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42/134)

2

죽은 드래곤의 레어

“델!”

“괜찮아.”

린시스가 황급히 떼어 내려고 했지만, 나는 만류했다.

실험체 17호는 기생 생물이 아니다.

멋대로 나를 숙주로 삼지는 못한다.

팔찌처럼 내 팔목을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제작자를 알아보는 건가?”

“제작자? 그게 무슨 소리지?”

의식을 잃은 벨수스는 마날루스의 레어 안쪽으로 옮겨졌다.

나는 세 드래곤에게 실험체 17호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실험체 17호는 여전히 내 팔에 들러붙어 있었다.

파베스는 탐탁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게 네 실험체 중 하나라는 얘기냐?”

“그래. 원래는 살아 있는 페러시트를 어떻게든 활용하려고 만들어진 놈인데.”

“마계의 생물로 그런 실험을 하는 건 너뿐일 거다.”

“알아. 고마워.”

“칭찬이 아니다. 인간.”

나름 취지는 좋은 실험이었다.

린시스는 얌전한 실험체 17호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런데 그게 왜 벨수스에게 들러붙은 거야?”

“그건 모르겠군. 나는 분명 폐기 명령을 내렸거든.”

“네놈의 관리 소홀 아닌가?”

“그건 아니라고 단언…… 음.”

내가 말을 끊고 생각에 잠기자, 린시스가 대답을 독촉했다.

“왜?”

“말했다시피, 실험체 17호는 내가 직접 폐기하지 않았거든. 다른 마법사가 연구 자료로 사용하고 싶다고 해서, 쓰고 폐기하라고 당부했지.”

“다른 마법사? 누구?”

“렘브란트 님푸스.”

린시스는 안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 팔베르크 제국의 젊은 마법사 아니야? 델, 네가 주목하고 있다는.”

“젊다니. 그놈도 이제 중년에 접어들었는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

“발레리아도 곧 서른이다.”

“헉.”

린시스는 허구한 날 잠자기 때문에 시간 감각이 영 흐린 감이 있었다.

조용히 얘기를 듣던 마날루스가 물었다.

“렘브란트 님푸스라는 자가 사건의 주동자더냐?”

“심증이야. 정확한 사항은 벨수스가 깨어나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잘 알아들었다. 그냥 넘길 사항은 아니구나.”

“어쩔 셈이지?”

“만약 진짜 그자가 한 짓이라면, 보여 줘야겠지.”

“뭘?”

“드래곤이 어떤 종족인지.”

드래곤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중립을 지킨다.

규율 때문에 용의 산맥 일대를 벗어나는 일도 거의 없다.

전쟁이 발발해도, 한 지역이 초토화되더라도 마찬가지다.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렇지. 선방 친 놈은 작살을 내놓는 것이 드래곤의 규율이었지.”

“표현이 좀 천박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군.”

파베스가 동조했다.

“만약 고의로 일어난 일이라면, 모든 드래곤이 보복에 동참할 것이다.”

“그 정도라고? 모든 드래곤은 과한 거 아닌가?”

“요즘 통 뭔 일이 없었으니까, 아마 심심해서라도 전부 들고일어날걸?”

“주동자만 죽일 건가?”

“당연히 주동자가 있는 나라까지 멸망시켜야지.”

파베스의 말에, 마날루스와 린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하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복수하기도 전에 제국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래곤이 하나도 아니고 떼거지로 몰려온다니, 내가 제국에 있어도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정말 벨수스에게 실험체 17호를 심은 것이 렘브란트 님푸스라면.

‘걘 좆 됐군.’

황제 성격에 벨수스를 건드렸을 가능성은 적었다.

철두철미한 놈이다.

괜히 잠자는 드래곤의 뿔을 걷어차지는 않았을 것이다.

확실한 건 벨수스가 깨어나야 경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뭔가 물어보려고 하지 않았더냐?”

“아, 맞다.”

마날루스의 물음에 정신이 들었다.

내가 여기에 온 목적 중 하나를 해결해야 했다.

“혹시 목오에게 부탁을 받았던 드래곤이 여기 있나?”

“목오라면, 서쪽의 땅거북을 말하는 거냐?”

“그래.”

린시스와 파베스는 모르는 눈치였다.

대답을 한 것은 마날루스였다.

“내가 알고 있다. 그 드래곤은….”

“뭔데 뜸을 들여?”

