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암국의 왕
나는 쥐의 꼬리에 묶여 있던 쪽지를 풀었다.
밤말을 듣는 쥐의 연락책이었다.
쥐는 곧장 꽁무니를 빼고 도망쳐 버렸다.
쪽지를 읽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단입니다.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들어와.”
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방금 오벨과 대련이 끝난 모양인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단은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았다.
“리옐 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드라이어드들이 데려갔어.”
“그렇군요. 아, 앉아도 괜찮겠습니까?”
“어, 거기 앉아.”
단은 내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나는 다리를 꼬고 앉아 단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일이지?”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도련님이라면 뭔가를 알고 계실까 싶어서 말입니다.”
“무슨 조언이 필요한데? 정교한 위장술? 아니면, 남을 잘 속이는 방법?”
“검에 대한 조언입니다. 그런 조언은 필요 없습니다.”
“필요할 것 같은데.”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이름 없는 검을 뽑았다.
검을 단의 목에 들이밀었다.
단은 제 목에 들어온 칼을 내려다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도련님,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시도는 좋았어.”
“시도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내 부하도 못 알아볼 정도로 멍청해 보이던가?”
검 끝을 살짝 틀었다.
단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끊어졌다.
툭.
목걸이가 카펫에 떨어졌다.
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신 처음 보는 남자가 나타났다.
단보다 조금 어려 보였는데, 부드러운 눈매가 돋보였다.
요즘 애들 말로 신전 오빠 상이었다.
남자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항복을 표시했다.
“워우 씨,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건 네가 알 바 아니고, 내 부하를 어떻게 한 거지?”
“단 록벨런 님이라면,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검날의 면 부분으로 남자의 턱을 눌렀다.
나와 남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아서 무장해제 해. 죽기 싫으면.”
“……분부대로 합죠.”
남자는 조금씩 손을 허리 쪽으로 움직였다.
묶여 있던 끈을 풀자, 허리에 매달려 있던 단검이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양손을 들었다.
“나는 분명 무장해제하라고 했다.”
“했지 않습니까?”
“양쪽 소매에 있는 단검은 멋으로 달고 다니는 거였나?”
“오우, 이런. 까먹고 있었네요.”
남자는 능청스럽게 양팔을 아래로 떨궜다.
소매에서 단검 두 자루가 떨어졌다.
“입 안에 있는 것도 뱉어.”
남자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검 끝을 가까이 하자, 남자는 재빨리 양손을 들었다.
“뱉겠습니다. 성질 급하시네. ……퉤.”
입을 우물거리더니, 발치에 뭔가를 뱉어 냈다.
작은 칼날이었다.
약아 빠진 놈이다.
남자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기, 우리 이러지 말고 평화롭게 해결하는 거 어떨까요?”
“닥쳐. 입 털면 죽인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협조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검 좀 치워 주시면 안 됩니까?”
“내가 지금 뭐라고 말했지?”
이름 없는 검이 남자의 목을 조금 파고들었다.
검날 위로 핏방울이 맺혔다.
진심이라는 것을 눈치챈 듯,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고 하셨죠. 옙.”
“그러게 한 번에 알아들으면 얼마나 좋아?”
훈련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단으로 변장해서 접근했다.
억양이나 사소한 버릇까지 따라 한 것을 보면, 프로다.
별궁에 들어올 정도면 A급 이상.
조용히 마법을 사용해, 퇴로를 모두 차단했다.
“단은 어떻게 했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훈련 시간을 조금 늦춘 것뿐입니다.”
“네 이름은?”
“없습니다.”
“죽고 싶다는 얘기로 받아들여도 되나?”
“아, 진짜 없다니까요! 목숨 걸고!”
남자는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진실일 확률이 높았다.
뒤 세계에서 태어난 이들에게는 종종 있는 일이다.
그런 경우에는 이름 대신 별명으로 불린다.
“그럼, 별명은 뭐지?”
“별명 말입니까? 낮말을 듣는 새라고 합니다.”
“……뭐?”
* * *
낮말을 듣는 새는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에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철저하고 눈치가 귀신같다는 언질은 들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더한 것 같았다.
지그문트는 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밤말을 듣는 쥐를 만났을 때 설마 있을까 싶었는데, 진짜 있었군.”
“사실 쥐 선배님을 동경해서 별명을 바꿨거든요. 멋지지 않습니까?”
“별로.”
