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새끼 사자
레온하트 왕성.
셋째 왕자 루터 레온하트는 제 무릎에 손을 올려 두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연신 불안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둘째 왕자, 시프 레온하트의 개인 서재였다.
“먼저 와 있었구나.”
“시프 형님.”
“일어설 것 없다.”
이윽고 시프 레온하트가 서재에 들어섰다.
손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한 서류를 한 뭉텅이 들고 있었다.
요즘 들어 부쩍 바빠진 시프 레온하트다.
시프는 엘비아와의 동맹 이후로, 여러 일을 도맡은 탓이었다.
“일이 고되시겠습니다.”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구나.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시프는 서류를 책상에 올려 두고, 루터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자신의 목과 어깨를 주물렀다.
루터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시프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루터.”
“네. 형님.”
“내가 너를 왜 불렀을 것 같으냐?”
루터는 상당히 영특한 편이다.
첫째 왕자인 제임스가 패악 질을 부릴 당시에는 바보를 연기해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루터는 시프를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시프에게는 자신을 숨기지 않았고, 시프도 루터의 영민함을 알고 있었다.
공적인 일이라는 것을 눈치챈 루터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팔베르크 제국의 대마법사, 델 로안 대공의 장례와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맞췄다.”
시프는 마음에 드는 대답이라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책상에 맨 위에 있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장례식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조문단을 편성할 시간도 충분해.”
“한데, 그것이 저와 무슨 관련이…… 설마.”
“네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 루터.”
시프는 루터를 응시했다.
“네가 가라. 팔베르크.”
그 누구도 아닌 팔베르크의 대마법사, 델 로안 대공의 장례다.
최소한 왕족 하나는 조문단에 포함시키는 편이 좋다.
루터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제가 어찌 그런 자리에 가겠습니까. 시프 형님이 가시는 것이…….”
“아니. 네가 가야 한다.”
시프도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지그문트에 의하면, 팔베르크 제국은 현재 상당히 위험하다.
마계와 연루되어 있다는 소문도 돌았을 뿐더러, 황제는 상당히 무서운 인물이다.
그럼에도 시프는 루터를 팔베르크로 보내기로 했다.
“어째선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이점이 있으니까. 너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팔베르크 제국은 서대륙에서 가장 큰 대국이다.
더군다나 델 로안 대공의 장례라면, 각국에서도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일 것이다.
단순히 가서 안면을 익혀 두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이점이 있다.
“그러니 더욱 형님이 가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야 형님께서…….”
루터는 잠깐 말을 멈추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가 결심한 듯, 시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레온하트의 왕세자가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형님도 계시지 않느냐.”
중앙 귀족이 몰락하면서, 첫째 왕자 제임스는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났다.
부정부패를 저지른 중앙 귀족들과 상당 부분 연루된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반면, 시프는 비옌트가를 제외하면 중앙 귀족들과 크게 연관된 부분이 없었다.
그 시점에서 엘비아와의 동맹을 성사시켜 버렸으니.
시프의 왕세자 책봉은 거의 확정된 상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너도 있고 말이다.”
“저는 서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저는 책을 읽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래? 나는 줄곧 우리 셋 중에, 루터 네가 왕세자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형님.”
루터는 난처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선언했다.
“나는 왕좌에 뜻이 없다.”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다. 폐하께서 왕세자 책봉을 제안하면, 거절할 생각이야.”
충격적인 발언에, 루터는 넋을 놓았다.
“형님께서 어째서…….”
“나는 왕보다는 사제가 되고 싶거든.”
“예?”
“사제 말이다. 사제.”
루터는 너무 의외의 발언에 헛숨을 삼켰다.
그런 반응을 지켜보던 시프가 작게 웃었다.
“아, 이건 아직 비밀이다.”
“새겨듣겠습니다.”
“자, 그러면 영특한 너는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시프는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루터, 레온하트의 왕좌에 오를 생각이 있더냐?”
* * *
캉!
마이어가의 연무장.
단의 클레이모어와 내 검이 맞부딪쳤다.
한편에서는 가신 기사들이 대련을 관전하고 있었다.
“후우.”
숨을 크게 들이쉬고, 검을 내리그었다.
단은 검을 눕혀 공격을 막음과 동시에, 검의 방향을 틀었다.
