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54/134)

7

가짜 성배

“오지 마아!”

클레이먼은 절규하듯 경고했다.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놈이 품속에서 꺼낸 검은색의 술잔 때문이었다.

‘부패한 성배?’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당연히 숨겨 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가지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부패한 성배는 성유물임에도 불구하고 신성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너, 너, 이게 뭔 줄 알고 있나?”

“알지. 부패한 성배, 아닌가?”

“맞다! 이걸 쓰면, 너 따위는 간단하게 죽일 수 있다고!”

클레이먼은 악을 썼다.

나는 가만히 클레이먼을 응시했다.

부패한 성배는 확실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성유물인 만큼, 마도구나 아티팩트와는 그 궤를 달리하는 물건이다.

사용하기에 따라 지금의 나 정도는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 그거 쓰는 법은 아냐?”

“뭐?”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닌 물건이더라도.

사용법을 모른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사제도 아니고, 하물며 리에이트의 신자조차 아닌 클레이먼이 성배의 사용법을 알까.

모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클레이먼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눈동자가 양옆으로 흔들렸다.

“알다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다가오지 마라!”

“모르는 것 같은데.”

“안다고!”

“그럼 써 보든가.”

설령 알고 있더라도, 상관없다.

이 거리라면 홀드(Hold)로 동작을 정지시키는 건 일도 아니다.

표적이 큰 만큼 맞추기도 쉬울 테고.

나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오지 마!”

“허장성세도 연기력이나 머리가 뒷받침되어야 부릴 수 있는 거다.”

“오지 말라고오!”

뒷걸음질 치던 클레이먼이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클레이먼의 목에 이름 없는 검을 댔다.

칼날을 내려다본 클레이먼이 침을 삼켰다.

홀드(Hold)로 클레이먼을 속박한 뒤, 전황을 확인했다.

“리에이트를 위하여!”

리처드를 필두로 한 혁명군과, 클레이먼 휘하의 병력이 붙고 있었다.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혁명군 쪽이 약간 공세였다.

성기사들이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이다.

“무슨 힘이!”

마이어가의 서재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성기사는 기본적으로 신성력을 이용해 힘을 강화하고, 오러를 통해 싸운다.

내가 마나 번(Mana Burn)을 썼던 것도 성기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두 힘을 모두 메인으로 쓰는 것보다는, 하나를 보조로 두는 것이 편하니까.

‘리에이트가 뒤에 있으니, 밀릴 리가 없지.’

클레이먼 휘하의 성기사들은 맥을 못 썼다.

신자인 만큼 신성력은 사용할 수 있겠지만, 리에이트가 일부러 반감시켰기 때문이다.

반대로 위에서 신성력 빵빵하게 넣어 주고 있는 혁명군 쪽은, 확연히 강했다.

성기사에 병사까지 달라붙어야 겨우 혁명군 하나와 대등한 수준이었다.

“단 한 명도 죽음에 이르게 해선 안 된다!”

리처드가 악을 썼다.

그 말대로, 성기사들은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선에서 그쳤다.

집행자들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리에이트의 신자들은 불살(不殺)을 지킨다.

리에이트를 대변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이대로라면 사상자가 생길 것 같은데.’

슬슬 이쪽을 정리하고, 개입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클레이먼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바쁜데 시간 끌지 말자. 그거 이리 내.”

클레이먼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내게 부패한 성배를 내밀었다.

탁기(濁氣)가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아무리 부패했더라고 하더라도 성유물인데.’

나는 부패한 성배를 받아 들었다.

어쨌든 불사의 괴물을 죽이기 위해선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델 로안!

리에이트였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다급한 목소리가 경고했다.

-그거, 성배 아니에요!

“뭐?”

그와 동시에, 부패한 성배라고 생각했던 술잔이 폭발했다.

* * *

단은 성기사 둘을 막아서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강했다.

평범한 기사들보다 힘이 확연히 강한 것이 느껴졌다.

‘버티는 것뿐이라면, 할 만하다!’

단은 검을 치켜세웠다.

설령 상대가 여럿일지라도, 체력이 버텨 주는 한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지그문트의 온갖 까다로운 검술을 전부 받아 온 단이다.

