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심연의 틈
요안은 심연을 걸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심연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남아 있던 감각이 희미해졌다.
처음에는 청각이었다.
발을 내딛음에 따라 들려오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 아.’
목구멍 끝에 있던 소리를 끄집어냈지만,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다음은 촉각이었다.
발을 내딛을 때 신발에 발가락 끝이 닿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손등을 꼬집어 보려고 했다.
머지않아, 팔다리를 움직이고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됐다.
‘나는 아직도 걷고 있는 걸까.’
모든 감각을 잃은 요안이 할 수 있는 건, 생각뿐이었다.
어쩌면 심연에 들어온 것이, 섣부른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뒤에서 소리가 들리든 말든, 앞으로 나아갔어야 했는데.
실수인가, 오만이 낳은 실패인가.
알 수 없었다.
‘그것들은, 정말 천사였을까?’
꿈속에서 자신을 인도하던 검은 머리카락의 남매가 떠올랐다.
둘은 성서에서 이르는 천사들처럼 하얀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요안 깊숙한 곳에서 그들에 대한 적개심이 피어올랐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니.
‘두렵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는 것이 무서웠다.
촉각이 없을 텐데, 온몸에서 개미가 기어 다니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둠이 몸을 뜯어먹고 있는 것 같았다.
‘리에이트 님, 저를 구원하소서.’
하지만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생각을 멈추는 순간, 존재가 사라질 것만 같은 막연한 공포 때문이었다.
사제와 성기사는 어떻게 됐을까.
이미 뒤를 심연에 잡아먹힌 건 아닐까.
끝도 보이지 않는 드넓은 우주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음?’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감각이 돌아왔다.
그 시발점은 손목이었다.
누군가 요안의 손목을 덥석 잡은 것이다.
손목을 감싼 손바닥에서 전해진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아.”
목소리가 나왔고, 또한 들렸다.
심연의 어둠은 여전히 시야를 앗아 갔지만, 다른 감각은 모두 돌아왔다.
손의 주인은 요안을 어디론가 끌어당겼다.
“누구십니까?”
요안은 순순히 손의 주인을 따라 방향을 돌렸다.
의심할 법도 했건만, 어째선지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몇 분 동안 그가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뿐인데.
빛이 터져 나왔다.
“윽.”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갑작스런 빛에 적응하지 못했다.
옅은 두통을 느끼며 눈을 끔뻑였다.
이윽고, 주변 풍경이 드러났다.
“여긴?”
붉은 모래 위, 먹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나 있다.
건물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형체가 희미한 무언가 떠돌아다니고 있다.
마계가 있다면, 이런 풍경이겠거니 싶었다.
“심연의 틈입니다.”
요안은 고개를 돌렸다.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청년이 옆에 있었다.
어째선지 특징을 잡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누구십니까?”
“제가 누군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가면인은 정체를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굳이 캐물을 것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그가 누구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곳을 어떻게 빠져나가느냐가 문제군요.”
“그렇습니다. 기다리십시오. 다른 두 분도 꺼내 오겠습니다.”
“예?”
그 말을 끝으로, 가면인이 마치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겁에 질린 성기사가 나타났다.
“우왁!”
나오자마자 모래에 발이 빠져 앞으로 고꾸라진다.
뒤이어, 사제가 나타났다.
성기사에 비하면 비교적 멀쩡한 모습이었다.
안색이 새파래진 것 정도 말고는 말이다.
“요안 님! 자네도!”
“사제님,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사제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요안과 거의 비슷했다.
성기사는 조금 달랐다.
뒤에서 뭔가 쫓아오는 것을 느끼자마자, 냅다 도망쳤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쳐서 멈춰 보니, 방향을 잃었다는 것이다.
“프랭커입니다.”
마지막으로 가면을 쓴 지그문트가 나타났다.
사제의 인상이 구겨졌다.
“……프랭커요?”
“예. 심연 속에서 사람들에게 장난을 치는 놈이지요.”
“직접 위해는 가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놈의 목적은 심연 속에 들어온 이를 놀리는 것이니까요.”
성기사와 사제, 요안까지 질색을 했다.
그저 놀리고 싶다는 이유로, 영원히 심연 속에 갇힐 뻔했다.
