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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대회
레온하트 왕국에서는 1년에 한 번 검술 대회가 열린다.
왕실이 주최하는 만큼 심사도 공정하고, 그 보상도 상당하다.
자신의 실력을 시험하고 입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 대회를 보기 위해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검술 대회를 계기로 가신 기사가 되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많은 기사들이 출전을 하는데, 그만큼 예선에도 수많은 사람이 참가했다.
“저기, 혹시…….”
“맞네. 저 얼굴, 본 적 있어.”
왕성 외부 연무장에는 예선 심사를 치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이목은 한 인물에게 쏠렸다.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 파울 레드라인이었다.
“계속 그렇게 흘끔거린다면,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눈알을 파내 주지.”
짜증스러운 파울의 한마디에, 사람들은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소드 마스터의 아들, 레드라인가의 망나니.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수없이 많았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이것이었다.
검술의 천재.
요하네스 레드라인의 핏줄을 이어받은 그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요즘에는 지독할 정도로 훈련을 한다던데.”
“쯧. 올해 우승자는 정해졌구먼.”
“제발 나중에 만났으면 좋겠다.”
파울은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대회에는 관심도 없었다.
아버지, 요하네스 레드라인의 강권에 참가하게 됐을 뿐이었다.
나이 제한이 있는 만큼, 파울의 상대는 찾기 어려웠다.
‘죄다 어중이떠중이밖에 없잖아.’
움직임을 보면 대충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적어도 파울이 보기에는 전부 자신의 밑이었다.
더욱 의욕이 떨어졌다.
적당히 눈을 굴리고 있던 파울의 흥미를 잡아끈 것이 있었다.
상당히 큰 편에 속하는 클레이모어 한 자루였다.
‘보통 검이 아니군.’
적어도 명검 반열에 드는 검이었다.
검의 주인도 보통은 아닌 것 같았다.
어쭙잖은 강도의 훈련으로는 만들 수 없는 다부진 몸.
저 클레이모어를 다룰 정도라면 힘도 상당할 것이다.
‘저건…… 괜찮은데.’
한눈에 보기에도 다른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랐다.
심사장에서 처음 찾은, 자신과 엇비슷할 것 같은 상대였다.
파울은 자신이 주목하고 있는 기사, 단이 지그문트의 밑에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둘이 만날 일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한번 겨뤄 보고 싶군.’
파울은 대회에 조금 흥미를 가졌다.
저 기사라면, 분명 위에 올라올 것이다.
자연히 겨뤄 볼 기회가 생기리라.
그 외에도 아는 얼굴이 몇몇 보였지만, 단처럼 기대되지는 않았다.
파울은 따분하다는 듯 하품을 했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파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 * *
‘파울도 왔나.’
나는 얼굴을 감추고 심사장에 참석했다.
꽤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콘셉트 참 재밌게 잘 잡았군.”
“재밌네. 레온하트의 수호자라니.”
“진짜 아니야?”
“설마.”
거의 내 진위를 의심하는 분위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자연스럽게 밝혀질 이야기다.
곧, 예선 심사가 시작됐다.
“정숙!”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심사장을 울렸다.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단숨에 사그라졌다.
붉은 사자가 그려진 갑옷 차림의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레온하트 왕국의 근위 기사였다.
“지금부터 예선 심사 시험 내용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예선은 객기로 참가한 이들을 걸러 내는 과정이었다.
그만큼 심사 방법은 간단했다.
오러를 발현한다.
그 오러를 통해 정해진 물건을 한 번에 베어 내기만 하면 됐다.
심사랄 것도 없는 간단한 일이었다.
“여러분이 한 번에 베어 내야 하는 물건은, 이겁니다.”
“……뭐야?”
“철골?”
근위 기사가 들어 올린 것은 철골이었다.
두께가 꽤 있었지만, 강철 대신 순도가 옅은 연철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저 정도라면 못 벨 것도 없다.
오러가 금지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사용을 권장하고 있으니.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내 예상과 조금 달랐다.
“힘들 것 같은데.”
“저 굵기의 철을 한 번에 베라고? 말이 쉽지.”
“시도하기 전에는 모르는 거야.”
“무리야.”
대체로 비장한 분위기였다.
고개가 절로 기울었다.
근위 기사는 철골을 바닥에 고정시켰다.
곧, 첫 번째로 심사받는 남자가 나섰다.
“후.”
남자는 사뭇 비장한 기색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몇 번 검을 허공에 휘두르더니, 준비가 끝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위 기사가 입을 열었다.
“오러 발현.”
남자의 검에 오러가 나타났다.
검날에 떠도는 기운.
소드 러너의 오러다.
저 정도라면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확인이 끝났는지, 근위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어!”
“하아아압!”
남자는 검을 크게 휘둘렀다.
실전성은 전무한, 엉성한 공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쩌엉!
철골은 잘리지 않았다.
검날은 철골을 파고들긴 했지만, 절반 정도에서 멈추고 말았다.
남자의 실력 부족이었다.
물론 철골의 두께도 한몫했다.
“로날도, 실격!”
가차 없는 실격 선언이 이어졌다.
남자, 레오날도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터덜터덜 심사장을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의외로 쉽지 않은 일이었나 보다.
‘……여태껏 맞붙은 애들이 전부 만만한 놈들은 아니었지.’
내가 기사들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심사가 계속됐고, 절반이 넘는 인원이 떨어져 나갔다.
오러를 아예 발현시키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심사를 이어 나가던 근위 기사는 잠시 멈칫했다.
“파울 레드라인. 심사 시작하겠습니다.”
파울의 차례였다.
계속된 심사에 제 할 일 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압도적인 우승 후보.
주목하는 것도 당연했다.
파울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검을 치켜세웠다.
“오러 발현.”