‘합이 썩 좋지 않다.’

클레이먼 휘하의 성기사 둘은 단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절묘한 합공도 아니고, 따로따로 하나씩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때, 단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푸확!

화형대 단상에서 돌연 탁한 색의 연기가 터져 나온 것이다.

연기가 지그문트와 클레이먼을 뒤덮었다.

그 근처에 있던 병사가 연기를 들이마셨다.

“어헉!”

병사는 목을 붙잡고 헛숨을 삼켰다.

기침과 동시에, 검게 죽은피를 쏟아 냈다.

주위에 있던 이들이 그것을 보고 질겁했다.

“이게 무슨!”

병사가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눈이 뒤집어진 병사는 피거품을 물고 발작했다.

몸을 뒤틀다가, 이윽고 축 늘어졌다.

죽은 것이다.

‘도련님!’

단은 이를 악물었다.

움직이려 했으나, 단을 가로막고 있던 성기사 둘이 놓아주지 않았다.

“비켜!”

마도구의 힘에 의지하지 않기 위해 좀처럼 검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던 단이다.

그러나 지금 단은 그것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가 짧게 빛났다.

콰앙!

축적된 충격이 폭발했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두 성기사가 뒤로 밀려났다.

단은 곧장 연기 쪽으로 달려갔다.

“멈추십시오!”

리처드가 단의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단은 리처드를 노려보았다.

서슬 퍼런 기색에 리처드가 움찔했다.

“비키십시오.”

“지금 사람 죽는 거, 못 봤습니까?”

“그래서 구해야 합니다.”

숨을 내쉰 리처드의 손에서 미약한 빛이 점멸했다.

단에게 미약한 신성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극도로 흥분한 사람을 진정할 때 쓰는 방법이었다.

단의 눈동자가 조금 차분해졌다.

“들어가면 개죽음입니다.”

“그러면 보고만 있으라는 겁니까?”

리처드는 차분하게 연기를 바라보았다.

안개처럼 공간을 떠돌고 있는 탁한 기운.

“저거, 마기입니다.”

“마기요?”

“예. 신성력의 반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다는 건, 정화할 수 있다는 겁니까?”

“신성력이 부족합니다.”

리처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단상 인근을 가득 메운 마기는 상당히 진하고 많았다.

이곳의 성기사들이 신성력을 모으더라도, 정화는 힘들었다.

“신성력……!”

단의 눈에 희망이 생겼다.

지그문트의 몸에 신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다루지 못하기에 정화는 힘들어도, 버티고 있을 수는 있다.

“신성력이 충분하면, 정화할 수 있는 겁니까?”

“예? 예. 그렇긴 합니다만, 당장 신전으로 가더라도 모든 사제들을 소집하는 건…….”

“버티십시오.”

단은 급하게 검집에 클레이모어를 집어넣었다.

리처드는 영문을 모르는 눈으로 단을 바라보았다.

단은 곧장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 * *

검게 변색된 술잔.

부패한 성배가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성배를 미리 준비해 뒀던 함에 넣었다.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클레이먼. 쓸모없는 돼지가 한 건 했군.”

화형식이 시작되기 전.

남자는 클레이먼에게 부패한 성배를 넘겨받았다.

클레이먼이 원한 것은 더 큰 권력이었다.

시노드 교구의 주교를 넘어, 교국의 대주교가 되고자 했다.

“주제도 모르는 놈이.”

남자는 혀를 찼다.

클레이먼의 판단은 어떤 면에서는 현명했다.

부패한 성배는 큰 힘인 동시에, 위험성이 짙은 물건이다.

마녀는 부패한 성배를 훔쳤다는 이유로 수많은 습격을 당했다.

클레이먼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성배를 넘기고 권력을 취하고자 했다.

“마침 시노드 교구는 정리할 때가 됐다고 했으니.”

남자는 마차 쪽으로 다가갔다.

마부는 쾌활하게 남자를 맞이했다.

“어서옵쇼. 어디로 가십니까?”

“하멜.”

“트리옌 왕국의 하멜 말입니까?”

“그래. 혹시 거기까진 안 가나?”

“어. 죄송하지만 저는 교국 내부만 돕니다요.”