성기사는 물에 젖은 개처럼 몸을 떨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러게, 왜 멋대로 들어가고 그러나? 자네 때문에 나는 물론 요안 님까지 위험할 뻔했어.”
“발 한 번 디디는 걸로 그런 장소로 빨려 들어갈 줄 알았겠습니까?”
“지금이 책임 전가나 할 땐가?”
요안의 한마디에, 둘 모두 입을 다물었다.
요안은 한숨을 내쉬고 지그문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경황이 없어 감사를 표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괜찮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지그문트는 담담하게 대답한 뒤, 먼 곳을 바라보았다.
심연의 틈은 굳이 비교하자면 사막과 비슷했다.
시야가 탁 트여 있었다.
그러나 지그문트의 시야 끝에도 붉은 모래만 보일 뿐이었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사제가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딥니까? 심연을 통과한 겁니까?”
“아닙니다. 심연의 틈이라고 하시더군요.”
“심연의 틈요?”
사제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요안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집행자들은 마계와 마족에 대한 특수 교육을 받는다.
당연히 심연에 대해서도 배운 바 있다.
그러나.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예의 프랭커에 대한 것이나, 심연의 틈 등.
마족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집행자들조차 몰랐던 정보다.
더군다나, 심연에서 헤매고 있던 셋을 손쉽게 끄집어내기까지 했다.
정체불명의 가면인이 과연 인간이 맞을까 의심이 들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사제가 지그문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요안과 성기사는 사제의 의중을 파악했지만, 제지하진 않았다.
둘 또한 지그문트에 대한 미약한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제의 손가락 사이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신성력이 지그문트의 몸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성력에 반응이 일절 없다는 건, 적어도 마족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제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범하여 죄송합니다. 인간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 * *
“세 분께서는 너무 오래 심연에 머무르셨습니다.”
심연은 머무르는 시간대에 따라 목적지를 바꾼다.
정상적으로 걸어서 도착한다면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헤맨다면 목적지를 심연의 틈으로 틀어 버린다.
“그렇기에, 이곳 심연의 틈으로 오게 된 겁니다.”
“빠져나가는 방법은, 있습니까?”
“있습니다. 틈의 지배자에게 길을 열어 달라고 요구하면 됩니다.”
“틈의 지배자요?”
사제는 적극적으로 내게 질문을 하며, 내 대답을 수첩에 받아 적었다.
리에이트 교국이 마계에 대항책을 가지는 건, 지금으로써 반길 만한 일이다.
나는 기꺼이 질문에 대답해 줬다.
“심연의 틈은 구역입니다. 마계와 지상의 사이쯤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마계와 지상…… 그렇다면, 심연의 끝에는 마계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넘어가서, 틈에는 각각 지배자가 있습니다.”
지상의 국가로 따지자면, 변경백쯤 되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다.
내 설명을 들은 집행자들은 질색했다.
“귀족급 마족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닙니다. 귀족급은 마계 깊숙한 곳, 지옥에 위치한 경우가 많으니까요.”
변경백은 상당한 무력과 지위를 가지지만, 틈의 지배자는 그렇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방패막이 같은 이들이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인 마계다.
틈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 혈안이 된 마족도 물론 있었다.
“마족에게 협조를 구하는 건 아무래도 꺼려지는데요.”
집행자들의 신념에 어긋나는 듯, 성기사는 특히 불편한 모습을 보였다.
요안과 사제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썩 내키진 않는 눈치였다.
아주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아니요. 때려잡고, 강제로 열어도 됩니다.”
“아.”
“그편이 마음에 드는군요.”
“저희가 마족은 잘 잡습니다.”
집행자들은 자신만만한 눈치였다.
하멜에서 중하급 마족 하나 잡는 데 쩔쩔 맸던 걸 생각하면, 그렇게 믿음직스럽진 못했다.
더군다나, 마족은 지상에서 상당한 제한을 받는다.
심연의 틈은 외곽이라지만 마계에 속한다.
전력을 내는 틈의 지배자를 저 셋이 잡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럼, 틈의 지배자를 찾아보죠.”
“……그렇게 말씀하시니, 막막하군요.”
