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7권) (48/134)

기사 가문의 대마법사 7권

글쓰냐 퓨전 판타지 장편소설

목차

가실 겁니까?

하멜의 집행자들

해치지 않아요

준비된 고급 인력

쌍방 탈취

혁명의 불씨

가짜 성배

부패한 성배

리에이트의 성자 (1)

1

가실 겁니까?

“그분의 일부를 삼킴으로써 족쇄에 묶인 나약한 몸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건 무슨 드래곤 풀 뜯어 먹는 소리지?”

“불사의 교리 중 일부입니다.”

시프 레온하트는 한때 불사의 신자였다.

리옐과 단을 습격한 아그나에 대해서도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했는데.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아마 지그문트 님께서 말씀하신 아그나는 불사자일 겁니다.”

“불사자?”

“예. 음…… 어디서부터 설명드려야 할까요.”

시프는 인상을 찡그렸다.

“불사의 신자들은 아그나를 먹습니다.”

“알고 있어. 그걸로 불사자가 된다는 얘긴가?”

“늙지도 병들지도 않으며, 설령 죽더라도 되살아나는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거죠.”

“하지만 게오르크 비옌트는 그러지 못했는데.”

게오르크 비옌트.

시프를 불사의 신자로 만든 귀족 자제였다.

그놈도 분명 아그나 고기를 먹었다.

하지만 게오르크는 불사자가 되지 못했다.

렘브란트에 의해 불완전한 아그나가 되긴 했지만, 단을 습격한 놈처럼 초인적인 재생력은 보이지 못했다.

“소량 섭취로는 효과가 없습니다. 꾸준히 다량을 섭취해야 한다더군요.”

“너도 먹었냐?”

“저는 먹지 않았습니다. 일정한 성과를 내야 교단에서 배급해 주는 식이었거든요.”

“다행이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속이 매스껍군요.”

시프는 방 뒤에 걸린 세계수의 표식을 향해 짧게 기도했다.

중얼거리는 것을 들어 보니, 세계수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지 못하던데.”

그건 사람이 아니었다.

지능이 있었고, 말도 했지만 분명 아그나에 더 가까웠다.

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사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괴물들이지요.”

“그래 보였어.”

“하지만 이상하군요. 네르갈 내부의 불사의 교단은 모두 정리를 마쳤는데 말입니다.”

“외부에서 들어왔다는 뜻 아니겠나?”

“하지만 검문이…… 흠.”

시프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팔베르크 제국이군요.”

“정답이야. 눈치가 빠르군.”

아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공간에 넣는 방식으로 들여 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렘브란트 님푸스는 저번에 게오르크 비옌트의 일에도 관여한 전적이 있었다.

“그래. 신중하게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새겨듣겠습니다.”

왕족인 만큼, 시프는 팔베르크 제국의 힘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여차하면 레온하트 왕국 정도는 무력으로 밀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제국이다.

확신이 없다면 움직이지 마라.

시프라면 알아들었을 것이다.

“참, 왕성에 소문이 하나 돌고 있습니다.”

“소문?”

“적탑 인근의 언데드를 지그문트 님께서 싹 쓸어 버리셨다는 소문입니다.”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트렸는지 모르겠군. 내가 한 일이 아닌데.”

진짜로 내가 한 일이 아니다.

요르문간드에게 박살 난 것이 구 할.

내가 잡은 건 기껏해야 일 할 정도가 전부다.

기사들이 오해한 모양이었다.

비밀로 해 달라니까.

“그렇군요. 입단속은 철저히 시키겠습니다.”

“아니라니까. 말을 하면 좀 곧이곧대로 들어라.”

시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밤말을 듣는 쥐도 그렇고, 나를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한숨이 나왔다.

* * *

“우와아아아!”

꽃잎이 하늘을 수놓았다.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레온하트 왕국과 엘비아 간의 동맹이 맺어진 기념비적인 날.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열광했다.

‘반응이 나쁘지 않군.’

발락의 폭주로 미뤄졌던 선언식이다.

민심이 흔들릴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언데드의 습격보다 레온하트 왕가의 대처가 주목을 받았다.

시프 레온하트가 왕성 내부로 사람들을 피신시킨 것이 유효했다.

‘피해가 거의 없었으니.’

다른 나라의 사절단들도 거의 모두 남아 있었다.

