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빵 두 조각
지그문트는 지도를 내려다봤다.
서대륙 최북단, 프라우드 산맥 너머.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은 곳에 용의 산맥이 있다.
용의 산맥에는 만년설이 쌓여 있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올라갔다간 동사 확정이었다.
불을 잘 다루는 발레리아를 데려가는 이유 중 하나였다.
“보온 마법요?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죠!”
“좋아. 너는 이제부터 살아 있는 난로다.”
단과 마리나는 발레리아를 인간 난로 취급하는 지그문트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레온하트의 최고 전력 중 하나.
서대륙에 다섯도 없는 마탑의 주인을 난로 대용 취급한다.
둘의 표정을 본 발레리아가 말했다.
“걱정 마세요. 최대한 안 태워 볼게요.”
단과 마리나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지그문트는 태연했다.
발레리아 나름대로 농담을 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에게는 살벌하게 들렸지만 말이다.
“농담이에요.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예. 알겠습니다.”
“네. 네!”
지그문트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단과 마리나의 목소리는 몹시 어색했다.
“왜 그렇게 쫄아 있어?”
“그렇지만, 무려 마탑주께 무례하게 굴 수는…….”
“대마법사한테는 편하게 굴던 놈들이.”
쯧 혀를 찬 지그문트는 다시 지도를 내려다봤다.
발레리아도 웃으며 말을 거들었다.
“저한테도 편하게 대해 주세요. 전 괜찮아요.”
“아줌마.”
“…….”
발레리아는 웃고 있는 그 상태로 리옐에게 시선을 돌렸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살벌한 예기에, 단과 마리나가 주춤 물러났다.
리옐은 발레리아와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쳤다.
“난 아직 20대 후반이거든?”
“아하, 난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래? 이제 보니 꼬맹이가 아니라 아가였구나?”
“아니야!”
유치한 투덕거림에, 지그문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깜빡했던 걸 기억해 낸 듯 발레리아에게 물었다.
“너 신분은?”
“이미 하나 만들어 뒀죠.”
발레리아 로안은 상당히 눈에 띄는 인물이다.
최연소 탑주에, 7서클 마도사.
눈에 띄는 외모 때문에 얼굴을 아는 이들도 적지 않다.
팔베르크나 레온하트의 사람들이라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그문트는 발레리아에게 새 신분을 만들어 오라고 했다.
“마법사한테 위장은 간단한 일인 걸요.”
“내가 네 환상 마법 수준을 아니까 그러지.”
“……제가 환상 마법을 잘 다루지는 못한다는 건 인정할게요.”
환상 마법은 예술적인 영역과 관련이 깊다.
기본적으로 발레리아 로안은 그림을 잘 못 그린다.
지그문트의 기억대로라면, 리옐 밑이다.
마법이나 계산에 천부적인 면모를 보이는 반면, 예술 쪽은 영 아니었다.
“그래서 간단하게 준비했어요.”
발레리아는 손가락을 튕겼다.
마나가 몸을 감싸며, 발레리아의 체형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키가 조금 작아졌다.
허리 끝까지 닿던 긴 머리카락은 목 언저리까지 오는 단발로 줄어들었다.
얼굴에는 변화가 거의 없었지만, 어딘가 앳되게 보였다.
지그문트는 발레리아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이게 몇 살 때지?”
“열여덟요.”
“10년을 줄이다니. 양심도 없구나.”
“윽.”
“그 얼굴이면 제국에선 알아보는 사람도 있겠는데. 차라리 늙게 변하는 건 어떠냐?”
“죽어도 싫거든요.”
8서클의 폴리모프(Polymorph)가 아니라면 완전한 눈속임은 어렵다.
그렇다고 대충 변장할 수도 없다.
발레리아는 지그문트의 성격을 알았다.
그래서 나이만 어리게 만든 것이다.
이미 몸이 한 번 거쳐 간 외형이다.
더군다나 바꿀 것도 크게 없으니, 상대적으로 편하다.
“하여튼 칭찬 좀 해 주면 덧나나.”
발레리아는 투덜거리며 머리색을 바꿨다.
눈에 확 띄던 붉은 머리카락이 차분한 갈색으로 바뀌었다.
그것만으로도 인상이 크게 변했다.
“신기하군요. 못 알아보겠습니다.”
“우와.”
단과 마리나가 감탄했다.
지그문트의 마법을 몇 번 보긴 했지만, 모습이 변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목소리와 복장까지 바꾸자, 완벽히 다른 사람이었다.
발레리아는 천연덕스럽게 찻잔을 들며 조신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던 예법을 보이며 인사했다.
“리아라고 불러 주세요.”
“꼭 명문가의 귀족 영애 분 같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내 성을 쓰고 있으니 명문가 맞지.”
“사기야!”
리옐이 씩씩거렸지만, 발레리아는 모른 척했다.
준비를 마친 지그문트 일행은 곧 네르갈을 떠났다.
* * *
덜컹.
마차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단이 속삭였다.
“도련님, 병사가 보입니다.”
“내가 시킨 대로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우리는 이동 수단으로 텔레포트 대신 마차를 택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장거리 공간 이동을 위해선 여러 선행 조건이 필요하다.
웨스트 던에는 전송 장치가 있어서 가능했지만, 용의 산맥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직접 이동해야 했다.
“안 걸리겠죠?”
“안 걸려.”
우리는 레온하트 왕국과 팔베르크 제국 사이, 국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북동쪽의 해상 도시 퀸틴을 경유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몇 달을 지체해야 한다.
장고 끝에 제국을 가로지르기로 결정했다.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조금 위험이 따르긴 하지만.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지. 마차 세우십시오.”
쇠 부딪치는 소리.
제국의 병사들이었다.
이어서 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검문입니다.”
“시간이 없는데. 간단하게 끝내게.”
“예. 실례지만 안에 계신 분이 누군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실례인 건 잘 아는군.”
단은 생각보다 연기에 재능이 있었다.
오만한 척을 하며 자신 있게 나가자, 병사도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조심스럽게 대했다.
사실 이런 검문은 형식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국은 유독 까다로운 편이지만, 연습했던 대로만 한다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받게.”
“이건……!”
