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6권) (41/134)

기사 가문의 대마법사 6권

글쓰냐 퓨전 판타지 장편소설

목차

광룡의 아들

죽은 드래곤의 레어

동맹의 중심

그림자 속에는

암국의 왕

발락 리빙데드

신을 노리는 자들

1

광룡의 아들

“브레스! 피하시오! 구석으로!”

하우전드가 재빠르게 건물 잔해로 몸을 던졌다.

다급히 리옐을 안아 든 마리나도 옆으로 빠졌다.

단과 발레리아까지 이동을 마쳤지만, 한 명은 그러지 않았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아가리를 벌린 벨수스 앞에 서 있었다.

놀란 발레리아는 지그문트를 다그쳤다.

“스승님! 피하세요!”

“흠,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푸른 마나가 지그문트의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발레리아는 황급히 디스펠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마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벨수스의 의지에 반응한 마나가 저절로 움직인 것이다.

“내가 못 풀고 있는데, 네가 풀 수 있겠냐?”

“으, 진짜!”

“도련님!”

단과 발레리아가 동시에 앞으로 뛰쳐나갔다.

앞에는 드래곤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한테만 이러는 걸 보니, 밉보인 모양이야.”

“어떻게 하실 거예요?”

“원래라면 죽었겠지만, 대책이 있지.”

지그문트는 단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단, 등 좀 받쳐 줘.”

“예.”

단은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지그문트의 명령대로, 등을 받치고 섰다.

벨수스의 목구멍에서 모여든 화기가 눈에 들어왔다.

발레리아는 지그문트와 눈을 마주쳤다.

“마나 링크.”

“알았어요.”

마찬가지로, 의문은 없다.

발레리아가 빠르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6서클까지다.

하지만 드래곤 브레스는 7서클 방어 마법인 앱솔루트 배리어(Absolute Berrior)로도 막기 어려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다.

발레리아는 지그문트의 팔을 붙잡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지그문트가 중얼거렸다.

단의 손에 등을 기대고, 발을 땅에 단단히 고정한다.

발레리아의 마나 서클이 회전했다.

지그문트는 벨수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발레리아는 마나가 쭉 빠져나가는 허무한 감각을 느꼈다.

‘무슨?’

지그문트는 아직 5서클.

쓸 수 있는 모든 마법을 쓰더라도, 7서클인 발레리아의 마나를 전부 사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그문트는 지금 발레리아의 마나 대부분을 전부 사용하려고 하고 있었다.

지그문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벨수스의 입에 모여들었던 화기가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아아!

정면에서 쇄도해 오는 불길.

단과 마리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람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빛이 눈앞에서 폭발했다.

동시에, 지그문트의 손에서 여럿 겹쳐진 복잡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브레스에는 브레스지.”

콰아아아아아아!

마법진에서는 화기가 폭발했다.

벨수스의 드래곤 브레스와 똑같은, 드래곤 브레스.

브레스와 브레스가 서로 맞부딪쳤다.

둘을 중심으로 공기가 터져 나갔다.

“큭!”

지그문트의 몸은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단은 이를 악 물고 지그문트를 지탱했다.

머지않아, 두 브레스가 사그라들었다.

입을 닫은 벨수스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지그문트가 씩 웃었다.

“왜. 너만 쓸 수 있을 줄 알았냐?”

브레스는 드래곤이라는 종족만이 사용할 수 있다.

마법으로 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지그문트가 심심풀이 삼아 만든 것이, 바로 이 아티팩트.

숨결(Breath)이다.

“터무니없는 아티팩트였네요.”

“성능은 꽤 괜찮지?”

“마나를 좀 많이 잡아먹는다는 것만 빼면요.”

드래곤 브레스의 위력을 생각하면, 그리 많이 잡아먹는 것도 아니었다.

지그문트는 이어서 마법을 사용했다.

멘탈 체크(Mental Check).

저주나 마법에 의하여 정신이 오염됐는지에 대한 여부를 확인하는 마법.

반응은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쉰 지그문트가 소리쳤다.

-벨수스 블랙! 정신 차려라! 네 아비를 따라갈 셈이냐!

꾸짖는 듯한 목소리에, 벨수스가 목을 길게 뻗고 포효했다.

쿠오오오오오!

땅이 뒤흔들렸다.

발레리아는 남은 마나를 쥐어짜 방어 마법을 캐스팅했다.

리옐이 본능적으로 가호를 내려 일행을 드래곤 피어로부터 보호했다.

지그문트는 벨수스에게 다가갔다.

벨수스는 다가오지 말라는 듯, 낮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미련한 놈. 하는 짓만 보면 드래곤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해도 믿겠구나.”

지그문트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각성(Awaken)이나 멘탈 체크(Mental Check) 같은 간단한 마법도 막아 내지 못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벨수스는 지금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만 잡아다가 죽이려고 한 이유가 있을 터.”

둘의 차이는 명확하다.

벨수스는 드래곤이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그 육체 능력은 몬스터나 인간과 비할 것이 못 된다.

반면 지그문트는 이름 없는 검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

하지만 지그문트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벨수스는 뒤로 물러났다.

“사춘기는 아닐 테고, 이러는 이유가 뭐냐?”

벨수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돌려 거대한 꼬리를 휘둘렀다.

지그문트는 방어하지 않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린시스, 니 애 좀 어떻게 해 봐라.”

그 순간.

지그문트의 머리 위에서 벨수스보다 두 배는 커다란 드래곤 한 마리가 나타났다.

프라우드 산맥의 눈과 같은, 하얀 비늘을 가진 드래곤.

화이트 드래곤 린시스가 급하강했다.

발톱으로 벨수스의 목을 죄고, 눌렀다.

쿵!

벨수스의 머리가 땅에 처박혔다.

제압당한 벨수스가 울부짖었다.

카아아아아악!

린시스는 벨수스를 짓누른 채 지그문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게 누구야. 죽었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그놈이나 처리해라.

-그래. 잠깐만 기다려.

* * *

쾅! 콰앙!

쌓여 있던 눈이 폭발했다.

땅이 흔들리고, 건물의 잔해가 날아갔다.

두 드래곤은 뒤엉켜서 싸우고 있었다.

화이트 드래곤, 린시스의 압도적인 공세였다.

끼어들 엄두도 안 나는 전투를 보며, 단이 질문했다.

“저 드래곤은 누굽니까?”

“린시스. 벨수스의 친어머니지.”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니고요?”

린시스가 만들어 낸 작은 공간.

우리는 잠시 쉬며 두 드래곤의 혈투를 구경했다.

구경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저기 끼어들면 무조건 사망이다.

쿠오오오오오오!

제 자식이라고 봐주는 건 없었다.

린시스가 벨수스의 꼬리를 물어뜯었다.

벨수스는 죽는 거 아닐까 의문이 들 정도로 심하게 당했다.

날개의 일부가 찢겨 나갔고, 목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린시스는 멈추지 않았다.

“린시스 님이 저렇게 화나신 거, 처음 봤어요.”

“억장이 무너질 만도 해.”

사연을 아는 나는 린시스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리옐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하우전드가 슬쩍 합류했다.

“지그문트 공. 혹, 진짜 드래곤 슬레이어였소?”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믿어라.”

“누가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소?”

“도련님, 드래곤도 사냥하셨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사냥은 아니었지.”

콰앙!

땅이 크게 흔들렸다.

린시스가 벨수스를 찍어 누른 것이다.

곤죽이 된 벨수스는 숨만 겨우 쉬고 있었다.

흥분을 가라앉힌 린시스가 고개를 돌렸다.

-끝났어. 이제 나와도 괜찮아.

