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39/134)

6

청동 협곡의 드워프

칼바람에 휘날리는 눈발이 시야를 가렸다.

발을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차가운 눈이 신발 속으로 들어왔다.

이내 그 눈은 보온 마법에 의해 녹아 축축한 물이 됐다.

썩 좋은 감각은 아니었다.

“마법이라는 건 대단하군요.”

“마법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인가?”

“마법사가 흔히 볼 수 있는 직업은 않으니까요.”

타트는 발레리아에게 선망 어린 시선을 보냈다.

“대부분 사람들은 중턱도 못 가서 포기합니다. 낮은 온도와 험준한 산맥이 합쳐지면 고행이 따로 없으니까요.”

“그럭저럭 편하게 온 것 같은데.”

“다 마법사님 덕분입니다. 저도 이렇게 수월하게 온 건 처음입니다. 날씨가 썩 좋은 편도 아닌데 말입니다.”

“제가 좀 유능하긴 하죠.”

발레리아의 콧대가 높아졌다.

평소였다면 자만하지 말라고 눌러 줬겠지만, 이번에는 참았다.

꽤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으니까.

보온 마법을 유지하면서, 주변 정찰과 길 만들기까지 하고 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이다.

“……왜 뭐라고 안 하세요?”

“누가 들으면 내가 맨날 나무라기만 하는 줄 알겠구나.”

“맞잖아요.”

“비겁하게 진실을 들이밀다니.”

맞는 말이라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숨결이 있을 법한 장소는 보이냐?”

“찾고 있는데, 스승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나가 집중된 곳은 없어요.”

“이런 눈밭에서는 마나 메이즈 현상이 일어나도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드니.”

숨을 내뱉자 새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프라우드 산맥은 설산.

햇빛을 반사한 하얀 눈만 가득했다.

눈이 시렸고, 거리 감각이 조금씩 애매해지기 시작했다.

듣고 있던 타트가 물었다.

“저, 마나 메이즈가 뭡니까?”

“마나가 집중된 곳에 공간이 뒤틀리는 현상.”

“공간이 뒤틀려요?”

“그래. 단, 대충 설명해 줘라.”

마나 메이즈를 직접 몸으로 경험한 단이 타트에게 설명해 줬다.

특징이나 느낀 점을 설명하자, 타트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프라우드 산맥에 확실히 그런 곳이 있습니다.”

“있다고?”

“예. 청동의 협곡이라고 불리는 곳이죠.”

“청동의 협곡?”

“예. 저희 부족 사이에서는 브론즈, 혹은 심해라고도 불립니다.”

듣기만 해도 가고 싶은 마음이 뚝 떨어지는 이름이었다.

그래도 생소한 지명이었기에 관심이 생겼다.

내 지식 밖의 일이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지?”

“협곡 아래에서 구리와 주석이 나왔거든요.”

“광맥인가 보군.”

“그렇습니다. 돈이 될 거라 생각한 몇몇이 들어갔지만.”

보온 마법 덕분에 춥지도 않을 텐데, 타트는 양 팔뚝을 손으로 쓸었다.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어느 하나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청동의 협곡에 마나 메이즈가 있다?”

“예. 청동의 협곡은 그 안을 들여다봐도, 제대로 된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거든요.”

타트는 청동의 산맥을 떠올리듯 눈을 감았다.

“마침 근처긴 합니다만.”

“좋아. 바로 안내해 주게. 두 눈으로 보면 마나 메이즈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테니.”

“저, 근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청동의 협곡은 유독 많은 몬스터가 서식하고 있는 곳입니다.”

마나 메이즈에는 자연적으로 동물이나 몬스터가 모이기 마련이다.

대기 중의 마나가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때문이다.

망아의 숲에는 거의 동물이었지만, 여긴 프라우드 산맥.

역시 몬스터가 많은 모양이었다.

“프라우드 산맥의 몬스터는 강합니다.”

“별문제 아닐세.”

용의 산맥이라면 모를까.

프라우드 산맥의 몬스터 정도는 처리 가능했다.

타트는 신뢰가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군데군데 박혀 길을 표시해 주던 이정표에서 벗어났다.

앞장서서 가던 타트가 어느 순간 멈췄다.

“도착했습니다. 이곳이 청동의 협곡입니다.”

“협곡?”

단은 의아한 얼굴이 됐다.

이렇다 할 지명이 붙을 만한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이는 건 비스듬히 쌓인 새하얀 눈밖에 없었다.

“협곡이 어디…… 우워!”

타트의 옆에 선 단이 기겁하여 물러섰다.

한 발자국만 더 갔다면 낭떠러지로 떨어졌을 것이다.

눈 더미가 후드득 떨어졌다.

바로 아래,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협곡이 보였다.

“마나 메이즈가 맞군.”

나는 지그시 협곡을 내려다봤다.

빛이 들지 않아 잘 보이지는 않았다.

어렴풋이 얼어 버린 하천이 보였다.

“찾는 물건은 어디 있습니까?”

