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47/134)

7

신을 노리는 자들

광장의 혼란이 어느 정도 사그라들자, 기사들은 적탑 쪽으로 파견됐다.

요르문간드뿐만 아니라 언데드들이 출몰하는 곳도 적탑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적탑 인근에 다다른 기사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여태껏 우리가 상대 했던 건…… 고작 일부였나.”

광장에 들이닥친 언데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적탑 인근은 죽은 언데드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얼핏 봐도 천을 훌쩍 넘기는 수.

“그런데, 누가 이 많은 언데드를 다 처치한 거지?”

레온하트 왕국의 최고 전력이라고 평가 받는 레드라인 후작과 적탑주는 광장에 있었다.

왕가의 병력도 광장 쪽에 집중됐기 때문에, 이런 의문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스켈레톤이나 좀비 같은 저위 언데드가 대다수긴 했지만.

듀라한이나 밴시 등 고위 언데드의 사체도 섞여 있었다.

“일단 가 보자고.”

기사들은 조심스럽게 적탑 쪽으로 전진했다.

생존자를 찾고, 혹시 목숨이 붙어 있는 언데드가 있다면 처리해야 했다.

언데드의 수는 적탑에 가까워질수록 많아졌다.

부스럭.

적막을 깨는 소리에, 기사들의 신경이 곤두섰다.

검을 뽑아 들고, 소리가 들린 방향을 주시한다.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인 가운데.

한 사람이 언데드를 밟아 으스러트리며 비척비척 걸어왔다.

“지, 지그문트 마이어 님?”

선언식에 참여한 기사들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요정족의 은인이자 동맹의 주역, 지그문트 마이어.

선언식 때와는 달리 몹시 초췌해 보였다.

한 손으로는 웬 사람의 뒷덜미를 붙잡고 있었다.

“어.”

지그문트는 걸음을 멈췄다.

뒤늦게 기사들을 발견한 것이다.

지그문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수고하십니다.”

“예? 아, 옙.”

길 가다 마주친 분위기였다.

기사들도 얼떨결에 마주 인사했다.

지그문트는 기사들을 지나쳐 계속 걸어갔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냥 보낼 뻔했다.

한 기사가 다급히 지그문트를 불러 세웠다.

“저, 지그문트 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예?”

“그 사람은 누굽니까?”

“이거요? 네르갈에 언데드를 푼 네크로맨서입니다.”

“……설마, 직접 잡으신 겁니까?”

지그문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난처한 듯 웃으며 검지를 입술에 올린다.

“비밀로 좀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예?”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그문트는 다시 지친 발걸음을 옮겼다.

기사들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일개 군대에 필적하는 수의 언데드가 죽은 자리.

걸어 나온 사람은 오직 지그문트 마이어뿐이었다.

“이렇게 많은 언데드를 저지하고, 주모자까지 잡아냈다고? 혼자서?”

지그문트가 처치한 언데드도 많았지만, 실제로는 요르문간드에게 죽은 언데드가 대다수였다.

그러나 기사들이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요르문간드는 괴물이니, 당연히 언데드의 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기사들은 지그문트 마이어가 이 많은 언데드를 처치했다고 오해했다.

“그러고 보니, 그 커다란 뱀도 어느 순간 사라졌지.”

“전부 저 사람, 아니, 저분이 홀로 하셨단 말인가.”

가공할 만한 업적을 세우고도, 그것을 자랑하거나 내세우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적을 숨기고, 별일 아니라는 듯 행동한다.

지그문트의 등을 응시하던 한 기사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영웅.”

“확실히 그것 말고는, 수식할 만한 단어가 없군.”

그 말 한마디에, 기사들이 동요했다.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지그문트가 듣는다면 뒷목 잡을 소리였다.

* * *

이튿날.

“흐아암.”

전에 머물던 별궁의 방이었다.

호화로운 침대에 드러누운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배에는 행복한 표정의 리옐이 엎어져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까지 조금 졸렸다.

‘엘비아의 사절단을 진정시키라니. 걔들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구먼.’

내가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건 레온하트 왕가에서 내린 특명 때문이었다.

소동으로 놀란 요정족을 진정시키고, 변심의 기색이 있으면 막아라.

귀족들은 동맹이 수포로 돌아갈까 봐 호들갑을 떨었다.

정작 엘비아의 사절단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겁먹은 요정족도 있었지만, 리옐을 잠시 대여해 주니 금방 진정됐다.

그걸로 내 특명은 끝이었다.