어떻게든 엘비아와 연을 트겠다는 일념으로 기다린 것 같았다.

유감스럽게도, 힘들어 보였지만 말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인사라도 나눌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말씀하시죠. 그대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르네 옆에는 통역으로 시프 레온하트가 직접 붙어 있었다.

한 나라의 왕자가 직접 나섰는데, 수작을 부릴 만큼 간 큰 나라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이번 일로 거의 왕세자 책봉이 유력하게 된 시프인 만큼, 더욱 그랬다.

‘머리 좀 썼군.’

내가 협상 테이블에 앉았을 때 했던 것을 비슷하게 따라 하고 있었다.

좋은 방법이었다.

요정족의 언어에 능통하며, 동맹국의 왕자이기도 한 시프다.

저만큼 좋은 견제 수단은 없었다.

“지그문트.”

“아, 시몬님.”

함지박만 한 미소를 머금은 시몬 밀러가 다가왔다.

그는 다짜고짜 나를 껴안았다.

“으하하! 이렇게까지 해 주면 내가 실패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제가 뭘 했다고 그러십니까.”

“그 많은 언데드의 사체를 밀러 상단에 넘겼지 않은가. 듣자 하니, 자네가 전부 소탕했다면서?”

그러고 보니,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요르문간드에게 박살 난 언데드의 사체 처리.

듀라한처럼 사체의 값어치가 꽤 큰 것들이 더러 있었다.

아무래도 시프가 수를 쓴 모양이었다.

“위기는 기회로 바꿀 수 있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 자네는 항상 그렇게 말하더군. 여하튼, 조만간 연락 줌세.”

시몬는 호탕하게 웃으며 떠나갔다.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추켜세워 주는 것이 떨떠름했다.

그래도 밀러 상단에 투자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내 아군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아빠!”

테라스에서 꽃잎을 뿌리던 리옐이 손을 붕붕 흔들었다.

대충 손을 들어, 화답해 주니 해맑게 웃는다.

한 숲지기가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선언식은 별일 없이 끝났다.

렘브란트 님푸스도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신경 쓰이는군.’

이쯤 되니, 리에이트 교국의 사절단이 조금 신경 쓰였다.

눈을 돌렸다.

내 신성을 꿰뚫어 본 수습 사제가 사절단 끝자락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사제들은 내 신성을 보지 못했으나, 저자는 똑똑히 봤다.

오러라고 얼버무리긴 했지만.

‘뭔가 있는 건 확실한데.’

자기 입으로는 리에이트의 신성력도 쓰지 못한다고 했다.

일단 얼굴을 기억해 뒀다.

뒤에 서 있던 단이 나지막이 물었다.

“가실 겁니까?”

“어딜?”

“리에이트 교국, 가실 거 아닙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단이 자연스럽게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많이 돌아다니긴 했다.

태초의 숲, 목오 사막, 용의 산맥까지.

퀸틴만 가면 이제 바다까지 섭렵하게 된다.

“안 가.”

“아쉽군요. 성기사와는 한번 겨뤄 보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쉬엄쉬엄해.”

“쉬는 것도 훈련의 일환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그런 뜻이 아닌데 말이야.”

* * *

발레리아 로안은 로안 아카데미 원장실에서 지내고 있었다.

저번 사건으로 적탑이 부서져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원장실 책상에는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남들은 치사량이라고 할 정도의 업무 강도였다.

정작 발레리아는 술술 서류를 처리해 나갔다.

“로안 님.”

“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요?”

발레리아는 화색이 됐다.

다른 사람과 큰 교류가 없는 발레리아를 찾아올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단연 들르는 빈도가 높은 건 지그문트.

발레리아는 얼른 서류를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그러고는 헝클어진 머리를 재빠르게 정리했다.

“흠흠,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들어가시죠.”

문이 열렸다.

싱글벙글하던 발레리아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었다.

욕지거리가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여유를 가장하고, 연기를 시작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적탑주?”

“어머, 이게 누구시람.”

발레리아는 정면의 중년인을 노려보았다.

“네르갈 한복판에 블리자드를 갈기시려던, 렘브란트 님푸스 경 아니세요?”

“비꼬는 건가?”

“제가 틀린 말 했나요?”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렘브란트에게 좋은 감정이라고는 쥐뿔도 없었다.

델 로안을 살해한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무슨 용건이시죠?”