요안은 공허한 눈으로 심연의 틈을 둘러보았다.
목오 사막이 연상될 만큼 넓었다.
이 공간에서 틈의 지배자를 찾으라니.
사막에서 바늘 찾기 같았다.
“방법이 있습니다.”
무작정 찾아다니는 건 미련한 짓이다.
나는 속으로 신성을 불렀다.
‘신성, 나와 봐.’
‘삐짐.’
‘좀 도와줘.’
‘싫음.’
그리무아르가 만들어 낸 괴물을 상대할 때 불러낸 것이 영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사제에게 도움을 구했다.
사제는 내 말대로 땅에 손을 얹었다.
“그냥 신성력을 방출하면 됩니까?”
“정화 의식이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냥 방출하셔도 괜찮습니다.”
“해 보겠습니다.”
나는 이름 없는 검을 뽑아 들었다.
요안이 알아볼까 싶어서, 환상 마법으로 외형을 바꿔 둔 것이었다.
성기사와 요안도 각각 검을 뽑았다.
사제가 땅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웅.
붉은 모래가 옅은 갈색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뿐, 엄청난 변화는 없었다.
신성력을 아끼는 방향을 택한 모양이다.
하긴, 이런 상황에서는 좋은 판단이다.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만.”
“옵니다. 준비하십시오.”
“예?”
살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심연의 틈이다.
그러나 지배자가 있으면 피지배자도 있는 법.
심연의 틈은, 마계에서 쫓겨나듯 밀려난 것들의 터전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게 좋을 겁니다.”
멀리서 흙먼지가 일었다.
미약한 신성력에 적개심을 일으킨 것들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피와 같은 새빨간 털에, 미간에 눈이 하나 더 달린 들개 무리였다.
“꽤 셀 겁니다.”
“저, 저것들이 지배잡니까?”
“아니요. 헬 하운드 무립니다. 마계의 들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뭔 놈의 개가 무슨 늑대보다 큽니까!”
요안이 신성력과 오러를 끌어 올렸다.
나는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당분간은 뚜렷한 지능이 없는 몬스터 같은 놈들만 몰려올 겁니다.”
“지배자는요?”
“상대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배자가 나타날 겁니다.”
“그런 무식한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이윽고, 폭발적인 속도로 달려온 헬 하운드 무리가 우리를 덮쳤다.
수십 마리의 개가 머리를 물어뜯을 기세로 아가리를 벌렸다.
“홀리…… 쉣!”
기겁한 사제의 목소리가 난전의 시작을 알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것에 비해, 집행자들은 잘 싸웠다.
금방 냉정을 되찾고 차분하게 헬 하운드들을 저지했다.
특히 요안의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큭!”
성기사는 고전하고 있었다.
헬 하운드가 입이 찢어졌음에도 검을 물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무기의 통제권을 빼앗긴 성기사는 적잖이 당황한 것으로 보였다.
뒤에서 기회를 노리던 한 마리가 성기사의 어깨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도와줘야 되나.’
마법을 준비했다가, 멈췄다.
요안이 먼저 움직였기 때문이다.
상대하고 있던 헬 하운드를 떨쳐 내고, 성기사 쪽으로 튀어 나갔다.
“어딜!”
성기사의 검을 물고 안 놔주던 헬 하운드를 올려 베었다.
깔끔한 솜씨였다.
턱에 힘이 풀리며, 검이 자유로워졌다.
성기사는 곧장 검을 뽑아 자신을 노리던 헬 하운드를 상대했다.
“빛으로 저희를 보호하소서!”
사제가 기도문을 외웠다.
신성력이 터져 나오며, 빛의 장막이 무방비해진 요안의 등을 감쌌다.
요안을 노리던 놈들이 타들어 갔다.
화아아악!
팀워크도 좋다.
철저하게 실전으로 다져진 솜씨다.
하멜에서의 상황이 특수해서 그렇지,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긴, 이 정도도 안 된다면 마족을 상대하긴 어렵겠지.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요안과 성기사의 오러였다.
‘신성력과 오러를 섞은 건가?’
그저 베었을 뿐인데, 헬 하운드가 불타올라 버렸다.