‘나가지도 못하게 하니. 원.’

검이라도 휘두르고 싶었는데, 큰일을 했다고 푹 쉬란다.

덕분에 이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게 됐다.

문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계세요?”

“계신다.”

“들어갈게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발레리아였다.

내 배에 자리 잡은 리옐 때문에 일어나지 못했다.

손으로 대충 인사하자, 발레리아는 기가 차다는 얼굴이 됐다.

“애 어리광 좀 그만 받아 주세요.”

“너도 어릴 때는 이랬어.”

“저는 독립적이고 의젓한 아이였거든요?”

“양심이 없군. 과거사 한번 풀어 볼까?”

“큼, 넘어가죠.”

발레리아는 현 상황을 설명했다.

선언식은 연기됐고, 사람들은 뒷수습에 나섰다.

다행히 왕성에도 별일이 없었다고 한다.

레드라인 후작과 발레리아가 버티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 쪽이 더 이상한 거겠지.

“렘브란트는 별 움직임이 없었냐?”

“네. 지금도 조용히 배치된 방에서 대기하고 있다고 하네요.”

조금 의아했던 점은, 렘브란트 님푸스가 너무 조용히 있었다는 것이다.

발락 리빙데드가 잡혔음에도 동요조차 하지 않았다.

‘제일 가능성이 높은 건, 역시 꼬리 자르기.’

발락 리빙데드는 계획에서 벗어나 독단으로 움직였다.

렘브란트는 거기에 합세하는 대신, 방관을 택한 걸지도 모른다.

가설이지만, 발락의 즉흥적인 성격을 고려하면 충분히 있을 법한 얘기다.

“네가 처리한 놈들은?”

“전부 시간 끌기였어요. 생포한 놈들도 있는데, 감옥에서 전부 죽어 버렸다더라고요.”

“죽었다고?”

“처음부터 몸에 독이 퍼진 상태였어요.”

혀를 찼다.

하여튼 철두철미한 건 알아줘야 한다.

선언식에 있던 놈들이 전부 조무래기였다면, 시선 끌기용일 확률이 높았다.

역시 발락이 무슨 목적으로 적탑에 있었는지부터 알아봐야 했다.

“발락은? 설마 죽은 거 아니지?”

“다행히 살아 있어요. 지하 감옥에 투옥됐고, 몇 시간 전에 정신을 차렸다더라고요. 바로 심문을 시작했는데, 영 진척이 없나 봐요.”

“쯧. 그놈 입 여는 게 뭐 얼마나 어렵다고.”

아무래도 그쪽에는 내가 직접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이어서 발레리아는 수습 마법사가 무사하다는 안부를 전해 왔다.

자신 외에 암살자를 처치한 사람이 있다는 등, 잡다한 이야기도 했다.

그러던 중, 발레리아는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려했던 대로, 적탑이 완전 박살 났더라고요.”

마탑주의 방에 있던 요르문간드가 거대화하며 부서진 것으로 추정됐다.

외부는 견고하지만, 내부에서 일어난 충격에는 다소 약한 면이 있는 마탑이다.

더군다나 요르문간드가 언데드를 떨쳐 내기 위해서 들이받기까지 했으니.

간신히 무너지는 건 면했으나, 그 꼴은 말이 아니었다.

“레온하트 왕가에서 무상으로 지원해 주겠다고 해서 살았어요.”

“이참에 튼튼하게 좀 지으라고 해라. 두 번이나 무너진 마탑은 적탑밖에 없을 거다.”

“흠흠,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적탑에 투자 좀 하실 용의가 있으신가요? 건물 보강에 보탤 돈이 필요했거든요.”

“투자? 하면 뭐가 좋은데?”

발레리아는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하나뿐인 제자의 기분이 좋아집니다.”

“에잉.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얘는 돈을 다 어디다 흘리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동전 한 줌을 꺼냈다.

발레리아는 눈치 빠르게 손을 모아 내밀었다.

“옛다. 용돈.”

“아싸! 어? 백금화?”

금액을 확인한 발레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벼룩이 좀, 많이 크네요?”

“왜. 더 주랴?”

“아뇨. 그냥 이 거금의 출저가 궁금해서요.”

“그냥 떨어져 있길래 주웠는데.”

예전에, 요정족을 사고파는 경매장에서 죽은 귀족들의 돈을 챙긴 적이 있다.

전 재산을 들고 온 놈들도 적잖이 있어서, 꽤 많은 돈을 주울 수 있었다.

