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가문의 대마법사 5권
글쓰냐 퓨전 판타지 장편소설
목차
위로 (2)
검술 대회
메인 매치
빵 두 조각
프라우드의 악룡
청동 협곡의 드워프
악몽의 끝
1
위로 (2)
소드 마스터(Sword Master).
검과 오러를 완벽하게 다루는 기사.
서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것이 소드 마스터다.
레온하트 왕국에는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 한 명이 전부다.
그 정도로 드물고, 오르기 힘든 경지다.
“자네, 파울을 잘못 말한 건 아니겠지?”
“건방지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후작님과 겨뤄 보고 싶습니다.”
“결투 신청인가?”
“설마요, 대련 요청입니다.”
내 경지는 소드 익스퍼트 초급.
소드 마스터와는 큰 격차가 있다.
소드 익스퍼트는 초급, 중급, 상급, 최상급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4단계나 차이나는 것이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벽이 견고해지는 걸 생각하면, 그 이상이다.
“미리 말해 두는데, 제대로 한다면 한 수도 버티지 못할 걸세.”
후작은 단언했다.
한 수도 버티지 못한다.
오만 같은 것이 아닌, 사실이었다.
소드 마스터의 한 수는 대단한 의미를 가진다.
왜 전쟁에서 소드 마스터를 전략 병기처럼 활용하겠는가.
그만큼 소드 마스터는 강했다.
어쩌면 목오 사막의 던전에 있던, 내 기억보다 더.
“알고 있습니다.”
“알고도 대련을 원하는 건가?”
“예.”
“왜지?”
“정말로 강한 기사와 검을 맞대보고 싶습니다.”
강한 기사와 겨뤄 본 경험은 수없이 많다.
전생에 나는 그만큼 많은 전투를 경험했다.
하지만, 크게 다가오진 않았다.
기사보다 내가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나는 검에 관심이 없었기에, 연구하지도 않았다.
‘검과 검으로 부딪치면 느낌이 다를 테고.’
내 성장에 더딘 이유는 검이었다.
오러의 수준만 올라간다면, 마나 서클을 만드는 건 쉬웠다.
7서클, 8서클부터는 조금 공을 들여야겠지만.
지금은 오러를 늘리는 것이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기사와 검을 맞댄 경험이 그리 많지 않다.’
노크와 검을 부딪쳐 보고 깨달았다.
위로 올라가기 위한 단서.
조금만 더 가면 실마리가 잡힐 것 같은데.
잡힐 듯 잡히지 않아 결국 놓치고 말았다.
‘뭔가 느끼는 것이 있을 터.’
비슷한 수준이 아닌, 아예 높은 경지의 검을 제대로 보고 싶었다.
보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몸으로 받아 보고 싶었다.
내 생각을 이야기해 주자, 레드라인 후작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로군.”
“그런 소리 좀 들었습니다.”
“하긴, 이렇게 무모하니 단시간에 소드 익스퍼트 초급에 오른 거겠지.”
“저는 검에 대한 재능이 없습니다. 경험 한 번이 중요합니다.”
고민하던 레드라인 후작은 결국 승낙을 표했다.
* * *
레드라인가의 시종들은 떠들썩했다.
파울의 유일무이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지그문트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용무는 파울이 아닌 요하네스 후작에게 있는 듯했지만.
그래도 파울의 지인이 두 번씩이나 저택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꽤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가주님과도 안면이 있었나 보군.”
“가주님께서 지그문트 님을 아시지 않았나.”
“아, 그건 그러네.”
“듣자 하니 지그문트 님을 제자로 들이려 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제안을 받았다면, 당연히 제자로 들어오지 않았겠나.”
“설마 소드 마스터의 가르침을 마다할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야.”
시종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그문트가 후작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기껏해야 라스 마이어 정도였다.
응접실 문이 열렸다.
지그문트와 라스가 밖으로 나왔다.
그것을 몰래 지켜보던 시종들이 웅성거렸다.
“무슨 일이지?”
“검을 차고 있는데?”
