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134)

5

쌍방 탈취

“도련님?”

“마리나?”

하얀 얼굴 때문에 눈 밑으로 드리운 다크서클이 도드라져 보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조금 야윈 것 같기도 했다.

팔목에는 엘프의 팔찌가 있었고, 석궁도 목오 사막에서 얻은 그것이었다.

마리나가 분명했다.

“구하러 오신 건가요?”

“아니. 나도 잡혔어.”

“네? 설마, 그런 일이!”

“농담이야.”

정말 상상도 못 한 정체가 아닐 수 없었다.

애가 연락이 없어서 뭔 일이 있나 싶었는데.

여기에 잡혀 있었던 건가.

인상을 찡그렸다.

“너, 분명 위독하신 조부모를 뵈러 간다고 하지 않았냐?”

머릿속에서 종이 쳤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퍼즐 조각 하나를 주운 기분이었다.

‘그 위독하신 조부모라는 게, 설마…….’

마녀라면.

혼란스러운 표정의 마리나는 천천히 석궁을 아래로 향했다.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할머니를 뵈러 가는 도중에, 갑자기 잡혀서.”

“그놈들이 너보고 뭐라고 하든?”

“무슨 마녀의 손녀라고…….”

“환장하겠군.”

왜 이리 연락이 없나 했다.

원래 마녀의 거처였던 북쪽으로 헛걸음했다가 교국까지 내려온 모양이었다.

이후에 잡혔으니, 통신구는 사용하지 못했을 테고.

즉, 마리나는 마녀의 손녀가 분명했다.

‘평범한 삶을 살고 있을 거라더니.’

확실히 한 가문의 시녀로 평범하게 살고 있던 마리나였다.

나랑 엮이면서 조금 특이한 삶이 됐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시노드 교구에서 리옐이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고 했다.

그때 납치당한 것이 마리나였단 말인가.

“리옐 님과 단 님도 여기 계신가요?”

“그래. 일단 나가서 얘기하지. 잡아.”

블링크(Blink)를 사용해 감옥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마주한 광경에, 나는 곧바로 인식 방해(Disturb Realization)를 사용했다.

수십 명의 복면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리는 할 수 있겠지만.’

시간을 너무 끌면 성기사들까지 올 수 있었다.

마리나는 불안한 시선을 보내왔다.

나는 주위를 살폈다.

“그거 알고 있나?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 법은 두 가지가 있다는 거.”

복면인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도망칠 구멍이 없는 막다른 길.

천천히 조여 올 생각인 것 같았다.

상대가 어떤 수를 쓸지 모른다면, 좋은 판단이었다.

서두르는 것은 일을 그르칠 확률이 높으니까.

하지만 마법사가 상대라면, 안 좋은 판단이다.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거고, 다른 하나는…….”

발로 땅을 쳤다.

마나가 바닥을 파고들었다.

지하 통로가 조금 흔들렸다.

쿵!

월 오브 스톤(Wall of Stone).

아래에서 거대한 벽이 솟아나, 우리와 복면인을 갈라놓았다.

디그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가 끼어 있지 않는 한, 시간 좀 걸릴 것이다.

벽 너머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다른 하나는 뭔데?”

“지금 그게 중요하냐!”

대답할 의무는 없었다.

이제는 탈출만 하면 된다.

위를 올려다봤다.

적과 갈라지긴 했지만, 이래서야 스스로를 가둔 꼴이었다.

바깥이 보이지 않으니 블링크(Blink)는 불가능하다.

‘걸어서 나가는 수밖에.’

벽에 손을 얹었다.

디그(Dig) 변환 마법, 비상구(Emergency Exit).

끼익.

벽 위로 문이 생겼다.

저절로 열린 문 너머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가자.”

“네? 아, 네!”

라이트(Light)의 빛무리를 앞세우고 비상구 내부로 들어갔다.

등 뒤의 문을 닫자, 문틈이 사라지며 자연스럽게 벽과 동화됐다.

아마 찾으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설령 찾는다고 해도, 비상구를 메워 버리면 그만이다.

계단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자, 머리 위로 문이 보였다.

‘괜히 언덕 위로 가서는.’

문을 열자, 소량의 흙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잔디 위에 문을 만든 거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클린(Clean)을 쓰니, 어떻게 알고 단과 리옐이 왔다.