파울의 검에서 붉은 오러가 피어올랐다.
검날을 감싼 오러는 확실한 형태를 갖췄다.
사람들이 기겁했다.
“미친.”
“저거, 중급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우승은 글렀군.”
소드 익스퍼트 중급.
말도 안 되는 속도의 성장이었다.
왕실 소속의 기사들도 소수만이 도달한다는 경지였다.
더군다나 나처럼 인생 2회 차도 아니다.
‘대단한데.’
나는 솔직히 감탄했다.
재능은 말할 것도 없고, 안 어울리게 근성까지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 성장할 줄은 몰랐다.
아직 완성형은 아닌지, 살짝 오러가 흔들리긴 했다.
파울은 한 손으로 검을 들고 가만히 근위 기사의 신호를 기다렸다.
“베어!”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파울이 검을 휘둘렀다.
힘이 실린 위력적인 베기.
아니, 부수기였다.
쾅!
쇠막대는 완전히 박살 나고 말았다.
반동이 있을 법도 한데, 파울은 느낌도 없다는 얼굴이었다.
한 손으로 부수기.
인상적인 퍼포먼스였다.
감탄한 사람들이 박수까지 쳤다.
“성격은 개차반이지만…… 검술은 확실히, 미쳤어.”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파울 레드라인, 통과!”
심사를 마친 파울이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나와 눈이 마주쳤다.
으레 보내 오던 적개심 가득한 눈총이었다.
이윽고 내 차례가 다가왔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의를 제기했다.
“저거, 저렇게 나와도 되는 겁니까?”
“신원은 밝혀야 할 거 아닙니까! 대리 시험 아니야?”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런 심사에서 자신의 신원을 드러내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근위 기사는 그들을 한 번 쳐다보더니, 내 앞에 철골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님, 심사 시작하겠습니다.”
일순간 항의하던 사람들의 표정이 멍해졌다.
“어?”
“잠깐. 저거 진짜야?”
“무슨, 근위 기사가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실존하는 인물이었어?”
나는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때로는 싫더라도 눈에 띄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가령 지금 같은 상황.
레온하트의 수호자로서, 사람들의 눈에 단단히 각인되어야 할 때.
팔베르크를 비롯한 타국에 얕보이면 안 된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허세 좀 부려야겠군.’
* * *
레온하트의 수호자.
지그문트 마이어는 상당히 독특한 외관의 검을 뽑아 들었다.
이름 없는 검이었다.
간혹가다가 철없는 청년들이 부리던 허세는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경건하게 느껴지는 동작에, 사람들은 침을 삼켰다.
오직 파울만이 그 가증스러움에 치를 떨 뿐이었다.
‘저 자식, 일부러 저러는 건가?’
화려하진 않지만 절도 있었다.
쓸데없는 잡동작 대신, 검을 뽑는 속도를 교묘하게 조절했다.
연극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종일관 같은 말을 반복하던 근위 기사가 한마디 덧붙였다.
“오러는 조절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그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오러를 조절하라니.
대체 어떤 경지에 도달했길래 저런 말까지 한단 말인가.
웅.
푸른 오러가 서서히 검날 위로 나타났다.
그마저도 어쩐지 신비롭게 느껴져, 사람들은 말 한마디 없이 그 광경을 지켜봤다.
오러는 검의 표면 위로 새로운 검의 형상을 덧씌우기에 이르렀다.
그 모습을 보던 한 청년이 중얼거렸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 아니, 최상급……?”
소드 익스퍼트 상급, 혹은 최상급에서 보이는 오러였다.
물론 지그문트는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아직까지 소드 익스퍼트 초급의 끝자락에 불과했다.
그걸 그대로 보여 주면 곤란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팔베르크 제국의 견제 수단 중 하나다.
‘그 전력이 불분명하지만, 강력한 건 확실한 존재’여야만 했다.
그래서 마나를 아주 세밀하게 조절해, 오러 위에 교묘하게 덧씌웠다.
마나를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오러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기가 차군.’
물론 파울처럼 안목이 좋은 사람이나, 경지에 다다른 기사를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를 제외한 심사장의 모든 이들은 이미 넘어간 상태였다.
근위 기사와 말까지 맞췄으니,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지그문트는 이어서 마법까지 사용했다.
피어(Fear).
강대한 기운이 좌중을 압도했다.
파울조차 이를 악물 정도였다.
마치 소설 속의 드래곤을 마주했을 때나 느낄 법한 위압감.
약자의 본능적인 위축.
근위 기사만이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 수 있었다.
“베어.”
마나 번을 통해 신체 능력을 전체적으로 크게 강화한다.
푸쉬까지 사용해 베는 속도를 더했다.
서걱!
지그문트는 섬광과 같이 철골을 베어 냈다.
파울 같은 임팩트 있는 부수기는 아니었다.
심사 내용에 충실한, 깔끔한 베기였다.
목적을 마친 검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지그문트가 자세를 바로 했다.
좌중을 짓누르던 위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푸하.”
“헉, 헉.”
근위 기사는 자세히 살펴볼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님, 완벽한 통과입니다.”
* * *
서풍의 1층.
시몬 밀러가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자네도 들었겠지?”
“무엇을 말입니까?”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검술 대회에 출전했다는 이야기.”
“예. 들었습니다.”
검술 대회 예선 심사에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출연했다.
이 이야기는 평민 귀족을 막론하고 레온하트에서 뜨거운 화젯거리였다.
수호자가 이토록 공개된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시몬 밀러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레온하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동향을 살피러 온다더군.”
“그거 하나 구경하자고 여기까지 오겠습니까?”
“베일에 싸인 영웅을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네.”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가면은 선풍적인 인기를 끈 바가 있다.