“아마 저 아래 어딘가에 있겠지.”

이 마나 메이즈 자체가 내 아티팩트 때문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원래 프라우드 산맥에는 마나 메이즈가 없었으니까.

타트는 조금 머뭇거렸다.

“정말 내려가실 겁니까?”

“그래. 막상 가려니 무섭나?”

타트는 흘긋 발레리아의 눈치를 봤다.

발레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깊은 숨을 내쉰 타트가 결심한 듯 주먹을 쥐었다.

“무섭지 않습니다.”

타트의 주먹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남자의 허세란.

발레리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나 파장은?”

“맞췄어요. 다른 분들도 마나 메이즈에 진입할 수 있을 거예요.”

“좋아. 그럼 나 먼저 내려가서 안전한지 확인하고 오마.”

“네. 조심하세요.”

“아빠. 안전 제일!”

나는 곧장 협곡 아래로 뛰어내렸다.

* * *

“로난 남작님!”

타트는 크게 놀랐다.

먼저 내려가겠다더니, 훌쩍 뛰어내려 버린 것이다.

심지어는 그 어떤 안전 장비도 없이!

청동의 협곡 깊이가 1,000미터에 육박하는 것을 생각하면, 자살행위였다.

그러나 그 일행들은 별생각 없는 눈치였다.

“저희는 뭘 해야 합니까?”

“우선 마나 파장을 맞춰야 해요. 단은 마나 메이즈에 들어가 본 적 있다고 했죠?”

“예. 그때는 마도구를 가지고 갔습니다.”

“지금은 마도구가 없으니까, 내가 임의로 만들어 줄 거예요.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세요.”

“알겠습니다.”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태평해 보인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건만!

‘내가 환각을 본 건가?’

청동의 협곡에서는 착란 증세가 자주 일어난다.

타트는 제 볼을 세게 꼬집었다.

눈을 감았다가 떠 봐도, 상황은 똑같았다.

“당신들! 미쳤습니까?”

“예?”

“지금 로난 남작님께서 뛰어내렸습니다!”

일행은 ‘아는데, 그게 뭐 어쨌다고?’라는 눈으로 타트를 봤다.

타트는 당황했다.

단체로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도련님……이 아니라, 로난 남작님께서는 무사할 거예요.”

마리나는 타트를 진정시켰다.

타트는 일단 심호흡을 했다.

발레리아가 설명했다.

“아마 페더 폴(Fedder Fall)을 써서 낙하 속도를 늦추셨을 거예요.”

“로난 남작님께서도 마법사십니까?”

“그런 설정인 걸로 하죠.”

타트는 페더 폴이라는 마법을 처음 들어 봤지만, 대충 상황은 깨달았다.

낙하 속도를 늦춰 무사히 착지했을 거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하는 듯한 사실이 있었다.

“협곡 아래에는 몬스터가 득실거립니다. 하다못해 기사님이라도 대동하셨어야……!”

“글쎄요. 적어도 남작님께선 쉽게 당할 분이 아니십니다.”

단은 큰 걱정이 되지 않았다.

태초의 숲에서 오거와 워베어를 두들겨 팼다.

목오 사막에서는 혼자 제국군를 헤집어 놓기도 했다.

그 힘의 총량은 단보다 약간 높은 정도일지언정.

힘의 활용도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 지그문트다.

“걱정되긴 하네요. 협곡 아래 있는 몬스터가.”

“그렇죠. 아마 맨손으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살아 돌아오실 겁니다.”

“호랑이 굴이라니요. 마계 정도는 돼야 수준이…….”

오가는 대화를 듣던 타트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상식이 통하는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 * *

협곡 아래는 어두웠다.

라이트(Light)를 사용해 빛무리를 만들어 냈다.

하얀 빛무리가 살아 있는 것처럼 협곡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제야 협곡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넓군.’

얼어붙은 벽이 라이트의 빛을 반사해 반짝거렸다.

발치에는 얼어붙은 강이 있었다.

강이라기보다는 그냥 얼음 덩어리라고 하는 편이 어울릴 것 같았다.

‘구리, 주석, 찾아보면 보석도 나오려나.’

꽤 큰 광산으로 개발될 가능성이 보였다.

나는 협곡을 돌아보며 주변을 경계했다.

타트의 말대로라면 몬스터가 있을 것이다.

매복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몬스터는 안 보이는데.’

하지만 헛수고였다.

몬스터는커녕 동물이나 곤충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곡괭이?’

곡괭이였다.

땅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곡괭이였지만, 내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무슨 곡괭이 퀄리티가 이래?’

상당히 공을 들인 흔적이 보였다.

그 완성도도 대단했다.

무기로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나는 협곡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아여워! 우우 어어?”

그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웅얼거리는 듯했지만, 확실히 언어였다.

나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언 에앙! 이엉에 우응 엉아?”

화가 난 듯하면서도 억울한 목소리.

쭉 가 보니, 웬 사람이 벽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땅딸막한 키에, 다부진 몸, 거기에 길게 자란 수염까지.

