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50/134)

3

해치지 않아요

“틀림없습니다. 마족입니다.”

성기사의 확신에 찬 말에, 요안이 턱짓했다.

사제들이 구속당한 마족을 둘러싸고, 두 손을 모았다.

기도를 시작하자, 빛이 마족의 몸속에서 터져 나왔다.

우우웅!

앞에 있던 리옐의 눈을 손으로 덮었다.

마족이 산 채로 불타는 것은 썩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지금 사제들은 마족에게 신성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상극의 기운을 억지로 밀어 넣는 것이다.

이미 오러가 담긴 심장에 마나 서클을 만드는 것과 같다.

당연히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키게에엑!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마족이 불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에는 한 줌의 재만 남았다.

한 사제가 작은 함을 들고 와 재를 쓸어 담았다.

요안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중하급 마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상자가 하나도 없다니, 기적입니다.”

성기사들 중 일부가 창에 찔리긴 했으나, 사제들의 신성력으로 치료를 마쳤다.

조종당하던 민간인들도 전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요안은 내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모두 마이어 공 덕분입니다.”

“저는 한 일이 없습니다. 아티팩트 하나 사용했을 뿐.”

내 공적이라고 해 봐야 서로 죽이려던 사람들을 정지시킨 것이 전부다.

대충 기억을 보여 주며 아티팩트로 한 일이라고 얼버무렸다.

사실 홀드(Hold)를 다중으로 사용한 것이었지만.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진 않았다.

다행히 집행자들은 나를 완전히 신뢰했고, 내 말도 곧이곧대로 믿었다.

“아티팩트에는 사용 횟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요안의 시선이 내 목에서 머물렀다.

아티팩트를 사용한 것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값나가는 종류의 아티팩트는 백금화 단위로 나가니, 그럴 수도 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실제로 아티팩트를 사용한 건 아니기에,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집행자들이 숨을 삼켰다.

요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나는 겸손한 척 공을 돌렸다.

“저보다는 단이 중요한 일을 했지요.”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록벨런 님.”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단은 ‘우연찮게’ 마족을 발견했다.

빙의 중이던 마족은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에,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는 설정이었다.

연기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단이기에, 집행자들을 잘 속여 넘겼다.

기사 중에는 기감이 이상하리만치 발달한 이들이 종종 있다.

그런 이들이 마족을 발견하는 것은 때때로 있는 일이다.

“리에이트께서 저희를 보고 계신가 봅니다.”

이후로는 겸손과 칭찬, 사랑으로 가득 찬 대화가 오고 갔다.

연기라지만 어울리려니 죽을 맛이었다.

이윽고 요안은 고개를 돌렸다.

하멜의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희는 이만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쉽군요.”

“저야말로 아쉽습니다. 오늘 떠난다고 하셨지요?”

“예. 오늘 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가시는 길에 빛이 함께하길 빌겠습니다.”

요안과 집행자들은 하멜 왕성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 달라 부탁했으니, 언급은 자제할 것이다.

저들이 떠나기 전에, 한 가지 할 일이 있었다.

“요안 님.”

요안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주먹을 쥐어 보였다.

“임무, 힘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끝까지 훈훈하게 헤어졌다.

집행자들이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계획대로다.

“하멜에서 마족 조사에 조금 시간을 쓰겠지만, 이 정도면 됐어.”

트리옌 왕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든 완만하게 넘어가려고 할 것이다.

아마 뒷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집행자들을 보호할 거고.

적어도 팔베르크 제국에 가기 전까지 집행자들은 안전할 것이다.

“수고했다. 단.”

“저는 리옐 아가씨 말씀대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마족의 위치를 밝혀낸 것은 리옐이었다.

확실히 공을 세우긴 했다.

리옐은 제 머리를 불쑥 들이밀었다.

“아빠, 나도 칭찬!”

“그래. 잘했어.”

머리에 손을 얹어 주니, 헤헤 웃으며 좋아한다.

솔직히 귀엽긴 했다.

* * *

“찾았습니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리에이트 교국.

시노드 교구(敎區)의 주교 클레이먼은 흡족하게 웃었다.

보고를 올리던 성기사는 슬쩍 시선을 올려 클레이먼을 바라보았다.

금으로 만든 장신구가 두꺼운 팔목을 감싸고 있다.

사제복 대신 값비싼 정장을 입었다.

주교보다는 졸부나 귀족에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잡아오도록.”

