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49/134)

2

하멜의 집행자들

“저는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단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리옐이 단을 그대로 따라 했다.

“결국 가게 되는군요. 리에이트 교국.”

“가게 되는군요!”

별궁에서의 생활이 조금 지루했던 걸까.

리옐은 조금 신난 상태였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는 지금 막 트리옌 왕국에 들어서고 있었다.

최종 목적지는 단이 말했던 것처럼, 리에이트 교국이었다.

“진짜 갈 생각 없었는데.”

조용히 네르갈에서 힘을 키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밤말을 듣는 쥐에게 뜻밖의 정보가 들어왔다.

부패한 성배는 마녀가 가지고 있으며, 마녀는 지금 리에이트 교국에 있다.

사실 암국에게 맡겨도 됐으나, 내가 직접 나서기로 했다.

암국 측에서 전력을 소모하는 것보다 내가 가서 교섭을 시도하는 쪽이 나았으니까.

‘암국에게 넘긴 정보가 있으니까.’

암국은 지금 팔베르크 제국과 소리 없는 전쟁 중이었다.

내가 꽤 많은 양의 정보를 넘긴 만큼,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을 것이다.

괜히 이쪽으로 분산시키는 것보다, 확실히 제국에 힘을 쏟았으면 했다.

“도련님, 내리시죠. 리옐 아가씨도.”

“응!”

마차는 트리옌 왕국의 수도, 하멜에서 멈췄다.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리옐이 감탄했다.

“우와아, 사람 많다!”

“확실히 그렇군요. 축제 기간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하멜은 원래 이래.”

트리옌 왕국은 서대륙 중심부에 위치한 국가다.

교통의 요지인 만큼, 유동 인구가 상당했다.

나는 적당한 여관을 찾아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빈 방 있나?”

“상층에 큰 방이 둘 남아 있습니다만, 조금 가격대가 있습니다.”

“둘 다 하루 동안 빌리지.”

나는 금화 한 닢을 여관 주인에게 튕겼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네.”

“바로 모시겠습니다!”

이곳은 서풍 같은 초고급 여관이 아니다.

하루 숙박하는 데 금화 한 닢이면, 남아도 정말 많이 남는 장사일 것이다.

여관 주인은 여관 상층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따로 짐은 없으십니까?”

“없다네. 시장한데 바로 식사 준비 가능하겠지?”

“물론입니다. 준비되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식당도 겸하고 있는 여관이었기에, 귀찮게 나갈 필요도 없었다.

잠시 쉬고 있으니, 여관 주인이 식사가 준비됐다는 것을 알려 왔다.

우리는 1층으로 내려갔다.

“앉으시죠.”

따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10명은 너끈히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과하게 넓었다.

트리옌의 음식이 여럿 준비되어 있었는데, 아마 여행객인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자리에 앉으니, 여관 주인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주시길 바랍니다.”

“잘 먹겠습니다!”

드라이어드는 식사가 불필요했지만, 리옐은 대체로 우리와 함께 밥을 챙겨 먹는 편이었다.

1층은 조금 시끄러운 편이었다.

대화를 나누지는 못할 것 같았다.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돌연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여관으로 하얀 갑옷 차림의 기사들이 들어섰다.

왁자하게 떠들던 사람들은 기사들의 눈치를 봤다.

단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저거 혹시…….”

“교국의 성기사들이네.”

성기사 하나가 뚜벅뚜벅 여관 주인을 향해 걸어갔다.

헬름 속에서 중저음이 흘러나왔다.

“빈 방 있습니까?”

“죄송합니다만, 방이 다 찼습니다.”

“하멜의 모든 여관을 돌아다녔습니다. 좁은 방이라도 괜찮습니다.”

“정말 송구할 따름입니다.”

“흠.”

여관 주인도, 성기사도 조금 난처해 보였다.

어색한 기류에 사람들도 불편한 기색이었다.

나는 여관 주인이 볼 수 있도록 한 손을 들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성기사에게 양해를 구한 여관 주인이 후다닥 뛰어왔다.

나는 여관 주인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큰 방을 두 개 빌렸었지.”

“예. 그랬습죠.”

“하나는 저쪽에게 양보하겠네.”

“아,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방값은 내가 지불한 걸로 하지.”