남자는 마부석에 은화를 올려놓았다.

마부의 눈이 빛났다.

“모시겠습니다.”

남자는 한동안 광장 쪽을 바라보았다.

마부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돈의 힘이었다.

이윽고 남자가 마차에 올랐다.

“최대한 빨리갔으면 하는군.”

“아유,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최고 속도로 모시겠습니다.”

마부는 콧노래를 불렀다.

이 정도 팁을 받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교국 사람들은 이상하게 제시한 금액만큼만 주는 경향이 있었다.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하멜에 마족이 나타났다더군요.”

마부들은 손님에게 도착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원래는 말없이 자기 일만 하는 마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기분이 워낙 좋은 상태였기에 말이 술술 나왔다.

“거기에 마침 계셨던 성기사분들이 제압했다고 합니다.”

“벌써 말인가?”

“예? 아, 예. 며칠 된 이야기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군.”

남자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쪽에서 큰 수확을 얻긴 했지만, 집행자들을 잡아 두는 건 실패한 모양이었다.

덜컹.

그때, 돌연 마차가 옆으로 기울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마부가 마부석에서 미끄러졌다.

놀란 말들이 멈췄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람.”

“뭐지?”

“바퀴가 주저앉았습니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남자는 밖으로 나와 마차 바퀴를 살폈다.

나무로 만들어진 바퀴는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쯧. 이런 것도 제대로 관리 안 하나?”

“아닙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굴러갔는데!”

“됐다. 돈이나 돌려놓도록.”

마부는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남자는 듣지 않았다.

결국 돈을 돌려받은 남자는 다른 마차를 찾았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남자가 타는 마차마다 모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푸르릉!

잘 가던 말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마차가 주저앉는다.

여기까지는 약과에 불과했다.

“뭐야, 운전 똑바로 안 해?”

“눈을 제대로 뜨고 다녀!”

“뭐 이 자식아?”

“너 내려!”

마차끼리 접촉 사고가 나는 바람에 시비가 붙어, 출발이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고.

“아, 내가 왜 마부 같은 걸 하고 있지? 나는 어릴 적에…… 죄송합니다. 저는 제 꿈을 찾아 떠나겠습니다.”

심지어는 뜬금없이 마부가 퇴직을 선언하기도 했다.

기이한 일들이 연달아 발생하자, 남자도 이상함을 느꼈다.

누군가 시노드 교구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수를 쓰는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까악.

지붕 위의 까마귀를 발견했다.

까마귀가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까만 눈동자는 정확히 남자를 직시하고 있었다.

‘마녀!’

* * *

새까만 마기가 단상을 중심으로 지름 10미터 정도의 원기둥을 만들었다.

원기둥의 사방으로 사제들이 손을 뻗고 있었다.

신성력을 쏟아부어 마기가 확장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은은한 빛을 내는 신성력의 벽이 마기를 가뒀다.

리처드는 인상을 찡그렸다.

‘맨눈에 보일 정도로 농축된 마기다. 저 안에서 살아 있을 수 있나?’

설령 신성력을 가진 사제나 성기사라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당장 리처드 본인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다행이 제압은 끝났지만…….’

클레이먼의 병력은 모두 무력화했다.

어떤 시점에, 리에이트는 클레이먼의 병력에게서 신성력을 거둬 버렸다.

신성력을 일시적으로 혁명군들에게 부여했다.

그 이후로는 압도적인 격차가 벌어졌다.

“사제님, 어떻습니까?”

“어떻게든 제어는 하고 있지만, 정화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불가능하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사제님이 오셔도 어렵습니다. 마기가 너무 강합니다.”

“그 정도입니까?”

“아마 이 벽 안은 마계와 유사할 정도로 마기가 가득할 겁니다.”

평범한 생물은 숨조차 쉴 수 없는 곳이 마계다.

마계의 땅을 정화하는 건 설령 성인이 나타나더라도 어려운 일이다.

리처드는 안타깝다는 눈으로 마기가 들어찬 공간을 바라보았다.

“늦기 전에 봉인해야 합니다.”

사제의 제안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마기는 봉인해 두는 것이 정석적인 방법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그라질 때까지 격리하는 것이다.