드워프였다.

“어이 이음 애 위에! 우우 이어? 이은 어이?”

발소리를 들었는지, 드워프가 반색했다.

어쩐지 벽에 얼굴을 처박고 있긴 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드워프의 옆쪽에 섰다.

드워프는 얼음벽을 혀로 핥고 있었다.

혀가 얼음에 붙어 버린 모양이었다.

‘환생하고 본 것 중에 가장 멍청한 광경이군.’

말을 웅얼거리듯이 한 것도 혀가 붙어서 그런 것인 듯했다.

드워프의 한 손에는 반쯤 비워진 술병이 들려 있었다.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손을 까딱였다.

“오오안 이이 아고, 애 옹왱이 오 아여아오!”

보고만 있지 말고, 곡괭이 좀 가져다 달라는 것 같았다.

아마 나를 동족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혀가 붙어 뒤를 돌아볼 수 없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

나는 곡괭이를 가져다주는 대신, 얼음에 손을 댔다.

해동(Thaw).

열기가 손바닥을 타고 빙벽에 스며들었다.

드워프의 혓바닥에 붙어 있던 얼음이 스르륵 녹았다.

드워프는 혓바닥을 내민 그대로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제 혀를 손바닥으로 만져 보더니, 만세를 불렀다.

“됐다! 살았어! 으하하! 추하게 죽으라는 법 없구나!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고맙네! 이 일을 비밀로 해 준다면, 내가 술이라도 한잔…… 으허어억!”

화색이 되어 뒤를 돌아본 드워프는 놀라 뒤로 자빠졌다.

그 와중에도 술병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어버, 어버버!”

“그렇게까지 당황할 거 없는데.”

수염 길이를 보니 젊은 드워프였다.

나는 드워프에게 다가갔다.

솔직하고 호탕한 성격의 드워프다.

협조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숨결의 위치에 대해 간단한 탐문만 할 생각이었는데.

드워프는 넙죽 엎드렸다.

“아이고! 살려 주시옵소서! 저는 아직 젊습니다요! 노예처럼 일하겠습니다!”

“……응?”

내가 기억하기로 드워프는 상당히 뚝심도 있고, 기개 있는 성격이었는데.

이 드워프는 겁이 많은 모양이었다.

협박도 안 했는데 저자세로 나온다.

뭐 사람도 성격이 제각각이니, 그럴 수 있다.

“제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드래곤님의 장갑을 탐내…….”

“장갑? 지금 장갑이라고 했나?”

나는 드워프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드워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히익!”

“그거 자세히 좀 말해 봐라.”

오래 전, 프라우드 산맥에 하얀 드래곤 한 마리가 내려왔다.

드래곤은 땅에 긴 손톱자국을 냈다.

그것이 갈라져 생긴 게 바로 청동의 협곡이다.

인간으로 변한 드래곤은 협곡 안으로 들어갔다.

한 드워프의 말에 따르면, 협곡에 보물을 숨겨 뒀다고 한다.

“그 보물이라는 게, 장갑인가?”

“예, 예! 장로님 말씀대로라면, 협곡에 가득 찬 마나의 근원이 그 장갑이라고 합니다.”

“흠, 그 장갑이 어떤 물건인지도 알고 있나?”

“정확히는 모릅니다요. 아티팩트로 추정되는데, 끼고 손가락을 튕기면 서대륙의 생명체 절반이 사라진다는 소문이…….”

“장소는?”

“알고 있습죠! 저희 부락 깊숙한 곳에…… 헙!”

드워프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래도 드워프는 이 협곡에 자리 잡은 것 같았다.

“너희들은 이곳에 자리 잡은 건가?”

“그……렇습니다요. 며칠 전, 악룡을 피하고자 거처를 옮긴 참입니다.”

악룡.

벨수스 놈이 드워프의 마을도 들쑤시고 다녔던 모양이다.

내게는 행운이었다.

드워프는 한번 찾아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름이 뭐지?”

“오래된 화로의 모루모루라고 합니다.”

“오래된 화로라.”

드워프는 성이 없다.

앞에 부락 이름을 대는 것으로 성을 대신한다.

오래된 화로라면 나도 알고 있는 부락이었다.

“일단 오해부터 정정하지. 나는 드래곤이 아니다.”

“드래곤이…… 아니라고요?”

“그래.”

오해를 풀고 있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 어디 계세요?”

협곡을 내려온 발레리아와 일행들이었다.

내 뒤를 흘긋 본 드워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아! 유희 중이시군요!”

“아니라니까.”

“입 다물라는 말씀이십니까? 예. 예. 알아들었습니다요.”

“나 인간이라고.”

“네! 알고 있습니다. 드래곤님은 인간이시지요!”

말이 안 통했다.

한 대 때리려다가 말았다.

곧 일행이 합류했다.

“타트는?”

“돌려보냈어요. 아닌 척해도, 영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요.”

“그래. 잘했다.”