“아빠!”

“도련님! 마녀의 손녀는…….”

둘은 마리나를 보고 멈칫했다.

마리나는 반가움 반, 어색함 반인 표정으로 인사했다.

“어, 오랜만이에요? 단 님. 리옐 님.”

“언니가 왜 거기서 나와?”

“그러게나 말입니다.”

단과 리옐은 설명을 요구하듯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라고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건 아니다.

거의 다 아는 거지.

“얘가 마녀의 손녀래.”

“네?”

“추적이 붙을 수도 있어.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일단 알겠습니다. 예정대로 마녀님과 합류하는 겁니까?”

“그래. 최대한 빨리 교국을 뜬다.”

최소 셋 이상의 세력이 부딪치고 있다.

리에이트 교국과, 암살자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복면인들.

불사의 신자들과 우리들까지 포함하면 난전이 될 확률이 높았다.

목표는 마녀와, 부패한 성배.

내 해결책은 간단했다.

‘다 들고 나른다.’

마녀는 부패한 성배에 걸어 둔 저주를 해주하기 위해 오두막에 남은 상태였다.

마녀와 합류해, 성배와 손녀에 마녀까지 전부 들고 나른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마녀와 합류할 필요가 있었다.

해후는 안전한 장소에서 나눠도 된다.

우리는 시노드 교구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 * *

수백 마리의 아그나들이 마녀의 오두막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지가 없는 괴물들이라기에는 너무 정갈한 모양새였다.

마치 누군가에게 명령이라도 받는 것 같았다.

아그작, 아그작.

큰 늪거미를 씹어 먹고 있는 놈도 있었다.

아그나 하나를 밟고 선 불사의 신자가 뒷짐을 진 채 앞으로 나섰다.

“부패한 성배만 내놓는다면, 순순히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네놈들 말을 믿을 성싶으냐?”

검은 안개에 의지한 마녀는 오두막 밖으로 나와 있었다.

안에 숨어 있다간 오두막을 무너트릴 수 있었기에, 불편함에도 움직인 것이다.

마녀는 불사의 신자를 노려보았다.

“네놈들에게 줄 건 없다. 썩 꺼지거라.”

“리에이트 교구에 잡힌 손녀의 행방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마녀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불사의 신자가 비릿하게 웃었다.

“이쪽에서 이미 인원을 투입한 상태입니다.”

음지에서 일하는 암살자들과, 돈만 주면 뭐든 하는 용병들이다.

그것도 꽤 알아주는 놈들이었다.

큰돈을 주고 고용한 만큼, 보안이 부실한 교화 시설 정도는 털고도 남을 전력.

“내가 손만 까딱이면, 죽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무사할 것이 뻔히 보이는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너만 사람을 보낸 줄 아느냐?”

어째선지, 마녀는 자신만만한 기색이었다.

불사의 신자는 내심 당황했다.

마녀를 돕는 사람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다.

“사람 하나 정도는…….”

“그래. 사람 하나지. 만약 누군지 안다면 그런 말은 못 할 테지만.”

불사의 신자는 마녀의 언변에 말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저었다.

마녀의 손녀를 이용해 마녀 본인과, 부패한 성배를 탈취한다.

만약 이것이 어렵다면, 두 번째 계획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말로 해결하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군요.”

“아이야, 내가 이런 생기다 만 것들에게 당할 것 같으냐?”

“숫자 앞에 장사 없는 법입니다.”

까마귀 한 마리가 마녀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검은 안개가 꾸물거리며 까마귀에게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몸집이 불어난 까마귀는, 오두막의 몇 배나 되는 크기의 괴물로 변했다.

불사의 신자는 그것을 올려다봤다.

‘저게, 후닌.’

가벼운 날갯짓에, 사기(死氣)를 흘리는 괴물.

날카로운 송곳 수십 개가 온몸을 찌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영광인 줄 알거라.”

후닌을 앞세운 마녀가 주름진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동작 하나에, 일대의 아그나 수십 마리가 돌처럼 굳었다.

쩌적!

“내 손에 죽는 것을.”

* * *

‘괴물이군.’

뒤로 물러선 불사의 신자는 생각했다.

마녀는 괴물이었다.

이미 들은 바 있지만, 실제로 보니 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우드득!

