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63/134)

7

캐슬링

홀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황제, 라그힐 팔베르크는 조용히 장내를 둘러보았다.

팔베르크 제국의 전쟁 선포.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제국의 계획은 상당 부분 저지됐다.

특히 레온하트 왕국을 노린 공작은 내 손에 완전 무효화된 것들이 대부분.

아직 대대적인 전쟁을 선포할 때는 아니다.

한 국가를 상대로 한 전쟁 선포일 터.

라그힐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 끝에는, 검은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있었다.

‘엘레너 왕녀.’

서대륙 북서쪽, 레온하트 왕국과 정반대 방향에 위치한 나라, 웨스트리아 왕국.

엘레너는 웨스트리아의 첫째 왕녀로, 어린 왕자를 대신해 조문단에 참석했다.

굳이 이 자리에서 전쟁을 선포했다는 건.

‘명분 때문이겠지.’

라그힐이 턱짓하자, 무장한 기사들이 홀 내로 돌입했다.

팔베르크 제국의 귀족들도 눈에 띄게 당황한 모양새였다.

예정에 없던 시나리오.

황제가 독단적으로 진행시킨 것 같았다.

“저항하지 말고, 순순히 투항하십시오.”

“이게 무슨 짓이냐! 놓아라!”

그들은 웨스트리아의 귀족들만 골라서 제압했다.

장례식장에 무기를 들고 온 귀족들은 없었기에, 모두 손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당했다.

물론 엘레너 왕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 명의 기사가 엘레너 왕녀의 뒤에 섰다.

둘 모두 검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황제 폐하!”

엘레너 왕녀는 똑바로 라그힐을 올려다봤다.

꽉 쥔 주먹이 덜덜 떨리고 있지만,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다.

라그힐은 손을 내저었다.

“엘레너 웨스트리아 왕녀. 뻔뻔하군.”

“무슨……!”

“델 로안 대공의 죽음.”

굳이 이 자리를 빌어서 전쟁을 선포한 이유.

바로 내 죽음을 전쟁의 명분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에 웨스트리아가 있다는 것이 판명됐다.”

“증거를 제시하지 않으신다면, 납득할 수 없는 대우입니다!”

“증거라.”

나는 혀를 찼다.

완벽하게 증거를 조작해 뒀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죽고 지금에야 일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꽤 공을 들였을 것이다.

“팔베르크 제국을 너무 만만히 보는군.”

라그힐은 엘레너 왕녀를 직시했다.

나름 당차게 억울함을 호소하던 엘레너 왕녀가 돌연 사색이 됐다.

저 존재감을 혼자서 감당하는 건, 저 아이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허억, 컥.”

숨이 막힌 듯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거칠게 숨을 내쉰다.

다리를 덜덜 떨더니 결국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웨스트리아의 귀족들이 움직였다.

“왕녀님!”

“움직이지 마라.”

나지막한 경고에, 웨스트리아의 귀족들이 얼어붙었다.

무력으로는 라그힐보다 한참 위에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명령에는 무력과는 조금 다른 힘이 담겨 있었다.

‘쓸데없이 알뜰살뜰한 놈 같으니.’

유언으로 발레리아를 끌어들이려는 것도 그렇고.

내 죽음을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아주 기분이 더러웠다.

“증거라면, 몇 번이고 제시해 주겠다.”

웨스트리아 왕국은 웅크린 거북이다.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수비적인 성향을 보이는 국가.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제국이라도 시간을 쏟아야 하는 수비력을 자랑한다.

지리적으로 팔베르크 제국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변수는 전부 쳐 낼 생각이군.’

웨스트리아 왕국은 유일하게 제국보다 북쪽에 위치해 있다.

프라우드 산맥을 사이에 끼고 있어, 공략이 까다롭다.

만약 대대적인 전쟁에서 장악하고자 한다면, 병력 분산을 야기할 수 있다.

‘병력을 집중해서 피해를 최소화한다.’

아주 똑똑한 한 수였다.

외적으로 첫 목표를 웨스트리아로 정한 것도 좋다.

웨스트리아는 거의 모든 국가에게 우호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동맹국은 없다.

팔베르크 제국이 전쟁을 선포한다고 해도, 웨스트리아를 감쌀 국가는 없었다.