창문 너머로 상황을 살폈다.
단이 병사에게 건넨 것은 작은 휘장이었다.
팔베르크 제국을 상징하는, 금색의 태양이 한가운데 박혀 있었다.
병사가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다른 하나도 눈치를 보다가 허리를 숙였다.
“몰라뵌 점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나가겠다.”
“예! 상부에 전해 놓을까요?”
병사가 묻자, 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보이스 체인지(Voice Change)를 사용해, 목소리를 중년의 것으로 바꿨다.
한껏 목소리를 내리깔고 입을 열었다.
“시끄러운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검으로 땅을 찍어 예를 표했다.
단은 그들을 보다가 금화 한 닢을 던졌다.
눈이 휘둥그레 커진 병사가 얼른 금화를 받았다.
마차가 출발했다.
한참 후, 발레리아는 마법으로 주변을 살피고 입을 열었다.
“이제 말해도 괜찮아요.”
“푸하!”
리옐이 입을 막고 있던 양손을 열며 숨을 내뱉었다.
마리나는 의아한 듯 휘장을 보며 물었다.
“저게 뭔데 이렇게 순순히 들여보내 주는 건가요?”
“제국 고위 관료들이 비밀리에 움직일 때 신원을 증명하는 패.”
“……도련님은 어떻게 그걸 가지고 계신 거죠?”
나는 은화 한 닢을 손에 쥐었다.
다시 손을 폈다.
은화는 어느새 휘장으로 변해 있었다.
정교한 환상 마법으로 눈속임을 한 것이다.
“이거 위조 아닌가요?”
“지들이 멋대로 오해한 거야.”
나도, 단도 이게 뭐라고 말한 적은 없다.
병사들이 보고 표식으로 ‘착각’한 것이다.
마리나는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리옐은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바람을 쐤다.
“정말 아무것도 없네요.”
“팔베르크 제국은 땅덩어리에 비해서 인구가 많은 나라는 아니니까.”
급격하게 규모가 커진 나라인 만큼, 인구 밀집도가 현저하게 낮았다.
황성이 있는 수도가 아니라면 쉽게 지나갈 수 있었다.
적진 한복판이라지만, 적진이 너무 크면 이런 일이 생긴다.
“예상대로라면 별문제 없이 지나갈 수 있을 거야.”
“이참에 수도에 대규모 공격 마법 하나 쏘고 오는 건 어떨까요? 7서클짜리로.”
“부술 거면 황성만 부숴라. 애먼 사람들 피해 주지 말고.”
“……두 분 다, 농담이시죠?”
발레리아는 완드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괜히 검 자루를 툭툭 쳤다.
끝까지 대답하지 않자, 마리나는 울상이 됐다.
마차는 한참을 달렸다.
해가 저물었고, 지친 리옐은 마리나의 무릎에서 잠들었다.
발레리아는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도련님, 빛이 보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여긴 어딘가요?”
“위스크 백작령.”
“이렇게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어. 위스크는 지금 없거든.”
“어디 갔는데요?”
“저승.”
위스크 백작.
할리온 남작과 함께 목오 사막에서 고군분투하던 제국의 귀족이었다.
발락의 사령술에 의해 죽었다.
말인즉슨, 지금 위스크 백작령에는 귀족이 없다는 뜻.
‘있어 봐야 대리지.’
잠시 영지를 맡은 대리자가 적극적으로 외부인에게 간섭하지는 않을 것이다.
몰래 경유하기에는 최적이었다.
간단한 신원 조사를 받고, 백작령 내부로 들어섰다.
초저녁인데도 사람들이 꽤 돌아다녔다.
단이 마차를 늦추고 지나가는 남자를 불러 세웠다.
“말 좀 묻겠네. 혹시 근처에 여관이 있는가?”
“있긴 합니다만, 여관이라고 하기도 뭐한 여인숙입니다요. 나으리나 나으리께서 뫼시는 분이 가실 만한 곳은 아닐 겁니다.”
“상관없네.”
“혹시, 밖에서 오셨습니까?”
단과 남자의 대화에 한 명이 끼어들었다.
남자는 얼른 허리를 숙였다.
나는 창밖을 살폈다.
대화에 끼어든 것은 키가 크고 마른 청년이었다.
편해 보이는 복장이지만, 소재가 꽤 좋은 것이다.
평민은 아니었다.
‘귀족? 위스크 백작의 자제?’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단은 조심스럽게 말을 높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저희 저택에 오시지요!”
저택.
말인즉슨 위스크 백작의 저택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
대리자는 아니었다.
위스크 백작의 자제일 가능성이 높았다.
“저는 팔든 위스크라고 합니다. 아버지 대신 백작령을 맡고 있지요.”
“아, 그렇군요.”
“해서, 오실 거지요?”
팔든 위스크는 빙그레 웃었다.
단은 내 의중을 읽으려는 듯 침묵했다.
팔든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마차의 창가를 향했다. 그러고는 단이 길을 물었던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자가 말했다시피, 여인숙은 영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저희 영지를 찾은 분을 그런 곳에서 밤을 보내게 한다면, 팔베르크의 귀족으로서 수치지요.”
“이렇게 적극적으로 호의를 베풀어 주니 거절하기가 힘들군.”
나는 보이스 체인지로 바꾼 중년의 목소리를 유지한 채 말했다.
어쩐지 께름칙했다.
팔든 위스크를 살폈다.
단순한 호의? 아니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가?
둘 중 어느 쪽이든 간에, 내게 거절할 만한 구실은 없었다.
“가지.”
팔든은 뻔뻔하게도 마차에 동승했다.
마차 내부에는 어색한 공기가 가득 찼다.
마리나는 영 불편해 보였고, 발레리아는 관심 없는 척 창밖을 구경했다.
리옐은 태평하게도 자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존함을 듣지 못했군요.”
“트리옌의 로난 남작일세.”
“트리옌! 멀리서 오셨군요.”
미리 생각해 둔 신분을 댔다.
환상 마법을 통해 중년 귀족으로 위장하고 있었기에, 적당한 이름이었다.
트리옌 왕국에는 유독 귀족이 많은 나라다.
그중에서도 애매한 위치인 남작의 이름을 전부 알 리 없다.
