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9권) (66/134)

기사 가문의 대마법사 9권

글쓰냐 퓨전 판타지 장편소설

목차

죽음을 속인 자

부드러운 가시밭길을 지나서

그렇게 됐다

끔찍한 혼종

하멜 탈환전

트리옌의 구원자

나는 미혼이다

급류를 타고 (1)

1

죽음을 속인 자

임시로 관이 안치된 안치실.

의자에 앉은 기사는 리에이트의 표식이 그려진 목걸이를 움켜쥐고 기도문을 외웠다.

그는 독실한 리에이트의 신자였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몹시 불안한 듯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자네, 왜 그러나?”

그를 걱정스럽게 여긴 다른 기사가 다가왔다.

헬름을 벗자, 백발을 뒤로 넘긴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늙은 기사, 옥스였다.

목걸이를 부서져라 움켜쥐고 있던 기사는 고개를 들었다.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긴장했나? 잠을 못 잔 모양이군.”

두 기사는 이번에 있을 델 로안 대공의 장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다.

델 로안 대공의 관을 호송하는 것이었다.

관을 실은 마차 앞에서 행진할 뿐인 일.

별것 아닌 일 같았지만, 아니었다.

여러 국가의 주요 인사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모든 동작에 있어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선 안 됐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네. 황제 폐하는 너그러운 분이야. 실수가 있더라도, 용서해 주실 걸세.”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이 사람. 그럼 뭐가 문젠가?”

“그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기사는 충혈된 눈을 옥스에게 돌렸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옥스는 조용히 기사를 내려다봤다.

기사는 머뭇거리다가 중얼거렸다.

“델 로안 대공의 관을 관리하던 이들이 연달아 명을 달리 한 것 말입니다.”

“들었다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침착하신 겁니까? 이건 분명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겨우 두 사람 아닌가. 우연이겠지.”

“우연이 아닙니다. 우연이 아니란 말입니다.”

“거참, 우연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기사는 달달 떨던 다리를 뚝 멈췄다.

뭐라고 말을 하려는 듯, 입을 한참 동안 달싹거렸다.

결국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옥스는 딱하다는 눈으로 기사를 보며, 옆에 엉덩이를 걸쳤다.

“죽음은 어떤 징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다네.”

“어떤 징조도 없이, 갑작스럽게요?”

“그래. 그들이 죽은 건, 델 로안 대공의 관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그렇다면, 죽을 운명이었단 말씀이십니까?”

옥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네. 전쟁터에 나가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

실제로 관을 관리하던 둘의 죽음은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첫 번째 관리자는 지병이 도져 숨을 거뒀다.

두 번째 관리자는 불의의 사고로 실족사 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영영 죽을 것 같지 않던 델 로안 대공께서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가시지 않았나.”

“그건, 맞습니다만…….”

“사고였네. 그들의 불운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게야.”

옥스는 기사의 등을 토닥였다.

기사의 떨림이 차츰 잦아들었다.

여전히 리에이트의 표식이 그려진 목걸이를 쥐고 있긴 했다.

적어도 불안한 듯 다리를 떨지는 않았다.

“복장을 갖추게. 자랑스러운 팔베르크 제국의 기사답게, 가슴을 펴.”

“……감사합니다. 옥스 님.”

* * *

이른 저녁, 렘센,

황성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굳게 닫혀 있던 황성의 문이 열렸다.

앞장서서 나온 것은 황성의 기사들이었다.

팔베르크 제국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오와 열을 맞춰서 움직였다.

그 수는 얼핏 보기에도 수백에 이르렀다.

다그닥. 다그닥.

약간의 간격을 두고, 마차가 등장했다.

황족의 장례를 치를 때만 사용하는 마차였다.

마차 위에는 순백의 천이 덮여 있었다.

델 로안 대공의 관이었다.

“평생 죽을 것 같지 않았던 분인데.”

“아직도 안 믿기는군.”

“마찬가지야.”

렘센은 포화 상태였다.

제국민들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 발걸음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제국민들의 분위기에 감화되어 조용히 장례를 지켜봤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는 마법사들과 심지어는 몇몇 귀족들까지 행렬에 동참했다.

델 로안 대공의 발인은 성대한 규모로 이루어졌다.

툭, 툭.

그쳤던 비가 다시 땅바닥을 때렸다.

사람들은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았다.

행렬은 황성부터 이어진 큰 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문 앞에는 팔베르크 제국의 거의 모든 귀족들이 자리했다.

그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델 로안 대공을 배웅하고 있었다.

‘지금쯤 시작하면 되겠군.’

나는 렘센에서 황성 다음으로 높은 건물, 흑탑의 꼭대기에서 상황을 주시했다.

양옆에는 검은 머리의 남매가 있었다.

메어리, 나고와 얘야 남매였다.

“준비됐냐?”

“됐어?”

“됐어!”

내가 준비한 것은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일시적으로 델 로안의 몸에 들어가는 것.

그리무아르와 메어리를 통한 의식의 연결한다.

관에 있는 몸에는 영혼이 없기 때문에 메어리가 중개 역할을 한다.

그리무아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했다.

“갔다 올게?”

“조심해라.”

항상 의문문을 쓰는 여아 메어리, 얘야가 모습을 감췄다.

메어리는 기본적으로 정령에 가깝기에, 들킬 가능성은 적었다.

눈치챈다고 해도 요아힘과 린시스 정도였다.

요아힘은 참석하지 않았고, 린시스에게는 미리 말해 뒀다.

‘마나 서클이 전부 끊어진 건, 좀 아쉽군.’

만약 서클이 남아 있었다면, 재밌는 걸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관에서 즉석으로 마나 서클을 만들어, 대마법 하나를 갈긴다든지.

물론 제국 전체에 테러를 가할 마음은 없었다.

노렸다면 황제와 렘브란트, 날 죽인 주범 둘이었다.

“얘야가 준비 끝났대.”

“너는 어떻지?”

“나도 끝났어!”

“좋아.”

나는 그리무아르를 펼쳤다.

나고가 내 심장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의식이 끊어졌다.

‘기분이…… 이상하군.’

나는 나, 지그문트의 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고위 사령술 중에는 영체화라는 개념이 있다.

그것과 비슷할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영체라고는 하나, 영체도 결국 몸이다.

지금의 나는 몸이 없이 의식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영혼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럴 때가 아니지.’

오랫동안 밖에 머무르는 건 위험했다.

곧장 나고에게 다가갔다

내 심장에 손을 올린 나고에게서 마나의 통로가 뻗어 나와 있었다.

통로는 장례 행렬, 관 내부로 이어져 있었다.

나는 통로를 타고 마차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흠.’

관 안쪽은 어두웠지만, 이상하게도 밤눈(Night Vison)을 사용한 듯 모든 것이 보였다.

얘야가 델 로안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있었다.

전생의 내 몸은 오래 전에 그 기능을 정지한 상태였다.

보존 마법이 걸려 있었지만, 장기들이 제 기능을 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기에, 살아난다기보다는 시체에 의식을 부여한다는 표현이 옳았다.