특히 이렇게 명분이 뚜렷하다면, 더더욱 그렇다.

“렘브란트.”

“예. 황제 폐하.”

“오늘 중으로 자료를 정리해 각국의 조문단 대표에게 나눠 주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물론 엘레너 웨스트리아, 그대도 받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엘레너 왕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만약 반박할 여지를 뒀다면, 라그힐이 이런 수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엘레너 왕녀를 포함한 웨스트리아의 귀족들은 기사들에게 연행됐다.

* * *

웨스트리아의 귀족들은 감옥 대신 별궁에 마련된 방으로 안내됐다.

장소만 방일 뿐이지, 사실상 연금이나 다름없었다.

이동과 교류는 완전히 제한됐다.

엘레너 왕녀는 의자에 앉아 골똘히 고민했다.

‘아바마마께서 그러셨을 리 없어.’

황제의 기에 짓눌려 제대로 항변조차 못했지만, 엘레너는 웨스트리아 왕국이 무고하다고 굳게 믿었다.

대마법사, 델 로안 대공을 살해했다니.

‘말도 안 돼.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은 웨스트리아에…….’

불현 듯 엘레너의 머릿속에 누군가 스쳐 지나갔다.

처음에는 부정했지만, 고개를 내민 의심의 싹이 자꾸 눈에 밟혔다.

결국 생각할 수밖에 없는 가능성이었다.

“설마, 황탑주님께서?”

황탑주.

같은 마법사인 만큼 델 로안과 관련이 있을 확률이 높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엘레너는 황탑주의 품성을 알고 있다.

결코 누군가를 암살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만에 하나 진짜라면?’

델 로안 대공을 살해한 배경에 웨스트리아 왕국이 있다면.

황제의 말대로, 전쟁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패배자가 정해진 싸움이다.

철벽의 수비를 자랑하는 웨스트리아라도, 팔베르크에 당해낼 도리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은 점점 커져 갔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엘레너가 눈짓하자, 방 안에 있던 시녀가 문을 열었다.

흑탑주, 렘브란트가 직접 서 있었다.

“엘레너 왕녀님,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아니요. 자료만 넘겨주시면 돼요.”

엘레너는 렘브란트를 경계했다.

정신 마법에 대한 대비는 확실했지만, 팔베르크 제국의 인물은 경계해야 했다.

렘브란트는 잠깐 엘레너에게 시선을 두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순순히 시녀에게 서류를 넘기고 떠나갔다.

“검사해 보겠습니다.”

시녀는 서류에 장갑 낀 손을 올렸다.

면장갑이 반짝였다.

황탑주에게 받은 마도구였다.

마법적인 함정이나 유해한 무언가 숨겨져 있는지 검사한 것이다.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 단순한 서류입니다. 왕녀님.”

엘레너는 서류를 넘겨받았다.

여러 정황 증거들을 포함해, 물증과 증인까지 확보된 상태였다.

직접 움직인 범인으로 특정된 것은, 당연히 황탑주였다.

엘레너가 여러 번에 걸쳐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 때.

“아.”

돌연 시녀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놀란 엘레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로넬!”

반사적으로 서류를 밀어냈다.

뭔가 수작을 부렸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재운 거니, 놀랄 필요 없습니다.”

“누구냐.”

엘레너의 정면, 로넬의 옆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발에, 하얀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인물.

워낙 눈에 띄는 인상착의였기에, 엘레너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알아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엘레너 웨스트리아 왕녀님.”

수호자, 수호자는 정중하게 엘레너에게 인사했다.

엘레너는 경계를 쉽게 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언제 들어온 것이냐.”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웨스트리아가 멸망하게 생겼다는 것이죠.”

“몰래 들어온 것도 모자라, 망발까지 하다니. 무엄하다.”

“원래 제가 좀 무엄합니다.”

수호자가 쉽게 인정해 버리자, 당황한 것은 엘레너 쪽이었다.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단 말인가.

수호자는 엘레너에게 다가갔다.

엘레너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여차하면 호신용 마도구를 사용할 심산이었다.

“어디 보자.”

수호자는 엘레너를 그대로 지나쳐, 책상에 올려진 서류를 확인했다.