나는 사치를 부리는 편도 아니라, 돈이 빠져나갈 일이 없다.

그때 돈이 아직도 남아 있었을 뿐이다.

“또 어디서 무슨 짓을 하셨…….”

“도로 내놔.”

“아,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요!”

내가 부려먹은 것이 있어서, 결국 줬다.

그 와중에도 리옐은 잘만 잤다.

* * *

그날 저녁.

나는 레드라인 후작을 따라 걸었다.

왕성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회색 건물이 보였다.

병사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는 등 경비가 삼엄했다.

문 앞에 있던 기사가 경례했다.

“충성.”

“예의 네크로맨서 심문 건으로 왔네.”

“전해 들었습니다. 하면 옆에 분께서…….”

“반갑습니다. 지그문트 마이어입니다.”

기사는 뭔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하 감옥 쪽에는 처음 왔기에, 일면식이 없을 텐데.

선언식에서 본 걸까.

명부에 글을 쓴 기사가 문을 열었다.

“입장하셔도 좋습니다. 안내가 필요하십니까?”

“괜찮네. 내가 안내역으로 온 거니까. 그 전에, 잠깐.”

레드라인 후작은 나를 멈춰 세웠다.

뭔가 싶어서 보니, 진지하게 조언을 해 줬다.

“이곳은 중범죄자들만 수감되어 있는 감옥이라네. 보기 썩 좋지 않을 거야. 자네가 원한다면 그 네크로맨서만 따로 끌어낼 수도 있는데.”

“배려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시간이 아까워서 말입니다.”

렘브란트가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거라면, 지금 알아 둬야 한다.

레드라인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장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서늘하군.’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공기가 조금 차가워졌다.

발소리가 울려서 스산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조명도 최소한으로만 사용하는지, 램프가 배치된 간격이 넓었다.

“히히! 히히히히히! 햇님이 보고 싶어! 예쁜 햇님!”

“저 좀 꺼내 주세요. 네? 제발요! 다음부터는 안 아프게 살살 찌를게요!”

“993, 986, 979, 972…….”

수감자들이 괴성을 지르는 복도를 지나갔다.

전부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레드라인 후작은 나를 보며 사뭇 감탄한 기색이었다.

“혹시 이런 곳에 온 것이 처음이 아닌 건가?”

“이번 생에는 처음일 겁니다. 왜 그러십니까?”

“나는 처음 왔을 때 진저리를 쳤거든. 한데 자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길래 말이야.”

“겁이 없는 성격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후작의 경고와 달리, 지하 감옥은 깔끔한 편이었다.

수감자들이 조금 시끄러웠지만, 이 정도는 애교 수준이다.

‘마계의 감옥에 비하면 천국이 따로 없군.’

수감자는 좁은 방에 가둬져 있었는데,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말하는 걸 보니 식사까지 제공하는 것 같았다.

국왕도 착해서 탈이다.

레드라인 후작과 나는 가장 깊숙한 곳, 격리된 방에 다다랐다.

“충성.”

따로 간수까지 뒀다.

간수가 철문을 열자, 창살 너머로 발락 리빙데드가 보였다.

침대 하나 없는 감옥 구석 쪼그려 앉아, 퀭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스 마이어에게 맞아 퉁퉁 부은 얼굴이 아직도 낫지 않은 모양이다.

소리를 들었는지, 발락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발락 리빙데드의 혐의는 이미 입증된 상태였다.

적탑 수습 마법사가 나서서 증언을 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 결과, 발락은 마나 서클을 제거 당하고 투옥됐다.

“잠깐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그래. ……동정하진 말게.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세상의 이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 그렇게 무른 사람 아닙니다.”

지그문트의 요청으로, 간수와 레드라인 후작은 감옥 밖으로 나갔다.

레드라인 후작은 쇠창살의 강도와 방의 구조를 확인했다.

유사시에 돌입할 수 있도록, 문 앞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취조는 어떻게 됐나?”

“이미 수차례 진행했습니다.”

“알아낸 건?”

“송구합니다. 어지간한 고통에도 비명 한 번 안 지르더군요. 지독한 놈입니다.”

레드라인 후작은 지그문트가 걱정됐다.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청년.

이런 쪽으로는 경험이 부족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큰 오산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문 너머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놀란 레드라인 후작과 간수가 일제히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드라인 후작은 검에 손을 가져갔다.

“문 열게. 어서!”

간수가 열쇠를 찾아 다급히 문을 열었다.

발락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지그문트가 보였다.

간수는 질겁했다.