나는 린시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애들이 뒤에서 쫄래쫄래 따라왔다.

린시스는 우리를 내려다보다가, 마법을 사용했다.

폴리모프(Polymoph).

빛이 린시스의 몸을 감쌌다.

곧 빛이 사그라졌고, 그 자리에는 백발의 여성이 서 있었다.

“안녕, 델. 많이 약해졌네.”

“오랜만이군. 린시스.”

“아, 리아도 반가워.”

“저도요. 린시스 님. 그런데, 벨수스는…….”

린시스는 벨수스의 머리에 앉아 손을 휘둘렀다.

그레이트 바인드(Great Bind).

빛의 사슬이 벨수스의 몸을 칭칭 감았다.

굳이 구속하지 않아도 움직이지 못하겠지만.

“어.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요.”

“뭐, 어때. 이러는 편이 안심이 되잖아.”

린시스의 시선이 뒤쪽을 향했다.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간다.

“못 보던 얼굴들이네.”

“애들 겁주지 마라.”

단과 마리나는 조금 떨고 있었다.

린시스가 감추고 있던 피어를 드러낸 것이다.

하우전드는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린시스는 리옐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 아이는?”

리옐은 드래곤 피어를 정면에서 마주했음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린시스가 조절을 했다고는 하나,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대여섯 살의 아이라면 더더욱.

리옐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자기소개를 했다.

“아빠 딸!”

“……델. 너, 딸도 있었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린시스는 의아한 눈으로 리옐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새싹이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 드라이어드잖아?”

“아니야! 리옐이야!”

“리옐? 내 이름은 린시스란다. 린시스 화이트.”

“린시스?”

“그래. 이리 좀 와 보련?”

리옐은 허락을 구하듯 나를 올려다봤다.

린시스가 허튼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리옐은 마리나의 손을 놓고 총총 린시스의 앞으로 걸어갔다.

리옐이 걱정됐는지, 마리나가 넌지시 질문했다.

“괜찮은 건가요?”

“그래. 술주정이 심하고, 잠이 많고, 이따금 폭력적인 것만 빼면 괜찮은 녀석이야.”

“저기. 다 들리거든?”

린시스는 내게 괜한 소리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반박하지는 못했다.

본인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모양이다.

“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신목이 확실하네.”

“그래. 신목의 후계자다.”

“애는 알고 있어?”

신목이 후계자를 만든다는 것은, 죽음을 앞뒀을 때뿐이다.

린시스가 말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리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영문을 모르는 리옐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입 다물어. 내가 알아서 해결할 거니까.”

“은근히 정이 많다니까.”

“왜 화제가 이쪽으로 새는지 모르겠군. 내 딸은 됐고.”

“헉!”

리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어느 부분에서 놀란 건지 모르겠다.

린시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자랑했다.

“있지. 아빠가 처음으로 내 딸이라고 했어!”

“델, 당신도 너무하네. 정말.”

“아, 이건 좀.”

린시스는 불쌍하다는 듯 리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리나도 동조했다.

단과 하우전드도 눈빛으로 나를 비난했다.

나는 말을 돌렸다.

“여태까지 뭐 하고 있었는데, 애가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둔 거야?”

“친구가 죽었다길래. 오랜만에 혼자 들이붓다가 그대로 곯아떨어졌지.”

“친구 누구?”

“델 로안이라고, 있어.”

“누군지는 몰라도 멀쩡히 잘 살아 있을 것 같은데.”

“뻔뻔한 건 여전하네.”

린시스는 기가 차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뒤에 서 있던 발레리아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야기는 좀 더 미뤄 두지. 그거는 어떻게 할 거야?”

“벨수스?”

“일단 광증은 아닌 것 같던데.”

최강의 생물이라는 드래곤도 병에 걸린다.

단순한 질병이 아닌, 정신적인 병이었다.

그 대표 격이 바로 광증이다.

“광룡이 아니라 악룡이라고 불렸으니.”

“그거 다행이네. 정말로.”

광증에 걸려 이지를 잃은 드래곤을 광룡이라고 한다.

광룡은 다른 드래곤보다 더 위험하게 분류된다.

수명을 깎아서라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용의 산맥에 사는 드래곤들이 나서서 처리하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벨수스는 광증에 걸린 것이 아니었다.

광증은 마법이나 저주가 아닌 질병.

멘탈 체크(Mental Check)에 반응하지 않는다.

“여긴 추우니까, 들어가서 얘기할까?”

“어딜?”

“어디긴 어디야. 내 레어지.”

“저, 저.”

“응?”

“저는 어떻게 합니까?”

하우전드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내 검을 가공하기 위해서다.

대뜸 레어까지 갈 이유는 없다.

“드워프? 델, 누구야?”

“이곳, ‘오래된 화로’. 그러니까 벨수스가 박살 낸 마을의 장로, 하우전드다.”

“그래? 미안해. 아들을 대신해서 사과할게.”

설마 사과를 받을 줄은 몰랐는지, 하우전드의 입이 벌어졌다.

드래곤은 오만하다.

거의 모든 종족을 열등하다고 보는 경우가 대다수.

드워프에게 머리를 숙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성격 나름이다.

“괘, 괜찮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다친 드워프는 있어도 죽은 드워프는 없었습니다.”

“그거 다행이네. 얘가 좀…… 맛이 가서.”

린시스는 벨수스의 몸뚱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쾅! 쾅!

그러나 그 위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어찌나 강하게 때린 것인지, 가죽에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드래곤 가죽에 손자국을 낼 정도면, 바위도 부술 수 있을 것이다.

그레이트 바인드에 주둥이가 묶인 벨수스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린시스를 바라봤다.

“씁, 누가 눈 그렇게 뜨래?”

쾅!

소심하게 반항한 벨수스의 가죽에 손자국이 추가됐다.

린시스는 손을 탁탁 털고 말했다.

“마을을 부순 거라면 이 아이를 정신 차리게 하고, 배상을 시킬 테니까. 기다려 줄래?”

“아닙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사양하지 마렴. 어디 가서 가정교육 잘못시켰다는 얘기 듣는 건 싫거든.”

하우전드는 땀을 비 오듯 흘렸다.

마을을 부순 악룡의 배상이라니.

결코 달갑진 않을 것이다.

“저는 지그문트 공의 검을 두드리기 위해서 이곳을 찾았을 뿐입니다.”

“그래? 그러면 여기서 일하는 건 위험할 텐데. 호위 하나 붙여 줄게.”

린시스는 발로 살짝 눈을 건드렸다.

청량한 기운이 퍼져 나오며, 눈 더미가 몸을 일으켰다.

눈은 저절로 뭉치더니, 눈사람과 꼭 닮은 모양의 형상이 됐다.

“……이건.”

“눈의 정령. 멍청해 보여도 꽤 강하니까, 작업하는 동안 방해 받을 일은 없을 거야.”

단순한 눈의 정령이 아니었다.

하급도 아니고 중급 눈의 정령이다.

모양새가 어째 이상했지만, 그 힘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오거 몇 마리쯤은 너끈하게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호의를 베풀어 주시다니, 드래곤님께선 아량이 넓으시군요.”

“나도 알아. 그럼, 이제…….”

쿠오오오오오!

린시스가 텔레포트를 준비하는 순간, 돌연 주둥이를 묶고 있던 사슬을 끊어 낸 벨수스가 포효했다.

방심하고 있던 하우전드가 피어를 정면에서 맞고 기절했다.

“린시스!”

“누구 닮았는지, 힘 하나는 좋네!”

곧바로 린시스가 움직였다.

텔레포트 캐스팅을 취소하고, 다시 한번 그레이트 바인드를 준비한다.