힘을 역이용하여, 검로를 강제로 바꿔 버린 것이다.
내가 방어할 때 몇 번 사용한 적 있는 기술이었다.
‘이런.’
위기에 몰리자, 정신이 조금 차가워졌다.
그러나 이미 한 번 틈을 보인 시점에서, 승패는 정해졌다.
단의 클레이모어가 내 목 앞에서 멈춰 섰다.
패배였다.
“허억, 허억.”
단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항복의 표시로 양손을 들어 보였다.
구경하던 가신 기사들이 환호했다.
나라고 항상 단을 이기는 건 아니다.
검술에는 아직 미숙한 부분이 많았다.
오러와 마나를 배제하면, 열 번 중 한 번은 지곤 했다.
“도련님.”
그때마다 단은 뿌듯함을 숨기지 못하고 입꼬리를 씰룩였다.
솔직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표정이 애매모호했다.
호흡을 가다듬은 단은 기사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용히 질문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왜?”
“검이, 평소보다…….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무뎠습니다.”
감정이 전투에 드러난 걸까.
환생의 영향이 있다고 해도, 아직 검술 면에서는 많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내 장례를 치른다더군.”
“팔베르크에서 말입니까?”
“그래.”
“허.”
단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하지만, 왜 이제 와서…….”
“바로 장례를 치르기에는 마땅치 않았을 거야.”
미심쩍은 구석이 적잖은 죽음이었다.
장례를 미뤄 두고 수사를 하는 구색이라도 갖추는 것이 먼저였을 것이다.
제국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다고 했다.
무턱대고 함부로 다른 국가의 조문단을 들이기 꺼려졌을 것이다.
제국의 자작극이라는 것이 들통날 수도 있다.
용의선상에 오른 타국을 조문객으로 들이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니까.
“분명, 다른 노림수도 있겠지.”
내 유서를 조작해서 발레리아를 끌어들이려고 했던 전적이 있다.
팔베르크 제국, 특히 황제는 내 죽음을 아주 알차게 써먹고 있었다.
이번 장례식에도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가실 겁니까?”
“못 가. 적어도 지금은.”
프라우드 산맥으로 갈 때, 제국을 지날 수 있었던 건 변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례는 필시 수도에서 진행될 터.
드래곤 아가리에 제 발로 들어가는 꼴이다.
특히 레온하트 왕국은 상당한 경계를 사고 있을 것이다.
‘발락 리빙데드가 잡혔으니.’
네크로맨서 발락 리빙데드는 제국 전력의 일부에 불과하다.
흑탑주도 남아 있고, 무엇보다 가장 꺼려지는 건.
“불패의 기사, 알고 있나?”
“모르면 기사가 아니지요.”
나와 함께 팔베르크 제국의 가장 큰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전생의 나조차 승리를 쉽게 점칠 수 없었던 괴물 중 괴물.
“그랜드 소드 마스터, 요아힘 월베른 경의 별칭 아닙니까.”
“그래. 그게 문제야.”
나는 마법에 있어서 따를 자가 없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요아힘은 검에 있어서 따를 자가 없다.
아마 소드 마스터, 레드라인 후작 정도는 되어야 몇 합 겨우 버틸 것이다.
그런 괴물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제국의 수도로 발을 들인다.
“내 지금 힘으로는, 미친 짓이지.”
숨결을 충전한다고 해도, 시간을 끄는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애초에, 드래곤 브레스로 요아힘을 상대한다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인간 중 단 두 명 있는 드래곤 슬레이어 중 하나가, 요아힘이니까.
요아힘은 검 한 자루만 들고 드래곤의 목을 자른 전적이 있는 괴물이다.
“저는 잘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뭐가?”
“검의 정점에 달한 기사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지.”
단은 넌지시 내게 물어보고 있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적당한 예시를 찾았다.
이름 없는 검을 옆으로 그었다.
단이 눈을 깜빡였다.
“내가 지금 뭘 한 것 같냐?”
“횡베기군요. 흔들림 없는 깔끔한 솜씨입니다.”
“그치?”
나는 오랜 기억을 더듬었다.
요아힘, 그 노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슥 검을 옆으로 긋는 광경을.
분명 동작 자체는 비슷한데.