목오 사막의 탐험가들처럼, 사람들은 미지에 큰 관심을 보이기 마련이다.
과연 서풍의 1층에는 외지인이 많이 보였다.
옷차림이나 억양을 보면 구분할 수 있다.
‘팔베르크에서도 당연히 움직였겠지.’
시몬의 말처럼 정보만 어느 정도 얻어 갈 것인가.
황제라면 접선이나 암살을 시도할 수도 있다.
대회 도중에도 주변을 경계해야 했다.
내겐 아쉬웠다.
이렇게 많은 수의 기사와 일대일로 붙어 볼 기회가 여태껏 없었기 때문이다.
시몬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자네도 참가하지 그랬나. 자네라면 분명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을 텐데.”
“저를 과대평가하시는군요. 저는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 자네는 알게 모르게 상당히 주목받고 있다네.”
“제가 말입니까?”
“그래. 레드라인의 망나니를 이긴 전적이 있지 않나.”
그건 또 새롭게 안 사실이었다.
지그문트 마이어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은 잦아든 줄 알았는데.
“자네가 건국제 이후로 조용히 있어서 그렇지.”
“여행을 다녀왔거든요.”
“아쉽군. 아쉬워. 눈도장도 찍고, 몸값도 불릴 기회였는데 말이야.”
“저는 눈에 띄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군.”
시몬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시몬의 가문, 밀러는 자작가다.
준귀족에 가까운 대우를 받는 만큼, 성공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나는 시몬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성격은 참 좋단 말이지.’
여러모로 장래가 기대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사람과 금방 친해지면서도, 선은 확실히 지킨다.
인망도 있고, 장사 수완도 괜찮은 것 같다.
결정적 계기만 있다면 크게 성공할 수도 있었다.
“시몬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가?”
“혹시 최근, 둘째 왕자님의 동향을 알고 계신가 싶어서 말입니다.”
“시프 왕자님 말인가? 이렇다 할 정보는 없네.”
시몬 밀러는 뭔가 생각하는 듯 허공을 응시했다.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이상하군. 활발하게 움직이시는 분인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긴 해.”
“감이 좋으시군요.”
시몬 밀러는 감이 좋았다.
상단을 운영하는 만큼,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안목은 조금 떨어지지만, 이 정도라면 합격선이다.
나는 식탁에 몸을 붙이고 시몬에게 가까이 갔다.
“첨언 하나 해도 괜찮겠습니까?”
“자네. 뭔가 알고 있나 보군.”
“예.”
“부탁하네.”
나는 주변을 살폈다.
서풍은 고급 여관이다.
다들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일반 여관처럼 왁자하진 않았다.
대체로 점잖게 대화를 나눴고, 그만큼 조용했다.
이런 공간에서 함부로 꺼낼 정보는 아니었다.
마법으로 시몬 밀러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제한했다.
“둘째 왕자님은 엘비아로 가셨습니다.”
시몬의 눈이 점점 커졌다.
주위를 살피더니, 나를 구석 자리로 데리고 갔다.
마법을 사용해서 별로 의미 없는 행동이긴 했다.
시몬이 속삭였다.
“엘비아? 내가 알고 있는 그 태초의 숲에 사는 엘프들의 나라 맞나?”
“맞습니다.”
“어떻게? 태초의 숲은 인간이 발을 들일 수 없는 금역일 텐데.”
“그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동맹을 맺기 위해서 갔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허무맹랑한 얘기로군. 엘비아와 동맹이라니. 아니, 아닌가?”
시몬은 눈을 감았다.
뭔가 계산하는 듯 입술이 달싹였다.
이건 내 나름대로 시몬을 시험해 본 것이다.
시몬이 내 말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또한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못 믿는다면 거기서 끝이지만.
‘이 기회를 잡는다면, 엄청난 이점을 가져갈 수 있겠지.’
시몬 밀러는 한참 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조용하게 물었다.
“어디서 들은 이야긴가?”
“그건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자네, 무서운 사람이군.”
“그런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혹 협상이 체결될 가능성도 알고 있는가?”
“매우 높습니다.”
시몬 밀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나는 시몬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은 결의에 차 있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군.”
“제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솔직히 제가 말하고도 농담 같은데요.”
“믿는다네.”
나는 조금 감탄했다.
신중하면서, 한편으로는 과감하다.
동시에 가지기 힘든 성격이다.
내가 좋아하는 인물상이기도 했다.
“가기 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자네, 어째서 내게 이런 정보를 넘긴 거지?”
레드라인 후작과 같은 질문이었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이유 없는 호의는 경계해야 했다.
하지만 시몬 밀러는 경계보다 호기심이 강해 보였다.
나는 대답했다.
“……예전에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점이 하나 있죠.”
“깨달은 점?”
“아군은 가까이 둘수록 좋다는 겁니다.”
전생의 나는 고립되어 있었다.
분명 아군이라고 부를 만한 인물은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고립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 결과, 뒤통수를 맞고 죽었다.
“실수는 반복하지 말아야지요.”
괜히 적을 만들 필요는 없다.
아군은 많을수록 좋다.
당연한 얘기지만, 오만했던 나로선 깨닫기 힘든 부분이었다.
시몬은 나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내가 자네의 아군이라면, 자네 또한 내 아군이겠군.”
“그렇습니다.”
“잘 알겠네.”
* * *
시몬 밀러를 보낸 뒤, 나는 검술 대회 대진표를 확인했다.
예선에서 그렇게 떨어져 나갔는데도, 많았다.
레온하트는 유독 기사 지망생이 많은 나라다.
레드라인 후작의 영향이지만, 이렇게 보니 다시 실감이 났다.
‘내 첫 상대는…….’
나는 의외의 이름을 발견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다.
픽 웃음이 나왔다.
얘도 나오는 건가.
