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58/134)

2

도도한 힘

피해는 적었지만, 사망자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마족의 손톱자국은 시노드 교구에 선명하게 남았다.

마기에 휘말린 이들 중에는 죄 없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몰렉의 출현은 여러 인명을 앗아 갔다.

“제발요. 제발, 한 번만요. 성자님이시라면 살릴 수 있잖아요!”

“죄송합니다.”

아이를 끌어안은 중년의 여자는 간곡히 부탁했다.

부서진 건물의 복구를 돕던 사람들과, 사제들은 모두 그녀를 딱하게 바라보았다.

차갑게 식은 아이는 이미 숨을 쉬지 않았다.

“우선, 아이를 좀 놓으시고.”

“이거 놓으세요! 우리 아이 건드리지 마!”

“부인.”

사제의 부름에, 중년의 여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눈동자에서는 아주 작은 희망이 떠올랐다.

그러나 사제는 여자의 기대와는 달리, 깊게 고개를 숙였다.

“죽은 사람은 어떻게 해도 되살릴 수 없습니다.”

“기적! 기적을 행하는 것이 리에이트 님이시잖아요? 그렇죠?”

여자는 그 누구보다 간절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마치 동의라도 구하는 것처럼.

하지만, 사람들은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제가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평생 리에이트 님을 모실 테니까…….”

“부인,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아아…….”

지푸라기처럼 힘없이 쓰러진 여자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흐느껴 울었다.

무력감을 느낀 사제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미 십수 번 넘게 겪은 일이지만, 오늘따라 마음이 아팠다.

설령 리에이트가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있다고 해도.

죽은 자를 함부로 되살릴 리 없었다.

‘리에이트 님, 저 아이에게 안식을 내리소서.’

사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이를 향한 추모기도 정도가 전부였다.

* * *

“크기 한번 겁나게 크네.”

신성은 여태껏 내가 본 그 무엇보다 더 거대했다.

세계수의 거신이나, 드래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굳이 비슷한 것을 찾자면 요르문간드의 본체 정도인데.

신성은 웅크리고 있어 실제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만약 자아가 있다면, 의사소통은 가능한가?”

의사소통 방법은 비단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마나를 통해서, 혹은 단순하게 몸짓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도 있었다.

신성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뭉클뭉클 작은 빛무리를 내보냈다.

내 팔뚝만 한 크기의 빛은 점점 형체를 갖추더니.

“가능.”

말을 했다.

눈이 부셔서 쳐다보기도 힘들던 빛이 점점 사그라졌다.

날개를 여유롭게 움직이며 공중에 뜬 페어리 하나가 보였다.

성별을 판단하기 어려운 중성적인 얼굴.

졸린지 반쯤 감은 눈은 감정이 빠져나간 듯 공허했다.

머리카락에서 이따금 반짝거리는 빛무리가 보였다.

“……네가 신성이냐?”

페어리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는 살짝 당황했다.

페어리는 요정족.

세계수의 피조물 중 하나다.

“왜 굳이 그런 형상을?”

“편함.”

간단명료한 대답이었다.

편하다면 어쩔 수 없지.

실제로 육신이 없는 것들은 가장 편한 형상을 취하곤 한다.

대표적으로 정령이 그랬다.

하급이라면 모를까, 형상을 바꿀 수 있는 중급부터는 그 모습이 제각각이다.

“여긴 어디지?”

“여기.”

신성은 작은 손가락으로 내 명치를 쿡 찔렀다.

나는 두리번 주변을 다시 확인했다.

“내 내면이라기에는 너무 평화로운데?”

폭풍이 몰아치고 용암이 터지고 해일이 몰려온다면 모를까.

나는 이런 광활한 초원 같은 속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신성은 이번엔 자신을 가리키더니, 팔짱을 꼈다.

“안정.”

턱을 살짝 들고 콧바람을 내뿜었다.

자신이 안정시켰다는 건가.

뿌듯한 모양새였지만, 표정 변화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신성은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질문?”

“있지.”

“받음.”

“신성이 어떻게 자아를 가진 거지?”

신성은 신의 힘이지, 자아를 가진 어떤 무언가가 아니었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 마나와 오러가 자아를 가진다면, 몹시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았다.

“목오.”

신성의 말과 동시에, 발밑에 닿는 감각이 달라졌다.

부서지는 뜨거운 모래.

이윽고 언젠가 들어 봤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오오오오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먼 곳.