느낌이 지금의 내 검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 노인네는 이걸로 산을 베었어.”
“예?”
“프라우드 산맥의 산 하나가 횡베기로 잘려 나가더군.”
“……농담이 심하십니다.”
“농담 같지?”
옛날에는 몰랐다.
환생하고, 직접 검을 잡아 보니 와 닿았다.
요아힘이 어떤 경지에 있었는지.
“나도 농담이었으면 한다.”
요아힘은 전생의 나와 비슷할 정도로 상당한 변수지만, 죽임을 당하진 않았다.
이유는 둘이었다.
첫 번째로, 약점이 불명이다.
심장이라는 명료한 약점만 공략하면, 델 로안은 힘없는 노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요아힘은 기사인 만큼, 온몸이 무기다.
나이가 백에 가까운 노인임에도 노쇠하지도 않았다.
‘아마 황제도 요아힘을 죽일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 수도.’
마계의 힘을 빌린다고 해도 힘들었을 것이다.
죽이는 것이 불가능했거나, 어떻게든 제거한다고 해도 손해라고 판단한 것이겠지.
요아힘이 죽임을 당하지 않은 두 번째 이유와 연결됐다.
바로 태도다.
정치에 깊게 개입한 나와 달리, 통달이라도 한 것처럼 개입을 피했다.
‘쯧, 나도 조용히 여생이나 보낼 것을.’
황제 그놈이 뭐가 이쁘다고 다 해 줬는지 모르겠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렇다면, 가지 않으실 겁니까?”
“이게 상황이 애매한 게, 그럴 수는 또 없단 말이야.”
발레리아를 포함한 레온하트의 조문단만 보낼 수는 없다.
제국이 뭔가 수작을 준비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동행은 해야 했다.
“다행인 점은, 불패의 기사가 방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거지.”
아마 제국의 계획에 동참했을 가능성은 적었다.
하지만 불패의 기사가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전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필요가 있겠어.”
“지금보다 더 말입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진짜 죽을 각오로 한다면. 생각 있어?”
“도련님께서 말씀하시니, 조금 다르게 들리는군요. 저는 당연히 동참하겠습니다.”
지금의 나는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오러와 다섯 개의 마나 서클을 가지고 있다.
단은 놀랍게도 아직까지 소드 익스퍼트 초급이었다.
검술 수준은 그보다 몇 단계 위였으나, 오러 수준은 확실히 낮았다.
“다행히 아직 시간이 좀 남는단 말이야.”
물론 매우 촉박하다.
네르갈까지 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1주일 안에 끝내야 한다.
아마 괴랄하다고 부를 만한 강도의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죽을 각오는 됐냐?”
* * *
1주일 후.
로안 아카데미 정문 앞.
모자를 눌러쓴 평범한 복장의 소년이 멈춰 섰다.
덩치 큰 중년의 남자가 그 뒤를 따랐다.
소년은 고개를 들고 아카데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조각상을 올려다봤다.
“저분께서 대마법사 델 로안 대공이군요.”
소년의 정체는 레온하트 왕국의 셋째 왕자, 루터 레온하트였다.
그 뒤를 따르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로 평범한 복장으로 위장한 왕실근위단장이었다.
“그렇습니다. 왕자님께서는 처음 보시는 겁니까?”
“왕성 밖으로 나갈 일이 없었으니까요.”
서자인 루터 레온하트는 여태껏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살았다.
왕성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대외적인 활동을 최대한 억제 했다.
그 결과, 첫째 왕자 제임스의 눈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외부에서 활동한 경험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멋지군요.”
완드를 하늘로 뻗은 형상.
깊은 눈과, 노인답지 않은 기개가 잘 드러나 있었다.
팔베르크 제국의 대공이기도 하나, 레온하트 왕가에서는 이를 허락했다.
대마법사에 대한 존경의 의미였다.
“직접 발걸음을 옮기시겠다고 한 건.”
“바깥을 보고 싶다는 제 욕심도 있지만, 그것이 이유는 아닙니다.”
루터가 직접 로안 아카데미를 찾은 것은, 적탑주를 만나기 위해서다.
이번 조문단에서, 적탑주 발레리아 로안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마법사의 유일무이한 제자.
조문단 편성에 대해서도 알릴 필요가 있었다.