“혹시 그건가? 내 아들은 못 주네! 그런 거 아니야?”
“그건 또 뭔 개소리야?”
“지그문트 님이 직접 그랬거든. 파울 도련님과 복잡한 사이라고.”
“리에이트시여.”
아닌 게 아니라, 둘은 정말 연무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종들은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 복도 창가로 향했다.
일을 슬그머니 미뤄 둔 지 오래였다.
“어?”
“어디 가셨지?”
“뭐야.”
시종들은 당황했다.
분명 지그문트와 요하네스 후작은 연무장으로 갔다.
하지만 창문 너머의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다.
연무장을 통해서 어디로 이동한 걸까.
“그럼 그렇지. 아무리 지그문트 님이라도, 가주님과 연무장에 서는 건 말이 안 돼.”
“아쉽네. 가르침을 받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시종들은 저마다 한마디씩하며 해산했다.
그 모습을 창문 너머의 지그문트가 유심히 바라보았다.
* * *
“왜 그러나?”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유쾌한 건 좋지만,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시종들이다.
지그문트라는 존재는 아직 레온하트 왕국에서 미미하다.
내가 그렇게 의도했다.
파울 레드라인을 이긴 것 외에는 크게 유명세를 떨칠 일을 피했다.
설령 그럴 일이 있다면, 레온하트의 수호자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활동했다.
일부러였다.
‘마나와 오러를 동시에 쓰는 마법사 겸 검사.’
너무 특징적이다.
서대륙 전 역사를 통틀어서 전무후무한 사례였다.
팔베르크 제국 측은 계획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을 터.
내 특징을 정확히 짚어 냈다면, 쉽게 발각될지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내 정보는 최대한 숨기고 싶어서.’
나는 창문에 걸어 뒀던 일루전(Illusion)을 제거했다.
시종들의 눈에는 텅 빈 연무장으로 보였을 것이다.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요하네스 레드라인은 연무장에 배치되어 있던 연습용 롱소드를 잡았다.
“자네는 그 검으로 할 생각인가?”
“예. 몇 번 썼더니 완전히 익숙해져서 말입니다.”
내 손에 들린 이름 없는 검을 유심히 본다.
“보물전에서 받았다는 검인가 보군. 특이하게 생겼어.”
“부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걱정 말게. ‘검을 부수는 검’은 사용하지 않을 걸세.”
레드라인 후작은 내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소드 마스터의 검을 보고 싶었다.
오러를 담은 제대로 된 검격이면 충분했다.
애초에 레드라인 후작이 전력으로 나오면 내가 못 버틴다.
‘마법은…….’
마나 번(Mana Burn)을 비롯한 강화 마법을 사용하려다가, 멈췄다.
목오의 신격을 받아들이며 골격이나 신체 구조가 변화한 것이 떠올랐다.
겸사겸사 성능 테스트도 하면 될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말한다면 그만두지.”
“괜찮습니다. 한 번 정도는 버틸 자신 있으니까요.”
“숨겨 둔 수가 있다는 건가. 어디 한번 보지.”
레드라인 후작이 말을 마친 뒤, 내가 인식하기도 어려운 짧은 순간.
돌연 내 목 앞에 롱소드가 나타났다.
검날이 공기를 자르며 내 목을 향해 가까워진다.
‘미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휘두른 것이다.
물러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롱소드가 턱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레드라인 후작은 흥미로운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이 정도는 피하는군. 좋은 반사 신경이야. 속도를 조금 더 높이지.”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니 검이 코앞에 와 있었다.
동체 시력이 따라가질 못했다.
준비 동작이나 어깨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름 없는 검을 세로로 세워 막았다.
그러나.
쩌엉!
검과 검이 맞부딪친 순간, 느꼈다.
이건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공격이 아니라는 것을.
무기의 차이고 뭐고, 그냥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밀려나지 않기 위해 땅을 딛고 있던 발이 공중에 떠올랐다.
나는 후작이 검을 휘두른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콰앙!
연무장 벽면에 부딪힌 뒤에야 멈출 수 있었다.