읽지도 않는 듯 휙휙 넘겨보더니, 서류를 도로 던졌다.

“이야, 치밀하네.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웨스트리아 왕국은 무고하다. 우리가 델 로안 대공을 죽여서 얻는 득이 없어.”

“웅크린 거북이가 드래곤을 물어뜯는 꼴이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안다면…….”

“웨스트리아 왕국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수호자의 말 한마디에, 엘레너는 인상을 찡그렸다.

“산세에 숨어 병력을 모은 건 자원이 풍족한 남쪽의 국가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다. 델 로안 대공을 제거함으로 인접한 팔베르크 제국의 눈을 돌리는 동시에…….”

“헛소리를!”

“정확히는, 그럴 듯한 헛소리지요.”

객관적인 시선에서, 아주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엘레너 왕녀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입을 닫았다.

“진실이 아니더라도, 명분은 제국에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전쟁을 피할 수는 없을 겁니다.”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으냐.”

“덫에 걸렸다는 것을 알아챈들, 혼자서 빠져나올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웨스트리아를 잡기 위해서 준비한 덫이다.

분하지만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수호자는 의자를 빼서 앉았다.

“누군가 덫을 풀어 준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요.”

“뭐라?”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주 가벼운 어투로, 결코 가볍지 않은 손길을 뻗었다.

엘레너는 쉽게 수호자의 손을 잡지 않았다.

지푸라기도 잡아야 했지만, 동시에 지푸라기도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무얼 위해서?”

“만약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수호자는 증거 자료가 빼곡하게 적힌 서류의 뒷면을 이면지로 활용했다.

슥슥 그림을 그린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팔베르크는 웨스트리아를 집어삼킬 겁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렇겠지.”

웨스트리아의 무력이 강하고, 굳건한 수비를 자랑한다고 한들.

팔베르크 제국과 비교할 수준은 못된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버티는 것이 고작.

그마저도 얼마 못 갈 것이 분명했다.

“제국이 북서쪽을 모두 장악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겉보기에는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엉망인 지도가 완성됐다.

수호자는 그림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았다.

지도 속의 팔베르크 제국은 거의 서대륙의 절반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엉망인 지도에 웨스트리아 왕국은 없었다.

“큰 이점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웨스트리아는 교류가 어려운 외딴 곳에 위치해 있다.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하기도 힘들고, 자원도 넉넉지는 않다.

“아니지요. 북쪽에 배치해 둔 병력을 모두 남쪽으로 돌릴 수 있게 됩니다.”

“잠깐. 팔베르크 제국이 헛짚은 것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웨스트리아를 노렸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엘레너 왕녀님께서는 덫에 걸려든 것뿐입니다.”

엘레너는 수호자의 하얀 가면을 바라보았다.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목소리도 변조한 것 같았다.

잠깐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 가면을 벗어 준다면,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 *

별궁, 루터 레온하트의 별실.

나는 황제가 증거랍시고 떠민 서류를 넘겼다.

흑탑주를 황탑주로 교묘하게 바꿔치기 해 놓았다.

당시 황탑주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는데, 제국은 그것을 적극 활용했다.

‘내가 죽을 시기까지, 계산했던 건가.’

조금 희미해졌던 배신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문제는, 이 증거 자료에 반박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델 로안이라는 것을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럤다간 제국의 창끝이 웨스트리아가 아닌 레온하트를 향할 테니까.

“눈 뜨고 코 베이게 생겼군.”

“레온하트 왕국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루터 레온하트가 중얼거렸다.

뚜렷한 명분이 있다면, 개입할 만한 여지가 없다.

이대로라면 팔베르크 제국이 아무런 개입도 없이 웨스트리아 왕국을 친다.

내게 있어서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웨스트리아는 철저히 고립 당했다. 얼마쯤 버틸 거라고 생각하나?”

“요아힘 경께서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한 달을 채 못 갈 것 같습니다.”

“한 달이라. 제국을 너무 얕보는데. 큰 이변이 없다면 2주 안에 끝날 거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정복이다.

팔베르크 제국과 웨스트리아 왕국 간에는 그 정도의 간극이 있었다.