하지만 늦은 감이 있었다.

벨수스는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훌쩍 솟아올랐다.

“……마나가!”

숨결에 마나를 모두 쏟아부은 발레리아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보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벨수스는 도망치고 말았다.

타격이 상당했는지, 날아가는 꼴이 위태롭다.

린시스는 혀를 찼다.

“저 자식이, 엄마 말 안 듣고 가출을 해?”

“그거랑은 좀 다르지 싶은데.”

나는 벨수스가 도망치는 방향을 살폈다.

북쪽, 용의 산맥을 향하고 있었다.

“저기로 간 시점에서 퇴로는 없다고 봐도 되지 않나?”

“그래. 일단 숨 좀 돌리자.”

* * *

그 자리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린시스에게는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하우전드가 기절한 상태라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었다.

축약한 이야기를 마치자, 린시스가 감상평을 내놓았다.

“델, 당신은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재주가 있단 말이야.”

“무슨 소리냐? 난 수습하는 쪽이지.”

“그걸 다 수습하는 것도 ‘드래곤’해.”

“…….”

“용하다고.”

“그러는 너는 얼음 속성 마법 한번 없이 주변을 싸늘하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드래곤들도 인정한, 린시스의 이상한 취미 중 하나.

바로 돼도 않는 말장난이었다.

발레리아는 그리웠다는 듯 손을 모았다.

“와, 오랜만이네요. 린시스 님의 재미없는 농담.”

“……리아야, 내가 그렇게 재미없니? 여태까지 나름 위트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 몇백 년 전이었으면 또 모르겠다.”

내가 말을 받았다.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린시스의 농담은 매우 옛날식이었다.

심지어 뒤에 자신의 농담을 설명하는 것까지.

정말, 완벽하게 재미없었다.

조금 무안했는지, 린시스가 화제를 돌렸다.

“큼, 그래서 검을 쓰게 됐다는 거구나? 팔자에도 없는 처자식까지 얻고.”

“새로운 경험과 지식이라고 생각하니 나쁘지 않더라고.”

“여전하네, 그런 사고방식은.”

그때, 눈의 정령이 콕콕 찌르던 하우전드가 벌떡 일어났다.

“어헉! 드래곤!”

“나 불렀니?”

“우왁!”

일어나자마자 린시스를 보고 발라당 넘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린시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이제 가출한 아들 잡으러 가 볼까?”

“그래. 잘 갔다 와라.”

내가 배웅하자, 린시스가 눈을 깜빡였다.

“같이 안 가?”

“내가 왜?”

마나는 거의 회복했지만, 솔직히 귀찮다.

용의 산맥이 얼마나 험한데.

린시스가 동행한다고 해도, 굳이 그곳을 찾아가고 싶진 않다.

불사의 저주를 제거하는 방법이야, 린시스에게 물어 수소문하게 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벨수스 정도는 너 혼자 잡아 올 수 있잖아.”

“심심해.”

“참 당당하게도 말하는군.”

“그리고 델, 당신이 우리 아들 자존심을 무너트렸잖아. 같이 가서 달래 줘야지.”

“내가 언제?”

“애가 브레스를 쏘면 좀 맞아 주고 그러지, 좀. 눈치 없게 전력으로 대응하고 말이야.”

그거 맞아 주면 소멸이다.

귀찮았기에, 나는 회피를 시도했다.

“얘네들은 어디 있으라고? 용의 산맥에 출입도 안 될 텐데.”

“텔레포트(Teleport).”

린시스가 손을 슥 휘저었다.

부지불식간에 단과 마리나, 발레리아의 모습이 사라졌다.

“전부 내 레어로 보냈어. 이제 됐지?”

“전부 아닌데!”

밑에서 들려온 귀여운 목소리에, 린시스의 시선이 내려갔다.

짧달 막한 리옐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린시스는 당황했다.

“이상하다? 분명 전원을 대상으로 지정했는데.”

“쯧쯧.”

내가 혀를 차자, 린시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와 마법을 두고 논쟁을 벌일 만큼, 마법에 대한 린시스의 자부심은 엄청났다.

그런데 7서클 마법인 텔레포트를 실패했으니.

부끄러워할 만도 했다.

“아가. 너, 어떻게 여기 있니?”

“몰라!”

“……텔레포트(Teleport).”

린시스가 다시 한번 마법을 사용했다.

이번에는 손으로 리옐을 정확히 지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리옐은 약간 인상을 찡그렸다가,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을 뿐.

“지금 얘, 마법을 거부한 거야?”

“그런 것 같은데.”

“마나 서클도 없는데? 디스펠한 것도 아닐 텐데?”

“몰라. 세계수의 후계자잖아.”

리옐은 이상한 능력들을 여럿 가지고 있었다.

동식물과 대화하거나, 식물을 급성장시키기도 했다.

의식하고 쓰는 건 아닌 것 같고, 아마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태초의 숲에서 세계수가 알려 줬을 수도 있다.

“엄마가 부탁했는걸! 아빠가 허튼짓하려고 하면 막으라고!”

“내가 언제 허튼짓을 하려 했다고 그러냐.”

그렇게 나와 린시스, 그리고 리옐은 용의 산맥을 오르게 됐다.

* * *

약육강식의 법칙.

약자의 살은 강자의 먹이가 된다.

용의 산맥은 그 법칙이 통용되는 대표적인 장소였다.

마나에 홀려 모여든 몬스터들은 서로를 물어뜯으며 살아남는다.

도태된 약자에게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크릉.

오거 한 마리가 눈 쌓인 산길을 걸어갔다.

등에는 어떻게 사냥한 론 울프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드넓은 용의 산맥인 만큼, 적막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거는 꺼림칙한 느낌에 주변을 살폈다.

까악!

그 순간, 오거의 머리 위로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평범한 새는 아니었다.

푸른색의 날개 길이만 4미터에 육박했고, 부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용의 산맥의 일부를 지배하는 몬스터, 청조(靑鳥)였다.

콱!

맹금류의 휘어진 발톱이 오거의 목을 관통했다.

목을 꿰뚫린 오거가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늦었다.

청조는 발톱으로 오거를 단단히 붙잡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퍽!

그리고 공중에서 떨어트렸다.

떨어진 오거는 그대로 절명했다.

용병들의 두려움을 사는 몬스터라기에는 허무한 최후였다.

청조는 날갯짓을 하며 오거의 사체에 내려앉았다.

포식을 하려다가,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산의 아래를 살폈다.

까악…….

드높은 창공의 포식자였던 전과 달리, 소심하게 울었다.

뭔가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것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셋이었다.

“설마, 세계수의 후계자에게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나는 드래곤.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한 상태였지만, 예민한 청조의 감각을 속일 수는 없었다.

용의 산맥은 드래곤의 터전.

때때로 드래곤이 날아다니기도 했고, 청조는 그때마다 몸을 피했다.

아무리 청조라도, 드래곤에게는 버틸 도리가 없었다.

“아빠, 나 대단하지?”

다른 하나는 작은 아이였다.

이 아이에게서는 신기하게 적대감보다는 친근감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위협에게서 보호해야 할 것 같은 감각.

처음 느껴 보는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둘러싸고 있었다.

확실한 건, 평범한 아이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 대단하다.”

마지막으로, 아이의 머리를 헝클어 놓은 청년.

둘과 달리 정말 평범한 인간이었다.

청조는 영물에 가까운 몬스터다.

용의 산맥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본능이 엄청나게 발달했다.

그래서 느낄 수 있었다.

까악……

심연이 그곳에 있었다.