리처드는 갈등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습니까?”

“다행히도 중급 사제 분들이 여럿 계셔서, 몇 분 더 버틸 수 있습니다.”

“버텨 주십시오.”

“리처드, 의미 없는 일입니다.”

“세상에 의미 없는 일은 없습니다.”

리처드의 올곧은 눈에, 사제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리처드는 눈을 돌렸다.

한 구석에 꿇어앉은 말론이 눈에 들어왔다.

“말론!”

말론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었다.

리처드는 걸음을 멈췄다.

말론의 앞에는 피거품을 물고 죽은 병사가 있었다.

마기를 마시고 죽은 것이다.

“거룩하신 리에이트 님, 부디 빛으로 우리를 보호하시옵고.”

말론은 거의 혼이 빠져 있었다.

공허한 눈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리처드는 말론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말론!”

“……리처드 형? 어떻게?”

“정신 차려. 괜찮은 거야?”

“나는 괜찮은데. 이분께서…….”

망설이던 리처드는 눈을 치뜨고 죽은 병사에게 손을 가까이 했다.

눈을 감겨 주자, 말론의 눈동자가 떨렸다.

맞잡은 두 손이 서서히 풀렸다.

“내, 내가 신성력을 쓸 수 있었다면 살릴 수 있었을까?”

“말론. 죽은 사람이다.”

“형.”

“네 잘못이 아니야.”

말론은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였다.

처음으로 죽음과 마주한 것이다.

리처드는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 * *

“헉, 헉!”

단은 전력을 다해 달렸다.

품에는 리옐이 안겨 있었다.

여관에 있던 리옐을 급하게 데려온 것이다.

“리처드!”

단이 생각한 해결책은 리옐이었다.

일전에 하멜에서 마족과 마주했을 때, 지그문트가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리옐은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성 그 자체다.

마기와는 상극의 기운을 몸에 지니고 있다.

“리옐 아가씨, 저 안에 도련님께서 계십니다.”

“단 아저씨, 내려 줘.”

단의 설명을 듣던 리옐은 단의 품에서 내려왔다.

지그문트가 갇혀 있는 마기 쪽으로 똑바로 걸어갔다.

단순히 마주한 것만으로도 기분 나쁜 기운이 일렁거렸다.

“뭐 하는 건가! 당장 말리지 않고!”

“괜찮습니다.”

마기를 막고 있던 사제가 기겁했다.

웬 어린아이가 뭣도 모르고 다가오니, 그럴 만도 했다.

단은 노심초사해하면서도, 리옐을 지켜보았다.

리옐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웅.

마기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신성력의 벽이 리옐의 손끝에 닿았다.

리에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계수의 후계자가 어떻게 이렇게 활보할 수 있나 싶었는데.

리옐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파란 하늘 위로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세계수의 후계자임과 동시에 대마법사의 딸이기에, 제약을 덜 받고 있는 거군요.

-누구야? 나는 리옐인데!

-음, 리에이트라고 해요.

-리에이트?

-엄마 친구라고 설명하는 편이 좋겠네요.

리옐은 기억을 떠올렸다.

엘비아에서 세계수는 말한 적 있다.

하늘에 사는 친구가 있다고.

지금은 사정상 만나지 못하지만, 한때 친했다고 한다.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살아 있어요. 목오의 신성으로 겨우 버티는 중이지만.

리옐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짙은 마기 속에서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한 빛이 나는 것을.

지그문트가 분명했다.

-잘 들어요. 지금부터 델…… 아빠를 살리는 법을 알려 줄 테니까요.

-응!

-리옐은 제약에서 벗어난 게 아니에요. 단지 변수의 범위에 들어와 있을 뿐이지요.

-응……?

-이 정도의 개입은 리옐에게도 무리를 줄 수 있어요.

리옐은 멀뚱멀뚱 큰 눈을 깜빡였다.

-신성을 직접 행사하지 말고, 대리자를 통해 간접 개입으로 바꿔야 해요.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리옐은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가 너무 많이 섞여 있었다.

리에이트는 고심하다가 눈높이를 낮췄다.

-엄마에게는 하이 엘프가 있지요?