오랜만에 보는데, 좀 안됐다.
대회에서 나는 압승을 거둬야 했기 때문이다.
봐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파울은 반대쪽이군.’
의도된 것인지, 파울의 이름은 반대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긴 시작부터 나와 파울이 맞붙는 것도 영 재미가 없다.
주목할 만한 건 역시 단과 파울이었다.
단의 경우, 압승을 거두기 까다로운 상대였다.
이길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단의 무기를 생각하면 또 그렇지 않다.
‘자기 소유의 검을 쓰는 데 허락되어 있었지.’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는 상당히 위력적인 검이다.
시간을 오래 끌면 위험할 수 있다.
그 능력을 단이 제대로 조절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파울의 경우는, 그냥 어려웠다.
‘설마 소드 익스퍼트 중급에 들어섰을 줄은 몰랐는데.’
일전에 나는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기사와 맞붙은 적 있었다.
팔베르크의 기사, 노크.
그때 당시 노크는 실험체 1호, 롭과의 한 차례 전투를 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시야도 제한되어 있었다.
여러모로 노크가 불리했으며, 나는 마법까지 동원했다.
마법을 쓸 수 없는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다.
‘아직 오러가 완전하진 않아 보였지만, 놈이라면 그사이에 완성시킬 수도 있다.’
마법을 쓰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파울과의 승부는 점치기 힘들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도 파울도 상당히 성장했다.
확실한 건, 압승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재밌겠어.’
환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평생 검술에 관심을 가질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막상 파고들어 보니 꽤 재밌었다.
학자 기질 때문일까.
마법의 정점을 찍은 뒤라, 새로운 것을 추구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용의 산맥에 가기 전에 몸 풀기는 확실히 되겠군.’
* * *
며칠 후.
건국제 이후로, 네르갈에 유례없을 정도의 인파가 몰렸다.
대부분 대회를 구경하기 위해서 몰린 관광객들이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당연히 우승자 예측이었다.
“우승은 역시 레드라인이지.”
“망나니 파울 말인가?”
“요즘 술도 끊고 수련에 매진한다더니, 아주 괴물이 됐어.”
“확실히 그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 중급은 유례없을 일이긴 해.”
많은 이름이 거론됐지만, 단연 강력한 우승 후보는 파울이었다.
예선 심사에서 보여 준 퍼포먼스가 강력했기 때문이다.
소드 마스터의 아들인 만큼 인지도도 확실했다.
“역시 결승에서 레온하트의 수호자와 맞붙겠지?”
“그래. 나도 솔직히 그 부분이 제일 궁금해.”
“레드라인 후작님과 동급이라는 소리도 있던데.”
“설마, 그럼 이런 대회에 출전이 금지됐겠지.”
“혼자서 광전사를 제압했다지 않나. 모를 일이야.”
나는 인파 사이에 끼어 있었다.
내 출전은 오후였다.
오전에는 단의 경기가 있었기 때문에, 관람을 하러 가는 중이었다.
어깨 위에는 리옐이, 옆에는 마리나가 있었다.
“단 아저씨 얘기는 아무도 안 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아빠는?”
“나도 비슷하지.”
“그러고 보니, 도련님은 안 나가시나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보면, 얘들은 내가 레온하트의 수호자라는 걸 모른다.
전생도 아는 마당에 못 알려 줄 것도 없었다.
여기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여기가 경기장인가요?”
“더럽게 크네. 증축했다더니, 예산 좀 박았겠어.”
왕성에서 준비를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그 규모가 컸다.
경기장 앞에는 관람객들의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마리나는 긴 줄을 보며 질색했다.
“표를 살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요.”
“괜찮아.”
나는 주머니에서 표 세 장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 줄 앞으로 걸어갔다.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당황했다.
“저 사람 뭐야?”
“관계잔가?”
입장을 막고 있던 기사에게 표를 내밀었다.
표를 확인한 기사의 눈이 커졌다.
“표 확인했습니다. 여기! 특석으로 안내해 드려!”
“특석?”
“그런 게 있었어?”
나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먼저 경기장에 입장했다.
귀족들도 시종을 시켜서 줄을 세운 마당에, 줄도 안 서고 먼저 입장한다.
사람들은 당황과 부러움 섞인 시선을 보내왔다.
레드라인 후작이 따로 준비해 둔 표였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주요 귀족도 가지고 있었다.
시중에도 몇 장 풀리긴 했다.
일반 표보다 가격이 수백 배 비싸서 그렇지.
“가자.”
“저, 저도 가도 괜찮은 걸까요.”
“내 시종이면 이 정도 대우는 받아야지.”
우리는 따로 마련된 특석으로 갔다.
대회 첫 경기라서 그런지, 특석에는 주요 귀족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레드라인 후작도 보였다.
간단하게 눈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았다.
“저기 단 아저씨다!”
“정말이네요. 선전하셨으면 좋겠어요.”
“준결승까지 못 올라가면 해고한다고 했으니까, 알아서 잘할 거야.”
이윽고 일반 관람객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반석은 특석 밑에 있었기에 잘 보였다.
거대한 경기장은 순식간에 채워졌다.
수준 높은 투기 경기나 다름없다.
인기가 많은 것도 당연했다.
더군다나 왕실 공인이니, 불법적인 것도 아니다.
곧, 국왕 파서벌 레온하트가 등장했다.
국왕의 형식적인 연설은 간단하게 끝이 났다.
검술 대회로 들떠 있는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짧게 끝낸 것이다.
이윽고 요하네스 레드라인을 비롯한 왕국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소드 익스퍼트 상급 이상의, 왕국 전력의 주축이 되는 기사들이었다.
“그럼 대회 시작에 앞서, 경기 규정을 설명하겠다.”