“예?”

“반항해도 건드리지는 말고. 아, 예쁜가?”

“……뒷모습만 봤기에,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 뭐, 내가 직접 판단하면 될 일이지.”

클레이먼은 탐욕스럽게 입맛을 다셨다.

성기사, 리처드는 속으로 질색했다.

클레이먼은 리에이트를 모시는 사제도, 성기사도 아니다.

그저 대주교의 형제라는 이유로 이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인질을 앞세워 무장해제시키고 잡아들인 다음, 사형대에 세우는 거야.”

“상대는 마녀입니다. 가족이라고 한들 연을 붙였을지는…… 큭.”

성기사 리처드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클레이먼이 정강이를 걷어찼기 때문이다.

힘은 그리 세지 않았으나, 불의의 일격인 만큼 아팠다.

“너, 지금 내 머릿속에서 나온 완벽한 작전에 토를 다는 건가?”

“아, 아닙니다.”

“입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추방해 버리기 전에.”

리처드는 말을 삼켰다.

클레이먼이 자기 합리화를 시작했다.

“만약 응하지 않는다면, 적당히 가지고 놀다가 죽이고 묻어 버리면 돼.”

이게 주교라는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이란 말인가.

리처드는 치를 떨었다.

“마녀의 정신력을 깎아 먹어 굴복시키는 거지. 어때?”

대답이 없자, 클레이먼은 리처드를 노려봤다.

리처드는 할 수 없이 씹어뱉듯 대답했다.

“주교님 말씀이 옳습니다.”

“신성력도 못 느끼는 네 동생을 수습 사제로 임명시켜 준 것이 누군지, 잊지 않았겠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거 하나 번복하는 거, 일도 아니야. 잘 생각하고 행동해. 이제 나가 봐.”

리처드는 클레이먼의 방에서 나왔다.

신전에 모인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리에이트의 모습을 본뜬 신상이 보였다.

‘리에이트여, 어째서…….’

리처드는 눈을 감았다.

클레이먼의 명령이 잘못됐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따라야만 했다.

“리처드 형.”

“누구…… 말론?”

리처드는 인상을 찡그렸다.

사절단에 껴 네르갈로 갔던 동생, 말론이 뒤에 서 있었다.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이었다.

리처드는 인상을 찡그렸다.

“깜짝 놀랐지?”

“너, 내가 시노드 교구로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 맞다. 하지만 빨리 얘기해 주고 싶은 게 있어서…….”

“나와.”

리처드는 클레이먼 주교가 방 밖으로 나오기 전에, 말론을 신전 밖으로 데려갔다.

말론은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가면서 주절거렸다.

“형, 엘프들 진짜 예쁘더라. 그리고 레드라인 후작님도 직접 뵀는데……!”

“네르갈에서 소동이 일어났다고 들었다.”

“맞다. 내 얘기 들으면 깜짝 놀랄걸?”

말론은 구구절절 말을 이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리처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언데드와 마주쳤다고?”

“응! 나중에 사제님께 여쭤보니까 고스트 아머라고 하더라고. 와, 마주쳤을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

“고스트 아머라면 강력한 놈인데. 어떻게 네르갈에…….”

“좀 들어 봐. 그놈이 나한테 대검을 치켜드는 순간! 누가 와서 도와줬는지 알아?”

“누군데?”

“지그문트 마이어! 요정족의 은인!”

말론은 조금 신난 듯 추임새를 곁들여 지그문트를 묘사했다.

영웅을 직접 마주한 아이처럼 신난 기색이었다.

솔직히 리처드는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알기로 지그문트는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귀족 자제였기 때문이다.

“발차기를 빡! 날리니까, 고스트 아머가 튕겨 나갔다고?”

“응!”

“말도 안 되는 소리. 요안 님이 오셔도 고스트 아머를 발차기로 날리는 건 불가능해.”

“진짜라니까?”

“네가 잘못 본 것이겠지.”

리처드는 말론의 말을 믿지 않았다.

원래 이런 일은 과장을 섞어 말하는 법이었다.

말론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진짜라고!”

“어쨌든 네게는 생명의 은인이구나. 감사 인사는 드렸니?”

“물론 드렸지. 아, 하나 이상한 점이 있었는데…….”

말론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뒤에서 한 성기사가 나타났다.

“리처드 님? 거기서 뭐 하십니까?”

“미안. 가 봐야 할 것 같다. 나머지 이야기는 집에서 해 줘.”