“그런 걸 묻기 전에 차라도 한잔 대접하는 게 예의 아닌가?”

“피차 낯짝 마주 보고 차 마실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렘브란트는 면박을 받았음에도 눈 하나 깜빡 안 했다.

오히려 태연하게 발레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 한 명이 따라 붙었다.

흑탑 소속의 마법사인 것 같았다.

“델 로안 님의 서거는 나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발레리아는 두 귀를 의심했다.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천천히 원장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탄생’은 어디 있나?”

“당신이 스승님의 유품은 왜 찾는 거죠?”

“황명이다.”

“라그힐, 그 개자식은 마법도 못 쓰면서 완드는 왜 또 탐낸대요?”

원장실 내부의 마나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렘브란트는 차가운 눈으로 발레리아를 노려보았다.

팽팽한 눈싸움이 이어졌다.

사이에 낀 흑탑 마법사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금방이라도 공격 마법이 오갈 것 같은 상황.

“입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대단한 충견 납셨네요. 좀 있으면 짖기도 하시겠어요?”

“이죽거리는 건 제 스승과 똑같군.”

발레리아와 렘브란트의 눈이 마주쳤다.

먼저 시선을 피한 건 발레리아였다.

괜히 어울려 줄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안하지만, 탄생은 없어요.”

“없다고?”

“네. 제가 홀라당 태워 먹었거든요.”

발레리아는 아무것도 없는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사실이었기에, 거리낄 필요는 없었다.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드러낸 렘브란트가 진의를 살폈다.

“너.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 줄은 알고 있나?”

“완드니까 뭐 마석이 들어 있었겠죠.”

탄생 속의 씨앗은 발레리아의 화염을 견뎌 냈다.

그리고 지그문트를 만나 싹을 틔웠다.

렘브란트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 때문에 적탑을 습격한 거군요?”

“무슨 소리지?”

“시치미 떼지 마세요. 그 네크로맨서, 팔베르크 제국 소속이잖아요.”

“증거를 가져온다면 상대해 주지.”

정곡을 찔린 렘브란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자리에서 일어나, 발레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흑탑 소속의 마법사가 재빨리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툭.

마법사는 편지 봉투를 발레리아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팔베르크 황가를 상징하는 날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발레리아는 인상을 찡그리고 편지 봉투를 살폈다.

“이건 뭐죠?”

“직접 확인하도록.”

렘브란트는 왔던 것처럼 홀연히 방을 나가 버렸다.

흑탑 소속의 마법사가 헐레벌떡 렘브란트를 따라갔다.

발레리아는 한참 동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봉투를 집어 들었다.

편지를 꺼내 읽은 발레리아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 * *

바닥에 초대장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오도카니 앉은 리옐이 초대장을 읽고 있었다.

말은 또박또박 잘하지만 아직 읽고 쓰는 쪽은 부족한 리옐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초대장을 읽도록 시켰다.

내가 귀찮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그문트 마이어 공자님께. 아빠. 공자가 뭐야?”

“지체 높은 가문의 아들.”

“아하, 그럼 혼담은?”

“결혼 의논.”

“얍!”

리옐은 대답을 듣자마자 들고 있던 초대장을 쭉 찢어 버렸다.

꽤 과격한 반응이었다.

멋대로 하라고 했으니 크게 상관은 없다.

시프 레온하트가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에,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단이 찢어진 초대장을 주워 읽었다.

“코스타 공작님께서 보내셨군요.”

“뭐라는데?”

“가주님과 도련님을 초대해 진지하게 혼담을 나누고 싶다는 내용 같습니다.”

“이익!”

폴짝 뛴 리옐이 단의 손에서 초대장을 가로챘다.

구겨진 초대장이 방 한구석으로 날아갔다.

어차피 응해 줄 생각도 없었는데 말이다.

“부럽습니다. 도련님.”

“부럽긴. 죄다 혼기가 찼다는 구실로 결혼시키고 이용해 먹으려는 속셈일 텐데.”

“아닙니다. 영애께서 직접 쓰신 걸로 보이는 편지도 더러 있습니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단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좋다고 하는 여자는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난 단 아저씨 좋아!”

“리옐 아가씨…… 저도 리옐 아가씨를 흠모합니다만! 애석하게도 그런 뜻이 아닙니다.”

“으응?”

리옐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동안 나는 영약을 만들었다.