거대한 땅거북, 목오가 길게 울고 있었다.

“죽음.”

신성은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쿠구구구…….

공기가 진동했다.

진동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고 있었다.

메테오라이트(Meteorite).

콰아아아앙!

낙하한 운석이 목오의 등껍질 위로 내리꽂혔다.

길게 운 목오의 네 다리가 휘어졌다.

등껍질을 으스러트린 운석이 주저앉은 목오의 몸을 짓눌렀다.

“분리.”

목오의 몸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그대로 내게 날아와, 명치 부근에 스며들었다.

“깃듦.”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목오가 환상이었다는 듯 사라졌다.

운석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느새 다시 초원에 서 있었다.

신성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해?”

“어느 정도.”

목오는 죽음과 동시에, 신성에 자아를 부여했다.

그리고 내게 어떤 방식으로든 묶어 놓았다는 것 같았다.

나는 마침내,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내게 온 거지?”

신성은 자연에 동화되지 않고, 내게 자리를 잡았다.

목오는 어째서 내게 신성이라는 거대한 힘을 부여했는가.

신성이라면 분명 알고 있으리라.

목오에게 어떤 지시를 받았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비밀.”

그러나 신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하면 뭐든 대답해 주는 거 아니었나?”

“아님.”

“그래?”

“그럼.”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니, 뭐라 할 말도 없다.

협상할 여지는 없어 보였기에, 입을 닫았다.

짧은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 장소에 머무를 수 있을지 모른다.

본론부터 물어봐야 한다.

“다른 질문 하나 하지.”

“받음.”

“널 길들이는 법을 알고 싶다.”

“시험.”

“시험?”

“시험.”

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요컨대, 이런 거다.

“인정을 받으라는 거군?”

“맞음.”

간혹 이런 것들이 있다.

자격을 갖추거나, 시험을 통과해야만 자신을 다루게 해 주는 오만한 힘들.

대표적인 예로 물질로는 마검, 순수한 힘으로는 원념을 들 수 있다.

“할 거?”

“못 할 거 없지.”

“진짜?”

“됐고, 시험 내용은?”

“저거.”

어느새 10미터 정도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눈에 띄는 금발에, 여유 가득한 얼굴.

한 손에 든 이름 없는 검까지.

나, 지그문트 마이어였다.

“이겨.”

“자신과의 싸움?”

아주 전형적인 시험이었다.

나는 이름 없는 검에 손을 올렸다.

나 자신 정도야, 셀 수도 없이 많이 뛰어넘었다.

못 할 것도 없었다.

“대신.”

페어리는 조건이 있다는 듯, 내게 유유히 날아왔다.

단전에 자그마한 손을 올렸다.

그러자.

“오러.”

오러가 사라졌다.

제어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느껴지지도 않았다.

공허한 감각에 당황한 사이, 페어리는 심장에도 손을 올렸다.

“마나.”

다섯 개의 마나 서클이 일제히 해제됐다.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페어리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없이.”

“미친.”

“시작.”

마나 번(Mana Burn).

푸른 숨을 뱉은 지그문트 마이어가 자세를 낮췄다.

그 모습이 꼭 사냥 직전의 야수 같았다.

“이걸 어떻게 이기라고……!”

말을 마칠 틈도 없이, 지그문트가 내게 달려들었다.

푸시(Push)를 이용한 돌진.

내가 즐겨 사용하는 보조 마법이었다.

나는 방어를 위해 이름 없는 검에 손을 가져갔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손은커녕 입조차 달싹일 수 없었다.

나는 주먹을 움켜쥔 지그문트의 다른 손을 볼 수 있었다.

홀드(Hold).

기본적이지만, 정말 대처하기 까다로운 연계였다.

지그문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검을 찔러 넣었다.

푸확!

이름 없는 검이 아주 깔끔하게 내 심장을 관통했다.

뜨거운 통증과,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비릿한 피의 맛.

이거 죽었다.

신성은 무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나는 다시 초원에 서 있었다.

맞은편에는 지그문트가 서 있다.

‘다시?’

마치 내 죽음은 없었던 일이 된 것 같았다.

처음의 대치 상태로 돌아온 것이다.

지그문트가 아까와 똑같이 달려들었다.

도저히 대응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젠장.”

일단 홀드의 사정거리에 들어오기 전에, 거리를 벌려 봤다.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데,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추격당해서 목이 날아갔다.

“다시.”

신성은 내가 죽을 때마다 ‘다시’를 중얼거렸다.