잡히면 잡아먹히거나, 온몸이 해체되어 재료로 요긴하게 써먹힐 것 같았다.

지레 겁먹은 청조는 푸득 날갯짓을 했다.

그것 때문에 도리어 눈에 띄고 말았다.

“……저거, 청조 아니냐?”

무슨 인간이 드래곤보다 눈이 좋단 말인가.

청조는 기겁을 하며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빠르게, 마나의 사슬이 날아왔다.

드래곤이 마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날개를 묶인 청조는 도망치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정말이네. 맨날 후다닥 도망쳐서 보기도 힘든 몬스턴데. 용케 찾았어.”

드래곤이 태연하게 걸어왔다.

청년과, 청년의 손을 잡은 아이가 그 뒤를 따라왔다.

청년의 눈이 순간적으로 이채를 띠었다.

“고놈 참 맛나겠다.”

청조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비록 인간의 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눈빛의 정체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포식자의 눈빛.

저 인간은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속셈이었다.

“점심은 여기서 해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청조면 괜찮은 식사지.”

“아빠, 얘 잡아먹을 거야?”

청년과 드래곤은 서로 뭐라 의견을 주고받았다.

아이는 약간 슬픈 눈으로 청년을 올려다 봤다.

청조는 그 순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살려면 저 아이에게 빌붙어야 한다.

“쟤가 지금은 처량해 보여도, 아주 무시무시한 놈이거든.”

아이의 시선이 청조에게 돌아갔다.

청조는 그 순간, 살면서 한 번도 부려 본 적 없는 애교를 부렸다.

눈을 최대한 똘망똘망하게 뜨고, 가련한 새처럼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포식자의 울음소리 대신, 참새의 높고 귀여운 울음소리를 흉내 냈다.

짹?

“아빠.”

“……그래. 그냥 탈것으로나 써야겠다.”

생존 본능이 포식자의 자존심을 짓누른 순간이었다.

청조의 눈에서 또르르 눈물을 흘렀다.

* * *

쿵!

육중한 몸이 눈밭에 떨어졌다.

벨수스 블랙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몸뚱이는 만신창이였다.

꼬리는 부러졌고, 날개가 찢어졌다.

긴 절상에서는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뜨거운 피는 눈을 녹이고 땅에 스며들었다.

크륵. 크륵.

피 냄새를 맡은 몬스터들이 모여들었다.

몬스터들은 피의 주인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 멈칫했다.

하지만 벨수스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드래곤조차 먹잇감으로 전락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용의 산맥이었다.

론 울프 한 마리가 벨수스에게 달려들었다.

퍽!

벨수스는 부러진 꼬리를 휘둘러 론 울프를 쳐 냈다.

겁 없이 달려든 론 울프는 온몸의 뼈가 부러져 죽었다.

그것을 본 몬스터들은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아무리 지치고 다쳤어도, 드래곤은 드래곤.

기력이 있다면 상대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주변을 경계하던 벨수스는 기력을 회복할 요량으로 잠시 눈을 감았다.

* * *

아주 희미한 기억이었다.

벨수스가 아직 말도 하지 못할 해츨링 시절.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 그는 어떤 고원에 있었다.

드높은 창공에는 새까만 드래곤 한 마리가 있었다.

벨수스의 친부, 카닉스였다.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내려와.”

그 아래, 언제나와 같은 로브 차림의 델 로안이 서 있었다.

델 로안은 뭔가 안타깝다는 눈으로 카닉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닉스가 길게 포효하자, 압박감이 벨수스의 여린 몸을 짓눌렀다.

“자네가 자초한 일이야.”

델 로안이 나무 완드를 뻗었다.

벨수스는 그 뒤에 일어난 일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섬광이 번쩍 터지더니, 힘을 잃은 카닉스가 땅으로 낙하했다.

고통에 찬 울음소리를 들은 어린 벨수스는 몸을 움츠렸다.

“카닉스!”

쓰러진 카닉스의 주위로 사람들이 나타났다.

벨수스는 본능적으로 그들이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이에는 린시스도 있었다.

드래곤들은 쓰러진 카닉스를 완전히 제압했다.

푸른 머리의 청년, 블루 드래곤이 나섰다.

“광룡, 카닉스 블랙. 광증에 사로잡혀 용의 산맥을 벗어나 서대륙에 혼란을 야기한 죄인.”

벨수스의 기억이 점점 선명해졌다.

블루 드래곤은 카닉스의 죄목을 읊었다.

그러고는 한 발 물러선 뒤, 린시스를 바라보았다.

“규율에 따라, 광룡의 처형은 린시스가 맡는다.”

드래곤들은 쓰러진 카닉스를 잡아 둘 뿐, 움직이지 않았다.

몇 분의 갈등 끝에, 린시스가 앞으로 나섰다.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이, 마지못해 나선 것 같았다.

“죽여라. 네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을 담아서.”

선고가 내려졌다.

카닉스는 그 순간에도 미친 듯이 발악을 하고 있었다.

주저하던 린시스가 마지못해 손을 뻗었다.

벨수스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멀거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것뿐.

그 순간.

쿵.

델 로안이 완드로 땅을 내려쳤다.

드래곤들이 뒤늦게 반응했지만, 늦었다.

델 로안이 사용한 정체불명의 마법이 카닉스에게 닿았다.

발광을 하던 카닉스가 움직임을 뚝 멈췄다.

그대로 절명한 것이다.

블루 드래곤이 분노에 찬 표정으로 델 로안을 바라보았다.

“무슨 짓이냐!”

“죽이려면 빨리 죽이지. 뭘 질질 끌고 그래?”

“드래곤의 규율이다! 인간이 주제넘은 줄도 모르고!”

“그래. 네 말대로 드래곤의 규율이지. 인간의 규율은 아니잖아? 내가 지킬 필요는 없지.”

블루 드래곤은 적의를 보였지만, 델 로안은 태연했다.

오히려 교묘하게 빠져나가기까지 했다.

린시스가 풀썩 주저앉았다.

드래곤들은 린시스를 질책했다.

“한낱 정 때문에 주저하다가, 결국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델 로안은 드래곤들에게 들으라는 듯 넌지시 말했다.

“뭔들 남 탓보다 추한 건 없지.”

“뭐라고?”

“니들이 내 마법 막았으면 됐잖아?”

“그 입 닥치지 못해!”

“응. 닥치지 못해.”

드래곤들이 따져 물었지만, 델 로안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장난 식으로 유치하게 대응하거나, 아예 무시하기도 했다.

그동안 린시스는 죽은 카닉스를 붙잡고 울고 있었다.

“이 일은 에인션트께 보고될 것이다.”

“하든가.”

“……무슨 이런 인간이!”

“짜잔, 여기 있네?”

블루 드래곤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드래곤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서대륙에 개입할 수 없었다.

델 로안은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거칠게 심호흡을 한 블루 드래곤은 린시스를 홱 돌아보았다.

“사체 수습은 맡기겠다. 린시스.”

드래곤들은 델 로안을 노려보며 사라졌다.

델 로안이 벨수스에게 걸어왔다.

그러곤 쯧쯧 혀를 찼다.

“불쌍한 놈. 태어나자마자 못 볼 꼴을 봐 버렸구나.”

벨수스는 아직 말도 이해하지 못할 때였다.

델 로안은 푸념하듯이 혼잣말을 계속했다.

“드래곤은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생을 기억한다고 하지. 더없는 축복이라고들 하지만, 이럴 때 보면 최악의 저주나 다름없는 것 같단 말이야.”

델 로안은 벨수스에게 손을 뻗었다.

벨수스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움츠렸다.

하지만 적의가 없어 보였기에, 도망치진 않았다.