온갖 종류의 저주들이 아그나들을 덮쳤다.

땅에 파묻혀 버리거나, 썩고 곪아 버리는 것들도 있었다.

어째서 사람들이 적대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저 손 끝이 한 도시를 향하기라도 한다면, 재앙이 내릴 테니까.

까악!

후닌의 날카로운 발톱이 아그나들을 꿰뚫었다.

날갯짓 한 번에 나무가 부서질 듯 흔들렸다.

후닌을 앞세워 접근하는 것들을 막고, 뒤에서 저주를 내린다.

‘약점은 전면전이라더니.’

마녀의 약점은 전면전이다.

저주의 장점은 은밀한 것이 장점인 만큼, 앞에 나설수록 불리해진다.

그러나 마녀는 전면전에서도 충분히 강했다.

이미 수백 마리의 아그나가 무력화된 상태.

‘하지만, 숫자 앞에서 장사 없는 법이지.’

저주를 무한정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소모전으로 가면 무조건 이쪽이 유리하다.

아그나의 재생력과, 수를 믿고 밀어붙인 것이다.

‘하나 걸리는 점은, 마녀를 돕는 자가 있다는 건데.’

마녀의 손녀를 탈취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누군가.

마녀와 연결되어 있다면 예사 인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쪽도 꿇리진 않는다.

마녀에 의해 상당 수 줄긴 했으나, 아그나는 아직 많이 남았다.

‘뭐, 그자가 누구든 간에, 이 수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터.’

오히려 가세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자까지 제압해 낸다면, 자연스럽게 신자의 공적이 올라가는 셈이니까.

그때, 팽팽하던 전황이 기울었다.

“쿨럭!”

마녀가 각혈을 한 것이다.

저주는 기세를 잃었고, 자연스럽게 후닌에게 몰리는 아그나들이 많아졌다.

후닌은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다수를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상대가 죽여도, 죽여도 되살아나는 아그나였기에 더욱 그랬다.

“지금입니다!”

불사의 신자가 수를 꺼내 들었다.

오두막 위에서 대기하던 불사자 하나가 마녀를 덮쳤다.

순식간에 고개를 튼 후닌이 부리로 불사자를 콱 물어 버렸다.

그러나 등이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아그나들이 후닌에게 달려들었다.

‘저건 못 막는다.’

승기를 잡은 불사의 신자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겼다.

그렇게 생각했다.

변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웅.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로 거대한 중압감이 몸을 짓눌렀다.

불사의 신자는 눈을 돌렸다.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금발의 청년이 보였다.

기묘하게도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누구……?’

누군가 청년의 등을 받치고 섰다.

마치, 무언가를 준비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흰 장갑을 낀 청년은 오른손으로 왼팔의 팔꿈치 안쪽을 잡고 지지했다.

땅을 단단히 밟고 섰다.

청년의 입술이 달싹였다.

불사의 신자는 순간 잘못 들은 건 아닐까, 귀를 의심했다.

“드래곤 브레스(Dragon Breath).”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드래곤 브레스가 쓸고 지나간 자리 위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조건부 불사인 아그나라고 하더라도, 완전히 지워 버리면 재생할 수 없다.

아티팩트, 숨결은 한 쌍이 모두 아티팩트다.

이제 한참 동안 마나를 욱여넣어야 쓸 수 있겠지만, 아깝지는 않았다.

레온하트 왕국으로 가 발레리아에게 협조를 구하면 될 일이다.

나는 왼팔을 부여잡았다.

“아오, 아픈 거.”

용의 산맥에서도 느낀 건데, 숨결은 반동이 너무 강했다.

반쯤 재미 삼아 만든 것이라, 이런 부분은 솔직히 생각 못 했다.

마나 번을 사용했음에도 왼팔이 저릿했다.

특히 관절 부분에 무리가 많이 가는 것 같았다.

이러면 나중에 늙어서 고생하는데.

“날 잡아서 개선하든가 해야지. 원.”

“동감합니다.”

등을 받치고 있던 단이 동의를 표했다.

나는 왼손을 한 번 쥐었다 편 뒤, 주변을 살폈다.

멍하니 내게 시선을 고정한 불사의 신자 한 명이 보였다.

“용병을 고용한 것도 저놈들인가 보군.”