더 이상 로난 남작으로 위장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내심 불편했는데.

환상 마법을 풀었다.

모루모루는 폴리모프하는 것으로 오해한 얼굴이었다.

“드워프군요.”

“정말이네요. 처음 봤어요.”

단과 마리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엘프를 비롯한 요정족과 교류를 한 적 있기 때문이었다.

드워프는 내 눈치를 보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래된 화로의 모루모루라고 합니다.”

“오래된 화로?”

“드워프는 성이 없어. 대신 부락 이름을 대지.”

“잘 아시는군요. 역시 드, 아니, 인간이십니다.”

드워프, 모루모루는 거짓말에 서툴렀다.

명백히 나만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었다.

발레리아가 조용히 다가와서 귓속말을 했다.

“쟤 왜 저래요?”

“나를 유희 중인 드래곤으로 착각하고 있어.”

“아, 옛날에도 종종 있었죠. 그런 착각하는 사람들.”

모루모루는 자꾸 나를 흘끗흘끗 훔쳐봤다.

은근슬쩍 내게서 떨어진다.

나는 모루모루에게 다가갔다.

“부락으로 안내해 줄 수 있겠나?”

“힉! 예! 그럼요!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 * *

발레리아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여기서부터는 마나 메이즈네요.”

“마나 메이즈 내부에 부락을 만들었나 보군.”

“신기하네요. 마나 중독에 걸리진 않을까요?”

“그건 아닐 거다.”

나는 손으로 벽을 쓸었다.

마나 알갱이가 벽 안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여긴 광물이 풍부한 곳이야. 아마 광석이 마나를 흡수할 거다.”

“아, 마석이 만들어진다는 거군요.”

“그래. 자연의 기운을 머금은 광석은 마나 흡수율이 높으니까.”

“마나 수용량이 남은 마석이 마나를 흡수해서 적절한 비율을 유지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발레리아는 곧바로 수긍했다.

단은 조금 주눅 든 목소리로 물었다.

“마리나, 내가 멍청한 겁니까?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아니요. 저도 못 알아들었어요.”

“나도!”

해맑게 웃는 리옐을 본 단이 조금 안도했다.

마리나라면 몰라도,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리옐과 비교하는 건 어떨까 싶다.

앞장선 모루모루는 연신 뒤를 살피며 길을 찾았다.

“우리는 마나 파장을 맞췄다지만, 저 드워프는 어떻게 메이즈 내부로 들어온 거죠?”

“옷 단추에 작은 보석이 달려 있던 거 못 봤냐?”

“아, 그게 마석이었구나.”

“그래. 협곡에서 채취한 마석이면 파장이 맞을 테니까. 모루모루, 내 말이 맞나?”

몸을 움찔 떤 모루모루가 간신히 대답헀다.

“정확합니다요. 역시 드…… 인간이십니다. 헤헤.”

모루모루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너무 무서워하는 것 같아 어쩐지 불쌍했지만, 나는 더 이상 해명하지 않았다.

멋대로 오해한 건 저쪽이다.

이윽고 모루모루는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길을 잘못 든 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여기가 길입니다.”

모루모루는 벽을 더듬었다.

어떤 부분에서 손이 벽 안으로 쑥 들어갔다.

손에 이어 몸까지 전부 다 들어간다.

진짜 벽이 아닌, 정교한 환상이었다.

모루모루는 벽에서 얼굴을 쑥 내밀었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조금 작습니다. 통로가 드워프의 신장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거든요. 인간 여러분들께서 들어오실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두꺼운 옷을 벗어 버리면 모를까.

적어도 덩치가 꽤 있는 편인 단은 통과하지 못할 크기였다.

나는 통로의 크기를 가늠해 보고 턱을 까딱였다.

“됐어. 길이야 만들면 되니까. 숙련된 조교, 앞으로.”

“앞으로!”

발레리아가 장단을 맞춰 주며 앞으로 나섰다.

모루모루가 들어갔던 벽면으로 손을 뻗었다.

콰드득!

땅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모루모루가 기겁을 하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뭘 하고 계신 겁니까?”

“통로 확장 공사.”

“여긴 지반이 그렇게 단단하지 않습니다! 섣불리 파냈다간 무너질 겁니다!”

“알아.”

단순히 디그(Dig)만 사용했다면, 통로가 무너졌을 것이다.

발레리아는 통로를 전반적으로 확장함과 동시에, 벽면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으로 본 모루모루는 감탄했다.

마법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게 마법이군요. 이런 것도 할 수 있을 줄이야.”

“마법으로 요새도 만드는 게 마법사야. 안 될 건 없지.”

마법사라고 전부 저런 기예를 펼칠 수 있는 건 아니다.

더블 캐스팅을 할 수 있는 실력과 섬세한 감각이 필요하다.

물론 내 제자는 가능하다.

“끝!”

“가자.”

* * *

땅! 땅! 땅!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망치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나에게 안겨 있던 리옐이 털 뭉치 같은 옷에서 쏙 빠져나왔다.