새는 태연하게 검을 집어넣는 지그문트를 살폈다.
밤말을 듣는 쥐가 직접 전담하겠다고 선언한 자다.
원래 이런 명령은 받지 않았지만, 호기심에 접근했다.
해코지할 생각은 아니었다.
실력도 보고, 대응하지 못한다면 경각심을 깨워 줄 생각이었다.
첫 만남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마음도 조금 있었다.
‘연기는 완벽했어.’
아무리 봐도 귀하게 자란 도련님처럼 느껴지는 지그문트였다.
설마 위장이 들통날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카펫에 떨어진 목걸이를 주워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내로라하는 첩자들도 구분하지 못하는데.’
단순히 외관뿐만 아니라 채취와 외관까지 복사하는 물건이었다.
이렇게 쉽게 간파 당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소한 버릇도 보고 그대로 따라 했음에도 불구하고, 걸렸다.
‘선배님이 칭찬한 이유를 알겠어.’
소매의 단검은 그렇다 치고, 입안에 숨겨 둔 칼날까지 찾아냈다.
무기의 위치를 모두 정확히 짚어 낸 걸 보면, 감은 아닐 것이다.
새는 지그문트가 검을 들이밀었을 때의 눈빛을 떠올렸다.
오한이 몸을 스쳐 지나갔다.
‘하마터면 뒈질 뻔했네.’
지그문트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새는 눈을 끔벅이며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금화 열 닢.”
“예?”
“내놔.”
“그건 무슨 뜬금없는 소리십니까?”
“장난질 친 값. 안 줄 거야?”
금화 열 닢은 저렇게 가볍게 말할 정도로 적은 돈이 아니다.
새는 어물쩍 넘어갈 생각으로 둘러댔다.
“그런 큰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열 닢이 어디 새 이름도 아니고.”
“그렇다면 고객 된 입장에서 정식으로 항의를 해야겠군.”
낮말을 듣는 새는 뒤늦게 깨달았다.
괜히 깝쳤다.
호기심에 건드렸다가, 금화 열 닢을 헌납하게 생겼다.
‘에이 씨. 이래서 쥐 선배님이 호기심 좀 죽이라고 한 건데.’
새는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호기심을 죽여라.
제발 시키지도 않은 짓 좀 하지 마라.
밤말을 듣는 쥐가 했던 조언이었다.
새는 궁색하게 빌빌 댔다.
“그, 열 닢은 너무 많은데, 좀 깎아 주실 수 있다면…….”
“스무 닢.”
“왜 오릅니까?”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교섭하려고 하지 마. 서른 닢.”
“지독하시군요. 당신이 사람입니까?”
“사람이야. 정보료 추가해서, 마흔 닢.”
“그냥 서른 닢 하죠.”
“쉰 닢.”
정말 지그문트가 정식으로 항의를 하면, 곤란한 건 낮말을 듣는 새 쪽이었다.
고객을 건드리는 것은 금지 사항 중 하나다.
뒷조사 정도는 암묵적으로 허락되어 있었다.
그러나 쥐의 엄포에 의해 뒷조사도 금지된 고객이 지그문트다.
‘크흑, 선배님. 그 큰 뜻을 이제야 이해합니다.’
새는 눈물을 머금고 금화 쉰 닢을 내놓아야 했다.
사실 그 정도 경제적 여유는 있었다.
하지만 피 같은 생돈이 빠져나가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깝치지 말자.”
“흑흑, 아픈 동생 약값인데.”
“거짓말이라는 데에 금화 쉰 닢 걸지. 너는 무엇을 걸래?”
새가 울음을 뚝 멈췄다.
당연하게도, 낮말을 듣는 새에게는 아픈 동생이 없었다.
동정심을 얻기 위해 우는 척 연기했을 뿐이었다.
“뭐 이런 놈이 왔어? 너 지위가 어떻게 되냐?”
“하멜 지부장입니다.”
“너 같은 놈이 트리옌 왕국의 수도를 맡고 있다고? 하멜 지부는 망했겠군.”
의도치 않게 맹점을 찔린 새는 흠칫 떨었다.
지그문트의 말대로, 암국의 하멜 지부는 정말 망했다.
새의 반응을 본 지그문트는 황당하다는 물었다.
“진짜 망했냐?”
“……예.”
팔베르크 제국의 1차 습격.
그때, 하멜 지부의 거의 모든 인원이 전멸했다.