오러 속에 신성력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은은하게 검을 둘러싼 듯한 기사의 오러에 비해, 빛이 명료했다.
서로 다른 두 힘을 섞는 건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흠.”
신성도 내게 조언한 적이 있다.
오러와 마나의 융합을 시도해 보라고 했지.
마침 헬 하운드 하나가 내게 달려들었다.
쩍 벌린 아가리에서 유황 냄새가 났다.
‘몇 달 전이었으면 이것과도 목숨을 걸고 싸웠을 텐데.’
지금은 좋은 실험 대상일 뿐이었다.
나는 몸을 틀어 헬 하운드를 피했다.
그리고 놈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깽!
헬 하운드는 혓바닥을 내밀고 나를 멀뚱히 보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인지, 당황한 것 같았다.
이렇게 보면 덩치가 좀 큰 들개와 다를 바가 없다.
‘마기가 적으니 힘을 못 쓰는군.’
헬 하운드는 마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몬스터다.
케르베로스의 피가 섞인 놈들인데, 조상에 비해서 그리 강하진 않다.
마계에서는 털로 마기를 태워 불꽃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다.
심연의 틈은 마계로 분류되긴 하나, 마기의 농도가 옅다.
해서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마나랑 오러를 잘 섞어서.’
오러가 이름 없는 검을 감쌌다.
심장에서 시작된 마나가 팔을 타고 검에 전해졌다.
상극의 힘은 서로 반발한다.
반대로, 퍼즐 조각처럼 들어맞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에라이. 드래곤 풀 뜯어먹는 소리.’
내 예상대로, 융합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나가 오러에 뒤섞이기 무섭게, 폭발의 조짐을 보였다.
나는 재빨리 검을 헬 하운드 무리를 향해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 * *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요안은 전투 중이라는 것도 잊고, 지그문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키는 조금 크지만, 몸이 호리호리한 편이었기에 싸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큰 오산이었다.
헬 하운드 한 마리를 손으로 잡지를 않나.
어떻게 한 건지, 오러로 폭발까지 일으켰다.
‘……무시무시하군.’
그 위력은 상당했다.
기회를 살피며 주변을 맴돌던 헬 하운드 무리가 아예 소멸됐다.
살아남은 몇몇은 뒷걸음질 치다가 꽁무니를 빼 버렸다.
정작 지그문트는 뭔가 잘 안 됐다는 듯 뒤통수를 긁고 있었다.
성기사와 사제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지그문트를 보았다.
요안이 그들에게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야. 저분 혹시.”
“신의 사도 같습니다.”
“흠, 요안 님 생각도 같군요.”
신의 사도.
신자들이 길을 잃고 배회할 때, 길을 가르쳐 준다는 정체불명의 인물이다.
성자와 달리 홀연히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인물이었다.
심연에 대한 지식과, 가공할 정도의 무력.
그리고 무엇보다.
‘길을 잃고 배회할 때, 길을 가르쳐 준다.’
지그문트는 심연 속에서 떠돌던 요안과 집행자들을 구해 줬다.
그렇기에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사제가 문득 이상한 말을 했다.
“저분 곁에는 빛이 있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나비 같기도 하고, 정령 같기도 합니다.”
“저는 보이지 않는데요.”
“아주 신성한 무언가가 저분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셋은 멋대로 지그문트를 신의 사도로 단정 지었다.
너무 많은 상황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요안은 지그문트의 눈치를 보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으신 것 같으니, 눈치껏 캐묻지 맙시다.”
“알겠습니다.”
“동의합니다.”
신성력으로 검에 묻은 피를 태운 뒤, 지그문트에게 다가갔다.
지그문트는 제 검을 살피고 있었다.
가면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이만큼이나 소란을 피웠으니, 지배자도 나타나겠군요.”
“예? 아, 아닙니다.”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어조였다.
요안의 눈이 깜빡였다.
짧은 전투였지만, 꽤 강한 놈들이었다.
지그문트가 한 번에 쓸어 버려서 그렇지, 집행자들뿐이었다면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동네 들개가 사라진 정도로 영주가 나오진 않잖습니까.”
“……동네 들개요?”
“예. 동네 들개요.”
요안은 말을 잃었다.
