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가문의 대마법사 8권
글쓰냐 퓨전 판타지 장편소설
목차
리에이트의 성자(2)
도도한 힘
새끼 사자
렘센의 악몽
죽은 대마법사의 마도서
오픈 게임
캐슬링
심연의 틈
앙파상
1
리에이트의 성자 (2)
지그문트를 향해 똑바로 쏘아져 나가던 열기가 벽에 가로막힌 듯 멈췄다.
잠시 정지했던 열기는, 방향을 바꿔 몰렉을 향해 강하게 뿜어 나갔다.
몰렉은 다급히 마나를 일으켜 조정을 시도했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분명 열기에 담긴 몰렉의 마나는 그대로인데, 그 마나가 말을 듣지를 않았다.
팔다리를 다른 사람에게 조종당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짓을!
아무리 몰렉이라도, 이걸 정면으로 맞으면 위험했다.
지옥불의 열기가 몰렉을 덮치기 직전.
몰렉은 열기를 조종하는 것을 포기하고, 양팔을 교차해 머리를 보호했다.
그는 마족.
지옥의 열기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는 종족이었다.
-쿠오오오오오-!
뼈까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에, 몰렉이 울부짖었다.
양 팔뚝이 녹아내렸다.
열기가 몰렉의 전신을 휩쓸고, 벽에 부딪쳤다.
화륵!
언덕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녹아내렸다.
시노드 교구의 전경이 조금 드러났다.
딱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지옥의 열기는 사그라지지 않고, 대기 중으로 퍼져 나갔다.
화악!
언덕에 있던 모든 식물이 타들어 갔다.
잔열에 불과했지만, 사막과 같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지그문트는 제 몸에 손을 얹었다.
쿨링(Cooling).
몸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으며, 적절한 온도로 내려갔다.
몰렉은 욱신거리는 팔을 내렸다.
지그문트는 몰렉을 관찰하는 듯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마족일지라도, 지옥불의 열기는 버티기 힘들었을 텐데.
-네놈,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고정 관념은 버리는 게 좋을 게다.
지그문트는 충고하듯 읊조리며, 손을 지휘하듯 움직였다.
-오래 살다 보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일이 종종 일어나는 법이거든.
-뭐라고?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다 준비했다.
동시에, 온갖 종류의 공격 마법이 몰렉을 둘러쌌다.
경이로울 정도의 캐스팅 속도를 기억하던 몰렉이었기에, 가까스로 반응할 수 있었다.
몰렉이 재빠르게 몸을 웅크리며, 찢어진 날개로 온몸을 감쌌다.
마법이 몰렉을 향해 작열했다.
콰가가가가강!
* * *
폭음과 함께, 열기가 시노드 교구를 뒤덮었다.
단은 땀을 뻘뻘 흘리며 걸음을 내딛었다.
마리나는 손에 든 개구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대(大) 자로 누워 뻗은 마녀가 앞다리를 들어 생존을 신고했다.
머리 위 새싹을 축 늘어트린 리옐은 인상을 쓰며 마리나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말론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북문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일행은 화형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목오 사막 못지않은 열기군요. 후우.”
단은 뜨겁게 달궈진 체인 메일을 벗어 던졌다.
지그문트가 있었다면 어떻게든 조치를 취했겠지만, 지금은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도련님은 여태껏 얼마나 저희 편의를 봐주고 계셨던 걸까요.”
“저도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하필 화형장은 교화 시설 근처에 있었다.
열기의 근원지는 교화 시설 언덕, 지그문트와 몰렉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
가까이 갈수록 뜨거워지는 열기에,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죄, 죄송합니다. 허억, 도움이 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말론은 제일 뒤에서 힘겹게 걸어왔다.
뜨거운 열기에 머리가 어지러운 나머지,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땀에 흠뻑 젖은 사제복이 무겁게 발목을 잡았다.
말론으로써는 곧잘 앞으로 가는 둘이 경이로워 보일 정도였다.
“허억, 커헉.”
입을 열자 침이 바짝 말라오며, 마른기침이 나왔다.
단과 마리나는 어쨌거나 목오 사막을 횡단한 경험이 있던 만큼, 잘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녀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멈춰라, 멈춰. 더 가면 위험하니.”
마녀의 지시에 따라 멈추니, 희미하게 퍼진 마기가 눈에 들어왔다.
워낙 극소량이라, 사제인 말론도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자칫하면 마기를 들이마실 뻔했다.
“그래서, 얘야.”
“네, 넵.”
