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134)

6

오픈 게임

“지금쯤 트리옌이 함락 당했을 거다.”

나는 백색 퀸을 옮겨 흑색 폰을 잡아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발레리아는 곧장 비숍에 손을 올렸다.

크게 고민하는 기색 없이, 흑색 비숍이 백색 퀸을 넘어트린다.

“예상보다 빠르네요.”

“황제가 계획을 많이 변경했어.”

기존의 계획은 조금 더 확실하고, 전개가 느린 방식으로 진행됐다.

반면에 현재 황제는 매우 공격적으로 승부수를 두고 있었다.

레온하트 왕국에 수차례 공격을 감행한 것에서 대충 짐작을 했지만, 이렇게까지 계획의 진행 속도를 높일 줄은 몰랐다.

“아마 스승님의 죽음이 계기겠죠.”

“그렇겠지.”

팔베르크 제국은 가장 강력한 패를 스스로 버렸다.

폭탄을 안고 가느니, 가시밭길을 걷는 쪽을 택한 것이다.

걷는 속도가 빨라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음 목표는 어딜까요?”

“대신전과 성자의 분쟁으로 혼란스러운 리에이트 교국…….”

수를 두자, 발레리아도 말을 옮겼다.

입으로는 이야기를 이어 나가면서, 체스를 두는 것.

동시에 여러 마법을 캐스팅을 하는 데 도움이 되기에, 옛날에 자주 하던 일이다.

“……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마 퀸틴일 거다.”

“퀸틴요? 그 먼 곳을 굳이 우선순위에 둘 이유가 있을까요?”

발레리아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해상도시 퀸틴은 서대륙의 북동쪽 끝자락에 있다.

다른 국가와 교류가 적고, 이렇다 할 지리적 이점도 없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확실히 그랬다.

“있지.”

“아, 불사의 신자들.”

“맞다. 그것 말고도, 트리옌을 완전히 쥐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불사의 괴물.

놈이 봉인되어 있는 곳이 해상도시 퀸틴 인근이다.

세계수의 신살이 활성화된 것으로 봐서, 아마 봉인 해제는 진행 중일 것이다.

최악의 경우, 이미 퀸틴이 장악 당했을 수도 있다.

적어도 퀸틴의 뒤 세계는 이미 팔베르크 제국의 손아귀 안에 있었으니까.

“신어(神魚)도 확인해 봐야 돼. 봉인이 약화됐으니.”

“그럼 스승님 다음 행선지는 퀸틴인가요?”

“아마도. 트리옌에 한번 들러야 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황제가 이 장례식을 연 목적이 미지수였다.

적진에 있던 폰을 한 칸 앞으로 옮기자, 발레리아가 짧게 탄식했다.

폰을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미끼로 던진 퀸이 유효했다.

발레리아는 장고 끝에, 울며 겨자 먹기로 수를 뒀다.

“체크메이트.”

“끙, 그러네요.”

백색 폰이 상대 진영 끝까지 전진했다.

폰을 나이트로 승급시키면서, 체크메이트였다.

발레리아는 스스로 킹을 눕혔다.

* * *

“루터 레온하트 왕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열려 있다.”

방 안으로 들어선 루터는 흠칫했다.

트리옌의 왕세자, 헨드릭 때문이었다.

“반갑네. 루터 왕자.”

과거, 헨드릭은 사절단을 이끄는 몸으로 레온하트 왕국을 찾은 적이 있다.

루터 레온하트는 그때의 헨드릭을 기억했다.

올바르고 굳센 눈동자와, 당당하게 편 어깨.

굳이 비교하자면 시프 레온하트와 비슷한 부류였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헨드릭은 몹시 초췌한 안색이었다.

언데드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퀭한 눈 그늘과, 움푹 파인 볼.

가끔 눈가가 잘게 떨리기도 했다.

환자를 방불케 하는 인상이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헨드릭 왕세자님.”

“앉게나.”

루터는 헨드릭을 조용히 관찰했다.

뭔가 불안한 사람처럼 눈동자를 쉴 새 없이 좌우로 굴린다.

예전의 당당한 사람은 어디로 가고, 잔뜩 움츠린 모양새다.

시녀가 차를 내왔다.

“친목이나 도모하자고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어쩐 일인가?”

바로 본론부터 묻는다.

사담은 별로 원치 않는 눈치다.

루터 레온하트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하멜의 마족에 대한 건입니다.”