“이미 죽었으니까.”

“어?”

리옐이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 * *

“에구, 내가 큰 잘못을 했구나. 미안하다, 미안해.”

일의 경위를 들은 마날루스는 뚝뚝 눈물을 흘리는 리옐을 안타깝다는 듯 달랬다.

세계수를 살릴 수 있다는 하나 남은 희망을 저도 모르게 짓밟아 버린 꼴이니.

선한 성격을 생각하면, 죄책감이 클 것이다.

“그렇지. 레어에 가면 분명 자료가 남아 있을 거란다.”

“그럼, 우리 엄마, 살릴 수 있어요?”

“분명 살릴 수 있을 거다. 이 할미가 도와주마.”

“……정말이죠?”

“그럼. 정말이고말고.”

리옐은 훌쩍거리면서 새끼손가락을 척 들어 보였다.

“약속.”

가만히 지켜보던 파베스와 린시스가 당황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드래곤에게 약속은 목숨을 걸고 하는 맹약과 같다.

명예와 직결된 문제였기에, 함부로 받아들일 사항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날루스의 주름진 손가락은 리옐의 손가락에 걸렸다.

“그래.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에인션트님.”

“아이를 울려 놓고 이런 약속도 못 하는 못난 어른은 아니다.”

“하지만!”

“됐다.”

리옐은 모를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은 이 약속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자그마치 에인션트 드래곤의 지원이다.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럼 이제 뚝 그치거라.”

“……뚝.”

“옳지.”

마날루스가 안아 들고 있던 리옐을 내게 넘겼다.

리옐은 물기에 젖은 눈을 숨기려는 듯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 실언을 했구나.”

“됐어. 고의도 아니고.”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런다.”

마날루스는 정말 미안하다는 얼굴이었다.

“파베스. 이 아이와 델 로안을 투소메스의 레어로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에인션트님.”

“린시스, 벨수스는 내게 맡기고, 동행하거라.”

“그럴 생각이었어요. 제 아들 좀 잘 부탁드려요. 에인션트님.”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드래곤 둘이 순식간에 호위로 붙었다.

우리는 마날루스를 뒤로하고, 레어에서 벗어났다.

* * *

밖은 절벽과 가까운 산 꼭대기였다.

마날루스의 레어 내부와는 반대로, 생명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저 아래로 눈에 덮인 프라우드 산맥이 보였다.

정말 까마득한 높이였다.

린시스는 기지개를 켰다.

“으쟈쟈! 전부 끝나면 한잔할 거지?”

“이 몸은 알코올이랑 별로 안 맞는 것 같던데.”

“에이, 빼지 말고.”

파베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태평하군.”

“파베스, 설마 안 끼워 줘서 삐졌어?”

“헛소리하지 마라. 린시스.”

린시스의 장난을 일축한 파베스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는 내 팔목에 들러붙은 실험체 17호를 노려봤다.

“그건 어떡할 거지?”

“모르겠네. 폐기할 수도 있고, 연구 좀 더 해서 내가 쓸 수도 있고.”

“그걸 쓰겠다고? 숙주가 이지를 잃어버리는 것을 두 눈으로 보지 않았나?”

“옛날 실험체라 그래. 조금만 손보면 쓸 만해질걸?”

나는 단과 달리 갑옷을 입지 않는다.

굼뜬 동작보다 효율적인 회피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어에 취약한 편이다.

방어 마법 외에는 몸을 지킬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실험체 17호 정도면 쓸 만하다.

“미친놈이었군.”

“그건 인정이지.”

린시스가 동의했다.

배신을 하다니.

너무하다.

린시스는 꼼짝 않는 리옐을 살폈다.

“리옐은? 좀 진정됐나?”

“울다가 지친 것 같은데. 잠들었어.”

리옐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색색 자고 있었다.

린시스는 리옐을 보며 그리움에 잠겼다.

“벨수스도 이렇게 귀여울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귀엽진 않지.”

말은 저렇게 해도, 린시스는 벨수스에 대한 애착이 대단한 편이다.

대부분의 드래곤이 자식을 챙겨 주는 건 해츨링 때 정도.

이후로는 거의 남남에 가깝다.

“그래서, 투소메스라는 드래곤의 레어는 어디 있지?”

“여기서 멀지 않다. 걸어서 이동하지.”

파베스를 선두로, 우리는 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강력한 몬스터가 많은 용의 산맥이다.

