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앙파상
뒷짐을 진 채 정원을 산책하던 라그힐이 우뚝 멈춰 섰다.
추억에 젖은 눈으로 나무 아래를 바라본다.
“옛날 생각나지 않나?”
평소의 나른함보다는 부드러움이 묻어 나오는 어조였다.
그 뒤에는 발레리아 로안이 있었다.
“여기서 너랑 벨수스랑 뛰어 놀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정말 그렇군요. 황제 폐하.”
발레리아와 벨수스, 라그힐은 어렸을 적 이 정원에서 곧잘 놀았다.
눈앞에 아른거릴 정도로 선명한 기억이었다.
라그힐은 눈살을 찡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예의 차릴 필요 없어. 우리밖에 없잖아.”
라그힐은 수많은 시종들과 호위 기사들은 모두 물려놓은 상태였다.
발레리아는 정원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들을 흘긋 보았다.
기사들은 언제든지 돌입할 태세로 검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황제 폐하, 저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개미 한 마리 못 죽이던 심약한 왕자는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말괄량이 기질이 다분하던 대마법사의 제자는 적탑주가 되었다.
곧잘 삐지고 틱틱 대던 해츨링은 블랙 드래곤이 되었다.
불과 10여 년이 지났을 뿐인데,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렇지.”
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테이블에는 의자 세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전 황제, 델 로안, 그리고 린시스가 곧잘 앉아 있던 곳이다.
셋은 저기서 담소를 나누며 아이들을 구경하곤 했다.
라그힐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화제를 돌렸다.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나?”
“재차 말씀드리지만, 없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군. 부족한가?”
건국제 당시, 라그힐은 한 번 발레리아를 회유하려 했다.
팔베르크 제국에서는 파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을 내놓았다.
델 로안의 유산 전체와, 공작 위까지 준비해 뒀으니.
제국의 위세를 생각하면, 거절할 리 없는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레온하트 왕국은 네 가치를 몰라.”
발레리아는 과거의 델 로안보다 더 빠르게 7서클에 도달한 인재다.
대마법사 델 로안의 제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훗날 대마법사가 될 가능성도 충분했다.
당장의 전력까지 생각하면, 서대륙 내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늘 말했잖아. 대공 같은 대마법사가 되고 싶다고.”
“황제 폐하.”
“팔베르크 제국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할 수 있다.”
발레리아의 나지막한 부름에도, 라그힐은 말을 이었다.
반론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한 어조였다.
멀리 있던 시종들이 황제의 기세에 위축됐다.
“필요하다면 드래곤 하트든 뭐든 구해 주지. 그러니, 내 손을 잡도록.”
황제는 손을 내밀었다.
발레리아는 빤히 그 손을 내려다봤다.
열 받는다는 듯 폭 한숨을 내쉬었다.
“야, 내가 안 간다고 했어, 안 했어?”
순간적으로 돌변한 발레리아의 태도에, 황제는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어렸을 적, 셋의 서열은 확실했다.
델 로안에게 온갖 마법, 책략과 꼼수를 전수 받은 발레리아가 맨 위.
태생적으로 마법과 힘을 지니고 있던 벨수스가 두 번째.
평범하기 그지없는 어린아이였던 라그힐은 세 번째에 불과했다.
“사람이 말을 하면 귀를 기울여 주시길, 황제 폐하.”
“하, 하하하!”
라그힐은 폭소했다.
그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보여, 도리어 당황한 쪽은 발레리아였다.
한참 동안 웃던 라그힐이 끅끅거리며 웃음을 멈췄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미치셨습니까?”
“후우, 배 아파. 이러니 내가 너를 곁에 두려하는 것이지.”
얼마나 웃었는지,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그때, 한 시종이 쭈뼛거리며 찾아왔다.
라그힐은 언제 웃었냐는 듯 표정을 굳히고 시종을 바라보았다.
“짐이 들어오지 말라 했을 텐데?”