태초의 숲에서 받은 영초가 남아돌았기에, 재료 걱정은 없었다.

부족한 도구는 시몬에게 부탁해서 공수했다.

“다 됐다. 먹어라.”

나는 완성한 영약을 단에게 건넸다.

영약을 받아 든 단이 의구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먹을 수 있는 거 맞습니까?”

“이게 보기에는 좀 그래도, 맛도 좀 그럴 거야.”

“아, 그건 다행…… 음?”

유리병에 담긴 붉은 액체가 부글부글 끓었다.

단은 께름칙한 표정으로 영약을 살폈다.

끼에에에에엑!

병 속에서 귀를 찌르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놀란 단은 병을 떨어트렸다.

“우왁!”

유리병은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 공중에서 떠올랐다.

마법으로 띄운 것이다.

반응을 예측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혀를 찼다.

“그게 얼마짜린데. 깨 먹으면 쓰나.”

“무, 무, 무슨 비명이 들리지 않았습니까?”

“만드라고라가 섞여 있어서 그래. 그냥 무시해.”

유리병은 스스로 떠올라 단의 앞으로 이동했다.

단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유리병을 잡았다.

나를 한 번 보더니, 침을 꿀꺽 삼킨다.

“그, 도련님을 절대 의심하는 건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의심하는 걸로밖에 안 보이는데.”

“후, 그냥 마시겠습니다.”

단은 눈을 질끈 감고 유리병을 홱 젖혔다.

영약은 단숨에 사라졌다.

몸을 부르르 떤 단이 입을 벌렸다.

“습, 하, 스으으읍.”

“좀 맵지? 당분간 물 마시면 안 된다. 효능 날아가.”

“그, 습, 그런! 크어어어어!”

단이 불을 뿜으며 돌아다녔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불을 뿜었다.

만드라고라의 대표적인 부작용 중 하나다.

복용하면 10분 정도 입에서 불이 나온다.

뜻밖의 묘기에 리옐이 꺄르륵 웃으며 박수를 쳤다.

“크어어어어!”

한참 후, 물을 마시고 진정한 단은 불만을 토로했다.

“저는 도련님이 영약을 잘못 만든 줄 알았습니다.”

“마녀를 제외하면 약제학에 한해서는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 없는데.”

“입에서 불이 나올 줄은 몰랐단 말입니다.”

“만드라고라 얘기했을 때 알아차렸어야지.”

말을 할 때마다 입술 틈으로 불꽃이 새어 나왔다.

일시적으로 불에 대한 내성도 상승하기 때문에, 입이 데이진 않았을 것이다.

단은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크게 달라진 것 같진 않습니다만.”

“단발성으로 효능이 나오는 영약이 아니니까. 두고두고 좋은 거야.”

“그렇습니까?”

“네가 이 안에 들어간 재료의 값어치를 알면 그런 질문을 안 할 텐데.”

“……혹시 제가 마신 거, 얼마나 합니까?”

경매장에 가도 하나 구하기 힘든 영약을 쏟아부었다.

내 인건비까지 생각하면, 값어치를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대충 이 정도?”

값을 매겨서 알려 주자, 단이 딸꾹질을 했다.

속이 안 좋아진 듯 가슴을 쿵쿵 두드린다.

안색이 새파래졌다.

“제가 지금 저택 수십 채를 삼켰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되겠지.”

“평생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오냐.”

단의 충성심이 조금 무거워졌다.

* * *

리에이트 교국 변방.

검은 사제복 차림의 사람들이 늪을 건너고 있었다.

진창에 다리를 잡아먹힌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밤말을 듣는 쥐는 조용히 그들의 뒤를 밟았다.

‘최악의 환경이군.’

교국이라는 신성한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늪이었다.

나뭇가지에 쪼그려 앉은 쥐는 사제들을 주시했다.

리에이트의 사제들이 아니었다.

역삼각형과, 세로 선으로 된 표식.

불사의 신자들이었다.

‘부패한 성배를 찾으러 간다더니, 도대체 어딜 가는 거지?’

밤말을 듣는 쥐가 불사의 신자들의 뒤를 밟는 이유는 다름 아닌 지그문트의 의뢰, 부패한 성배 때문이었다.

“여기에 있는 게 확실한 건가?”

“그렇지 않았다면 대변자께서 불사자를 둘씩이나 대동시키지 않았을 테지.”