일시적으로 언데드가 되는 것이었다.

‘어지럽다.’

의식은 단독으로 오래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영체든 신체든 간에,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요구했다.

나는 지체 없이 델 로안의 몸에 들어가려 했다.

손이 몸에 닿기 직전.

파직!

손끝에서 녹색의 얇은 막이 나타났다가 부식됐다.

영혼에 가호가 걸려 있었던 것 같다.

어렴풋한 풀 내음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세계수, 혹은 리옐의 가호였다.

판단은 빨랐다.

가호가 이런 식으로 발동했다는 건.

‘위험하다!’

내 시체에는 뭔가 숨어 있었다.

자그마치 신의 가호가 한 번에 깨졌다.

황제나 렘브란트의 역량으로 벌인 짓이 아니다.

시체에 숨어 있던 무언가 내 의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

나와 그것 사이에서 신성이 나타났다.

빛과 어둠이 부딪쳤다.

뭔가 잘못됐다.

-도망!

다급함을 넘어서, 절박함이 느껴지는 신성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곧장 통로를 통해 도망쳤다.

* * *

그것은 어떤 징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검은 하늘이 열렸다.

하늘의 틈에서 무언가가 뚝 떨어졌다.

그것은 물에 퍼진 잉크처럼 하늘을 뒤덮었다.

아래를 향한 거대한 날개 같기도 했고, 오므린 손 같기도 했다.

좁은 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그것이 자신의 일부를 떨어트렸다.

툭.

끈적끈적한 점액처럼 느릿하게 흘러내린 덩어리가 땅에 떨어졌다.

델 로안의 관이 실린 마차 앞이었다.

덩어리가 부글부글 끓더니, 형체를 갖추고 일어섰다.

인간과 비슷한 무언가였다.

“뭐지?”

“진형을 갖춰라! 어서!”

옥스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검을 뽑아 든 제국의 기사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것이 허튼짓을 할 수 없도록, 둘러싸듯이 포위한다.

마법사들 또한 지체 없이 캐스팅을 시작했다.

수백에 달하는 기사들과 마법사들.

일반적인 군대 하나는 간단하게 묵살시킬 수 있는 전력이었다.

“움직이지 마라.”

기사 하나가 그것의 목으로 추정되는 곳에 검을 올렸다.

언제든지 벨 수 있도록 오러를 유지한 상태였다.

낮은 목소리로 헬름에 가려진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기사, 옥스였다.

경험 많은 노익장이라 그런지 대처가 좋았다.

스으으……

그것은 옥스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내겐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만하라고 제지하는 듯한 자세였다.

옥스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옥스 님?”

긴 침묵에, 이상함을 느낀 기사 하나가 나지막이 옥스를 불렀다.

옥스는 여전히 무반응이었다.

기사는 검 끝을 그것에게 겨눈 채, 게걸음으로 주춤주춤 옥스에게 다가갔다.

옥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기가 무섭게, 옥스의 몸이 허물어졌다.

캉……!

갑옷과 검이 땅에 부딪치며 쇳소리를 냈다.

기사는 재빠르게 동료에게 뒤를 맡기고, 옥스의 생사를 확인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확실히 죽었다.

‘어떻게?’

내가 보기에도, 그것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마법도, 오러도, 사령술도, 정령술도, 아티팩트도 아니었다.

어떤 힘이 옥스에게 작용한 낌새는 없었다.

말 그대로 그냥 갑자기 죽어 버린 것이다.

-하아…….

그것이 입을 열고 숨을 뱉었다.

겨울도 아닌데 하얀 입김이 공기를 타고 퍼져 나갔다.

그에, 모든 기사들이 돌처럼 굳었다.

“아.”

그것을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이 쓰러졌다.

모두 숨을 멈추고, 죽어 버렸다.

공포도 혼란도 고통도 없었다.

무언가 옆에서 덜덜 떨렸다.

“저게, 뭐야…….”

나고는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렘센에 모인 수많은 사람 중,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느릿한 동작으로 움직이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그것뿐이었다.

그것은 하얀 천에 뒤덮인 관을 쓰다듬었다.

‘왜.’

어쩐지 내 뺨에 그 감촉이 와닿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금니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관을 쓰다듬은 그것은 뭔가 생각 같지 않은 듯, 고개를 기울였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고개가 정확히 내 쪽을 향해 휙 꺾였다.

‘여길 봤다?’

그것에게는 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지만.

어쩐지 눈이 마주친 느낌이 들었다.

마나 서클을 회전시켰지만,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

언젠가 느껴 봤던 서늘한 숨결이 목 뒤에 닿았다.

귓속을 파고드는 갈라진 목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찾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가락이 교차하며 목을 감싸 쥐었다.

그것의 손아귀는 부모의 손길처럼 부드러웠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달콤한 안식이 등 뒤에 있었다.

“스승님!”

익숙한 목소리에, 아득해지던 정신이 돌아왔다.

붉은 로브가 눈에 들어왔다.

눈앞에는 발레리아가 있었다.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불타는 창을 한 손에 쥐고 있다.

“흡!”

숨을 참는 소리와 함께, 발레리아가 창을 투척했다.

플레임 스피어(Flame Spear).가 내 어깨 위를 스쳐 지나갔다.

퍼엉!

등 뒤에서 열기가 폭발했다.

동시에, 발레리아는 급하게 내 손을 낚아챘다.

시야가 뒤집혔다.

텔레포트(Teleport).

공간이 바뀌며, 익숙한 벽지가 보였다.

좌표를 잘못 설정했는지 발밑이 허전했다.

나와 발레리아는 바닥에 쓰러지듯 넘어졌다.

몸에 닿는 충격에 멍했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여긴?”

낯설지 않은 구조였다.

제국의 내 저택.

발레리아의 방이었다.

지금은 가구 따위가 없었지만, 확실했다.

무의식적으로 이동한 모양이었다.

발레리아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스승님, 괜찮으세요?”

“그래. 괜찮은 것 같구나.”

나는 목을 더듬었다.

그것의 손이 아직도 내 목을 쥐고 있는 듯한 감촉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까지 당황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리아, 너는 괜찮으냐?”

“예. 저도, 뭐.”

말은 저렇게 하고 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건 숨기지 못했다.

오한이 느껴지는지, 연신 팔뚝을 쓸고 있었다.

“도대체, 그건 뭐였죠? 어디서 갑자기 그런 게.”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야.”

“혹시 마신 같은 건가요?”

“아니.”

이미 여러 차례 경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에인션트 드래곤 마날루스, 마녀, 그리고 신성도 한 번 언급했다.

저건 몬스터도, 신도 아니다.

“죽음.”

“죽음……? 사신 같은 건가요?”

“수확자 같은 몬스터가 아니야. 저런 몬스터가 있다면 서대륙은 종말을 맞이했을 테니.”

“죽음은 추상적 개념이잖아요. 저런…… 존재가 아니라.”

“나도 모르겠다.”

나라고 세상의 모든 진리를 알고 있는 건 아니다.