“정말 감사합니다. 바로 전하겠습니다.”

여관 주인은 성기사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윽고 성기사가 내 쪽으로 걸어 왔다.

“식사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곤란한 사람이 있다면 돕는 것이 도리니까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호인이시군요.”

성기사는 감탄한 기색이 역력했다.

옆에 있던 리옐과 단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얘네는 너무 잘 안다.

당연히 그냥 호의를 베푼 것은 아니었다.

성기사는 헬름을 벗었다.

“리에이트 교국의 성기사, 요안이라고 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을 듣고 싶습니다.”

“지그문트 마이어라고 합니다.”

“지그문트 마이어? ……혹시, 레온하트 왕국 출신이십니까?”

“맞습니다.”

“허, 이런 곳에서 요정족의 은인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요안은 나를 알고 있었다.

직위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일 확률이 높아졌다.

과거에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괜찮다면 합석하시겠습니까?”

“그렇게까지 누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저희 수가 많아…….”

“음식이야 더 주문하면 됩니다. 성기사분들과는 한번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거든요.”

“이것 참, 허허.”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린 요안은 성기사와 사제 들을 불러들였다.

요안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들은 내게 축복의 말을 건넸다.

순식간에 넓은 자리가 전부 들어찼다.

여관 주인이 눈치 빠르게 음식을 내왔다.

“이쪽은 제 기사, 단 록벨런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아, 들은 적 있습니다.”

요안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단이 눈을 깜빡였다.

“저, 저를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검술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고 들었습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요안은 먼저 악수를 청했다.

단은 기꺼이 악수를 받았다.

“괜찮으시다면 언제 한번 대련이라도 부탁드립니다.”

“지고 싶지 않군요. 시간이 난다면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요안이 시선을 옮겼다.

자리가 꽉 찬 것을 핑계로 내 무릎을 차지하고 있는 아이였다.

“귀여운 숙녀분께선, 마이어가의 영애십니까?”

“제 딸입니다. 리옐이라고 합니다.”

내 대답에, 리옐은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으로 숨긴 머리 위 새싹이 빠르게 좌우로 흔들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요안이라고 합니다.”

“응!”

리옐과도 악수를 나눈 요안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봤다.

조금 억울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게 다 간악한 세계수의 술수였다.

이제 좀 익숙해진 느낌이라 기분이 묘했다.

“그보다, 어디로 가는 길이셨습니까?”

“리에이트 교국입니다.”

“귀빈이 오신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요.”

“사적인 일이라서 말입니다.”

나는 리옐에게 샌딩(Sending)을 보냈다.

짧게 눈빛을 교환했다.

리옐은 고개를 숙였다.

위를 올려다보는 눈이 꽤 처연했다.

“우리 엄마, 아파.”

“아.”

“그래서 약 구하러 가는 거야.”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안타깝다는 듯 탄식을 흘렸다.

리옐은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요안은 눈을 감았다.

“빛이 가시는 길을 비춰 주기를.”

“감사합니다. 요안 님께서도 리에이트 교국으로 가시는 겁니까?”

나는 일부러 조금 억지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본 사제들이 짧게 기도를 했다.

심지어 눈물을 훔치는 사제도 한 명 있었다.

감수성 참 풍부한 친구들이다.

요안은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팔베르크 제국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내일 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팔베르크 제국요? 그 먼 곳까지는 어쩐 일로…….”

“임무 때문입니다.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해합니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쳐 주며 머리를 굴렸다.

리에이트 교국의 성기사단이 팔베르크 제국에 갈 만한 일.

바로 하나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위스크 백작령의 마족.

‘그때 퍼트린 소문이 기어코 교국까지 닿았나 보군.’

마족이라면 학을 떼는 리에이트 교국인 만큼,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다.

내 예상이 맞다면, 이들은 그 소문에 대한 조사를 위해 제국으로 가는 것이리라.

이후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교국의 명물이나, 꼭 가 봐야 하는 장소 같은 것이 화제였다.

아마 리옐과 나에 대한 배려가 반이었으리라.

“그럼 저희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 쉬십시오.”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방으로 돌아왔다.

리옐과 주먹을 맞부딪쳤다.

“잘했어.”

“히히.”

일부러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리옐에게 연기를 시켰다.