강아지처럼 혀를 쭉 내민다.

“더워!”

“한창 대장간이 활성화된 시간이니, 그럴 수 있습니다.”

“보온 마법 해제할게요.”

우리는 통로를 빠져나왔다.

프라우드 산맥에서는 느낄 수 없던 후끈한 열기가 얼굴에 와닿았다.

“이곳이 오래된 화로입니다.”

“우와.”

“여기가, 드워프의 마을…….”

드래곤 레어가 연상되는 거대한 지하 공동이었다.

제멋대로 지은 듯한 집들이 보였다.

재료도, 양식도 전부 달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난잡해 보이지는 않았다.

부락의 중심부, 거대한 망치를 든 드워프의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주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하지 않았나?”

“이 정도는 며칠이면 충분합니다.”

모루모루의 목소리에서는 자긍심이 느껴졌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수십 년 동안 정착한 끝에 발전한 시가지로 보일 것이다.

그만큼 다양한 구조물이 있었다.

마리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 드워프는 한 명도 안 보이네요.”

“전부 대장간이나 광산에 있을 겁니다.”

“그럼, 바로 장로에게 안내해 줄 수 있나?”

“예, 예. 알겠습니다.”

오래된 화로의 지면은 평평하지 않고 비스듬히 경사진 구조였다.

모루모루는 길을 따라 가장 높은 대장간으로 갔다.

유독 망치질 소리가 크게 들렸던 곳이다.

땅! 땅! 땅!

“제가! 먼저! 사정을! 설명! 드리고! 오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요!”

쇳소리에 목소리가 묻혔다.

모루모루는 기다리라고 한 뒤 대장간으로 들어갔다.

곧, 망치질 소리가 멈췄다.

“뭣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장간 안에서 한 드워프가 나왔다.

모루모루보다 수염이 두 배는 길었다.

얼굴에는 검댕이 묻어 있었다.

눈가에 자글자글한 잔주름이 보였다.

늙은 드워프는 우리를 훑어본 뒤, 모루모루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 중에 어떤 분이시라고?”

“제일 앞에 계신 분입니다.”

“알았다. 이만 가 봐라.”

모루모루는 내 눈치를 살피다가 후다닥 도망쳤다.

늙은 드워프는 콧김을 내뿜으며 내게 다가왔다.

비록 키는 작았지만, 그 기개는 당당했다.

모루모루처럼 겁을 먹은 기색은 없었다.

“내가 오래된 화로의 장로, 하우전드요.”

하우전드는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봤다.

“지그문트 마이어다. 너는 내가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군?”

“그렇소. 나는 인간을 몇 번 본 적 있거든. 혹시 모루모루를 속인 것이오?”

“아니. 나는 내가 인간이라고 해명했어. 지가 멋대로 착각한 것뿐이지.”

“그렇군. 알겠소. 오래된 화로에는 어쩐 일이오?”

하우전드는 상당히 호쾌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속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따져 물을 줄 알았는데.

이런 단순함이 드워프다웠다.

역시 모루모루가 괴짜였다.

“물건을 찾으러 왔는데.”

“물건? 혹시 의뢰를 맡겼소?”

“아니. 이곳에 있다는 장갑을 가지러 왔다.”

“당신이 ‘무한의 장갑’의 주인이란 말이오?”

“그런 이름 아니거든?”

멋대로 이름까지 붙인 모양이다.

하우전드는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내 뒤를 살폈다.

“비록 여관은 없지만, 중턱에 가면 빈집이 있으니. 그곳에서 쉬도록 하시오.”

“빈집?”

“그렇소. 그곳에 살 만큼 드워프가 많지 않아서 말이오.”

“그런데 왜 만든 거지?”

“우리 오래된 화로에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말이 있소.”

“그게 뭔데?”

“일단 만들어! 그리고…… 만들어!”

정정해야 될 것 같다.

하우전드도 상당한 괴짜였다.

* * *

우리는 하우전드의 권고대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프라우드 산맥을 오르느라 피로가 꽤 쌓였기 때문이다.

언제 벨수스를 만날지 모르는 만큼,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싶었다.

“외관에만 신경 쓴 게 아니었군요.”

단은 흡족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하우전드가 말한 집은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구는 모두 드워프 수제품이었다.

“한 나라의 왕도 없어서 못 구한다는 게 드워프 수제품이거든.”

외관에서 오는 화려함은 덜했으나, 그 품질은 하나같이 최고급이었다.

침대에 엎어진 리옐이 그대로 잠들어 버릴 정도였다.

발레리아는 눈을 감고 마나를 모았다.

단은 조금 쉬다가 일어나서 가벼운 운동을 했다.

각자의 방법으로 쉬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우전드요. 들어가도 괜찮겠소?”

“그래.”

문을 열고 들어온 하우전드가 입을 열었다.

“뭐 필요한 것이 없나 해서 왔…… 어억!”

하우전드는 크게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였다.