부딪칠 걸 알았기에,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마나를 활성화시켜 호흡을 가다듬었다.
“미친.”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과거에 나와 싸우던 마법사들이 이런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벽이나 산이 아닌, 하늘과 같은 느낌.
경외심과 무력감.
‘저걸 넘어서야 한다니.’
까마득한 높이였다.
힘, 속도, 기술.
그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부터 너무 큰 차이가 났다.
나는 이름 없는 검을 움켜쥐었다.
적어도 지금은, 마나를 쓴다 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한 번만 더.’
고개를 들었다.
레드라인 후작은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왼쪽!’
침착하게 경로를 계산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레드라인의 검술, 검을 부수는 검.
후작의 롱소드와 이름 없는 검이 충돌했다.
콰앙!
손목이 저렸다.
레드라인 후작의 검은 훈련용 롱소드.
검을 부수는 검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유감일세. 회심의 일격이었을 텐데.”
눈이 커졌다.
후작의 검은 부서지지 않았다.
심지어 오러마저 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했다.
검을 부수는 검은 제대로 들어갔다.
연습용 롱소드 정도는 가볍게 부술 수 있을 텐데.
“파울의 것을 보고 사용해서 그런지, 깊이가 얕아.”
레드라인 후작은 발로 이름 없는 검의 칼자루 끝을 올려 찼다.
단단히 쥐고 있던 검은 허무하게 내 손을 빠져나갔다.
검이 저만치 날아갔다.
텅그렁,
목에 롱소드가 들어왔다.
나는 양손을 들었다.
완패였다.
“졌습니다.”
“꽤 인상적이었네.”
“인상적이긴요. 부족했지요.”
검을 보기는커녕, 방어만 하다가 간단하게 제압당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무력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소득이 있었다.
‘얼핏 봤다.’
레드라인 후작의 움직임.
겉보기에는 그냥 깔끔한 동작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저 깔끔한 게 아니라, 완성된 동작이라는 것을.
‘저걸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드냐가 관건이겠군.’
많은 경험과 타고난 감각, 그리고 연습의 산물일 것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레드라인 후작의 동작을 되새겼다.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뭔가 깨달은 것이 있나 보군. 이만 가 보게나.”
“감사합니다.”
레드라인 후작은 고맙게도 나를 배려해 줬다.
깨달음을 얻은 걸 간파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준 것이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레드라인가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 * *
요하네스 레드라인은 연무장을 빠져나가는 지그문트를 바라보았다.
뭐라 중얼거리면서, 시험하듯 가상의 검을 허공에 휘두르고 있었다.
‘도대체 저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레드라인 후작은 매우 놀란 상태였다.
지그문트는 소드 익스퍼트 초급의 기사다.
이제 막 기사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애송이에 불과했다.
‘당황이나 긴장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기사의 정점에 가까운 소드 마스터의 검을 몇 번이나 피하고 막았다.
아무리 힘 조절을 했다고 한들, 후작의 상식선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실력은 이미 소드 익스퍼트 초급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실제로 후작은 잠깐의 공방 속에서 지그문트의 눈을 몇 번 보았다.
‘백전노장이라고 해도 믿겠군.’
수백 번의 역경을 경험한, 깊고 냉정한 눈이었다.
지그문트는 검을 제대로 잡은 지 채 몇 달도 되지 않은 기사다.
후작은 조금 소름이 돋았다.
롱소드를 쥔 손에 힘을 뺐다.
그러자.
쩌억!
롱소드의 날에 금이 나타났다.
후작은 롱소드의 끝으로 연무장 바닥을 툭 건드렸다.
금이 점점 벌어지더니, 이내 연습용 롱소드는 완전히 부서졌다.
검날은 완전히 조각나 바닥에 떨어지고, 검 자루만 남았다.
“검에 대한 재능이 없다라.”
지그문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조렸다.
겸손이 아닌,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후작은 헛웃음을 흘리며 검 자루를 떨어트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헛소리.”
* * *
이른 아침.