신성을 내 힘으로 만들 당시, 넌지시 느낀 적이 있긴 했지만.

저런 종류의 것일 줄은 몰랐다.

“근데 왜 저게 스승님을 죽이려고 드는 거예요?”

“내가 죽지 않았으니까.”

저것은 어떤 존재라기보다 순리나 법칙에 가까운 무언가다.

즉, 저것은 그 순리대로 나를 죽이기 위해서 온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갑자기요?”

“아마 내가 내 원래의 몸에 접근한 탓이겠지.”

“그런…….”

“명백한 내 잘못이다. 저런 게 도사리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

나는 창밖을 살폈다.

어두운 하늘, 얇은 틈에서 죽음이 떨어지고 있었다.

점성을 지닌 액체 같기도 했고, 느릿하게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기체 같기도 했다.

내 관을 쓰다듬던 그것을 떠올렸다.

“나를 죽이려고 한 그것은, 아마 죽음의 일부에 불과할 거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저항할 수 있던 거라는 거죠?”

“그래. 하지만 저것에게는, 저항할 수 없을 것 같구나.”

발레리아도 똑같은 감상인 듯, 창밖을 응시했다.

저것이 완전히 하늘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나는 죽는다.

이것은 단순히 감에 의존한 추측이 아니었다.

나도 어째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는 건 확실했다.

* * *

돌연 사라졌던 그것은 다시금 땅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는 듯,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간다.

“허억, 허억.”

“어.”

공포에 꼼짝 없이 굳어 있던 사람들이 숨만 겨우 헐떡였다.

그것이 사람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 어떤 접촉도 없었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동공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죽은 것이다.

“저, 저, 저, 저것 좀 어떻게 해 보시오!”

한 귀족이 렘브란트의 로브 자락을 찢을 듯 움켜쥐고 흔들었다.

목소리는 겁먹은 염소처럼 떨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아 있었다.

렘브란트 님푸스는 귀족을 내려다봤다.

눈이 마주친 귀족이 악을 썼다.

“명색이 탑주라면, 어서 뭐라도 좀 해 보란 말이야!”

“손, 치우도록.”

스산한 목소리에, 반쯤 정신을 놓았던 귀족은 흠칫 몸을 떨며 손을 놓았다.

렘브란트는 구겨진 로브를 툭툭 쳐서 편 뒤, 황성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것으로부터 꽤 거리가 있었기에, 렘브란트는 이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판단은 지극히 냉정했다.

렘브란트는 황성 내부로 텔레포트(Teleport)했다.

“도, 도망치다니! 이런 비겁한!”

황제를 피신시키기 위해서 이동한 것이었다.

그 의도를 알 리가 없는 귀족은 괜히 화를 냈다.

렘브란트가 사라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그래서 너무 늦게 눈치채고 말았다.

“어.”

죽음이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다가왔다는 것을.

아주 천천히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던 죽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앞에 있으니,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유심히 귀족을 들여다보던 죽음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깊은 공동에서 나오는 듯한 갈라진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귀족은 맥없는 인형처럼 쓰러져 죽었다.

죽음은 팔베르크 제국의 다른 귀족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허억.”

누군가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마지막이었다.

성문 앞에 있던 제국의 귀족들이 모두 절명했다.

죽음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렘센에 한밤중의 묘지에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고요가 찾아왔다.

그것은 기괴하게 머리를 뒤틀다가, 황성 쪽을 보았다.

“…….”

어두운 하늘 탓에,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빗소리 틈으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비규환한 사람들의 절규와 연달아 겹치는 발소리.

인기척을 확인한 그것은 천천히 황성의 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가주님!”

별궁 복도를 달리던 단 록벨런은 라스 마이어와 조우했다.

라스 외에도, 루터 레온하트를 비롯한 레온하트 왕국의 주요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단이 달려오자마자, 라스는 단의 어깨를 붙잡았다.

“단.”

“예, 예!”

“지그문트는 어디 있지?”

“저도 찾고 있었습니다. 여기 안 계십니까?”

“빌어먹을.”

라스는 답지 않게 인상을 찡그렸다.

델 로안의 발인은 관이 실린 마차가 렘센을 한 바퀴 돈 뒤 예정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다른 국가의 조문단은 별궁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덕분에 레온하트 왕국의 귀족들은 모두 무사했지만.

발레리아 로안과 지그문트 마이어, 둘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이럴 게 아니라, 어서 도망쳐야 합니다!”

공포에 빠진 레온하트 왕국의 귀족 하나가 루터 레온하트를 닦달했다.

넓은 창문 너머로, 하늘에서 무언가 내려오려는 것이 보였다.

일부만 드러났음에도, 인간의 선에서 대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루터는 차분하게 그를 설득했다.

“섣불리 움직이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러면 어쩌잔 말씀입니까? 이대로 가만히 저 괴물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루터도 두려운 건 매한가지였다.

창밖으로 보이던 렘센의 제국민들은 모두 쓰러져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무언가 내려오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라스가 루터에게 다가갔다.

“루터 왕자님, 지그문트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나!”

귀족은 지금 상황에 그게 문제냐는 듯, 라스를 타박했다.

라스는 귀족에게 눈을 돌렸다.

라스와 눈이 마주친 귀족은 딸꾹질을 했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듯한, 귀신의 눈이었다.

루터는 그사이를 가로막듯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적탑주님도 보이지 않는군요.”

“수색을 요청합니다.”

“……불허합니다. 현 상황에서 수색은 너무 위험합니다.”

루터 레온하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처럼 싸울 수 있는 인원이 부족한 상황에, 전력을 나누는 것은 악수였다.

라스 마이어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불복하겠습니다.”

“마이어 남작! 이, 이, 이제 막 나가는 건가!”

눈치를 보던 귀족이 기회라는 듯 라스에게 삿대질을 했다.

라스는 그런 귀족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묵묵히 검을 챙기고, 무장을 갖췄다.

라스 마이어가 검을 쓰는 걸 몰랐는지, 귀족은 다시 한번 몸을 움츠렸다.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려 하는 줄 알고, 지레 겁먹은 것이다.

“지금 자네 아들이 중요하냐는 말이야! 검을 쓴다면 왕자님을 보필할 것이지!”

“중요합니다. 적어도 저한테는 말입니다.”

라스는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렸다.

단은 루터에게 예를 표해 보인 뒤, 라스를 따라갔다.

귀족은 뒷목을 잡았다.

“저, 저, 저! 루터 왕자님!”

“그만하세요. 언쟁을 벌일 시간은 없습니다. 움직이겠습니다.”

* * *

라스 마이어와 단 록벨런은 별궁을 수색했다.

지그문트와 발레리아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복도에 널브러진 무수한 시체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귀족, 기사, 시종을 가리지 않고 모두 죽었다.

단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특이하군.”

라스는 시체를 살폈다.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몇몇은 공포에 질려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아예 죽음을 인식조차 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죽은 이들도 있었다.

전투가 있었는지, 바닥에 깨진 유리 조각이 있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별궁 밖으로 가는 길은 이곳뿐이다. 나아가야겠지.”