턱이 덜덜 떨리며 긴 수염이 파도를 쳤다.

“저, 저, 저, 저!”

“저?”

“저건! 높은 망치의 작품 아니요?”

하우전드가 가리킨 것은 단의 검이었다.

벽면에 비스듬히 세워 놓은,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

단이 내게 궁금증 어린 시선을 보냈다.

“보는 눈이 좋군.”

막시밀리안의 유산,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

과거, 오래된 화로의 명장, ‘높은 망치’가 만든 검이었다.

하우전드는 벌떡 일어나더니 검을 향해 다가갔다.

“이 검의 주인이 누구요?”

“접니다.”

단이 조용히 나섰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에 꽤 애착이 있는 단이다.

하우전드는 단에게 광기 어린 눈을 돌렸다.

“하악. 하악. 내가, 저 사랑스러운 것을 조금, 만져 봐도 괜찮겠소?”

“……만지는 것이라면 별로 상관없습니다만.”

거친 숨소리에, 꿈틀거리는 손가락.

기세에 눌린 단은 영 꺼림칙한 표정으로 승낙했다.

“고맙소! 정말 고마우이!”

하우전드는 허겁지겁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에게 다가갔다.

떨리는 손을 검날에 가져가더니, 슥 쓸었다.

“오오, 이 표면 처리. 이건, 정말, 워우 씨……!”

‘높은 망치’는 모든 드워프 장로 중 최고의 명장에게 주어졌던 칭호다.

그 명장이 직접 만든 검이니, 하우전드가 감탄할 만도 했다.

‘그놈이 쓰던 검이니까.’

드워프 장로인 하우전드는 오래된 화로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일 것이다.

원래 드워프들은 장로를 그런 식으로 뽑으니까.

나는 아공간에서 이름 없는 검을 꺼냈다.

“하우전드.”

황홀한 얼굴로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보던 하우전드가 고개를 돌렸다.

꿈에서 깬 듯한 몽롱한 얼굴이었다.

나는 이름 없는 검을 내밀었다.

“혹시, 이 검이 뭔지도 알 것 같나?”

레온하트 왕실 보물고에서 얻은 검.

그 정확한 소재는 아직까지도 오리무중이었다.

특징은 여러 검의 형태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강도가 매우 단단하다는 것 말고는 없었다.

‘뭔가 있을까 해 봐서 조사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드워프라면 혹시 모를까 해서 한번 찾아갈 생각이었다.

하우전드의 반응은 꽤 격했다.

역시 드워프 장로는 다른 건가?

“이건! 도대체!”

“도대체 뭐?”

“……그러게 말이요. 도대체 뭐요?”

황당했다.

물어본 건 내 쪽이다.

하우전드는 이름 없는 검의 검신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검날이 검 자루와 이어지는 부분을.

“허. 내 살다 살다 이런 경우는 처음 보오. 검집을 고정시켜 놓다니.”

“검집? 검집이 어디 있어?”

나는 아공간에 검을 넣고 다니기 때문에 검집이 따로 필요 없다.

해서 검집도 안 가지고 다니는데, 뜬금없이 검집 얘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하우전드는 검의 날 부분을 툭툭 건드렸다.

“이거 말이오. 겉보기에는 검신, 그러니까 날 부분 같지만, 날이 아니라 검집이라오.”

“이게 검집이라고?”

“틀림없소. 심지어 재질은 내가 본 적 없는 종류의 금속이오.”

“그럼 내가 여태껏 검집을 휘두르며 싸웠단 건가?”

나는 검날과 손잡이를 잡았다.

드워프의 눈이 틀렸을 리도 없다.

검을 뽑으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했잖소. 고정되어 있다고.”

“그럼 뽑을 수 없는 건가?”

“그건 아니라오. 고정된 부분을 녹이면…….”

“그렇다면 녹여 주게.”

나는 이름 없는 검을 하우전드에게 넘겼다.

하우전드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봤다.

“내 식견이 좁아 확신할 수 없지만, 이 검집도 매우 희귀한 금속으로 만들어졌소. 정말 녹여도 괜찮겠소?”

“그래. 부산물은 가져도 돼.”

“흠. 나도 모르는 금속이라면 의뢰비로 충분하지.”

하우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기 전에, 장갑의 위치를 정확히 말해 줄 수 있나?”

“그건 말로 설명하기 조금 어렵다오. ‘도전’하겠다면 나를 찾아오시오.”

“도전?”

“그렇소. 도전.”

* * *

몇 시간 후.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고 생각한 나는 집을 나섰다.

밖은 아까보다 조금 더 어두웠다.

지하면서 밤낮을 구현해 놓은 모양이었다.

드워프의 기술력이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이놈들은 도통 밖을 쏘다니지 않는군.’

거리에는 드워프가 보이지 않았다.

빛을 발하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왁자지껄한 걸 보니, 술집이다.

곧장 하우전드의 공방을 찾아갔다.

들어서자마자 화기가 온몸을 뒤덮었다.