“분명 어떤 방도가 있다고 했지?”
“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자 했다.
마녀가 제시한 방법은 간단했다.
“목표는 부패한 성배다.”
부패한 성배가 바로, 마기로 둘러싸인 화형장에 힘겹게 온 이유였다.
영주급 마족, 몰렉이 완전히 현현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부패한 성배 덕분이다.
부패한 성배를 어떻게든 막아 내면, 몰렉도 힘을 제한 받는다.
문제는 부패한 성배를 둘러싸고 있는 마기였다.
마계와 비슷할 정도로 진한 농도의 마기가 에워싸고 있었다.
“부패한 성배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저것이나 걷어 낼 수 있겠느냐?”
마녀는 솔직히 무리라고 생각했다.
전력을 발휘하더라도, 저 안에서 버티는 것이 전부.
저만한 마기를 걷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세계수의 아이가 겨우 해낸 것을, 일반 사제가?’
지금도 마기는 계속해서 뿜어 나오고 있었다.
대사제가 온다고 해도 정화는커녕 폐쇄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말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걷어 낼 수 있습니다.”
“네 힘을 과대평가하는 것 아니냐?”
“저는 약합니다.”
말론은 순순히 인정했다.
자신은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마기 너머의 부패한 성배를 보자마자, 불쾌함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그러나 두려움은 없었다.
“제게 힘을 빌려주시는 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론은 두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하늘이 열렸다.
* * *
-이게 다인가?
마법이 점점 사그라지더니, 이내 완전히 멈췄다.
몰렉은 웅크리고 있던 몸을 세웠다.
수많은 상처가 온몸에 새겨져 있었다.
마나의 창이 꽂혀 있고, 불이 붙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한 방이 없군.’
몰렉은 여러 차례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지그문트는 빈번히 그것을 막아 내거나, 피해 냈다.
모든 수를 예상했다는 듯, 안전을 도모하는 것 같았다.
반대로 얘기하면, 방어에 마나를 꽤 소모했다는 뜻이다.
지금쯤 바닥을 보이고 있을 것이다.
-마나를 전부 소모한 마법사만큼, 쉬운 상대도 없지.
검을 잃은 기사와 같았다.
지그문트는 태연한 척했지만, 몰렉의 눈에는 보였다.
그는 눈에 띄게 지쳐 있었다.
-솔직히, 장창의 힘이 없었다면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블리자드를 사용했던 시점에서 패배했을 것이다.
실제로 지그문트는 그때 승부수를 띄웠다.
적의 전력을 파악하지 못했을 때야말로, 기습의 적기였으니까.
그러나 몰렉은 막아 냈다.
-이 내기는 내 승리인 것 같구먼그래.
지그문트, 델 로안도 알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패배는 정해졌다.
아무리 그라고 한들, 7서클로 힘을 제한 당한 지금.
이길 확률은 반반에 가까웠다.
해서 최대한 빨리 승부수를 띄웠다.
그 이후로는 시간을 끈 것뿐이었다.
“늙은이는 여기까지인가 보이. 뒷일을 부탁하네.”
“에잉, 이거 하나 못 잡냐?”
지그문트가 자문자답했다.
기시감을 느낀 몰렉은 주춤했다.
또다시 사람이 변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경계했지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군. 인격이 두 개인가?
-글쎄올시다.
-어쨌든, 이제 승부는 결정 난 것 같군.
몰렉은 힘을 잃은 장창을 세웠다.
지그문트는 이름 없는 검을 뽑아 들었다.
무기 크기 차이만 봐도, 이쑤시개와 공성 무기 수준의 차이.
그럼에도 창끝에서 눈을 떼지 않는 지그문트의 눈은, 몰렉을 감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얼굴, 기억하마.
-아직 안 끝났거든?
몰렉은 지그문트를 향해 장창을 내리꽂았다.
지그문트는 검을 들었다.
오러는 남았다고 해도, 저만한 크기의 장창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설령 피한다고 해도 그 여파에 휩쓸린다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
-허억.
엄청난 탈력감을 느낀 몰렉이 휘청거렸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몰렉은 급히 벽의 뚫린 부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를 떨어트리던 어두운 하늘에서 빛 한 줄기가 쏟아졌다.
* * *
비가 그쳤다.
구름 사이로 쏟아져 내려온 빛줄기가 말론을 비췄다.
눈을 감은 말론은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제 머리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모를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가슴이 충만해지는 듯한 감각에, 단과 마리나는 저도 모르게 꿇어앉았다.
“성자(聖子)가 나타났구나.”