끌려간 이들도 몇몇 있었지만, 아마 전부 자결했을 것이다.
낮말을 듣는 새는 아티팩트를 써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트리옌은 유독 지부가 많은 나라였기에, 쥐의 경고가 늦게 도착한 탓이었다.
“그러면, 트리옌은? 아니, 설마 하멜 말고 털린 곳이 더 있냐?”
“여기서부터는 유료입니다만.”
“네가 지금 정보 팔아먹을 입장일까?”
지그문트는 일절 믿지 않는다는 투로 되물었다.
새는 식은땀을 흘렸다.
위장해서 접근해, 위협을 가하려 했다는 사실이 쥐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아마 낮말을 듣는 새는 밤말을 듣는 쥐의 신뢰를 잃을 것이다.
주도권을 쥐려다가, 약점을 넘긴 꼴이 됐다.
“그, 지그문트 님께는 특별히 알려 드리지요.”
“선심 쓰는 척하지 말고, 빨리 불어.”
“해상 도시 퀸틴 또한 장악 당했습니다.”
“나머지는 막아 냈다는 건가?”
“예. 피해는 있었을지언정, 전멸은 피했다더군요.”
지그문트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 얘기하면 골수까지 정보를 빨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섬뜩한 새가 화제를 돌렸다.
“자, 자. 제 원래 목적을 잃어버릴 뻔했군요. 가시죠, 왕을 뵈러.”
“나는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는데.”
“괜찮습니다. 왕께서 직접, 네르갈까지 오셨으니까요.”
* * *
네르갈의 빈민가.
원래는 밤말을 듣는 쥐의 네르갈 지부가 있었던 곳이다.
항상 밤에 왔는데, 낮에 오니까 느낌이 색달랐다.
‘암살자들이 지천에 깔려 있군.’
암국의 왕을 호위하는 이들 같았다.
이 수가 전부 달려든다면, 나도 이긴다는 장담을 못 할 것 같다.
쥐가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지 않았다면, 나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허세 아니고, 저희 왕께서는 소드 마스터도 암살하신 분입니다.”
“알아.”
“진짜 대단하지 않습니까? 아까 멀리서 레드라인 후작을 봤는데, 지리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런 괴물을 암살하다니.”
“좀 닥치면 안 되나? 정신 사나운데.”
그에 반해 새는 암국 소속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 많았다.
가는 내내 쉴 새 없이 떠드니,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밤말을 듣는 쥐는 어디 갔지?”
“쥐 선배님은 전투가 가능하셔서, 다른 곳으로 투입됐습니다.”
“다음부터는 너 말고 쥐를 붙여 달라고 요구해야겠어.”
밤말을 듣는 쥐가 그리웠다.
음흉한 구석이 있어서 그렇지, 말도 잘 통하고, 할 말만 딱 했는데.
“섭섭합니다. 저는 좀 정들었는데.”
“명색이 암살자라는 놈이 벌써 정이 들어?”
“저는 암살자가 아닙니다. 정확히는…… 아. 도착했군요.”
새는 허름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창고로 쓰던 건물 같았다.
“들어가시죠. 이곳입니다.”
낮말을 듣는 새는 나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깨진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이 먼지가 가득한 건물 내부를 비췄다.
안 어울리게도 고급 안락의자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자, 자. 앉으십시오.”
권유에 따라 안락의자에 앉자, 낮말을 듣는 새도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나와 암국의 왕을 위해 준비된 자린 줄 알았는데.
“왜 네가 앉아?”
“왕께서 오시기 전까지 잠깐만 쉬겠습니다.”
황당했지만, 뭐라 하지는 않았다.
쉴 수도 있지.
몇 분을 기다려도 암국의 왕은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깨진 창밖으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언제 오는 거지? 분명 오래 안 걸린다고 하지 않았나?”
“잠깐이면 됩니다. 이제 곧 오십니다.”
낮말을 듣는 새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방정맞던 입도 다문 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윽고 해가 능선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낮말을 듣는 새도 눈을 떴다.
‘무슨?’
나는 본능적으로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올렸다.
여차하면 검을 뽑기 위해서였다.
사람이 바뀌었다.
눈앞의 남자는 낮말을 듣는 새가 아니었다.
외관은 같았지만, 다른 사람이 분명했다.
경박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품위와 진중함이 느껴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지그문트 마이어 경.”
구부정하던 허리를 꼿꼿이 편 새는 자신을 다시 소개했다.