하우전드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름 없는 검을 두드리고 있었다.

“후욱! 후욱!”

“하우전드.”

“후욱! 조금만 기다리시오.”

하우전드는 그로부터 30분 동안 묵묵히 작업을 계속했다.

드워프라는 족속이 이렇다.

옆에 그 뭐가 있다고 한들, 한번 작업에 들어가면 대단한 집중력을 보인다.

작업에 열중한 나머지, 식사를 취하는 것을 잊어 탈진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내 검을 두드리는데, 기다려 주지 못할 정도로 참을성이 없진 않다.

“후우, 이거 정말 물건이구먼.”

마침내 하우전드가 허리를 폈다.

이름 없는 검을 흘긋 봤지만,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진척이 있나?”

“……없소! 이 빌어먹을 금속은 녹을 생각을 않는군!”

“그래서, 불가능하다는 얘긴가?”

“내 사전에 그런 말을 적지 않았소. 좀 더 시도를 해 봐야지.”

도구를 내려놓은 하우전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요?”

“그래. 문제 될 거 있나?”

“아니. 없소만, 호위가 없어도 괜찮겠소?”

“내 물건 찾으러 가는데 우르르 몰려갈 필요는 없지.”

“그렇군. 따라오시오.”

나는 하우전드를 따라 공방을 나섰다.

하우전드는 공방 뒤편 샛길로 향했다.

짧은 다리를 발발거리며 바삐 놀리는데, 꽤 민첩했다.

“원래 부락은 어떻게 됐나?”

“오래된 화로 말이오? 모루모루가 말하지 않았소?”

“악룡을 피해 왔다는 것만 알고 있는데.”

“흠, 맞소. 악룡이 오래된 화로를 완전히 부숴 놓았소.”

“대항은?”

“그 어떤 명검을 벼려 낸들, 우리는 기사가 아니라 대장장이라오.”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어 착각하기 쉽지만, 드워프는 호전적인 종족이 아니다.

평생을 작품 활동에 전념하는 예술가였다.

최소한의 병력은 갖추고 있지만 상대는 드래곤.

오히려 그것을 사냥하는 쪽이 이상하다.

“인간 중에는 드래곤을 사냥한 사람이 둘이나 있다고 들었소.”

“그래. 그중에 하나가 나야.”

“농담도 잘하오.”

“진짠데.”

과거 나는 드래곤 슬레이어라 불리기도 했다.

어쨌든 드래곤을 죽이긴 했으니까.

하우전드는 내 말을 농담으로 치부했다.

“그렇다면 악룡 좀 어떻게 해 주시오.”

“그럴 생각이야. 나랑 연이 좀 있는 놈이거든.”

“허허.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소.”

하우전드는 잡담을 나누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건물이 밀집한 지역을 벗어나, 공동의 벽면까지 닿았다.

새하얀 문이 보였다.

고대의 유적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라오.”

“딱 그 녀석 취향이군.”

고대 양식을 따르면서도, 미묘하게 깔끔한 문.

자신의 상징과 같은 별 모양까지.

이곳이 확실했다.

문틈에서 심상치 않은 양의 마나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도전에 실패했소. 그리고 이곳으로 가는 걸 금지했지.”

“장갑을 얻으려고 한 건가?”

“그렇소. 장갑의 힘에 매료된 몇몇 드워프가 무리를 이뤄 도전했지. 하지만 모두 실패했소.”

“그러고 보면 모루모루도 장갑을 탐냈다고 했지.”

“모루모루가? 그놈은 입구에서 무섭다고 도망쳤소.”

아까부터 걸리는 단어가 있었다.

도전.

말인즉슨 무언가 난관이 있다는 건데.

엉뚱하기로는 알아주는 녀석이었기 때문에, 예측이 가지 않았다.

“혹시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알려 줄 수 있나?”

“그건 나도 모르오. 살아 돌아온 모든 드워프는 입을 닫았다오.”

“입을 닫았다?”

“그렇소.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그 일에 대해 물으면 발작을 하니 원.”

나는 문을 바라보았다.

‘숨결’의 마나가 느껴지긴 했지만, 그 외에는 잘 모르겠다.

들어가 보면 알겠지.

‘설마 내가 찾으러 올 걸 알면서, 죽이려 들기야 하겠어?’

문에는 고대어로 뭔가 쓰여 있었다.

‘과거의 심연에 잡아먹히지 마라.’

문을 열었다.

어둠으로 들어찬 내부는 보이지 않았다.

들어가려는데, 하우전드가 한마디 했다.

“살아 돌아오시길 바라오.”

“그래.”

* * *

“델. 자네 설마, 지금 자고 있는 건가?”

“음?”

그리운 목소리에 눈을 떴다.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내 옆에 서 있었다.

기사는 투덜거렸다.

“나는 두려워서 다리가 떨리는데, 자네는 태평하군. 졸기까지 하다니.”

“나는 강하거든. 왜, 후달리나?”

“솔직히 아주 안 무섭다면 거짓말이겠군. 아무래도 저 수는 버겁다네.”