“취미도 고약하군. 무슨 이런 곳에 살고 있단 말인가.”

밤말을 듣는 쥐는 신자들의 대화를 속으로 되뇌었다.

아무래도 누군가를 찾으러 온 모양이다.

그자가 부패한 성배를 가지고 있으리라.

‘이 늪에 사람이 산다고?’

바닥은 다리를 집어삼키는 진창인 데다가, 먹을 수 있는 것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늪에는 온갖 몬스터가 가득했다.

불사의 신자들은 이곳에 올 때까지 수십 번 전투를 거쳤다.

대부분 독기를 품은 것들이 많아 고역을 치러야 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닌데.’

그런 쥐의 생각이 무색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오두막이 나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빈집 같았다.

거미줄이 한 면을 뒤덮고 있었고, 창문은 먼지로 가득했다.

하지만 굴뚝에서는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찾았군.”

“바로 돌입할까?”

“시간은 끌지 말라고 하셨다.”

불사의 신자들은 곧장 오두막으로 접근했다.

신자들이 ‘불사자’라고 부르는 괴물들이 앞장을 섰다.

힘으로 진창을 벗어난 불사자들은 오두막의 앞마당까지 다다랐다.

푸욱!

그 순간, 불사자 하나가 진창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젠장! 알고 있었나?”

“주위 경계해!”

신자들이 각각 무기를 뽑아 들고, 주위를 살폈다.

늪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 신자가 진창 속으로 쑥 들어갔다.

“으아아아악!”

옆에 있던 신자가 검으로 진창을 찔렀다.

하지만 애먼 진흙만 묻어 나올 뿐이었다.

“뛰어!”

오두막은 진창이 아닌 단단한 땅에 있다.

일단 사람을 잡아먹는 진흙 밭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불사의 신자들이 허겁지겁 땅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흙이 발목을 붙잡아, 그 속도는 턱없이 느렸다.

쑤욱!

사람 둘이 더 사라졌다.

최종적으로 땅에 올라온 것은 신자 둘과, 불사자 하나가 전부였다.

공포에 질린 신자는 털썩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다.

다른 하나는 그나마 냉철했다.

단시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오두막으로 돌입했다.

쾅!

발로 걷어차 문을 열었다.

오두막 안에는 짙은 어둠이 들어차 있었다.

빨려 들어갈 듯한 감각에, 신자가 뒤로 물러섰다.

“소란스럽구나. 조용히 하지 못할까.”

어디선가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밤말을 듣는 쥐는 인상을 찡그렸다.

귀를 슥 닦아 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끄으으!”

기도하던 신자는 귀에서 피를 줄줄 흘렸다.

문을 걷어찬 신자는 양쪽 귀를 틀어막고 소리쳤다.

“비겁하게 숨어 있지 말고, 나와라!”

“조용히 하라 했을 텐데.”

밤말을 듣는 쥐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오두막 지붕을 뒤덮은 거미 한 마리를.

거미가 기도하던 신자를 덮쳤다.

“끄아아악!”

불사자가 움직였다.

손이 기괴하게 움직이며 검과 같은 모양새로 변형했다.

곧장 거미의 다리를 잘라 냈다.

서걱!

잘린 부분에서 회색빛의 안개가 터져 나왔다.

안개에 뒤덮인 불사자가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을 쳤다.

그 틈에, 불사의 신자가 거미의 머리를 찔렀다.

푹!

검을 뽑자, 이번에는 안개 대신 녹색 피가 터져 나왔다.

신자 쪽으로 네 개의 눈을 돌렸던 거미가 힘없이 쓰러졌다.

“허억, 헉.”

심호흡을 한 신자는 기세등등한 기색으로 오두막을 향해 소리쳤다.

“네 부하는 죽었다! 모습을 드러내라! 마녀!”

“오, 이런.”

늙은 목소리, 마녀는 참으로 안타깝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녀석은 내 부하가 아니란다. 이 근처에 집을 지은 새끼 거미일 뿐이지.”

“뭐?”

불사의 신자는 검을 세우고 주위를 살폈다.

밤말을 듣는 쥐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수십 개의 기척을.

“어, 어?”

수많은 거미들이 여덟 개의 다리를 바삐 놀리며 진창을 건너오고 있었다.

불사의 신자는 허망한 표정으로 검을 떨어트렸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늪을 뒤덮을 정도로 많은 수.