예상대로 마녀는 고전하고 있었다.

제때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마녀를 본 마리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 할머니?”

“맞나 보네. 오래 전에 의절했다며?”

“네. 그래도, 기억해요. 할머니가 맞아요.”

교국 측에서 사연만 비슷한 애먼 사람을 붙잡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리나는 마녀의 핏줄이 확실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젊었을 적의 마녀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열세에 몰리긴 했지만, 다행이 피해는 적었다.

마녀가 조금 안 좋아 보이긴 했지만, 다치진 않았다.

후닌을 덮치려던 아그나는 전부 쓸려 나갔으니.

“리옐. 마리나랑 같이 가서, 저 할머니 좀 돌봐 드려라.”

“응!”

“단, 지켜. 한 명도 죽게 하지 마.”

“알겠습니다.”

나는 이름 없는 검을 뽑아 들었다.

숨을 뱉자, 푸른 연기가 쏟아져 나왔다.

마나 번(Mana Burn).

* * *

지그문트를 확인한 마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리옐을 안아 든 마리나는 곧장 마녀에게 뛰어갔다.

발밑으로 나무뿌리가 길을 만들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할머니!”

마녀를 떠받치고 있던 검은 안개가 뒤로 물러났다.

마녀는 놀란 눈으로 마리나를 바라보았다.

“마리나? 마리나 맞으냐?”

“네. 저예요!”

“아이고, 요만한 꼬맹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다 컸누…….”

마녀는 겨우 손을 올렸다.

주름진 손이 마리나의 얼굴을 더듬었다.

“울기는 왜 울어. 예쁜 얼굴 못생겨진다. 이것아.”

마리나의 눈가에 핑 눈물이 돌았다.

거의 10년을 만나지 못한 할머니다.

서러운 점도 많이 있었다.

만나면 낯설거나 어색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니, 애틋한 마음만 가득했다.

혼자서 어떻게 버텨 온 걸까.

“할미가 미안하다.”

우물쭈물하던 마녀가 한숨을 토했다.

팔베르크 제국의 습격이 있고 난 후,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그 때문에 마지막으로 손녀 얼굴이 한번 보고 싶은 마음에, 편지를 보냈다.

“내가 너까지 위험하게 만들고야 말았구나.”

욕심이었다.

마녀는 크게 자책했다.

아마 앞으로 마리나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리에이트 교국은 마녀의 손녀라는 존재를 알게 됐다.

이미 얼굴도 팔렸을 확률이 높았다.

“이 할미가 가증스러우냐?”

“아니에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마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면서 지그문트가 말해 주길, 마녀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거의 편견이라고 했다.

그 덕분에 마리나도 자신의 핏줄에 대해 의연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마녀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할머니는 할머니인 걸요.”

“……고맙구나.”

마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 * *

쾅!

물벼락이 쏟아지며, 남아 있던 아그나들이 비명횡사했다.

지그문트 마이어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불사의 신자 쪽으로 걸어갔다.

푸른 숨을 내뱉으며 걸음을 내딛는 모습은 설화 속의 악귀와 같았다.

불사의 신자는 진저리를 쳤다.

“드, 드래곤이라니. 이런 얘기는 없었는데.”

늪지대의 일부를 소멸시켜 버린 압도적인 화기.

분명 그것은 드래곤 브레스였다.

불사의 신자는 지그문트를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라고 확신했다.

인간이 드래곤 브레스를 사용할 수는 없으니, 당연한 추론이었다.

‘승산이 있나?’

물 속성의 마법을 연달아 사용하는 걸로 보아, 아그나의 약점도 알고 있다.

지그문트는 여유로운 기색으로 잔당을 하나하나 베고 있었다.

‘있을 리가 없잖아!’

소드 마스터나 탑주를 데려와도 상대가 힘든 것이 드래곤이다.

어떤 경위로 리에이트 교국까지 내려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었다.

쿵.

중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도망칠 궁리를 하던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말로만 듣던 드래곤 피어가 확실했다.

실상은 비슷한 마법인 피어(Fear)였지만, 불사의 신자가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불사의 괴물을 따르는 추종자여.”

지그문트가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불사의 신자는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목소리에 서린 위엄이 느껴졌다.

진짜 드래곤이 아니고서야, 이런 자연스러운 위엄을 뿜어내긴 어려웠다.