그러나 몬스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들의 레어가 밀집된 정상 일대를 어슬렁거릴 만큼 멍청하진 않은 모양이다.

“죽은 드래곤의 레어는 대부분 방치된다.”

“방치?”

“그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기 위해서지. 레어 내부에 뭐가 있을지는 우리도 몰라.”

“투소메스 님은 레어에 다른 드래곤을 잘 들이지 않으셨으니까.”

마날루스의 말대로라면 목오의 부탁을 받은 연구는 투소메스가 전담했다.

죽기 전에 연구를 완성했는지 걱정이었다.

하다못해 자료라도 남아 있으면 이어 갈 수라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료를 보려고 하면 자동 소각되는 구조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델, 너는 정말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구나.”

“방심하는 것보다는 염두에 두는 쪽이 좋지.”

파베스는 작은 오두막 앞에서 멈춰 섰다.

정말 뜬금없었다.

용의 산맥 한가운데에 오두막이라니.

원목을 다듬어 만든 오두막은 꽤 아기자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곳이 투소메스 님의 레어 입구다.”

“드래곤들은 레어 입구에 꼭 이런 기믹을 넣는단 말이야.”

“개성이지.”

린시스가 오두막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 순간, 오두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무 틈에 껴 있던 흙먼지가 떨어졌다.

창문 너머로 거대한 눈동자가 보였다.

문턱에는 이빨이 나 있었다.

오두막 자체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가디언이군.”

드래곤이 레어를 장시간 비울 때, 레어를 지키는 것이 가디언이다.

자작의 골렘이나, 길들인 가고일, 정령 등을 쓰는 경우가 많다.

“투소메스 님의 가디언은 처음 보네. 미믹 같은 느낌으로 만든 것 같은데.”

“입구가 가디언이고, 가디언이 입구인 것 같네. 재밌어.”

린시스와 파베스는 태연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인 만큼, 더럽게 강하긴 할 것이다.

적어도 용의 산맥에 사는 몬스터를 전부 때려잡을 정도는 된다.

그렇다고 내가 겁을 먹을 필요는 없었다.

“이빨 전부 뽑기 전에 집어넣어라.”

“나는 뽑는 쪽보다 부수는 쪽이 취향인데.”

내 양옆에 있는 둘은 드래곤이다.

이런 가디언 정도는 주먹 한 방으로 부술 수 있다.

드래곤 피어에 짓눌린 가디언이 얼른 이빨을 숨겼다.

창문으로 보이던 눈동자가 사라지고, 문이 벌컥 열렸다.

이빨은 어느새 사라진 후였다.

“싱겁네.”

“입구를 부수는 건 좋지 않다. 린시스.”

“너는 뽑으려고 했으면서.”

파베스는 대답하지 않고 오두막 내부로 들어갔다.

린시스가 뒤를 따랐다.

나는 오두막을 가만히 바라봤다.

“취미 참 이상한 고룡이었나 보군.”

드래곤이 둘이나 붙어 있는 이상, 위험은 없을 것이다.

나는 오두막 내부로 발을 들였다.

문턱을 넘은 순간, 시야가 반전했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심한데.”

린시스가 사용한 라이트(Light)의 빛에, 레어 내부가 드러났다.

레어라기보다는, 커다란 연구실이 연상되는 곳이었다.

눌어붙은 피는 딱딱하게 굳어 벽의 일부처럼 보였다.

바닥에는 몬스터의 신체 일부가 늘어져 있었는데, 한 종족 같지는 않았다.

비위가 강한 편인 나도 썩 좋은 기분이 들지 않는 광경이었다.

“혹시 투소메스라는 드래곤, 광룡 아니었나?”

“그건…… 모르겠군.”

파베스는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가디언의 모습을 볼 때 대충 눈치챘지만, 취향 참 이상한 놈이다.

아니면 정말 사이코패스거나.

나는 발치에 놓인 무언가를 발로 슥 밀어냈다.

“도대체 뭘 했길래 레어가 이 꼴이 난 거지?”

“리옐이 잠들어서 다행이네. 이런 걸 보면 트라우마가 남을 텐데.”

“일단 앞으로 가 보지.”

그래도 레어는 주거 공간이다.

피나 사체가 없는 곳이 하나쯤은 있을 법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점점 그로테스크한 것들이 많이 보였다.

파베스는 더러워진 자신의 신발을 보며 인상을 썼다.