승산은 없었다.

“끄아아아아아……!”

단말마와 함께, 거미들이 오두막을 뒤덮었다.

불사자와 신자는 거미에 뒤덮여 보이지도 않았다.

어느 순간 비명도 끊겼다.

십중팔구 죽었을 것이다.

밤말을 듣는 쥐는 그 끔찍한 광경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일단 보고가 먼저다.’

자리를 뜨려는 순간.

쥐는 시선을 느끼고 동작을 멈췄다.

조용히 눈을 돌렸다.

나뭇가지에 앉은 까마귀 한 마리가 쥐를 지켜보고 있었다.

까마귀가 부리를 열자, 기이하게도 노파의 음성이 새어 나왔다.

“너는 누구지? 일행인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왕성에 숨어들 정도로, 기척을 숨기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마녀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쥐를 찾아냈다.

‘젠장!’

밤말을 듣는 쥐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뭇가지를 박차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까마귀는 쥐의 등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까악.

그리고 보통 까마귀처럼 울었다.

* * *

“커억!”

가까스로 늪을 빠져나온 밤말을 듣는 쥐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불사의 신자들은 부패한 성배를 찾으러 간다고 했다.’

즉, 부패한 성배는 마녀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를 해야 했다.

급한 대로 통신구를 꺼내 들었다.

“응? 이건…….”

밤말을 듣는 쥐의 안색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양손이 숯처럼 까맣게 변색되어 있었다.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늪을 돌아보았다.

늪 속의 어둠이 가만히 밤말을 듣는 쥐를 응시했다.

밤말을 듣는 쥐는 암국 지부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곧장 자신의 팔을 저주에 관해 박식한 정보원에게 보였다.

정보원은 쥐의 팔뚝을 보고 혀를 찼다.

“썩은 살갗의 저주군요. 알고 계실 겁니다.”

“모를 리가.”

암국에 오래 몸을 담은 만큼, 대부분의 정보는 꿰고 있는 쥐다.

물론 썩은 살갗의 저주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1주일간은 몸의 색이 썩은 듯 새까맣게 변하는 것에서 그친다.

하지만 1주일이 지나기 전까지 해주하지 못하면, 변색된 몸이 전부 썩어 죽게 된다.

“그나마 다행이군. 썩은 살갗의 저주는 해주법이 명확하니까.”

“있긴 있지요. 당장 리에이트 교국만 찾아가도 사제들이 해주할 수 있다고 할 겁니다.”

정보원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토해 내듯 말했다.

“하지만 이 경우는 해주할 수 없습니다.”

“뭐? 왜지?”

“지부장님의 말씀대로라면, 이건 그냥 저주가 아니라 마녀의 저주니까요.”

마녀의 저주는 언데드나 네크로맨서의 저주와 궤를 달리한다.

보통 마법사의 마법과 대마법사의 마법이 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정보원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마 지금 살아 있는 사람 중 이 저주를 해주할 수 있는 건, 저주를 건 장본인인 마녀뿐일 겁니다.”

마녀는 밤말을 듣는 쥐를 이미 한번 적대했다.

지금 가서 해주해 달라고 한들, 아무런 소용없으리라.

이미 불사의 신자들과 한통속이라고 오해한 모양이었으니.

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암살자에게 있어 죽음은 그리 멀리 있지 않은 것을…….’

뒷세계에서 그만큼 오래 살아남은 인물은 드물었다.

죽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1주일의 유예가 오히려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지부장님,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선 하던 일은 마쳐야겠지. 레온하트로 복귀한다.”

* * *

네르갈, 코스타 공작가.

파울 레드라인은 고뇌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와인 때문이었다.

유리잔에 담긴 와인이 흔들릴 때마다, 파울의 눈동자도 같이 흔들렸다.

‘한 잔쯤은…….’

지그문트와의 내기에서 진 후로, 금주 중인 파울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유혹을 참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이렇게 짜증 나는 공간 속에서는 더욱 그랬다.

“반갑습니다. 영애.”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우아하고 가식적인 인사가 오간다.

수많은 눈동자가 굴러가며 서로의 눈치를 본다.

조용한 전장, 사교계였다.

새롭게 중앙으로 진출한 귀족의 자제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였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

파울은 레드라인 후작에게 등을 떠밀리다시피 이 연회에 발을 들였다.