쇠창살 안에는 또 왜 들어갔단 말인가.

“그, 그만둬!”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구석에 몰린 발락은 뭔가에 묶이기라도 한 듯,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지그문트는 발락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이마를 드러내도록 했다.

중지에 입김을 불어넣더니, 딱밤을 때렸다.

딱!

이마를 맞은 발락의 눈이 순간적으로 흰자를 드러냈다.

입이 벌어지더니,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절규를 토해 냈다.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악! 아파! 아파아악!”

레드라인 후작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간수를 바라봤다.

간수의 말에 의하면, 발락은 고통에 굴복하지 않는 독종이었다.

그런데 딱밤 한 대 맞았다고 저러고 있으니.

당황한 간수가 중얼거렸다.

“이, 이상하다. 서클을 파괴당할 때도 웃고 있던 놈인데.”

“어? 언제 들어오셨습니까? 아직 안 끝났는데 말입니다.”

지그문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레드라인 후작은 지그문트를 살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정말 딱밤만 때린 것 같았다.

“자네, 뭐 하고 있나?”

“보시는 대로, 딱밤을 때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이긴 하는데…….”

레드라인 후작은 말을 삼켰다.

도대체 어떻게 때렸기에 저토록 괴로워한단 말인가.

간수와 레드라인 후작을 발견한 발락이 쉰 목소리로 간절하게 외쳤다.

“거기! 살려 줘어! 제발 이 미친놈 좀 어떻게 해 봐!”

“엄살이 심하군요. 그냥 딱밤 때리는 건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간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락의 눈에 두려움이 들어찼다.

레드라인 후작은 검에서 손을 뗐다.

“괜한 참견이었군. 우린 나가 있겠네.”

“……철창 열쇠는 두고 나가겠습니다. 어떻게 여신 건지 모르겠지만, 끝나고 잠가 주십시오.”

간수와 레드라인 후작이 조용히 방을 나갔다.

발락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들어찼다.

‘이게 무슨 개 같은!’

발락 리빙데드는 통증에 둔한 편이다.

목오 사막에서 팔목을 잘렸을 때도.

심지어 서클이 파괴당했을 때도 크게 아프지 않았다.

가끔 비명을 지르긴 하지만, 그것은 아픈 척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그문트의 딱밤은 달랐다.

딱!

손가락이 이마를 때렸다.

두꺼운 못을 박아, 망치로 두드린 듯한 충격이 뇌를 흔들었다.

정신이 잠깐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끔찍한 고통이 머리를 강타했다.

발락이 살아가면서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통증이었다.

갈라진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으어, 어허어억……. 끅.”

누가 인두로 지진 것처럼 이마가 뜨거웠다.

지그문트는 집요하게 때린 곳을 또 때렸다.

발락은 남은 힘으로 악을 썼다.

“차라리 죽여! 죽이라고! 이 개자식아아아!”

“그러게 처음에 말로 하자고 했을 때 협조했어야지.”

이미 한 번 대화를 시도했으나, 발락은 협조를 거부했다.

지그문트는 중지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수습 마법사의 신경을 차단해, 고통을 일시적으로 느끼지 못하도록 한 것과 반대.

발락은 지금 평상시보다 수십, 수백 배에 달하는 고통을 느끼는 상태였다.

냉정한 성격의 지그문트도 좀처럼 쓰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다.

“대답해라. 적탑에 간 이유가 뭐지?”

“대! 대마법사의 유품!”

“대마법사의 유품?”

지그문트는 눈살을 찡그렸다.

네르갈, 적탑에 있는 대마법사의 유품은 하나뿐이었다.

발레리아가 태워먹은 완드, ‘탄생’이었다.

“그걸 왜 찾았지?”

“몰라! 찾아오래서 찾으려고 한 것뿐이라고!”

“아직 덜 맞았군.”

발락은 식은땀을 흘렸다.

저 고통을 다시 겪느니, 죽는 것이 낫다.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짚었다.

“후계자!”

“뭐?”

“후계자 때문이라고 했어! 더는 몰라!”

머릿속에 불현듯 뭔가가 스쳐 지나간 지그문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탄생 속에 잠들어 있던 세계수의 후계자.

“리옐.”

* * *

별궁.

리옐은 드물게도 심통이 난 상태였다.

자고 일어나니 지그문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항상 곁에 있던 마리나도 이번에는 없다.

요정족도 잠시 별궁을 비운 상태.

리옐을 달래 줄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리옐 님, 아직도 삐지셨습니까?”