“레어 전체에 올 클린(All Clean) 한 번만 쓰면 안 되나?”

“그러다가 자료까지 날아가면 어쩌려고?”

“린시스 말이 맞아. 참아라.”

“빌어먹을.”

나는 한구석에 쌓인 사체 더미를 바라보았다.

보통 이런 곳에는 뭐가 있기 마련이다.

린시스가 내 주변을 기웃거렸다.

“왜?”

“저거. 딱 봐도 수상하잖아.”

사체들은 대부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한데 모여 있다.

부패 방지 마법이 걸린 듯, 썩지도 않은 모양새다.

뭐가 안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오기 좋다.

“에이, 뭐가 있다고.”

린시스가 겁 없이 사체 더미 앞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사체 더미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불쑥 튀어나온 손은 반쯤 썩어 있었다.

그르르르르르르……!

크기 때문에 입 밖으로 드러난 엄니.

굽은 등과, 녹색을 띠는 피부.

트롤이었다.

‘아니. 그냥 트롤은 아니군. 언데드 트롤인가?’

트롤은 반쯤 부패한 상태였다.

피부가 녹아내리며 뼈가 드러났다.

썩은 부분은 계속해서 재생하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썩어 들어갔다.

놈은 린시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이씨, 깜짝이야.”

갑작스러운 등장에, 살짝 놀란 린시스는 트롤을 걷어찼다.

뻥!

가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트롤이 소멸했다.

후두둑.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트롤이었던 것이 떨어져 내렸다.

뭐 얼마나 강하게 때리면 사지가 폭발하는지 모르겠다.

새삼스럽게 저 주먹에 처맞은 벨수스가 안쓰러워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파베스는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이 됐다.

“여전히 힘은 무식하게 세군.”

“칭찬으로 들을게.”

나는 사체 더미를 살폈다.

의도된 함정이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놀란 상대를 덮치는, 점프 스케어 형식.

던전에서 흔히 사용하는 배치다.

‘끝에 뭐가 있긴 한가 본데.’

말인즉슨, 투소메스는 이 레어를 던전처럼 구성했다는 뜻이다.

대체로 던전의 끝에는 보상이 존재한다.

신살의 제거에 대한 자료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트롤 자체도 조금 이상했다.

‘단순한 언데드는 아니었다.’

일종의 실험체일 확률이 높았다.

나처럼 인도적인 방향으로 사용한 것 같진 않았지만 말이다.

린시스는 하품을 하더니,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천장에서 독성을 띤 거대 슬라임이 떨어졌다.

파베스의 마법에 얼려진 뒤, 부서져 산산조각 났다.

가고일과 합성된 키메라 한 마리가 날아왔다.

린시스의 주먹 한 방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타 등등, 꽤 야심찬 연출과 함께 등장한 몬스터들은 모두 허무하게 죽었다.

“드래곤이 둘이나 붙어 있으니 편하긴 편하군.”

여태껏 나온 몬스터들은 전부 강력했다.

나 혼자였으면 고전을 면치 못 했을 정도다.

하지만, 양옆에 붙어 있는 것이 드래곤이다.

지상 최강의 종족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얼마나 간단하게 처리했으면, 리옐이 아직도 깨지 않았다.

“에인션트님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이 행할 뿐이다.”

“나는 명령이 없었어도 이 정도는 도와줬을 거야. 의리!”

그렇게 몬스터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면서 나아간 지 30분.

어느덧 끝자락으로 보이는 철제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고리도 없는 평평한 문에는 작은 열쇠 구멍이 나 있었다.

“끝인 것 같은데? 어떡할까, 열어?”

“열어야지. 좀비 드래곤만 안 나왔으면 좋겠군.”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 투소메스 님의 유해는 다른 곳에 있으니.”

철제문은 얼핏 봐도 보통 무게가 아닐 것 같았다.

문이라기보다는 그냥 금속 덩어리로 길을 막아 놓은 모양새였다.

린시스는 주먹에 입김을 불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연다와 부순다가 언제부터 동의어였지?”

“열쇠 없잖아.”

“그건 그래. 내부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조심해라. 자료 날아가면 말짱 꽝이니까.”

“걱정 마셔. 흡!”

린시스는 한 손으로 손목을 잡고, 힘껏 문을 때렸다.

쩌엉!

두께만 수 미터에 달하는 문이 움푹 파였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펀치였다.