‘역시 전령을 통해서 전하는 것이 빠르고, 편한 방법이지만.’
루터는 직접 찾아오는 것을 택했다.
시프 레온하트의 조언 때문이었다.
발레리아 로안은 이번 조문단에서 단연 일순위로 중요한 인물이다.
문제는 아직도 정치적 중립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몇 차례 왕성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그러나 작위는 여전히 거부하고 있었다.
‘내 편으로 만들지는 못할지언정 좋은 인상이라도 남겨야 한다.’
직접 움직일 가치는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마지막으로 조각상을 눈에 새겼다.
루터는 아카데미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음?”
아카데미 1층.
뭔가를 목격한 루터가 걸음을 멈췄다.
안내를 위해 마련된 듯한 책상 너머.
적탑의 로브를 입은 여자 수습 마법사 한 명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근위기사단장은 들으라는 듯 헛기침을 했다.
“크흠!”
“습, 어서 오세요.”
수습 마법사는 언제 잤냐는 듯, 태연하게 침을 닦고 둘을 맞이했다.
난생 처음 겪는 대우에 조금 당황했다.
동시에 꽤 신선한 감각도 있었다.
아무리 서자라고 하나, 루터는 왕자.
그 앞에서 이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근위기사단장이 입을 열었다.
“말 좀 묻겠네.”
“네, 무슨 일이신가요? 신입생 모집은 아직인데.”
“원장실이 어딘가?”
“엄, 적탑주님, 아니지, 원장님을 만나러 오셨나요?”
“그렇다네.”
종이를 팔락거리던 수습 마법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동공으로 둘을 살폈다.
“혹시, 거기 계신 분 성함이…….”
“루터 레온하트.”
“히끅, 아, 알아뵙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변장이 그럴싸했나 보군요. 다행입니다.”
벌떡 일어난 수습 마법사는 다급히 둘을 원장실로 안내했다.
긴장했는지, 왼발과 왼팔이 같이 앞으로 나갔다.
삐걱대며 원장실 앞에 도착한 수습 마법사가 문을 두드렸다.
“탑주님, 루터 레온하트 왕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열려 있어요.”
수습 마법사는 재빨리 문을 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발레리아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루터 레온하트 왕자님. 저희 구면이지요?”
격식이 있는 동시에, 친근감도 있는 인사였다.
딱딱하고 가식적인 여타 귀족들보다는 훨씬 와닿았다.
루터는 발레리아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반갑습니다, 적탑주님. 두 번째로 뵙는군요.”
“차 좀 내오렴.”
“넵!”
발레리아는 손님을 맞이할 때 쓰는 소파에 앉았다.
방으로 들어온 루터는 발레리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근위기사단장이 그 뒤에 섰다.
발레리아는 근위기사단장을 흘긋 봤다.
한 손에는 통신구를 쥐고 있었다.
“조문단 최종 편성 인원입니다.”
“잠깐 확인 좀 할게요.”
발레리아는 거의 훑어보듯 명단을 확인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
몇 초 만에 명단을 내려놓은 발레리아가 몇 가지 이름을 지목했다.
가장 먼저.
“시프 왕자님 대신 루터 왕자님이 가시는 건, 확실히 의외네요.”
“무엄…….”
뒤에 있던 근위기사단장이 나섰으나, 루터가 제지했다.
지나칠 정도로 직설적인 화법.
그러나 발레리아 로안은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다.
“시프 형님의 제의로, 제가 가게 됐습니다.”
“그렇군요.”
발레리아는 한쪽 눈썹만 끌어 올릴 뿐, 별다른 이견을 내놓지 않았다.
이미 지그문트에게 언질을 들었기 때문이다.
시프 레온하트는 열렬한 세계수의 신자가 됐다.
또한, 루터 레온하트가 능력을 숨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라스 마이어 남작님을 조문단에 포함시킨 이유는요?”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님의 추천이 있었습니다. 전력에 보탬이 될 거라고 합니다.”
“그것뿐인가요?”
“능력이 출중해서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마이어라는 것도 이유 중 하나입니다.”
“흠, 이제 드러내시기로 한 건가요?”
발레리아와 루터의 시선이 교차했다.
루터는 내심 감탄했다.
‘고작 한 번, 그것도 짧게 만났을 뿐인데.’