“흠.”

헨드릭은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얼마 전, 위스크 백작령에서 나온 마족이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트리옌은 팔베르크처럼 귀족이 직접 연관된 것은 아니었지만, 하멜은 트리옌의 수도이며, 왕성이 있는 곳이다.

민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위스크 백작령에 이어, 하멜, 최근에는 시노드 교구에서 귀족급 마족이 출연했습니다.”

“들었네. 성자가 처리했다던데.”

“레온하트에도 마족의 손길이 닿았습니다.”

“그건…… 듣지 못했군.”

헨드릭이 팔짱을 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엘비아와의 동맹 선언식 때, 거대한 뱀과 언데드들이 출연한 것을 얘기하는 건가?”

“아닙니다. 그 일의 범인은 네크로맨서였습니다.”

“그럼?”

“검술 대회 준결승이었습니다.”

“아아.”

헨드릭도 언뜻 들은 적 있었다.

검술 대회 준결승에서,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폭주한 기사를 막아 냈다는 것.

그 기사가 마족에 의해 폭주했다는 얘기가 된다.

헨드릭은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루터를 살폈다.

“한데, 어째서 그 얘기를 내게 하는 거지?”

마족의 출연은 국가의 치안과 평판에도 깊게 연관되어 있다.

숨길 수 있다면 숨기는 것이 제일이었다.

위스크 백작령과 시노드 교구의 경우, 워낙 일이 공공연하게 퍼질 만한 규모였다.

하멜은 리에이트 교국의 성기사들이 연관되는 바람에 새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검술 대회에 마족의 손길이 닿았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내 충고하는데, 그런 발언은 신중하게 하는 것이 좋을 거야.”

루터 레온하트는 이제 열댓 살이다.

치열한 왕권 다툼에서 살아남은 헨드릭의 눈에는, 어린아이로만 보였다.

만약 헨드릭이 피폐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분명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어린아이의 눈에서 빛나는 총명함을.

“알고 있습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인데, 국가의 위신을 떨어트릴 수도 있는 일을 내게 알리는 것이지?”

“검술 대회 준결승 당시, 리로이 존스라는 기사가 폭주 했습니다.”

세간에는 약의 남용으로 이성을 잃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넌지시 암시한 덕분이었다.

“페러시트라는 마계의 기생 생물이 원인이었습니다.”

“페러시트?”

루터는 페러시트에 대해서 설명했다.

지그문트가 마차에서 설명해 준 것을 그대로 옮겼다.

설명을 들은 헨드릭은 끔찍하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머리에 기생하여 숙주를 조종한다. 적출도 어렵다니, 끔찍하군.”

“그렇습니다. 끔찍한 일이지요.”

루터는 짐짓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헨드릭을 바라보았다.

“하나 이는 마기에 노출된 페러시트입니다.”

“무슨 소리지?”

“페러시트는 마계의 생물입니다. 마기가 없다면, 활동이 현저하게 느려집니다.”

리로이에 기생한 페러시트는 마기에 노출되었다.

하여 고작 며칠 만에 리로이의 몸을 장악한 것이다.

“마기에 노출되지 않은 페러시트가 기생한다면, 숙주는 다음과 같은 증세는 겪습니다.”

루터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지그문트가 말해 준 증세를 열거했다.

“처음에는 기억력이 저하하고, 몸이 쇄합니다. 영양분을 빨리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자연히 숙주는 폭식을 하게 됩니다. 페러시트에게 빼앗긴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해서요.”

헨드릭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생각에 빠졌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루터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이후에는 한 번 앓아눕는다고 합니다. 몸이 장시간 페러시트를 받아들이지 못하니까요.”

“그다음은?”

“그것이 회복되면, 정신력을 깎아 먹기 시작합니다. 서서히 이지를 잃어 가지요.”

“그건.”

“예. 트리옌 국왕 폐하와 왕비마마의 병세와 매우 흡사하지요.”

헨드릭은 사색이 됐다.

루터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앓아누운 것은 트리옌의 왕비고, 이지를 잃은 것은 트리옌의 국왕이다.

“하면, 페러시트가 문제라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헨드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눈동자에는 초점과 함께 희미한 희망이 돌아와 있었다.

“이럴게 아니라, 당장 사제를…….”

“헨드릭 왕세자님.”

헨드릭이 시선을 내렸다.

지극히 차분한 기색의 루터가 보였다.

덩달아 헨드릭의 머리도 조금 식었다.