대마법사나 그랜드 소드 마스터 정도라면 모를까.

“크아아아아아!”

불사자 하나가 이성을 잃고 지그문트에게 달려들었다.

아그나 고기를 먹은 인간, 불사자는 확실히 불사의 몸을 얻는다.

물론 디메리트는 존재했다.

불멸의 육신의 대가는 이성이었다.

불사자들 중 대부분은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드래곤 피어에 견디지 못하고, 이성의 끈을 놓은 건가!’

차라리 잘됐다.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계속 재생하는 불사자를 상대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틈을 타 도망치면 된다.

그런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서걱!

지그문트의 검이 불사자의 목을 잘랐다.

공중을 날던 머리가 다시 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곧바로 부여된 척력(Repulsive Force)에 의해, 재생을 실패했다.

간단하게 불사자의 재생을 파훼한 지그문트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 발을 들인 이유가 무엇이냐?”

“저, 저, 저는……!”

불사의 신자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마녀의 저항이 거셀 때를 대비해, 커다란 바위 뒤에 숨겨 뒀던 비장의 한 수.

그 한 수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바위는 이미 드래곤 브레스에 의해 사라진 후였다.

물론 비장의 한 수 또한 같이 사라졌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가까스로 진정한 불사의 신자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드래곤은 아까와 같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누르는 대신, 하나하나 정리 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질문을 했다.

즉, 교섭할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부패한 성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왜 찾는 것이지?”

“저도 자세한 건…… 히익!”

어물쩡 대답을 피하려던 불사의 신자는 기겁했다.

지그문트의 뒤로 아가리를 벌린 드래곤의 환영이 보였다.

실제로 지그문트가 일루전(Illusion)을 이용해 만든 연출이었다.

그것을 알지 못한 불사의 신자는 벌벌 떨며 바지를 더듬었다.

다행이 지리진 않았다.

“진짜 모릅니다! 저는 그리 고위직이 아니기에…….”

“불사의 교단에 전해라.”

지그문트는 뻔뻔하게 드래곤을 연기하며 불사의 신자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면, 그때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예, 옙!”

대답을 하기 무섭게, 불사의 신자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시야가 뒤집히며, 시노드 교구 외벽 인근에 떨어졌다.

쿵!

땅바닥에 머리를 박은 불사의 신자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사, 살았나?”

드래곤은 매우 오만하며, 즉흥적이라고 들은 적 있다.

아마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것 같았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드래곤에게 물려 가면 정신을 차려도 죽는다는 말이 있다.

그는 억세게 운이 좋은 편인 것 같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교단에 이 사실을 알려야…….’

불사의 신자는 헐레벌떡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지그문트는 신자를 순순히 놓아준 것이 아니었다.

신자의 팔목에 들러붙어 있던 팔찌 모양의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어?’

이질감을 느낀 불사의 신자가 손을 들었다.

그러나 손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손으로 쓸어 봐도 느껴지는 건 없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신자는 다시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는 끝까지 몰랐다.

투명하게 변한 페러시트, 실험체 17호가 팔목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 * *

불사의 교단 측에서는 아마 좀 혼란스러울 것이다.

뜬금없이 드래곤이 나타났을 거라고 착각할 테니까.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서대륙의 일에 개입할 수 없는 드래곤이다.

내 정체를 밝히려면 고생 깨나 할 거다.

‘물론 고생해도 못 밝히겠지만.’

나는 불사자들을 처리한 뒤, 검을 닦고 오두막 쪽으로 걸어갔다.

마녀가 다치진 않았을까 살피던 마리나가 나를 발견했다.

“도련님!”

“도련님이라고?”

마녀는 눈을 끔뻑이며 나와 마리나를 번갈아 보았다.

나는 시선을 피했다.

마리나는 뒤늦게 자신이 마이어가의 시녀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마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윌리엄. 그 노친네가…….”

“윌리엄?”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윌리엄.

마이어가의 집사장 아닌가.

라스 마이어의 측근이자, 시종들에게 무기를 가르치는 이상한 노인.

평범한 인물은 아닐 거라고 예상했다만, 마녀와 연관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가만히 마녀를 응시했다.

“윌리엄이 왜 나와?”