“삐진 적 없는데.”

“그,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단은 볼을 복어처럼 부풀린 리옐을 앞에 두고 쩔쩔 맸다.

묘하게 아이를 잘 보는 지그문트.

천성적으로 아이를 좋아하는 마리나.

그 둘과 함께 다니다 보니, 단은 리옐을 대하는 법을 잘 몰랐다.

여러 방법을 시도하던 단은 지그문트의 조언을 떠올렸다.

“……그럼 산책이라도 다녀오지 않겠습니까?”

“산책?”

리옐이 흥미를 보였다.

여태껏 별궁에 갇혀 있다 보니, 답답한 감이 있었다.

더군다나 호기심이 많은 리옐이다.

지그문트와 함께 외출을 할 때면 매번 좋아하곤 했다.

“예. 거리도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을 겁니다.”

“맛있는 거?”

리옐은 결국 단의 감언이설에 넘어갔다.

단은 탄생초가 담긴 화분을 챙겨 들었다.

매번 마리나가 들곤 했는데, 생각보다 무거웠다.

남은 손으로 리옐의 손을 잡고, 방 밖으로 나갔다.

-어머, 리옐 님.

복도를 지나다가, 하이엘프 르네와 마주쳤다.

숲지기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단은 언어가 통하지 않았기에, 목례를 통해 인사만 했다.

-어디 가시는 건가요?

-산책!

-그렇군요. 재밌게 놀다 오세요.

-응!

짧은 대화를 마치고, 단과 리옐은 별궁 밖으로 나갔다.

지그문트의 주변 인물은 비교적 별궁 출입이 자유로웠다.

덕분에 별궁 밖으로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와. 우와!”

“그러고 보니 저녁에는 처음 나오시는군요.”

“응!”

리옐은 몇 번 네르갈 거리에 나간 적 있었지만, 전부 낮이었다.

저녁의 거리는 낮과 달랐다.

이곳저곳에서 빛이 반짝인다.

리옐은 눈을 빛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단 아저씨. 저기! 저기 가자!”

“자, 잠시만 기다리십쇼! 아가씨!”

단은 리옐에게 이끌려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거리에서 파는 음식을 맛보기도 했고, 건물을 구경하기도 했다.

지그문트와 마리나를 위한 선물도 사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리옐 님. 이제 들어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벌써?”

“이제 가게도 문을 닫을 시간입니다.”

거리를 돌아다니던 사람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간 후였다.

리옐은 조금 아쉬워보였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일단 큰 길로 빠져나가야 할 것 같았다.

“찾았다.”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섬뜩한 기분에, 단은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정체불명의 남자가 앞에 서 있었다.

주변이 어두워 정확한 신원은 파악할 수 없었다.

“누구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리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리옐은 주춤 물러섰다.

“단 아저씨. 저 사람, 싫어.”

남자가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빛에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그나?’

얼굴 대신 용암에 녹아내린 듯한 살덩어리가 보였다.

일전에 엘비아를 습격한 불사의 잔재, 아그나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목구비가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움직이는 것도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러서라. 더 다가오면 베겠다.”

말이 통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경고했다.

단은 클레이모어로 아그나를 똑바로 겨눴다.

아그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좋아하시겠네.”

아그나가 다짜고짜 리옐을 향해 달려들었다.

단의 발이 땅을 디뎠다.

오러가 검날을 뒤덮었다.

아그나가 바로 앞까지 왔을 때, 클레이모어를 비스듬하게 올려 그었다.

서걱!

아그나의 어깻죽지가 갈라지며,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아그나는 멈추지 않았다.

단은 두 눈을 의심했다.

갈라졌던 어깻죽지가 저절로 들러붙었기 때문이다.

“잡았다.”

“리옐 아가씨!”

아그나는 단의 공격을 무시하고 리옐에게 손을 뻗었다.

눈을 질끈 감은 리옐의 몸에서 푸른빛이 돌았다.

아그나의 입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마법?”

아그나의 손이 리옐에게 닿기 직전, 푸른 장막이 둘을 갈라놓았다.

지그문트가 걸어 뒀던 방어 마법이었다.

푸른 장막에 닿은 손끝이 녹아내렸다.

아그나가 손을 뒤로 뺀 순간, 단의 무릎이 아그나의 턱을 때렸다.

뻐억!

검으로 베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단이 타격으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턱을 정통으로 맞은 아그나는 쓰러지듯 뒤로 물러났다.

아그나는 천천히 뒤로 젖혀 있던 고개를 들었다.