움직임으로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강하다.
적어도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제가 암국의 왕입니다.”
“……어떻게 한 거지?”
“과정은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목걸이의 힘인가 싶었지만, 마나는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도 아니라는 소리다.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중요한 건 이렇게 제가 마이어 경과 대면했다는 사실입니다.”
“알려 주기 싫다는 말을 길게도 하는군.”
“이 또한 정보니까요.”
암국의 왕은 부드럽게 웃었다.
전에 없던 여유가 묻어나 왔다.
“우선 감사 인사부터 드리고 싶군요.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인사는 필요는 없어. 거래였으니까.”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쪽이 지고 들어갈 이유는 없다.
“그러고 보니, 밤말을 듣는 쥐에게 재밌는 질문을 하셨더군요.”
“그랬지. 나는 아직도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실은 제가 이 자리에 온 이유 중 하나가, 그 대답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팔베르크 제국이라는 배후를 알려 주는 조건으로 요구한 정보.
사실 사적인 질문에 가까웠는데, 밤말을 듣는 쥐는 대답을 뒤로 미뤘다.
정확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더니.
이런 뜻이었나.
“분명 ‘암국의 왕은 팔베르크 제국에 맞설 것인가?’였지요.”
“그래.”
암국의 왕은 재밌다는 듯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얼핏 보면 내가 제시한 정보에 비해 시답지 않은 질문.
하지만 내게는 꽤 중요한 문제였다.
대답에 따라, 암국에 대한 계획과 태도를 변경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예. 그럴 생각입니다.”
암국의 왕은 태연한 얼굴로 팔베르크 제국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내가 생각하던 최상의 시나리오가, 여기서 맞춰졌다.
“마이어 경께서는 저희와 협력할 의사가 있다고 생각해도 괜찮겠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수지가 맞지 않는 거래를 할 분이 아니실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사람 보는 눈이 있군. 맞아.”
내 질문은 확인의 의미가 컸다.
암국에게 배후가 팔베르크 제국이라는 정보는 거저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팔베르크 제국과 암국 간의 적대 관계를 형성하도록 만들기 위한 발판.
암국의 왕이 떠보듯 물었다.
“어디까지 읽고 움직이신 겁니까?”
“일단은 여기까지라고 말해 두지. 솔직히 왕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그렇군요.”
적의 적은 우리 편이다.
나는 암국을 지원할 용의가 있었다.
물론 목적은 팔베르크 제국을 견제하는 데에 있다.
‘의도했던 대로, 제국과 암국은 뒤 세계를 두고 부딪칠 거고.’
암국이 아무리 거대한 집단이라지만, 팔베르크 제국과 전면전은 어렵다.
그래서 나는 밤말을 듣는 쥐에게 미끼를 던졌다.
내가 암국에게 건낸 팔베르크 제국에 대한 정보는 절반에 불과하다.
나는 팔베르크 제국의 계획을 대부분 알고 있었기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암국의 상태가 어느 정돈지가 미지수다.’
암국은 타격을 입었다.
하멜과 퀸틴 지부가 전멸했다고 하니, 꽤 클 것이다.
팔베르크 제국과 정보전을 펼치는 데 인력을 소모할 여력이 없을 정도면 딱 좋다.
그래야 내가 교섭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왕이 직접 행차하실 정도라면, 암국 상태가 썩 좋지는 않은 것 같은데.”
“대체할 인력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피해를 되도록 줄이고자 했기에 나선 것입니다.”
“암살자들이 감동해서 눈물 흘릴 소리군.”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팔베르크 제국도 바보가 아닌 만큼, 암국을 견제할 것이다.
암국이라고 한들, 정보를 빼 오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졌을 터.
그런데 여기서 제3자인 내가, 팔베르크 제국의 정보를 쥐고 있다.
얻어 낸다면, 암국의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 안 푸는 격이다.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다.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하셨죠?”
“본의 아니게 주목 받고 있는 입장이라서 말이야.”
“그런데도 절 기다리셨다는 건.”
“교섭할 의사가 있다는 거지.”
내가 밤말을 듣는 쥐에게 제시한 정보는 팔베르크 제국에게 있어서 치명적이다.
더군다나 나는 그 대가로, 암국의 의사까지 확인했다.
팔베르크 제국를 적대할 것인가.
‘저쪽도 대강 눈치챘나 보군.’
암국의 왕은 그 두 가지를 토대로, 내가 팔베르크 제국과 적대 관계라고 판단.