“그놈에게 마리나를 맡겼거든. 굳이 따지자면 마리나에게는 대부쯤 되겠구나.”

“그랬어?”

“네. 그렇게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요.”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마리나를 보면 알 수 있었지만, 한때 마녀는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 좋다고 따라다니던 엘프가 하나, 인간이 하나 있었는데.

그중 인간 쪽의 나이를 생각하면, 대충 지금 윌리엄 정도 나이의 노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게 윌리엄이었구나.’

오래된 기억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그렇다면 윌리엄과 마리나는 친족인 걸까.

나는 궁금한 마음에 마녀에게 샌딩(Sending)을 보냈다.

-그럼 얘 할아버지가 윌리엄이냐?

마녀는 나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환장할 노릇이다.

마녀는 전성기 때 도대체 뭘 하고 다녔던 걸까.

별로 깊게 파고들고 싶지는 않았다.

자리를 정리했다.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고, 일단 자리를 뜨지.”

이만한 소란이 일었으면, 교국 측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인식 방해로 얼굴은 가리고 있더라도, 사제들은 영 상대하기 껄끄럽다.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왜?”

마녀가 딴죽을 걸었다.

영 면목이 없다는 표정으로 오두막 쪽을 바라보았다.

“놈들이 부패한 성배를 가져간 것 같거든.”

* * *

“요즘 들어 검문이 철저해졌군.”

“마녀가 사라졌다고 하잖냐. 교구로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줄이 더럽게 길어진 건 어쩌고?”

시노드 교구, 광장.

분수대 앞에 모인 사람들이 수다를 떨었다.

리처드는 매우 음침한 표정으로 분수대 앞에 서 있었다.

팅.

던진 동전이 분수대 중앙의 동상에 맞고 떨어졌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 성기사님, 왜 저러나? 완전히 넋을 놨구먼그래.”

“몰라. 아침부터 저러더라고.”

물속으로 잠기는 동전을 보며, 리처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녀의 손녀를 탈취 당했다.’

이미 교구 전체에 화형식에 대해서 떠들어 댄 클레이먼 주교는 노발대발했다.

고용된 용병들이 마녀의 손녀를 빼돌렸기 때문이다.

제압은 성공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죽어 버렸다고 한다.

즉, 마녀의 손녀는 사실상 행방불명이었다.

팅.

힘없이 날아간 동전은 또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넋을 놓고 동전을 던지던 리처드는 클레이먼 주교의 명령을 떠올렸다.

-여자 하나, 사 와.

-잘못 들었습니다?

-일단 마녀의 손녀라고 둘러대기라도 해야 될 거 아니냐.

-그렇다고 무고한 사람을 화형시키는 건……!

-됐다. 내 눈앞에서 꺼져. 내 밑에 있는 놈이 너뿐인 줄 아냐?

이를 악문 리처드는 들고 있던 동전을 한 움큼 분수대에 던졌다.

구멍에 들어간 동전은 하나도 없었다.

전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질 뿐이었다.

교화 시설에서 만난 사제의 조언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신은 간절한 기도에도 대답이 없었다.

“후.”

그런 리처드의 눈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리처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신은…….”

리처드의 앞으로 걸어온 것은 사제복 차림의 남자였다.

절묘하게 역광을 받고 있어, 눌러쓴 모자 그림자에 얼굴이 가려졌다.

하지만 리처드는 알 수 있었다.

교화 시설 예배당에 있던 그 사제가 분명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특이한 분위기 같은 것이 있었다.

“그때 그 사제님. 맞으시지요?”

사제로 변장한 지그문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그문트의 시선이 잠깐 분수대에 머물렀다.

수백 개에 이르는 동전이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세상만사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법이지요.”

지그문트는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보이스 체인지(Voice Change)에 연기를 섞었을 뿐이지만, 매우 그럴싸했다.

리처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리에이트 님께 물어보시지요.”

“수백, 수천 번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감정이 격양된 리처드가 울분을 토해 내듯 말했다.

지그문트는 가만히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스스로 화를 식힌 리처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리에이트께서는 단 한 번도 제 기도에 응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갈라져 있으니까요. 당연한 일입니다.”

뜬금없는 소리에, 리처드는 눈을 깜빡였다.

지그문트는 리처드에게 뭔가를 쥐여 줬다.