숨기고 있는 능력을 눈치챈 것 같았다.
이를 눈치챈 이가 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울 만도 했다.
하나는 시프 레온하트, 다른 하나는 레온하트의 수호자였다.
루터는 발레리아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더 올렸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첫째 왕자 제임스가 거의 실각에 가까운 상태인 지금.
시프의 지지가 있다면, 더 이상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발레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문단에 두 명만 추가하죠.”
“두 명요?”
“네.”
발레리아는 통신구를 매만졌다.
“요정족의 은인이, 참여 의사를 강하게 밝혀서 말이에요.”
* * *
마이어 저택.
“정말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씹어뱉는 듯한 단의 대답에, 마리나는 걱정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단의 눈 밑으로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걷는 것도 좀비처럼 힘겹게 걸었다.
요 1주일간, 지그문트와 단은 매일 아침 일찍 저택을 나섰다.
새벽녘에서야 들어와 쪽잠을 자고, 다시 나갔다.
“도대체 뭘 하시길래.”
“욱,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답을 위해 입을 열었던 단은 속이 매스꺼워졌다는 듯 헛구역질을 했다.
리옐을 무릎에 올린 마녀는 그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매일 고강도의 훈련을 소화하는 단이 질색할 정도의 훈련.
“그놈이 말하는 죽을 각오면, 진짜 죽을 수도 있다.”
“설마요.”
마리나는 아무리 그래도 지그문트가 단을 죽일까 싶었다.
“아빠는 거짓말 안 해!”
“도련님께선 거짓말 안 하십니다.”
리옐과 단이 바로 부정했다.
단은 조금 촉촉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제가 죽으면 부디 양지 바른 곳에…….”
“단.”
“도, 도련님.”
지그문트의 등장에, 단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오늘은 실내다.”
“제발, 그것만은.”
“시끄러. 축복 받은 줄 알아야지.”
단은 끌려가듯 무거운 걸음으로 지그문트를 따라갔다.
“단 아저씨! 힘내! 아빠도!”
“힘내세요.”
“살아 돌아오려무나.”
지그문트는 단을 리옐의 방으로 안내했다.
단은 방의 풍경을 보며 절망했다.
귀족 영애가 살 것 같은 방은 이미 온데간데없고, 실험실로 둔갑했다.
“이게 다 영약입니까?”
“그래.”
“이 많은 걸 언제 다 만드셨습니까……?”
“나 대마법사야.”
온갖 종류의 영약이 가득했다.
모두 지그문트가 단에게 먹일 작정으로 손수 만든 것이었다.
단은 복잡 미묘한 기분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지그문트는 부글부글 끓는 영약을 컵에 담아 건넸다.
“마셔라. 단 록벨런. 힘을 손에 넣어라.”
단은 컵을 받아 들었다.
어째 악마와 계약하는 기분이 들었다.
단은 이미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 되고도 남았어야 한다.
그러나 단은 지나치게 오랜 기간 동안 정체되어 있었다.
그에 대한 지그문트의 결론은 이랬다.
‘신체적 한계.’
물은 충분한데, 그릇이 작다.
해서 물이 더 담기지 않고 넘치고만 있었다.
물론 이는 꾸준한 단련으로 극복할 수 있으나, 지나치게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 시간을 대폭 단축시켜 주는 것이 바로 영약이었다.
“그렇다면, 도련님. 그 대가는 뭡니까.”
“……미각.”
지그문트의 영약은 하나같이 맛이 괴랄했다.
하지만 효과 하나는 탁월했다.
실제로 만드라고라로 만든 영약의 맛은 끔찍했지만, 단은 바로 효과를 체감했다.
‘후우, 무엇인들 못 하리.’
늘 바라 마지않던 힘이다.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아니, 이 정도의 영약을 이만큼 마시는 건 호사였다.
단은 눈을 질끈 감고, 영약을 단숨에 삼켰다.
꿀꺽, 꿀꺽.
목울대가 움직이며, 영약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최대한 맛을 느끼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으나, 허사였다.
목에서부터 올라오는 끔찍한 맛에, 단은 바로 후회했다.
차라리 진흙 따위를 퍼먹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켈록. 커헉.”
“쭈욱. 그렇지.”
“크흡.”
단은 의지로 그것을 극복해 냈다.