그때마다 지금의 이 대치 상태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될 때까지 다시 하라는 건가.

“후, 내가 못 할 줄 알고?”

검 대신, 순수한 신체 능력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홀드가 있는데 먹힐 리가 있나.

다시 한번 심장이 꿰뚫렸다.

“다시.”

홀드에 걸리기 전에, 검을 세워 실수를 노려봤다.

물론 지그문트는 추진력을 이기지 못하고 검에 그대로 처박혔으면 했다.

하지만 나는 멍청하지 않았다.

차분히 허리를 숙여 피하고, 내 검을 튕겨 내 버렸다.

무장 해제 상태가 된 나는 반으로 갈라져 죽었다.

“다시.”

“못 할 것 같은데?”

지그문트 마이어는 계속 똑같은 패턴을 보였다.

돌진.

타이밍을 맞춰서, 초원의 흙을 찼다.

활용할 수 있는 지형지물은 이 정도니까.

지그문트는 홀드를 쓰는 대신, 왼손으로 눈을 가렸다.

“됐……?”

나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왼손에서 곧바로 섬광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플래시 뱅(Flash Bang).

일시적으로 눈이 먼 사이, 목에서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다시.”

내가 잔인한 성격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지그문트는 정말 깔끔한 방법으로 나를 죽였다.

심장을 꿰뚫든, 목을 치든 간에.

고통은 느끼기 힘들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다.

‘패턴이 바뀌었다.’

지그문트는 내 대응 방법에 따라 행동을 바꾸기도 한다.

이를테면, 마법 등을 쓰는 시늉을 했을 때는.

서걱!

등 뒤로 블링크한 뒤, 뒤에서 찔러 죽인다.

행운이 겹쳐서 홀드에서 벗어났을 때는.

콰가가가각!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마법을 난사했다.

애로 레인과 리버스 아이언 메이든.

위아래에서 화살과 가시가 튀어나오니,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제일 아프게 죽었다.

“다시.”

다시 상황이 초기화됐다.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대응 방법이 없어.’

지그문트 마이어는 안전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싸운다.

도박을 감행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전력 차가 날 때.

대체로 반격의 여지를 완전히 차단하고,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걸 선호한다.

“꼭 그렇게 죽여야만, 속이 시원했냐!”

대화나 협상, 윽박지르는 것도 통하지 않았다.

나는 신성 쪽으로 눈을 돌렸다.

무심한 표정의 신성은 그저 멍하니 내가 죽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좀만 쉬었다 하자. 힘들다.”

계속 죽으니, 떠오를 생각도 안 떠오른다.

차분한 상태라면 공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뭐?”

말을 뱉은 순간 깨달았다.

마나 애로가 다시 한번 내 목숨을 앗아 갔다.

휴식은 허락되지 않았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몇 번째 죽음인지 세는 것은 진즉에 그만뒀다.

그 시간에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대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용할 만한 지형지물도, 힘도 없다.’

전면전에서 민간인이 기사를 이길 확률은 0에 수렴한다.

더군다나 상대는 마법도 쓸 수 있고, 머리도 비상하다.

여태껏 실수는 한 번도 없었다.

도박수도 마찬가지다.

‘뭐 어떡하라는 거야?’

지닌 아티팩트도 무용지물이었다.

숨결은 마나 부족으로 쓸 수 없다.

기억도 마찬가지로, 마석에 담긴 마법의 방향을 잡을 최소한의 마나는 필요했다.

“다시.”

신성의 목소리와 함께, 숨이 끊어졌다.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지그문트가 나를 죽인 것이다.

숨이 입술 사이로 빠져나갔다.

너무 많이 죽은 걸까.

본질적인 의문이 머리를 꿰뚫었다.

‘오러도, 마나도 없는 나는 뭐지?’

몸의 일부처럼 느끼던 마나 서클은 사라지고 없다.

가슴 한편이 허전했다.

단전에 자리하고 있던 뜨거운 오러도 없다.

지금의 나는 머리 조금 좋은,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홀드(Hold).

거대한 손이 몸을 움켜쥔 듯, 모든 방향에서 압박감이 느껴졌다.

움직일 수 없다.

아무런 힘도 없는 나는 한없이 무력한 존재였다.

‘신성이 내게 원하는 건 뭐지?’

상황은 또다시 반복됐다.

검을 세운 지그문트는 나를 응시했다.

몸이 앞으로 기울더니, 한 번 더 내게 쇄도해 온다.