단 록벨런은 여느 때처럼 서풍의 안뜰로 향했다.
체력 단련을 위해서였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안뜰은 대체로 비어 있다.
단은 조용한 곳에서 홀로 운동하는 것을 즐겼다.
“흠?”
그런데 웬일인지, 선객이 있었다.
안뜰 중앙에 우두커니 선 금발의 청년.
지그문트 마이어였다.
말을 걸려던 단은 멈칫했다.
지그문트는 단이 왔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집중하고 계시군.’
단은 지그문트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구석으로 갔다.
훈련은 잠시 미뤄 두고 구경할 심산이었다.
지그문트는 검을 앞으로 뻗고 가만히 멈춰 있었다.
그 검 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허.’
단은 내심 감탄했다.
완전한 부동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적잖은 집중과 힘이 필요한 일이다.
팔을 뻗고 있으면 조금이나마 흔들리기 마련이다.
하물며 무거운 검까지 들고 있다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지그문트는 몇 분이 넘도록 그 자세를 유지했다.
‘뭘 하고 계신 거지?’
단은 움직일 수 없었다.
깊이 몰두한 지그문트에게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저 가만히 선 지그문트를 바라보길 수십 분.
“후.”
지그문트 마이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허리를 틀어 자세를 취한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마이어가의 검술이군.’
완전히 기본에 충실했다.
검술의 교과서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어서 검을 휘두르는 것도 경이로울 정도로 정교했다.
가문의 기사들이 이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지그문트는 그에 그치지 않고 연달아 자세를 바꿨다.
자로 잰 듯한 완벽한 동작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지그문트가 멈췄다.
‘뭐지?’
검무를 보듯 푹 빠져 있던 단이 정신을 차렸다.
지그문트는 다시 첫 번째 기본자세를 취했다.
한 발을 앞에 두고, 검 끝을 위로 비스듬히 세운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돌연, 자세가 무너졌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힘이 빠진 느낌이었다.
기사의 표본이라고 불릴 만했던 결점 없는 자세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어딘가 어수룩해 보이기도 했다.
“아닌데.”
혼잣말을 한 지그문트는 거듭 자세를 바꿨다.
단은 그런 지그문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완벽했던 동작을 스스로 무너트렸으니.
하지만 단은 알고 있었다.
‘도련님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지.’
뭔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단은 지그문트를 계속 관찰했다.
어느 순간, 조금씩 바뀌던 지그문트의 자세가 멈췄다.
처음 취했던 마이어가의 첫 번째 기본자세와 비슷했다.
‘검술을 변형하고 계신 건가?’
기사라고 해서 배운 그대로 검술을 사용하진 않는다.
경험이 쌓이다 보면, 검술은 기사의 성향과 강점에 맞게 변형된다.
이를테면 단은 방어적인 전투를 선호한다.
강점은 방어하는 도중에 찾은 틈을 파고드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단의 자세와 동작은 수비와 반격에 용이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도련님께서는 이미 그 과정을 끝내셨는데.’
지그문트는 상당히 독창적으로 검술을 변형한 바 있다.
정교하면서 유동적인 검술.
여태껏 수십 번을 넘게 지그문트와 대련한 단이다.
그 까다로움을 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검술의 변형은 크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검술로만 따지자면, 지그문트는 소드 익스퍼트 초급을 진즉에 넘어섰다.
‘이제 와서? 어째서?’
그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지그문트가 움직였다.
발을 크게 앞으로 뻗는다.
이름 없는 검이 허공을 베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단순한 베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의 감상은 달랐다.
‘어?’
이상했다.
지그문트의 검로는 극히 까다로웠지만, 파훼는 가능했다.
단은 수비적인 검술에 특화된 기사였다.
방어에는 도가 텄고, 어떻게든 검을 받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게 뭔, 아니, 어떻게.’
만약 저 앞에 서 있는 것이 자신이었다면, 알고도 막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으면, 검날은 검을 타고 흐르듯 단의 목으로 들어왔다.
피해 봤지만, 어떤 방법을 써도 중심이 무너진다.