“소, 송구합니다! 렘브란트 님께서, 급한 사항이라고, 당장 전달하라 하시어……!”
라그힐은 눈썹을 찡그리고 몹시 불쾌하다는 것을 대놓고 드러냈다.
시종은 포식자를 마주한 사슴처럼 벌벌 떨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라그힐은 잠시 발레리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시종에게 다가갔다.
“렘브란트의 명령이 짐의 명령보다 위에 있나?”
“아, 아니옵니다!”
“짐이 오늘은 기분이 좋아 넘어가는 것이다.”
“하늘과 같은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시종은 발레리아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했다.
라그힐은 턱을 가볍게 까딱여 말하는 것을 허락했다.
“리에이트 교국의 집행자라는 분들께서 황성에 찾아왔사옵니다.”
* * *
황성의 응접실 앞.
요안과 집행자들은 팔베르크 제국의 기사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양쪽 모두 무기만 빼들지 않았을 뿐, 경계심이 가득한 상태였다.
응접실 내에는 집행자의 대표 격인 요안과, 제국의 대표 격인 아페 백작이 있었다.
시종이 차를 내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리에이트 교국의 집행 기사단장, 요안이라고 합니다.”
“팔베르크 제국의 아페 백작이라네.”
평소와 달리 사무적인 태도를 보이는 요안과 달리, 아페 백작은 여유로웠다.
특유의 유한 분위기에, 차가운 응접실 공기가 조금 풀어지는 것 같았다.
“황제 폐하께 알현을 요청하신 이유가 궁금하군.”
“가급적이면 팔베르크 제국의 황제 폐하께 직접 말씀드려야 할 사항입니다.”
“황제 폐하께선 아무 때나 만나 뵐 수 있는 분이 아니라네.”
차를 한 모금 마신 아페 백작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급한 사안이라면, 내가 전달하는 편이 빠를 걸세.”
“기다리겠습니다.”
“대마법사 델 로안 대공의 장례식이 진행 중이라는 건 알고 있나?”
“중요한 일입니다. 추후, 국가적인 문제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요안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을 거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아페 백작은 난처한 듯 침음을 흘렸다.
리에이트 교국, 특히 집행자들은 무시하기 어려운 존재다.
위스크 백작령의 사건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한데.”
“이러시면 곤란한 건 저희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페 백작님.”
요안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아페 백작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자신의 의지와 정의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곧은 눈이었다.
요안은 목함을 탁자에 올려 뒀다.
아페 백작은 의문스러운 눈으로 목함을 바라보았다.
“이게 뭔가?”
“열어 보십시오.”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아페 백작은 조심스레 목함을 열었다.
검은 씨앗 같은 것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잠든 상태의 페러시트였다.
아페 백작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페러시트들을 내려다봤다.
“페러시트. 마계의 기생 생물입니다.”
“마계의 기생 생물? 그것이 어찌 여기에.”
“렘센의 골목에서 심연을 발견했습니다.”
요안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심연 속으로 들어갔다가, 심연의 틈으로 빠진 것.
심연의 틈에서 틈의 지배자, 헤르창과 조우한 것.
그리고 헤르창이 인간과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까지.
아페 백작은 요안의 말을 한마디 대답도 없이 주의 깊게 이야기를 들었다.
“다행히 저희는 심연의 끝에 도달했고, 거기서 이와 같은 증거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설마, 팔베르크 제국에 마계와 연관된 이가 또 있다니.”
“여러 차례에 걸쳐 살아 있는 인간을 공물로 바친 흔적 또한 발견되었습니다.”
“그렇게 끔찍한 일이…….”
아페 백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입을 틀어막았다.
눈이 파르르 떨린다.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당장 조사를 진행하고, 진상을 규명하겠네.”
“아페 백작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한 시라도 빨리…….”
“언제까지 시치미를 떼실 생각이십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던 아페 백작이 뚝 동작을 정지했다.