나는 지그문트를 응시했다.

‘극복? 초월?’

지그문트 마이어를 아무런 힘도 없는 지금의 나 혼자서, 이길 수 있을까.

내 결론은 불가능이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벌릴 수 없는 격차가 있다.

지금 오러나 마나를 새로 쌓을 생각도 해 봤지만.

지그문트에게 죽는 순간 초기화될 것이다.

‘포기? 아니다.’

포기하는 법이라면 이미 알고 있다.

살아오면서 모든 것을 손에 쥐지는 못했으니까.

그리고 신성은 내게 저것을 이기라고 했다.

그것이 시험 조건이라면, 정답이 포기는 아닐 터.

‘그렇다면.’

푸른 숨을 흩뿌리며, 매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지그문트.

신성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다시’라는 말과 함께 상황을 원래대로 되돌릴 것이다.

굳이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서, 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까.

여태껏 신성이 보여 준 힘을 생각하면.

‘다른 의도가 있다.’

신성은 자신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내게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었다.

그제야 신성이 내게 했던 말을 되짚었다.

저거, 이겨, 대신, 오러, 마나, 없이.

오러와 마나 말고, 나는 나 자신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바보였군.’

내 몸 속에는 한 가지 힘이 더 있었다.

신성이 바라던 것은 극복도, 초월도, 포기도, 승리도 아니었다.

‘자각하라는 건가.’

답에 대한 실마리는 이미 충분히 주어졌다.

신성이 보여 준, 목오의 죽음.

여태껏 나는 이것이 ‘목오의 신성’이라고 생각했다.

목오의 힘이니, 내가 잠시 맡아 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목오가 죽으면서 신성은 분리되었고, 내게 깃들었다.

‘신성은 이미 내 힘이다.’

오러와 마나를 분리하고, 내면을 깨끗하게 만들었다.

패러시트와 싸울 때는 직접 나서기까지 했다.

이미 날 도와줄 생각은 만만한데, 내가 손을 뻗지 않은 것이다.

신성의 맑은 눈동자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성.”

내 부름에, 신성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이름 없는 검이 내 목 끝에 닿은 순간.

지그문트의 동공이 확장됐다.

“큭!”

여간 당황한 것이 아닌 듯, 처음으로 목소리까지 냈다.

어느새 내 앞에 나타난 신성이 엄지와 검지만으로 검을 잡아 버렸기 때문이다.

지그문트는 검을 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신성의 힘이 얼마나 센지 뽑히지 않았다.

지그문트도 녹록지는 않았다.

키잉.

오러 속에 마나가 스며들었다.

상극의 성질을 띤 오러와 마나를 강제로 접촉시켜, 폭발을 일으키는 기술.

이름 없는 검이 잘게 떨렸다.

신성을 없애진 못해도, 내게 여파가 미칠 것이다.

“안 돼.”

폭발이 커지기 직전.

신성은 검에서 터져 나오려는 화기를 두 손으로 덮었다.

그것을 짓누르듯 양손에 꾹 힘을 준다.

다시 손을 놓았을 때, 검에서 느껴지던 화기는 사그라진 뒤였다.

‘그냥 짓눌러서 소멸시킨 건가?’

막은 것도 아니고, 다른 공간으로 폭발을 보내 버린 것도 아니다.

그냥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짓눌러 버린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엄청난 짓을 저지른 신성이 손을 옆으로 까딱였다.

마치, 비키라는 것 같았다.

이상함을 감지한 지그문트는 곧장 방어 마법을 다중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단순히 밀어낸 것이 아니었다.

‘사라졌다.’

지그문트 마이어는 그대로 사라졌다.

손을 탁탁 턴 신성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합격.”

“시험은 이게 끝이냐?”

신성은 천만의 말씀이라는 듯 검지를 양옆으로 까딱였다.

“남음.”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거부.”

천천히 날아온 신성은 내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소멸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그냥 평범한 딱밤이었다.

“오만.”

신성은 뒤를 가리켰다.

처음 초원에 들어섰을 때 본 거대한 빛이 보였다.

“전부?”

이어서 그 빛을 내게 밀어 넣는 시늉을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욕심.”

“요컨대 1단계만 통과했으니, 그만큼만 쓸 수 있다는 건가?”

“맞음.”

“만약 저걸 다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지?”

“폭발.”

태연하게 무서운 소리를 한다.