-르네 언니?

-그래요. 리옐도 그런 사람을 찾아야 해요.

-하지만 엄마가, 요정족 중에 찾으라고 했는데.

-괜찮아요. 순혈은 아니지만, 피가 섞인 사람이 있으니까.

* * *

엘비아.

밤말을 듣는 쥐는 감탄했다.

워베어와 오거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숲지기들에게 사형 당할 뻔하기도 했다.

여러 위기를 넘겼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었다.

-후,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됐는지.

밤말을 듣는 쥐는 수소문 끝에 필립을 찾을 수 있었다.

필립은 소개장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밤말을 듣는 쥐를 피했다.

하지만, 지그문트의 글을 읽어 보고 안색이 싹 바뀌어 쥐를 맞이했다.

‘분명 빚을 탕감해 준다고 쓰여 있었지.’

회화까지는 어려워도, 요정족의 언어를 읽고 듣는 정도는 할 수 있다.

아무래도 필립이라는 엘프는 지그문트에게 큰 빚을 진 것 같았다.

지그문트는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을 감수하고 밤말을 듣는 쥐를 살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움직여 봐.

밤말을 듣는 쥐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다.

검게 변색된 팔은 원래의 피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놀랍군.’

필립이라는 엘프의 솜씨는 대단했다.

암국의 정보원이 마녀가 아니고서야 해주할 수 없을 거라고 단언했던 저주다.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으나, 필립은 썩은 살갗의 저주를 해주하는 데 성공했다.

-감사합니다. 좋습니다.

-간단한 말 정도는 할 수 있나 보군.

-듣는 거, 합니다.

-그래? 그럼 이 늙은이 푸념 좀 들어 주겠나?

약재를 정리하던 필립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내가 왜 해주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밤말을 듣는 쥐는 조용히 필립의 말을 기다렸다.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립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손목을 내밀어 보였다.

인위적인 검은 선이 팔찌처럼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

-저주 때문일세.

-아직? 어째서?

-나도 수십 년 동안 해주하려고 했어. 하지만 실패했네. 그만큼 지독한 저주지.

해주할 수 없다던 썩은 살갗의 저주도 쉽게 해주해 버린 필립이다.

도대체 누구기에 그도 해주할 수 없는 저주를 걸었단 말인가.

필립의 눈에는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들어찼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네. 기억을 지우는 저주거든.

필립은 소매를 다시 올렸다.

쿰쿰한 곰팡내와 먼지로 들어찬 집을 둘러보았다.

도저히 누군가 사는 곳으로 보이진 않았다.

-지금은 이렇게 살고 있지만, 한때는 가족이 있었어.

-가족? 저주?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지. 그 벌로 받은 것이 이 저주일세.

필립은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감았다.

-나는 내 가족을 기억하지 못하네. 어렴풋이 아내와 아들이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책상을 툭툭 친 필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통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네. 이름도 마찬가지야.

손목을 움켜쥔 필립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마 아들은 다 컸을 테지. 내가 모르는 손자나 손녀가 있을지도 모르겠구먼.

* * *

마리나는 뒤늦게 광장에 도착했다.

원념을 받아들이고 한동안 정신을 잃었다.

일어나 보니 저주를 알려 주겠다던 할머니, 마녀는 어디로 가고 없었다.

“헉, 헉.”

대뜸 단이 리옐을 데려가는 바람에, 급하게 따라왔다.

마리나도 달리기에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매일 훈련을 겸해 달리는 단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리옐 님?”

“마리나? 어떻게?”

“단 님, 저게 뭐죠?”

사제들이 검은 연기를 둘러싸고 있다.

리옐은 그 앞에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리나는 마기를 보자마자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저거, 위험한 거 아닌가요?”

“도련님이 저 안에 계십니다.”

한 사제가 인상을 찡그렸다.

얼굴 위로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리처드! 더는 무리입니다! 봉인해야 합니다!”

“봉인? 그게 무슨……!”

“이게 퍼져 나가면 시노드 교구의 모든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안에 도련님이 계시다고요!”

하늘을 보던 리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리나와 리옐의 눈이 마주쳤다.

“언니!”

“네?”