지그문트는 태연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부터가 진짭니다. 아, 신성을 불어넣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모래에 손을 얹으려던 사제가 동작을 멈췄다.
“피 냄새를 맡은 틈의 주민들이 하나둘 찾아올 테니까요.”
* * *
발레리아 로안, 요하네스 레드라인 등등.
내 주변에는 괴물이 좀 많다.
대체로 군대 단위의 전력들이다.
린시스나 세계수 같은 경우에는 국가로 넘어갈 만큼 강하다.
그나마 인간적인 편에 속하는 단도 기사 한 무더기쯤은 너끈히 막아 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요안은 몰라도, 집행자 개인의 무력은 크게 강하지 않군.’
성기사와 사제의 실력은, 솔직히 기대 이하였다.
헬 하운드에게 쩔쩔 맸던 건 당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 정도가 본 실력이었던 모양이다.
“크윽! 놈!”
“사도 님. 역시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강해져야지요. 이대로라면 중급 마족은 꿈도 못 꿉니다.”
성기사와 사제가 페어를 이뤄 마족을 상대하고 있었다.
뾰족한 이빨을 제외하면 그냥 근육질의 사람으로도 보였다.
무력은 하급, 잘 쳐주면 중하급 정도인 것 같았다.
즉, 위스크 백작령에서 베르제 대공을 사칭하던 놈 수준이었다.
-무다무다무다무다!
이상한 기합소리와 함께, 성기사를 향해 주먹을 연타한다.
속도와 파괴력은 가공할 정도다.
그러나 신체를 무기로 쓰는 마족들의 약점은 명확하다.
거리.
‘검이 가지는 이점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군.’
성기사는 방어에 급급할 뿐, 거리를 두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튀긴 옥수수를 입에 털어 넣으며 진지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마족도 거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 쉴 새 없이 성기사를 몰아붙이는 것이리라.
“리에이트의 이름으로!”
후방에서 기도문을 중얼중얼 외우던 사제가 가슴 위에 성호를 그었다.
빛의 십자가가 성기사를 통과해 마족에게 쏘아져 나갔다.
마법사들도 그렇고, 사제도 그렇고, 저게 문제다.
뭐 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저게 보통이긴 하지만, 그만큼 선택을 좀 더 잘할 필요가 있단 말이지.’
저 마족은 속도가 상당한 타입이다.
사제가 사용한 것은, 신성력이 형체를 이룰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다.
그러나 충분히 피할 만한 속도였다.
마족도 이를 감지하고 공격을 멈췄다.
“흡!”
노리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기사가 앞으로 돌진했다.
이 부분은 머리를 잘 썼다.
여러 번 합을 맞춰 본 경험이 있으니 자연스레 나온 전략인 것 같았다.
마족이 피할 경로를 예측해서, 미리 차단한다.
-으리이!
승부처라고 판단했는지, 마족도 아주 화끈하게 나왔다.
오히려 신성력이 만든 십자가 쪽으로 달린 것이다.
신성력을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몸이 불타오를지언정, 멈추지는 않았다.
“이런!”
무방비 상태의 사제부터 노린다.
생각대로 되기만 한다면, 아주 유효한 수였다.
성기사도 예상하지 못한 듯 당황해서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너희들의 수준, 잘 알았다.
회심의 한 수가 제대로 통했다.
마족은 사제의 눈앞에 머리를 들이밀고 히죽 웃었다.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
-그럼 죽어라.
선고와 함께, 마족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풀썩 무릎을 꿇었다.
-누가 무릎을 꿇으랬지? 무례한 놈. 죽으라 하지 않았느냐.
-죄, 죄송합니다!
사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마족 하나가 서 있었다.
날 수는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날개가 작았다.
트롤처럼 엄니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상체만 조졌나?’
평범한 사람과 비슷한 하체에 비해, 언밸런스할 정도로 상체가 거대했다.
울끈불끈한 근육을 보니, 아마 힘으로 밀어붙이는 놈인 것 같았다.
요안은 검을 겨누고 경계했다.
“사도 님, 저놈은…….”
“틈의 주인이군요.”
어째선지 나를 사도라고 칭하는 요안이 검을 고쳐 잡았다.