왜 내 힘들은 하나같이 내 몸을 폭발시킬 수도 있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 걸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내가 이 이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시험을 볼 수 있는 건가?”

“맞음.”

“거 도도한 힘이군.”

“맞음.”

당당하기도 했다.

신성은 손가락 셋을 펴 보였다.

“조언.”

“조언이라고? 세 가지가 있다는 뜻인가?”

“맞음.”

“조언을 해 준다면 고맙지.”

신성은 먼저 검지를 들어 올렸다.

“죽음.”

대뜸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섬뜩한 기분이 등골을 스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기분 나쁜 감각.

무언가가 내뱉은 차가운 숨결이 목 뒤에 닿았다.

신음 같기도 하고, 단말마 같기도 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아, 아아아…….

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홱 돌렸다.

등 뒤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텅 빈 초원이 어째선지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조심.”

“조심하지.”

에인션트 드래곤 마날루스도, 마녀도 죽음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이건 차원이 다를 정도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공포. 다시 느끼긴 힘든 감정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괜히 목을 문질렀다.

과거, 신과 처음 대면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세계수 같은 경우에는 여태껏 나를 상당히 배려해 주고 있었다.

목오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고, 리에이트는 목소리만 연결된 것이니.

“다음.”

신성이 두 번째 손가락을 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켰다.

“자제.”

신성을 쓰는 것을 자제하라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의문이 들어찼다.

기껏 신성이 내 힘이라는 것을 자각시켜 놓고 자제하라니.

이게 무슨 뜻일까.

신성은 나를 가리켰다.

“인간.”

“혹시 내가 인간이니, 신성을 사용하면 몸에 어떤 영향이 간다는 건가?”

신성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드러났다.

그래 봤자 입을 오므렸을 뿐이지만 말이다.

놀란 걸까.

유유히 날아온 신성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건 수백 년만인 것 같은데.

“칭찬.”

“내가 좀 똑똑해.”

“취소.”

신성은 뒤로 물러나더니, 세 번째 손가락을 펴 보였다.

“다음.”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오러.”

신성의 오른손 위에서 붉은 힘이 출현했다.

불처럼 타오르며, 쉴 새 없이 움직이려고 하는 뜨거운 힘.

오러 같았다.

“마나.”

이번에는 왼손에서 푸른 고리가 나타났다.

공중에 떠서 느리게 회전하는 고리는 분명 마나 서클이었다.

푸른 마나 알갱이들이 주변을 떠돌았다.

신성은 두 손을 모았다.

“결합.”

“아이 씨, 놀라라.”

부딪쳐서, 폭발할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신성은 마주 잡은 두 손을 떼어 냈다.

그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어서 나를 가리킨다.

“시도.”

“오러와 마나의 결합을 시도하라고?”

더는 알려 주지 않겠다는 듯, 신성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오러와 마나는 접촉하면 무조건 폭발하는 줄 알았는데.

뭐가 있는 걸까.

“알아들었다.”

“좋음.”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신성이 내게 날아왔다.

어차피 내 힘인 만큼, 적의를 가지고 있진 않을 테니.

제지하진 않았다.

작은 손이 내 두 눈을 가렸다.

“시간.”

“무슨 시간?”

“끝남.”

* * *

눈을 깜빡이니, 나는 교화 시설 뒤편 언덕에 있었다.

말론도 함께였다.

리에이트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아, 왔네요.

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나는 확실히 알았다.

신성은 내 힘이지만, 아직 내가 다룰 수는 없다는 것.

‘아직은.’

시험이 몇 단계까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발전 가능성이 있었다.

몸에 이상이 없나 다시 확인했다.

달라진 건 하나였다.

전에는 느껴지지 않던 신성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현실에 안주하는 순간, 발전은 끝난다.

아직 갈 길이 먼만큼, 만족하진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까지만 해야 할 것 같았다.

조건이 안 된다는데, 오기로 도전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말론.”

“용무는 끝나신 모양이군요.”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리에이트도 별말 없는 걸 보면, 된 것 같다.

이제 각자의 길을 걸어갈 시간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해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시간 되면 도와줄 테니까요.”

“보통은 얼마든지 아닙니까? 하하.”

“저는 그런 빈말은 안 합니다.”

“진심이라는 뜻이군요. 오히려 멋있습니다.”

만약 말론과 리처드 일행이 교국을 원상복구 한다면, 팔베르크 제국을 상대할 때 큰 전력이 될 수도 있었다.