마녀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말론의 옷을 적시고 있던 피가 증발해 버린 듯 사라졌다.
마치 방금 새로 태어난 것처럼, 깨끗한 모습이었다.
리에이트가 성인에게 신성력을 하사할 때 일어나는 현상.
‘신성 폭발!’
말론을 중심으로 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찬란한 빛에 눈을 감았던 마녀는 몸을 감싸는 따뜻한 감각에 다시 눈을 떴다.
개구리의 앞다리 대신, 인간의 손이 보였다.
과다할 정도의 신성력에 노출되어, 해주되어 버린 것이었다.
“으음? 와아, 예쁘다.”
부스스 눈을 뜬 리옐이 해맑게 감탄했다.
무수한 빛 알갱이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두운 구름이 걷히며,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마기에 노출되어 썩어 가던 나무가 생기를 되찾았다.
부패한 성배를 둘러싸고 있던 마기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
“리에이트 님.”
탁한 색으로 물들어 있던 부패한 성배도 마찬가지였다.
신성력 덕분에 일시적으로 원래의 황금색을 되찾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말론은 성배 앞으로 다가갔다.
그 모습이 의식을 하는 것처럼 엄숙하게 느껴졌다.
“부디 바라건대.”
교화 시설 너머, 언덕을 둘러싸고 있던 벽이 사라졌다.
창을 든 몰렉의 모습이 드러났다.
몰렉의 창은 지그문트가 아닌, 엄한 땅을 찔렀다.
갑작스럽게 신성력에 노출되어, 빗나간 것이다.
콰앙!
폭음과 함께 언덕이 무너져 내렸다.
몰렉은 균형을 유지하며, 두 번째 공격을 준비했다.
정확히 지그문트를 겨눈 창을 드높이 들어 올렸다.
말론이 소망했다.
“악을 멸하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다른 사람은 듣지 못했지만, 말론은 똑똑히 들었다.
-아싸!
이 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리에이트의 신난 음성을.
마치 무료한 공부 시간을 견딘 끝에 잠깐의 자유를 허락 받은 아이 같았다.
온몸의 털이 곤두선 몰렉이,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족이 함부로 지상에 나오면…….
빛이 모여, 손의 형상을 만들었다.
문제는 그 손이, 시노드 교구를 뒤덮을 정도로 거대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그 손에게서 일말의 위협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몰렉은 그렇지 못했다.
-못 써요!
주먹을 쥔 손은 검지를 내밀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검지가 살포시 몰렉의 머리를 눌렀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였으나, 그 위력은 그렇지 않았다.
-끄아아아……!
몰렉은 고통에 절규하며 불탔다.
블리자드를 막아 내고, 지옥의 열기를 몸으로 감당하던 몰렉이다.
하지만 이건 버틸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니었다.
* * *
시노드 교구의 사건은 일단락됐다.
주교는 사망했고, 교구 한복판에 귀족급 마족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큰 혼란이 없었던 건, 성자의 출현 덕분이었다.
심지어 리에이트의 힘을 지극히 일부라도 직접 목도했으니.
“저, 이런 상황일지라도, 가르침을 구해도 괜찮겠습니까?”
“언제든지요. 들어오시지요.”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신을 믿지 않던 소수의 사람들도 신자가 됐다.
말론이 성자가 될 때 나타났던 신성 폭발 덕분에, 사상자도 많이 줄었다.
신전 한편, 단은 분주히 움직이는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주교가 죽었는 데도 혼란은 없군요.”
“그자는 주교가 아니었습니다. 폭군이라면 모를까요.”
단의 옆에 앉은 리처드가 중얼거렸다.
시노드 교구 내에서, 클레이먼이 저지른 짓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도리어 보란 듯이 보여 주며 공포정치를 시도했으니까.
사병을 필두로 한 무력과, 위계질서가 뚜렷한 신전 구조 때문에 옴짝달싹 못 했을 뿐이다.
“일이 좋게 끝나서 다행입니다.”
“그렇죠. 저희에게는 이제 시작이지만요.”
말론이라는 새로운 구심점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이 나타났다.
리에이트의 기적을 목도하고, 성자를 따르는 이들.
“혁명을 위해 대신전으로 향한다고 하셨지요. 이름은 없습니까?”
“이름이 생기는 순간, 그 이름 아래 움직이게 되니까요.”
목표는 부패한 리에이트 교국을 정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리에이트가 말론에게 모종의 언질을 내린 듯했다.