“애석하게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밖에 없다.”

델 로안의 손가락이 벨수스의 미간을 눌렀다.

시야가 돌연 까맣게 물들었다.

의식이 흐려졌다.

“잊고 살아라. 벨수스.”

* * *

자박. 자박.

눈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을 느낀 벨수스는 힘겹게 눈을 떴다.

눈앞에는 푸른 머리카락의 청년이 서 있었다.

어딘가 낯이 익었다.

뒷짐을 진 채 벨수스의 앞에 선 청년이 입을 열었다.

“벨수스 블랙? 이게 무슨 꼴이지?”

벨수스는 이를 드러내며 청년을 위협했다.

청년은 인상을 찡그렸다.

“장난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특히 네 경우는 말이지.”

벨수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그문트와 만날 때만 해도 조금은 남아 있던 언어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서와 같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기껏해야 위협 정도가 전부였다.

“가족력이 있다고는 하나, 정말 광증에 걸릴 줄은 몰랐군.”

잠깐 벨수스를 살핀 청년은 손을 콱 움켜쥐었다.

마나가 죄어들며 벨수스의 몸을 짓눌렀다.

상처가 터지고 찢어졌다.

벨수스는 고통에 찬 울음소리를 흘렸다.

“말도 못 하는 걸 보면 확실한데. 안타까워.”

말과는 달리, 청년의 표정은 무미건조했다.

벨수스의 목 위로 거대한 마나 칼날이 나타났다.

마치 처형대가 연상되는 모양새였다.

그 순간.

쾅!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벨수스와 청년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눈과 똑같은 순백색의 머리카락.

린시스였다.

“린시스, 비켜라.”

“내 아들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 파베스.”

“눈물겨운 모성애군.”

청년의 모습을 한 블루 드래곤, 파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온도가 낮은 용의 산맥에 한기가 들어찼다.

파베스의 입가에서 냉기 섞인 숨결이 새어 나왔다.

린시스의 표정도 험악해졌다.

푸드덕. 푸드덕.

심각해진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세 드래곤의 눈이 위로 올라갔다.

청조 한 마리가 린시스 옆에 내려앉았다.

파베스는 뜬금없는 청조의 등장에 눈을 깜빡였다.

청조는 자기도 민망하다는 듯 눈치를 봤다.

청조의 등에 탄 둘을 본 파베스의 눈썹이 휘었다.

“인간? 드라이어드?”

“그래. 인간이다. 뭘 새삼스럽게.”

지그문트는 리옐을 안아 들고 청조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뭐, 용의 산맥에 인간이랑 드라이어드는 들어오면 안 되냐?”

“지금 내게 말하고 있는 건가?”

“그래. 블루 드래곤.”

“이런 시건방진!”

콰앙!

파베스의 드래곤 피어가 폭발했다.

청조가 풀썩 옆으로 쓰러졌다.

멀리 있던 몬스터들도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용의 산맥에 사는 몬스터들조차 버티지 못하는 압박감.

그러나 정작 피어를 정면에서 받은 지그문트는 태연했다.

“네가 블루 드래곤이지. 레드 드래곤은 아니잖아.”

“감히!”

“우리 아빠한테 소리치지 마!”

지그문트에게 안겨 있던 리옐이 빽 소리를 질렀다.

펑!

주변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드래곤 피어가 일순간에 무력화된 것이다.

전무후무한 상황에, 파베스는 황당함이 섞인 눈으로 리옐을 바라봤다.

“어떻게?”

“우리 애가 능력이 좀 출중해.”

“히.”

칭찬 받은 리옐은 좋다고 웃었다.

지그문트는 벨수스 쪽을 보고 말했다.

“벨수스를 죽이려고 하던데.”

“드래곤의 규율대로 행했을 뿐이다. 인간이 주제넘은 줄도 모르는군.”

“오랜만에 듣네. 그 대사.”

지그문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파베스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다가, 가까스로 멈췄다.

인간을 상대로 뒷걸음질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주제넘은 건 네 쪽이다. 블루 드래곤.”

“뭐라고?”

“그 잘난 규율대로라면, 광룡의 분류는 에인션트 드래곤의 담당이다.”

에인션트 드래곤.

1천 년을 넘게 살아온 고룡 중에서도, 가장 오래 살아온 드래곤을 뜻한다.

용의 산맥을 지배하는, 모든 드래곤의 수장.

광룡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은 에인션트 드래곤의 일이었다.

“왜 멋대로 벨수스 블랙을 광룡으로 단정 짓고, 심지어 죽이려고 든 거지?”

“…….”

“지금 네가 하려던 짓은 광룡의 처형이 아니라, 동족 살해 아닌가?”

반박할 여지가 없는 정론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경우에는 처음 발견한 드래곤이 처형하는 것이 관례다.

굳이 에인션트 드래곤의 확인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규율을 먼저 들먹인 건 파베스다.

“어떻게 드래곤의 규율을 아는 거지?”

“내가 좀 아는 게 많아.”

대답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누가 드래곤의 규율을 가르쳐 준단 말인가.

파베스는 흘긋 린시스를 봤지만, 린시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린시스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슨 이런 인간이!”

“짜잔. 여기 있네?”

파베스는 무의식적으로 과거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지그문트는 그에 똑같은 대사로 받아쳤다.

기시감을 느낀 파베스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네놈 혹시, 델 로안인가?”

“명색이 드래곤이면 그런 건 한 번에 좀 알아차려라.”

델 로안은 멋대로 카닉스를 죽인 이후로, 일부 드래곤의 반감을 샀다.

파베스도 그중 하나였다.

폴리모프한 드래곤 특유의 미색이 짙은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러게 왜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애를 잡으려고 해?”

과거와 매우 비슷한 상황.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그문트가 처형 대상인 벨수스를 변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파베스는 짜증이 났다.

지그문트가 하는 말이 맞는 말이라 더욱 그랬다.

“에인션트 드래곤에게 직접 들어 보자고. 얘가 광증에 걸렸는지, 네가 착각한 건지.”

* * *

파베스는 텔레포트를 통해 우리를 어디론가 이동시켰다.

아주 오래된 듯한 거대한 석재 문 앞이었다.

“이곳이 에인션트님의 레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파베스는 드래곤치고 상당히 합리적인 녀석이다.

드래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종족을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드래곤은 꽤 많다.

그런 놈들 같은 경우에는 말도 안 통한다.

정론으로 밀고 들어가도, 제 말이 맞다고 우길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죽이려고 들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린시스가 나섰겠지만 말이다.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특히 인간.”

“나 뭐?”

“지금 같은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걱정 마. 나는 내 마음에 안 드는 놈한테만 이래.”

“그거 다행이군. 나도 네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파베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손을 올리자, 거대한 문은 저절로 열렸다.

내게 붙어 있던 리옐의 눈이 반짝였다.

“우와.”

석재 문 너머에는 호수가 있었다.

은은한 달빛이 물에 반사되어 주변을 비췄다.

반딧불이들이 날아다녔고, 곤충 우는 소리가 났다.

“좋은 냄새!”

호수를 감싼 나무에서 청량한 향이 감돌았다.

발 아래로 부드러운 흙이 밟혔다.

호수 위에서는 물방울처럼 생긴 물의 하급 정령들이 장난을 치고 있었다.

소환된 것이 아니라, 정말 놀러온 것 같았다.

프라우드 산맥보다 낮은 온도를 자랑하는 용의 산맥이 아니었다.

드래곤 레어는 목오 사막의 던전처럼 외부와 별도의 공간인 경우가 대다수다.

“손님들이 왔구나.”