“그렇지. 적출이 불가능하다고 했지.”

루터가 말하길, 적탑주조차 페러시트를 적출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헨드릭은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원인을 찾았으니, 희망의 불꽃이 피어난 것이다.

헨드릭은 약간이지만 생기를 되찾았다.

“어느 것이나 예외는 있기 마련입니다.”

루터가 입을 열었다.

“적출이 가능하다는 얘긴가? 누구지? 대사제인가?”

“아닙니다. 저희 레온하트 왕국에 있습니다. 사례로, 리로이 존스는 완전 회복되었습니다.”

“적탑주께서도 불가능하다고 했을 텐데.”

“페러시트에 대해서도, 지금 해 준 이야기도 모두 그분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루터는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레온하트의 어린 사자가, 사냥 준비를 시작했다.

* * *

떠들썩한 주점.

황성 밖으로 나온 나는 단과 함께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마나 서클이 회전했다.

개인 공간(Private Space).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술을 실제로 마시진 않았다.

몇 차례 술을 마셔 봤지만, 이 몸은 술에 몹시 약한 편이었다.

취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주군.”

“왔냐.”

“예. 리옐 님께서는, 오지 않으셨습니까?”

“불사의 신자들이 신경 쓰여서 말이야.”

전(前) 실험체 1호, 고블린 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물게도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새 인간의 언어가 늘어난 것 같기도 했다.

“두고 와도, 괜찮은 겁니까?”

“마녀랑 요르문간드가 지키고 있어.”

“그거, 다행이군요.”

“그래서, 진척은?”

“조금,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왜?”

롭은 나고와 얘야가 진행하고 있던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알려왔다.

잘못해서 렘브란트 님푸스를 건드렸다가, 호되게 당하고 쫓겼다는 얘기였다.

“둘은?”

“무사합니다만, 당분간은.”

“그렇겠지. 괜찮아. 어차피 따로 맡길 일이 있었으니까.”

“전하겠습니다.”

쪽지를 위로 던지자, 그림자에서 녹색 손이 튀어나와 쪽지를 잡아챘다.

굳이 황성 밖으로 나온 이유는, 통신구의 한계 때문이었다.

황성 같은 공간에서는 도청의 가능성이 있었다.

직접 샌딩(Sending)을 보내는 것은 위치가 특정되지 않아 불가능했다.

“롭. 너도 따로 할 일이 있다.”

“무엇, 입니까?”

“실험체 17호, 기억 나냐?”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롭은 최초의 실험체인 만큼, 뒤 기수들을 거의 알고 있었다.

실험체 17호는 지성이 없었지만, 처음 폐기된 실험체인 만큼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찾을 수 있겠어?”

“위장하고 있다면, 어렵습니다.”

“자.”

나는 쪽지에 이어서 작은 조각을 위로 던졌다.

실험체 17호를 개조할 당시, 따로 떼어 놓았던 것이다.

“근처로 가면 반응할 거야.”

“이런 것이 있다면, 간단한 일이지요.”

“렘센 내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전부 돌아보고, 위치 보고해 줘.”

“명, 받들겠습니다. 주군께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시간을 확인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떻게 하긴. 내 장례식 참여해야지.”

* * *

황성의 별궁.

발레리아 로안은 기분이 심히 좋지 않다는 기색이 팍팍 드러났다.

여차하면 사용이라도 하겠다는 듯, 완드에 손을 올려 두고 있다.

깊은 한숨을 내쉰 발레리아가 정면을 노려보았다.

“저 좋아하세요?”

“무슨 개소리지?”

“그러면 왜 자꾸 찾아와요? 짜증 나게.”

발레리아의 맞은편에는 렘브란트 님푸스가 앉아 있었다.

두 탑주는 또다시 기 싸움을 시작했다.

팔베르크 제국의 황성이건만, 둘은 전투라도 벌일 기세였다.

렘브란트는 발레리아를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리무아르가 도난당했다.”

불과 몇 분 전, 렘브란트 님푸스는 그리무아르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역시, 발레리아 로안이었다.

“아주 잘하는 짓이네요. 스승님이 남긴 유품을 도둑맞았다고 자랑이나 하고.”

“네가 벌인 짓, 아닌가?”

“하.”

발레리아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짐짓 기분이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린다.

“지금 저를 도둑 취급하는 건가요?”

“델 로안 대공의 유산이다. 네가 의심스러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증거 있어요?”