“언니구나!”

리옐은 마리나에게 다가와 손을 잡아끌었다.

마리나는 영문도 모른 채 리옐에게 이끌렸다.

리옐은 마리나를 마기 앞으로 데려왔다.

“마리나 언니.”

“네, 리옐 님.”

“손.”

리옐은 마리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리나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리옐은 마리나의 손목을 감싼 엘프의 팔찌에 손을 올렸다.

“언니가 나 대신, 저거 없애야 돼.”

리옐은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엘프의 팔찌에 생기가 들어찼다.

가지 위로 은은한 빛을 바라는 푸른색 나뭇잎이 피어났다.

세계수의 나뭇잎과 비슷한 색이었다.

“한계입니다!”

“신호와 함께 일제히 봉인 시작하겠습니다! 준비하십시오!”

신성력의 장벽이 위태롭게 부풀어 올랐다.

마리나는 화들짝 놀랐다.

뜨거운 힘이 손목부터 올라와, 심장까지 닿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지?”

“어, 어떻게 하면 되나요?”

“화악해서 파앗 하면 돼.”

“화악해서, 파앗?”

리옐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입으로 겨우 숨을 내뱉었다.

신성을 다루는 요령이 부족한 탓이었다.

“리옐 님!”

리옐은 풀썩 마리나의 품으로 쓰러졌다.

마리나는 신성력의 장벽을 뚫을 듯 팽창한 마기를 바라보았다.

사제들이 악을 썼다.

“준비!”

마리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리옐의 설명은 아주 아이다웠다.

그렇기에, 신성력의 사용법에 대해 전무한 마리나에게는 와닿았다.

‘화악해서, 파앗……!’

신성력의 장벽이 허물어지며 마기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화악 빛이 터져 나왔다.

* * *

“쿨럭.”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비릿한 느낌.

나는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 냈다.

검게 죽은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방심했어.’

조금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지 못한 건 아니다.

하지만 부패한 성유물인 만큼,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부패한 성배를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나는 숨을 내뱉었다.

‘이 몸은 마기에 면역이 없으니, 자칫하면 죽었겠군.’

긴 시간을 들인 끝에, 체내로 들어온 마기는 어떻게든 걷어 내긴 했다.

파울이 오러를 사용해 취기를 연소시킨 것에서 힌트를 얻었다.

나는 검게 죽은피를 내려다보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신성이 제멋대로 보호해 주고 있긴 한데.’

빛의 장벽이 마나 아머(Mana Armor)처럼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내 몸 언저리만 겨우 덮을 수 있을 정도로 미약했다.

아무래도 이걸 믿고 움직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마나가 있었다면 어떻게든 대처하겠는데.’

체내에 들어온 마기를 몰아내느라 꽤 많은 마나를 소모하고 말았다.

마기가 얼마나 퍼져 있는지 모른다.

섣불리 움직이는 건 피해야 했다.

마기의 영향인지, 리에이트와의 연결도 끊어졌다.

“쯧.”

목오의 신성을 쓸 수 있었다면 이 정도 마기는 정화시킬 수 있을 텐데.

이놈의 신성은 도통 내 말을 듣지를 않았다.

마나를 다루는 요령도, 오러를 다루는 요령도 소용없었다.

도도하게 비협조적으로 구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 말 좀 듣지?’

몸을 둘러싸고 있던 신성의 장벽이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뭐라고 했다고 이러는 건가.

“빌어먹을.”

나는 혀를 찼다.

목걸이, 기억의 마석에 손을 올렸다.

여기서 쓰기는 조금 아깝긴 하지만, 목숨은 건져야 했다.

그때, 발바닥에서 무언가가 움트는 것이 느껴졌다.

발을 들어 보니, 나뭇가지 같은 것이 바닥 틈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화악!

청량한 풀내음과 함께, 빛이 터져 나왔다.

나뭇가지는 마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탁한 안개가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나뭇가지 속으로 사라진다.

‘이건, 세계수?’

이윽고, 마기가 완전히 사그라지며 시야가 확보됐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사제들이 보였다.

“도련님!”

리옐을 안아 든 마리나도 있었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단이 달려와 내 몸을 샅샅이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멀쩡해.”