기사와 시종을 대동하고 있는 만큼, 귀족 행세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리아 로난이에요.”
발레리아는 새침하게 인사하고 눈을 돌렸다.
콘셉트 참 요망하게도 잡았다.
팔든은 발레리아를 응시했다.
“아름다우시군요. 레이디.”
“겉치레 차릴 것 없어요.”
“진심입니다.”
목소리가 한층 낮아지고, 눈빛이 달라진다.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전형적인 남자의 변화였다.
발레리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내 눈에는 팔에 돋은 닭살이 보였다.
팔든은 마리나와 리옐을 흘긋 보았다.
“기사 한 명과 시녀만 대동하고 오신 겁니까? 위험할 텐데요.”
“걱정할 거 없네. 실력 있는 기사일세. 나 또한 그렇지.”
“그렇군요.”
팔든의 시선이 내 허리의 검에 잠깐 머물렀다.
전력을 살피고 있는 건가, 아니면 진심 어린 걱정인가.
아직은 알 수 없다.
“도착했군요.”
마차가 멈췄다.
나는 뒷짐을 지고 마차에서 내렸다.
평범한 저택이었지만, 눈에 띄는 점이 몇 가지 있었다.
담장 위로 솟아오른 뾰족한 가시.
그리고 창문을 감싸고 있는 철창이었다.
경비병도 과할 정도로 많았다.
발레리아도 그것을 인식했는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들어가시지요. 조촐하지만, 저녁이라도 대접하고 싶습니다.”
“흠.”
나는 팔든의 안내에 따라 길을 걸었다.
내 뒤를 발레리아와 마리나, 단이 따라왔다.
리옐은 마리나에게 업혀 있었다.
정신없이 자는 걸 보니, 피곤했던 모양이다.
“충!”
문 앞에도 경비병이 넷이나 있었다.
전부 기사였다.
“검은 잠시 맡겨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방침이라서 말입니다.”
“그러지.”
애초에 허리에 차고 있던 것도 예비용이었다.
이름 없는 검은 아공간에 있다.
단은 조금 불안해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맡기며 기사에게 부탁까지 했다.
“엄중히 관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단과 마리나는 간단한 몸수색까지 받고 나서야 저택 내로 들어설 수 있었다.
내부는 평범했다.
팔든은 집사를 불러 몇 가지를 지시한 뒤, 우리를 직접 방까지 안내했다.
호의치고는 정중한 대접이었다.
“식사가 준비되면 시종을 보내겠습니다.”
“고맙네.”
“아닙니다. 고된 여정이었을 텐데, 편하게 쉬십시오.”
쿵.
문이 닫혔다.
나는 곧바로 몇 가지 마법을 사용했다.
디텍트(Detect).
멘탈 체크(Mental Check).
마법적인 물건이나, 정신 이상은 없었다.
감시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한 방이었다.
‘과민 반응인가?’
문과 복도에 알람(Alarm)을 걸어 뒀다.
발레리아에게 샌딩(Sending)을 보냈다.
-수상한 움직임은?
-없어요. 방도 그렇고, 주방에서 준비 중인 음식도 깨끗해요.
곧바로 답장이 왔다.
이쯤 되면 정말 호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레리아에게 호감을 표시하기도 했으니.
‘가급적 조용히 넘어가고 싶긴 하지만.’
소동을 벌이고 싶진 않다.
적진 한복판.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다.
팔든은 그리 강하지 않지만, 거슬리는 존재였다.
죽이거나 제압하면 제국 쪽의 시선을 끌 수도 있었다.
‘쯧. 왜 초대를 해선.’
상황이 조금 꼬였다.
여관에서 잠깐 휴식한 뒤 바로 지나갈 계획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여기서 하루 머무르는 수밖에 없었다.
* * *
방에서 쉬고 있으니, 시종이 찾아왔다.
나는 안내를 받아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발레리아와 리옐이 먼저 앉아 있었다.
단과 마리나는 보이지 않았다.
신분 때문에 따로 식사를 마련한 것 같았다.
나는 태연하게 상석 반대편에 앉았다.
“이리 대접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군.”
“아닙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팔든은 좋은 사람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저런 놈이 위험한 법인데.
내가 식기를 드는 것을 시작으로, 불편한 식사가 시작됐다.
팔든은 이런저런 질문을 해 왔다.
“팔베르크 제국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지나가는 길이었다네. 퀸틴에 볼 일이 있거든.”
“퀸틴 말씀이십니까? 한데 어찌 저희 영지로 오시게 된 겁니까? 트리옌에서 오셨다면 여길 지나칠 일이 없는데 말입니다.”
“레온하트를 경유했다네. 딸아이가 검술 대회를 구경하자고 졸라서 말이네.”
팔든의 눈이 발레리아 쪽으로 돌아갔다.
계획에 없던 시나리오였지만, 발레리아는 장단을 잘 맞췄다.
“강한 기사는 매력적이죠.”
“저도 검을 다룹니다. 레이디 리아.”
“어머, 정말요?”
“예. 소드 러너입니다.”
팔든은 자랑스럽다는 듯 한껏 가슴을 폈다.
저 나이에 소드 러너면 꽤 난 놈이긴 하다.
나는 주변을 살피는 채 한 뒤 입을 열었다.
“위스크 백작님은 안 계신가?”
“저희 아버지를 아십니까?”
“과거에 몇 번 뵌 적 있지.”
마지막으로 본 게 목오 사막에서 발락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긴 했지만 말이다.
팔든은 음식을 씹어 삼키곤 태연하게 말했다.
“돌아가셨습니다.”
“……내 괜한 말을 꺼냈군.”
“아닙니다. 저도 얼마 전에야 소식을 전해 들었으니까요.”
목오 사막의 원정대는 전멸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기억을 사용해 메테오라이트까지 썼으니, 거의 확정 사항이었다.
그러나 제국은 위스크 백작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 보고한 것이다.
‘발락 리빙데드. 역시 살아 있었나.’
네크로맨서, 발락일 확률이 높았다.
목오의 등에서 떨어져 죽었다면 제일 좋았겠지만.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한 모양이었다.