성자만 해도 천군만마나 다름없다.

-기껏 찾은 성자를 이용해 먹을 생각은 그만둬 줄래요?

-해일에 쓸려 갈 바에야, 차라리 방파제가 되는 쪽이 낫지 않겠어?

-말은 잘하시네요. 제가 지켜보고 있다는 거, 항상 기억하세요.

-무서워 죽겠군.

리에이트도 가볍게 경고했고, 나도 가볍게 대응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리에이트가 있는 이상, 교국은 이용해 먹을 수 없다.

-이용 대신, 협력이라면 상관없겠지?

-환영이에요.

-좋아.

말론과 나는 언덕에서 내려갔다.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어느새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땅거미 진 갈림길에서, 나와 말론은 헤어졌다.

말론은 신전으로, 나는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여관으로 향했다.

“나 왔다.”

여관 방문을 열자마자, 무언가 뛰쳐나왔다.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내게 달려들어, 배에 부딪쳤다.

멍!

리옐인 줄 알았더니, 검은 개였다.

대형견이었는데, 종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마리나가 급히 뛰어나왔다.

“단 님, 그러시면 안 돼요!”

“단?”

나는 내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지금 마리나가 개한테 단이라고 한 건가.

방 안에는 단이 보이지 않았다.

개가 내 얼굴을 핥으려고 했다.

“앉아.”

단호한 어조로 명령했다.

그러자 검은 개는 내 앞에 얌전히 앉았다.

혀를 길게 빼고 숨을 내쉰다.

헥헥.

눈에 띄게 당황한 마리나는 어쩔 줄 몰라서 우물쭈물했다.

나는 검은 개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거, 설마 단이냐?”

* * *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마리나는 마녀에게 원념을 받아, 저주를 익혔다.

마녀의 핏줄이니, 저주를 배울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녀가 정말 가르쳐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마녀의 한탄에 의하면, 마리나가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마리나는 마녀에게 간단한 저주를 몇 가지 배웠다.

그중에 하나가 사람을 동물로 바꾸는 것.

아르테미스의 저주였다.

저주 입문자라면 꼭 거쳐 가야 할 기본적이고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저주.

“약식이었지?”

“맞네. 아무리 내 핏줄이라고 한들, 시작부터 완전한 저주를 다루긴 힘드니.”

아르테미스의 저주는 사람을 술자가 원하는 동물로 바꾼다.

그러나 약식일 경우, 조금 제한이 붙는다.

원하는 동물 대신, 그 사람의 천성과 가장 비슷한 성질의 동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그 결과가 이거라는 거군.”

“그래.”

검은 개는 얌전히 내 발치에 앉아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덩치는 크지만, 얼굴이 순하게 생겨 사람을 잘 따를 것 같은 인상이다.

천성에 맞는 동물로 변한 거니까, 어쩐지 단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반성하고 있어요.”

시무룩해진 마리나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요컨대 저주를 거는 데 원념을 다 사용해 버려, 해주를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풀면 되는 거 아닌가?”

“풀려고 해 봤다. 그런데, 워낙 엉망으로 써서 도리어 해주가 안 되지 뭐냐.”

“헤헤…….”

나는 머리를 짚었다.

“왜 멀쩡한 사람을 저주 실험에 써?”

“이놈이 자원하더구나. 나는 한 번 말렸다.”

“왠지 그림이 그려지긴 하는데.”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아르테미스의 저주라면 영초로도 해주할 수 있다.

영초를 꺼내자, 마녀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도대체 영초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 게냐?”

“정원지기가 한 보따리 챙겨 줘서, 아직도 남아 있어.”

“정원지기가 직접 키운 것이라면, 돈 주고도 못 사는 품질일 텐데.”

“어. 요긴하게 써먹고 있지.”

도구를 꺼내 늘어놓고, 영초를 짓이겼다.

마녀가 눈치 빠르게 옆에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마리나, 보고 배우거라.”

“그, 그래도 될까요?”

마리나는 허락을 구하듯 나를 흘겨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비법이랄 것도 없어. 보고 배울 수 있으면 배워.”

“이놈의 약제학은 이 할미보다 한 수 위란다. 도움이 될 게야.”

“네!”

해주약을 만드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옆에서 마녀가 도운 덕분이었다.

단이 안 먹고 도망치는 바람에 골머리를 썩였지만, 어떻게든 먹이는 데 성공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단은 멍한 얼굴로 앉아 허공을 바라봤다.