요안은 말을 이었다.
“심연의 끝은 한 저택의 지하실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하실은…….”
아페 백작과 요안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아페 백작님의 저택 지하실이었습니다.”
요안이 검을 뽑아 들어 아페 백작의 목에 겨눴다.
아페 백작은 목에 들어온 칼을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무슨 횡포인가.”
“마족과 내통하는 자와 더 이상 말을 섞을 수 없습니다.”
“나는 모르는 일일세!”
아페 백작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요안은 검을 내려놓지 않았다.
“사람을 가둬 뒀던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 우리까지 발견 됐습니다.”
“내 저택이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이미 저택은 저희 집행자들이 장악한 상태입니다.”
아페 백작은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 양손을 천천히 올렸다.
그리고 차분하게 요안을 진정시켰다.
“이보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심연을 오가며 틈의 주인과 내통한 사실이 있습니까?”
“심연이나 틈의 주인 같은 이야기도, 오늘 처음 들었다네.”
“그렇다면 지하실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아페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 내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하네.”
“누구나 할 수 있는 변명입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나처럼 늙은 귀족은 적이 많다네. 자네는 속고 있는 걸세.”
“진술은 공적인 자리에서 하시지요.”
요안은 좀처럼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힘없는 노인이었기에, 제압하는 건 무의미해 보였다.
검을 집어넣었다.
“이 일은 리에이트 교국에 정식으로 보고될 겁니다.”
“보고된다는 건, 아직 보고하진 않았다는 얘기구먼.”
사뭇 달라진 말투.
섬뜩한 감각을 느낀 요안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페 백작은 태연한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조금 식은 차로 입술을 적시며, 고개를 까딱였다.
“문, 열어 보게나.”
요안은 인상을 찡그리고 문을 열었다.
황성에 들어올 때 무기를 빼앗긴 집행자들이, 기사들에게 제압당한 상태였다.
손을 뒤로 꺾인 채 바닥이나 벽에 몰아 붙여져 있었다.
“요안 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페 백작님.”
“리에이트 교국의 성기사들이 황성에 강제로 침입했다.”
아페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행자들은 정예라곤 하나, 마족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성기사들.
인간들을 상대로는 그냥 성기사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다.
제국의 기사들의 머릿수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황성에 들어올 때, 요안을 제외한 성기사들은 무기를 맡겨야 했다.
“난동을 일으킨 후, 도주. 현재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이렇게 되겠구먼.”
“이렇게 큰 소란을 피우고도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심연의 틈에서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헤르창이 지그문트에게 말했던 전임자, ‘노인’.
아페 백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틈의 주인. 그놈이 사람 하나는 잘 처리하거든.”
요안은 아페 백작에게 검을 겨누려고 했지만, 아페 백작은 여유로웠다.
부하들을 모두 제압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검을 거두는 편이 좋을 거야. 자네 말대로, 외교적인 문제로 번질 수도 있으니.”
“저희 리에이트 교국은…….”
“혼란스러운 상태지. 대사제와 성자가 제대로 부딪쳤다면서?”
끝내 차를 전부 마시고,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페 백작이 손을 까딱이자, 기사 둘이 응접실 내로 진입했다.
소드 익스퍼트 중급, 혹은 그 이상.
제국다운 상당한 전력이었다.
“순순히 투항하게.”
“여태까지, 전부 연기였습니까?”
“그래. 내 지하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내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아페 백작의 대답에, 요안은 검을 떨어트렸다.
어차피 싸워 봤자 이기지도 못할뿐더러, 부하들의 목숨이 위험한 상태.
싸울 의사를 상실한 것 같았다.
“드디어 자백했군.”
“그래서, 뭐 달라지는 거라도 있나?”
“있지. 왜 없겠니?”
대화에 끼어드는 낯선 목소리에, 아페 백작이 기겁했다.
“당신이, 어떻게?”
* * *
“리, 린시스 님.”