위스크 백작의 죽음이라는 화제에도, 팔든 위스크는 별로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기뻐 보였다.
“아직 정식으로 하사받지는 못했지만, 곧 제가 백작 위를 물려받을 예정입니다.”
“독자인가?”
“남동생이 둘,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이 자리에는 없지만요.”
팔든 위스크는 담담하게 식사를 이어 나갔다.
그렇게 저녁 식사는 아무 일도 없이 끝났다.
* * *
호화스러운 방.
단은 한창 운동을 하고 있었다.
검이 근처에 없으니 불안했다.
곧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기사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열려 있다.”
어린 시동 하나가 식사를 가지고 왔다.
일부러 간단하게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꽤 호화스러운 양이었다.
단은 운동을 멈추고 땀을 닦았다.
식사를 하려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꼬륵.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문 옆에 선 시동이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단이 빵을 집어 들자,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확실하고, 크고, 길었다.
꼬르르르륵.
시동이 단의 음식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단과 눈이 마주쳤다.
시동은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몸을 움츠렸다.
단은 말없이 빵을 시동에게 건넸다.
빵을 본 시동이 화들짝 놀랐다.
“저는 괜찮습니다! 기사님!”
“그냥 먹어라. 뱃속에서 아우성을 치지 않느냐.”
“하지만.”
“팔이 아프구나.”
“가, 감사합니다.”
시동은 눈을 빛내며 빵을 받았다.
단의 눈치를 살피더니,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빵을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켈록!”
목이 막히는지, 기침을 하며 가슴을 두드렸다.
단은 식사를 하려다 말고 시동에게 물컵을 건넸다.
“물도 마셔가면서 먹어라.”
목이 막힌 와중에도, 시동은 꾸벅 인사했다.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겨우 빵을 삼키고, 다시 인사를 한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대단치 않은 일이니, 그렇게 고마워할 거 없다.”
“아닙니다. 기사님께서 물을 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목이 막혀서 죽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빵을 준 것도 나니, 내가 죽인 것이 되겠구나?”
“아닙니다!”
눈을 휘둥그레 뜬 시동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단은 픽 웃고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한참 식사를 하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옆을 보니, 시동은 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하나 더 주랴?”
“네? 괜찮습니다!”
“침이나 닦고 말해라. 그리고 나한테는 양이 많다.”
단에게 음식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훈련을 위한 에너지만 보충할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
단이 느끼기에, 차려진 식사는 조금 과할 정도였다.
빵 하나를 더 받은 시동은 멍하니 단을 바라보았다.
“기사님은 착하시군요.”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는데.”
“아닙니다. 기사님은 여태껏 본 그 누구보다 훌륭하십니다.”
시동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단은 조금 멋쩍은 듯 볼을 긁었다.
소작 빵 두 조각 줬을 뿐인데, 시동은 선망의 눈으로 단을 보고 있었다.
“네가 아직 어려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 거다.”
“제가 일하는 동안, 많은 손님이 저택에 머무르셨습니다.”
“내가 모시는 도련…… 큼, 로난 남작님은 아직 보지 못했나 보구나.”
“그렇습니다.”
“그분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그마치 나라를 몇 번이나 구하셨지.”
“와…….”
시동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단은 넌지시 물었다.
“내가 모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냐?”
“네! 궁금합니다!”
“그럼 말해 주지. 그분께서는…….”
지그문트와 동행하면서, 여러 업적을 목격해 온 단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그문트를 모신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지그문트를 알아주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단으로서는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러니, 오거가 스스로 무릎을 꿇는 게 아니겠냐.”
“우와.”
단은 자랑하듯 한참 이야기를 했다.
몇 가지 얘기하기 곤란한 부분은 각색해야 했지만, 시동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워낙 대단한 이야기라, 사소한 부분에서 이상하다고 느끼진 못한 것이다.
“……그런 일도 있었지. 내 말재주가 없어서 이 정도로밖에 표현하지 못하겠구나.”
“아닙니다! 로난 남작님께서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 알겠습니다!”
“큼. 그렇지?”
시동의 목소리에는 존경과 선망이 담겨 있었다.
거짓은 일절 없었다.
단의 이야기에 의하면, ‘로난 남작’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야기 속에 단의 주관적인 의견이 들어 있었기에, 시동은 더욱 그렇게 느꼈다.
‘로난 남작님도, 기사님도 정말 멋진 분이시다!’
위스크의 저택에서 일하면서, 시동은 많은 귀족과 기사를 만나 왔다.
그중 어느 하나도 이처럼 의롭고 대단한 사람은 없었다.
모두 시동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있는데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배곯음 소리를 들으면, 짜증을 내거나 욕설을 내뱉는다.
걷어차이기도 했다.
그 누구도, 자신의 몫인 빵을 건네지 않았다.
‘이렇게 훌륭한 분들을 죽게 둘 수는 없다.’
시동은 결심했다.
어쩌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무서웠다.
하지만, 용기를 내야 했다.
“기사님, 로난 남작님을 모시고 저택에서 나가셔야 합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
“팔든 도련님께서 로난 남작님과 기사님을 죽이려 들 것입니다.”
“……자세히 말해 봐라.”
단은 의외의 인물에게서 중요한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었다.
대가는, 빵 두 조각이었다.
* * *
팔베르크 제국의 외곽.
두 병사들은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잠시 쉬고 있었다.
오랫동안 국경을 돌아다니면서 검문을 해야 하는 그들이다.
완전히 무장한 상태로 한나절 동안 움직이는 건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근무 시간에도 중간 중간 휴식은 필요했다.
“선배님, 근데 아까 그 마차는 뭐였습니까?”
“무슨 마차?”
“제국의 표식이 그려진 휘장을 제시한 마차 말입니다.”
후배 병사는 수통을 투구를 벗고 땀을 닦았다.
제국의 검문은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여태껏 일을 하면서 이렇게 쉽게 통과시킨 적은 없었다.
심지어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의 얼굴도 확인하지 않았으니.
선배 병사는 쯧쯧 혀를 찼다.
“교육 때 졸았지? 빠져 가지곤.”
뜨끔한 후배 병사는 괜히 수통을 건넸다.
수통을 낚아챈 선배 병사가 대답했다.