“이 피는?”

내가 바닥에 쏟아 냈던 피가 눈에 들어왔다.

마기를 머금어 검게 물들었던 피는 붉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리옐이 신성을 발휘한 건가?’

리옐은 마리나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저 상태로 힘을 썼을 리는 없다.

아니, 리옐이 이렇게 신성을 다뤘을 리가 없다.

리옐은 여태껏 몇 번이고 힘을 발휘했지만, 대체로 무의식적인 경우였다.

자신이 쓰고자 해서 쓴 것이 아니었다.

“마리나. 너?”

마리나의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째 눈동자 색이 리옐과 같은 에메랄드 색이었다.

눈을 깜빡이자,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잘못 본 건 아닐 것이다.

리처드가 앞으로 나섰다.

“클레이먼은 어디 있습니까?”

“저기.”

나는 단상 뒤쪽에 널브러진 것을 가리켰다.

새까만 덩어리 하나가 있었다.

마기를 흡수했음에도 인간의 형체조차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발치에 있던 나뭇가지를 마법으로 꺾어, 조심스럽게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피해는, 예상보다 적은가.’

클레이먼 휘하의 병력 일부가 마기에 죽었다.

딱 그 정도였다.

이 정도로 농축된 마기가 폭발한 것치고는, 적은 피해였다.

자칫하면 시노드 교구 전체가 휘말릴 수도 있었다.

‘잠깐. 그게 부패한 성배가 아니었다면…….’

이 마기는 부패한 성배의 힘이 아니었다.

리에이트가 말하길, 클레이먼이 가지고 있던 것은 부패한 성배가 아니라고 했다.

즉, 의도된 함정.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나는 차분히 상황을 되짚었다.

‘클레이먼이 부패한 성배를 화형식 전에 누군가에게 넘겼다?’

클레이먼의 수준을 고려하면, 가장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마녀를 데리고 다니며 부패한 성배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고 받았어야 했다.

마리나와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여관에 두고 온 것이 잘못이었다.

“마리나.”

“네. 도련님.”

“네 할머니, 지금 어디 있어?”

* * *

남자는 어둠을 보았다.

아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녀의 저주에 의해 시각을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것은 시각뿐만이 아니었다.

청각, 촉각, 온갖 감각들이 서서히 무뎌지고 있었다.

까악.

선명하게 들려오던 까마귀 울음소리는 이제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홀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무섭군.’

모든 감각을 차단당한 상태.

지금 남자는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미 죽었을 수도 있었다.

‘이게 마녀의 저주인가.’

난생 듣도 보도 못한 저주다.

만약 평소였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피식 웃었다.

마녀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내게 부패한 성배가 있다는 것을, 잊은 건가?”

청각이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분명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성배가 들어 있는 함의 촉감이 느껴졌다.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마녀.”

까마귀, 후닌이 고개를 까딱였다.

마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좀도둑 주제에 자신만만하구나.”

“그쪽이야말로, 정상적인 상황은 아닐 텐데.”

남자는 손을 쥐었다 폈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감각이 돌아온 것을 확인했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공기를 만끽했다.

그리고 후닌을 올려다봤다.

“어제, 불사의 신자들과 정면으로 충돌했다는 걸 모를 것 같나?”

마녀는 이미 상당한 힘을 소모했다.

더군다나 거리 한복판에 있는 만큼, 규모가 큰 저주는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온화한 성격상, 무고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싶나?”

“어떤 저주를 내린다고 한들, 큰 의미는 없을 것 같은데.”

“어쩔 수 없군. 이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남자는 긴장했다.

마녀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꽤 큰 수를 사용할 생각인 것 같았다.

함을 움켜쥐었다.

후닌의 부리가 열렸다.

“너는 이제부터 눈을 깜빡이는 걸 의식하게 된다.”

“뭐?”

남자는 눈을 깜빡였다.

“숨 쉬는 것도 마찬가지고. 아, 혀의 위치는 신경 쓰고 있나?”

“이게 무슨…… 되도 않는 장난질이지?”

남자는 인상을 찡그렸다.

확실히 의식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짜증이 나긴 했다.