나와 교섭하기 위해서 나선 것 같았다.
“그 전에 하나만 묻겠습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황제의 머릿속에서 나온 변수를 제외한 모든 것.”
어떻게 알고 있는가는 묻지 않는다.
암국의 왕이 자신의 입으로 말했듯이,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닌 결과다.
“확신하십니까?”
“이미 증명했다고 생각하는데.”
암국조차 미처 알아채지 못한 습격과, 그 배후까지 정확히 짚어 냈다.
“제가 마이어 경을 해코지해서 정보를 빼낼 거라는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저는 꽤 괜찮은 고문 기술자입니다.”
“나는 겁이 많은 성격이라서 말이야. 안전장치를 해 뒀지. 밤말을 듣는 쥐가 꽤 파격적인 계약을 제시했거든.”
“계약요?”
“그래. 내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밤말을 듣는 쥐는 죽는다.”
불과 몇 분 전 쥐를 통해 받은 계약서.
일방적인 종속 계약이었다.
물론 일시적이긴 하나, 밤말을 듣는 쥐 정도라면 암국에서도 중요한 인물.
함부로 나를 건드리기에는 리스크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뭣하면 확인해 보든가.”
내 눈을 응시하던 암국의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습니다. 다시 교섭으로 돌아가죠. 마이어 경께서 암국에 원하는 것이 있을 텐데요.”
“있지.”
“그게 무엇인지 질문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팔베르크 제국이 서대륙의 뒤 세계를 전부 장악하는 건 피해야 했다.
나는 그 견제 수단은 암국으로 정했다.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넘겨야 할 정보다.
하지만 그냥 넘기기에는 조금 아까워서, 이쪽도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그림을 만들었다.
꿩 먹는 김에 알도 먹는 것이 좋지 않은가.
“일주일 후, 레온하트 왕국과 엘비아 사이에 동맹 선언이 있을 거다.”
“예. 전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나도 거기에 자리해야 될 것 같거든. 훼방 놓는 놈들 처리할 사람이 필요해.”
“어렵지 않은 의뢰군요.”
암국은 암살자들의 나라이기도 하다.
사실 이 정도는 교섭할 필요도 없이, 고객으로써 의뢰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조금 달랐다.
“단, 지부장급으로.”
“흠.”
암국의 왕은 선뜻 제안을 수락하지 못했다.
아마 머릿속은 저울질로 한창일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지부장급의 인력은 동원하기 어려울 테니까.
“좋습니다. 준비해 드리죠.”
고민도 잠깐, 암국의 왕은 내 제안을 수락했다.
“또 하나.”
당연히 지부장급 암살자 고용으로 끝낼 일은 아니다.
암국의 왕도 내심 더 말해 주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대가가 그 정도라면, 내가 가진 정보도 그 정도라는 소리니까.
내가 암국의 왕에게 제시할 것은 이미 생각해 둔 상태였다.
“물건 하나 찾아 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간단한 의뢰로 괜찮겠습니까?”
“간단하진 않을 거야.”
암국에게 물건 찾기란 손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드래곤도, 세계수도 소재를 모르는 물건이다.
불사의 괴물을 죽이기 위한 독에 부족한 마지막 재료.
“부패한 성배. 찾을 수 있나?”
* * *
레온하트 왕성, 시프 레온하트의 개인 서재.
한가득 쌓인 편지를 읽고 있던 시프가 고개를 들었다.
레드라인 후작과 눈이 마주쳤다.
“레드라인 후작님.”
“예. 왕자님.”
“후작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일주일 후 있을 공식 석상에서의 동맹 선언.
분명 어디선가 딴지를 걸어올 것이다.
이미 지그문트 마이어는 암살자가 몇 다녀갔다고 경고한 바 있다.
어렸을 적부터 암살의 위협에 시달려 온 시프는 진저리를 쳤다.
별궁의 경계는 강화한 상태지만, 중요한 건 동맹 선언 때다.
“가능하다면 적탑주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흠, 글쎄요. 아마 어려울 것 같습니다.”
“도움 요청마저 어렵단 말입니까?”
왕성과 척을 지고 작위까지 받지 않은 적탑주다.
그런 적탑주가 요즘은 적극적으로 왕실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첩자를 잡아들이기도 하고, 대청소 후 불안한 회계를 담당하기도 했다.