“어? 어, 그래. 바쁠 텐데. 가 봐, 형.”

“그래.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다. 고생했어.”

리처드는 툭 말론의 팔뚝을 두드리고, 성기사 쪽으로 갔다.

홀로 남은 말론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나?”

* * *

“흐암.”

“흐암.”

단이 하품하자, 목말을 타고 있던 리옐도 똑같이 하품했다.

이른 아침.

하멜에서 떠나고 쉼 없이 달린 끝에, 겨우 리에이트 교국 끝자락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단은 졸린 눈을 억지로 뜨고 주변을 살폈다.

“여기가 어딥니까?”

“시노드 교구.”

시노드 교구.

리에이트 교국의 열두 교구 중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곳이다.

국경에 가까운 만큼, 두꺼운 성벽이 외곽을 빙 두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물이 리에이트를 상징하는 백색 일색이어서, 낮에 보면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분명 마녀를 찾으러 오셨다고 하셨죠?”

“그래. 교구에 인접한 늪에 있다더군.”

“아빠, 마녀는 나쁜 사람 아니야?”

리옐이 순진하게 질문했다.

단도 궁금했는지 나를 본다.

나는 습관적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동화책 같은 것에선 그렇게 묘사되곤 하지만, 실제와는 많이 다르지.”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일단 이유 없이 사람을 해치진 않아. 마법사랑 비슷하게 방구석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지.”

연구하는 종목이 마법이 아닌 저주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사냥 당해서 지금은 하나 남았어. 불쌍한 일족이야.”

“그래서 마지막 마녀라고 불리는 거였군요.”

“성격이 그리 좋지만은 않은데. 교섭은 가능할 거야.”

리옐은 이상한 것을 경계했다.

“아빠, 마녀님도 린시스처럼 예뻐?”

“아니? 꼬부랑 할머닌데.”

“휴.”

리옐은 안심했고, 단은 어쩐지 아쉬워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단 암국과 접촉하는 것이 먼저였다.

“꺄악!”

“저, 저, 저!”

거리 한편이 소란스러워졌다.

단과 짧게 눈을 마주쳤다.

곧장 소란이 일어난 곳으로 향했다.

“이게 무슨 일이래.”

“한두 번이 아니니, 원.”

“쯧, 다들 입조심하라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단이 구경하던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긴 무슨 일이야. 또 그놈이 마을 처녀 하나 잡아간 거지.”

“그놈요?”

뭔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남자가 옆을 봤다.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행자요?”

“그렇습니다만, 그놈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알 거 없소.”

남자는 돌연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아니, 조금 떨고 있었다.

리옐이 작은 코를 씰룩이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다.

뭐가 이상한 건지,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 기울인다.

“이상하다. 어디서 맡아 본 냄샌데?”

* * *

“이곳은 현재 출입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돌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무장한 성기사가 우리를 막아섰다.

시노드 교구 변두리, 늪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단은 성기사의 어깨 너머를 살피며 물었다.

“어째섭니까?”

“여행객이시라면 모를 수도 있겠군요. 얼마 전, 이곳에 마녀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마녀 말입니까? 확실합니까?”

“예. 이미 확인 작업까지 마친 상태입니다.”

무슨 위험한 몬스터 정도로 분류하고 있는 듯 격리한 모양이었다.

단이 눈으로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녀가 이곳에 있다는 걸 확인한 것으로 족했다.

“알겠습니다. 자칫하면 큰일 날 뻔했군요.”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순순히 물러섰다.

괜히 교국을 적대할 필요는 없었다.

내 목적은 마녀가 가진 부패한 성배다.

교국을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기사와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단이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할 것 같냐?”

“몰래 들어갈 것 같습니다.”

“알면서 왜 물어 봐?”

성기사들은 길목으로 출입하는 사람만 막을 뿐이다.

늪의 경계 전체를 막지는 않으니, 숨어드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시노드 교구로 돌아가지 않고, 길 밖으로 벗어났다.

리옐을 알아본 것인지, 수풀들이 물러나 길을 만들었다.

“안 좋은 냄새!”

리옐이 앙증맞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 말대로 악취가 풍겨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늪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 생각보다 넓군요.”

“그러네. 하나의 늪이라기보다는 늪지대라는 표현이 맞겠어.”

진흙 위로 마른 수초가 무성했다.