하지만 원래 상정했던 것을 생각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마녀는 끌끌 웃었다.

“재밌지 않나? 마녀가 아니라도 쓸 수 있는 저주라네. 성격 고약한 대마법사가 알려 줬지.”

“지금 나랑 농담하자는 건가?”

“누가 그러더군. 유쾌함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말이야. 끌끌.”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더 어울려 줄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장난스럽던 마녀의 목소리가 돌연 바뀌었다.

“그럼. 이제 죽게나.”

“뭐?”

방심하고 있던 남자는 이상한 쇳소리를 들었다.

머리 위에 있던 가게 간판이 아래로 기울었다.

쾅!

낙하한 간판이 남자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바닥에 박혔다.

눈치 빠른 남자가 피한 것이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젠장!’

남자의 등 뒤에서 견습 대장장이로 보이는 청년이 검을 한가득 들고 왔다.

쇠 부딪치는 소리에, 남자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청년은 바닥에 있던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어, 어!”

수십 자루의 검이 허공을 날았다.

모든 검의 칼끝이 절묘하게 남자를 향했다.

남자는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렸다.

캉! 카캉!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견습 대장장이가 놀라 달려왔다.

“죄, 죄송합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꺼져!”

“힉.”

신경질적인 남자의 대응에, 청년은 검을 주워 도망쳤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후닌을 올려다봤다.

마녀는 천연덕스럽게 평했다.

“우연이군.”

“질 나쁜 장난을!”

“장난이라니. 자네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건 진짜 저주라네.”

“뭐.”

“손목을 보게, 표식이 있을 테니.”

남자는 손목을 확인했다.

검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일상 속에서 오는 위협.’

끔찍했다.

만약 이 저주가 계속 유지된다면.

잠을 잘 때도 마음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다.

“특별히 공 들여서 걸었다네. 영광으로 알게나.”

남자는 혀를 찼다.

되도 않는 장난질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저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들었던 대로, 약은 면이 있었다.

“아마 벗어나려면 고생 깨나 할 게야.”

저주를 끊는 방법은 둘이었다.

첫 번째는 해주.

오감을 지우는 저주는 어떻게든 성배의 힘으로 해주했다지만.

이번 건 여간 공을 들인 것이 아닌지, 어쭙잖은 힘으로는 해주가 안 됐다.

‘두 번째 방법이 남았다.’

저주를 끊는 두 번째 방법.

저주를 건 술자를 죽이는 것.

남자는 부패한 성배가 들어 있는 함을 열었다.

“후닌!”

여유롭던 마녀의 목소리가 굳었다.

날아오른 후닌이 남자를 향해 수직으로 급강하했다.

남자는 기어코 함에서 부패한 성배를 꺼내고야 말았다.

공중에서 정지한 후닌은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녕 네놈이 미쳤구나?”

남자는 부패한 성배를 들어 올렸다.

눈동자가 좌우를 살폈다.

“저주 풀어.”

“성배부터 내려놓아라. 그러면 저주는 풀어 주마.”

“아니. 저주를 푸는 것이 먼저다.”

“그것을 사용한다면 네놈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죽는 것보단 낫지.”

남자의 눈에는 의지가 가득했다.

마녀는 신중을 기했다.

적어도 지그문트 마이어가 합류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했다.

자칫하면 시노드 교구 일대에 사는 모든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다.

“저주, 풀어 주마.”

마녀는 차분히 남자를 설득하기로 했다.

남자는 부패한 성배에서 손을 떼지 않고, 후닌을 주시했다.

잠시 정적이 흘러간 후, 마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완벽히 해주했다. 그러니, 일단 그것을 내려놓도록.”

“그래? 확실한가?”

“손목을 봐라.”

남자는 자신의 손목을 확인했다.

표식이 사라져 있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남자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이것이 내 도주 경로다!”

텔레포트 스크롤.

팔베르크 제국과 연결된 물건이었다.

남자는 스크롤을 쭉 찢었다.

“응?”

하지만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남자는 당황했다.

‘찢자마자 이동되어야 정상인데?’

오작동은 있을 리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 철저한 성격의 대마법사가 만든 물건이니까.

그때, 남자의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쌩쇼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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