단은 연기에 꽤 일가견이 있는 편이었지만, 리옐은 어색할지도 몰라서 걱정했는데.

성기사단 전체를 속여 버렸다.

단은 망연자실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순수하신 리옐 아가씨가…… 도련님처럼…….”

“리옐이 뭐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맞아.”

약이 아니라 부패한 성배를 구하러 가는 것이지만, 어쨌든 맥락은 맞았다.

나는 잠시 문 쪽을 바라봤다.

“내 생각이 맞다면, 저 사람들은 평범한 성기사단이 아닐 거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집행자. 마족과 관련된 사건을 전담해서 처리하는 정예 기사단이다.”

일반적으로 사제들은 성기사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아마 따로 대(對) 마족 훈련을 받은 사제들일 것이다.

그제야 단이 눈치를 챘다.

“위스크 백작령에서 있었던 일을 조사하러 가는 거군요.”

“아마도 그렇겠지.”

아마 팔베르크 제국에 도착만 한다면 좋은 견제 수단이 될 것이다.

제국이라도 저들을 국내에서 살해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토록 자연스럽게 의심을 사게 되는 상황은 피하려고 할 것이다.

도착을 한다면 말이다.

“근데, 저대로라면 팔베르크 제국에 도착 못 할 확률이 높거든.”

암국에 의하면, 하멜의 뒷세계는 이미 팔베르크 제국에 장악 당한 상태다.

저들이 집행자라는 것을 눈치챘다면, 필시 제거하려고 들 것이다.

‘지금이 적기. 나라면 그렇게 했다.’

집행자들이 머무르고 있는 곳은 교국도 제국도 아닌, 트리옌 왕국.

화살을 돌리기 딱 좋았다.

내 설명을 들은 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일 떠난다고 했으니, 습격한다면 오늘 밤일 거다.”

“하지만 요안 님도 그렇고, 모두 강해 보이셨는데 말입니다. 쉽게 당할까요?”

내가 느끼기에도 요안은 단 이상의 실력자로 보였다.

다른 성기사들도 모두 한가락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집행자로 발탁될 수가 없었으니까.

“알아서 막아 낸다면 좋겠지만, 아마 그렇게 쉽게 끝나진 않을 거다.”

제국 놈들을 만만히 보면 안 된다.

필요하다면 온갖 더러운 수를 동원할 확률이 높았다.

기습당하는 시점에서 일단 불리하다.

단은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도우실 겁니까?”

지금 집행자들이 팔베르크 제국으로 간다면, 내겐 이상적인 그림이 나온다.

자연스럽게 제국은 교국의 눈치를 보게 될 수밖에 없다.

힘 자체는 제국이 수십 배는 강하다.

그러나 대외적인 명분이라는 것이 있다.

마족이 나왔다는 소문과 겹친다면, 상당히 까다로울 거다.

“제국의 불행은 내 행복이지.”

* * *

요안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하멜의 모든 여관을 뒤지느라, 사실 조금은 짜증도 났었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작은 호의가 오늘 하루 그의 기분을 뒤바꿔 놓았다.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요안 님.”

“좋은 사람을 만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 아니겠습니까.”

지그문트에게 양도 받은 방은 생각보다 큰 편이었다.

어떻게든 모두 누워서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1층으로 보냈던 성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방값을 내러 갔던 성기사였다.

“저, 요안 님.”

“왜 그러십니까?”

“여관 주인에게 물어 보니, 이미 방값은 마이어 공께서 지불하셨다고 합니다.”

“이런, 마이어 공께서 저희를 파렴치한으로 만들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요안은 빙그레 웃었다.

이런 호의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었다.

성기사와 사제 들도 기분 좋게 웃었다.

“어떻게든 실내에서 잘 수 있게 됐군요.”

“마이어 공 덕분입니다.”

“나중에 꼭 보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지요.”

첫인상은 중요하다.

그들이 보기에, 지그문트 마이어는 더할 나위 없는 호인이었다.

곤란하던 차에 기꺼이 나서서 호의를 건넸다.

격식과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귀족인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존댓말을 쓰며 존중을 표했다.

“부인의 약을 구하기 위해 직접 리에이트 교국으로 가신다 하셨지요?”

“분명 그러셨습니다.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지금 리에이트 교국의 상황을 생각하면…….”

한 사제의 말에, 성기사들은 침묵했다.