호숫가에는 드래곤 한 마리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린시스나 벨수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세월에 빛바랜 회색 비늘.

다른 드래곤들에게서 느껴지는 힘이나 위엄은 없었다.

오히려 자연에 동화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의식하지 않았다면, 풍경의 일부겠거니 하고 지나갔을 정도였다.

늙은 드래곤이 눈을 떴다.

“파베스, 린시스.”

“안녕하십니까. 에인션트님.”

“안녕하세요. 에인션트님.”

“벨수스는 인사를 나눌 상황이 아닌가 보구나.”

“어…… 좀 이따 설명드릴게요.”

구속된 벨수스는 린시스가 질질 끌고 다니고 있는 상태였다.

가느다란 팔로 드래곤 한 마리를 잘도 끌고 다닌다.

수긍한 에인션트 드래곤은 느릿하게 고개를 움직였다.

그 눈은 리옐을 향했다.

“드라이어드…… 아니, 세계수의 아이인가?”

“리옐이에요!”

“좋은 이름이구나.”

“엄마가 지어 주셨어요!”

리옐이 존댓말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떤 기준이 있는 것 같은데.

왜 나한테는 안 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에인션트 드래곤은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인간, 델 로안.”

“오랜만이군. 마날루스.”

“100여 년이 넘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에인션트 드래곤 마날루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파베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린시스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리고 다그치듯 속삭였다.

“야! 에인션트님은 또 어떻게 알아?”

“아주 옛날에 만난 적이 있지. 그때는 그냥 고룡이었는데.”

정말 까마득할 정도로 오래 전이다.

마날루스는 나를 가만히 살폈다.

몹시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신기한 일이로고. 죽음을 속였구나.”

“죽음을 속여? 내가?”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마날루스의 말을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굳이 표현을 돌려서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환생을 말하는 건가?”

“그래. 아주 오만하고, 교묘한 방법이야. 죽음을 거슬렀다면 실패했을 터.”

“무슨 소린지 못 알아먹겠군.”

“나중에 알게 될 수밖에 없을 게다.”

마날루스는 입을 닫았다.

캐물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나는 마날루스의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파베스가 앞으로 나섰다.

“에인션트님, 고요를 깨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

“됐다. 마침 적적하던 참이었으니.”

마날루스의 말은 느릿했는데, 그것이 묘하게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할머니를 보는 것 같았다.

마날루스가 몸을 일으키자, 주위를 맴돌던 반딧불이가 날아갔다.

호수 위를 뛰놀던 물의 하급 정령들이 소란을 떨었다.

빛이 마날루스의 몸을 감쌌다.

“벨수스 때문에 찾아온 것이더냐?”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회색 머리카락의 노인이 있었다.

대체로 미형을 띄고 있는 다른 드래곤들과 달리, 늘그막 한 할머니가 됐다.

폴리모프(Polymoph)는 환상 마법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시전자의 종족을 바꿔 주는 마법이다.

간단히 말하면, 마날루스가 만약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저 외형이었을 거라는 얘기다.

“그렇습니다. 광증에 걸린 것으로 의심이 되어…….”

“아니다.”

마날루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언했다.

에인션트 드래곤의 확답에, 린시스가 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날루스는 천천히 벨수스에게 다가갔다.

“광증 같은 병이 아니라 기억을 제한하는 마법이구나. 누가 이런 짓을…….”

드래곤의 정신 방어 능력은 매우 뛰어나다.

모디파이 메모리(Modify Memory) 같은 기억 조작 마법은 그냥 무시할 정도다.

그런 드래곤의 정신 방어를 뚫었다니.

나조차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다.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모르겠지만.’

마날루스가 벨수스의 턱에 손을 올렸다.

부드러운 마나가 벨수스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공격 마법이 아닌, 마법의 종류를 파악하기 위한 검사.

그런데 이상한 반응이 일어났다.

“쿨럭.”

“에인션트님!”

마날루스가 입을 틀어막고 기침을 했다.

손바닥에 피가 묻어나 왔다.

놀란 파베스가 마날루스를 부축했다.

벨수스 또한 격통이 있었는지, 몸을 뒤틀었다.

리옐이 내 옷 소매를 꽉 쥐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호들갑 떨 것 없어.”

“이게 대체 무슨!”

파베스가 홱 돌아섰다.

적의가 가득한 눈은 벨수스를 향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죽일 듯한 기세였다.

“파베스.”

마날루스의 목소리에, 파베스가 우뚝 멈췄다.

벨수스를 노려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 아이의 치료는 내가 전담하도록 하마. 린시스, 그래도 괜찮겠지?”

“에인션트님께서 맡아 주신다면 저야 감사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미안하지만, 섣불리 확답을 줄 사항은 아니구나.”

린시스가 내게 눈을 돌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직접 당했다면 모를까.

직접 본 것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마나 거부반응과 비슷하긴 했지만, 조금 달랐다.

“파베스, 저 아이를 안쪽으로 옮겨 줄 수 있겠느냐?”

“예. 에이션트님.”

“저도 같이 갈게요.”

파베스는 벨수스를 데리고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벨수스가 걱정됐는지, 린시스가 그 뒤를 황급히 따랐다.

호숫가에는 나와 리옐, 마날루스만 남았다.

“벨수스의 치료는 가능한 건가?”

“기억을 되찾더라도, 그 기억이 온전하리라는 보장은 못 해 주겠구나.”

“정신만 차리게 해 주면 좋겠군.”

다른 드래곤도 아니고, 마날루스라면 믿고 맡길 만하다.

전투적인 성향인 다른 드래곤과 달리, 치료 쪽에 지식이 대단하다.

나도 한 수 접어줄 정도니 말 다했다.

“죽음에 대한 얘기는…….”

“경고하건대, 그 이야기는 입 밖으로 내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왜지?”

“눈치챌 수도 있으니까.”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했다.

하지만 뭔가 뜻이 있을 것이다.

고민하고 있는데, 심심했는지 리옐이 주위를 기웃거렸다.

물의 하급 정령들이 리옐 주위로 통통 튀어 왔다.

“으응?”

물방울이 살아 있는 모양이 신기했는지, 리옐도 관심을 보였다.

정령을 쿡쿡 찔러 보거나, 손바닥에 올리고 관찰했다.

마날루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리옐이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빠! 쟤네들이 저기서 놀자는데, 놀고 와도 괜찮아?”

“그래.”

허락을 받은 리옐은 물의 정령을 따라 호숫가로 갔다.

신발을 벗더니, 대뜸 호수로 달려갔다.

마법을 사용해서 막으려다가, 멈췄다.

리옐은 수면을 밟고 서 있었다.

물의 하급 정령들이 리옐의 작은 발바닥을 떠받치고 있었다.

“정령들마저 호의를 보이는 걸 보면, 역시 세계수의 아이가 맞구나.”

“그래.”

“세계수는 어찌 됐더냐?”

“아직 살아 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 마날루스가 넌지시 물었다.

“살릴 셈이냐?”

“어.”

“저 아이는?”

“살려야지.”

아직 뿌리를 내릴 때는 멀었다.

시간은 충분하다.

“너무 많은 것을 잡으려고 하는 것 아닌가? 둘 다 놓칠 수도 있다.”

“고작 둘이야. 그 정도 잡을 능력은 있어.”

“세계의 주축(主軸)과 그 후계자에게 고작이라니, 오만하구나.”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군.”

짧은 대화가 오갔고, 나와 마날루스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이곳에 온 두 번째 목적이 떠올랐다.

신살의 제거를 연구하고 있는 드래곤.