잎사귀 하나 없는 나무의 뿌리는 기괴한 모양새로 바깥에 드러나 있었다.

짙은 갈색의 진창은 그리 깨끗해 보이진 않았다.

단은 주춤거리다가 진창 위로 발을 디뎠다.

발이 진창 속으로 쑥 빠졌다.

“보기보다 깊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종아리를 절반 정도 덮는 깊이였다.

리옐이라면 다리가 전부 잠길 수도 있었다.

“이건 안 되겠군. 타.”

“아빠 좋아!”

쪼그려 앉자 리옐이 냉큼 업혔다.

목 뒤로 머리카락이 닿아 조금 간지러웠다.

단은 우두커니 서서 넓은 늪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안쪽까지 들어가려면 한참 걸리겠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그, 혹시 저번에 사막에서 사용했던 날아다니는 양탄자 같은 건…….”

“안 돼. 이런 곳에서 쓰면 충돌 사고 나.”

늪에는 생각보다 나무가 많았다.

플라이(Fly)로 띄운 물건은 이런 곳에서 사용하기 어렵다.

저속으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마나 낭비가 엄청날 것이다.

마녀와의 전투도 염두해 두고 있는 만큼, 마나는 아끼고 싶었다.

그냥 정면 돌파하는 쪽이 나았다.

내가 진창에 발을 들이려는 순간.

“여기!”

리옐이 누군가를 부르듯, 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나무가 밖으로 드러나 있던 긴 뿌리를 이쪽으로 뻗었다.

우득! 우드득!

나무뿌리가 서로 얽히며 진창 위로 길을 만들었다.

나는 길에 발을 디뎠다.

생각보다 튼튼했다.

“누구 딸인지, 능력도 좋군.”

“헤헤.”

단은 허탈한 눈으로 그것을 보다가, 진창 밖으로 올라왔다.

신발이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너무 하십니다. 리옐 아가씨.”

“그치만 나무 할아버지들이 지금 말을 들어줬는걸.”

“그건 어쩔 수 없지.”

“그치?”

“그럼.”

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신발을 씻어 냈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늪에 접어들었다.

앞으로 발을 디딜 때마다 나무뿌리로 만들어진 길이 나타났다.

어느 정도 나아가면, 뒤의 뿌리는 저절로 풀리며 제자리를 찾았다.

“리옐 아가씨는 다재다능하시군요.”

리옐의 말에 의하면, 따로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냥 부탁을 하면 들어준단다.

부러운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진창을 걸었으면 한참 걸렸을 텐데. 시간이 많이 단축되겠습니다.”

“맞는 말이야.”

“후후.”

“그런데 진창을 걷는 것도 아니니, 업혀 있을 필요는…….”

“쉿!”

단이 딴죽을 걸었다가, 리옐에게 제지당했다.

목을 감싼 팔 힘이 강해졌다.

업고 있어 봐야 무게도 느껴지지 않아 별 상관 없었다.

“단 아저씨 바보!”

“죄, 죄송합니다.”

결국 리옐은 등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늪 안쪽으로 들어갔다.

갈수록 나무가 많아졌고, 가지가 하늘을 가려 어두워졌다.

늪은 어딘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

인상을 찡그린 단이 허공에 팔을 휘저었다.

“뭐 하냐?”

“아니요. 거미줄이 걸려서 말입니다.”

“거미줄?”

순간 밤말을 듣는 쥐에게 전해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거미가 있다고 했지.

의식과 동시에 시선이 느껴졌다.

스르륵.

정면의 나무 위에서 거미가 내려왔다.

사람 정도 크기의 검은 거미는 총 세 마리.

놈들은 우리를 포위하듯 둘러쌌다.

단이 조심스럽게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몬스터군요.”

“몬스터 아니야. 큰 늪거미라는 거미의 한 종류지.”

“몬스터가 아니라고요? 저게 말입니까?”

나는 거미를 주시했다.

밤말을 듣는 쥐에게 이야기를 듣고 예상했던 바였다.

“몸 크기로 보면 이건 새끼들이야. 아마 일대에 수백 마리쯤 우글거릴 거다.”

“수백 마리요? 으.”

“대화로 해결하는 쪽이 현명하지.”

리옐이 어깨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네 쌍의 눈동자가 리옐을 향했다.

꽤나 징그럽게 생겼지만, 리옐은 별로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절대 이 거미들을 놀라게 해선 안 돼!”

“단, 검에서 손 떼란다.”