진검 승부인 만큼, 룰은 세밀하게 조정되어 있었다.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공격은 피해야 했다.
의도가 불순한 공격의 경우, 심사 의원이 개입해서 경기를 끝낼 수 있다.
시간제한도 걸려 있었다.
시간 안에 상대를 제압하거나, 상대가 항복을 외치면 끝.
제한 시간까지 승부가 안 날 경우, 심사 의원들의 판단하에 승패가 갈린다.
그 외에도 세밀한 규정이 여러 개 있었다.
“부정 심사가 일어날 경우,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 엄벌을 내릴 것이다.”
젊은 인력이 피해를 입는 건 왕국 측에서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적탑의 마법사들과 교국의 사제가 경기장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검술 대회를 시작하겠다!”
댕!
낮은 종소리가 대회의 시작을 알렸다.
레드라인 후작이 뒤로 물러나고, 사회자가 등장했다.
관중이 함성을 질렀다.
대망의 첫 번째 경기가 시작됐다.
* * *
대기실.
단 록벨런은 초조한 듯 허리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지그문트와 함께 기상천외한 모험을 해 왔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 앞에 서는 건 처음이었다.
또한, 검술로 다른 사람과 겨뤄 본 경험도 적었다.
마이어가의 기사들이나, 지그문트 정도가 전부였다.
‘도련님께서 준결승까지는 무조건 올라오라고 하셨는데.’
대기실을 살폈다.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기사들은 제각각이었다.
시종들이 수발을 들고 있는 귀족 자제.
몸 풀기를 하려는 듯 간단한 스트레칭이나 운동을 하고 있는 기사.
심드렁한 눈으로 첫 번째 경기를 관람하는 파울도 있었다.
‘이길 수 있을까?’
전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예선 심사를 통과한 기사들은 모두 쟁쟁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단은 자신의 클레이모어를 만지작거렸다.
검의 힘을 사용한다면 손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나도 성장해야 한다.’
지그문트 마이어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단의 예상대로라면, 머지않아 소드 익스퍼트 중급에 들어설 것이다.
주인보다 약한 기사가 되고 싶진 않았다.
이미 지그문트 마이어는 충분히 강했지만, 검에 있어서는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불가능하지 않아. 할 수 있다.’
소드 익스퍼트 중급.
이미 지그문트의 나이에 그 경지에 들어선 이가 한 명 있었다.
파울 레드라인이었다.
단의 시선을 느낀 파울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
단순히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기도 하는 파울이었다.
애초에 신분 격차가 있으니, 단이 뭐라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파울은 시비를 걸지 않았다.
단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다시 경기장 쪽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내심 긴장했던 단이 한숨을 돌렸다.
캉!
“오!”
“제대로 들어갔군.”
“저건 큰데?”
대기실이 어수선해졌다.
첫 번째 경기의 승패가 갈린 것이다.
덩치 큰 기사가 작은 쪽의 검을 힘으로 찍어 눌렀다.
검을 놓친 기사는 항복을 선언했다.
허무한 감이 조금 있었지만, 호쾌한 승부였다.
‘내 차례.’
두 번째 순서는, 단이었다.
* * *
“단 아저씨다!”
“어. 정말이네요. 상대는 누군가요?”
“스벤 에퍼.”
경기장 내부로 두 명의 기사가 입장했다.
제자리를 두고 내 무릎에 앉아 있던 리옐이 손을 붕붕 흔들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단은 그것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상대는 스벤 에퍼였다.
기사에 대해 잘 모르는 마리나가 물었다.
“어떤 분이신가요?”
“평가를 묻는 거라면, 꽤 괜찮은 기사야. 일단 대회에 몇 없는 소드 익스퍼트 초급이거든.”
스벤 에퍼.
에퍼 가문의 적자로, 레온하트의 젊은 기사 중 꽤 유명한 축에 속하는 이였다.
인성과 실력을 겸비했기에, 응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아마 단과 비슷한 부분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젊은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 초급에 들어, 정체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이길 수 있을까요?”
“붙어 보기 전에는 승패를 알 수 없는 법이지.”
파울과 내 출전이 알려지기 전까지, 스벤은 우승 후보로도 언급되던 기사였다.
재작년과 작년 검술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이다.
이렇다 할 특징은 없지만 안정적인 검술을 구사한다.
단점도 장점도 없어, 오히려 상대하기 까다로운 기사로 손꼽히기도 했다.
“스벤 에퍼가 벌써 나왔군. 다른 쪽은 누구지?”
“단 록벨런? 처음 듣는 이름이군.”
“나도 마찬가지야. 가신 기사 같은데.”
“스벤이 이기겠지. 수호자나 레드라인의 망나니가 상대라면 또 모르겠지만.”
“동감일세.”
밑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이런 경기는 승패를 점치면서 보는 것이 재밌다.
하지만 리옐은 영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볼을 복어처럼 부풀리고 내 배에 등을 문댔다.
“아닌데. 단 아저씨가 이길 텐데.”
* * *
“양측, 준비됐습니까?”
“예.”
“준비됐습니다.”
경기장.
사회자의 물음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선 스벤과 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다 할 지형지물이 없이 평평한 경기장이다.
완전히 검술을 이용한 진검 승부.
단은 땀으로 흥건한 손을 쥐었다 폈다.
반면에 스벤은 대회 참가 전적이 있는 만큼,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럼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댕-!
사회자의 말에 맞춰, 종이 울렸다.
스벤과 단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단은 스벤의 눈을 주시하며 클레이모어를 치켜세웠다.
수비적인 검술을 구사하는 것이 특징인 단이다.
방어하면서 상대의 실력이나 검술을 가늠할 생각이었다.
“흡!”
스벤의 생각은 달랐다.