9할이 넘는 시노드 교구의 성기사와 사제들이 기꺼이 동참 의사를 밝혔다.
리처드는 성자 말론과 함께 필두에 선 인물이었다.
“리에이트 님께 부끄러움 없는 교국으로 돌려놓겠습니다.”
당연히 교국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
대신 성자와, 리에이트의 목소리라는 명분이 있다.
리에이트 교국의 특성을 생각하면, 확률은 절반이다.
지그문트가 그랬으니, 단은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힘내십시오.”
“언제나 바라마지 않던 일입니다. 달게 걸어야 할 길이지요.”
“혹시, 부패한 성배는.”
“아, 말론…… 성자님께 들었습니다.”
부패한 성배는 일시적으로 제 역할을 해냈지만, 이내 다시 부패하고 말았다.
리에이트 교국의 대신전이 문제였다.
고개를 끄덕인 리처드가 준비해 뒀던 함을 꺼냈다.
순은으로 만들어진 함은 척 보기에도 값이 꽤나 나갈 것 같았다.
안에는 부패한 성배가 들어 있는 듯했다.
“리에이트 님께서 잠시 양도하라고 하셨다더군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보다, 지그…….”
“쉿.”
단은 손사래를 쳤다.
지그문트는 자신이 리에이트 교국에 온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리처드야 말론 때문에 알게 됐다고 해도,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는 건 최대한 피하라고 했다.
“성자님과 교화 시설로 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론, 아니, 성자님과요?”
“예. 약속을 하셨거든요.”
“약속……요?”
* * *
교화 시설 뒤편, 무너진 언덕.
나는 그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왜 하필 이곳이냐.
신성력이 대량으로 내려앉았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리에이트와 한결 수월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그럼.”
눈을 감고, 몸속의 기운에 집중한다.
심장을 둘러싼 마나 서클과, 단전에 웅크린 오러.
그 사이에 벽처럼 형성된 신성도, 확실히 느껴졌다.
“후우.”
심호흡을 한 뒤, 침을 삼켰다.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한다.
오러가 서서히 끓어오르고, 마나 서클이 회전한다.
그러나 신성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 신성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
머리 위에서 핀잔이 들려왔다.
턱을 괴고 엎드려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리에이트가 떠올랐다.
괜히 기분이 나빴다.
내가 제어를 못 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겁나게 뭐라 그러네. 얄밉게.”
여태껏 살면서 내게 가장 어려웠던 일은 검술이다.
머리는 아는데 몸이 따라 주지 않는 듯한, 그 답답한 감각.
마나 번(Mana Burn)과 꾸준한 대련, 훈련으로 어떻게든 극복해 냈다.
하지만 이건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무슨 소린지 이해도 안 돼.’
리에이트는 구구절절 신성을 다루는 법을 설명했다.
문제는 그 설명이 내게도 너무 어려웠다는 것이다.
알아들은 건 대략 전체의 20%도 되지 않았다.
‘살면서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무리 두서없는 설명이라도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리에이트는 꽤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했음에도,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단어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략 우선순위에 둬야 할 것은 이것이었다.
‘신성을 길들여라.’
내 몸속에 있는 것은 목오의 신성이다.
그러니 내 말을 따를 리가 없다.
쉽게 비유하자면 다른 사람에게 길들여진 동물에게 명령하는 꼴이었다.
더군다나, 그 동물의 성격은 매우 까칠하고 경계심이 많았다.
“재밌군.”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지그문트 마이어로 환생한 뒤로, 인생이 부쩍 즐거워졌다.
세상만사 장애물이 하나도 없으면 재미없는 법이다.
장애물의 높이가 높을수록, 뛰어넘는 보람도 있다.
위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하네요.
나는 여러 방면으로 신성을 길들여 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혹시 내 문제점이 뭔지 알려 줄 수 있나?”
무려 신씩이나 되는 선생이 있는데, 막히는 점이 있는데 묻지 않는 건 손해다.
리에이트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몸에 힘이 세 개씩이나 있는데, 그걸 전부 통제하려고 하니까 그렇지요.
몸에 있는 세 종류의 힘.
오러, 마나, 그리고 신성.
두 개까지는 충분히 제어할 만하다.
마법을 쓰는 동시에 오러를 일으키는 건 할 수 있다.
-지금의 당신이 신성을 제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네가 길들이라면서?”
-길들이라는 거지, 제어하라는 게 아니잖아요.
“뭐가 다른데?”
-당신은 반려동물을 완벽히 통제하나요?
“키워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흠.”