“아, 알겠습니다.”

큰 늪거미는 외형이나, 호전적인 성격 때문에 종종 몬스터로 오해 받곤 한다.

아직까지 움직임이 없는 걸로 보아,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경고 차원이었던 모양이다.

자기네 영역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거겠지.

“흠.”

리옐은 한참 거미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두에 선 큰 늪거미가 나무뿌리 위로 착지했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내가 길을 알아.”

“응?”

“거미 언니가 그랬어.”

“내가 살다 살다 거미를 타게 될 줄은 몰랐는데.”

“드래곤도 타고, 다 했잖습니까.”

“그거랑은 좀 다르지.”

* * *

큰 늪거미는 진창 위에서 바쁘게 다리를 놀렸다.

단은 신기하다는 듯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떻게 늪 위를 걸어 다니는 겁니까?”

“나무뿌리가 길을 만든 거랑 똑같은 거다. 실로 길을 만들고, 그걸 타고 이동하는 거거든.”

“오, 그거 신기하군요.”

수 시간 후.

으슥한 분위기를 풍기는 오두막 앞에 도착했다.

마녀의 거처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큰 늪거미는 우리를 땅에 내려 줬다.

“오두막 일대는 단단한 땅인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진창에 집을 지을 수는 없을 테니까.”

임무를 마쳤다는 듯, 큰 늪거미 세 마리는 유유히 떠나갔다.

리옐이 붕붕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 언니!”

샤샥.

거미 세 마리가 다리를 마주 들어 보였다.

사람 크기의 거미들이 다리를 흔들어 인사하는, 이상한 광경이었다.

단은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오두막을 살폈다.

“이곳이 확실합니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문은 잠겨 있었다.

창문에는 먼지가 가득해 내부는 보이지 않았다.

까악.

까마귀 한 마리가 처마 쪽에 설치된 횃대에 앉았다.

검은 동공이 이쪽을 향했다.

부리가 열리더니, 늙은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특이하구나. 늪거미들을 타고 오다니.”

“어디서……?”

“저기 있잖아.”

단은 뒤늦게 까마귀를 발견했다.

“너희들은 누구지? 리에이트 교국 출신은 아닌 것 같은데.”

까마귀가 날개를 푸득거리며 내려왔다.

리옐의 어깨에 앉으려 하길래, 팔을 내줬다.

발톱이 날카로워 다칠 수도 있었다.

까마귀는 유심히 리옐을 바라보았다.

“너, 어찌 이곳에 있는 것이냐?”

“아빠 따라 왔는데…….”

“아빠?”

까마귀는 나와 단을 번갈아보았다.

나는 한 손을 들어 자수했다.

고개를 까딱거린 까마귀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말이 안 되는데. 세계수가 결혼을 했다고?”

“안 했어.”

나는 부정했다.

리옐은 고개를 끄덕였다.

“속도위반이야.”

“아니거든?”

자꾸 어디서 이상한 말을 주워듣고 오는 건지 모르겠다.

까마귀는 다시 횃대로 돌아갔다.

“일단 들어오너라. 허튼짓은 생각도 않는 게 좋을 거야.”

까마귀가 횃대 끝으로 이동하자, 횃대가 아래로 기울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 * *

오두막 안에서는 쿰쿰한 냄새가 났다.

단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생각보다 평범하군요.”

“뭘 기대한 거야?”

이상한 묘약이 펄펄 끓는 가마솥도, 실험용 동물도 없었다.

언뜻 보기에는 조금 오래된,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한 노파가 안락의자에 몸을 묻은 채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평범한 노인처럼 보이지만, 틀림없다.

마녀가 분명했다.

“허.”

단은 주춤 걸음을 멈췄다.

마녀는 그만큼 강렬하게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인상을 잔뜩 찡그린 노파에게 예의 까마귀가 총총 다가왔다.

까마귀는 안경을 물고 있었다.

“고맙구나, 후닌.”

까마귀를 발견한 마녀가 안경을 받아 썼다.

인상이 순식간에 유순해졌다.

단의 표정을 보더니, 낄낄 웃는다.

“미안하구나. 놀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요즘 눈이 안 좋아져서 말이야.”

“아, 아닙니다.”

“다리 아프게 서 있지 말고 앉게나.”

우리는 마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리옐은 제자리라는 듯 자연스럽게 내 무릎을 차지했다.

마녀는 귀엽다는 듯 웃었다.