아페 백작은 아연실색했다.
세로로 찢어진 노란 눈이 아페 백작을 응시했다.
드래곤 피어(Dragon Fear).
지상 최강의 생물의 존재감에, 모든 기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아페 백작과 요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놈이……!’
아페 백작은 요안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요안도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무릎을 꿇은 채, 난생 처음 겪는 드래곤의 존재감에 이를 꽉 깨물고 있다.
린시스 또한 요안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페.”
린시스가 응접실에 발을 들였다.
아페 백작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땅 속에 묻힌 것처럼 가슴이 갑갑했다.
가까스로 호흡만 유지한 채, 린시스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
하얀 손이 아페 백작의 어깨에 닿았다.
“지금, 뭐라고 했지?”
“무고한 인간을 공물로 바치고, 심연의 틈에서 페러시트를 들여왔다 했습니다.”
아페 백작은 입을 열었다가 기겁했다.
분명 어떻게든 변명을 하려고 했는데.
엉뚱하게도, 속으로 삼키려던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고대 마법, 터치 오브 트루스(Touch of Truth) 변환 마법.
진실의 입(Mouth of Truth)이었다.
자그만치 8서클에 달하는 드래곤의 마법은 아페 백작에게 진실을 강요했다.
“그래. 그 일은 혼자 벌인 일이더냐?”
“헙, 아닙니다. 제게 명령을 내린 분이 계십니다.”
아페 백작은 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입은 멈출 생각을 안 했다.
진실이 입 밖으로 나올 때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드래곤 프레셔 때문에 생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자가, 누구더냐?”
“제게 명령을 내린 분은……!”
아페 백작은 남은 모든 힘을 쏟아서 입을 다물었다.
발설은 곧 죽음이다.
혀를 자르는 쪽이 차라리 낫다.
그러나 진실의 입은 아페 백작의 입을 강제로 열었다.
핏.
동시에, 아페 백작은 서늘한 바람이 목구멍을 관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아페 백작의 마지막이었다.
린시스가 손 쓸 틈도 없이, 아페 백작이 절명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린시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 요아힘 월베른이 검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요아힘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꼬마야.”
요아힘이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뒷짐을 진 황제, 라그힐이 걸어 나왔다.
예의 태연한 얼굴로 죽은 아페 백작을 내려다본다.
“마족과 내통한 인간을 죽였습니다.”
“조사가 끝난 뒤 처리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시선이 마주쳤다.
팽팽한 신경전에, 죽어 나가는 건 애꿎은 기사들이었다.
드래곤 프레셔에 짓눌려 있던 요안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몸이 터질 것 같았다.
“제가 해결해야 할 일입니다. 린시스 님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 눈에는 찔리는 게 있어서 급하게 처리한 걸로 보이는데?”
라그힐은 어깨를 으쓱였다.
린시스는 손을 뻗었다.
페러시트가 들어 있는 목함이 저절로 요안의 품에서 빠져나가 린시스의 손에 내려앉았다.
린시스는 페러시트를 확인한 뒤, 목함을 닫았다.
“팔베르크 제국에 마족의 손이 닿았다는 확인을 마쳤다.”
물증에, 증언까지 전부 확보가 끝난 상태.
이에 대해서는 발뺌할 구석이 일절 없었다.
“드래곤의 규율에 의거, 팔베르크 제국에 대한 조사를 착수하겠다.”
“팔베르크 제국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입니다.”
황제는 곧바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족의 개입이 확인됐다고 한들, 드래곤이 나설 수 있는 건 아니다.
지상의 조율자인 드래곤이라고는 하나, 그들이 움직이는 조건은 극단적으로 까다로웠다.
그러나.
“얼마 전, 벨수스 블랙에게서 특수한 페러시트가 기생하고 있던 것이 확인됐다.”
“벨수스에게서요?”
“벨수스 블랙에게 페러시트를 심은 것이 제국의 인물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구나.”