레드라인 후작은 사람을 많이 사귀라 조언했지만, 파울은 귓등으로 흘려 넘겼다.

이런 자리는 딱 질색이었다.

“후.”

차라리 훈련이나 하고 싶을 정도였다.

의자에 앉아 짜증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파울에게 다가서는 이는 하나 없었다.

파울의 성질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뭣 모르는 귀족 자제 몇몇이 겁도 없이 말을 붙였지만.

“저…….”

“꺼져라.”

“넵.”

심기 불편한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모양새에, 바로 꼬리를 내리고 도망쳤다.

파울의 반경 1미터 내로는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다.

그때, 귀족 자제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분은?”

“마이어 공자님이시다. 진짜로 오실 줄이야.”

뒤늦게 지그문트 마이어가 도착한 것이다.

귀족 자제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우르르 문 쪽으로 몰려갔다.

파울은 다리를 꼬고 앉아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그문트 님,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저는……!”

“반갑습니다.”

치열한 경쟁이 시작됐다.

알려진 바로는, 지그문트 마이어는 사교계에 발을 들인 적이 없다.

그 때문에 먼저 친분을 쌓아 두는 쪽이 유리했다.

자제들은 제 부모에게 여러 조언을 들었기에, 저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저번과 다르군.’

건국제 때는 몇몇 기사들에게만 알려져 있던 지그문트 마이어다.

그때는 시몬 밀러 정도를 제외하곤 말을 거는 이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파울을 제외한 모두가 말 한마디 붙여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파울.”

파울은 고개를 들었다.

지그문트가 앞에 서 있었다.

“왜 알은척이지?”

“혼자 앉아 있길래 불쌍해서?”

자제들은 기겁을 했다.

처음으로 말을 건 사람이 망나니 파울인 것도 놀라울 지경인데, 파울이 적의를 드러냈음에도 태연하게 대꾸까지 한다.

“빌어먹을 놈.”

그러나 파울은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다른 귀족 자제였다면 그대로 칼부림이 일어났을 텐데.

혀를 찼을 뿐, 별다를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이다.

“잠시 이쪽으로 와 주겠나?”

“예? 아, 예!”

정중하게 시종을 부른 지그문트는 손수 와인 두 잔을 따랐다.

그리고 그중 한 잔을 파울에게 건넸다.

파울은 몹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잔과 지그문트를 번갈아 보았다.

“무슨 뜻이지?”

“한잔하자는 뜻.”

지그문트는 능청스러운 투로 잔을 권했다.

파울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건국제 전까지만 해도 하루의 대부분을 취해 살았던 파울이다.

지그문트가 권한 술은 유독 맛있어 보였다.

“그동안 잘 참았는데,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파울은 결국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다.

지그문트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든, 저건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잔을 받은 파울은 가만히 자줏빛의 와인을 바라보았다.

“건배.”

지그문트가 잔을 내밀었다.

파울은 마지못해 잔을 부딪쳤다.

부딪친 잔 속의 와인이 탐스럽게 흔들렸다.

잔이 입술에 거의 닿았다.

꿀꺽, 꿀꺽.

파울은 와인을 마셨다.

목울대가 요동쳤다.

와인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오랜만에 맛본 술은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

‘스며든다!’

고작 와인 한 잔일 뿐인데, 파울에게 있어서는 천하 일미나 다름없었다.

지그문트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흐흐, 맛있나?”

잔의 투명한 바닥이 보이고 나서야, 파울은 정신을 차렸다.

미소 짓는 지그문트가 보였다.

파울이 보기에는 사악한 악마가 따로 없었다.

“무슨 속셈이지?”

“자리를 옮기지.”

지그문트는 파울과 함께 이동했다.

귀족 자제들이 둘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테라스로 나온 지그문트는 대뜸 파울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이게 뭐지?”

“펼쳐 봐.”

파울은 종이를 펼쳤다.

서대륙 전체가 그려진 지도였다.

누가 그렸는지, 그림이 정교하다.

상등품 같았다.

“부탁 하나 하려고.”

“내가 순순히 네 말에 따를 거라고 생각하나?”

“손해 볼 거 없는 얘기야. 오히려 네 쪽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하면 모를까.”

지그문트는 확신에 차 있었다.

파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들어만 보겠다.”

“좋은 생각이야. 그 지도를 보면, 표식이 있을 거다.”