램프가 전부 깨져, 복도 안쪽은 어둠으로 들어차 있었다.

스릉.

둘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어둠 속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단과 라스, 둘은 기사였다.

본능적인 감으로 알 수 있었다.

라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온다.”

아무런 소리도,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무언가 확실히 이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단의 클레이모어가 떨렸다.

모습이 보이지 않음에도, 두려웠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공포가 온몸을 둘러쌌다.

라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했다.

“단.”

“예.”

단은 볼 안쪽 살을 깨물어 피를 냈다.

아릿한 고통에도 공포가 지워지지 않았다.

거의 씹다시피 피를 낸 단이 침을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침에서는 비릿한 피의 맛이 났다.

“전력, 그 이상을 내라.”

라스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단은 조금 차분해졌다.

검에 오러가 피어오름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새까만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죽음, 그 자체였다.

라스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 죽을 테니.”

죽음이 입김을 내뿜었다.

한기가 별궁 복도에 들어찼다.

한편에 장식되어 있던 생화가 순식간에 시들어 버렸다.

라스와 마주친 죽음은 움직임을 멈췄다.

-비슷하다.

라스 마이어는 죽음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신 기괴한 신음, 절규, 웃음소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온갖 생물이 최후와 함께 쥐어 짜낸 단말마였다.

죽음은 잠시 라스를 응시하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아아아아!”

단이 절규와 같은 기합을 내질렀다.

오른발이 단단하게 땅을 디딘다.

눈을 부릅뜨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깊숙한 곳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아악!”

저항하는 자의 울부짖음.

단이 앞으로 나아갔다.

마찬가지로 입술을 깨문 라스가 자세를 낮추고 달려들었다.

필사(必死)의 저항이 시작됐다.

* * *

“신성.”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신성을 불렀다.

신성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명치와 단전 사이에 손을 올렸다.

“반응이 없나요?”

“아마 죽음을 막을 때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혹시, 죽은 건…….”

“신성은 생물이 아니야. 아마 다치거나 붙잡힌 정도겠지.”

그 증거로, 신성은 여전히 내 몸 속에 있었다.

죽었다면 아예 빛이 꺼졌을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죽음이라는 존재에 대적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무아르도 자신의 지식 밖에 있는 일이라고 했을 정도니.

“렘센에서 도망치는 게 최선 아닐까요?”

“저게 다 떨어지는 순간, 거리 같은 건 무의미할 거다.”

“그럼 어떻게 하죠?”

“린시스를 찾아야지.”

린시스.

린시스는 아직 황성 어딘가에 있었다.

지상의 조율자라는 드래곤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통신구를 통해 마녀에게 연락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마녀는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피했지.’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린시스가 마녀보다 죽음에 관하여 아는 바가 많을 것이다.

내 연구에 동참한 적도 몇 번 있으니.

“찾을 필요 없어.”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공간이 일그러졌다.

이윽고 허공에서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용케 살아 있네. 델.”

“린시스 님!”

“린시스.”

“쉿.”

린시스는 검지를 입술에 올렸다.

급히 입을 틀어막은 발레리아가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린시스는 마법을 중첩하여 몇 번이고 사용한 뒤에야, 손짓을 했다.

이제 말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궁금한 점이 몇 가지 있는데.”

“미리 말해 두는데.”

린시스는 자신의 입술에 단추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나도 일단 드래곤이야. 규율에 묶인 몸이지. 말할 수 없는 건 말해 줄 수 없어.”

“안다. 질문할 테니, 대답할 수 있는 것만 대답해 줘.”

린시스는 흘끔 발레리아를 바라봤다가, 눈을 감았다.

질문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저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이유는 뭐지?”

“죽었음에도 죽지 않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죽었음에도 죽지 않은 사람.

명백히 나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로써 저것의 목표가 나라는 것은 확실해졌다.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저것의 목표가 나라면, 어째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거지?”

“저건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어. 사람들이 죽은 거지.”

“죽이지 않았고, 죽은 거다? 쇼크사 했다는 건가?”

“틀려.”

린시스는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인상을 구기고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숨을 토해 내듯 빠르게 말했다.

“저건 바꾸기 위해서 지상으로 내려온 게 아니라, 바로잡기 위해서 내려온 거야.”

“어렵네요.”

발레리아는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나는 뭔가 감이 잡힐 듯 말 듯 했다.

어쨌든 린시스는 나를 돕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

말 속에 뼈가 있을 것이다.

‘바로잡는다.’

그릇되거나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고쳐 놓는다는 뜻이다.

아마 여기서 ‘그릇되거나 잘못된 것’은 내 존재일 것이다.

나는 죽음이라는 순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삶을 이어 가고 있었으니까.

‘바꾸기 위해서 지상에 내려온 게 아니다.’

하지만 죽음은 이미 많은 것을 바꿨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목도하고, 죽었다.

린시스의 말대로 자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 사실이 변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죽은 사람들은, 모두 죽은 건가?”

“그래. 죽었어.”

“아니지. 내가 잘못 말했군. 지금 죽은 사람들은, 모두 살아날 수 있나?”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죽음이 목적을 이루고 있었던 곳으로 돌아간다면.

진짜 목적이었던 나 이외에는, 모두 원래대로 돌아간다.

즉, 지금 죽은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죽은 상태라는 것이다.

발레리아는 이해가 잘 안 됐는지 고개를 기울였다.

“어떻게요?”

“저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면 자연히 그렇게 될 거야.”

“으음, 잘 모르겠네요. 그럼, 저걸 제자리로 돌려놓는 방법은요?”

“돌아간다면 모를까, 돌려놓을 수는 없을 거란다.”

린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저거, 이길 수 있냐?”

“필멸의 존재라면, 불가능해.”

“그렇다면 저것이 목적을 이루기 전에 제자리로 돌려놓는 방법이 존재하나?”

“아니.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 어떤 수를 쓰더라도.”

“안 돼요!”

발레리아가 돌연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발레리아를 바라보았다.

거의 울상이었다.

“스승님! 또 돌아가시면 절대 안 돼요!”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이거 놔라.”

“……그러고 보니, 스승님이 영웅적 희생을 하실 분은 아니긴 한데.”

“근데 이 녀석이. 에잉.”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

린시스는 피식 웃었다.

발레리아는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방법이 있는 건가요?”

“잠깐.”

죽음은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 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반대로 생각하면, 나를 확보한다면 확실히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죽지 않고 저놈을 돌려보낼 방법이 있다. 생각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있다고?”

린시스도 예상 밖이라는 듯, 눈을 끔뻑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치는 것만으로 모든 생명을 꺼트리는 죽음에게도, 맹점은 있었다.

“저건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니야.”

“무슨 말씀이세요?”

“에인션트 드래곤, 마날루스는 내가 죽음을 속였다고 했거든.”

나는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죽음을 올려다봤다.

“한 번 속였는데, 두 번 못 속일 거 있냐?”

* * *

틱.

황성의 마지막 불빛이 꺼졌다.

살아 있는 자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깨달은 죽음은 천천히 황성 밖으로 나왔다.