“아빠랑 사이가 좋구나?”

“응!”

“유대는 중요하지. 나와 후닌처럼 말이야.”

마녀가 책상 위로 손을 올렸다.

까마귀, 후닌이 마녀의 손등에 머리를 문댔다.

“그래. 일단 신목의 아이가 있어서 살려 두고는 있다만.”

마녀는 태연하게 우리를 살폈다.

그냥 인자한 할머니 같은 인상이지만 저주에 있어서는 따라올 자가 없는 인물이다.

한때는 렘브란트 님푸스 못지않은 강자였다.

“이 깊은 늪까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더냐?”

“부패한 성배.”

마녀의 눈이 내 쪽을 향했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가지고 있나?”

마녀는 대답하는 대신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의도를 가늠하는 눈치였다.

“그래. 부패한 성배는 내가 가지고 있다. 하지만.”

후닌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말이 짧구나. 늙은이 공경하는 법을 못 배웠느냐?”

돌연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에, 아래를 내려다봤다.

목 위로 검은 혈관 같은 것이 올라오고 있었다.

저주였다.

“도련님!”

“아빠!”

내 팔을 본 단과 리옐이 놀랐다.

나는 팔을 움직여 보이며 애들을 진정시켰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저주는 썩은 살갗의 저주처럼 목숨과 연관된 것이 아니다.

호들갑 떨 것 없다.

“대단한 저주 같지만, 실은 존댓말을 강제하는 것뿐이니까요.”

정말 별것 아닌 효과였다.

사람을 겸손해 보이도록 만드는 것 말고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

마녀가 흥미롭다는 기색을 보였다.

“네놈, 정체가 무엇이냐?”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마녀는 아직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한때 팔베르크 제국의 비호 아래 있었던 만큼,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

눈이 마주쳤다.

이제부터는 말을 잘 골라야 한다.

‘약았군. 몰래 저주를 하나 더 내렸어.’

존댓말을 강제하는 저주는 눈속임용.

저주 하나가 은밀하게 내 몸속으로 침투했다.

진실 혹은 죽음(Truth or Death).

나는 이제부터 거짓말을 하면 죽는다.

“레온하트 왕국 출신의 지그문트 마이어라고 합니다.”

“흠.”

진실을 얘기하며 진실을 숨긴다.

모호한 대답.

마녀의 입장을 모르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거짓이었다면 내가 죽었어야 했기에, 마녀는 내 말을 진실로 판단했다.

“부패한 성배를 찾는 이유는 무엇이더냐?”

“세계수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세계수? 그렇군. 그래서 후계자가…….”

마녀는 리옐에게 시선을 두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입을 달싹였다.

장고 끝에 수를 뒀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답해 주실 수 있습니까?”

“들어 보고.”

“마지막 마녀는 북쪽에 거주한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팔베르크 제국과 프라우드 산맥 중간쯤 되는 외딴 곳에 살았다.

마녀는 거처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여생을 이곳에서 보내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돌연 이 먼 남쪽까지 내려왔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리에이트 교국에 내려오신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시답잖은 질문이었구나.”

마녀는 자세를 고쳐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사람을 피해서 내려왔다. 마녀라는 것이 늘 쫓기는 몸이거든.”

이 대답을 들은 시점에서, 수많은 경우의 수가 하나로 좁혀졌다.

마녀는 팔베르크 제국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쫓기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어떤 간 큰 놈이 제국과 적대하겠는가.

반대로 생각하면, 제국과 연결이 끊어졌다는 뜻이다.

‘연결점을 죽여 버렸으니, 마녀 또한 위험 요소라고 판단한 건가.’

마녀와 팔베르크 제국을 연결하던 것은 전생의 나였으니.

비록 호전적인 성격이 아니더라도, 제국 입장에서 마녀는 상당한 변수였다.

저주라는 것은 은밀한 만큼 치명적인 결과를 초례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이라는 것이, 혹.”

나는 마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팔베르크 제국의 황제입니까?”

돌연 바닥 틈에서 검은 안개가 솟구쳐 나와, 집 안을 뒤덮었다.

저주의 일종인 것 같았다.

마녀는 은은한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제국의 끄나풀이더냐?”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목을 꺾어 죽이겠지.”

스멀스멀 나온 검은 안개가 나와 단의 목을 감쌌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마녀는 팔베르크 제국과 적대하고 있다.

“저는 팔베르크 제국의 끄나풀이 아닙니다.”