선공을 가져간 쪽이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
단이 자세를 잡는 사이, 빠르게 달려들었다.
방심했다면 당황해서 막을 수 없는 공격.
챙!
나름대로 허를 찌른 것인데, 스벤의 공격은 허무하게 막혔다.
그러자 당황한 것은 스벤이었다.
단이 너무 간단한 움직임만으로 기습을 막아 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손목을 타고 어깨까지 느껴지는 찌르르한 감각.
견고한 성벽을 찌른 듯한 느낌이었다.
‘무슨 사람이……!’
단은 흔들리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다시 와 보라는 듯, 방어 자세를 취할 뿐이었다.
스벤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수비만 해선 이길 수 없다.
“하압!”
단의 무기는 클레이모어다.
무거운 양손 검인만큼, 속도 면에서는 스벤이 유리했다.
힘이 실린 일격을 허용해선 안 된다.
쉴 새 없이 몰아쳐야 했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스벤이 공격을 퍼부었다.
챙! 챙! 챙!
빠른 연속 공격.
클레이모어로 대응하기 힘들도록, 일부러 검로를 뒤틀었다.
그러나 단은 아주 간단하게 그것을 막아 냈다.
심지어 발을 지면에서 한 번도 떼지 않았다.
“뭐야, 저거?”
“움직이지도 않잖아.”
“근데 다 막히는데?”
최소한의 동작으로 공격을 전부 막아 낸다.
스벤의 압승을 예상했던 관람객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가장 당황한 것은 단이었다.
단은 스벤의 공격을 원천봉쇄하면서 생각했다.
‘너무…… 약한데?’
검로가 뻔했다.
동작이 이어지자, 점점 자세가 무너졌다.
검에 힘이 실리지 않을 때도 간간이 있었다.
‘도련님에 비하면.’
단은 잦은 대련으로 지그문트 마이어의 검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허를 찌르는 까다로운 검로.
반격을 허용하지 않는 연속된 공격.
공격 한 번 한 번이 승부수인, 말도 안 되는 검.
지그문트를 생각하면, 스벤의 검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단순했다.
‘틈이 너무 많잖아.’
단의 특기는 수비와 반격.
하루 종일 지그문트의 허점을 파고들 궁리를 하던 단이다.
그래도 허점을 찾지 못해서, 자신에게 안목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스벤의 동작에선 치명적인 허점이 너무 많이 보였다.
단은 방심하지 않았다.
지그문트는 가끔 일부러 틈을 보여 준 뒤, 그것을 역이용하곤 했다.
‘지금.’
수비를 이어 나가던 단이 무릎을 살짝 굽혔다.
시험 삼아 한번 가볍게 반격해 볼 생각이었다.
스릉!
클레이모어에 단의 손목을 노리고 들어온 스벤의 검이 막혔다.
밀치거나 튕겨 내지는 않았다.
정중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가볍게 밀어냈다.
지그문트처럼 수비가 허술해진 틈을 공격해 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했던 스벤의 눈이 커졌다.
“어……?”
“여기.”
단은 무서운 속도로 클레이모어를 휘둘렀다.
지그문트를 상대하기 위해선 당연했던 속도.
그러나 관람객들이 보기엔 아니었다.
한 자리에 기둥처럼 서서 방어만 하던 단이다.
검을 잘 모르는 이들은 스벤의 승리를 점쳤다.
어쨌거나 단은 수세에 몰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이 돌연 무서운 속도로 틈을 파고들어 반격을 시도한 것이다.
붕!
단의 클레이모어는 스벤의 목 끝에서 멈췄다.
스벤은 방어를 시도했지만, 검을 쥔 손은 어정쩡한 위치에서 멈췄다.
반격의 여지는 없었다.
레드라인 후작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종이 울렸다.
승패가 갈렸다.
댕-!
움직이지도 않고 이겼다.
시종일관 방어만 하다가, 단 한 수로 역전한 것이다.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는 퍼포먼스였다.
관람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아아!”
“휘익!”
“와아아아아아!”
“멋지다!”
단은 얼떨떨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다.
너무 손쉬운 승리였다.
단은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주변에 지그문트라는 말도 안 되는 괴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은 알게 모르게 굉장한 성장을 거듭했다.
대련 상대가 항상 지그문트였어서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다.
검을 내린 스벤이 고개를 저었다.
“대단하군.”
“예? 아, 과찬이십니다.”
“아니. 내 완패야. 이름이 뭐라고 했지?”
“단. 단 록벨런입니다.”
“기억해 두지.”
스벤이 악수를 청했다.
놀란 단은 허리를 숙이며 악수를 받았다.
훈훈한 광경에, 사람들이 환호를 더했다.
단을 휘하에 들이기 위해, 소속을 알아보라고 지시하는 귀족도 있었다.
* * *
지그문트에게 미리 표를 받았던 단이 특석에 들어섰다.
마리나와 리옐이 단을 반겼다.
“잘하셨어요!”
“난 단 아저씨가 이길 줄 알았는데.”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단은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빈자리에 앉았다.
내심 기분이 좋았다.
특석에 들어오며 왕실 기사가 소속을 묻기도 했다.
단은 마음을 다시 잡았다.
한 번 이겼다고 오만해지면 안 됐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은 어마어마한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그문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리나, 도련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도련님이라면 내려가셨어요. 대회에 출전하신 것 같던데요?”
“예? 도련님의 성함은 대진표에 없었는데.”
단과 마리나가 의문에 찬 시선을 주고받았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둘은 경기장을 내려다봤다.
“우와아아아아!”
“저거, 진짜지?”
“국왕 폐하가 진짜라고 하셨는데, 진짜겠지 그럼!”
환호성과 함께 누군가 등장했다.
백발에, 하얀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남자.