목 넘김도 끈적끈적한 것이, 최악이었다.
다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쓰고 메스꺼운 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단이 컵을 내려놓기 무섭게, 새로운 영약을 쭉 따랐다.
“그거랑, 이거랑 저거랑 요것도 마셔야 돼.”
“오, 리에이트여.”
“저건 먹는 거고. 아, 저거는 씹어야지 효과가 좋아.”
지그문트는 아공간 주머니에 쌓여 있던 영초를 아예 싹 비웠다.
단은 감사와 원망을 동시에 담아 지그문트를 바라보았다.
“이 좋은 걸 제가 다 마셔도 됩니까? 도련님께서도…….”
“나는 괜찮아. 이미 영약을 마셔야 할 단계는 지났거든.”
“좋은 건 나누라는 옛말이…….”
“그래서 나눠 주고 있잖아. 흐흐흐.”
지그문트의 사악한 웃음에는 ‘너도 당해 봐라’라는 느낌이 물씬 담겨 있었다.
말로 지그문트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안 단은 결국 체념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모든 영약을 배 속에 집어넣어야 했다.
“죽여 줘…….”
“죽어도 먹고 죽어.”
영약이 끝은 아니었다.
여태껏 단이 하던 것의 몇 배 수준의 초고강도 훈련과, 지옥 같은 대련이 이어졌다.
검술과 오러에 익숙해진 지그문트의 커리큘럼은 지옥 훈련에 가까웠다.
동시에, 상상을 초월할 수준으로 잘 짜여 있었다.
그사이 단은 지그문트의 제자인 발레리아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느끼게 됐다.
훈련을 마친 지그문트와 단이 네르갈에 도착한 것은, 조문단이 출발하기 하루 전이었다.
조문단 구성은 상당히 조촐한 편이었다.
엄숙한 장례식에 병력을 이끌고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발레리아에게 받았던 명단을 되짚었다.
‘루터 레온하트, 발레리아 로안, 라스 마이어.’
현생의 나와 연이 있는 인물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 외에도 반가운 얼굴들이 몇몇 보였다.
전생의 나와 면식이 있던 늙은 귀족들이었다.
대청소 당시 중앙 귀족들은 대거 실각 당했지만, 살아남은 이들도 있었다.
그 사이에 포함된 이들 같았다.
‘그보다, 루터가 왔다는 건.’
시프 레온하트가 왕위에 뜻을 두지 않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루터가 직접 나섰다는 건, 조금 다른 얘기다.
시프가 루터를 밀어주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루터도 그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기로 했다는 거다.
“가주님도 계시는군요.”
“인사드려야지.”
나는 단과 함께 아직 마차에 오르지 않은 라스에게 다가갔다.
라스 마이어는 드물게도 다른 귀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
“흠, 온다는 소식 들었다.”
“커험.”
라스와 대화하던 귀족이 헛기침을 했다.
나를 흘긋흘긋 보는 것이, 명백히 관심이 있어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묘하게 낯이 익었다.
“오랜만이구나. 지그문트.”
“……밀러 자작님?”
“허, 나를 기억하느냐?”
사실 유추했을 뿐이다.
라스 마이어와 친분이 있고, 묘하게 시몬 밀러와 닮은 귀족.
지그문트의 기억 속 밀러 자작과는 조금 많이 달라졌다.
특히, 머리카락 부분이 조금 휑해진 감이 있었다.
“과연 영민하구나.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알아봤지. 음음.”
“이상하군. 밀러, 분명 내게는 골칫거리가 개과천선했다고…….”
“커험험! 이 사람,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나!”
밀러 자작은 라스의 등을 쿵쿵 두드렸다.
라스 마이어를 이렇게 대하는 건 레드라인 후작밖에 없었는데.
라스는 별로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큰일을 했구나.”
“운이 좋았습니다.”
“뻔한 겸손이구나.”
“물론 제 능력도 좋았지요.”
“허허, 어허허헛! 그렇지! 운만으로는 결코 이뤄 낼 수 없는 업적이었으니.”
밀러 자작은 격려하듯 내 어깨를 두드렸다.
힘이 상당히 좋았다.
라스와 친분이 있는 걸 보면, 기사일지도 모른다.
“시몬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하더구나.”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 시몬이 네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겠지!”