다른 국가의 개입을 완전히 차단한 지금 상태라면, 병력이 집중될 테니까.

‘웨스트리아 왕국에도 꽤 전력이 있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팔베르크 제국 쪽이 확연히 강하다.

더군다나, 제국은 애초에 대대적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장 수준부터 크게 차이 날 것이다.

명분으로 인한 사기도 무시할 수 없다.

“이대로 웨스트리아가 무너지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은 있는 게 아니야, 만드는 거지.”

웨스트리아 왕국을 먼저 장악한다.

전생의 나도 한번 생각해 봤던, 성사되기만 한다면 상당히 유효한 수였다.

명분이 없어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내 죽음으로 명분을 만들었다.

“황탑주가 무고함을 증명한다면요?”

“안 먹혀. 용의자가 자신은 죄가 없다고 변호하는 꼴이잖아.”

적어도 웨스트리아 왕국 측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 판은 그렇게 짜여 있었다.

“방법을 강구해 보겠습니다.”

“너는 지금 레온하트를 대변하고 있다.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

“그렇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겁니까?”

“나 움직일 때 커버 좀 쳐 줘. 이외의 시간에도 빠질 수 있어.”

“힘써 보겠습니다.”

어쨌든 간에 전쟁을 저지하기 위해서, 개입할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신분.

‘레온하트의 수호자도, 지그문트 마이어도 직접적으로는 개입할 수 없다.’

두 신분 모두 레온하트 왕국 소속이다.

나서는 순간, 레온하트가 말려들고 만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루터 레온하트나, 발레리아도 같은 이유로 움직일 수 없다.

‘그렇다면.’

델 로안이, 움직이면 된다.

* * *

리에이트 교국의 집행자, 성기사 요안은 이상한 꿈을 꿨다.

팔베르크 제국, 렘센의 한 방향으로 홀린 듯이 걸어가는 꿈이었다.

요안은 꿈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금방 잊어버리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 꿈만큼은 생생했다.

“천사가 나왔다고요? 꿈에?”

“그래요. 두 명이었는데,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지몽이나 신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군요.”

설명을 들은 사제는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요안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사제의 생각은 달랐다.

“시노드 교구에서의 일을, 전해 들으셨을 겁니다.”

“귀족급 마족과 성자님의 출현 말입니까?”

“예. 거기서, 리에이트 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알려진 자는 둘입니다.”

“한 분은 당연히 성자님이실 거고, 다른 분께선?”

“리처드라는 이름의 성기사입니다.”

요안은 눈을 끔뻑였다.

리처드라면 잘 알고 있었다.

잠깐이지만 검을 가르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리에이트 님의 목소리를 들었단 말입니까?”

“예. 그 외에도 성기사가 리에이트 님의 뜻을 전달 받은 전례가 있습니다.”

“하지만, 헛짚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로부터 천사가 나온 꿈에는 리에이트 님의 뜻이 담겨 있다 했습니다.”

사제는 요안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전부 기록했다.

꿈이라는 것은 무의식중에 잊어버릴 수 있기에, 기억이 또렷할 때 기록해 둬야 한다.

중요한 예지몽을 놓치는 바람에 큰 변고를 치른 이들도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어떤 장소로 요안 님을 인도했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렘센의 시가지 안쪽이었어요.”

“가 본 적이 있는 곳입니까?”

요안은 고개를 저었다.

사제는 기록을 덮었다.

“길을 기억하신다면,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헛걸음일 수도 있습니다.”

“확인하지 않는 것보다는 덜 찜찜할 겁니다.”

결국 요안과 성기사 둘, 사제 하나가 움직이기로 했다.

몽마의 수색은 중단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렇다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넷은 요안의 기억대로 건물 사이로 들어갔다.

사제는 요안의 기억을 토대로 그린 그림과 풍경을 비교했다.

“요안 님.”

“예.”

“아무래도, 평범한 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버려진 쓰레기와, 새가 둥지를 튼 위치까지 전부 일치했다.

요안도 체감하고 있었다.

꿈에서 본 곳과 정확히 일치했다.

넷은 계속 움직였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따라 시가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틀었습니다.”

“흠, 요안 님.”

“왜 그러십니까?”

“길이 없습니다.”