말로만 전해 듣던 레온하트의 수호자였다.
관람석이 유례없을 정도로 들끓었다.
튀긴 옥수수를 꿀꺽 삼킨 리옐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 아빠 나왔다.”
* * *
나는 경기장에 서서 관람석을 둘러보았다.
수천 명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유심히 나를 살피는 사람도 몇몇 있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의 전력을 파악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저기 있군.’
특석의 리옐과 눈이 마주쳤다.
리옐이 뭐라 소리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입 모양으로 볼 때 ‘아빠 힘내!’라고 한 것 같았다.
리옐의 응원대로 힘 좀 쓸 생각이었다.
퍼포먼스는 중요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그 상대는!”
사회자가 소개를 이어 나갔다.
맞은편에서 한 청년이 걸어 나왔다.
익숙한 금발에, 오만함이 묻어나는 발걸음.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찬 재수 없는 얼굴.
“루이스 마이어!”
동생, 루이스 마이어였다.
환생한 후로 잠깐 보고 처음이었다.
마리나에게 찝쩍거리다가, 내게 한 번 된통 당한 전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루이스는 나를 슬슬 피해 다녔다.
굳이 찾아갈 이유는 없었기에, 마주치지 않았다.
라스 대신 영지를 맡았다고 들었는데.
검술 대회 기간에 잠깐 올라온 모양이었다.
‘일부러 붙인 건가?’
대진표에는 레드라인 후작이 관여했을 것이다.
어쩌면 같은 라스의 아들이기에, 루이스에게도 기대를 걸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루이스는 전형적인, 철없는 귀족 자제였다.
루이스는 예의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님과 겨루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 이제는 존댓말 하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다.
그럼 다시 기억이 나게 해 줘야지.
사회자가 말을 끊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님은 오러의 수준을 소드 익스퍼트 초급으로 제한합니다!”
관람석이 웅성거렸다.
수호자의 수준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조정이었다.
이미 합의가 끝난 후였기 때문에, 심사 측에서도 이의는 나오지 않았다.
“양측 준비됐습니까?”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 자루에 손을 올렸다.
나는 눈대중으로 대충 루이스의 실력을 가늠했다.
경지는 소드 러너.
성장은 하지 않았다.
나는 툭툭 경기장 바닥을 발로 두드렸다.
강도는 나쁘지 않았다.
“그럼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댕-!
종이 울렸다.
* * *
루이스 마이어는 이길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전설적인 존재다.
소드 마스터라는 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그 첫 상대가 된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여겼다.
‘첫 출전인 만큼, 이목이 쏠려 있다.’
관람석을 슥 훑어보았다.
귀족 영애들의 눈에 들 수 있는 기회였다.
수호자와의 치열한 공방 끝에 패배한다.
그것만으로도 꽤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혹시 몰라. 이길지도?’
더군다나 상대는 오러를 제한했다.
소드 익스퍼트 초급의 기사와 겨뤄 본 적 없는 루이스다.
승산이 있다고 판단을 했다.
정작 루이스의 실력은 지그문트는커녕 마이어가의 가신 기사에도 못 미쳤다.
‘운 좋게 이긴다면, 흐흐…….’
루이스는 승리를 거머쥐고 명성이 드높아지는 상상에 빠졌다.
콧대 높은 귀족 영애들의 구애.
기사들의 존경 어린 시선.
귀족들의 주목.
모든 것을 한 번에 얻을 기회였다.
‘그냥 한 번 질러 봐야지.’
고개를 저어 사념을 떨쳐 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번 질러 볼 생각이었다.
살생을 염두에 둔 공격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알 바 아니었다.
댕-!
종이 울렸다.
루이스는 곧바로 검 자루를 쥔 손에 힘을 줬다.
검을 뽑아, 바로 내지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루이스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철컥.
검집에 뭐가 걸린 듯, 검을 뽑을 수 없었다.
시작과 동시에 루이스의 앞으로 튀어나온 지그문트가 검 자루 끝을 눌렀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인식도 할 수 없는 속도였다.
검을 뽑는 것부터 막혔다.
지그문트는 루이스의 턱 밑에 손을 올렸다.
발끝이 루이스의 발목에 걸렸다.
“어?”
턱을 밀린 루이스의 상체가 뒤로 넘어갔다.
뒤에서부터 걸린 발은 앞으로 올라갔다.
순간적으로 루이스의 몸이 공중에서 수평으로 뜬 것처럼 보였다.
쿵!
“끄악!”
루이스의 뒤통수와 등이 경기장 바닥에 충돌했다.
예상치 못한 고통에 비명이 절로 나왔다.
루이스의 눈앞으로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왔다.
신발의 밑창이었다.
쾅!
지그문트의 발이 루이스의 귀를 스쳤다.
큰 소리에 놀란 루이스가 질겁하며 몸을 움츠렸다.
전의를 가진 사람의 자세는 아니었다.
심사 의원들은 서로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댕!
종이 쳤다.
승패가 갈렸다.
최단 시간.
검술 대회임에도 불구하고 둘 모두 검을 뽑지 않았다.
여러모로 전무후무한 경기였다.
“우와아아아!”
“뭐야?”
“몰라! 난 보지도 못했어!”
그제야 상황을 인지한 관객들이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질렀다.
결과는 예상했지만, 이런 퍼포먼스를 보여 줄 줄은 몰랐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강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어? 어?”
진한 기시감에 휩싸인 루이스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검을 뽑으려는 것을 제지당한 뒤, 턱을 밀려 제압당한 것.
분명 언젠가 있었던 일이었다.
지그문트는 루이스를 일으켜 주기 위해서 손을 내밀었다.
‘그래. 저택에서 지그문트 그놈이……’
기시감의 정체를 기억해 낸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를 자세히 살폈다.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머리색은 백발이었고, 체형도 지그문트와는 달랐다.