“높은 분들, 그중에서도 황제 폐하의 측근만이 가지고 계신 휘장이야.”
“황제 폐하의 측근이라면…….”
“흑탑주 렘브란트 님푸스님, 뭐 그런 대단한 사람들이지.”
“허. 그런데 그런 분께서 그리 조촐한 인원으로 움직이셨을까요?”
“우리 같은 놈들은 그런 거 알려고 들면 안 돼. 목 달아난다.”
후배 병사는 선배 병사의 말을 가슴속 깊이 새겼다.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선배 병사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술을 마시는 시늉을 했다.
“그것보다, 오늘 밤에 한잔 어때?”
“돈이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그분 기사께서 이런 걸 하사하셨지 뭐냐.”
선배 병사는 화려하게 금화 한 닢을 꺼냈다.
후배 병사가 경악했다.
검문을 편하게 지나가기 위해서 돈을 찔러주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자그마치 금화다.
“무슨 씀씀이가…… 금화를…….”
“그만큼 돈 많은 사람이라는 거지. 우린 아량에 감사하며 취하면 그만이야. 그래서 되냐, 안 되냐?”
후배 병사는 한참 동안 갈등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마누라한테 죽습니다.”
“새신랑이라는 놈이. 벌써부터 잡혀 사냐?”
“헤헤.”
“좋아? 에휴. 그래. 좋을 때다.”
선배 병사는 픽 웃으며 수통을 기울였다.
뜨뜻미지근한 물로 목을 축인 뒤, 후배 병사가 있는 쪽으로 수통을 내밀었다.
하지만 후배 병사는 수통을 받지 못했다.
“야, 왜 안 받아?”
선배 병사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질겁했다.
우그적. 우그적.
괴물이었다.
어둠 때문에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얼핏 봐도 3미터는 넘어 보였다.
검은 털이 가득한 손으로 병사의 가슴을 단단히 잡아 고정했다.
얼핏 상어처럼 촘촘하고 작은 이빨이 보였다.
후배 병사의 머리를 통째로 입에 넣고 씹고 있었다.
“어어어…… 어어!”
선배 병사는 다급히 옆에 뒀던 검을 찾았다.
공포에 손이 멋대로 떨렸다.
가까스로 검을 집어 들고, 휘둘렀다.
콱!
그러나 괴물은 선배 병사가 휘두른 검을 손쉽게 잡아 버렸다.
후배 병사를 먹다가 말고, 선배 병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괴물은 다시 한번 아가리를 쩍 벌렸다.
우직.
선배 병사의 팔이 파르르 떨렸다.
다리가 뻣뻣하게 펴졌다가, 축 늘어졌다.
괴물은 식사를 마쳤는지 긴 혀를 움직여 입가를 닦았다.
“부족하군요.”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괴물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림자가 괴물의 몸을 감쌌다.
온몸이 쪼그라들더니, 이내 평범한 사람처럼 변했다.
단 하나.
팔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 * *
“흥미롭군.”
단은 시동에게 얻은 정보를 내게 전했다.
팔든 위스크가 손님을 연달아 죽였다는 것.
하지만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죽일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다.
식사 때만 해도 호위가 없었다.
리옐과 발레리아를 인질 삼으려고 시도했을 법도 한데.
“위험한 거 아닙니까?”
“위험한 거 아니다.”
“하지만, 이곳은 적의 소굴인데요.”
“단. 너는 우리 전력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어.”
전직 대마법사에, 검과 마법을 모두 다룰 수 있는 나.
현직 7서클 마도사.
검의 천재와 비슷한 실력의 기사.
동식물을 다루는 신의 아이도 있다.
그나마 평범한 마리나마저 일반인 하나쯤은 너끈히 제압할 수 있다.
시종을 포함해도 전투 불가능한 인물이 하나도 없다.
“아.”
단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더니, 납득했다.
애초에 발레리아가 껴 있는 시점에서, 웬만한 놈들에게 당할 걱정은 없다.
“얘가 좀 맹해도 명색이 마탑준데. 그런 걱정은 실례야.”
“앞부분만 뺐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동향은 어떠냐?”
“마찬가지로 별 움직임 없어요.”
“그래. 내 눈에도 그랬단 말이지.”
이상한 점이라고 해 봐야 대뜸 우리를 초대한 것.
보안이 철저했던 것 정도다.
팔든 위스크에게서 살의는 느낄 수 없었다.
내 눈을 피해 갔다면 두 가지.
정말 살의가 없거나, 대단한 연기자라는 뜻이다.
“새벽에 떠난다고 했으니, 시동의 말이 정말이라면 밤에 뭔가 수작을 걸어올 거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일이 커지더라도, 피하는 것보다는 맞서는 쪽이 나았다.
입막음이나 이상한 집착으로 따라오면 더 귀찮아진다.
“몇 번이나 사람을 죽였다면 아마 어설프게 나오진 않을 거야.”
“그렇다면…….”
“우리 쪽도 준비를 해 둬야지.”
* * *
팔든 위스크는 뒷짐을 진 채 창가를 바라보았다.
어둑어둑한 밤하늘 위에는 그믐달이 걸려 있었다.
한참 동안 먼 곳을 응시하던 팔든이 중얼거렸다.
“주인님께서 오신다. 느낄 수 있어.”
팔든이 등을 돌렸다.
그 표정은 광적인 희열로 가득 차 있었다.
낮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부족했던 공물을 마저 준비해야겠구나.”
철컥.
방에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팔든은 직접 자신의 검을 들고 방을 나섰다.
기사들이 팔든의 뒤를 따랐다.
문 너머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십의 병사가 합류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팔든이 복도를 훑어보았다.
모든 창문은 봉쇄됐다.
정문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이 시종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팔든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방문까지 잠갔다.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지금 이 저택은 완벽한 밀실이나 다름없었다.
이 인원의 눈을 피해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전부 2층에 있겠지?”
“예. 모두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
팔든은 그들을 암살할 생각이 없었다.
자고 있는 이를 깨워서, 완전히 각성한 상태에서 죽일 것이다.
공포에 질린 채 죽은 사람은 각별하다.