사제도 제 입을 막았다.

요안은 눈을 감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리에이트 교국은 지금 추한 정치질과 권력 다툼으로 한창이라는 것을.

“저희는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요안 님.”

“그만.”

그들은 집행자.

마족과 그 잔당을 토벌하는 이들이다.

내부의 부패를 조사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내일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바로 출발합니다. 이렇게 쉴 수 있을 때 쉬어 두세요.”

“알겠습니다.”

성기사들의 대답을 끝으로, 각자 자유 시간을 가지게 됐다.

피곤했는지 바로 곯아떨어지는 이들도 있었다.

요안은 다른 이들을 두고 방을 나가 1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보다 훨씬 왁자지껄했고, 사람도 많았다.

밤이 가까워지자 술잔을 나누는 사람이 늘어난 탓이었다.

“나는 앞면에 걸지.”

“자연스럽게 이쪽은 뒷면이 되겠군.”

“잠깐! 수작을 부릴 수도 있으니, 동전은 잡지 않기로 하지.”

“뭐, 상관없어. 그럼 던진다?”

술값을 걸고 간단한 내기를 하고 있는 남자들도 보였다.

뒷면을 택한 남자가 동전을 튕겼다.

공중에서 수 바퀴를 돈 동전이 식탁에 떨어졌다.

“잉?”

“어라.”

시답지 않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동전이 옆으로 선 것이다.

내기 하던 남자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구경꾼들이 폭소했다.

“으하하하! 이거 걸작이군!”

“그게 옆으로 딱 서다니!”

“무,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요안은 그 광경을 유심히 살폈다.

섬뜩한 오한이 몸을 스쳐 지나갔다.

‘불길하다.’

이토록 기이한 일이 생길 때면, 마족이 근처에 출몰하곤 했다.

문득 자신의 검을 방에 두고 왔다는 것이 떠오른 요안은,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 * *

“대충 경고는 먹힌 모양이군.”

“저 동전, 도련님께서 세우신 겁니까?”

“그래.”

여관 1층, 으슥한 구석.

나와 단은 인식 방해(Disturb Cognition)를 통해 숨어 있었다.

내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탁자에 꼿꼿이 서 있던 동전이 옆으로 툭 엎어졌다.

내기하던 남자들이 아쉬움의 탄성을 질렀다.

“이런 기이한 일이 일어날 때면 마족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있거든. 리에이트 교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낭설이야.”

“진짭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고위 마족의 경우라면 그럴 수도 있으니까.”

단은 흥미로운 기색으로 질문했다.

“고위 마족…… 저희가 위스크 백작에서 잡은 마족은 중하급이라고 하셨죠?”

“용케 기억하는군. 맞아.”

“흠, 서대륙에 고위 마족이 나타난 적이 있습니까?”

“왜 없겠어?”

내가 기억하기로는 단 한 번.

대공 베르제가 서대륙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아마 비가 내렸던가?”

“비요? 그게 기이한 일입니까?”

“기이한 일이지. 물 대신 피가 내렸는데.”

“……그거 무섭군요.”

단은 하늘에서 피가 떨어지는 상상을 했는지, 질색했다.

나는 여관 내부 구조를 살폈다.

“자, 그럼 제국 측이 어떻게 나올지가 문젠데.”

정공대로 기습을 할 확률은 적었다.

집행자들은 이런저런 술수를 쓰는 데 능한 마족을 사냥하는 집단이다.

설령 기습을 하더라도 대응 속도가 빠를 것이다.

그래서 더 치졸하고 간악한 수를 쓸 확률이 높았다.

“일단 내가 말해 줬던 대로만 움직여. 상황 보고 샌딩(Sending)할 테니까, 놀라지 말고.”

“알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단은 나의 명령대로, 여관 밖으로 나갔다.

나는 방으로 돌아갔다.

활짝 열린 창가, 리옐이 눈을 감고 있었다.

너도밤나무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뭔가에 귀 기울이던 리옐이 번쩍 눈을 떴다.

“찾았다!”

* * *

모두가 잠든 어두운 방.

요안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불길한 마음에 불침번을 자처한 것이다.

‘잘 자는군.’

사제와 성기사들은 비좁은 공간에서도 깊게 잠들어 있었다.