없다. 마법으로 조사했지만, 저택 내에서는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출입 기록에 의하면, 발레리아 로안은 황성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러나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있는 7서클 마법사에게 출입기록은 무의미했다.

외부에서 경계를 서던 기사들도, 수상한 사람을 목격하진 못했다.

“심증으로 사람 몰아가지 마시죠. 기분 더러우니까.”

발레리아는 몹시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렘브란트는 대놓고 발레리아를 떠보고 있었다.

반응만 봐서는 역시 알 수 없었다.

정계에 나서진 않았지만, 발레리아는 노련한 연기자였다.

“설령 제가 가져갔다고 해도, 무슨 상관이죠? 그리무아르가 당신 거예요?”

“델 로안 대공의 유산은 모두 팔베르크 제국에 귀속됐다.”

“아, 꿀꺽하시겠다 이거구나.”

“유언장에도 적혀 있었을 텐데. 유산을 거절한 것은 너다. 발레리아 로안.”

“유언장?”

허공을 떠돌던 마나가 불똥처럼 타닥타닥 타들었다.

방의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발레리아의 분노에 불의 서가 반응한 것이었다.

“지랄을 하세요. 라그힐, 그 새끼가 조작한 거 모를 줄 알아요?”

“황제 폐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삼가도록.”

“그 자식 면상에 헬 파이어 안 갈긴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렘브란트도 경고를 하는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라그힐 팔베르크의 명령 때문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발레리아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렘브란트가 손가락을 튕기자,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덩달아 머리가 조금 식은 발레리아는 혀를 찼다.

“쯧. 저번에도 탄생 내놓으라고 찡찡거리더니.”

“공격적이군. 팔베르크 제국에 악감정이라도 있나?”

“없었는데, 실시간으로 마구 생기고 있네요.”

렘브란트는 아공간에서 수정구 하나를 꺼냈다.

중심부에 푸른 마석이 박혀 있었다.

발레리아도 익히 알고 있는 마도구였다.

고대 마법, 터치 오브 트루스(Touch of Truth)가 내장된 수정구.

델 로안의 실험작 중 하나였다.

“수정구에 손을 올려라.”

“싫은데요.”

“범인이 아니라면, 거부할 이유는 없을 텐데.”

“협조할 이유도 없죠. 누구 덕분에 기분이 더러운 상태거든요.”

발레리아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피식 웃었다.

“증거를 가져오시면, 상대해 드릴게요.”

렘브란트 님푸스는 입을 다물었다.

레온하트 왕국에서, 렘브란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발락 리빙데드가 팔베르크 제국 소속이냐는 질문에, 딱 저런 식으로 대응했다.

렘브란트의 얼굴이 구겨짐에 따라, 대조적으로 발레리아의 안색이 밝아졌다.

한결 여유가 생겼는지,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계속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굴 건가? 이곳이 어딘지 잊은 건 아니겠지?”

“렘센이죠. 왜요? 그쪽이 했던 것처럼, 대규모 공격 마법이라도 갈겨 드려요?”

이번에는 네르갈 상공에 블리자드를 캐스팅했던 것을 들먹인다.

발레리아는 제 턱을 쓰다듬었다.

렘브란트 눈에, 순간적으로 발레리아와 델 로안이 겹쳐 보였다.

얄밉게 사람 심기를 툭툭 건드리는 것이,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다.

“그래도 저는 그쪽 같은 사회 부적응자가 아니라서요.”

발레리아는 수정구에 손을 올렸다.

의심이 있으면, 해명을 해야 한다.

꼬투리 잡힐 짓은 최대한 피하는 편이 좋았다.

“협조해 드리죠. 이 일은 레온하트 왕국에 정식으로 보고될 거라는 거, 알아 두세요.”

발레리아 로안은 레온하트 왕국의 조문단에 소속되어 제국을 찾았다.

즉, 외교 문제로 번질 여지가 충분했다.

렘브란트는 잠깐 갈등했다.

발레리아 로안이 너무 자신만만했기 때문이다.

“알겠다.”

렘브란트는 말려들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애매한 채로 내버려 둬야 한다.

더군다나, 발레리아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다.

발레리아는 수정구에 손을 올리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속임수는 없다.’

렘브란트 님푸스는 발레리아와 같은 탑주급 마법사다.

눈속임은 불가능했다.

발레리아는 조용히 읊조렸다.