죽음의 머리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모두 쓰러져 죽어 있는 가운데, 붉은 로브 차림의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발레리아 로안이었다.

“후, 진정(Calm Down). 하, 진정(Calm Down).”

발레리아는 가슴에 손을 얹고 연신 진정(Calm Down)을 외웠다.

하지만 좀처럼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마나가 건드릴 수 있는 정신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었다.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발레리아의 동작이 정지했다.

“으……아.”

눈동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발레리아는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7서클 마도사는 잘 훈련 받은 정규 기사단 수십 이상의 전력이다.

비록 스타터로, 7서클 마법을 완전하게 다루지는 못하지만.

다른 7서클 스타터와 비교하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거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이것도, 비슷한데.

저건 마법으로 대항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죽음 앞에 발레리아는 7서클 마도사도 탑주도 아닌, 그냥 인간이었다.

정신을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공포감.

죽음은 천천히 발레리아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움직여야 돼. 발레리아. 빨리.”

발레리아는 거의 울먹거림에 가까운 목소리로 자신을 독촉했다.

움직여야 한다.

저것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그러나 몸은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스승님.”

하지만 여기서 움직이지 못한다면, 허무하게 죽어 버린다면, 기껏 되살아난 델 로안은 또다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발레리아는 이를 악 물었다.

초인적인 의지로,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떨리는 다리에 힘을 줬다.

다가오는 것과 속도를 맞춰, 천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울상이 된 발레리아가 중얼거렸다.

지금은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저것은 지그문트를 봤을 때, 거의 공간이동에 준하는 속도로 이동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분에 걸쳐서 뒷걸음질만으로 움직이던 발레리아가 우뚝 멈춰 섰다.

“됐다.”

죽음이 처음으로 떨어진 곳.

기사들과 수많은 사람, 말 두 마리가 죽은 곳.

델 로안의 관이 올려진 마차 앞이었다.

발레리아는 관 앞에서 멈춰 섰다.

-하아…….

죽음은 똑같은 속도로 느릿하게 발레리아를 향해 움직였다.

발레리아는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도망치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충분히 텔레포트를 캐스팅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아주 조금이라도 더 죽음을 이곳에 잡아 두기 위해서.

시간을 벌기 위해서, 죽을 각오로 기다렸다.

“믿어요. 스승님.”

발레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의 숨결이 발레리아의 살갗에 닿았다.

그리고 발레리아는 절명했다.

죽음은 쓰러진 발레리아를 내려다봤다.

렘센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쾅!

우렁찬 소리가 적막을 깼다.

관 뚜껑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잠깐 하늘을 날던 관 뚜껑이 땅바닥에 꽂혔다.

죽음은 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오, 씨. 머리 아파 뒈지겠네.”

관에서 무언가 일어났다.

평범한 로브를 입은 노인이었다.

하얀 백발과 주름진 피부.

말투는 거칠었으나, 깊은 눈에서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지혜가 엿보였다.

대마법사 델 로안이 목을 꺾으며 관에서 일어났다.

* * *

-하아……

죽음의 일부는 차가운 숨을 내뱉으며 델 로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레리아에게 다가갈 때와 같은 느릿한 움직임으로 다가갔다.

하늘에서는 찢어질 듯한 비명과 절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

델 로안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좁았던 틈은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후였다.

죽음이 지상으로 떨어지기 위해 몸을 욱여넣고 있었다.

아래를 향해 뻗은 손은 거의 땅에 닿았다.

“곤란한데.”

델 로안은 인상을 찡그렸다.

죽음이 완전히 땅에 내려오는 순간, 계획이 어긋나고 만다.

그러나 죽음을 저지할 만한 힘은, 델 로안에게 없었다.

하여 죽음의 일부에게 먼저 다가갔다.

“내가 죽어야 끝난다면.”

죽음의 일부 앞에 선 델 로안은 눈을 감았다.

저항의 의사는 없다는 듯, 손을 내렸다.

“어서 죽여라. 기꺼이 죽어 줄 테니.”

죽음의 일부는 델 로안을 유심히 보았다.

그것은 분명 델 로안이었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었다.

어째선지 지그문트가 아닌 델 로안의 몸에 있긴 했지만.

그건 죽음에게 있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찾았다.

죽음의 차가운 손가락이 델 로안의 목을 움켜쥐었다.

조이는 힘이 점점 강해지더니, 엄지가 목울대를 꾹 누른다.

델 로안은 눈을 부릅뜨고 숨을 내뱉었다.

“컥, 헉.”

문제가 발생한 건 그때였다.

죽음의 일부에게 델 로안이 죽기 전.

진짜 죽음의 양팔이 하늘의 틈을 비집고 나온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은 태어나는 아이처럼 거꾸로 지상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델 로안의 동공이 떨렸다.

“……!”

완전히 죽음에 이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픽픽 죽었던 다른 사람과 달리, 델 로안은 쉽게 죽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죽기 전에, 죽음이 먼저 지상에 당도할 것 같았다.

“안, 돼……!”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에도, 델 로안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약하게 중얼거렸다.

진짜 죽음, 죽음의 본체가 지상에 떨어지는 순간.

죽음을 속이는 건 불가능해진다.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속도를 늦춰야 했다.

그러나.

‘손이, 없다.’

린시스는 개입을 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발레리아는 죽었고, 델 로안은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태.

아…… 아아아아……!

절망이 지상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 * *

“내 지금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죽음의 일부에게 목이 졸려, 의식이 희미했다.

희뿌연 시야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검 한 자루를 든 노인.

그랜드 소드 마스터, 요아힘 월베른이었다.

“일단 로안 대공. 오랜만이오. 죽은 줄 알았더니만, 기어코 관 짝을 걷어차고 일어나시는군.”

충분히 혼란스러울 법한 상황에서도, 요아힘은 침착했다.

델 로안의 손짓에, 요아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죽음은 이제 좁은 틈에서 상체를 빼내고 있었다.

척 봐도 선한 존재는 아니었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시간이 없는 것 같으니.”

요아힘 월베른은 델 로안을 흘끔 바라보았다.

델 로안이 저것에게 순순히 목을 내주며,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한마디.

어쨌든 간에 저걸 내려오게 해선 안 된다.

요아힘은 다른 어떤 것보다 자신의 감을 믿었다.

아아아아……!

끝내 허리까지 빠져나온 죽음이 지상으로 손을 뻗었다.

요아힘은 무릎을 살짝 굽히고 검 자루에 손을 올렸다.

두 눈동자는 하늘 위의 죽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로안 대공을 믿겠소.”

주름진 손이 검 손잡이를 움켜쥔다.

죽음을 마주한 모든 이가 느꼈던 공포를 느끼지 못한 듯.

그 동작에는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숨을 깊게 들이쉰다.

“스읍.”

검집 위로 검날이 드러났다.

델 로안과 같이, 인간을 초월한 괴물.

검의 끝에 달한 기사가, 검집에서 빼낸 검을 위로 올려 베었다.

아……?