리에이트 교국에서 하멜까지, 한 번의 휴식도 없이 달렸다.

피곤했을 것이다.

“하암.”

피곤한 건 요안도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눈꺼풀이 자꾸 내려앉았다.

요안은 고개를 세차게 저어 잠을 떨쳐 냈다.

그때였다.

쾅!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화들짝 놀란 요안이 검을 뽑아 들었다.

들어온 이들을 본 요안은 인상을 찡그렸다.

‘하멜의 병사들?’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었다.

트리옌 왕국의 표식이 견갑에 새겨져 있었다.

병사들은, 놀라서 잠에서 깬 성기사들에게 창을 겨눴다.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투항하라.”

“무슨 일입니까?”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무기를 버리지 않으면 무력으로 진압하겠다.”

요안은 대화를 시도했지만, 병사들은 듣지 않았다.

문제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요안은 천천히 검을 내렸다.

병사 하나가 달려들어 요안의 팔을 뒤로 꺾었다.

“큭!”

“뭐…… 요안 님!”

“뭐, 뭔 짓거리야!”

방에 있던 성기사와 사제 들이 차례차례 제압당했다.

병사에 의해 팔이 꺾인 요안은 담담하게 물었다.

“우리는 리에이트 교국의 성기사단입니다. 이게 지금 무슨 행패입니까?”

“신고가 들어왔다. 자세한 건 가서 얘기해 주지.”

요안은 인상을 찡그렸다.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

“켕기는 점이 없다면 순순히 따라와서 조사를 받으면 된다.”

“저, 저!”

유독 요안을 따르는 성기사가 분개했다.

요안은 나서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런 병사들 정도는, 요안 혼자 무기 없이 제압할 수 있다.

정규군인 만큼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기에 대항하지 않을 뿐이었다.

“저희는 이런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리에이트 교국 상부도 이 사실을 알게 될 거라는 점, 알아 두시길 바랍니다.”

“지금 협박하는 건가?”

“사실을 전할 뿐입니다.”

잠을 자던 성기사와 사제 들이 모두 병사들에게 끌려 나왔다.

양손은 묶였고, 무기는 압수당했다.

“오밤중에 뭔 일이람?”

“병사들이잖아.”

“저거, 성기사들 아니야?”

때아닌 소란에 몇몇 투숙객들이 구경을 나왔다.

개중에는 지그문트 마이어도 섞여 있었다.

“따라오도록.”

한 병사가 요안의 등을 창대로 쿡 찔렀다.

요안은 욱하는 마음을 꾹 참으며 병사들을 따라 여관 밖으로 나갔다.

이른 새벽인지라, 거리에는 사람 하나 없었다.

병사들은 횃불로 시야를 밝히며 어디론가 이동했다.

“요안 님,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입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섣불리 움직이는 건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요안은 허위 신고로 추측했다.

순순히 조사를 받고 풀려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멈춰라.”

요한 일행을 연행하던 병사들은 돌연 으슥한 골목에서 멈춰 섰다.

성기사와 사제 들은 주위를 살폈다.

조사를 받으러 가는 줄 알았더니, 왜 이런 곳에서 멈춘단 말인가.

병사들이 창을 고쳐 잡았다.

“준비.”

무기를 성기사와 사제 들에게 겨누었다.

당황한 요안이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무리 그들이 정규군이어도, 이건 도를 지나쳤다.

요안은 헬름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병사의 눈을 얼핏 볼 수 있었다.

동공이 풀려 있었다.

‘속았다!’

병사들은 조종당하고 있었다.

마족이 분명했다.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요안은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대응한다! 죽이는 것은 불허한다!”

동시에, 병사가 중얼거렸다.

“찔러.”

“흡!”

자세를 낮춘 요안은 발을 창대에 걸어, 옆으로 밀어내는 기예를 선보였다.

하지만 사방에서 날아오는 모든 창을 막아 내지는 못했다.

성기사들은 이를 악물고 몸으로 창을 막았다.

사제를 지킨 것이다.

“큭!”

“끄윽!”

다행히 모두 급소는 피했다.

다수를 조종하는 것이 하나라면, 정확도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요안은 완력만으로 팔을 묶고 있던 밧줄을 끊어 냈다.

우드득!

곧장 창 한 자루를 가로챘다.