“나는 그리무아르의 도난에 대해서 아는 바가 일절 없다.”

발레리아에겐 터치 오브 트루스(Touch of Truth)가 적용된 상태였다.

즉, 거짓은 입에 담을 수 없다.

그리무아르의 도난에 대해 모른다는 것이 진실이라는 뜻이었다.

만약 힘을 사용해 거짓을 입에 담았다면, 수정구가 깨졌을 터.

‘젠장.’

렘브란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발레리아는 태연한 얼굴로 수정구에서 손을 뗐다.

수정구를 확인한 렘브란트는, 장난질이 없었음을 재확인 했다.

“헛다리 크게 짚으셨네요.”

“……그렇군.”

렘브란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정구는 완벽하게 작동했다.

발레리아의 손과 수정구가 마나의 간섭 없이 접촉한 것도 확인했다.

“내 실수다. 사과하지.”

“네? 뭐라고요? 잘 안 들리는데요?”

렘브란트는 수정구를 회수한 뒤, 방을 나가 버렸다.

발레리아는 닫힌 방문을 보며 고소하다는 듯 큭큭 웃었다.

아공간을 열었다.

툭.

스크롤 하나가 발레리아의 손에 떨어졌다.

지그문트가 렘브란트와 이야기가 끝나면 찢으라고 한 것이었다.

무슨 마법이 담겨 있는지는 모른다.

찌이이익.

스크롤을 찢자, 마나가 새어 나왔다.

관자놀이를 찌르는 듯한 짧은 두통과 함께 잊고 있었던 기억이 돌아왔다.

지그문트 마이어와 그리무아르를 찾기 위해 저택에 갔던, 20분가량의 기억이었다.

“말이 되나 싶었는데.”

발레리아가 터치 오브 트루스를 피해 낸 방법은 괴랄했다.

기억 수정 마법, 모디파이 메모리(Modify Memory)를 변형해, 기억을 잘라 낸다.

그 기억은 스크롤에 따로 담아 둔 뒤, 일이 끝나고 되찾는다.

당연하게도 지그문트 마이어의 계획이었다.

“말이 되네?”

* * *

진혼곡이 홀에 내려앉았다.

라스 마이어의 뒤에 선 나는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봤다.

로브를 입은 노인이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초상화.

전생의 나, 델 로안의 초상화였다.

‘나는 누군가 나를 그리게 허한 기억이 없는데.’

아마 황제가 따로 준비한 것 같았다.

귀족들은 모두 파란 꽃 한 송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크리센스.

존경과 감사, 그리고 추모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꽃이었다.

극소량이지만 마나를 머금고 있어, 마법사의 장례에서 쓰이곤 한다.

‘기분 참 묘하군.’

귀족들은 제각각의 방법으로 추모를 했다.

기분이 더러울 거라고 예상했는데, 막상 닥치니 그렇진 않았다.

진심으로 내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물론 제국 놈들은 진심일지 의문이었지만.

적어도 아페 백작은 진심인 것 같았다.

“끄흑, 흑.”

“백작님. 또 저러시네.”

“개인적으로 연이 많았다더군.”

“좋으신 분이야.”

거의 오열을 한다.

팔베르크 제국의 귀족들이 전부 한통속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더 씁쓸했다.

순서가 다가오자, 나는 라스 마이어와 함께 초상화 앞에 섰다.

미리 받은 크리센스를 앞에 두고, 짧게 기도하는 시늉을 했다.

‘나 자신을 추모하다니.’

괴상한 경험을 마친 뒤, 홀 안쪽으로 들어갔다.

귀족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연회보다는 훨씬 차분한 분위기였다.

전생의 나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나는군. 돌아가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태어났을 때부터 굳건히 자리를 지키시던 분이니…….”

귀족들 사이에는 각국의 왕족도 섞여 있었다.

루터 레온하트가 접근해 왔다.

라스는 눈치 빠르게 옆으로 물러섰다.

“지그문트. 추모는 마쳤는가?”

“예. 루터 왕자님. 왕자님께선 일을 마치셨습니까?”

“그래. 진척이 있었지.”

서로 말투가 어색했지만, 다행히 티는 내지 않았다.

시선이 맞닿았다.

루터가 눈짓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트리옌의 왕자, 헨드릭이 있었다.

근심이 많았는지 비쩍 말랐으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접촉을 마친 모양이군. 증상도 맞아떨어진 것 같고.’