다른 기사와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오히려 조금 느리기까지 한 올려 베기.

검날의 길이는 하늘 위의 죽음에게 닿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았다.

요아힘은 검을 겁집에 집어넣었다.

철컥.

조그마한 쇠 부딪치는 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없었다.

요아힘이 검을 올린 방향으로 긴 선이 그어졌다.

이질적인 선을 따라 공간이 틀어졌다.

하늘이 잘렸다.

화악.

낮게 깔린 짙은 먹구름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구름 너머로 별이 수놓인 저녁 하늘이 드러났다.

죽음은 아래를 향해 뻗었던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조금이지만, 틈 안쪽으로 물러났다.

아…… 아아아아!

요아힘은 혀를 찼다.

고작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하는 정도가 한계였다.

고개를 돌렸다.

그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었다.

늘 그랬듯이.

“로안 대공?”

하나, 델 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죽음의 일부는 델 로안의 시체를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거둬들이듯 입속에서 무언가를 뽑아냈다.

-회수했다.

요아힘이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한 신음이었다.

그것이 위쪽으로 움직였다.

날개나 마나를 통해서 날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위를 향해 천천히 부유했다.

이윽고 죽음의 일부는 하늘 틈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죽음의 본체와 합류했다.

아……! 아아아……!

길게 울부짖은 죽음이, 틈의 안쪽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요아힘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로안 대공께서, 뭔가 한 것이오?”

델 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죽음에게 영혼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죽음이 틈 안으로 몸을 집어넣자, 틈이 저절로 닫히기 시작했다.

하늘의 균열이 사라지며, 죽음은 왔던 것처럼 갑작스레 모습을 감췄다.

“으.”

이윽고, 한 기사가 신음하며 몸을 일으켰다.

헬름을 벗고, 머리를 부여잡는다.

가장 먼저 죽음과 마주했던 노익장, 옥스였다.

요아힘은 인상을 찡그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 * *

“그런 형편 좋은 이야기가…….”

“가능해. 저건, 그럴 만한 존재거든.”

지그문트는 말했다.

죽음이 목적을 달성하고 하늘 위로 올라가는 순간.

지금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없었던 일이 될 거라고.

발레리아는 몹시 당황했다.

“하지만, 다 쓰러져 있다가 일어날 텐데요?”

“그것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을 거다. 아마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빈 시간에 대한 기시감이라든지……”

발레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그문트는 단언했다.

“린시스가 말했잖아. 저것의 목적은 바꾸는 게 아니라 바로잡는 것이라고.”

저것의 목적은 순리대로 죽었어야 할 지그문트를 죽이는 것이다.

갑자기 나타나 팔베르크 제국의 모든 제국민들을 학살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저것이 땅에 내려온 것은, 흐름을 바꿨다고 말할 수 있거든.”

설령 저것이 누군가를 죽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출현한 것만으로도, 원래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었다.

즉, 뭔가 바뀐 것이다.

“저게 돌아가는 순간, 시간 역행이라도 일어난다는 말씀이세요?”

“글쎄다. 그건 모르겠구나. 내 상식 밖에 일이라서 말이다.”

“속인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어떻게 하실 속셈이세요?”

“내 속에는 내가 하나 더 있거든.”

“네?”

지그문트는 델 로안의 기억에 대해서 설명했다.

발레리아는 황당하다는 눈치였지만, 금방 납득했다.

워낙 곁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을 숱하게 겪다 보니 적응이 빨랐다.

“나 대신, 내가 끌려가는 거란다.”

말투가 바뀌었다.

지그문트가 아니라, 목오 사막의 던전에 있던 델 로안이 나온 것이다.

발레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무아르와 메어리들을 통해 사용하려던 마법이 있단다.”

육신과 의식의 연결.

델 로안의 육신에 델 로안의 기억을 담는 것이다.

그로써 죽음을 속인다.

발레리아는 납득하긴 했지만, 내키진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스승님도 스승님이잖아요.”

“나는 나지만, 동시에 내가 아니야. 죽긴 하겠지만 생명이 아니니, 마음 쓸 거 없다.”

지그문트의 몸을 빌린 델 로안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7서클 마도사 시절의 델 로안.

그는 스스로 지그문트에게 자신을 미끼로 쓰라고 말했다.

“나는 일찍이 시노드 교구에서 대부분의 힘을 사용했어. 어차피 자연히 소멸할 운명이었지.”

“그래도!”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보단, 내게 도움을 주고 싶구나.”

“……잘 모르겠어요.”

지그문트는 발레리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아주 오래 전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 놓았다.

그리고 공간이 물에 번진 그림처럼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발레리아 로안은 눈을 떴다.

“어?”

* * *

“됐어?”

“됐어!”

나고와 얘야가 결의를 다졌다.

나는 흑탑 꼭대기에서 눈을 떴다.

잠깐 눈을 깜빡인 것 같았는데.

긴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없네.”

죽음이 내려온 흔적은 없었다.

무심한 빗줄기만 내려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한밤의 꿈인 것 같았다.

장례 행렬은 아무런 차질도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뭐가?”

“몰라.”

나고와 얘야는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얘야는 마차에 올려진 관을 내려다보며 내게 말했다.

“갔다 올게?”

“아니. 가면 안 돼.”

나는 얘야를 말렸다.

비록 죽음은 델 로안을 끌고 갔지만.

어쩐지 내 시체에 다시 접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무아르를 덮은 뒤, 나고와 얘야에게 철수 신호를 보냈다.

나고와 얘야는 조금 의아한 눈치였지만,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요아힘은 확실히 기억할 텐데.’

요아힘 월베른은 여러모로 나와 비슷한 점이 많다.

필시 죽음에 대한 기억도 그대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외에는 잘 알 수 없었다.

린시스나 발레리아라면, 어렴풋하게 기억할 수도 있었다.

가장 먼저, 신성을 확인했다.

-신성?

뒤이어, 뭔가 뒤통수를 때렸다.

아프진 않았지만 확실히 감촉이 있었다.

평소와 같은 페어리 모습의 신성이 손을 털고 있었다.

-다행이네. 괜찮냐?

죽음과 마주쳤을 때, 잘못된 줄 알았다.

신성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표정은 없었지만, 쏘아보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죽어.

-진짜 죽을 뻔했는데, 말이 좀 심하네.

신성은 단단히 부아가 난 상태였다.

내 업보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얘가 없었으면 반항 한 번 못 하고 죽음에게 끌려갔을 것이다.

-고맙다.

-됐음.

-삐졌냐?

-아님.

-그럼 뭔데?

-화남.

신성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저번에는 삐짐이었는데, 이번에는 화남으로 올라갔다.

당분간은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나고와 얘야 남매를 롭에게 보낸 뒤, 별궁으로 돌아갔다.

발레리아와 단, 라스, 루터 등의 주요 인물의 생존을 확인했다.

‘황제랑 렘브란트가 살아 있는 건 좀 아쉽군.’

* * *

며칠에 걸친 델 로안의 장례는 순탄하게 끝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조금 과하게 많은 일이 일어났다.