“한데 어떻게 황제가 나를 죽이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저는 한 번 죽었으니까요. 황제에게.”

표정 변화가 거의 없던 마녀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검은 안개가 다시 바닥의 틈으로 돌아갔다.

나는 목을 매만졌다.

이제는 밝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대마법사 델 로안이 환생을 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말도 안 된다. 필멸자가 죽음을 피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일 터.”

“저는 대마법사 델 로안의 환생입니다.”

“뭐라…?”

“진실 혹은 죽음. 자신의 저주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마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런 반응을 원했다.

발레리아 이후로, 반응이 좀 시원치 않았다.

내가 얼마나 어렵게 환생했는데.

“해주 좀 해 주시죠. 제가 당신에게 존댓말을 해야겠습니까?”

“죽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진실인데.”

마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저주가 사라졌다.

나는 목을 더듬었다.

해주되지 않고 잔류한 기운도 없었다.

역시 마녀, 깔끔한 솜씨다.

나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자. 그럼, 진득하게 얘기 좀 나눠 볼까?”

* * *

시노드 교구, 리에이트의 신전.

클레이먼 주교는 의자에 몸뚱이를 걸치고 있었다.

두 명의 시녀가 의자 뒤에 서서 눈치를 봤다.

클레이먼 주교가 몸을 돌린 순간, 책상에 올려져 있던 통신구가 빛났다.

“쯧. 꼭 중요할 때 연락을 한다니까.”

투덜거린 클레이먼이 통신구를 잡았다.

통신구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클레이먼.”

“예. 예. 안녕하십니까.”

“늪에 숨어들었다는 마녀는 어떻게 됐지?”

인사도 안 받고 본론부터 말한다.

클레이먼은 조금 짜증 났지만, 내색하지는 못했다.

상대는 손 하나 까딱이는 것으로 클레이먼을 죽일 수 있다.

적어도 앞에서 만큼은 순한 양처럼 굴어야 한다.

“밖으로 불러들일 준비를 마쳤습니다.”

“시노드 교구 내부로 말인가? 그녀는 조심성이 많다.”

“괜찮습니다. 핏줄을 붙잡았거든요.”

“핏줄? 그럴 리가.”

통신구 너머의 목소리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부정했다.

“마녀는 대가 끊겼을 텐데.”

“저도 정확한 경위는 알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거든요.”

“흠, 어쨌든 그것을 써서 마녀를 불러들이겠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진짜라면 반응을 하겠지요.”

목소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통보하듯 말했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이쪽에서 병력을 투입할 수밖에 없다.”

“곤란합니다. 아직 시노드 교구는…….”

“내가 그런 걸 신경 써야 하나?”

클레이먼은 입을 다물었다.

가까스로 한숨을 참고, 목구멍에서 억지로 대답을 끄집어냈다.

“아닙니다.”

“좋은 결과 기대하지.”

통신이 끊겼다.

클레이먼은 천장을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통신구를 내려놓고, 대신 책상에 올려져 있던 촛대를 잡아 던졌다.

카앙!

벽에 부딪친 촛대가 시녀의 발치로 튀었다.

촛대에서 떨어진 금속 장신이 시녀의 손등에 박혔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시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겨우 신음은 참았건만, 클레이먼과 눈이 마주쳤다.

“뭐, 내가 볼썽사납나?”

“아, 아닙니다.”

“리처드!”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리처드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클레이먼은 씩씩거리며 시녀를 가리켰다.

“이년을 때려죽여라.”

시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신전에서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명령을 받은 리처드에게 끌려간 이들 중 살아온 이는 아무도 없다.

리처드가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했다.

“어떤 이유로…….”

“주교를 욕보였단 말이다! 이 나를!”

클레이먼은 벽에 걸려 있던 리에이트의 상징물을 붙잡아 리처드에게 던졌다.

괜한 화풀이였다.

캉!

빗나가긴 했으나, 리에이트의 상징물은 바닥에 부딪쳐 깨지고 말았다.

리처드는 깨진 상징물을 내려다봤다.

클레이먼이 분개했다.

“너도 명령에 불복종하는 거냐?”

“아닙니다.”

“그럼 이년을 내 눈앞에서 치우란 말이다! 당장!”

리처드는 어쩔 수 없이 시녀에게 다가갔다.

시녀는 울상이 됐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각하! 한 번만 살려 주신다면…….”