페러시트를 통해 트리옌의 왕가를 장악했다는 건 나도 얼마 전 알게 된 사실이다.

조문단에 편성되기 전, 암국의 왕이 밤말을 듣는 쥐를 통해 정보를 전해 왔다.

하멜은 지금 암국과 팔베르크 제국의 암투로 한창이다.

그 과정에서 유출된 정보가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다.

증세를 듣고 페러시트를 연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바빠질 걸세.”

“알고 있습니다.”

신성이 탐탁치 않아 하겠지만, 트리옌에는 다시 한번 가야 할 것 같았다.

라스는 의아한 눈으로 나와 루터를 바라보았다.

라스 눈에는 신기해 보일 것이다.

허구한 날 어디 싸돌아다니는 아들놈이다.

어느새 착실히 인맥까지 만들어 두고 있으니.

“흠.”

귀족들이 웅성거리며, 한곳을 주목했다.

홀 내로 백발의 노인이 발을 들였다.

늙은 사람답지 않게 똑바른 자세가 눈에 띄었다.

체구는 보통 사람 정도에, 말쑥한 정장을 입었다.

원목으로 된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기묘하게도 어울렸다.

“저분께서 누구신데 그러십니까?”

젊은 축에 속하는 귀족들이 속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품이 느껴지긴 했으나, 다른 귀족들과 다를 바 없다.

겉보기에는 아페 백작과 비슷한 부류 같았다.

평범하디 평범한 늙은 귀족.

그렇게 착각할 수 있었다.

“처음 뵀다면 모를 수도 있지. 똑똑히 기억해 둬라.”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완벽하게 갈무리하였기에, 느껴지지 않았을 뿐.

기세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다.

노인의 정체는 검 한 자루로 드래곤을 살해하고, 산맥을 잘라 낸 기사.

검이라는 도구가 가진 한계를 산산이 깨 버린 인물.

“저분께서 그랜드 소드 마스터, 요아힘 월베른 경이시니.”

요아힘 월베른은 홀을 둘러보았다.

좌중을 압도하는 위압감이나,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은 없었다.

그럼에도 몇몇 이들은 절로 몸을 움츠렸다.

노인의 명성에 짓눌린 것이었다.

꿀꺽.

루터 레온하트도 긴장했는지, 마른침을 삼켰다.

조용한 담소가 돌아다니던 홀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요아힘의 입이 열렸다.

“노인네 하나 더 온 것뿐이니, 신경들 쓰지 말게나.”

그 말에, 팔베르크 제국의 귀족들이 눈치껏 이야기를 재개했다.

여전히 요아힘을 신경 쓰는 모양새였지만, 어쩔 수 없다.

현재 서대륙 내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 발을 들였는데.

신경이 안 쓰이면 이상한 것이다.

‘제국 내에서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요아힘을 보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 작위를 받은 귀족이지만, 작위에 예속되지는 않는다.

월베른이라는 성이 아닌 요아힘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황가에 대한 충성심은 지니고 있지만.’

팔베르크 제국이 선제공격을 당한 것이 아니라면, 먼저 움직이는 일은 없다.

그렇다고 평화주의자는 아니다.

꽤 성깔 있는 인물로, 결투 끝에 드래곤을 썰어 버린 전적이 있다.

하지만, 호전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빗대자면 바위나 산 같은 사람이다.

‘라그힐과 결탁을 했느냐가 문젠데.’

만약 그가 팔베르크 제국의 서대륙 재패에 동참했다면, 내 계획을 대폭 수정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승산이 현저하게 낮아진다.

확인할 필요가 있긴 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요아힘 경.”

귀족들이 눈치만 보며 다가가지 못하는 가운데, 한 귀족이 앞으로 나섰다.

팔베르크 제국의 아페 백작이었다.

넉살 좋게 말을 붙이자, 요아힘도 기꺼이 응대해 준다.

“아페 백작, 간만이구먼.”

“얼굴 뵙기가 어렵습니다.”

“이해해 주게. 이런 자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일세.”

이미 유명한 사실이었다.

황명이라면 모를까, 요아힘 월베른은 공적인 자리에 나서지 않는다.

자진해서, 스스로의 의지로만 발을 옮기는 놈이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간혹 제 의지와 다르다면, 황명을 거스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꽃만 두고 갈 셈이었는데.”

요아힘은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페 백작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뚜벅, 뚜벅.

유난히 큰 발소리가 홀을 울렸다.