마치 리처드가 클레이먼의 시녀에게 도망치라며, 동전을 쥐여 줬을 때처럼.

“이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작은 행운.”

리처드는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평범한 동화 한 닢이 올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 하지요.”

“자, 잠깐!”

이상함을 느낀 리처드가 손을 뻗었지만, 지그문트는 사라지고 말았다.

블링크(Blink)를 사용한 연출이었다.

혼자 남은 리처드는 멍하니 지그문트가 있었던 자리를 내려다봤다.

‘신의 사도인가?’

마나를 느끼지도 못하는 리처드가 그것이 블링크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지그문트는 블링크를 매우 교묘하게 사용했다.

블링크를 사용할 때 남는 특유의 빛을 모조리 제거한 것이다.

그 때문에, 지그문트는 공간에서 지워진 것처럼 보였다.

‘모르겠다.’

남은 것이라고는 손바닥에 올려진 동전 한 닢뿐이었다.

리처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제, 지그문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작은 행운이라 했지.’

분수대의 구멍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저 안에 동전을 던져 넣으라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그러나 리처드는 어쩐지 자신감이 생겼다.

휙.

동전이 손을 떠났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동전은 신상에 맞고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아.’

위로 한 번 튕긴 동전이 공중에서 회전했다.

중력에 의해 낙하한 동전은 빨려 들어가듯 구멍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미 안에 있던 동전들과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리처드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들어갔다.’

리처드는 잠시 기다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빛이 그를 감싸 안지도 않았고, 믿음이 충만해진 것도 아니다.

어깨를 늘어트린 리처드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광장의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만 귓속으로 파고들 뿐이었다.

-저, 저, 저, 두꺼비 같은 놈을 잡아다가 오장육부를 고스란히 뽑아서…….

어디선가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한 미성이 들려왔다.

유독 또렷하게 들리는, 아름다운 목소리.

문제는 목소리의 주인이 입에 담기도 어려운 욕설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황한 리처드가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주변에는 그런 심한 욕설을 내뱉는 사람이 없었다.

‘누, 누구지?’

이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증오심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영혼을 똘똘 말아다가 우주에 데려가 블랙홀에 백만 번 담금질을…….

머리 위.

목소리는 분명 위에서 들려왔다.

리처드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른 하늘 위로 하얀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리에이트 님?”

의문이 가득 담긴 작은 중얼거림.

누군가를 대차게 욕하던 목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어색한 정적이 지나가고,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아, 제 충실한 종, 리처드여.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성스럽게 울리는 목소리.

리처드의 입이 벌어졌다.

눈은 찢어질 듯 커졌고, 감격에 목이 메었다.

‘정말 리에이트 님이란 말인가!’

동전을 쥐여 준 사제는 정말 신의 사제가 분명했다.

리처드는 경건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들립니다. 선명하게 들립니다!”

리처드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정작 리에이트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언제 연결됐지? 혹시 제가 한 말 들으셨나요?

리처드는 잠시 고민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잊으려 해도 뇌리에 박혀 좀처럼 잊히지 않는, 구수하고 참신한 욕설을.

리처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신께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드, 들었습니다.”

-아, 젠장.

* * *

“부패한 성배가 교구 내에 있는 게 확실한가?”

“내 실력을 못 믿는 거냐?”

나는 시선을 돌렸다.

개구리 한 마리가 마리나의 머리에 앉아 있었다.

“에잉, 저주는 나보다 못한다더니, 말로만 그냥…….”

개구리의 입에서 마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스로에게 저주를 걸어, 개구리로 모습을 바꾼 것이다.

물론 지능은 그대로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풀리는 저주였다.

덕분에 시노드 교구 내부로 편하게 들어올 수 있었다.

“그래도 일단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게 먼저잖아.”

불행 중 다행으로, 부패한 성배에는 마녀가 조취를 취해 놓은 상태였다.

저주를 통해 위치를 추적할 수 있었다.

문제는 마녀에 말에 의하면, 부패한 성배가 시노드 교구 내부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황이 꼬인다.

‘성배를 탈취한 세력이 불사의 신자들이 아닌 제3의 세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장 리에이트 교국도 부패한 성배를 찾고 있었고.