턱이 옆으로 꺾여 있었다.

우득.

어긋난 턱을 제 손으로 맞춘다.

기괴한 광경에, 단은 식은땀을 흘렸다.

엘비아에서 봤던 아그나들은 몸을 베면 죽고 정지한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야 신체가 재생되며 부활했다.

하지만 이놈은 죽지도 않고, 순식간에 재생해 버리기까지 했다.

“리옐 님. 혹시 저번에 그거, 하실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어!”

“움직임을 막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단은 태초의 숲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그나의 약점은 물.

지그문트가 증명한 사실이다.

리옐은 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지그문트에게 자랑하겠다며 단 앞에서 몇 번 연습했기에, 알고 있었다.

턱을 매만지던 아그나가 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해꾼이…….”

카앙!

단은 대답하는 대신 클레이모어로 바닥을 쳤다.

날카로운 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지며, 검날이 부르르 떨렸다.

카앙!

다시금 클레이모어가 땅을 때렸다.

아그나가 단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단에게 달려들었다.

대응할 생각이 없는 건지, 단은 또 한 번 클레이모어로 벽을 두드렸다.

아그나가 단에게 손을 뻗었다.

“흡!”

단이 클레이모어를 휘둘렀다.

콰앙!

네르갈의 골목에서 작은 규모의 폭발이 일어났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는 검날에 받은 충격을 모아 폭발시킬 수 있다.

단은 검을 부딪치지 않고 충격을 모으기 위해, 일부러 검으로 땅을 쳤던 것이다.

“카악!”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아그나는 태생적으로 불에 강한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그나를 물러서도록 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불길을 뚫고 단이 튀어나왔다.

“하압!”

클레이모어가 아그나의 몸을 관통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어깨를 앞세워 몸통박치기를 감행했다.

검에 고정된 아그나는 단의 돌진에 쭉 밀려났다.

아그나의 손이 기괴하게 꿈틀거리더니, 날카로운 송곳처럼 변했다.

푹!

아그나는 송곳 같은 손을 단의 쇄골 부분에 박아 넣었다.

단은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도,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퍽!

끝내 아그나를 벽에 몰아붙인 단이 소리쳤다.

“지금입니다!”

“응!”

아그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단의 갑옷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을.

물의 하급 정령이 짧은 팔을 위로 뻗었다.

아그나는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로, 1미터는 족히 넘을 듯한 물의 공이 떠 있었다.

펑!

공이 터지며, 물벼락이 쏟아졌다.

물이 살갗에 닿자마자, 아그나의 몸에서 뜨거운 증기가 솟아올랐다.

치이이이익!

아그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계속 단을 찔렀다.

푹! 푹! 푹!

단은 이를 악 물고 버텼다.

다시 한번 물벼락이 쏟아졌다.

이번에는 아그나가 움직임을 멈췄다.

증기가 시야를 가려 생사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단은 조심스럽게 클레이모어를 뽑고 뒤로 물러섰다.

“쿨럭.”

한 손으로 쇄골 부분을 지혈했다.

뜨겁고 끈적끈적한 피가 손바닥을 적셨다.

“단 아저씨!”

“저는 괜찮습니다!”

하얀 증기가 흩어지고, 아그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끔찍하게 녹아내린 몰골.

단은 인상이 찡그렸다.

‘살아 있다고?’

물을 저렇게 뒤집어썼는데도, 아그나는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심지어 재생하려는 기색도 보였다.

“큭!”

소모전으로 가면 무조건 불리하다.

상대는 끊임없이 재생하는 반면, 단은 체력도 오러에도 한계가 있다.

단은 머리를 굴렸다.

네르갈에는 주기적으로 병사들이 순찰을 다닌다.

속도 면에서 뒤떨어지더라도, 큰길로 나가기만 한다면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리옐 아가씨!”

단은 리옐 쪽으로 달렸다.

눈치 빠른 리옐이 손을 뻗었다.

단은 리옐을 잡아채듯 안아 들고 뛰었다.

그 뒤에서 어느새 재생한 아그나가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단이 흘린 피로 만들어진 길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 * *

“헉, 헉, 헉!”

단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상처가 불에 덴 듯이 욱신거렸다.

주위를 살폈다.

겨우 큰 길까지 나왔지만, 병사는 보이지 않았다.

리옐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많이 아파?”

“괜찮습니다.”

단은 애써 웃어 보였다.

물을 끼얹으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상을 감수했다.

계산 실패였다.