‘말도 안 돼.’
지그문트는 검술을 변형한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검술을 만들고 있었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검.
말로는 그럴 듯하지만, 실제로는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단은 넋을 놓았다.
“아…….”
* * *
‘대충 이 정도면 기본은 가다듬어진 것 같은데.’
검술을 만드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고유 마법을 만드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직접 몸을 움직여 가면서 실험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또한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과 실제가 다른 경우가 많았다.
내 경험 부족이었다.
‘벌써 이런 시간이군.’
새벽부터 시작했는데,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서둘러 들어가려는데 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후우.”
호흡을 뱉으며, 클레이모어를 휘두르는 단이었다.
흐른 땀이 태양 빛을 반사해서 반짝거렸다.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는데, 발은 땅에 고정되어 있었다.
매우 몰두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숨을 죽였다.
‘성장하면 좋지.’
뭐가 단초를 제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의 성장은 내게 이득이었다.
단은 전력에 확실히 보탬이 된다.
목오 사막에서 실감했다.
공간 이동이 불가능한 지금, 단의 서포트는 꽤 크게 다가왔다.
나중에 영초라도 몇 개 달여 먹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서풍을 나왔다.
내가 향한 곳은 적탑이었다.
“의뢰는…….”
“마법사 차출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적탑의 1층은 부산스러웠다.
마탑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지만, 적탑은 유독 바빠 보였다.
레온하트 왕국 근처에는 적탑 이외의 다른 마탑이 없다.
의뢰를 비롯한 갖가지 일들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업무를 보는 직원들은 바쁘게 응대를 했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손님을 상대하고 있던 수습 마법사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발레리아의 수제자로 오해하고 있는 아가씨였다.
수습 마법사는 양해를 구하고 내게 다가왔다.
“탑주님께 용무인가요?”
“척하면 착이군.”
“바로 전하겠습니다.”
수습 마법사는 총총 계단으로 사라졌다.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대기하는 손님들이 의자를 차지하고 있어, 앉을 수 없었다.
어차피 금방 올 것 같았으니 별 상관없었다.
‘사람이 꽤 있군.’
그동안 적탑을 둘러보았다.
제각각의 용무로 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제법 돈 좀 있어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거드름을 피우는 귀족이나 수행원을 대동한 부호들.
마탑의 의뢰는 가격이 있는 편이라, 주머니 가벼운 사람은 못 온다.
‘저건…… 학생들인가?’
유독 눈에 띄는 무리가 있었다.
로안 아카데미에서 봤던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1층 한구석에서 오와 열을 맞춰 대기 중이었다.
열 명 남짓 됐는데, 얼굴에는 기대와 자부심이 떠올라 있었다.
“로안 아카데미의 학생인가?”
실제로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적탑을 방문한 아카데미의 학생들.
높은 확률로 적탑의 마법사가 될 인재들이었다.
미리 포섭해 두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학생들의 얼굴을 확인하던 나는 의외의 물건을 발견했다.
‘저건…….’
학생들의 허리에 매달린 새하얀 가면.
레온하트의 수호자 가면이었다.
재질을 보니 밀러 상단에서 제작한 모조품 같았다.
애들 장난감이나 기념품 정도로 판매하려고 했던 건데.
‘저걸 왜 들고 다녀?’
취향 참 황당한 놈들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패션이라도 되는 건가?
학생을 포섭하려던 부호도 궁금했는지, 가면을 가리켰다.
“자네들은 왜 그 가면을 달고 다니는가?”
“아, 궁금하세요? 궁금하셨구나.”
포섭에는 시종일관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던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가면 얘기가 나온 순간, 눈빛이 바뀌었다.
부호는 조금 당황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분이 누구시나면요…….”
“수업 때 원장님 대신 오셨는데…….”
“제가! 와! 이분이 아니었으면! 지금! 크!”
돌변한 학생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일관성은 없었지만, 대체로 찬양에 가까운 칭찬이었다.
눈동자에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하는 학생도 있었다.
이 정도면 우상숭배의 영역이 아닌가.