레드라인 후작과 종종 이야기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적탑주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럼 그 사람과 말을 해 보세요.”
“이거 참, 자기 일은 자기 스스로 하라고 한 소리 들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말입니다.”
“레드라인 후작께 그런 무례한 언사를 하는 자가 있습니까?”
레온하트의 왕자인 시프조차 존대를 꼬박꼬박 붙이는 것이 레드라인 후작이다.
국왕이 아니고서야,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국왕 파서벌 레온하트는 그런 말을 할 성격이 못 된다.
레드라인 후작도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있습니다. 한 명.”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시프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제 벗이 나서서 도와준다고 하니, 별문제 없을 겁니다.”
“벗요?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라스 마이어 남작. 들어 보셨습니까?”
시프는 당연히 라스 마이어를 알고 있다.
자신의 은인인 지그문트 마이어의 아버지 아닌가.
남작이라는 낮은 지위에도 뛰어난 능력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귀족이었다.
“마이어 남작께서 어찌 도와준다는 겁니까?”
“시프 왕자님께서는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라스는 한때 저보다 높은 수준의 기사였습니다.”
“예?”
레드라인 후작은 스물둘이라는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 초급에 다다른 천재다.
능력이 있지만 빛을 보지 못한 인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레드라인 후작을 한때나마 뛰어넘었던 기사라니.
“워낙 오래 된 일입니다.”
레드라인 후작은 잠시 눈을 감았다.
시프는 사정을 캐묻지 않았다.
지그문트 마이어와 관련된 이야기는 조심히 다뤄야 했다.
“특별히 요주의해야 할 이름이 있습니까?”
“트리옌 왕국, 리에이트 교국…… 엘비아 인근의 국가는 어지간하면 접촉을 시도할 겁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역시, 이 이름이 가장 마음에 걸립니다.”
시프는 한숨을 삼키며 편지를 내려다봤다.
편지지에는 금색 태양이 그려져 있었다.
팔베르크 제국의 상징이었다.
* * *
일주일 후, 별궁.
왕실 소속의 시종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내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점검한다.
나는 시프 레온하트가 맞춤 제작한 정장을 입은 상태였다.
이것도 불편해 죽겠는데, 장신구까지 고르고 있다.
‘동맹에서 내가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더라도. 좀 과한데.’
나뿐만 아니라 리옐과 단도 시프에게 불려 간 상태였다.
특히 단은 너무 자기 관리를 안 한다며 시종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다.
리옐은 화동(花童)으로, 단은 내 호위 기사 신분으로 선언식에 참여하게 됐다.
아마 시프의 배려일 테지만, 결혼식도 아닌데 화동을 쓰는 건 어떨까 싶었다.
“아빠!”
벌컥 문이 열리고, 리옐이 총총 뛰어왔다.
평소 입는 것보다 화려한 하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거 봐! 어때?”
“잘 어울리네.”
“히히.”
특히 머리에 쓴 꽃장식이 마음에 든 것 같다.
세계수의 머리카락과 비슷한 점이 좋았던 모양이다.
이윽고 훤한 인상의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너 누구야?”
“도련님, 접니다.”
머리카락은 뒤로 넘기고, 지저분한 수염은 깔끔하게 정돈했다.
깔끔한 하얀 셔츠를 입었는데, 몸이 좋아 잘 어울렸다.
인기 깨나 있을 법한 훤칠한 남자의 정체는 단이었다.
“너 이렇게 생겼었냐?”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저도 어색합니다.”
단은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옷이 날개라더니, 틀린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윽고 시프 레온하트가 들어왔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재단사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준비는 끝났습니까?”
“그런 것 같은데.”
“이런. 몰라보겠군요. 평소에도 그러고 다니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됐다. 내가 무슨 왕족도 아니고.”
‘지그문트 마이어’라는 존재가 드러났다.
시프 레온하트가 최대한 활동하기 편하게 해 준다고는 했지만.
앞으로 정장 입을 일이 많아질지도 모른다.
마리나가 있었더라면 좀 편했을 텐데.
“지그문트 님은 저와 함께 가시죠. 두 분은 따로 안내를 붙이겠습니다.”
나는 시프를 따라 별궁 밖으로 나섰다.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왕실 기사들이 뒤를 따랐다.
창문 너머로 네르갈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병사들과 시동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국왕 폐하와 르네 님께서는 테라스에서 모습을 비출 예정입니다.”
“엘비아의 사절단들은?”