“……부작용 생긴 거 아니야?”

“그, 그런.”

나는 단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번뜩 정신을 차린 듯, 단이 움찔 몸을 떨었다.

“도련님?”

“정신이 드냐?”

“예.”

단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꿈을 꿨습니다.”

“무슨 꿈?”

“제가 개였습니다.”

“그거 꿈 아니야.”

“예?”

마리나는 멋쩍은 듯 볼을 긁적거렸다.

* * *

그날 밤.

나는 여관의 방을 하나 더 빌렸다.

이유인즉슨, 불사의 괴물을 죽일 독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용의 산맥, 투소메스의 레어에서 챙겨 온 샘플을 꺼냈다.

‘투소메스가 샘플을 만들어 둬서 다행이야.’

손가락 크기의 작은 병.

물처럼 투명한 액체가 소량 담겨 있었다.

이 소량에 농축된 재료는 결코 무시할 수준이 못 됐다.

‘정령수, 타락한 일각수의 뿔, 바실리스크의 피, 아르고스의 여든 두 번째 눈물…….’

온갖 해괴한 재료는 다 들어갔다.

하나같이 웬만한 아티팩트 정도의 값어치를 가진 것들이었다.

나도 듣기만 했지, 못 만져 본 것도 몇 개 끼어 있었다.

이게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 재료를 구하느라 한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제조법대로라면, 이걸 부패한 성배에 떨어트리라는 건데.’

재료에 들어간 것들이 뒤섞인 키메라라도 소환되는 것 아닐까.

투소메스의 이론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투소메스는 내 감탄을 이끌어 낼 정도로 지독한 연구를 했으니까.

나는 부패한 성배를 꺼냈다.

‘이렇게 보니 그냥 평범한 나무 잔인데 말이야.’

겉보기에는 검은색으로 칠한 나무 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부패한 성배를 책상에 올렸다.

사실, 조금 더 안전한 장소에서 하고 싶지만.

성배를 돌려줘야 하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었다.

“잘못되면 리에이트가 어떻게든 하겠지.”

들었을지 모르겠다.

나는 유리병을 열었다.

정말 지독한 독은 냄새만으로도 사람을 중독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그런 종류의 독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색무취에 가까웠다.

‘정령수를 써서 그런 건가?’

나는 신중히 유리병을 기울였다.

유리병 속의 액체가 부패한 성배의 안으로 떨어졌다.

치이이이이익!

뜨겁게 달궈진 철에 찬물을 뿌린 듯, 증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마나로 증기를 차단했다.

조용히 경과를 지켜봤다.

부패한 성배 속의 액체는 부글부글 끓었다.

“어?”

예상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당연히 액체에 변화가 생길 줄 알았는데.

부패한 성배에 먼저 변화가 생겼다.

부패함을 상징하는 검은색이 조금씩 액체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게 뭐야?’

원리를 모르겠다.

부패한 성배가 마신의 성유물이라는 것 말고는, 아는 바가 별로 없으니까.

나는 성유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부패한 성배의 색을 빨아들인 액체는 이윽고 먹물처럼 까맣게 변색됐다.

검은색보다 더 어두운 색이었다.

주변의 빛이 사그라지는 듯한, 탁한 색의 독이 완성됐다.

* * *

“도착했습니다.”

“와아.”

“하아, 집에 돌아온 기분이에요.”

“흠흠, 이런 곳에 살았더냐?”

시노드 교구를 빠져나가, 마차로 며칠을 달렸다.

그 끝에, 우리는 마이어 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마녀도 함께였는데, 나와 협의를 본 끝에 데려올 수 있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것과, 마리나에 대한 걱정이 겹쳤다.

‘몇 가지 조건이 걸렸지만, 마녀를 이쪽으로 끌어들인 건 아주 큰 수확이다.’

큰 전력이 하나 추가됐다.

마차는 저택 대신 망아의 숲으로 향했다.

마녀는 거처로 조용하고, 식생이 풍부한 곳을 원했다.

듣자마자 생각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여기더냐?”

“그래. 괜찮지? 사람 발길도 뜸한 곳이야.”

“마나의 기운이 짙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마나 메이즈가 형성되어 있었거든.”

“마나 메이즈를 형성할 만한 물건이 있었나?”

“마나리아.”

마녀는 인상을 구겼다.

“마나리아는 그만한 마나를 머금고 있지 않을 터.”

“내가 개량한 거야. 일반 마나리아랑 비교하면 섭섭하지.”