귀족들이 갈라져 길을 만들었다.

요아힘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정확히 루터 레온하트와 내가 있는 곳 앞에 선다.

“오랜만이구나.”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황제, 라그힐 팔베르크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요아힘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전생에도 이 노인의 능력은 전부 파악하지 못했다.

영혼을 꿰뚫어 보기라도 했다면, 들킬 가능성도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설령 영혼을 꿰뚫어 봤다고 해도, 알아보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일들이 있었다.

특히 신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내 영혼은 분명 변했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

나는 요아힘의 입을 주시했다.

“라스.”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요아힘 이 노인네가 누구를 부른 거지.

옆을 보니, 평소와 같은 표정의 라스 마이어가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요아힘 경.”

귀족들이 조용히 수군댔다.

대부분 의문이 가득한 눈치였다.

솔직히 나도 많이 의아했다.

라스 마이어와 요아힘이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건지.

“아직 생각은 같은가?”

“송구합니다. 저는 델 로안 대공의 서거를 추모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라스 마이어는 완곡하게 말을 돌렸다.

공적인 자리, 사담은 삼가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요아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둘의 관계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나는 환생했을 때, 라스 마이어라는 인물을 처음 만났다.

이름조차 처음 들었다.

요아힘과 사적으로 아는 사이라면, 나도 들어 봤을 법한데.

‘어디서 만난 거지?’

추측을 이어 나가려는데, 요아힘이 눈을 돌렸다.

시선 끝이 향한 곳은 나와 루터 쪽이었다.

“레온하트의 루터 왕자님이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야말로,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요아힘 월베른 경.”

둘은 짧은 인사를 나눴다.

성격적인 측면에서, 요아힘은 상당히 점잖으며 너그러운 인물이다.

힘이 있음에도 오만하지 않으며, 도리어 더 자신을 낮추는 경향이 있다.

밖에 잘 나서지 않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평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요아힘이 눈을 돌렸다.

“필연적으로 자네가, 지그문트 마이어가 되겠군.”

* * *

요아힘 월베른은 고요한 눈으로 지그문트 마이어를 살폈다.

요즘 들어 소문이 무성하던, 요정족의 은인이다.

그 점은 요아힘의 흥미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영웅이란 시대를 불문하고 나타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저건.’

홀에 들어서자마자, 요아힘은 한 청년을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라스 마이어의 옆에 선 금발의 청년.

지그문트 마이어였다.

‘허허. 어디서 이런 놈이 튀어나왔는지.’

요아힘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힘을 가늠할 수 있었다.

특별한 능력 같은 것은 아니었고, 오랜 경험으로 쌓은 안목 덕분이었다.

그런데 지그문트 마이어에게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요아힘은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큰 충격을 받았다.

‘힘이 아예 없지는 않을 테고.’

검 한번 잡아 본 적 없는 일반인들도 각각 힘의 정도가 다르다.

살아 있는 것이라면 모두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그문트 마이어에게는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경우의 수는 하나뿐이다.

‘힘을 의도적으로 갈무리하고 있는 것인가?’

요아힘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라면, 완벽하게 힘을 제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힘을 가지는 것과, 자신의 모든 힘을 제어하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흥미가 솟구쳤다.

‘재밌는 놈이로고.’

지그문트 마이어는 이제 막 스물에 달한 청년이다.

있는 힘을 갈무리하고 제어하는 것보다, 힘의 총량을 키우는 데 사력을 쏟을 시기.

만약 의도적으로 힘을 숨기고 있다면, 필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요아힘은 라스와 루터에게 인사를 건넨 뒤, 지그문트에게 눈을 돌렸다.

“……필연적으로 자네가, 지그문트 마이어가 되겠군.”

“안녕하십니까. 요아힘 경.”

인사는 평범했다.

그러나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한 순간, 요아힘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레온하트 왕국에 이런 인재가 있을 줄이야.’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눈이었다.

제 나이에는 결코 가질 수 없는 눈빛.

그가 여태껏 만나 온 사람 중,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은 딱 둘이었다.

라그힐 팔베르크와, 죽은 델 로안.

“그래. 검을 다룬다고 했지?”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힘을 완벽히 제어하는 건, 결단코 보통 일이 아니다.

힘의 총량이 적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랜만에, 사람이 궁금해졌다.

요아힘은 은밀하게 힘의 일부를 드러냈다.

‘일단은 가볍게…….’

평범한 사람이라면, 죽을 수준.