‘……조금 무서운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학생들이었는데, 지금은 불사의 신자들보다 열성적이었다.
발레리아도 저러진 않았는데.
곧 수습 마법사가 돌아왔고, 나는 자리를 떴다.
* * *
“발레리아.”
“누구…… 스승님! 노크 좀 해 주세요!”
마탑주의 방.
발레리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가 보였다.
일하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마탑주로서의 책무, 아카데미의 결재 서류, 왕궁의 회계 감사까지.
평범한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할 양이었다.
“할 만하냐?”
“거의 다 했어요.”
발레리아는 태연한 얼굴로 깃펜을 내려놓았다.
아마 이 정도 업무라면 금방 할 것이다.
조금 맹한 구석이 있어도 천재는 천재다.
“데려가려고 했는데. 일이 너무 많아서 쓰나.”
“어디 가시는데요?”
“용의 산맥.”
“동쪽 끝, 서쪽 끝, 다음은 북쪽이네요.”
발레리아는 용의 산맥에 가 본 경험이 있었다.
팔베르크 제국과 인접한 곳이기도 하니까, 산책 삼아 몇 번 데려갔었다.
“추운 건 싫긴 한데.”
“그럼 오지 말든가.”
“그건 아니고요. 아, 그런데 용의 산맥은 무슨 일로 가시는 거예요?”
“거기 뭐 하러 가겠냐. 드래곤 만나러 가는 거지.”
신살을 제거할 단서가 그곳에 있다.
겸사겸사할 일도 있었다.
“숨결도 거기 있으니 회수할 거고, 프라우드 산맥에도 볼일이 있거든.”
“그러고 보면 스승님은 맨날 일을 몰아서 처리하셨죠.”
“몰아서 처리하는 게 아니라, 이왕 간 거 싹 끝내려는 거야.”
“네, 네. 아무렴요.”
사춘기가 분명했다.
수긍한 발레리아가 깜빡했다는 듯 소식을 전했다.
“들으셨어요? 시프 왕자가 비밀리에 엘비아로 출발했다네요.”
“여태껏 출발 안 하고 뭉그적거렸다는 말이냐? 거의 광신도가 됐던데.”
“외교적 문제로 이것저것 일이 많았나 봐요. 엘비아 측이 꽤 예민한 것 같았어요.”
세계수가 죽어 가고 있는데, 예민하지 않을 리 없다.
어쨌든 차도가 있으니 다행이었다.
“아, 그 전에, 방 하나만 내줘라.”
“따로 쓰실 조용한 공간이 필요하신 거죠?”
“그래.”
말도 안 했는데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짚었다.
역시 잘 통하긴 한다.
발레리아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지하 연구실이 하나 비어요. 공간이 조금 협소하긴 하지만요.”
“괜찮아.”
“아카데미로 가면 좀 더 넓은 공간이 있긴 한데.”
“여기가 나아. 무슨 일이 터지면 네가 해결해야 되거든.”
발레리아는 대체로 마탑에 있다.
상황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은 발레리아였다.
“뭐 하시게요?”
“서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가는데, 준비는 해야지 않겠어?”
“준비라면…….”
“만들어야지. 5서클.”
네르갈에 올라온 뒤로, 라스 마이어는 서풍에서 거주했다.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이 자택의 방을 내주겠다는 의사를 비쳤지만, 거절했다.
시종들이 너무 쾌활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서풍의 1층에는 간단하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이 있다.
라스는 아침 식사를 늘 그곳에서 해결했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 같은 메뉴.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오물오물.
자리에 앉은 라스는 맞은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양손으로 야무지게 빵을 잡고 있는 리옐이 있었다.
호쾌하게 빵을 뜯더니, 한참을 씹고 있다.
시선을 느낀 리옐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머리 위의 새싹이 리옐의 마음을 대변하듯 옆으로 갸웃 기울었다.
환상 마법이 걸려 있었기에, 라스는 보지 못했다.
꿀꺽.
빵을 삼킨 리옐이 물었다.
“왜요?”