“광장에 자리하겠지만, 레드라인 후작님을 비롯한 기사들이 붙었습니다.”
레드라인 후작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요정족의 전력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
오히려 왕실 기사들을 웃돌 수도 있다.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울지도 모르는데.”
“곤란합니다. 엘비아뿐만 아니라, 저와 지그문트 님에게도 이목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일루전(Illusion) 변환 마법, 더미(Dummy).
나와 똑같이 생긴 환상이 시프의 눈앞에 출현했다.
“이거면 어떻게 할 수 있나?”
“지그문트 님은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으시군요.”
시프는 더미를 자세히 살폈다.
주기적으로 눈을 깜빡이고, 호흡할 때마다 몸이 움직인다.
“흠, 정교하긴 하군요. 육안으로 봤을 때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할 수 있어, 없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입장 후 대기하실 때 잠깐 정도입니다.”
“충분해.”
* * *
선언식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각국에서 축하를 명목으로 보낸 사절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따로 분리된 왕성 아래 귀빈석에 자리했다.
“저 자리는 왜 비어 있는 거지?”
“아무래도 팔베르크 제국 아니겠는가.”
“제국의 자리는 따로 마련되어 있는 걸 내가 봤다네.”
“그래?”
일찍 도착한 트리옌 왕국의 귀족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몇몇은 안면식이 있는 레온하트의 귀족들과 인사를 하기도 했다.
“코스타 공작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아아, 그래. 누군가 했더니, 트리옌의 웨일런 백작이시구먼.”
“알아보시는군요. 저를 잊어버리신 줄 알았습니다.”
“설마. 워낙 신수가 훤해져서, 잠깐 못 알아봤을 뿐이라네.”
“말뿐이라도 듣기 좋군요.”
코스타 공작은 그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레온하트에서 협상으로 이름 있는 귀족.
엘비아와 협상했다는 것이 알려져, 관심을 끌었다.
“……코스타 공작님께서는 엘비아의 사절단도 직접 만나 보셨겠군요.”
“그렇지. 요정족의 언어를 몰라서 통역까지 받아 가며 진행했네.”
“요정족의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 있습니까?”
“있지. 내 사윗감으로 눈독 들이고 있다네.”
코스타 공작은 실제로 마이어 남작에게 혼담을 나눌 생각이 있었다.
혼기가 꽉 찬 둘째 딸과 맺어 주면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숨겨진 동맹의 주역, 지그문트 마이어.
알아본 바로는 레드라인 후작이나 시프 레온하트 등, 걸출한 인물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일단 잡아 두면 반드시 활용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요정족의 은인을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맞네.”
“청년이라 들었는데, 요정족의 언어까지 할 수 있다니. 인재로군요.”
웨일런 백작은 요정족의 언어에 능통한 사람을 수소문한 바 있다.
혹시 엘비아의 사절단과 접촉할 때를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트리옌 왕국에서 요정족의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마저도 실제 회화가 가능할지는 미지수인 사람들뿐이었다.
“고대어만큼은 아니지만, 요정족의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만만치 않게 희소한데 말입니다.”
“경위는 잘 모르네만, 아마 태초의 숲에 갔을 때 배운 것이겠지.”
“저도 꼭 얘기를 나눠 보고 싶군요.”
“내 사윗감으로 점 찍어 뒀다고 분명히 말했네.”
“그냥 얘기만 나눠 보고 싶다는 겁니다.”
코스타 공작은 웨일런 백작을 견제했다.
그에게서 지그문트 마이어에 대한 흥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작 지그문트 마이어는 저 둘과 연관될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때, 마차 한 대가 뒤늦게 도착했다.
제국을 상징하는 금색의 태양.
“저건 팔베르크 제국이군.”
“위스크 영지에서 악마가 나왔다는 소문이 있던데, 뻔뻔하게 여기까지 왔군요.”
“쯧. 저번 건국제 때는 어땠는지 아나?”
코스타 공작과 웨일런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악담을 했다.
마차 문이 열리고, 검은 로브 차림의 중년 남자가 내렸다.
코스타 공작과 웨일런 백작은 몹시 당황했다.
“어째서 저자가 이곳에…….”
“큼. 일단은 작위를 받은 귀족이니까요.”
흑탑주, 렘브란트 님푸스가 네르갈에 직접 찾아왔다.
* * *
다행히 나는 아직 얼굴이 팔리지 않았다.