팔베르크 제국은 웨스트리아 왕국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며, 용의 산맥은 마족과의 연관성을 빌미로 팔베르크 제국의 움직임을 제한시켰다.

그리고 죽음이 다녀갔다.

“꿈인가 했는데. 꿈이 아니었네요.”

발레리아의 별실.

나는 단과 발레리아에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줬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완전히 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둘은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역시 발레리아는 어느 정도 기억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도 기억이 납니다. 도련님께서 얘기해 주시지 않았다면 몰랐겠지만요.”

의외로, 단도 죽음의 일부와 마주했던 기억을 아주 어렴풋하게 가지고 있었다.

얘도 이제 내 영향을 상당히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환생한 후로 단은 거의 대부분 나와 함께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가주님과 함께 전력으로 싸웠다가,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그거랑 싸웠다고요?”

“예.”

“용감하시네요. 전 도망치는 것도 버겁던데.”

“하하.”

발레리아의 칭찬에, 단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간에 죽음을 속이는 데 성공했지만, 언제 그것이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

“단순히 스승님 의식이 스승님 시체에 접근해서, 그것이 나타난 건가요?”

“그것도 있지만, 신성이 말하길 리옐이 근처에 없었기 때문이라더군.”

“꼬맹이가요?”

“리옐 아가씨께서 왜 거기서 나옵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신성은 죽음으로부터 나를 감춰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부터, 나를 죽음으로부터 숨겨 주고 있었던 존재가 있었다.

그것이 리옐이었다.

“알게 모르게 지켜 주고 있었던 모양이야.”

신성과 리옐은 힘을 합쳐서 나를 죽음으로부터 감췄다.

둘 중에 하나라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진즉 죽었을지도 모른다.

시노드 교구의 늪에서 마녀가 직접 언급한 적이 있다.

‘죽음의 눈을 속이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면서, 리옐에게 고마워하라고 했지.’

지금 돌이켜 보면, 아주 중요한 충고였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만약 신성과 리옐, 둘 다 내 곁에 있었다면 죽음은 나를 발견하지 못했을 테니.

“돌아가는 대로 리옐과 합류해야겠어.”

“으음, 그래야겠군요. 그것과 다시 마주하고 싶진 않습니다.”

“완전 동감이에요.”

그러고 보면, 리옐은 기를 쓰고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통신구를 통해 내게 빨리 돌아오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린아이의 투정으로 여겼는데, 이런 뜻이 담겨 있을 줄은 몰랐다.

알고 나를 지키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자고 있을 때 몰래 나온 거, 사과해야겠네.”

* * *

조문단은 별문제 없이 레온하트로 귀환했다.

네르갈에 도착하자마자 나와 단, 그리고 라스는 곧장 마이어 영지로 돌아갔다.

리옐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타게나. 마침 혼자 가기 심심했는데, 잘됐군.”

밀러 자작이 호의를 보인 덕분에,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마차 안은, 솔직히 조금 불편했다.

평소처럼 침묵으로 일관하는 라스.

밀러 자작은 대조적으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단은 귀족들 사이에 낀 탓인지, 한마디도 못하고 눈동자만 굴렸다.

“단.”

“예. 가주님.”

“……아니다.”

라스는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다.

나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만큼, 죽음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후유증으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할 말도 없었기에, 라스에게 궁금하던 것을 물어봤다.

“아버지.”

“음.”

“요아힘 월베른 경과는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라스 마이어가 평범한 귀족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변방에서 썩고 있을 만한 인재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요아힘 월베른과 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

사람은 극단적으로 가리는 노인네인데, 먼저 다가올 정도였으니.

“몇 번 검을 부딪쳤을 뿐이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랑요?”

내가 알기로, 라스 마이어는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기사였다.

오러나 마나는 그 경지가 높아질수록, 부숴야 할 벽이 급진적으로 두꺼워진다.

그만큼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기사는 드물며, 중급이 기사와 큰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요아힘 월베른과 검을 부딪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검 한 번 슥 그어서 산을 자르고 하늘을 가르는 미친 노인네랑, 검을 부딪친다고?’

머릿속으로 요아힘과 검으로 겨뤄 봤다.

지금 상태로는 한 합은커녕, 검을 뽑기도 전에 죽을 것 같았다.

아티팩트, 마나, 신성까지 총동원하면 몇 초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적어도 드래곤급, 그 위로 올라가야 해 볼만 할 텐데.

‘힘을 감추고 있는 건가?’

나는 라스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선언식 당시, 발락 리빙데드를 일방적으로 패는 걸 보긴 했지만.

검은 들고 있었을 뿐, 직접 휘두르진 않았다.

밀러 자작은 위로하듯 라스의 등을 두드렸다.

“그 일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구나,”

“알겠습니다.”

* * *

마이어 영지에 도착한 건 이른 아침이었다.

마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조그마한 인영이 내게 돌진해 왔다.

“억!”

배에 정통으로 박치기가 들어왔다.

리옐이 해맑게 웃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갑옷을 안 입고 다녀서 다행이었다.

“아빠!”

“오냐.”

“헤헤.”

안아 들어 주니, 기다렸다는 듯 볼을 비벼왔다.

죽음의 차가운 손길 대신, 말랑한 볼살의 감촉이 느껴졌다.

역시 이쪽이 훨씬 나았다.

시선이 느껴져서 흘끔 뒤를 보니, 라스가 부럽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리옐.”

“응?”

“저기, 할아버지도 있다.”

“할아부지!”

리옐이 팔을 벌렸다.

옮겨 주니, 라스는 아주 익숙하게 리옐을 받아 들었다.

리옐은 내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라스의 뺨에 볼을 비볐다.

라스는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지만, 퍽 만족한 눈치였다.

“다녀오셨습니까. 가주님. 도련님.”

“다녀오셨어요.”

윌리엄 집사장도 나와 있었다.

리옐의 탄생화를 들고 있는 마리나도 있었다.

“어떻게 알고 나와 있냐?”

“리옐 님께서 왠지 오실 것 같다고 밖에서 기다리자고 하셨답니다.”

“신기하군요. 누굴 닮아 이리 감이 좋으신지.”

“히히.”

“들어가시죠.”

마이어 저택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휴식하며 여독을 풀기로 했다.

물론 나는 쉴 새가 없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통신구를 꺼내 들었다.

셋째 왕자, 루터 레온하트가 얼굴을 비췄다.

“지그문트 경. 잘 들어가셨습니까?”

“겉치레는 시간 아까우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헨드릭 왕세자님과 교섭을 끝냈습니다.”

“좋아.”

루터 레온하트는 렘센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트리옌의 헨드릭 왕세자에게 쏟았다.

그 결과,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 낼 수 있었다.

트리옌 왕국은 팔베르크 제국이 우선적으로 장악한 국가다.

서대륙의 중심부라는 중요한 위치에 있으니, 웨스트리아보다 우선순위가 높았을 것이다.

‘헨드릭을 제외한 왕족은 페러시트에 감염된 상태다.’