지그문트 마이어는 이미 린시스에게 자신이 유추한 황제의 계획을 전한 바 있다.
“지금, 저를 의심하는 겁니까?”
“그래. 너를 의심하는 거란다. 라그힐 팔베르크.”
린시스는 빙빙 돌려 말하지 않았다.
라그힐 팔베르크는 아주 유력한 용의자였다.
“당분간 모든 국가에 대한 팔베르크 제국의 공격을 침략 행위로 규정, 금지하겠다.”
“횡포군요.”
“나는 규율대로 일을 진행할 뿐이란다. 억울하면 에인션트 님께 항의하렴.”
린시스는 요아힘과 잠시 눈을 마주쳤다.
요아힘은 라그힐의 신변을 보호할 뿐, 개입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검에 손을 올려 두고 있지만, 딱 그뿐이었다.
린시스는 황제를 스쳐 지나가며 경고했다.
“용의 산맥 전체를 상대하고 싶다면, 말리진 않으마.”
* * *
웨스트리아의 남쪽 국경선.
넓적한 곡검으로 무장한 병사는 목책 위에서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산지 아래에는 압도적인 물량의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축 처져 있던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팔베르크 제국을 상징하는 금색의 태양이 드러났다.
“정말, 전쟁이 일어날까요?”
“알 수 없지.”
바로 몇 시간 전 들어온 급보.
팔베르크 제국이 웨스트리아 왕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유는 대마법사와 황탑주 간의 분쟁이었다.
황탑주가 웨스트리아 왕국을 비운 지금,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때문에 팔베르크 제국 측도 공격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이 요새를 지키는 것, 그거 하나만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저 병력은…….”
지형적 이점을 모조리 묵사발로 만들 수 있는 수준의 병력 차이였다.
물량도 물량이지만, 제국의 병력에는 기사와 마법사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서대륙 제일의 열강이라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공성 병기 또한 다수 보였다.
만약 작정하고 쳐들어온다면, 승산은 절망적이라고 할 정도로 낮았다.
병사는 먼 곳의 프라우드 산맥을 바라보았다.
“드래곤이라도 나타나서 브레스 한 번 뿌려 줬으면 좋겠군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드래곤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산맥 밖으로 안 나와.”
프라우드 산맥과 맞닿아 있는 웨스트리아다.
그러나 두 병사는 드래곤을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었고, 둘 모두 알고 있었다.
우울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아무렇게나 지껄였을 뿐이다.
그런데.
“어?”
돌연, 공기가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갑작스러운 이상 현상에, 두 병사는 무릎을 꿇었다.
한 병사는 목책의 담장을 짚고 겨우 일어섰다.
“저, 저, 저거!”
“예?”
“저거! 안 보이냐?”
멀리서 무언가 날아오고 있었다.
하늘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가끔 목격되는 청조겠거니 했지만, 점점 그 생각은 바뀌었다.
덩치가 지나치게 컸다.
“드래곤!”
드래곤 한 마리가 프라우드 산맥에서 날아왔다.
제국 측도 그것을 보았는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전부 나와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병사는 질겁해서 뒤로 물러났다.
“저거, 프라우드의 악룡 아니냐?”
“헐.”
새까만 비늘의 블랙 드래곤.
벨수스 블랙이었다.
벨수스는 웨스트리아의 요새와, 팔베르크의 진지 사이를 낮게 날았다.
화기를 머금은 목울대가 붉게 빛났다.
용의 숨결의 전조였다.
“이런, 개미친! 숙여!”
병사가 다른 병사의 머리를 잡고 숙였다.
동시에, 벨수스의 드래곤 브레스가 터져 나왔다.
콰가가가가가가강!
벨수스는 정확히 국경선을 따라 숨결을 토해 냈다.
그 모습이 꼭 웨스트리아와 팔베르크를 갈라놓는 것 같았다.