성기사 하나가 눈치 빠르게 팔을 내밀었다.

서걱!

창날로 성기사의 양팔을 구속하던 밧줄을 잘라 냈다.

자유로워진 성기사가 곧장 병사 하나를 제압했다.

아무리 무기가 없다고 한들, 기사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오러도 쓰지 못하는 병사를 제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병사들은 조종당하고 있었기에, 움직임이 조금 둔했다.

“요안 님! 이쪽은 저희에게 맡기십시오!”

성기사가 악을 썼다.

인간을 홀려 조종하는 마족에 대한 기본적인 대응법이었다.

일부가 조종당하는 이들을 막는 동안, 조종하는 자를 찾아야 한다.

요안은 재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분명 근처에 있을 터!’

이런 부류는 근처에 숨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상황에 맞는 대응을 하기 위해서 눈으로 조종하는 자들을 지켜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안은 골목 바깥쪽에서 한 인영을 발견했다.

인영은 요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도망치듯 뛰기 시작했다.

‘찾았다!’

창을 한 성기사에게 넘긴 요안은 서둘러 인영을 쫓았다.

서로 간의 신뢰가 있었기에 할 수 있는 역할 분배였다.

골목 밖으로 달려 나간 요안은 발을 멈췄다.

거리를 보는 요안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건.”

수백에 달하는 사람들이 공허한 눈으로 요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 * *

지붕 위.

나는 악전고투하는 요안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집행자들의 입장을 철저히 파고든 공격이었다.

‘아무리 먼저 공격을 받는다 하더라도, 상대는 민간인.’

리에이트 교국의 성기사들은 불살(不殺)을 택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죽이는 것보다 제압하는 것이 몇 배는 어렵다.

‘하멜에 머리 깨나 돌아가는 놈이 하나 있나 보군.’

설령 실패하더라도 손해 볼 것이 거의 없는 작전이었다.

제국뿐만 아니라, 트리옌 왕국에도 마족이 나타났다는 게 되니까.

집행자들은 자연스럽게 마족을 찾을 때까지 하멜에 발이 묶일 것이다.

마족 하나를 버림 패로 쓰고, 상당한 이득을 취해 간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나라는 변수가 있는 이상, 팔베르크 제국의 의도대로 흘러가진 않을 것이다.

골목 쪽으로 눈을 돌렸다.

성기사들은 병사들을 거의 제압한 상태였다.

사제들이 제압당한 병사들을 제정신으로 돌려놓고 있었다.

‘썩 좋은 판단은 아닌데.’

조종당하고 있는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일일이 정화하는 쪽을 택하다니.

신성력 낭비다.

아직 거리의 상황을 모르니 저럴 수 있다.

다행인 점은, 성기사들은 첫 공격 이외에는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것.

‘이제 슬슬 개입해야겠군.’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집행자들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건 피해야 했다.

그래야 얼른 팔베르크 제국에 가서 마족 어디 있냐고 들쑤시지 않겠는가.

때마침 통신구가 빛났다.

* * *

푹!

“크윽!”

요안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공허한 눈의 여자가 긴 송곳으로 요안의 허벅지를 찌르고 있었다.

이를 악문 요안은 여자의 손에서 송곳을 빼앗고, 밀어냈다.

자칫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밀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미치겠군!’

요안의 얼굴에는 잔상처가 가득했다.

사람이 워낙 많았던 탓에, 모든 공격을 피하진 못했다.

그래도 거리를 가득 채운 이 인파를 뚫어야만 했다.

마족이 이 사람들 너머에 있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부자연스럽게 사람들로 거리를 채우지 않았을 테니까.

‘오러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요안은 강하다.

그러나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민간인을 공격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집행자들이 가장 까다로워 하는 마족이 이런 계열이었다.

뒤에 숨어서 온갖 까다로운 수를 쓰는 놈들.

“요안 님!”

뒤에서 합류한 성기사들이 사람들을 제압했다.

사제들이 조종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작은 도움이 크게 다가왔다.

성기사들이 길을 만들어 준 덕분에, 요안은 인파를 뚫어 내는 데 성공했다.

“허억!”

심호흡을 한 요안은 고개를 들었다.

사내아이가 분수대 근처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으며, 동공은 이상하리만치 커져 있다.

집행자의 본능이 경고했다.