“그럼 그렇게 말했어야지. 에잉.”

혀를 찬 마녀는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집터나 찾아보겠다면서, 검은 안개에 앉았다.

마녀를 태운 안개가 떠오르더니, 유유히 망아의 숲 내부로 이동했다.

후닌이 그 뒤를 따라 날아갔다.

“괜찮으실까요? 몬스터라도 나온다면.”

“걱정할 거면, 몬스터를 걱정해야지.”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고작 숲에 사는 몬스터 정도에 당할 마녀가 아니다.

조건만 갖춰진다면 탑주와도 대등하게 부딪칠 만한 힘을 지닌 존재가 마녀다.

마리나는 아직 제 조모의 힘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피곤하다. 들어가자.”

저택으로 돌아온 우리를 맞이한 건 집사장, 윌리엄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라스 마이어를 보좌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영지가 불안하니까, 믿을 만한 사람을 남겨 둔 걸까.

“오랜만에 뵙는군요. 도련님.”

“바빠서 말이야.”

“그 나이에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언 고맙군.”

범상치 않은 노인라고는 생각했지만.

마녀와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고 보니, 다르게 보였다.

다 늙었으면서 단과 비슷할 정도로 다부진 체격이었다.

“쇤네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니야. 쉬어.”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갔다.

뒤에서 뭐가 쫄래쫄래 쫓아왔다.

리옐이었다.

“리옐.”

“응!”

“방 있잖아.”

“아빠랑 같이가 좋아!”

라스 마이어는 리옐을 위한 방을 따로 마련해 뒀다.

그 크기가 내 방 못지않을 정도로 컸다.

하지만 그런 배려가 무색하게도, 리옐은 그 방을 쓰지 않았다.

“맘대로 해라.”

크게 불편한 점은 없으니, 그러려니 했다.

세상 아무런 걱정 없어 보이는 리옐이지만, 사실 상당히 눈치가 빠른 편이다.

철이 일찍 든 건지, 좀처럼 나를 귀찮게 구는 일은 없었다.

애교 수준의 투정 정도가 전부다.

“히히.”

리옐은 해맑게 웃으며 나를 졸졸 따라왔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곧장 통신구를 꺼냈다.

하멜에서 발목을 잡히고, 교구에서도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소모했다.

그사이 발레리아에게 한 번쯤 연락이 있을 법도 했는데.

‘이상하게 조용해.’

꼼꼼한 성격을 생각하면 보고를 잊었을 리도 없었다.

통신구를 톡톡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레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뒤를 보니 로안 아카데미의 원장실이었다.

“스승님?”

“뭐 하냐?”

“업무 중이에요.”

발레리아는 서류를 통신구에 비춰 보였다.

“별일 없냐?”

“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하늘 같은 스승에게 거짓말을 해?”

“제가요?”

“발뺌도 하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지금이라도 바른 대로 고하면 봐주마.”

나름대로 속여 보려고 한 것 같지만, 얘한테 연기를 가르친 것도 나다.

발레리아는 한참을 우물쭈물했다.

내가 가만히 바라보자, 한숨을 폭 내쉰다.

“후우, 스승님.”

“왜?”

“꼭 아셔야겠어요?”

“꼭 알아야겠다. 뭔데 그러냐.”

“엄, 사실 선언식 기간에 렘브란트 님푸스가 찾아왔어요.”

렘브란트가 발레리아를 직접 찾아갔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탑주끼리 만나기라도 한 건가.

“그래서?”

“그 새…… 큼, 렘브란트가 제게 이런 걸 건넸는데요.”

발레리아는 편지지를 꺼냈다.

흘긋 내 눈치를 살피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 화내시거나 하면 안 돼요?”

“뭔데, 보여 줘 봐.”

발레리아는 통신구에 편지지를 비춰 보였다.

나는 차분하게 편지지에 쓰인 글씨를 읽었다.

“흠.”

뭐든 동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글을 다 읽은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편지지 위로 발레리아가 흘끔 고개를 내밀었다.

“스승님? 화나신 거 아니죠?”

“혹시 만에 하나 내가 잘못 읽었을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물어보마.”

“힉.”

“지금 팔베르크 제국, 아니, 황제…… 라그힐 그 뻔뻔한 놈이.”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편지지에 쓰여 있던 단어가 뇌를 때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심호흡을 한 뒤, 발레리아에게 재차 확인했다.

“내 장례식을 치르겠다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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