몬스터가 폭발한 것도 납득이 됐다.

린시스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어라, 안 부서지네.”

“방어 마법으로 코팅된 것 같은데.”

“인간의 말이 맞다. 독자적인 술식이라 디스펠도 힘들어.”

파베스가 정확히 봤다.

문을 감싼 방어 마법은 통상 마법이 아니라, 직접 구성한 마법이었다.

하지만 틀린 점도 있었다.

“그렇다고 디스펠하지 못할 건 아니지.”

“할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시간 소모가 길다는 뜻이다.”

“뭐 얼마나 오래 걸린다고.”

“술식 파악을 포함하면 몇 시간은 걸린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앞으로 나섰다.

몇 시간이나 소모할 술식은 아니었다.

그냥 십자 낱말 풀이 정도로 생각하면 쉽다.

“뭐 그리 고위 마법도 아니구먼.”

디스펠은 특기다.

파베스는 영 못 미덥다는 얼굴이었지만, 제지하지는 않았다.

나는 린시스에게 잠든 리옐을 맡기고, 문에 손을 올렸다.

푸른 마나가 내 손 끝에서 문 전체를 훑었다.

마나 감지 방어도 없다.

술식 자체가 커서 어려워 보일 뿐이다.

“구경하고 있어. 금방 끝날 것 같으니까.”

* * *

파베스는 인간을 영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드래곤이다.

제 분수를 모르고 설치며, 이기적이고 무능하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앞의 인간은 무능하진 않았다.

“델이 디스펠 하는 건 처음 보나 봐?”

“그래. 잠깐 조우한 것 정도가 전부다.”

“그럼 그런 반응을 보일만 하지.”

실제로 파베스는 감탄하고 있었다.

문 앞에 선 지그문트는 지휘하듯 손을 움직였다.

그때마다, 복잡한 술식이 너무 간단한 방식으로 풀려 나갔다.

파베스가 상상도 못 한, 새로운 길을 찾아낸다.

저도 모르게 매료된 파베스는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건…… 말이 안 되는데?”

알수록 많은 것이 보이는 법이다.

마법에 방대한 지식을 가진 파베스였기에, 느낄 수 있었다.

지그문트의 지식과 마나 컨트롤은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나는 말이야. 델이랑 대화하면서 처음으로 자괴감이라는 걸 느껴 봤어.”

린시스는 과거를 회상했다.

황성에서, 그와 마법을 두고 논쟁을 벌였을 때.

드래곤은 마나의 축복을 받은 종족이다.

마법에 대한 지식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물며 논쟁 상대는 인간이다.

설령 그가 억지로 수명을 늘렸다고 해도, 린시스가 살아온 세월의 반도 안 됐다.

“드래곤이 인간한테 지식으로 밀린 거야. 처음에는 얼마나 마음이 상했는데.”

린시스는 델 로안과의 논쟁에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자존심도 상했고,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존경심이 들기 시작했다.

파베스에게 눈을 돌렸다.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아마 나랑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겠지.’

린시스는 파베스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일 테니까.

그 와중에도 지그문트는 손을 움직였다.

파베스가 몇 시간이 걸릴 거라고 예상했던 술식이다.

그런데 술식은 거의 디스펠되기 직전이었다.

‘5서클로 저걸 풀고 앉아 있네.’

하물며 현재 지그문트의 마나 서클은 5개가 전부다.

서클이 늘어날수록 컨트롤할 수 있는 마나의 양도 늘어난다.

여러 가지를 감안할수록, 지그문트의 디스펠은 기예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내가 저거 보고 마법을 잘 안 쓰기 시작했지.’

린시스는 드래곤인데도 불구하고 직접 무력을 행사하거나, 꿈을 활용하곤 한다.

그 이유 중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지그문트였다.

만약 순수하게 마법으로만 붙는다면, 이길 엄두가 안 났다.

정작 지그문트는 그것을 모를뿐더러, 붙을 생각조차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철컥.

자물쇠 열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문을 감싸고 있던 방어 마법이 사라졌다.

디스펠이 끝난 것이다.

지그문트는 오랫동안 위를 보고 있어 뻐근하다는 듯 목을 주무를 뿐.

별로 무리했다는 기색은 없었다.

린시스는 파베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파베스.”

“……어, 어.”

“얼빠진 소리 그만 내. 자존심이 있지.”