팔든은 ‘주인님’의 말씀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 계집들은 생포해라.”
“옙!”
* * *
시동은 문에 바짝 붙어 귀를 대고 있었다.
갑옷 부딪치는 쇳소리와, 이어지는 발소리.
팔든이 병력을 데리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제발……! 기사님……!’
시동은 초조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만한 병력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무기도 없는 상태.
완전무장한 수십의 기사들이 한 번에 덤비면,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도망치셨기를!’
더군다나 일행에는 어린 여아와 젊은 여자도 있었다.
팔든 위스크는 그런 이들을 먼저 인질로 잡는 성향이 있다.
그의 악질적인 면모를 일부 알고 있는 시동은 두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곧 비명이 들려왔다.
“끄아아아아아악!”
시동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기어이 전투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문 앞을 병사가 지키고 서 있어 나갈 수도 없었다.
시동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시동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으아아아악!”
“살려 줘어어어!”
평소였다면 한 번의 단말마로 끝났을 텐데.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폭음까지 들렸다.
쾅!
시동은 희망을 얻고 다시 문 너머의 소리에 집중했다.
허겁지겁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시동이 뒤로 물러나자, 문이 벌컥 열렸다.
시동의 방에 뛰어 들어온 것은 한 기사였다.
팔든 위스크의 측근이었다.
“허억! 허억!”
기사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았다.
문을 등진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창문! 창문 없냐?”
“네? 어, 없습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기사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두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무슨 괴물들이 들어와서……!”
“괴, 괴물들요?”
기사가 시동 쪽으로 눈을 돌렸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시동이 주춤 물러섰다.
기사가 홀린 듯 검을 잡았다.
“그래. 너를 인질로 잡으면!”
기사가 늘 하던 일이었다.
손님 중 가장 높은 사람이나, 약한 여자와 아이를 인질로 잡아 상대를 협박하는 것.
팔든 위스크의 명령하에 했다지만, 기사는 이미 그 방법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자연스럽게 머리가 그쪽으로 돌아간 것이다.
기사가 검을 뽑아 들고 시동에게 다가갔다.
시동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아이를 인질로 잡고 있으면, 살 구멍이 생길 거야.”
“그 주인에 그 부하라고, 아주 지랄을 하시네요.”
“어?”
낯선 목소리에, 기사의 눈이 돌아갔다.
어느새 기사의 옆에는 영애가 서 있었다.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시동은 넋을 놓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 정도로 아름다웠다.
짧은 갈색 머리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조금 걸쭉했지만 말이다.
“어떻게! 이 마녀가!”
기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시동이 소리쳤다.
“위험……!”
“응?”
발레리아의 눈이 돌아갔다.
틈을 노린 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시동이 몸을 던졌지만, 늦었다.
회심의 일격을 날린 기사는 미소를 지었다.
“죽어라!”
“싫은데.”
덥석.
발레리아의 작은 손이 기사의 안면을 잡았다.
그리고 손아귀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소규모 폭발(Small Scale Explosion).
펑!
기사의 검이 쇳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몸뚱이가 옆으로 기울더니, 풀썩 쓰러졌다.
머리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발레리아는 손수건으로 제 손을 닦았다.
“단이 말한 시동이 당신인가요?”
“네? 단 기사님께서…….”
“맞나 보네. 가죠.”
“어, 어딜……?”
“정보 제공자 특혜라고 생각하세요.”
* * *
뒷걸음질 치던 팔든 위스크의 등이 무언가에 부딪쳤다.
문이었다.
잽싸게 문고리를 잡았다.
철컥. 철컥.
열리지 않았다.
그제야 제 명령으로 모든 문이 잠긴 것을 깨달았다.
“젠장. 젠장.”
병사들과 기사들은 전멸한 지 오래였다.
상대가 꽤 수준이 높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눈대중으로 실력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로난 남작과 그 기사는 수준급이었다.
해서 기사를 포함한 병력을 총동원했는 데도, 이 꼴이 났다.
“이 괴물들!”
로난 남작의 일행은 하나같이 전부 괴물들이었다.
팔든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털썩 주저앉은 팔든이 덜덜 떨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것은, 저 남자.
로난 남작이었다.
“왜 당한 건 난데, 항상 내가 악당처럼 구도가 잡히는 건지 모르겠군.”
로난 남작, 지그문트 마이어는 검을 슥슥 닦았다.
마법사는 충분한 시간을 들인 준비만 있다면 무한정으로 강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손 몇 번 까딱한 것으로 병력을 몰살시킬 수 있었다.
예전이었으면 모를까.
지금 전력으로 이 정도는 손쉬운 상대였다.
“그래서, 왜 죽이려고 하는 거냐? 단순히 쾌락을 위해서?”
“주인님께서 오실 거다!”
팔든이 마지막으로 악을 썼다.
“주인님?”
“그래! 우리 주인님께서 너희들을 전부 찢어 죽일 거다!”
“그 주인님이 누군데?”
“오신다! 주인님께서! 오신다!”
팔든의 눈은 광적이었다.
‘불사의 신도보다 더하군.’
지그문트는 이놈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다.
곧 단을 포함한 일행들이 합류했다.
“전부 처리했습니다. 도련님.”
“리옐 님, 아직 눈 뜨지 마세요.”
“으응?”
팔든 위스크가 벌떡 일어났다.
입가에는 환희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오셨다! 주인님께서! 오셨다아아!”
지그문트는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지그문트를 본 단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문이 박살 났다.
콰앙!
먼지가 피어오르며,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밖에 없는 검은 팔에는 누렇고 날카로운 손톱이 나 있다.
긴 주둥이 끝에는 촘촘한 이빨이 있었고, 머리에는 산양의 뿔이 달렸다.
등에는 박쥐의 것과 비슷한 날개가 접혀 있었다.
팔든 위스크가 넙죽 엎드렸다.
그르르르르……
지그문트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지나가던 길고양이라도 본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뭐야, 마족이네.”
팔든 위스크는 당황했다.
마족을 본 사람의 반응은 보통 두 가지로 갈린다.
그 외관만으로도 압도되어 전의를 상실하거나, 패닉에 빠지기 마련이다.
하다못해 뒤에 선 기사처럼 긴장하기라도 한다.