나는 밀러 자작의 얼굴을 눈에 새겼다.
그러고 보니 내가 낸 책, 마법학개론의 초판본도 가지고 있었다.
안목도 있는 것 같고, 성격도 마음에 들었다.
‘좀 더 지켜봐야겠군.’
밀러 자작은 시몬과 밀러 상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가만히 듣던 라스가 적절한 시기에 밀러 자작을 제지했다.
“그만하게. 밀러.”
“헙, 그렇지. 이제 막 합류했으니, 인사를 나눌 사람도 많을 텐데. 내가 주책이었군.”
“괜찮습니다.”
“지그문트, 루터 왕자님께 인사는 드렸더냐?”
“아직입니다.”
“가 보거라.”
라스는 나를 떠밀 듯 보내 버렸다.
나는 다른 귀족과도 간단하게 통성명만 했다.
아무래도 귀족 자제 신분으로 참여한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먼저 인사를 하고 다녔다.
딱 봐도 가장 화려한 마차 앞에 있는 근위기사단장과도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십니까. 지그문트 마이어 공.”
“반갑습니다. 근위기사단장님. 혹시, 루터 왕자님께선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습니까?”
“마차에 오르셨습니다. 안 그래도 지그문트 공을 찾으시더군요.”
근위기사단장은 마차 문을 두드렸다.
“지그문트 마이어 공이 오셨습니다.”
“기다렸습니다. 들어오시지요.”
문이 열리고, 루터 레온하트가 보였다.
확실히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안녕하십니까, 루터 레온하트 왕자님. 지그문트 마이어입니다.”
“반갑습니다, 지그문트 마이어 공. 앉으시지요.”
나는 루터 레온하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루터는 기다렸다는 듯 바깥에 명령을 전했다.
“이제 출발하지.”
“전하겠습니다.”
조문단을 출발시키는 걸 보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도 바라던 바다.
이미 합류 전에 준비는 거의 끝났던 모양이다.
지체 없이 마차가 출발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루터였다.
“저희, 구면이지요?”
“처음 뵙습니다만.”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루터 레온하트는 시작부터 고단수를 뒀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경.”
* * *
마차의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침묵이 마차 안을 맴돌았다.
나와 루터는 눈싸움이라도 하듯 서로를 주시했다.
‘요놈 보게.’
발레리아를 제외하면, 내가 레온하트의 수호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셋.
레드라인 부자, 요하네스 레드라인과 파울 레드라인.
그리고 시프 레온하트다.
레드라인 후작은 나를 숨겼고, 파울은 루터와 접점이 없다.
‘시프, 그놈 성격에 내가 수호자라는 사실을 알릴 리 없고.’
일루전(Illusion)이 내장된 마도구, 수호자의 가면은 파울에게 준 지 오래다.
그 이후로는 인식 방해(Disturb Realization)를 사용해 가며 정체를 숨겼다.
덜미가 잡힐 만한 움직임은 없었다.
더군다나, 파울과 발레리아 또한 수호자로써 움직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수호자를 나로 특정 지었다는 건.
‘넘겨짚은 건 아니라는 건데.’
설령 떠보는 것일지라도,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루터 레온하트가 능력을 숨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왕자님께서는 제가 레온하트의 수호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루터를 가만히 살폈다.
깊은 눈동자에는 확신과 총기가 가득했다.
작은 동물처럼 소심하고 겁이 많아 보이던 루터 레온하트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 나라의 왕족, 그것도 왕의 자질이 보이는 왕자가 앉아 있었다.
“시프인가?”
“형님께선 아무런 말씀 없으셨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추론해 본 것이지요.”
“이제 다 드러낼 셈인가 보군.”
“연기는 그만두라고 하신 건, 지그문트 공 아니십니까.”
시프 레온하트를 불사의 교단에서 빼낼 때, 루터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레온하트 왕국 대청소가 있기 바로 직전이었다.
가장 큰 위협인 제임스가 실각될 테니, 할 수 있었던 조언이지만.
“시프 레온하트는 뭐라고 하던가?”
“왕좌에 오를 생각이 있는지, 물으시더군요.”
조문단에 합류한 것도 모자라, 자신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말인즉슨, 시프의 물음에 긍정했다는 뜻이다.