“……흠, 내가 언제 얼빠진 소리를 냈지?”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린시스는 피식 웃었다.

지그문트가 돌아왔다.

“다 풀었다.”

“수고했어, 델.”

“이제 보니, 미친놈이 아니었군.”

“왜, 좀 다시 봤냐?”

“많이 미친놈이었어.”

파베스는 솔직하지 못한 감상평을 남겼다.

린시스는 파베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봤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자존심을 지켜 주기 위해서였다.

“이제 다시 내가 나설 차롄가?”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왜?”

“풀다가 여는 방법도 찾았거든.”

“……하아,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린시스는 납득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방어 마법 디스펠 도중에 문을 여는 방법을 찾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원래 이런 인간이었다.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는 쪽이 속 편하다.

지그문트는 마나로 작은 열쇠를 만들어 냈다.

“그건 또 무슨 마법이야?”

“그냥 마나 모아서 만든 건데.”

린시스는 말을 삼켰다.

마나 컨트롤 능력이 어느 정도면 저렇게 세밀한 구조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 거냐고.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린시스도 비슷하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열쇠의 작은 홈 같은 부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자신은 없었다.

그건 파베스도 마찬가지였다.

“생각해 보니까 너무 큰 소리가 나면 애가 깰 것 같아서.”

지그문트는 태연하게 열쇠 구멍에 열쇠를 끼워 넣었다.

파베스는 반신반의 했지만, 열쇠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열쇠를 돌린다.

끼이이이익…….

철제문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여기는 정상적이군. 그나마.”

여전히 어두침침하긴 하지만, 한결 나았다.

적어도 피와 살이 난무하는 그로테스크한 공간은 아니었다.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뒤 쓰는 방인 듯, 작은 편이었다.

방 안에 들어찬 플라스크 때문에 더욱 좁게 느껴졌다.

“이건 뭐지?”

린시스는 플라스크들을 살폈다.

그 안에 담긴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용액이었다.

각자 색이나 농도가 조금씩 달랐다.

부글부글 끓어오르거나, 특수한 용기에 담긴 것도 있었다.

나는 플라스크를 하나 집어 들었다.

“독 같은데?”

“독?”

“그래. 그냥 독도 아니고, 맹독이야.”

모두 직접 제조한 독이다.

파베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독과 관련된 몬스터가 많이 나오긴 했지.”

“처음에 사체 더미에 숨어 있던 트롤. 기억나냐?”

린시스의 주먹 한 방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언데드 트롤.

놈은 부패와 재생을 반복하고 있었다.

언데드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상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말이다.

“아마 이 독 중 하나를 투여 받은 놈 같다.”

“영원히 고통 받고 있었던 거네. 불쌍해라.”

“네가 할 소리냐?”

파베스의 일침에, 린시스는 딴청을 피웠다.

그 트롤을 무자비하게 터트린 것은 린시스였다.

라이트(Light)로 만들어진 빛무리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방 전체를 비추니, 수백 개의 플라스크가 보였다.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양.

하나하나 확인하는 건 비효율의 극치다.

“어디 연구의 기록 같은 걸 남겨 뒀을 거야.”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파기했을 수도 있지 않나?”

“그랬다면 이 연구실도 남겨 두지 않았겠지.”

몬스터로 길목을 막아 둔 것은, 지킬 것이 있다는 반증이다.

말인즉슨, 자료는 이곳에 있다.

곧장 연구실 수색을 시작했다.

따로 주의할 필요는 없었다.

린시스와 파베스라면 나름대로 대처를 하고 움직일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린시스가 서랍에서 뭔가를 찾아냈다.

“델, 파베스, 여기.”

린시스가 찾은 것은 먼지 쌓인 책이었다.

오래 붙잡고 있었던 듯, 가죽 표지가 상당히 닳아 있었다.

“연구일지?”

“클래식하네.”

연구일지를 펼쳤다.

누가 고룡 아니랄까 봐, 기록은 고대어로 작성되어 있었다.

서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고대어에 능통한 사람은 극소수다.

나 같은 경우에는 그 극수소 중 하나.

옆에 있는 둘은 사람이 아니라 드래곤이다.

고대어는 기본 소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린시스가 첫 번째 장을 읽었다.

“연구 주제, 신살의 제거에 대하여.”

당첨이었다.

린시스는 일지를 빠르게 넘겼다.