기사는 자신의 손을 들었다.

떨리고 있었다.

“마법으로 진정시켜 줄까?”

“때로는 두려움이 목숨을 지켜 주기도 하는 법이라네.”

“말은 번드르르하게 잘하는군.”

“자네한테 배웠지.”

기사가 빙그레 웃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 어린 웃음이었다.

나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재밌어. 아주.”

“그렇게 재미없다는 투로 말하면 서운하네만.”

“닥치고, 저거 어쩔 거야?”

나는 앞을 응시했다.

몬스터들이 우리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수였다.

“어쩌겠나. 싹 다 죽여야지. 그게 우리가 살아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

“징글징글하군.”

“동감이야.”

언뜻 보기에도 수천이 넘었다.

정규군을 동원해도 못 막을 정도의 물량.

새삼스럽게 짜증이 났다.

“하여튼, 세다고 다 좋은 건 아니야. 이런 일에 달랑 둘만 보내다니.”

“나는 오랜만에 자네와 합을 맞춰서 좋은데.”

“징그럽게. 잘 막기나 해.”

“후방으로 가는 건 없을 걸세.”

기사는 클레이모어를 뽑았다.

나는 아공간을 열어 탄생을 꺼냈다.

기사가 눈을 깜빡였다.

“완드라. 자네, 분명 저번에는 맨손이 편하다고 하지 않았나?”

“선물 받았거든. 안 쓰기도 뭐하잖아.”

“혹시 여잔가?”

“나무야.”

“나무?”

내 대답에, 기사는 당황했다.

이런 대답은 예상치 못한 모양이다.

“하여튼. 연애도 좀 하고 살라니까. 총각으로 죽을 생각인가?”

“그러는 자네는 어떤데? 진척이 있나?”

기사는 씩 웃으며 목에 걸린 펜던트를 들어 보였다.

심지어는 펜던트에 키스까지 한다.

“이 전투가 끝나면 돌아가서 결혼식을 올릴 걸세.”

“더럽게 불길한 소리를 태연하게도 하는군. 죽을 각인데.”

“자네가 뒤를 봐주는데.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있나! 하하!”

기사는 유쾌하게 웃었다.

오러가 클레이모어를 감쌌다.

순식간에 기세가 변했다.

나도 마나 서클을 회전시켰다.

카아아아악!

몬스터들이 몰려왔다.

나무가 무너지고, 땅이 순식간에 불모지로 변했다.

수만 마리의 괴물.

나와 기사, 둘은 그 괴물의 무리를 막아섰다.

“신호하면 가겠네.”

“신호.”

“거참! 재미없기는!”

기사가 괴물의 무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동시에, 내 마법이 작렬했다.

* * *

다행히 녀석은 죽지 않았다.

무사히 돌아가서 결혼식도 올렸다.

그래도 영웅이라고, 결혼식은 성대하게 이뤄졌다.

아내는 아름다웠다.

놈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다.

“이제 보니 기사가 아니라 도둑놈이었군.”

“어허. 사랑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네.”

“개뿔이.”

샐쭉 웃는 기사는 행복해 보였다.

평생 온갖 고생이라는 고생은 전부 다 한 놈이다.

이제 편해질 때도 됐다.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였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또 전쟁인가? 지긋지긋하군.”

“남서쪽과 북동쪽, 양면에서 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소국에 불과한 팔베르크다.

동원할 수 있는 강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남서쪽에 배치됐다.

“북동쪽은?”

“로안 님께서 오실 때까지 버티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 같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죽어 나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강했다.

서대륙의 마법사 중에서는 수위를 다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결국 내 몸은 하나였고, 갈 수 있는 전선도 하나였다.

나는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다.

명령을 따를 수밖에.

“내가 가겠네.”

“허튼소리.”

“내 비록 잠시 검을 놨다지만, 아직 건재하다네.”

내 이야기를 들은 녀석은 기꺼이 나서겠다고 했다.

가정을 우선시하겠다고 기사직을 내려놓았건만.

내가 어깨에 다시 짐을 얹어 놓은 꼴이 됐다.

“정말 괜찮겠나?”

“그럼. 내가 누군지 잊었나?”

“자네에게는 가정이 있지 않은가.”

“당연히 무사히 돌아갈 걸세. 약속하지.”

기사는 내 등을 쳤다.

그리고 호쾌하게 웃어 보였다.

“웃고 살아. 이 사람아. 농담도 좀 하고. 자네는 다 좋은데, 매사에 부정적인 것이 흠이야.”

“……고려해 보지.”

“하하! 자네다운 대답이야.”

기사는 그렇게 다시 검을 들었다.

정예 병력으로 이루어진 증원군과 함께 북동쪽 요새로 떠났다.

그리고 기사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남서 전선에서의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어느 날.

한 병사가 급보를 전해 왔다.

“다시 한번 말해 봐라. 지금, 뭐라고?”

“……막시밀리안 님께서, 전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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