균형 잡힌 검술로 유명했습니다.”
단이 첨언했다.
요하네스 레드라인은 검을 부수는 검이라 불린다.
극단적으로 무기 파괴에 치중된 검을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어트는 모든 면에서 틈이 없는 검술을 다룬다고 적혀 있었다.
요하네스가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시켰다면, 어트는 결점을 최소화시킨 것이다.
“공략할 여지가 있습니까?”
“이도저도 아닌 것과 만능은 한 끝 차이거든.”
균형의 검.
반대로 말하면 뚜렷한 장점이 없는 평범한 검이 될 수도 있다.
같은 소드 마스터라도, 전력은 아마 레드라인 후작이 우세할 것이다.
단점이 없는 것보단, 장점을 극대화시킨 쪽이 더 강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만약 위로 올라간다면, 어트가 요하네스보다 강해지겠지.’
단계가 높아진다면.
어트 한넬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 요아힘 월베른처럼 완전무결한 기사가 될 수 있었다.
아마 어트도 그것을 염두해 두고 이런 검술을 갈고닦은 것이리라.
야망이 큰 놈이었다.
“단.”
“예.”
“어트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냐?”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요?”
소드 마스터.
군대 단위의 병력을 홀로 상대할 수 있는 기사.
당연히 평범한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기사는 뼈도 못 추린다.
버티기는커녕, 검 한 번 맞대 보지 못하고 목이 달아날 것이다.
“글쎄요. 단순히 버티는 것 뿐만이라면, 몇 분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단은 달랐다.
일반적인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기사는 압도적으로 상회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
검을 수도 없이 주고받아 왔다.
과장이 아니라, 단언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도련님과의 무수한 대련이 저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참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단이 내가 사용하는 온갖 검술을 전부 혼자서 받아 낸 건 사실이다.
아마 웬만한 노익장 못지않은 노련함을 가지고 있을 터.
‘어트는 뚜렷한 강점이 없는 기사.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내 주변에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강한 놈들이 너무 많아서 묻힌 감이 있지만, 단도 충분히 국가에서 주목할 만큼 강력한 기사였다.
“그럼 잠시 어트 좀 맡아라.”
“예?”
“끝장을 볼 필요는 없고, 버티기만 하면 돼.”
나는 죽을 뻔했지만, 그건 기습당해서 그런 거다.
단은 방어에 한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사다.
검술 대회 당시 붙은 별명이 난공불락이었을 정도니.
“할 수 있지?”
“제가 끝장날 것 같습니다만.”
“괜찮아. 너 안 죽어.”
* * *
하멜을 탈환할 생각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암국의 병력은 금방 도착했다.
유사시를 대비해서 거리를 두고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수가 채 백이 되지 않았는데, 모두 밤말을 듣는 쥐의 직속이라고 했다.
밤말을 듣는 쥐는 정보상보다 암살자로서 더 지위가 높다.
말인즉슨, 전부 정예 암살자라는 뜻이었다.
“말했던 거 전부 외웠지? 먼저 가서 신호 대기해.”
“알겠습니다.”
밤말을 듣는 쥐는 기습을 준비하기 위해서, 먼저 이동했다.
나와 단은 새벽에 여관을 나섰다.
마리나가 우리를 배웅했다.
나가기 전, 침대에 곯아떨어져 있는 국왕을 확인했다.
“쯧. 잘도 자는군. 나라 개판 난 것도 모르고 말이야.”
“수면이 부족이셨던 걸까요.”
마리나와 리옐은 남기로 했다.
마리나 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 은신에 일가견이 있지만, 리옐은 은밀하게 움직이기 어려웠다.
국왕이 정신을 차리면 상황을 설명할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고.
“아, 국왕이 날뛰면 제압할 수 있지?”
“어…… 아마 가능할 것 같아요!”
“여차하면 통신하고.”
“네.”
하나 걱정됐던 건 죽음이었다.
렘센에서 그런 일이 있고 나니, 리옐과 함부로 떨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속이기도 어려울 테니까.
신성에게 물어보니, 하멜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크게 지장은 없을 거라고 한다.
“다녀오세요!”
“오냐.”
배꼽 인사를 하는 리옐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밖으로 나갔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가면 대신, 밤말을 듣는 쥐가 준 복면을 뒤집어썼다.
어트가 수색 명령을 내렸는지, 횃불을 든 병사들이 길거리를 쏘다니고 있었다.
저것들에게 걸리면 일이 좀 많이 귀찮아진다.
밤말을 듣는 쥐가 옆으로 다가왔다.
“본거지는?”
“송구합니다만,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왕성 내부에 있을 확률이 높다 사료됩니다.”
“그럼 장악 당한 암국의 전 하멜 지부가 어디 있지?”
“네르갈과 같습니다.”
“빈민가라는 얘기군. 거기부터 털자.”
밤말을 듣는 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쥐는 조금 걱정된다는 눈치로 나와 단을 번갈아 보았다.
“따라오실 수 있겠습니까?”
“길이나 안내해.”
“알겠습니다.”
밤말을 듣는 쥐와, 암살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우리를 배려한 것인지, 암살자 중 하나가 쫓아오라는 듯 자신을 드러내며 움직였다.
그들은 건물 지붕이나 간판 따위를 넘어 다니며 남쪽으로 사라졌다.
“와…… 저게 사람입니까? 어떻게 저러지?”
“왜 입만 벌리고 있어. 우리도 가야지.”
“도련님, 도련님이라면 몰라도, 저는 저런 거 못 합니다.”
“알아.”
나는 단의 목덜미를 잡았다.
갑옷의 무게 때문에 국왕보다 조금 무거웠다.
그렇다고 못 들 정도는 아니었다.
내 가슴에 손을 얹고 마법을 중첩해서 사용했다.
마나 번(Mana Burn).
경량화(Weight Lightening).
밤눈(Night Vision).
페더 폴(Feather Fall).
마나의 잔재를 뱉어 내며, 가볍게 제자리에서 뛰어봤다.
단의 몸이 덜컥거리며 움직였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사색이 됐다.
“잠깐, 도련님?”
“간다.”
“우왁! 켁!”
나는 한 손에 단을 붙들고, 밤말을 듣는 쥐를 따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