심지어 목소리까지 차이가 심했다.
‘설마.’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전설처럼 전해지던 인물이다.
그런 수호자가 얼간이에 가까운 형, 지그문트와 동일 인물일 리 없었다.
손을 잡고 일어났다.
지그문트는 잠시 보이스 체인지(Voice Change)를 해제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 모르냐?”
“어, 너? 허억!”
루이스의 눈이 커졌다.
손가락으로 지그문트를 가리키며, 덜덜 떤다.
지그문트는 루이스를 독려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관객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유유히 퇴장했다.
홀로 남은 루이스만이 눈을 크게 뜬 채 경기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관객들이 수군거렸다.
“왜 저래?”
“처발리고 충격 먹었나 보지.”
* * *
“나 왔다.”
특석으로 돌아온 나는 자리에 앉았다.
단이 싸웠던 것처럼 조금 허무하게 끝난 감이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루이스 같은 뭣도 아닌 놈을 상대로는 화려한 연출도 불가능했다.
단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도련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응. 맞아.”
“아직 질문도 안 했습니다만.”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혹시 나 아니냐고 물어볼 거 아니었어?”
“그건…… 맞습니다.”
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왕성에서 터진 사건을 막은 것도 도련님이십니까?”
“어.”
“이번에 일어났다는 개혁도…….”
“내가 좀 거들었지.”
“마리나, 혹시 알고 있었습니까?”
“그러려니 해야죠.”
마리나는 가지런히 앉은 채 웃었다.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 얼굴이었다.
“전 이제 도련님이 드래곤과 친구라고 해도 믿을 거예요.”
“조만간 만나러 갈 거야.”
“제가 말을 말죠.”
진짠데.
나는 경기장을 내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자.”
“더 안 보십니까?”
“우리 순서 끝났잖아. 다음 차례는 내일이나 돌아올 텐데.”
“특석 표값이 어마어마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깝습니다.”
“그거 레드라인 후작한테 공짜로 받았어.”
“아, 그렇군요. 예? 레드라인?”
대회는 앞으로 저녁까지 이어질 예정이었다.
그때까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검술 연구라도 할까 했는데, 그러기에는 수준이 너무 낮았다.
“볼 거면 더 보든가.”
“난 아빠 따라갈래!”
“모시겠습니다.”
“……갑니다!”
* * *
파울은 가볍게 승리를 거머쥐고 대기실에서 빠져나왔다.
상대는 소드 유저의 기사였는데, 한 방에 검이 부서져서 항복했다.
더 구경할 마음은 없었다.
단이라는 이름의 기사와 지그문트를 제외하면 볼 것도 없었다.
그럴 시간에 오러를 안정시키는 게 나았다.
‘이번에는 이긴다.’
뜬금없는 곳에서 결투할 기회가 찾아왔다.
설욕전만 오매불망 기다리던 파울이다.
방심하다가 두 번이나 패배한 만큼, 철저하게 준비해야 했다.
‘그 괴물 같은 놈이라면 분명 더 강해졌을 게 분명하니.’
파울은 지그문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경험이 있었다.
패배의 굴욕감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한동안 사그라졌던 지그문트에 대한 투쟁심이 불타올랐다.
“거기, 공자. 잠깐 서 주시겠습니까?”
누군가 뒤에서 파울을 불렀다.
파울은 인상을 찡그렸다.
기분이 단숨에 나빠졌다.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골목,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서 있었다.
“대놓고 수상하게 생겼군.”
“힘을 원하십니까?”
“대사도 더럽게 수상해.”
“강해지고 싶지 않으십니까?”
“나는 충분히 강하다.”
“강함에 충분하다는 말만큼 어울리지 않는 것이 또 있을까요.”
괴한이 킬킬 웃었다.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파울은 그의 목을 쳐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검술 대회의 출전 자격이 취소되면 곤란했다.
대신 검 자루에 손을 올리고 위협했다.
“개수작 부릴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저는 사소한 도움을 드리려는 것뿐입니다.”
괴한은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파울의 눈썹이 까딱였다.
알싸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맴돌았다.
“영약입니다. 단순히 복용한 것만으로도 수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귀한 물건이죠.”
“개소리를 길게도 하는군.”
“믿음이 없으셔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당신이 이것을 먹는다면…… 레온하트의 수호자도 쉽게 이길 수 있을 텐데요.”
파울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괴한은 조금씩 드리우는 땅거미처럼 파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파울의 시선이 영약에 집중됐다.
“어떻습니까?”
“사람 홀리는 재주가 있군. 솔직히 솔깃했어.”
파울은 지그문트만큼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턱없이 약한 데도 불구하고 결투를 신청했다.
전투 중에 본 검술을 따라 하는 기예를 보이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훌쩍 성장했다.
현재의 실력은 미지수였다.
“근데 말이야. 다시 생각해 보니까, 좆 같네?”
“예? 지금 뭐라고…….”
“지금 나를 레온하트의 수호자 밑이라고 확정 짓고 지껄이고 있잖아.”
파울은 검을 뽑았다.
지그문트를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편법은 아니었다.
“너, 오른팔 잡이냐 왼팔 잡이냐?”
“그건 왜 물으십니까?”
“자주 쓰는 쪽을 자르려고. 대회 실격은 싫으니, 목은 봐 주지.”
“농담이 과하시군요.”
“내가 지금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냐?”
파울이 으르렁거렸다.
검날 위로 오러가 일렁거렸다.
괴한은 혀를 차며 뒤로 물러섰다.
소란이 일어날 만한 분쟁은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파울은 무서운 기세로 땅을 박찼다.
괴한이 팔을 뻗은 건 그와 거의 같은 타이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