넷은 기어코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

요안의 꿈대로라면 길이 있어야 했지만, 그 자리에는 벽뿐이었다.

요안은 벽을 올려다봤다.

“이상하군요.”

“요안 님께서도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두 성기사는 어리둥절한 눈을 마주쳤다.

뭐가 이상하다는 걸까.

요안은 벽 위에 손을 올렸다.

촉감은 분명히 있었다.

“비에 젖은 흔적이 없습니다.”

“그야, 지붕이 위를 막고 있으니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확인해 보면 될 일입니다.”

요안은 바닥에 고인 물에 손을 담갔다.

그리고 벽에 물을 뿌렸다.

“어?”

“흠, 이건.”

뿌려진 물이 벽에 흡수되듯 사라졌다.

뒤이어, 바닥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제가 결론을 내렸다.

“산 자를 거부하는 벽이군요.”

“그게 뭡니까?”

“네크로맨시, 그러니까 사령술의 한 종류입니다. 저도 이름만 들어 봤을 뿐입니다.”

사제는 아는 대로 벽에 대해 설명했다.

살아 있는 것, 즉 생물에게만 보이고 느껴지는 벽이라는 것이다.

금고처럼 일정한 패턴으로 두드리면 스스로 허물어지며, 다시 재구축된다.

“문제는, 그 암호를 모른다는 건데, 꿈에 나온 천사들이 안 알려 줬습니까?”

“알려 줬습니다.”

“어떻게 하라고 하던가요?”

요안은 지체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무언가 막아선다면, 죄다 부숴 버리라고 하더군요.”

아주 간단명료한 해결책이었다.

“공간이 협소하니, 비켜 주십시오.”

두 성기사와 사제가 물러섰다.

요안의 검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앙!

* * *

먹구름에 가려진 하늘은 유독 어두웠다.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황성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시가지까지 이어질 정도의 인원.

그럼에도 빗소리 말고는 들리지 않았다.

모두 숙연한 표정으로 줄을 서 있었다.

“장관이군.”

정문을 지키던 기사가 중얼거렸다.

렘센의 제국민들이 모두 모였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 단정하게 차려 입었는데, 비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야, 그 누구도 아닌 델 로안 대공의 장례식이니까요.”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흑탑의 마법사가 대답했다.

황성 앞에는 델 로안 대공의 서거를 추모하기 위한 묘소가 세워진 상태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을 이룬 제국민들은 모두 그 묘소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때였다.

“허.”

한 노인이 착잡한 마음에 위를 올려다봤다가, 경악했다.

처음에는 신경도 안 쓰던 사람들이 하나둘 노인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모두 경악에 휩싸였다.

기사와 마법사도 위를 올려다봤다.

“드, 드래곤?”

새하얀 화이트 드래곤이 비를 뚫고 창공에 출현했다.

기겁한 사람들이 뒤로 물러섰다.

황성 앞에 작은 공터가 생겼다.

하늘에서 가만히 체공하던 화이트 드래곤이 황성 앞에 내려앉았다.

쿵.

난생 처음 드래곤을 본 사람들은 그 모습에 압도당했다.

어두워서인지, 하얀 몸체가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화이트 드래곤은 거대한 날개를 접었다.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련의 동작으로, 그치지 않을 것 같던 비가 뚝 그쳤다.

“큭.”

“움직여!”

팔베르크 제국의 황성 정문은 경계가 한층 강화된 상태였다.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방문한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기사들과 흑탑의 마법사들이 다수 배치되어 있었다.

인파를 정리하기 위해서 나온 병사들까지 포함한다면, 전쟁에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전력이었다.

“정지!”

기사들이 드래곤을 막아섰다.

몇몇 기사들은 검을 뽑아 겨누기도 했다.

적의를 보이지 않던 드래곤이, 정면을 향해 힘을 일부 드러냈다.

쿵.

드래곤 프레셔.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 기사들 대부분이 전의를 잃었다.

하지만, 여전히 버티고 선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황성을 지키겠다는 사명감 하나로, 공포를 이겨 내고 드래곤 앞에 섰다.

비록 팔다리는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다들, 무기를 거두어라.”

“아페 백작님?”

황성 정문에서 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아페 백작이었다.