“닥쳐라! 내가 네 더러운 속내를 읽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리처드는 시녀를 끌고 방을 나갔다.

문을 닫았음에도 클레이먼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처드는 방을 나가자마자 시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가족이 교국 내에 있습니까?”

“아, 아아. 가족만큼은, 자비를…….”

“그런 뜻이 아닙니다.”

리처드는 시녀를 끌고 신전 뒤쪽으로 나갔다.

패닉에 빠진 시녀를 가까스로 진정시킨 뒤, 조언했다.

“바로 도망쳐야 합니다. 최대한 멀리. 팔베르크 제국이나 레온하트 왕국이라면 안전할 테니.”

“네?”

“교구 북동쪽의 이즈킹을 찾아가십시오. 내가 보냈다고 하면 검문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시녀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주교의 측근이라고 악명 높은 리처드였기 때문에, 이런 행보는 생각도 못 했다.

리처드는 주변을 경계하며 시녀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신전부터 벗어나십쇼. 클레이먼이 방에서 나오기 전에.”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리처드는 잰걸음으로 도망치는 시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이고 이럴 수는 없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언제 클레이먼이 눈치챌지 모를 일이었다.

‘모르겠다. 나는 죄책감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건가?’

오늘도 클레이먼의 명령으로 애꿎은 사람을 잡아들였다.

그는 지금 리에이트의 성기사가 아니라, 클레이먼의 종이나 다름없었다.

리처드는 눈을 감았다.

깨져 버린 리에이트의 상징물이 떠올랐다.

* * *

“독한 사람이구먼. 심장이 멈춰도 살아 돌아오다니.”

“엄밀히 말하면 살아 돌아온 건 아니지. 델 로안은 죽었으니까.”

내 이야기를 들은 마녀는 헛헛하게 웃었다.

집 안을 유유히 날아다니는 후닌과, 그것을 쫓는 리옐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에게 고마워하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죽음의 눈을 속이는 데 한몫을 하고 있거든.”

“에인션트 드래곤이랑 비슷한 말을 하는군.”

죽음의 눈을 속인다.

내가 환생한 것과 관련 있는 모양인데,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나?”

“곤란해.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거든.”

“흠.”

마녀는 완곡한 거절과 동시에, 실마리를 던졌다.

진실을 얘기하면 죽는다.

나는 머릿속에 말을 새겼다.

“제안 하나 하지. 비슷한 처지끼리 뭉치는 거야. 어떤가?”

“늙은이를 이용할 생각이 만만해 보이는군그래?”

“전력 하나가 아까운 시점이거든.”

내 주변에 있는 인물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하다.

레드라인 후작이나 발레리아가 그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팔베르크 제국의 규모를 생각하면, 아직 부족했다.

대항마는 많을수록 좋다.

“거절하겠네.”

“쯧. 그럴 것 같더라.”

“미안허이.”

마녀는 상당히 강력한 패다.

이쪽으로 끌어들이고 싶은데, 구실이 없었다.

같은 적을 두고 있긴 하지만, 상황이 조금 달랐으니까.

제국과 전면전을 각오하고 있는 나와 다르다.

마녀는 제국의 마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제국을 무너트리면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재밌는 말이구먼. 이 늙은이는 그런 과격한 방법은 싫으이. 평온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어.”

“적에게 대대손손 탈모에 걸리는 저주를 걸었던 그 잔인한 마녀는 어디 갔나?”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끌끌.”

확실히 나이가 들며 유해진 면이 있었다.

마녀는 결국 내 제안을 거절했다.

“내 그리 상태가 좋지 못하거든.”

“팔팔해 보이는데.”

고개를 저은 마녀가 덮고 있던 담요를 걷었다.

발목을 따라 눈에 보일 정도로 긴 흉터가 나 있었다.

치료는 한 것 같았지만, 불완전했던 모양이다.

“다리를 다쳤어. 거동은 아예 불가능한 상태지.”

“어쩌다가?”

“아마 생포하려고 했겠지. 어떻게든 이용하려고 말이야.”

마녀가 책상을 두드리자, 리옐과 놀던 까마귀 후닌이 날아왔다.

“목숨을 건진 건 후닌 덕분이라네.”

“역시 뱀보다는 까마귀인가.”

“끌끌. 요르문간드가 들으면 섭섭해하겠어.”

“됐고, 부패한 성배는…….”

본론으로 돌아오려는 순간, 마녀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바깥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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