루터 레온하트는 레온하트 왕국의 왕세자가 되고자 했다.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해도 되나?”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수호자 신분을 빌미로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설마요. 저는 지그문트 공을 존경합니다. 그런 짓은 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내게 내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이유는?”
“사실, 제 능력을 조금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루터는 멋쩍다는 듯 볼을 긁었다.
그제야 제 나이대의 소년이 얼핏 보였다.
“그래야 제대로 대화에 응하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대담하군.”
“여태껏 충분히 조심스러웠으니까요.”
루터 레온하트의 나이가 열여섯이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
아무리 왕족이더라도, 이 정도로 심계가 깊은 이 나이대의 인물은 드물다.
어렸을 적의 황제, 라그힐과 조금 겹쳐 보였다.
물론, 지금까지 보여 준 것만으로는 황제에게 못 미친다.
“도움이라는 건?”
만약 왕세자로 책봉되는 데 내 도움을 구하는 것이라면, 나는 루터 레온하트에게 정말 크게 실망할 것이다.
물론, 왕좌는 혼자서 오르는 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거래 형식의 도움을 바라선 안 된다.
“지그문트 경께서 조문단에 참여한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마법을 준비했다.
마나 서클이 회전했다.
여차하면 모디파이 메모리(Modify Memory)라도 쓸 셈이었다.
왕족의 기억을 조작하는 건 중범죄지만, 내 정체가 제국에 드러나는 것보다는 나았다.
“팔베르크 제국을 막기 위해서, 아닙니까?”
“흠.”
팔베르크 제국을 막는 게 가장 큰 목표긴 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나는 마나를 다시 가라앉혔다.
아무래도 내가 델 로안이라는 것까지는 꿰뚫어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팔베르크 제국이 이상하다는 건 대충 눈치챈 것 같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제국의 계획은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루터 레온하트는 말을 이었다.
“편하게 움직임을 취하실 수 있도록 봐드리겠습니다.”
“그거 고맙군.”
“두 가지만 도와주십시오.”
“들어 보고.”
* * *
“무슨 대화를 나누시길래, 이제야 오세요?”
“원래는 네 마차 탈 생각도 없었다. 통신구로 연락하면 될 것을. 샌딩도 있고.”
“하나뿐인 제자 취급이 너무한데요.”
“됐고, 왜 불렀어?”
루터와 대화를 마치고, 마차를 옮겨 타려고 했다.
원래는 라스 마이어가 탄 마차에 오를 생각이었으나.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처럼 발레리아가 샌딩을 보내왔다.
“아이참, 저희가 꼭 용건이 있어야 보는 사이인가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군.”
“방음 마법은 철저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 문제가 아닌데.”
발레리아는 연신 내 눈치를 봤다.
대충 의도가 눈에 보였다.
“나 화 안 났다.”
“진짜요?”
“죽은 사람 장례식 한다는데, 내가 화낼 게 뭐 있냐.”
처음 들었을 때 어이가 없었을 뿐.
정말 화는 나지 않았다.
정성을 들여 계획을 세운 뒤 뒤통수를 쳐 죽이고, 유서까지 조작했다.
장례식이 뭐 대수랴.
중요한 건, 내가 팔베르크 제국의 수도로 들어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가만히 조문단에 계실 건가요?”
“설마.”
“그럴 줄 알았어요.”
발레리아는 이마를 짚었다.
이건 기회다.
모처럼 정당한 명분을 들고 팔베르크 제국에 가는데.
움직이지 않으면 손해였다.
“뭐 하시게요?”
“이것저것 할 게 많지. 일단 장례식에 깽판도 좀 놓고.”
“아이고야. 저도 참여하겠죠?”
“당연하지. 왜? 싫어?”
“스승님 장례식에 깽판을 놓는 제자라니. 쓰레기 같잖아요.”
“난 멀쩡히 살아 있는데, 장례식 치르는 놈들이 쓰레기지.”
루터 레온하트에게 부탁 받은 것도 있고, 개인적으로 계획해 둔 것도 있었다.
조문단이 출발하기 전, 단과 훈련만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스크롤을 하나 꺼냈다.
“이건…….”
발레리아는 한눈에 스크롤의 정체를 알아봤다.
“너, 나랑 일 하나 같이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