화이트 드래곤의 푸른 눈동자가 아페 백작을 향했다.

그는 화이트 드래곤을 올려다보더니, 허리를 꾸벅 숙였다.

“린시스 님, 어서 오십시오.”

“알아보는 사람이 있긴 있구나.”

콧김을 내뿜은 화이트 드래곤의 몸이 짧게 빛났다.

거대한 몸이 인간 크기로 줄어들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린시스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린시스를 보고 넋을 놓았다.

린시스는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앞으로 걸어왔다.

“벗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찾아왔는데.”

“황제 폐하께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개소리하지 말고 문부터 열렴. 들어가게.”

“린시스 님.”

“지금 저것들이, 저 문이.”

린시스는 벌벌 떨고 있는 기사들과, 굳게 닫힌 황궁의 문을 번갈아 보았다.

오만하지만, 아주 자연스러운 투로 경고한다.

“누구의 앞길을 막고 있는 건지, 알고 있니?”

“열겠습니다.”

델 로안 대공이 살아 있을 때는, 자유롭게 출입하던 황성이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 되니,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병사들이 허겁지겁 황성의 문을 열었다.

화이트 드래곤, 린시스가 황성에 입장했다.

* * *

렘브란트 님푸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이토록 경의를 표하는 인물은 단 하나.

팔베르크 제국의 황제, 라그힐 팔베르크였다.

삐딱하게 앉은 라그힐이 입을 열었다.

“발레리아 로안의 회유는 성공했나?”

“송구하오나, 실패했습니다.”

“왜?”

“그리무아르를 탈취한 범인은 발레리아 로안이 아니었습니다.”

“흠. 개입했을 줄 알았는데. 오판이었나?”

라그힐은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가 예상하던 것과 일이 다르게 흘러가는 경우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레온하트의 수호자와 같이 움직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라그힐의 예상대로라면, 그리무아르를 훔친 범인은 둘이다.

레온하트의 수호자와 발레리아 로안.

하지만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이었고, 뚜렷한 물증은 없었다.

“도난 추정 시간에, 아페 백작이 두 명과 조우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페 백작이 마법에 속았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적탑주는 환상 마법에 능하지 못한 마법사입니다.”

한때 팔베르크 제국에 살았던 만큼, 발레리아 로안에 대한 정보는 충분했다.

거의 모든 종류의 마법을 델 로안처럼 능숙하게 해냈던 발레리아다.

단 한 가지, 환상 마법을 제외하고 말이다.

“확실한가?”

“제가 따로 확인했습니다.”

렘브란트는 델 로안의 마도구까지 써 가면서 발레리아를 추궁했다.

그러나 결과는 무고였다.

라그힐은 빈 홀을 둘러보았다.

옥좌의 왼쪽에서 시선을 멈추더니, 가만히 응시한다.

거의 지정석처럼 서 있던 곳이었다.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 없군.”

“계획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문이 저절로 열렸다.

백발의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라그힐은 눈을 깜빡였다.

왕좌 앞에 선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이구나, 꼬마야.”

“린시스 님.”

화이트 드래곤, 린시스.

예상치 못한 방문에, 라그힐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델 로안 대공의 죽음을 전해 들은 린시스 화이트는 용의 산맥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벨수스와 함께 종종 황성을 방문하던 것은 모두 델 로안 때문이었다.

렘브란트가 조용히 마나 서클을 회전시켰다.

“멈추십시오.”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드래곤은 규율에 의해 지상에 개입하는 일이 극단적으로 적었다.

하지만, 린시스가 돌연 황제를 공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어머.”

렘브란트에게는 당연한 대응이었다.

린시스는 렘브란트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죽고 싶으면 말을 하렴.”

지나가는 듯한 나지막한 경고.

렘브란트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황제에게서 느껴지는 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힘이었다.

생물이라면 가지고 있을 본능적인 공포를 깨우는, 그런 압박감이었다.

“한데, 어쩐 일이십니까?”

라그힐이 화제를 돌렸다.

자연스럽게 린시스의 시선이 옆으로 넘어갔다.

숨통이 트인 렘브란트는 볼 안쪽 살을 피가 날 때까지 씹었다.