“아니다. 계속 먹거라.”
“응!”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힐데와 마리나는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라스 마이어는 대체로 혼자서 식사를 한다.
저택에서도 그랬다.
예외는 지그문트나 루이스와 함께할 때뿐이었다.
그마저도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드문 광경이었다.
“리옐 님이 마음에 드셨나 봐요.”
“그러게. 저렇게 기분 좋아 보이시는 건 처음 봐.”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라스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저택에서 일한 힐데와 마리나라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라스 마이어는 몹시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안 닿아…….”
리옐이 식탁 위로 손을 뻗으며 끙끙거렸다.
물컵이 손에 닿지 않는 위치에 있었다.
힐데가 곧바로 움직이려고 했지만, 라스가 제지했다.
리옐이 라스를 올려다봤다.
라스는 식기를 내려놓았다.
직접 컵을 리옐이 잡기 쉬운 곳으로 옮겨 줬다.
“고맙습니다!”
컵을 잡은 리옐은 해맑게 웃었다.
라스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놀라울 정도로 극적인 변화였다.
“마리나.”
“네. 가주님.”
“지그문트가 어디에 있지?”
“외출 중이십니다.”
“그 녀석은 허구한 날 외출이군.”
마리나는 속으로 긴장했다.
지그문트가 레드라인 후작가로 떠나고 닷새가 넘었다.
저택에 찾아가 봤지만, 진작 떠났다는 것 말고는 알 수 없었다.
가끔 홀연히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예상하고 있지만.
‘가주님께서 급히 찾으시면,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지?’
전속 시녀로서 주인의 행방을 제대로 모른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리나는 조금 긴장했지만, 다행히도 라스는 추궁할 기색이 아니었다.
괜히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어쩔 수 없군. 이 아이는 내가 보는 수밖에.”
* * *
지하 연구실을 사용하는 마법사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적탑주, 발레리아 로안이 틈만 나면 지하를 서성거렸기 때문이다.
지하의 연구실은 이제 막 수습을 벗어난 마법사들이 사용한다.
그들은 혹여나 발레리아와 눈이라도 마주칠 때면.
“적탑주님께서 날 보셨어!”
“아니야! 멍청아! 날 보신 거야!”
“나는 위로 갈 거야!”
“기억할게!”
온갖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떨었다.
적탑주가 연구 진행에 관심을 보인다.
말인즉슨 승급에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실제로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오해했다.
‘올해는 지하를 벗어난다!’
‘열심히 해서 승급하자!’
‘가즈아아아!’
마법사들은 진행하던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얼떨결에 적탑 지하의 능률이 대폭 상승했다.
정작 발레리아의 관심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발레리아는 지그문트가 들어간 연구실 앞을 서성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괜한 걱정인 걸 알면서도 하게 된다.
부고를 전해들은 뒤로 발레리아는 항상 불안했다.
어떻게든 되살아났지만, 지그문트는 전생에 비해 턱없이 약했다.
그러면서도 위험을 기꺼이 감수한다.
‘다섯 번째 서클부터는 원래 조금 힘들긴 하지만.’
4서클과 5서클의 차이는 크다.
마법사 중 절반가량이 10여 년에 걸쳐서 4서클에 겨우 다다른다.
5서클부터는 그 수가 한 번 더 크게 줄어든다.
5서클 마법사는 한 나라에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그래도 스승님한테는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지그문트는 가끔 발레리아를 천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발레리아 본인은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녀의 스승이아말로, 불세출의 천재이기 때문이다.
지그문트가 오러와 마나를 동시에 다루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발레리아는 기가 찼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했다.
‘힘들겠지만, 나도 할 수 있으려나.’
대신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아무런 방해 받지 않는 조용한 공간에서 혼자 있는다.
움직이지 않고 오롯이 내면에 집중한다.
그렇게 한다면, 가능했다.
일주일 정도가 지나면 한계에 봉착하겠지만 말이다.
‘근데 그 오러와 서클을 계속 높이고 있으니.’
받고 있을 부담감이 상상도 되지 않았다.