틈의 주인은 요안을 무시하고 뚜벅뚜벅 사제 쪽으로 걸어갔다.
-스스로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도록.
-한 번만 자비를…… 컥!
틈의 주인이 마족의 머리를 잡았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터져 나왔다.
동족이어도 자비가 없다.
틈의 주인은 피로 물든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흠, 손이 더러워졌군.
성기사와 사제가 무심코 뒷걸음질 쳤다.
틈의 주인과의 격차를 느낀 것 같았다.
일반 성기사가 상대할 수 있는 마족은 하급까지.
그것도 지상에서 마족의 힘이 제한되었을 때가 기준이다.
그나마 집행자들은 중하급까지 어떻게든 잡는 모양이지만.
“요안 님, 사제님. 사도 님. 도망쳐야 합니다.”
성기사는 조용히 경고했다.
틈의 주인은 강했다.
어림잡아도 중상급이었다.
중하급 마족에게 질 뻔했던 성기사는 당연히 후퇴를 권고했다.
무모하게 달려드는 것보다는 나았다.
“날아서 쫓아올 수도 있습니다. 싸워야지요.”
요안은 반대였다.
확실히 요안까지 합세한다면, 해 볼 만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틈의 주인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나는 날지 않는다. 그건 유산소거든.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엉뚱한 소리긴 했지만, 지금 요안에게 대답한 것 같았는데.
-인간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나?
-물론이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이놈은 마족을 죽여 버렸지만, 우리들에게는 적개심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대화까지 시도하고 있으니.
나는 틈의 주인을 올려다봤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스물네 번째 틈의 주인, 단속하는 자 헤르창이다.
-운동 좀 할 것 같은 이름이군.
-네 말마따나, 취미는 운동이다.
헤르창은 자세를 잡고 울끈불끈한 팔뚝을 과시했다.
핏줄이 꿈틀거렸고, 부푼 가슴 근육이 씰룩거렸다.
위협으로 받아들인 집행자들은 주춤 물러섰다.
헤르창은 집행자들을 보며 씩 웃었다.
-내 근육에 감탄했나 보군.
-그래.
-그런데, 너는 어떻게 마족의 언어를 쓰는 거지?
머리가 굴러갔다.
헤르창은 인간인 우리에게 적개심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인간의 언어도 알아들었다.
-마족의 언어를 쓰는 것이 이상한가? 전임자는 못 썼어?
-아니. 그 녀석도 마족의 언어를 썼다. 옹알이 수준이었지만 말이야.
전임자.
즉, 심연의 틈에 일부러 방문한 인간이 있었다.
아무래도 팔베르크 제국 측 인물일 확률이 높았다.
헤르창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발음이 지나치게 유창해서 이상한 거지.
-다른 마족과 연이 있어서 말이야.
-누구지?
-그냥 조그마한 직책 하나 맡고 있는 놈이야.
-그렇군. 일단, 따라와라.
헤르창은 턱짓을 하며 앞장서서 걸었다.
집행자들은 내 눈치를 살피며 헤르창을 따라갔다.
헤르창이 걸음을 멈춘 곳은 바위를 깎아 만든 것으로 보이는 건물이었다.
역시 지상과는 건축 양식이 많이 다르다.
그냥 외부와 내부를 분리하기 위해서 세워 둔 느낌이었다.
“마족한테 대접을 받다니.”
“……마족은 전부 악이라고 생각했는데.”
헤르창이 앉으라고 한 곳에 앉았다.
의자는 아니었고, 잘 보니 세로로 세워 둔 아령이었다.
더럽게 무겁기만 하고 강도는 약한, 중철로 만든 것 같았다.
아마 보기보다 수백 배 무거울 것이다.
-심연의 틈은 처음인가?
-세 번째 틈에 방문했던 적이 한 번 있지.
-세 번째 틈? 연이 있다는 마족이 무덤을 파는 자, 오릭이었나?
-아니. 비관자, 러셀이었는데?
헤르창이 팔짱을 꼈다.
펌핑 된 팔뚝 때문에, 팔짱을 꼈다기보다는 팔을 겹쳐 놓은 것처럼 보였다.
-비관자 러셀은 두 번째 틈의 지배자다. 착각한 거 아닌가?