광장에 나와 있어도 신경 쓰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미리 사절단의 배치나, 기사들의 위치를 보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등장했다.
‘렘브란트 님푸스가 여기에 올 줄이야.’
7서클 마도사, 흑탑주 렘브란트 님푸스.
마법으로는 현재 레온하트 최강인 발레리아도 어쩔 도리가 없는 놈이다.
놈을 보냈다는 건, 수작질을 하겠다는 반증이나 다름없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확실히 까다로운 수였다.
준비를 안 해 뒀다면,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자의 왕홀 범위가 어디까지지?’
레온하트 왕가에는 마법을 억제해 주는 아티팩트, 사자의 왕홀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렘브란트 수준이라면 어떻게든 뚫어 낼 것이다.
다행인 건 사절단으로 참가했으니, 직접 움직이진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이목이 집중된 자리에서 마법을 쓰긴 어려울 테니까.
‘문제는 다른 쪽인데.’
아마 메인은 따로 있고, 렘브란트는 서포트일 확률이 높았다.
렘브란트가 서포트라면, 메인은 뭐란 말인가.
‘암국에서 지부장급 암살자를 보내 주기로 하긴 했지만.’
내가 준비한 패가 밀릴 거라는 생각은 한 적 없다.
암국에서 보내 줄 지부장급 암살자에, 나, 발레리아까지.
이렇게 총 셋이 움직일 예정이다.
그 외의 조력자도 있었다.
일단 암살자가 지금쯤 도착해야 움직임을 취할 텐데.
“도련님, 뭘 그리 깊게 고민하십니까?”
단이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평소와 괴리감 때문인지 낯설게 느껴졌다.
아니, 괴리감 때문이 아니다.
“이런 장난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만해. 좀.”
단은 씩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정확히는 단이 아니라, 단으로 모습을 바꾼 암국의 왕이었다.
지부장급 암살자를 보내 달라고 했는데.
본인이 올 줄은 몰랐다.
“눈치가 빠르시군요.”
“낮말을 듣는 새가 아닌 건가?”
“그 또한 지부장급이긴 하지만, 암살자는 아니라서 말입니다. 제가 직접 왔습니다.”
“인력이 모자라서 온 건 아니고?”
“지그문트 님이 주신 정보가 워낙 알짜배기였던지라, 서비스입니다.”
“선심 쓰는 척하는 건 낮말을 듣는 새와 똑같군.”
암국의 왕은 생각보다 능글맞은 성격이었다.
진지한 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모두 가면일 수도 있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대가 렘브란트 님푸스라는 거물이니 말입니다.”
“알고 있었나?”
“저도 며칠 전에야 입수한 정보입니다.”
“제국 측이 어떻게 나올지도 안다면 좋을 텐데.”
“그것까지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암국의 왕이 직접 나선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인력이 모자랐다거나.
나와의 협력 관계를 굳히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혹은 제국에 대한 내 대처를 직접 확인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뭐 어쨌든 간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어쨌든 소드 마스터 암살자가 지원해 준다니. 든든하군.”
“높게 평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렇다고 멋대로 움직이는 건 조금 곤란해.”
“저는 고용된 암살자. 지금부터는 지그문트 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겠습니다.”
“좋아. 일단 주변에 뭐 없는지 찾아봐. 은밀하게. 제거해야 할 건 제거하고.”
“확인했습니다.”
단의 모습을 한 암국의 왕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나도 움직임을 놓쳤는데,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어떻게 나오려나.’
황제는 늘 변수를 만들었다.
계획을 방해 받고 있다는 것 정도는 대강 눈치챘을 테니.
이번만큼은 주의해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하필 네르갈 한복판에 대규모 공격 마법을 날리려던 미친놈이 왔으니.’
그때,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귀족들도 모두 시선을 돌렸다.
엘프 장로 레골라스를 필두로 한 엘비아의 사절단이 입장하고 있었다.
“저게 말로만 듣던 엘프로구먼.”
“드라이어드와 페어리도 보이는군. 그림으로만 봤었는데.”
“살면서 이렇게 많은 요정족을 보게 될 줄이야.”
“맨 앞에 선 늙은 엘프가 하이엘프인가?”
사람들이 갈라지며, 자연스럽게 길이 생겼다.
요정족이 귀빈석에 자리하자, 왕성 쪽에서 시종이 나왔다.
시종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지금부터 레온하트 왕국과 엘비아의 동맹 선언식을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