그러나 지그문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요아힘은 속으로 감탄했다.

기습적인 압박에 당황했을 법도 한데, 그런 기색도 일절 없다.

“요아힘 경.”

라스가 나지막이 요아힘을 불렀다.

힘을 가하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요아힘은 힘을 거둬들였다.

호기심에 무례를 범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미안하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배려가 담긴 대답에, 요아힘은 크게 감탄했다.

요즘 보기 드문 인성을 지닌 청년이었다.

재능까지 겸비했으니, 더할 나위 없다.

손녀가 있었다면 기꺼이 소개시켰을 정도로,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잘 모르겠군요.”

지그문트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것처럼 보였다.

요아힘은 모르고 있었다.

지그문트는 스스로 힘을 제어하고 감춘 것이 아니었다.

신성이 오러와 마나를 감싸고 있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요아힘의 시험 또한, 지그문트는 신성의 보호를 받아 일절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 저래?’

* * *

요하임 월베른.

이 늙은이가 순순히 황제에게 협력했을 리는 없었다.

황제가 걷는 길은 패도.

요아힘이 지향하는 삶과 정반대의 길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의해야지.’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늙은이.

그 저력은 국가 단위로 넘어간다.

지금 내가 모든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이길 방법은 없다.

공격적인 성향이 거의 없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회유는…… 불가능하다.’

설령 내 정체를 밝히더라도, 요아힘을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건 불가능하다.

초탈한 듯한 자세를 일관하는 만큼,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라그힐도 이 늙은이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을 것이다.

‘의중을 떠보고 싶긴 한데.’

요아힘은 나와 짧게 대화를 나눈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홀을 벗어났다.

공적인 자리에 오래 있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의문을 해결하고 싶었는데, 의외의 의문이 하나 더 생겼다.

‘라스랑은 또 무슨 관계지?’

라스 마이어.

요아힘도, 라스도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확실히 라스 마이어는 주목 받을 만한 인재가 맞다.

진흙 속에 진주라고, 여태껏 드러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

그러나 전생의 나도 존재를 알지 못했는데.

‘외부와의 접촉을 꺼리는 늙은이 성향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전쟁에서 조우했을 가능성이 컸다.

추론일 뿐이다.

라스 마이어의 배경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암국을 통해 알아볼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지그문트.”

라스가 내 이름을 불렀다.

북적이던 홀 바깥쪽이 조용해졌다.

추모를 위해 줄을 서 있던 귀족들이 길을 비켰다.

황제, 라그힐 팔베르크가 직접 걸어 왔다.

‘저놈이.’

눈동자에는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들어차 있었다.

다른 이들과 똑같이 크리센스들 들었다.

앞으로 걸을 때마다 조금씩 보폭이 좁아진다.

“후.”

한숨을 내쉬며 꽃을 사진 앞에 올렸다.

영락없이 슬픔을 애써 감추며 착잡한 마음을 정리하는 것으로 보였다.

장내가 숙연해진다.

라그힐 팔베르크라는 한 사람의 행동으로, 이 많은 사람들의 분위기가 변했다.

알게 모르게 좌중을 휘어잡은 것이다.

‘누가 가르쳤는지, 제대로군.’

라그힐 팔베르크는 타고난 연기자다.

발레리아도 재능이 있는 편이었지만, 이놈은 궤를 달리 한다.

속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마족도 속여 넘길 놈이다.

‘저러니, 내가 저놈의 시꺼먼 속내를 못 알아차렸지.’

나도 속았다.

라그힐은 조의를 표하듯 고개를 숙였다.

지가 죽여 놓고 저러니,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초상화를 올려다보며, 다시 한번 한숨을 쉰다.

“하아.”

분위기 연출을 위해서 발걸음을 한 줄 알았는데, 라그힐은 홀 내로 직접 들어섰다.

제국의 귀족들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조문단에 포함된 다른 국가의 귀족들도 각각의 방법으로 예우를 표했다.

‘의도된 연출은 확실하군.’

황제를 위해 마련된 자리가 따로 있었다.

황좌에 비하면 그리 화려하지 않았지만, 놈이 앉는 의자가 곧 황좌였다.

라그힐이 홀 내로 들어서자, 어느 누구도 입을 함부로 열지 못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라그힐이 입을 열었다.

“이 자리를 빌어 짐은.”

비통하면서, 동시에 근엄한 목소리.

“전쟁을 선포하려 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