비슷한 건 몇 있다.
발레리아라든지, 요르문간드라든지.
나는 ‘길들이다’의 뜻을 다시 한번 되짚었다.
확실히 길들인다와 제어하는 건 다른 일이다.
‘익숙하게 한다. 즉,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길들여지는 대상에게도 자유가 있다.
확실히 이 거대한 힘을 내가 통제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고작 5서클과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오러도 겨우 동시에 제어하고 있는데.
‘적어도 지금은, 자력으로는 온전히 컨트롤할 수 없는 힘이다. 그건 확실해.’
목오의 신성은 웅크리고 있는 상태였다.
인간의 몸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목오가 배려한 것이다.
이것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데, 완전히 신성을 제어하려고 했으니.
다시 생각해 보니, 멍청한 짓이었다.
‘익숙하게 한다.’
친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내 몸에 들어온 지는 꽤 오래됐으나, 나는 그런 시도를 해 본 적이 없다.
관찰, 연구, 제어 시도라면 해 봤지만.
신성에 무슨 자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느낌으로 다가간 적은 없다.
‘아니. 잠깐. 자아 비슷한 게 있는 건가?’
가능성은 있었다.
신성은 이따금 주체적으로 움직이곤 했으니까.
처음 자리를 잡을 때, 오러와 마나 사이를 갈라놓은 거라든지.
페러시트에 잠식당한 리로이를 상대할 때라든지.
나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성을 바라보았다.
‘미친 짓 같은데.’
위에 있는 리에이트가 비웃을 수도 있었다.
남 눈치를 보면서 내가 생각해 낸 것을 주저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신성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아니나 다를까, 응답은 없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미지에 대한 가설이라고는 해도, 허무맹랑한 생각이었다.
리에이트의 비웃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뭐라고?”
뭔가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리에이트가 말한 건가 싶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왜요?
리에이트는 왜 그러냐는 듯 의문을 제기했다.
사람 놀리는 걸 좋아하는 타입은 아닌데.
다시 한번, 뭔가 웅얼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소리가 아니었다.
‘뭐지?’
나는 다시 신성과 마주했다.
신성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확실히 느껴졌다.
감정이 직접 전달되는 듯한, 묘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이 감각은 분명.
‘호기심?’
몸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신성이, 갸웃 고개를 기울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머릿속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 * *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물속에서 듣는 듯, 울리는 리에이트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눈이 저절로 떠졌다.
일어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메어리들의 악몽에 끌려갔을 때처럼, 조금 멍한 감각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눈을 떴지만, 암전된 것처럼 보이는 건 없었다.
발밑으로 바닥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우주 한가운데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몽계?’
꿈에서 하던 요령으로, 공간을 찢어 보려고 했다.
나고와 얘야 남매를 때려잡을 때 대충 감각을 익혔기 때문이다.
그때와 같이 손을 내리그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몽계는 아닌 것 같았다.
‘느낌은 비슷한데.’
그 순간, 돌연 빛이 터져 나왔다.
눈부신 섬광에 눈을 감았다 뜨니, 지면이 발에 밟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싱그러운 풀이었다.
끝도 없이 드넓은 초원 한가운데.
나는 덩그러니 서 있었다.
“아, 아.”
목소리도 나오고, 마법과 오러도 정상적으로 사용됐다.
움직임에도 문제는 없다.
따뜻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바람에 풀이 쓸려 넘어지며, 길과 같은 모양새가 됐다.
‘길을 따라가라는 건가?’
마땅한 방법이 없었기에, 일단 길을 따라가기로 했다.
길을 따라 갈수록 오묘한 감각이 온몸을 뒤덮었다.
밝은 기운.
‘그다지 친숙하진 않군.’
마나는 굳이 묘사하자면 차가운 쪽에 속한다.
오러는 그 반대로, 뜨거운 불과 같다.
하지만 이것은 그 무엇과도 맞지 않았다.
홀린 듯이 길을 따라 걸었다.
‘저건.’
나는 걸음을 멈췄다.
초원, 먼 곳에서 무언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과 나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본능 깊숙한 곳에서, 저게 뭔지 느낄 수 있었다.
“후.”
리에이트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앞으로 걸어갈수록, 신성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형체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만나서 반갑다.”
오랜만에 느끼는 압박감.
드래곤 프레셔와 같이 상대를 위협하기 위해서 내뿜는 살기의 개념이 아니다.
그냥 이 존재가 너무 거대해서, 나도 모르게 느낄 뿐.
나는 빛을 올려다보았다.
“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