중요한 부분은 따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서쪽 땅에 사는 신, 목오의 부탁을 받아 신살의 제거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벗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수단 방법은 가리지 않을 생각이다.

“목오와 친구 사이였나 보지?”

“투소메스 님은 서쪽에 연고가 많으셨다. 이상한 일은 아니지.”

“신과 친구라니. 대단하네.”

-신살은 저주와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결론이 나왔다.

-겉으로 드러난 표식을 도려내도 소용없었다. 신살은 신체가 아닌 영혼에 박혀 있다.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을 동원했지만, 제거에 실패했다.

부정적인 결론뿐이었다.

진척이 없자 초조했는지, 생략된 기록도 많았다.

계속 읽었다.

-목오가 죽었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지나도 신살은 사라지지 않았다.

-불사의 괴물이 살아 있는 한, 영원히 유지되는 것 같다.

-목오가 죽었는데도, 신살은 남아 있었다.

잇따른 실패의 기록.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갔다.

어느 순간, 연구 주제가 바뀌었다.

-죽지 않는 것을 죽이는 방법에 대하여.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주 원초적인 해결 방법으로 돌아갔다.

신살은 저주의 일종.

마나가 아닌, 저주를 건 자의 생명력을 대가로 지속된다.

즉 저주의 근원, 불사의 괴물을 죽이면 된다.

‘문제는 불사의 괴물이 이름 그대로 불사라는 건데.’

실험체 1호 같이, 애매한 능력이 아니다.

말 그대로 불사다.

죽여도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죽여도 죽지를 않는다.

일시적으로 신체를 파괴할 수는 있지만, 금방 재생한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신살에서 힌트를 얻었다.

-영원히 지속되며, 어떤 방법으로도 희석되지도 않고, 면역 체계도 갖출 수 없는 맹독.

-물질적인 신체가 아니라, 영혼을 좀먹는, 신살과 같은 성질을 띠는 독.

-땅에 예속된 존재인 이상, 무한한 불사성을 띠고 있진 않을 것이다.

투소메스의 결론은 이랬다.

신살과 흡사한 성질을 띠는 독을 만들어, 불사의 괴물을 죽인다.

자연히 시전자가 죽으면서, 저주도 풀린다는 내용이었다.

솔직히 썩 믿음직스럽지는 않았다.

땅에 사는 신들조차 끝내 죽이지 못해, 봉인된 불사의 괴물이다.

그것을 죽이는 방법이 고작 독이라니?

-바실리스크의 독과 히드라 독의 결합…… 실패.

-발광 이끼와 트롤의 피를 결합했더니, 빛나는 포션이 나왔다. 쓸모는 없어 보인다.

-독에 저주를 섞었다. 영속성이 떨어진다는 결론이 나왔다. 나는 언젠가 죽는다.

-가고일 피부 샘플을 데스 바이퍼의 독에 용해시켰다. 실패했다. 용질의 문제 같다.

연구일지가 팔락팔락 넘어갔다.

실제로 만들어져, 실험까지 끝낸 독만 수십 만 종류가 넘었다.

독을 다루는 사람들에게는 마도서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두꺼운 연구일지에서 처음으로, 긍정적인 단어가 나왔다.

-헤아릴 수도 없는 실패 끝에, 나는 성공했다.

-깨끗한 정령수에, 타락한 일각수의 뿔을 섞어 영혼에 틈을 벌린다. 그 후…….

독을 만드는 방법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온갖 기상천외한 재료에, 나도 처음 보는 방식의 제조법이었다.

저걸 전부 찾아서 만들어야 되나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샘플은 이미 만들어졌고, 레어에 따로 보관되어 있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리나 했더니, 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독을 완성하지 못했다. 마지막 재료가 부족했다.

-용의 산맥에 사는 드래곤들에게 수소문해도 찾을 수 없었다.

-직접 찾는 수밖에.

일지는 거기서 끊겨 있었다.

린시스는 마법으로 일지를 확인했지만, 숨겨진 내용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마지막 재료가 적혀 있었다는 것.

재료를 확인한 린시스와 파베스는 동시에 인상을 찡그렸다.

* * *

왕궁이 부럽지 않게 꾸며진 휘황찬란한 침실.

발레리아는 침대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다.

린시스는 인간에 우호적인 드래곤이다.

레어에는 인간 손님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 크기만 해도 왕궁 수준이었으며, 읽을거리도 많았다.