-그때는 세 번째였어.
-승격은 100여 년 전에 했을 텐데. 이상하군.
-됐고, 내가 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받지 못해서 말이야.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틈의 주인이 팔베르크 제국과 연관이 있다.
헤르창은 나를 제국의 인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라그힐의 꿍꿍이를 캐낼 좋은 기회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나는 공물이 준비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헤르창은 집행자들에게 눈을 돌렸다.
세 집행자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헤르창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것들은 공물이 아니야.
-어째서지? 리에이트의 신자들은 별미란 말이다.
헤르창의 입에서 두 개의 혓바닥이 튀어나와 각각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적셨다.
두꺼운 목이 미세하게 꿀렁거렸다.
식인을 하는 놈인 것 같았다.
조금 모자라 보여도 마족은 마족이라는 거다.
-페러시트라면 충분히 준비해 뒀다. 상등품이다.
헤르창은 서랍으로 추정되는 가구에서 투박한 나무 상자를 꺼냈다.
열어 보니, 다섯 마리의 페러시트가 잠들어 있었다.
탁한 색깔을 보니 보기 드문 성체였다.
다른 생물에게 기생하지 않고 이렇게까지 크는 경우는 드물다.
-확실히 상등품이군. 공물은 곧 준비될 거야.
-나는 저 셋을 원한다. 수염 난 녀석은 특히 각별해 보이는데.
-미안하지만, 이 셋은 따로 쓸데가 있으니까.
무고한 인간과 페러시트를 교환한다.
팔베르크 제국에게는 일석이조의 거래였다.
페러시트도 얻고, 눈에 거슬리는 인간의 존재도 지울 수 있을 테니까.
내 눈 밖에서 아주 추악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쪽도 더 좋은 공물을 준비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줘.
-나는 미식가다. 이것보다 더 좋은 공물이라니, 기대하겠다.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는 것도 그렇고.
생긴 건 무식하지만, 머리는 좋은 놈인 것 같았다.
-인간은 다 같잖아 보였는데, 너는 마음에 든다.
-어느 점이?
-흠, 마족의 언어를 유창히 하는 점이나, 당당한 점이나.
-전임자는 옹알이 수준이라고 했지.
-그래. 그 늙은이는 언어가 안 되니 손짓 발짓까지 써야 했단 말이다. 답답했다!
늙은이.
키워드를 머릿속에 입력한 뒤,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는 꽤 괜찮은 몸을 하고 있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인데.
-옷으로 가리고 있지만, 알 수 있다고. 호리호리해 보이지만, 완벽히 균형 잡힌 몸이야.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칭찬이 맞다. 너라면 아래의 갑옷을 입는 것도 허락할 수 있다.
아래의 갑옷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헤르창은 나를 좋게 보고 있는 건 확실했다.
전임자의 정체를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나는 본격적으로 팔베르크 제국의 연락책이라는 직책에 몰입했다.
-전임자가 그만뒀다는 것을 알릴 겸 틈의 지배자도 볼 생각이었다.
-그렇군. 죽이고 빼앗았나?
-아니. 아쉽게도 살아 있다. 만약 이곳에 찾아온다면, 상대하지 말아 주면 좋겠는데.
-죽이려고?
-당연하지. 내 자리를 호시탐탐 노릴 텐데, 살려 둬서 좋을 것 없지.
-아주 바람직한 생각이군. 역시 너는 마음에 드는 인간이다.
* * *
헤르창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요안이 내게 가까이 붙어서 물었다.
“사도 님, 무슨 대화를 나누신 겁니까?”
“틈의 길을 열어 달라고 했습니다.”
“지금 마족과 교섭을 하신 겁니까? 있을 수 없습니다.”
요안은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나를 신의 사도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 마족, 헤르창은 이 틈의 주인입니다. 이 공간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지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보다 두 배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흠.”
헤르창은 강하다.
아마 집행자들도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준귀족급 마족보다 약간 아래 정도.
적어도 이 전력으로는 상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저희에게는 사도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자 온 것입니다. 마족을 사냥하는 건.”
“……저희 사명입니다.”
“그렇지요.”
요안은 입을 다물었다.