하지만 팔든의 앞에 선 로난 남작, 지그문트 마이어는 아니었다.
마족이라는 단어를 저렇게 가볍게 입에 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연기다! 놈은 겁을 집어먹었지만, 애써 그것을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해!’
마족을 처음 본다면, 저런 반응을 보일 수 없다.
용맹한 기사들도 지레 겁먹고 검을 떨구기 일쑤다.
허세가 분명했다.
“여유 있는 척을!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있느냐?”
“이분이 누구신데?”
“마계의 정점에 있는 고위 마족! 대공이시다!”
“고위 마족에, 대공이라…… 설마 베르제 대공?”
“그렇다!”
“허.”
지그문트가 놀라자, 팔든은 자신이 생겼다.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놀랄 만도 하다.
고위 마족 베르제.
손짓 한 번으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유명한 마족이다.
‘여태껏 직접 나서지 않으시고 공물만 받아 가셨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직접 나설 것이다.
그 증거로, 평소 보여 주던 인간의 모습이 아닌 본신을 드러냈다.
이만큼 든든할 수가 없었다.
“주인님께서 본신을 드러내셨으니, 네놈은 끝이다!”
“그, 그게 본신이라고?”
“그래!”
“그렇군.”
지그문트는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았다.
놀랐던 것이 연기였다는 듯 무심한 눈으로 돌아온다.
한숨을 쉬며 뒤통수를 긁는다.
“너도 참 멍청하구나. 저런 거에 속아서 열심히 공양물이나 바치고 있었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지그문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뇌가 있으면 생각을 해라. 저건 베르제도 아니고, 하물며 고위 마족도 아니다. 베르제의 본신은 저렇게 아담하지 않거든.”
“뭐……!”
“중급. 아니지. 팔 한 짝 없는 걸 보니 잘 쳐줘도 중하급이나 되겠네. 복구하러 왔나 보지?”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마족은 선 채로 굳어 있었다.
처음 호기롭게 등장한 것과 달리, 당황한 눈치였다.
지그문트는 마족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너, 기억났다. 저번에 한 번 본 적 있었지.”
“…….”
“한 100년 전쯤에 이거랑 똑같이 사칭하다가 베르제한테 된통 처맞은 놈. 맞지?”
“네가 그것을 어찌……!”
마족은 크게 당황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족은 과거에도 베르제를 사칭했다.
위명이 자자한 이름을 빌리면 공양물을 쉽게 받을 수 있었다.
흉물스러운 외관에 압도된 인간들은 넙죽 공양물을 바쳤다.
그렇게 득의양양하게 한적한 마을에서 꿀을 빨고 있을 때.
한 번의 실수로 일이 틀어졌다.
‘그 마법사.’
지나가던 한 마법사를 잘못 건드리고, 전부 들통 났다.
한 번 겁을 줬을 뿐인데, 거의 모든 힘을 빼앗기고 처맞았다.
정체가 들통난 건 당연하다.
어떤 수를 썼는지, 마법사는 직접 베르제를 불러오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베르제한테 또 처맞았다.
“네, 네놈 설마!”
지그문트의 정체를 깨달은 마족은 경악했다.
그때, 발레리아가 블링크(Blink)를 사용해 지그문트 뒤에서 나타났다.
한 손에는 뒷덜미를 잡힌 시동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스승님, 저 왔어요.”
“야, 너는 저거 하나 못 잡고 놓치냐?”
지그문트는 다짜고짜 발레리아에게 핀잔을 줬다.
발레리아의 시선이 마족을 향했다.
“저게 뭔데요? 마족 아니에요?”
“마족이지. 네가 저번에 팔 한 짝만 자르고 놓친.”
마족은 질겁했다.
외관이 바뀌어서 몰라봤다.
어린 마법사는 적탑주, 발레리아 로안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잘린 어깨가 욱신거려 왔다.
“아, 저게 그거예요?”
발레리아는 시동을 바닥에 내려 뒀다.
시동은 쪼르르 단의 뒤로 숨었다.
발레리아는 씩씩거리며 마족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마족은 감히 움직이지도 못했다.
저번에 한 번 역량 차이를 느꼈기 때문이다.
“야! 너 때문에 혼났잖아!”
마족은 억울했다.
하지만 변명할 수 없었다.
괜히 입을 열었다간 죽음만 기다릴 뿐이었다.
“주, 주인님?”
팔든은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듯, 애처롭게 마족을 올려다봤다.
슬쩍 팔든의 눈치를 본 마족이 그림자를 소환했다.
‘튀자.’
체면 차릴 때가 아니었다.
적탑주야 한 번 도망친 전적이 있으니 그렇다 쳐도.
예상대로라면, 뒤에 있는 놈은 정말 극악무도한 놈이다.
손속이 잔인하다는 고위 마족 베르제도 그를 앞에 두고는 혀를 내둘렀다.
잡히면 쉽게 죽진 않을 것이다.
‘빌어먹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이냐.’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레온하트 왕국에서 페러시트를 퍼트려 혼란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의외의 복병을 만나 실패했다.
도리어 팔 한 짝만 잃었다.
제국으로 복귀하는 도중, 잃어버린 팔을 재생성하기 위해서 공양물을 먹으러 왔다.
그런데 이 꼴이다.
“어쭈. 또, 또! 은근슬쩍 튀려고.”
발레리아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이그나이트(Ignite).
술식을 구성하던 하나 남은 팔에 돌연 불이 붙었다.
화악!
“끄아아악!”
마족은 팔을 휘두르며 고꾸라졌다.
팔든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위스크 백작이 떠난 뒤, 부귀영화를 제시하며 다가온 마족, 베르제.
그를 믿고 몇 달 동안 살인을 저지르며 공양물을 바쳐 왔다.
그런데, 베르제가 아니라 중하급 마족이란다.
손짓 한 번에 그냥 고꾸라져 버린다.
지그문트와 시선이 마주쳤다.
팔든의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지그문트는 쯧 혀를 찼다.
“불쌍한 척 좀 그만해라. 내 쪽이 착한 역할이라니까?”
* * *
며칠 후.