에인션트 드래곤인 마날루스라면 그 드래곤이 누군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혹시 용의 산맥에 사는 드래곤 중에…….”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콰아아앙!

나무 너머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 * *

쿠오오오오오!

“벨수스 블랙!”

마날루스의 레어, 깊은 숲.

불시의 일격을 맞은 파베스가 악을 썼다.

그 앞에는 새까만 무언가에 뒤덮인 벨수스가 있었다.

끈적끈적한 점성을 가진 그것은 늪의 진흙이나 타르처럼 보였다.

액체에 뒤덮인 벨수스는 고통에 찬 절규를 흘렸다.

린시스는 다급히 정화를 시도했다.

“그레이트 클린(Great Clean)!”

마나가 반짝이며 벨수스를 감쌌다.

그러나 마법은 순식간에 튕겨 나갔다.

린시스의 마나가 폭발하며 작은 충격을 일으켰다.

마날루스가 마나를 사용했을 때와 같은 반응.

혀를 찬 린시스는 폴리모프를 풀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우득! 우득!

이마에서 뿔이 솟아나고, 등에서 날개가 돋아난다.

곧 나무를 부러트리며 하얀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이 통하지 않자, 무력을 행사하려는 것이었다.

린시스는 발톱으로 벨수스에게 붙은 무언가를 잘라 냈다.

“린시스!”

그러나 타르 같은 액체는 도리어 린시스의 발톱에 엉겨 붙었다.

린시스는 그것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달라붙은 액체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치이이익!

린시스의 발톱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때, 불현듯이 나무 사이에서 한 형체가 튀어나왔다.

지그문트였다.

서걱!

오러를 담은 검이 린시스의 발톱과 정체불명의 액체 사이를 베어 냈다.

액체는 검에 들러붙었지만, 지그문트는 그 검을 별거 아니라는 듯 버렸다.

이름 없는 검이 아닌 예비용 검이었기 때문이다.

파베스의 눈이 빛났다.

‘그래. 검이라면!’

벨수스의 몸을 뒤덮은 정체불명의 액체를 전부 잘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지그문트는 파베스가 조금 놀랄 정도의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한 번 쓴 검은 버려야 한다는 것.

“인간, 혹시 다른 검도 있나?”

지그문트는 대답하는 대신,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입구를 거꾸로 뒤집으니, 검이 우수수 쏟아졌다.

얼핏 봐도 수백 자루가 넘었다.

파베스가 봐도 어이없을 정도로 많은 양.

“무슨 검을 이렇게 많이 들고 다니는 거지?”

“내가 준비성이 좀 좋은 편이거든.”

나는 몇 자루의 검은 손에 들고, 몇 자루는 아공간에 넣었다.

예비용이지만 품질이 나쁜 것들은 아니다.

검을 잡은 파베스가 나지막한 어조로 경고했다.

“조심해라. 저놈. 뭔가 달라졌다.”

“그야 척 보면 아는데.”

“내 말뜻은 그게 아니다. 인간.”

파베스는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오러는 쓰지 못했으나, 자세가 꽤 괜찮았다.

검에 대한 지식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순간적이지만 내 힘을 압도했어.”

“밀렸냐? 저 쪼만한 놈한테?”

“진지하게 들어라.”

“난 진지해.”

파베스는 린시스와 같은 성룡.

아직 성룡이 되지 못한 벨수스와는 큰 격차가 존재한다.

그런데 파베스가 밀렸다면, 오히려 힘이 강해졌다는 뜻인데.

“이상하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히려 힘이 없었는데.”

마법도 못 쓰고, 정상적인 사고도 못했다.

그런 벨수스가 갑자기 파베스를 압도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파베스는 드래곤 중에서도 무력이 뛰어난 편이었기 때문이다.

“저게 뭔지 알아내는 게 먼전데.”

벨수스를 뒤덮은 검은 물질.

저 물질이 벨수스의 힘을 강화시켰다고 보는 쪽이 타당했다.

정체를 모르는 이상, 함부로 대처하기 까다롭다.

“내가 본 바에 의하면, 벨수스 블랙의 입에서 나왔다.”

“입에서?”

“그래. 머금고 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순식간에 증식하더니 저렇게 몸을 감싸더군.”

“모르겠네.”

저렇게 생긴 건 처음 본다.

처음에는 점성 때문에 슬라임의 일종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드래곤을 감쌀 만큼 거대한 크기의 슬라임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더군다나, 그 슬라임이 드래곤을 제압할 수 있을 리도 없다.

“일단 떼어 내고 봐야겠군.”

벨수스가 몸부림을 치는 걸 보면, 외부에서 계속해서 자극을 가하고 있다.

저 물질이 뭐든 간에, 가만히 두는 건 위험하다.

할 수 있는 대처는 전부 한다.

“린시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린시스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공간에서 술 한 병을 꺼내 린시스에게 던졌다.

시몬 밀러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구한 최고급 와인이었다.

린시스의 눈이 빛났다.

“가능하겠어?”

“저게 마나의 간섭만 저지한다면, 몽계로 가는 쪽이 더 낫긴 하지.”

“좋아. 안 되더라도 시도는 해 보자고.”

대처법을 모르는 만큼,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한다.

나는 직접 저 물질을 떼어 내고, 린시스는 다른 방향으로 제압을 시도한다.

린시스는 와인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파베스.”

“뭐냐?”

“마나가 닿지 않는 선에서, 벨수스 주변의 온도만 낮출 수 있겠어?”

“온도를 낮춰? 저 물컹거리는 걸 얼릴 셈이군.”

“그래.”

“가능하다.”

파베스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설명도 안 했는데, 의도를 단숨에 알아차렸다.

그래도 드래곤이라고, 머리가 잘 돌아간다.

“네놈도 같이 얼려 버릴 수도 있는데. 괜찮겠나?”

“드래곤이 마나 컨트롤에 그렇게 미숙한 종족이었나?”

“한마디를 안 지는군.”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파베스는 불평하면서도 손을 들어 올렸다.

결국 하라는 대로 할 거면서 왜 저러는지.

나는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마나 번(Mana Burn)

“후우.”

푸른 숨을 뱉었다.

요즘 검을 수련한답시고 잘 안 쓰고 있었는데.

확실히 느낌이 달라졌다.

감각이 뚜렷해지고, 시야가 선명해진다.

나는 땅을 박찼다.

푸시(Push).

팡!

거리낄 필요는 없다.

지금 수준의 검술로는 벨수스의 가죽을 뚫지 못한다.

전력을 다해도 베어 내는 건 저 정체불명의 물질뿐.

“프리징 포인트(Freezing Point).”

절묘한 타이밍에 파베스의 지원 마법이 들어왔다.

7서클 고대 마법, 프리징 포인트.

주변 온도가 급격히 낮아짐과 동시에, 벨수스를 감싸고 있던 물질이 얼어붙었다.

얼핏 보면 더 베기 힘들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차라리 단단한 것이 베기 쉽다.’

점성을 가진 물질은 검에 들러붙는다.

물질은 자연스럽게 검날을 감싸게 되고, 검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그 전에 물질을 얼려 버린다면?

오히려, 간단히 베인다.

끼이이익!

얼음이 갈라지며, 높은 소리를 냈다.

나는 푸시(Push)의 추진력을 받아 그대로 검을 그었다.

벨수스의 왼쪽을 감싸고 있던 물질이 잘려 나갔다.

서겅!

오러에 녹은 물질이 검날에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못 쓰게 된 검을 버리고, 다른 검을 잡았다.

‘나쁘지 않군.’

파베스의 마법은 물질을 얼릴 뿐만 아니라, 벨수스의 반항도 통제했다.