출혈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리옐 아가씨만큼은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그나는 리옐을 노리고 있었다.

‘왕성으로……!’

길을 쭉 따라가기만 하면 왕성이 나온다.

단은 리옐과 함께 길을 걸었다.

발걸음이 휘청거렸다.

리옐은 단을 부축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체격 차이가 너무 컸다.

“이익!”

눈물을 머금은 리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언식 때 언데드가 나타났던 일 때문일까.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후계자, 방해꾼.”

뒤에서 아그나가 걸어 나왔다.

단은 힘겹게 클레이모어를 뽑아 들었다.

자꾸만 아그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움직였다.

“……!”

리옐이 알 수 없는 말을 소리쳤다.

길거리에 있던 풀들이 급속도로 자라났다.

덩굴이 아그나의 발목을 휘감았고, 나무가 몸을 기울여 장벽을 만들었다.

화륵!

아그나의 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덩굴은 타들어 갔고, 나무 장벽이 뚫렸다.

아그나는 리옐과 단 쪽으로 똑바로 걸어왔다.

단은 클레이모어로 땅을 찍었다.

캉!

“리옐 아가씨, 왕성으로 가십시오. 제가 버티고 있겠습니다.”

“싫어!”

“아가씨께서 도련님을 불러오셔야 합니다!”

지그문트가 있다면, 상황이 바뀔 것이다.

단은 그렇게 믿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아그나가 달리기 시작했다.

단은 어깨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아그나에게 찔린 상처 때문이었다.

“크윽!”

단은 전력을 다 해서 검을 휘둘렀다.

아그나의 목이 잘렸 나갔다.

그러나 아그나의 몸뚱이는 계속 움직였다.

잘린 머리가 허공에서 히죽 웃었다.

송곳처럼 바뀐 손이 단의 목을 찌르기 직전.

“아빠!”

지그문트 마이어가 단의 뒤에서 나타났다.

* * *

나는 단을 뒤로 밀어냈다.

그대로 아그나의 한쪽 팔을 잘라 냈다.

“도련님, 이놈, 재생합니다!”

밀려난 단이 남은 힘을 쥐어짠 듯 소리쳤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잘렸던 아그나의 팔이 붙었다.

머리를 주워 들더니, 목에 붙인다.

그게 또 붙었다.

괴랄할 정도의 재생 속도였다.

‘일반적인 아그나는 아니군.’

애초에 평범한 아그나라면 단의 상대가 못 됐다.

엘비아에서 봤던 덩치 큰 놈과 비슷한 변종이라는 뜻이다.

뒤로 물러난 아그나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너도 방해꾼인가?”

“이것 봐라. 말도 하네.”

아그나는 불사의 괴물에서 떨어져 나온 잔재다.

지능이 높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옷자락에 낯익은 표식이 보였다.

세로로 양분된 역삼각형.

불사의 신자들을 뜻하는 표식이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세상 이치라더라.”

등 뒤의 리옐과 단을 살폈다.

이름 없는 검을 한 손으로 고쳐 잡았다.

아그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채, 자세를 낮췄다.

“지금부터 내가 벌을 줄 테니까, 달게 받아라.”

아그나가 내게 달려들었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재생력을 믿고, 정직하게 정면으로 온다.

대처하기 상당히 까다로웠을 것이다.

머리를 잘라도 죽지 않고, 금방 재생해 버리니까.

서걱!

오러를 머금은 이름 없는 검이 아그나의 어깨를 잘라 냈다.

피가 터져 나왔다.

예상대로, 아그나는 검을 무시하고 달려들었다.

남은 팔을 내게 뻗어 온다.

‘언어 능력이나 행동 패턴으로 볼 때, 지능이 그렇게 높지는 않군.’

단에게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노린다.

남은 손을 움켜쥐었다.

홀드(Hold).

눈앞에서 아그나의 팔이 멈췄다.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동작도 정지시킬 수 있었다.

스릉!

남은 팔 한쪽도 베어 냈다.

양쪽 팔 모두 쓰지 못하게 된 아그나는 곧바로 재생을 시작했다.

절단면에서 혈관 같은 것이 튀어나와, 서로 엉겨 붙으려 했다.

그러나 팔은 붙지 않았다.

아그나의 눈이 커졌다.

“뭐가 잘 안 되나 봐?”

아그나가 나를 노려봤다.

놈의 재생에는 맹점이 있었다.

새롭게 신체 조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잘린 부위를 붙여 재활용한다.

즉, 잘린 부위만 못 붙이게 하면 된다.