마족이다.

“으.”

눈도 깜빡이지 않고 요안을 응시하고 있던 마족이 코를 감싸 쥐었다.

작은 입술 사이에서는 여러 목소리가 섞인 듯한 기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 냄새 나.”

마족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구토라도 할 듯한 표정이었다.

요안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마족을 주시했다.

“빛 냄새. 다른 사람보다 독해.”

요안은 동요하지 않았다.

때때로 신성력이 강한 성기사나 사제에게 거부반응을 보이는 마족이 있었다.

아마 비슷한 경우 같았다.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하늘에 계신 리에이트여, 미천한 종이 가는 길을 빛으로 보듬어 주시옵고…….”

마족은 도리질을 치더니, 귓구멍에 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요안은 조종당하던 사람에게서 빼앗은 단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마족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 죽일 거야?”

마족의 고개가 부자연스럽게 옆으로 꺾였다.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겁도 없이 요안에게 다가간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정거리 안까지 들어와, 뒷짐을 지고 목을 내민다.

“응? 응? 죽일 거야?”

요안은 뒤늦게 깨달았다.

눈앞의 아이는 인간으로 모습을 바꾼 마족이 아니었다.

‘빙의.’

저 아이도 조종당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상태였다.

마족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마족에게 정신을 잡아먹혔을 뿐이다.

즉, 민간인.

쉽사리 건드릴 수 없다.

갈등하는 요안을 보던 마족이 혀를 찼다.

“쯧. 재미없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뭔가를 꺼내 거꾸로 들었다.

요안의 허벅지를 찌른 것과 같은 긴 송곳이었다.

요안은 곧바로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마족은 요안이 예상하지 못한 돌발 행동을 했다.

“무슨 짓을!”

자신의 목에 송곳을 찔러 넣으려 한 것이다.

요안은 다급히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마족이 손을 움직였다.

푹!

살갗을 뚫은 송곳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마족은 인상을 찡그린 요안을 빤히 올려다봤다.

“어라.”

송곳은 요안의 손에 박혀 있었다.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송곳을 막은 것이다.

마족은 요안의 손을 보더니, 눈을 깜빡였다.

“아프겠다.”

요안은 송곳을 빼는 대신, 손을 움켜쥐었다.

송곳을 빼앗고, 다른 손으로 마족의 양팔을 붙잡았다.

‘빙의는 어디까지나 정신을 지배할 뿐!’

육체적인 능력은 그대로이기에,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아, 잡혔네.”

요안은 마족에게 신성력을 불어넣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붙잡힌 마족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 섞인 기색으로 요안에게 말을 걸었다.

“신성력 불어넣을 거지? 그럼 큰일 난다? 난 경고했어.”

“그 간악한 혓바닥, 다시는 놀리지 못하게 해 주지.”

요안이 마족의 이마를 붙잡았다.

이마를 붙잡힌 마족은 뭐가 그리 좋은지 히히 웃었다.

요안의 손에서 미세한 빛이 흘러나오는 순간, 마족이 중얼거렸다.

지금까지의 장난스러운 어조와는 다른 단호한 목소리.

“너희들.”

요안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홀려 있던 사람들이 동작을 정지했다.

“이제부터 서로 죽여라.”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기 시작했다.

성기사들도 당황했다.

이런 난전이 일어난다면, 사상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

아직 제압당하지 않은 사람이 많은 상황.

“안 돼!”

“으히히히! 히히히!”

마족의 광소와 함께, 사람들이 팔을 휘둘렀다.

무기가 서로의 급소를 찌르기 직전.

짝!

돌연 손뼉 치는 소리가 거리를 울렸다.

동시에 사람들은 석상이라도 된 듯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뜻밖의 상황에 성기사들이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손뼉 치는 소리가 들린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몰라서 따라왔는데, 다행입니다.”

요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두 손을 마주친 지그문트 마이어가 있었다.

* * *

“어? 어?”

마족은 당황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머릿속으로 명령을 내리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가 사람들의 온몸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이어 공! 어떻게……?”

“증언이라도 필요할까 싶어서 왔는데, 설마 이런 사달이 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지그문트는 태연하게 요안 쪽으로 걸어왔다.

마족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푸, 풀 냄새!”

마족은 머리를 양옆으로 휘저으며 발광했다.