큰 의미를 가지는 물건인 만큼, 존재를 안다면 눈독 들일 세력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교구 내부로 들어왔으니, 리에이트 교국 측에서 탈취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직접 보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다.

“확인한 뒤에는? 어떻게 할 겐가?”

“어떡하긴 어떻게 해. 쌔벼야지.”

“조금 더 고상한 표현 없나?”

“도둑질을 고상하게 할 필요는 없잖아?”

마녀는 분수대 앞의 리처드에게 눈을 돌렸다.

“저 성기사는?”

“혁명의 불씨.”

“또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군.”

“사람을 그렇게 음침하게 표현하지 말아 줄래?”

“내 평생 살면서 너 같이 속 시커먼 놈을 못 봤다.”

“하하…….”

마리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조모와 고용주가 투덕거리니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연결은 된 것 같은데.’

무릎을 꿇은 리처드는 하늘을 향해 뭐라 말을 걸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딱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젊은 사람이. 쯧쯧.”

“여보,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불쌍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리처드는 개의치 않았다.

그토록 찾던 신을 만났는데, 그런 시선 따위가 느껴질 리 없었다.

‘리에이트가 내 생각대로 움직여 준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리에이트는 필시 엉망이 된 교국을 바로 잡으려 할 것이다.

메리트는 확실히 있다.

팔베르크 제국이 마족과 연관된 것이 확인된 만큼, 그 대항마를 키워 둘 필요가 있었다.

레온하트 왕국만으로 팔베르크 제국에, 마족까지 상대하는 건 벅찼으니까.

왕국이 안정된 만큼 다른 나라에도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성배의 정확한 위치는 가늠할 수 없나?”

“시노드 교구 내부로 들어온 뒤, 파악이 불가능해졌다네.”

마리나의 머리에 앉은 마녀는 턱을 괴고 고민했다.

개구리가 저러니 뭔가 묘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저주가 들지 않는 신성한 장소라는 뜻이지.”

“신전?”

“아마 성역은 아닐 테니. 그럴 확률이 높겠지.”

“씁. 신전 터는 건 좀 빡셀 것 같은데.”

서풍과 스케일이 다른 얘기다.

성기사들도 다수 포진하고 있을 뿐더러, 자칫하면 이교도로 몰릴 수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 도망자 신세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안 턴다고?”

“그런 말은 안 했고.”

* * *

“사실이었을 줄이야.”

클레이먼 주교는 책상에 올려진 검은 성배를 가만히 지켜봤다.

리에이트 교국의 고위직들 사이에서 떠도는 이야기였다.

어느 날, 성배가 부패했다.

흉조(凶照)라 여긴 중앙 신전에서는 이를 은폐했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부패한 성배는 도난당했다.’

중앙 신전에서 엄중히 관리되던, 교국의 치부.

사실을 알게 된 상부는 당연히 발칵 뒤집혔다.

한데, 설마 그것을 훔친 것이 마녀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찰 삼아 보낸 놈인데 말이야.’

클레이먼 주교의 시선이 앞으로 옮겨 갔다.

입꼬리를 씰룩이고 있는 병사 하나가 있었다.

대단한 공적을 세웠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는 혼란을 틈타 부패한 성배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잘했네. 내 자네의 공을 잊지 않을 거야.”

자리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킨 클레이먼 주교는 직접 병사에게 다가갔다.

병사는 화색이 됐다.

클레이먼 주교는 병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푹!

돌연 목 언저리에서 느껴진 뜨거운 감각에, 병사는 눈을 돌렸다.

클레이먼 주교의 단검이 병사의 목에 박혀 있었다.

병사의 동공이 풀렸다.

풀썩 쓰러진 병사를 내려다본 클레이먼 주교는 쪼그려 앉았다.

병사의 옷으로 단검을 슥슥 닦았다.

‘그럼, 이걸 어디다가 쓸까.’

부패한 성배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했다.

잘만 하면 리에이트 교국을 파멸에 이르게 만들 수도 있는 물건.

단순히 확보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비장의 패가 될 수 있었다.

“리처드!”

클레이먼은 습관적으로 리처드를 찾았다.

그러나 리처드는 응답하지 않았다.

비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신, 다른 성기사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성기사는 죽은 병사를 보고 잠깐 움찔했다.

“그래. 누구든 간에, 저거 치워. 청소도 하고.”

“네, 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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