척력(Repulsive Force).

절단면에 각각 척력을 부여해, 서로 들러붙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현재 아그나의 어깨와 팔은 같은 극의 자석과 같다.

아무리 용을 써도, 다시 붙이긴 어려울 것이다.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아그나가 악을 썼다.

설명해 줄 의무는 없었다.

* * *

조각난 아그나는 재생을 멈췄다.

한계에 봉착했는지, 죽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공간에서 물을 꺼내 확실히 마무리까지 한 뒤, 단 쪽으로 돌아갔다.

리옐이 단의 옆에서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아빠! 단 아저씨, 정말 죽으면 어떡해?”

“안 죽어.”

단은 어깨를 누른 채 더운 숨을 뱉고 있었다.

출혈이 너무 길었다.

말할 기력도 없는 모양이었다.

“손 치워 봐.”

수차례 찔린 흔적이 보였다.

마나로 통증을 차단하고, 출혈을 막았다.

영초와 생명의 샘물을 먹였다.

단은 조금 편해진 듯 찡그렸던 인상을 풀었다.

“후우.”

“걸을 수 있겠냐?”

“예. 훨씬 낫습니다.”

“마법으로 응급조치 했어. 따로 치료는 받아야 할 거다.”

리에이트 교국의 사절단이 아직 머무르고 있었다.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르네가 말해 주더군.”

발락의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별궁으로 복귀했다.

르네에게 둘이 산책 갔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곧바로 네르갈을 이 잡듯이 뒤졌다.

그러던 도중 리옐에게 걸어 뒀던 보호 마법이 작동했고, 마나를 따라갔다.

그 이후로는 어렵지 않았다.

벽을 짚고 일어난 단이 대뜸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뭐가?”

“제가 좀 더 강했더라면…….”

“너랑은 상성이 안 좋았어.”

단뿐만 아니라, 그 어떤 기사라도 저놈을 상대하는 건 힘들었을 것이다.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 만큼, 상성적으로 불리했다.

“뭐, 네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야. 더 강했다면 이겼을 수도 있지.”

초인적인 경지에 다다른 레드라인 후작 정도라면, 그냥 힘으로 찍어 눌렀을 것이다.

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강해지려면…….”

“왜, 영약이라도 하나 지어 줘?”

“부탁드립니다.”

보통 이런 건 부담스럽다고 거절하곤 했는데, 단은 덥석 받아들였다.

나는 왕성으로 가며 머리를 굴렸다.

‘전에는 긴가민가했는데.’

한 가지 사실이 확인됐다.

팔베르크 제국과 불사의 신자들이 결탁했다.

발락은 ‘씨앗’을, 아그나는 이미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세계수의 후계자를 찾아다녔다.

아마 아그나도 아공간 따위를 이용해서 네르갈에 들어왔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리옐을 내려다봤다.

‘놈들은 세계수의 후계자를 확보하고자 한다. 왜?’

* * *

왕성으로 돌아가자마자, 리에이트 교국의 사절단을 찾았다.

운 좋게도 일전에 구해 준 수습 사제와 마주쳤다.

“부상자가 있다. 도와줄 수 있나?”

“물론입니다. 어서 들어오시죠.”

수습 사제는 나를 깍듯이 대했다.

생명의 은인이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대충 넘겼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수습 사제는 직접 중급 사제를 불러와, 단의 상처를 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이건, 심하군.”

단의 상처는 꽤 지독한 편이었다.

사제는 모시는 신의 신성을 빌어 기적을 행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리에이트를 모시는 사제들은 치료와 축복에 특화되어 있었다.

몇 분 후, 치료를 끝낸 중급 사제가 내게 다가왔다.

“응급처치는 누가 하신 겁니까?”

“제가 했습니다.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너무 적절해서 말입니다. 치료술에 지식이 있으십니까?”

“알음알음 있습니다.”

후유증도 남지 않을 거고, 며칠이면 팔도 정상적으로 쓸 수 있을 거라고 한다.

당분간 다친 어깨를 쓰는 걸 자제해야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중급 사제가 단에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말해 줬다.

그런데, 수습 사제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저, 지그문트 님. 잠시 이쪽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음?”

뭔가 싶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수습 사제는 나를 방 밖으로 이끌었다.

주변을 살피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그문트 님, 외람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혹시…….”

“혹시?”

“혹시, 그 안에 있는 것이 뭔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수습 사제는 내 심장과 단전 사이.

신성이 있는 부분을 직시했다.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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