발레리아는 책을 덮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럴 거면 왜 따라오라고 한 거람.”

린시스에게 텔레포트된 뒤로, 쭉 책만 읽었다.

희귀한 서적이 많아 지루하진 않았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모처럼 여행이었는데, 이렇게 떨어져 버리다니.’

함부로 용의 산맥에 오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레온하트로 돌아가도 괜찮았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가 봤자 하는 일이라고는 업무와 마법 수련이 전부다.

침대를 굴러다니던 발레리아가 멈췄다.

“스승님이 갔으니까, 벨수스는 문제없을 테고.”

발레리아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고, 침실 밖으로 나섰다.

찾아간 곳은 레어의 안쪽에 있는 빈 공터였다.

“흡!”

남자가 허공에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단 록벨런.

스스로를 지그문트의 기사라고 밝힌 남자.

충성심은 높은 것 같았지만, 발레리아 눈에 드는 인재는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평범한 기사였다.

왜 데리고 다니는지 의문이었다.

“적탑주님?”

시녀, 마리나가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쪼그려 앉은 모양새가 영 불편해 보였다.

발레리아는 발끝으로 바닥을 툭 두드렸다.

간이 의자가 두 개 만들어졌다.

“앉아요. 불편하게 있지 말고.”

“우와, 감사합니다.”

마리나는 의자에 앉았다.

발레리아도 그 옆에 앉아 단을 구경했다.

비 맞은 것처럼 온몸이 땀으로 가득했다.

다리와 팔은 한계인 듯 떨렸다.

“얼마나 됐어요?”

“잠깐 휴식한 걸 빼면, 이곳에 온 후로 쭉요.”

“독종이네.”

발레리아는 혀를 내둘렀다.

이미 그가 훈련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여행 도중에도 틈틈이 몸을 움직였으니.

‘옆에 스승님이 계셔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마탑에 종종 있는 인간 군상이다.

열심히 하는 척만 열심히 하는 부류.

발레리아는 사람을 잘 믿지 못할뿐더러, 의심도 많은 성격이다.

단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옆에 지그문트가 없으니 훈련 강도가 높아졌다.

“왜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거래요?”

“모시는 분이 지그문트 도련님이시니까요.”

마리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레리아는 처음으로 둘이 마음에 들었다.

“마리나, 물어볼 게 있는데요.”

“네.”

“환생했다는 걸 들었을 때, 놀라지 않았나요?”

“계속 언질을 해 주셨거든요. 처음엔 저도 단 님도 믿지 않았지만요.”

마리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전생에 대마법사였다는 말이 진짜일 줄은 몰랐다.

중대한 사항이건만 너무 가볍게 말을 하는 바람에,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혼란스러웠을 텐데.”

“아니라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직접 밝혀 주셨잖아요? 숨길 수 있었을 텐데도.”

지그문트는 단과 마리나에게 환생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밝혔다.

‘나는 너희들이 알고 있던 지그문트가 아니니, 떠날 거면 떠나라.’라는 듯이.

“도련님께서 저희를 믿어 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마리나는 무아지경에 이르러서도 노력하는 단을 바라보았다.

전투에서, 마리나가 할 수 있는 건 어쭙잖은 궁술이 전부다.

대신 잡다한 일을 도맡아서 하고, 리옐을 전담해서 돌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지그문트를 따르고 있었다.

발레리아는 지그문트가 둘을 데리고 다니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스승님이 좀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성향이 있으신데. 힘들진 않나요?”

“전혀요. 오히려 즐거워요. 고작 시녀를 이렇게 대하시는 건 도련님뿐일 거예요.”

“속은 꼬부랑 할아버진데. 왜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도련님은 도련님인 걸요.”

몇 번 더 떠봤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발레리아가 이토록 지그문트의 주변 사람을 경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나만 약속해 줄 수 있나요?”

“약속요?”

“저희 스승님. 배신하지 말아 주세요.”

마리나는 말을 삼켰다.

델 로안은 황제에게 배신을 당해 죽었다.

생명과 직결된 약점을 알려 줄 정도로 믿고 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다.

마리나가 알고 있는 건 그 정도가 전부였다.

그 배신감이 얼마나 클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약속할게요.”

마리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리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 보이겠지만 스승님은…….”

발레리아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마나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텔레포트(Teleport)의 전조였다.

곧, 리옐을 안아 든 지그문트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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