요안은 마족의 이마에서 손을 떼지 않을 채 인상을 찌푸렸다.

“풀? 무슨 풀?”

“나무랑 흙, 용? 마나? 너, 너 뭐야!”

마족은 미칠 지경이었다.

리에이트의 신자들에게서는 빛의 냄새가.

살생을 저지른 자에게서는 피 냄새가.

같은 마족에게서는 어둠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이토록 많은 냄새를 몸에 지닌 인간은 없었다.

“너! 인간 아니지? 그치?”

지그문트는 대답하는 대신 마족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마족은 낯선 냄새를 맡았다.

바로 앞에 있는 성기사, 요안에게서 나는 빛의 냄새마저 덮어 버리는 강렬한 향.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짙은 냄새.

“주, 죽음?”

“요안 님, 원래 마족은 이렇게 헛소리가 많습니까?”

지그문트는 완곡하게 말을 돌렸다.

정신을 차린 요안이 신성력을 일으켰다.

마족의 이마와 요안의 손바닥 사이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아악!”

신성력이 마족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마족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요안이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늘과 빛의 신 리에이트여,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을 땅 밑으로 돌려보내시옵고…….”

어느 순간, 마족은 눈이 감기며 몸부림을 멈췄다.

요안이 기도문을 멈추고 마족의 이마에서 손을 뗐다.

눈을 감은 채 희미하게 숨을 쉬는 아이는, 더 이상 마족이 아니었다.

혀를 찬 요안이 중얼거렸다.

“도망쳤군요.”

“도망요?”

“예. 이건 빙의된 아이일 뿐입니다. 마족 본체는 따로 있을 겁니다.”

요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마족은 도망치거나 숨을 것이다.

“아무래도 하멜에 조금 더 머무르게 될 것 같군요.”

이야기를 들은 지그문트는 대수롭지 않은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신성력을 맞았으니, 힘이 빠져서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 * *

빙의를 해제한 마족은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

먼지가 소복이 쌓인 실내가 보였다.

하멜의 바깥쪽, 허물기로 예정된 건물이었다.

성기사들이 있는 거리와는 꽤 멀었다.

‘도망, 도망쳐야 한다.’

원래 위에서 내려온 명령도, 피해만 주고 도망쳐서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족은 지금 진심으로 도망치고자 했다.

성기사들은 무섭지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죽일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한 명은 아니었다.

여러 냄새가 섞인 금발의 청년이 떠올랐다.

‘그건 안 돼. 안 돼. 안 돼.’

사람을 조종하고, 홀리는 능력이 있으나 본체는 약한 마족이다.

그 청년과 직접 마주친다면 뼈도 못 추릴 것이 분명했다.

고위 마족을 만났을 때를 제외하고, 본능이 이렇게까지 경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족이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어딜 도망가?”

낯선 목소리와 함께, 목에 검날이 닿았다.

마족은 조용히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 단이 클레이모어를 겨누고 있었다.

“허튼짓하면 베겠다. 순순히 투항하도록.”

단은 마족에게 경고했다.

숨을 크게 들이쉰 마족은 씩 웃었다.

‘쇳냄새 외에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신성력을 지닌 성기사도 아닌, 평범한 기사.

이런 놈을 조종하는 것을 일도 아니다.

마족은 단과 눈을 마주쳤다.

“검을 내려라.”

마족의 나지막한 음성에, 단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마족은 단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내게 복종해라.”

초점이 점점 풀리고, 검날이 살짝 내려갔다.

그러나.

“유감이지만, 나는 도련님의 명령 외에는 듣지 않는다.”

초점이 돌아오며, 검날이 다시 올라갔다.

마족은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직접 조종했는데, 먹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 어떻게?”

“나 이제 나와도 괜찮아?”

“리옐 아가씨, 도련님께 통신하셨습니까?”

“응!”

낡은 서랍장 뒤에서, 여자아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리옐이었다.

리옐을 본 마족은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을 뻔했다.

건물 내에 청량한 풀 냄새가 가득 들어찼다.

“이건 또 뭔……!”

아찔한 감각에 눈을 감았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리옐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통신구를 내밀었다.

통신구에서 한심하다는 듯한 지그문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성력이 아니라 신성이 옆에 있는데, 그런 잔기술이 먹히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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