“벗의 장례를 치른다기에 왔단다. 문제 될 거 있니?”

“아닙니다. 잘 오셨습니다. 조속히 방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델 로안 대공의 장례는 사흘에 걸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황제는 웃는 낯으로 은근슬쩍 린시스에게 이곳에 머무를 걸 제안했다.

그러나 린시스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됐어. 언제까지 여기 지낼 생각은 없으니까.”

황제가 린시스를, 드래곤이라는 강력한 존재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린시스는 지그문트에게 들은 것이 있었기에, 이를 사전에 차단했다.

대신, 역으로 수를 뒀다.

“꼬마야.”

“예. 린시스 님.”

“여기저기 손을 뻗치고 다니는 것 같더구나.”

마계와 불사의 괴물.

정황에 의하면, 라그힐 팔베르크는 두 쪽 모두와 관련이 있었다.

아직까지 확증은 없었지만, 용의 산맥은 팔베르크 제국을 주시하고 있었다.

결정적 계기는 지그문트 마이어가 찾아낸 페러시트였다.

“조심하려무나. 내 손으로 팔베르크 제국을 박살 내고 싶지는 않으니.”

“명심하겠습니다.”

* * *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허물어졌다.

비 비린내를 뚫을 만큼 선명한 썩은 내가 코를 찔렀다.

두 명의 성기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요안 님!”

“아무래도, 신탁이 맞았던 모양입니다.”

사제 또한 신성력을 끌어 올렸다.

요안은 벽 너머의 공간을 살폈다.

깊은 어둠으로 들어찬 골목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제가 먼저 확인해 보겠습니다.”

한 성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렘브란트 님푸스와 조우했을 때, 잠들어 있던 성기사였다.

잠든 사이에 있었던 일을 듣고, 만회하기 위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의욕이 앞섰다.

“잠깐……!”

요안이 그를 멈춰 세웠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성기사는 벽 너머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사제가 뒤늦게 신성력을 일으켜 빛을 비췄지만, 어둠은 빛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이건 설마…….”

“가장 어두운 어둠, 심연이군요.”

요안은 진지한 기색으로 사제와 성기사를 한 발 뒤로 물러서도록 했다.

마계의 안개와 같은 것으로, 일종의 통로의 역할을 한다.

발을 딛는 것만으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문제는 그 반대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증원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브릭, 집행자를 전부 소집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성기사, 브릭은 심연 속으로 사라진 성기사가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동료니, 당연한 일이었다.

요안은 걱정 말라는 듯 심연을 응시했다.

“제가 구하겠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제가 같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사제가 브릭을 안심시켰다.

브릭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요안은 수많은 마족과 마주하고, 여러 역경을 헤쳐 왔다.

그의 판단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브릭을 보며, 사제가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들어가야지요.”

“너무 위험합니다. 여기선 증원을 기다리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심연은 문이 아니라, 한쪽으로 이어진 통로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심연 속으로 들어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은 이들도 더러 있었다.

“가야지요.”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고는 예상했습니다.”

사제는 눈을 감았다.

요안의 정직하고 올곧은 성격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많은 성기사들의 존경을 받는 것이겠지만.

위험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혹, 꿈에서 말입니다. 천사들이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부숴 버리라고요?”

“그거 말고, 심연 속에 있는 것에 대한 언질이 있을 법도 한데요.”

“심연 속에 있는 것.”

요안은 눈을 감고 기억을 되짚었다.

꿈속의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꿈만큼은 바로 방금 겪은 듯 선명했다.

“악.”

“악요?”

사제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걸까, 되물었다.

요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악(惡)이 있다고 했습니다.”

* * *

황성, 별실.

나는 그리무아르를 덮었다.

시간에 맞춰,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나타났다.

가면을 벗자 발레리아의 얼굴이 드러났다.

“엘레너 왕녀는 어떻더냐?”

“생각보다 침착하던데요? 의외였어요.”

“황제한테 말 붙일 때 대충 싹수가 보이지 않던?”

“그건 그랬죠.”

황제에게 그런 식으로 말대답을 할 수 있는 인물은 드물다.

결국 주저앉긴 했어도, 엘레너 왕녀가 무력이 전무하다는 걸 생각하면 대단한 거다.