뭔가 깨달은 바가 있는 듯, 주먹을 움켜쥔다.
이렇게 사소한 대화에서 가끔 뭔가를 얻어 가는 이들이 있다.
앞으로 강해질 여지가 충분한 사람들이다.
요안은 더 강해질 것 같았다.
“틈을 빠져나가는 것이 먼저입니다. 심연의 끝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야지요.”
“그도 그렇습니다만.”
“저 마족은 지상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집행에 목매지 않으셔도 됩니다.”
셋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집행자 셋이서는 헤르창을 사냥할 수 없다.
그 사실은 요안이 제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더 강해져야겠습니다.”
“성자를 찾아가십시오.”
“예?”
“리에이트 님께서 길을 제시해 주실 겁니다.”
“아, 사도 님.”
그때였다.
헤르창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한 손에는 통나무와 비슷한 크기의 아령을 들고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나와 요안이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내 앞에 섰다.
-전부 다 들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헤르창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
말하는 것까지는 어려운 모양이었지만.
리에이트라는 단어를 들었으니, 민감하게 반응할 수도 있었다.
-너, 이 자식.
헤르창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집행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미개한 것들을 속이고 있는 거냐?
-정확하군. 내 연기, 괜찮던가?
-괜찮다마다! 나도 깜빡 속아 넘어갈 정도였다. 신의 사도 행세를 하다니!
-희미한 희망 너머에 절망이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더 좌절하는 법이지.
이렇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상황을 넘기기 위해서 아무렇게나 지껄였는데, 헤르창이 무릎을 탁 치고 감탄했다.
-크! 너, 웬만한 마족보다 더 비열하고 더럽군!
-그거, 칭찬이지?
-칭찬이 아니라, 극찬이다! 마족이었다면 부하로 삼았을 텐데. 아깝군. 아까워.
헤르창은 혀를 내두르며 나를 칭찬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런데, 저 사제 하나만 남겨 두고 가면 안 되나? 입이 심심한데.
-안 돼. 나중에 아주 순수한 놈으로 가져다줄 테니, 인내해 줘.
-고통과 인내 끝에 근육이 있는 법. 좋다. 믿고 기다리지.
* * *
엘레너 왕녀는 잔뜩 긴장했다.
어쩌면 황제와 대면했을 때보다 더.
“그렇게 긴장할 거 없단다. 안 죽여.”
“긴장한 적 없습니다!”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은 백발의 여자.
그 정체는 폴리모프한 화이트 드래곤, 린시스였다.
책에서나 읽던 드래곤이 앞에 있으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 드래곤님.”
“그냥 린시스라고 부르려무나.”
“……린시스 님.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데?”
“저를, 웨스트리아를 도와주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린시스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왜. 나서지 말까?”
“헉! 그, 그런 뜻이 아니오라.”
“농담이란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너나 웨스트리아 왕국을 도와주는 게 아니야.”
선을 그은 린시스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세웠다.
그 일련의 동작이 너무도 우아하게 느껴져, 엘레너는 조금 위축됐다.
“은인이자 오랜 벗의 죽음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싶기 때문이지.”
은인이자 오랜 벗.
델 로안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모르는 엘레너는 감탄했다.
어떤 삶을 살았기에, 드래곤에게 이런 대접을 받는단 말인가.
“아가, 너는 운이 좋은 아이란다.”
“네?”
“수호자가 도움을 주잖니.”
“레온하트의 수호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엘레너는 기분이 나빠졌다.
난생 처음 받아 보는 무례한 대접이 떠올랐다.
표정으로 드러나진 않았으나, 린시스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했는걸요.”
“나를 부른 것이 수호자인데?”
“그건, 그렇지만…… 음.”
“아이야, 그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란다.”
엘레너도 알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
무례한 태도와, 선뜻 내민 손에 가려졌을 뿐.
그는 분명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인간이 드래곤을 불러들였는지.’
드래곤은 중립을 지킨다.
북부에 위치한 웨스트리아의 왕녀인 만큼, 엘레너도 익히 알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드래곤은 지상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시계를 본 린시스가 중얼거렸다.
“슬슬 시간이네.”
“……무슨 말씀이신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웨스트리아 왕국 구원할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