위스크 백작령에 도착한 발락 리빙데드는 말에서 내렸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발락은 쯧쯧 혀를 찼다.
“어이구, 저 병신 새끼들. 잘 논다.”
위스크 저택의 지붕 끝자락.
그 아래에는 팔든 위스크와 마족이 매달려 있었다.
무슨 수모를 겪었는지, 꼴이 말도 아니다.
대신 서로 뭔가 원한이 있는 듯, 힘없이 투덕거리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발락은 바닥을 굴러다니던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정갈한 글씨체로 팔든의 악행이 적혀 있었다.
마족을 섬기고, 그 공양물로 사람을 죽여 바쳤다는 것.
이미 일은 일파만파 커진 뒤였다.
“젠장.”
발락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선전물을 던졌다.
이게 문제였다.
대량으로 뿌려진 선전물 때문에, 벌써 제국의 수도까지 소문이 돌았다.
황제는 발 빠르게 대처했으나, 완벽히 막을 수는 없었다.
돌연 이런 일이 터질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당연히 여러 목소리가 나왔다.
‘저놈들은 이제 죽은 목숨이군.’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저 둘은 꼬리 자르기를 당할 것이다.
수도에서 공개 처형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 해도 민심이 악화된 건 사실이었다.
다른 종족도 아닌 마족이다.
교국에서는 벌써 경고를 보내오기까지 했다.
“제기라아아알!”
황제는 이 일에 무려 발락이라는 고급 인력을 투입했다.
측근을 보내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겠다는 명목 때문이었다.
물론 발락이 할 일은 사건의 경위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다.
일을 최대한 조용히 덮는 것이었다.
‘어떤 새낀지, 일을 아주 좆같이 만들었어.’
심지어 이 사달을 일으킨 장본인들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어째 증인도 목격자도 없었다.
마치 사람들의 기억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위스크와 마족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짜증이 난 발락은 팔든 위스크와 마족을 구타했다.
둘은 반송장 상태여서, 반항도 하지 못하고 걷어 차였다.
퍽! 퍽! 퍽! 퍽! 퍽!
“이! 병! 신! 들! 아! 아오! 빡 쳐!”
* * *
“레온하트 왕국, 적탑까지 데려가 주십시오.”
마부에게 당부한 단은 마차 창문을 바라보았다.
시동이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런 과분한 호의를 받아도 괜찮나요?”
“괜찮다. 덕분에 일이 쉬워졌거든.”
확신하고 대처하는 것과 의심하고 대처하는 건 큰 차이가 있다.
시동 덕분에 비교적 간단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발레리아가 한마디 거들었다.
시동의 처우를 맡기로 한 것이 발레리아였다.
“당분간 적탑에서 일하게 될 거예요. 괜찮죠?”
“예! 가,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럼 됐어요.”
이윽고 마차가 떠나 갔다.
시동은 마차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끝까지 인사를 했다.
발레리아는 조금 고민하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역시 금화라도 몇 닢 쥐여 주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요?”
“큰돈 가지고 다니면 범죄의 표적이 된다. 은화면 적당해.”
“……저희는 받아들이기 힘든 화폐 개념이군요.”
단은 조금 떨떠름하게 그 둘을 바라보았다.
금화니 은화니 하지만, 둘 다 큰돈이었다.
여비로는 차고 넘칠 것이다.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아직도 낯설었다.
“그러고 보니, 도련님. 마족과 안면도 있으셨습니까?”
“왜. 몇 명 소개시켜 줄까? 고위 마족 중에는 괜찮은 놈들도 있어. 대체로 쓰레기들이지만.”
“제가 괜한 말을 꺼냈군요. 사양하겠습니다.”
* * *
눈보라가 몰아치는 프라우드 산맥 중턱.
어두운 동굴에는 차가운 바람 소리만이 가득했다.
새하얀 늑대 한 마리가 다리를 절뚝이며 동굴 입구로 들어섰다.
워베어와 그 힘이 비슷하다고 취급되는 몬스터, 론 울프였다.
크릉.
론 울프는 귀를 까딱이더니,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은 상당히 거대했다.
이상하게도 벌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동굴이라면 발 빠르게 자리 잡을 만한 포식자는 일절 없었다.
론 울프는 동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다리를 다친 데다가, 후각까지 잃었다.
이 산맥에선 죽음으로 이를 수 있는 치명상이었다.
안전한 장소에 숨어서 회복을 기다려야 했다.
킁킁.
론 울프는 코를 씰룩이며 전진했다.
동굴 입구와는 달리, 안쪽에서는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꼭 거대한 생물의 숨결 같았다.
그러나 론 울프는 그 냄새를 맡지 못했다.
끝내 동굴 끝자락에 다다른 론 울프가 자리를 잡으려고 할 때, 어둠 속에서 거대한 눈동자가 나타났다.
뱀의 눈처럼 세로로 쭉 찢어진, 파충류의 노란 동공.
그것은 론 울프의 몸뚱이와 비슷할 정도로 거대했다.
깽!
놀란 론 울프가 뒤로 물러섰다.
발톱이 저절로 오그라들었다.
워베어나 오거에게도 겁 없이 덤비는 놈이,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이내 어둠 속에서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르르르르…….
그것은 더운 숨결을 토했다.
긴 주둥이와 밤처럼 새까만 색의 비늘.
위엄을 상징하는 머리의 뿔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드래곤.
자연스럽게 뿜어 나오는 위압감에, 부들부들 떨던 론 울프가 거품을 물고 졸도했다.
드래곤은 늑대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동굴 밖으로 나갔다.
쿵. 쿵. 쿵.
동굴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쌓여 있던 눈이 쏟아졌다.
이윽고 드래곤은 동굴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깽! 깨갱!
먹이 냄새를 맡고 모여들었던 몬스터들이 도망쳤다.
넙죽 엎드리거나, 눈 속으로 숨어드는 놈들도 있었다.
완전히 동굴에서 나온 드래곤은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펄럭!
꼬리가 땅바닥을 쓸자, 땅이 흔들렸다.
날개를 움직이자 돌풍이 일어났다.
눈보라에도 버티고 있던 나무가 쓰러져 나갔다.
검은 드래곤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프라우드 산맥에 악룡이 출연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