이대로라면 저 물질을 완전히 떼어 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번 벨수스를 향해 돌진했다.

노리는 건 꼬리.

푸시의 추진력을 이용해, 꼬리 끝부터 머리까지 긁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인간!”

파베스의 경고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나는 곧바로 정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푸시(Push).

앞으로 돌진하던 몸이 공중에서 급정거했다.

무리한 정지에 내장이 뒤흔들리는 역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벨수스의 꼬리가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부웅!

아슬아슬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게 멈췄다면, 몸이 박살 났을 것이다.

어떻게 움직인 거지?

벨수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파베스에게 소리쳤다.

“제대로 해!”

“하고 있다! 그런데!”

치이이이이익!

벨수스의 몸에서 증기가 피어올랐다.

얼어붙었던 물질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스스로 온도를 높여, 얼어붙었던 몸을 다시 움직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벨수스는 마법을 쓸 수 없다.

드래곤의 가죽에 발열 기능이 없는 걸 감안하면, 저 물질이 했다는 건데.

‘생명체?’

검은 물질은 점점 붉은색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불현듯 그 물질의 정체를 깨달았다.

“페러시트?”

“뭐?”

“저거, 아마 페러시트다. 아니, 확실해.”

“페러시트는 씨앗으로 의태한 기생 생물이다. 저런 모습을 띄고 있지 않아.”

“변종이니까.”

페러시트의 변종.

통칭 실험체 17호.

과거 내 실험, ‘적응하는 갑옷’에 사용됐던 페러시트다.

페러시트는 힘을 소모시켜 숙주의 몸을 강탈하는 기생 생물이다.

하지만 실험체 17호는 다르다.

숙주의 힘을 일부 흡수해, 주변 상황에 맞춰 적응하는 공생 생물이다.

원래는 무기나 방어구처럼 사용할 계획으로 만들었다.

‘여러 상황에 따라 적응하는 생물형 갑옷.’

주변 상황에 맞춰 몸을 변화해, 숙주의 몸을 최우선으로 지킨다.

대신 숙주의 힘 일부를 양식으로 사용한다.

제국 전력 강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실험체.

그러나 실제로 쓰이진 못했다.

부작용이 뒤따르는 바람에, 폐기했다.

숙주의 기억과 이성까지 잡아먹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

“저거, 저대로 두면 폭발한다.”

“폭발?”

“그래.”

페러시트의 수용량을 초과하는 힘을 흡수한 경우, 폭발할 가능성이 있다.

숙주가 드래곤이니, 그 폭발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대규모 공격 마법 이상의 위력을 낼 것이 분명했다.

내 설명을 들은 파베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저게 그럼, 살아 있는 시한폭탄이라는 거냐?”

“그래. 페러시트가 완전히 붉어지기 전에 처리해야 돼.”

“환장하겠군.”

“동감이야.”

왜 실험체 17호가 벨수스에게 들러붙어 있는지 모르겠다.

수십 년 전에 폐기한 실험체 중 하나일 텐데.

제국의 소행일 가능성이 컸지만, 확실한 건 없다.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공략은 알고 있나?”

“그래. 일단 벨수스 블랙, 그러니까 숙주의 의식을 끊어야 해.”

실험체 17호가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는 건 숙주의 힘 덕분이다.

숙주의 의식이 차단되면, 공생 생물인 실험체 17호가 혼자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 전에는 공격 방법을 계속 바꿔서 갑주를 뚫는 수밖에.”

“공격 방법을 바꾼다라. 효율적인 방법이군.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다.”

파베스는 보이지 않은 무언가를 움켜쥔 듯 주먹을 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솟아오른다.

푸른 마나가 모여들더니, 얼어붙기 시작했다.

“공격의 강도를 급격하게 올리는 거지.”

“반골 기질이 있군.”

“내가 왜 네 명령을 따라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래. 알아서 해라. 얼마나 벌어 주면 되지?”

“몇 초면 충분하다.”

나는 혀를 찼다.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내 마법은 실험체 17호를 뚫을 수 없다.

파베스의 방식대로 하게 놔두는 수밖에.

쿠오오오오오!

이지를 완전히 상실한 벨수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짐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와 파베스 쪽으로 달려든다.

나를 적으로 인식한 것 같았다.

“사서 고생을 하는군!”

나는 곧장 측면으로 빠졌다.

벨수스가 방향을 틀어 내게 아가리를 벌렸다.

뜨거운 열기가 안면으로 와 닿았다.

거대한 입에 삼켜지기 직전, 나는 검을 던져 넣었다.

푸확!

아무리 실험체 17호라고 하더라도, 입속까지 보호하진 못했다.

입안에 검이 박힌 벨수스는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대신 머리를 숙여, 뿔로 나를 들이받으려고 했다.

방어 마법으로도 저건 못 막는다.

다소 타격을 입더라도 피하기 위해서 몸을 틀었다.

크릉!

하지만 돌연 벨수스가 비틀거림과 동시에, 뿔이 내 몸을 스쳐 지나갔다.

뒤에서 린시스가 나타났다.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델, 나 안 늦었지?”

“아슬아슬하게.”

린시스의 주사는 잠을 자는 것이다.

그녀의 특기 때문에, 때때로 이렇게 전투 중에도 술을 마시곤 한다.

린시스는 특이하게도 메어리처럼 꿈을 조종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벨수스가 비틀거린 것도, 수면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극도로 흥분한 상태라, 저 정도가 한계야.”

“충분해. 파베스!”

파베스가 눈을 떴다.

린시스는 재빨리 방어 마법으로 자신과 내 몸을 감쌌다.

일렁이던 마나가 진동을 멈췄다.

주변이 순간적으로 고요해졌다.

곧 모든 것이 행동을 정지했다.

“절대 영도(Absoulte Zero Point).”

쩌억!

숲 일대가 하얗게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잔디는 빳빳하게 서 있었다.

그 중심에는 파베스가 있었다.

벨수스도 움직임을 멈췄다.

한기에 맞서 고온으로 끓어오르고 있던 실험체 17호마저, 완전히 얼어 버렸다.

“린시스, 이거 유지해 줘.”

“알았어.”

나는 꼼짝 없이 얼어붙은 벨수스에게 다가갔다.

검을 휘둘러, 벨수스에게 붙어 있던 실험체 17호를 잘라 냈다.

벨수스는 풀썩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았다.

린시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파베스는 기세등등한 얼굴로 입김을 내뿜었다.

쾅!

누군가 파베스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적잖은 충격에, 파베스의 고개가 앞으로 넘어간다.

홱 뒤를 돌아본 파베스가 성질을 냈다.

“누가 감히……!”

“파베스.”

그곳에는 리옐을 안아 든 노인, 마날루스가 있었다.

내가 애 좀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기에, 늦게 온 것이다.

마날루스는 영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혹시 내게 불만이 쌓였더냐? 내 레어에 이런 짓을 한 이유가 뭐지?”

“에인션트님! 그게 아니옵고.”

“이렇게까지 할 것도 없이 해결할 방법이 있었지. 그러게 공격 방법만 바꾸자니까.”

나는 슬쩍 말을 얹었다.

파베스는 자존심 때문에 내가 제시한 방법 대신 다른 방법을 썼다.

사실이었기에, 파베스도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나를 노려봤다.

“네가 한 일이니, 네가 치울 거라 믿는다.”

“……예. 에인션트님.”

어째 방을 어지른 뒤 혼나는 모양새였다.

나는 그사이에 벨수스에게 다가갔다.

어린아이 주먹 크기로 줄어든 실험체 17호를 회수했다.

그런데.

철썩.

실험체 17호는 내 팔에 들러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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