파울은 지도를 살폈다.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에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거, 전부 던전이야.”

“헛소리. 서대륙의 던전은 모두 공략됐을 텐데.”

“그거야말로 헛소리지. 서대륙에 미개척지가 얼마나 많은데, 그런 낭설을 믿나?”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파울은 종이를 접었다.

만약 지그문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지도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돈을 준다고 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아마 왕국에 바치면 작위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직접 던전을 공략하는 쪽이 이득일 텐데?”

“원래는 그 말대로, 내가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전부 공략할 생각이었어.”

지그문트는 저택 안쪽을 흘겨봤다.

테라스 쪽을 주시하는 귀족 자제들이 보였다.

“보다시피, 조금 바빠져서 말이야.”

“그래서 내게 이걸 넘긴다는 건가?”

“내가 그 귀한 걸 그냥 넘기겠냐?”

“역시 꿍꿍이가 있었군.”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표시된 던전의 보상은 모두 영초와 돈이었다.

지그문트는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어서, 계륵이 된 것.

“난 네가 강해지면 좋겠어.”

“개자식. 내가 약하다는 소리냐?”

“강하지. 또래에 비하면.”

나이를 생각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것이 파울 레드라인이다.

하지만 지그문트가 생각하기에, 아직은 부족했다.

팔베르크 제국과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됐을 때, 저 정도로는 쪽도 못 쓴다.

“그 지도를 넘겨주지. 보상도 전부 가져도 좋아. 대신, 나중에 부탁 하나만 들어줘.”

“부탁? 금주 같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할 거면…….”

“그런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지그문트는 픽 웃었다.

파울에게 부족한 것은 경험.

서대륙을 돌아다니며 던전을 공략하다 보면, 자연스레 약점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줄기차게 굴려야 하니, 이 정도 투자는 아깝지 않다.

“어때, 할래?”

* * *

“부패한 성배, 찾았습니다.”

네르갈, 빈민가.

밤말을 듣는 쥐는 지그문트와 접선했다.

지그문트는 조금 감탄한 기색이었다.

“이렇게까지 빨리 찾아낼 줄은 몰랐는데.”

“소재만 찾았을 뿐, 물건을 확보하진 못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야. 교국은 수년 동안 찾아다녔는데.”

밤말을 듣는 쥐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부패한 성배는 한때 리에이트 교국의 성유물이었다.

그것은 모종의 이유로 타락했고, 이제는 교국의 치부나 다름없는 물건이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난을 당하는 바람에, 교국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고 있었다.

“재밌는 건 부패한 성배가 리에이트 교국에 있다는 것이죠.”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지그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밤말을 듣는 쥐의 눈을 직시했다.

“팔 내밀어 봐.”

“갑자기 무슨…….”

“싫음 말고.”

밤말을 듣는 쥐는 짧은 고민 끝에 쭈뼛쭈뼛 양팔을 내밀었다.

지그문트는 쥐의 소매를 걷어 붙였다.

새까맣게 변색된 팔뚝이 드러났다.

“부패한 성배를 가지고 있는 게 마녀인가?”

“흠, 그걸 어떻게……?”

“그야 이건 마녀의 저주니까.”

밤말을 듣는 쥐는 쓰게 웃었다.

놀라울 정도의 안목이었다.

“미리 인사드려야겠군요. 저는 아마 곧 죽게 될 겁니다.”

“죽어? 왜?”

“이 썩은 살갗의 저주는 해주할 수 없으니까요.”

멀뚱히 쥐를 보던 지그문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잘못 알고 있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그 저주, 해주할 수 있어.”

지그문트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유려한 글씨체로 뭔가를 썼다.

요정족의 언어였다.

“엘비아의 필립을 찾아라. 내 이름을 대면 해주해 줄 거야.”

밤말을 듣는 쥐는 얼떨결에 소개장을 받아들었다.

지그문트는 변색된 정도를 살피더니, 정확히 저주 받은 때를 짚어 냈다.

“저주를 받은 지 나흘 정도 됐네. 지금 바로 출발하면 늦진 않을 거야.”

“어째서……?”

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태껏 지그문트는 다른 고객들과 달리 쥐와 선을 그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거래자의 관계로 남으려 했다.

그런데 지그문트는 밤말을 듣는 쥐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

그것도 아주 당연하다는 얼굴로.

“뭐 사람 살리는데 이유까지 붙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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