아마 이번 장례식에서 황제는 헨드릭을 손에 쥐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헨드릭 왕세자는 황제에게 거의 굴복한 상태였다.

하지만 루터와 내가 개입함으로써 상황을 뒤집었다.

아득한 절망 속에서, 한 가닥의 희망을 잡은 헨드릭은 금방 정신을 되찾았다.

“지그문트 경께서는 조만간 트리옌 왕국에 정식으로 파견될 예정입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로써? 아니면 엘비아의 은인으로써?”

“어느 쪽이 좋으십니까?”

“레온하트의 수호자. 지그문트 마이어를 더 드러내면 안 될 것 같아서.”

“알겠습니다.”

황제는 분명 나를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지그문트 마이어가 트리옌 왕국으로 가, 헨드릭 왕세자와 접촉한다면, 당연히 눈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신분으로 가는 편이 나았다.

“페러시트들을 안전하게 적출할 수 있으신 건 확실히 맞습니까?”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가능할 거야.”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면, 뭐든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냥 좀, 달래기만 하면 돼.”

“달래신다고요?”

루터 레온하트는 눈을 깜빡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신성이 화나서 대답을 안 한다고 말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정이 잡히는 대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대기 부탁드립니다.”

“그래.”

* * *

나는 오랜만에 망아의 숲을 찾았다.

마나리아를 회수하고 꽤 시간이 지났다.

마나 메이즈는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나 인적은 드문 건 여전했다.

“아빠. 이쪽이야!”

“그래. 너무 서두르지 마라. 넘어진다.”

“으히히. 알았어!”

리옐은 내가 모르는 것을 소개시켜 주는 게 마냥 좋은 것 같았다.

해맑게 웃으며 나를 안내한다.

내가 팔베르크 제국에 가 있는 동안, 마녀의 집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근처에서 최고로 쳐주는 목수를 수배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어. 윌리엄 할아부지다.”

“……윌리엄?”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마이어가의 집사장, 윌리엄이었다.

윌리엄은 축 어깨를 늘어트린 채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무려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윌리엄.”

“지그문트 도련님? 그리고 리옐 아가씨.”

“여기서 뭐 하냐?”

윌리엄은 눈을 굴렸다.

어색하게 꽃을 뒤로 숨겼다.

리옐의 눈이 윌리엄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이미 들켰다는 걸 깨달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허허, 차이고 오는 길입니다.”

“안타깝군.”

윌리엄도 어지간히 순정파다.

젊었을 적 마녀를 따라다녔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럴 줄은 몰랐다.

리옐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윌리엄을 토닥였다.

키 차이 때문에 허벅지를 토닥이긴 했지만 말이다.

“힘내! 연애는 어려운 거야!”

“예. 힘내겠습니다. 그보다, 리옐 아가씨, 벌써 연애를 아십니까?”

나는 윌리엄을 빤히 바라보았다.

윌리엄과 눈이 마주쳤다.

“윌리엄, 마이어 영지에 리옐 나이대의 남자아이가 있던가?”

“지금 당장 리스트와 프로필을 작성해 오겠습니다.”

“전부 나랑 대련 한 판씩 하자고 전해라. 진검으로.”

“지체 없이 전달하겠습니다.”

리옐은 나와 윌리엄을 만류했다.

연애가 어렵다는 말은 세계수가 리옐에게 하소연한 것으로 밝혀졌다.

애한테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윌리엄과 헤어진 우리는 마녀의 집으로 향했다.

“전이랑 똑같은데?”

“응!”

마녀의 집은 시노드 교구의 늪에 있던 것과 같은 나무 오두막이었다.

처마에 설치된 횃대에는 까마귀 후닌이 앉아 있었다.

나와 리엘을 알아본 후닌이 오두막 문을 열었다.

“도련님! 피하세요!”

다급한 마리나의 목소리.

문 밖으로 검은 형체가 튀어나왔다.

마녀가 다루는 검은 안개 같기도 했지만, 달랐다.

기이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그것은 분명 악령이었다.

끼히히히히!

빠른 속도로 달려든 악령이 리옐에게 손을 뻗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리옐은 반응하지 못했다.

대신 내가 반응했다.

철썩!

뺨을 맞은 악령이 저만치 날아갔다.

마리나는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날아가는 악령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어떻게 유령을 때리세요?”

“잘.”

마나를 잘 조절하면, 영체도 팰 수 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마나가 부족해서 못 했겠지만, 지금은 된다.

마나로 악령을 묶어, 내 앞에 놓았다.

악령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뺨을 잡고 나를 보았다.

-죽을래?

-저, 전 이미 죽었는데요.

-죽은 놈은 못 죽일 것 같냐?

마리나가 눈치 빠르게 리옐의 눈을 손으로 덮었다.

나는 악령을 패기 시작했다.

리옐에게 손을 대자마자 정화될 만큼 약한 악령이었다.

그러나 의도가 너무 괘씸했다.

끼에에엑……!

절묘하게 소멸하지 않을 정도로 힘 조절을 해서 패기를 수 분.

악령은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성불하듯 희뿌옇게 변해 위로 올라갔다.

나는 하늘 위로 올라가는 악령을 덥석 붙잡았다.

-어딜 도망가.

-죄송합니다. 그냥 죽여 주시면 안 될까요?

-죽이긴 할 건데, 애한테는 사과 안 해?

-자, 잘못했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으아아아! 원통하다!

다시 팼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악을 쓰던 악령은 결국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마리나와 마녀가 질렸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잉. 독한 놈. 악령을 잡고 패는 건 네가 유일할 게다.”

“분명 엄청 나쁜 악령일 텐데, 왠지 불쌍해요.”

“뭔데, 뭔데? 마리나 언니, 나도 볼래!”

“어린이가 관람하기에는 좀.”

마리나의 손에 가려 악령 패는 걸 못 본 리옐만 궁금증 가득한 얼굴이었다.

“악령은 어쩌다 튀어나온 거냐?”

“제가 연습하다가, 실수로…… 정말 죄송합니다.”

“어차피 얼마 못 가서 소멸할 놈이긴 했는데, 어쨌든 조심해라.”

“네에…….”

우리는 마녀의 집에 들어섰다.

집 구조도 전과 비슷했다.

“모처럼 지원해 준다는데, 왜 이렇게 만들어 놨어?”

“복작복작한 게 좋아서 말이네.”

마녀는 손수 차를 내왔다.

“마리나를 제대로 가르칠 작정인가 보군.”

“그래. 이 아이가 스스로 지킬 힘이 필요하다 했으니.”

“근데, 영 아닌 것 같다?”

“맞네. 우리 일족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원념을 못 받아들이고 있어.”

시무룩해진 마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마녀는 내 성격을 잘 알았다.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래. 보아하니, 그것을 만난 것 같군.”

그것.

렘센에서 만난, 죽음을 일컫는 말이었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

“용케도 살아남았군그래.”

“잘 속여 넘기긴 했지. 그래도, 아무래도 불안해서 말이야.”

“자네 생각대로일 걸세.”

마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것은, 자네를 데려가기 위해 다시 돌아올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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