길게 드래곤 브레스를 뿜어 낸 벨수스 블랙은 그대로 방향을 돌렸다.
웨스트리아 왕국 측도, 팔베르크 제국 측도, 모두 허둥지둥 임전 태세에 돌입했다.
“전투 준비!”
“진형을 갖춰라!”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무장을 갖췄다.
벨수스의 노란 눈이 두 진영을 살폈다.
푸릉.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병사들도 알고 있었다.
드래곤을 상대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전력이라는 것을.
양측이 협력하더라도 저 드래곤 하나를 이길 수 없었다.
벨수스는 크게 날갯짓을 하더니, 프라우드 산맥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큭!”
“막사 잡아!”
고작 날갯짓 한 번이었는데, 천막이 날아가고 나무가 기울었다.
브레스의 여파로 피어오르던 수증기가 흩어졌다.
병사는 두 눈을 의심했다.
국경선을 따라, 거대한 골짜기가 파였다.
불이 꺼지지 않은 골짜기는, 마치 이곳을 건너지 말라는 듯 경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 * *
나는 체스 말을 옮겼다.
위쪽은 대치 상태였다.
어느 한쪽이 움직이면, 손해를 보는 그림이었다.
“북부는 일시적으로 동결시켰다.”
황제, 라그힐이 범한 한 가지 실수.
바로 너무 많은 힘을 끌어다 썼다는 것이다.
특히, 마족이라는 뒤가 구린 힘이 발목을 잡았다.
아마 적당히 이용해 먹다가 버림 패로 쓸 심산이었겠지만.
“과감한 수는 리스크를 동반하기 마련이니까요.”
중얼거린 발레리아가 맞은편에서 다음 수를 고민했다.
작전이 전부 먹힌 것은 아니다.
반은 성공했고, 반은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내 수가 완전히 들어갔다면, 팔베르크 제국은 낭패를 봤을 것이다.
드래곤에게 마족과 내통한 국가로 낙인찍혔을 테니.
“예상 외로, 대처가 빨랐어.”
“심지어 효율적이기까지 했죠. 라그힐이 잔머리는 잘 돌아가니까요.”
입장을 바꿔서 보면, 황제의 수는 완벽했다.
수가 어긋남으로 일어날 리스크를 대부분 막아 냈으니까.
과감하게 아페 백작이라는 꼬리를 잘라 낸 것이 유효했다.
그 짧은 순간에 이런 판단을 하다니, 솔직히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어쨌든 공격권을 이쪽으로 끌어오는 건 성공했으니, 만족해야겠지.”
“리에이트 교국과 용의 산맥. 둘은 감당하기 힘들겠죠. 아무래도.”
당분간 팔베르크 제국의 움직임은 제한될 거다.
그 안에 형세를 뒤집어야 했다.
황제의 움직임은 원래 계획보다 몇 배는 빨랐다.
나도 그에 맞춰 속도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남은 건 오후에 있을 외부 장례식이네요.”
“이번 건을 이유로 취소할 가능성은?”
“없어요. 제국으로서는 용의 산맥에게 견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싫을 테니까요.”
“그렇겠지.”
나는 루터 레온하트에게 들었던 장례 일정을 떠올렸다.
대외적인 내 신분 때문인지, 아주 성대하게 치를 생각인 것 같았다.
무슨 왕족도 아닌데 국가적 행사 규모로 며칠에 걸쳐 이러는 걸 보면 말이다.
라그힐은 모르겠지만, 이는 치명적인 악수였다.
장례식이 길면, 내가 렘센에 체류하는 시간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여태 너무 얌전히 있었더니, 삭신이 쑤시네.”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기지개를 켰다.
방 안에서 체스만 두려니 심심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게 가만히 계셨던 거예요? 심연의 틈도 다녀오시고…….”
“이 정도면 나치고 얌전히 있었지.”
“아, 스승님치고.”
발레리아는 어쩐지 납득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자. 시작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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