발레리아는 그리무아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뭘 준비하시는 건가요?”

“라그힐 그놈이 수를 뒀으니, 이번에는 내 차례거든.”

나는 그리무아르를 툭툭 두드렸다.

표지의 세로 선이 쭉 찢어지더니, 입이 열렸다.

“툭툭 두드리지 마라. 물겠다.”

“말해 뒀던 건?”

“가능하다. 정신에 걸릴 부하를 생각하면, 추천하지 않는다.”

“좋아. 가능하면 됐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에 올려 둔 레온하트의 수호자 가면을 집어 들었다.

그리무아르는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발레리아는 멀뚱히 나를 쳐다보았다.

“어디 가시게요?”

“옮겨 놓은 나이트가 죽을 수도 있거든.”

“같이 가요!”

“안 돼. 말했던 대로 움직여.”

“……눼. 알겠습미다.”

발레리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대답했다.

발음이 괴상하게 뭉개졌다.

얘는 다 컸으면서, 이상하게도 내 앞에서는 애처럼 군다.

“황탑주는?”

“통신이 안 돼요.”

“하여튼 그놈은 어딜 싸돌아다니는 건지.”

“방랑벽은 스승님도 만만치 않으신데요.”

“비겁하게 진실을 들이밀다니.”

나는 가면을 뒤집어썼다.

“린시스는?”

“도착했을 거예요.”

“너무 일러. 시간 끌어야 돼.”

“제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부탁한다.”

* * *

가슴이 갑갑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었다.

신성력의 빛은 심연에 먹혀 버렸다.

요안은 그저 앞으로 걸었다.

심연은 통로.

지나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걸어가야 했다.

‘주의해야 한다.’

심연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 너머에 있는 것도, 미지였다.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실체가 없다.

어둠 속에 있는 무언가.

심연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둠이 요안의 정신력을 갉아먹었다.

‘리에이트 님.’

요안은 속으로 기도문을 되뇌며 버텼다.

그 무엇도 자신을 위험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없다.

그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며, 걸었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심연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

목적지만을 바라보고 걸어야 한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통로를 지나는 것에 미련이 있다고 간주한다고 한다.

심연은 생물이 아니지만, 그런 판단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전해진다.

‘음?’

요안은 발걸음을 멈췄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뒤에서 뭔가 따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이겠거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뚜벅.

동굴에서 울리듯, 발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한 걸음 앞으로 간 요안은 우뚝 멈춰 섰다.

뚜벅.

발소리가, 뒤늦게 하나 더 겹쳐 들렸다.

등골이 서늘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분명히, 무언가 뒤에 서 있었다.

“후우.”

요안은 검에 손을 올렸다.

무엇인지 모를, 그것은 요안이 멈추자 가만히 있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기는 없다.’

두려웠다.

숱한 마족을 상대하면서, 이렇게 두려웠던 적은 없다.

하지만 요안은 굳게 마음을 다잡고, 다시 앞으로 걸었다.

뚜벅, 뚜벅.

발소리는 여전히 겹쳐 들렸다.

뒤에 있는 무언가는 요안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따라오는 것 같았다.

요안은 아랫입술을 피가 날 때까지 깨물어서 정신을 맑게 만들었다.

두려움에 잠식돼서는 안 된다.

툭.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신경이 곤두 선 상황.

요안은 아주 간단한 변화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이 요안의 등을 쿡 누른 것이다.

“큭!”

요안은 눈을 질끈 감고, 검을 뽑아 들었다.

몸을 틀어, 어둠을 베어 냈다.

칼끝에 감각이 있었다.

종이를 베는 듯한, 아주 옅은 감각이었다.

“히히히…….”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것의 기척이 사라졌다.

요안은 검을 집어넣었다.

눈을 감은 덕분에 심연에 갇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방향이…… 여기였나?’

아무런 시각적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방향을 다시 잡을 수가 없었다.

심연을 빠져나가기 위해선 같은 길로 정확히 걸어야 한다.

한데,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큭.”

요안은 감각을 되살리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결국 확실히 뒤는 아닌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요안은 하염없이 걸었다.

걷고, 걷다가, 확실히 깨달았다.

“빌어먹을. 망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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