지그문트는 5서클을 만든다고 했다.
그렇게 말했으니,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5서클을 만드는 것이 전부라면 이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을 것이다.
‘뭐 연구라도 하고 계신가?’
학자 기질이 다분한 지그문트다.
전생에도 이따금 이렇게 방에 틀어박혀 연구에 몰두하곤 했다.
한 번 집중하면 시간 감각을 잃어버리고 며칠을 집중한다.
발레리아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의 집중력이었다.
‘일단 최소한 폭발은 안 했으니까.’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
대마법사의 연구는 평범한 마법사들의 연구와 궤가 다르다.
발레리아는 멋모르고 연구실에 들어갔다가, 다른 세계로 끌려간 적도 있었다.
지금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공포였다.
“끙.”
아무리 생각을 해 봐야,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그문트가 5서클에 오르려 하는 건 이해가 됐다.
용의 산맥은 발레리아도 껄끄러운 곳이었다.
최소한 공간 이동 마법, 블링크(Blink)는 갖추고 있어야 한다.
“어?”
발레리아의 눈이 깜빡였다.
문틈 사이로 빛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벌컥.
연구실에서 나온 지그문트가 맥없이 쓰러졌다.
놀란 발레리아는 지그문트의 몸을 받쳤다.
“스승님!”
* * *
포근한 감각이 몸을 감쌌다.
기분 좋은 풀내음이 느껴졌다.
가슴팍에서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리옐이 내 위에 엎어져 자고 있었다.
좌우로 흔들리는 새싹이 코를 간지럽혔다.
‘서풍인가?’
주변을 둘러보니 서풍의 객실인 듯했다.
오래 잠들어 있었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적탑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다섯 번째 서클은 만들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는 오러 쪽이었다.
‘실패했다.’
신성을 사용해 오러를 억지로 증가시키려고 했다.
꼼수라고 볼 수도 있으나, 교국의 성기사들이 쓰는 방법이었다.
신성력과 오러를 혼합해 그 효과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실패했다.
‘신성의 힘이 너무 강해서, 오러에 섞이질 않는다.’
성기사들이 오러에 섞는 것은 신성력.
신에게서 빌려온 힘이다.
내 것은 다르다.
신에게서 빌려온 힘이 아니라, 신의 힘 그 자체인 신성이다.
그 때문에 오러와 융화되지 못한 것이다.
‘실험적이긴 했지만, 실패할 줄은 몰랐는데.’
성공 가능성이 높은 실험이었다.
안정성을 위해서 마나 서클을 먼저 만들어 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급했다.’
오러와 마나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나로서는 뼈아픈 실책이었다.
신성이 두 힘을 어느 정도 갈라놓은 것이 다행이었다.
물론 완전히 분리한 것은 아니기에, 시간제한이 있었다.
앞으로 몇 주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 소드 익스퍼트 중급을 달성해야 한다.
“쯧.”
어차피 만들어야 할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었지만.
어쩐지 내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 마음이 착잡했다.
목오는 왜 대뜸 이런 큰 힘을 나한테 줘서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머리맡에 놓인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
‘붉은 선, 레드라인가의 표식인데?’
편지를 읽었다.
레드라인 후작이 보낸 것이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리옐이 잠에서 깼다.
눈이 잘 안 떠지는 듯 부스스한 얼굴로 나를 본다.
“아빠?”
“더 자.”
“응.”
다시 까무룩 내 위에 엎어졌다.
편지를 마저 읽었다.
형식상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었지만, 요약해 보면 내용은 간단했다.
왕이 나를 찾고 있다.
* * *
국왕의 집무실.
심각한 얼굴로 있던 파서벌 레온하트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반색했다.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레드라인 후작님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들라 하라.”
레드라인 후작이 들어왔다.
문이 닫히자, 가면을 쓴 지그문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도구를 사용해 모습을 감추고 있던 것이다.
“폐하.”
“수호자 경. 어서 오게. 그동안 별일 없었나?”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지그문트는 사실을 말한 것뿐이었다.
그사이에 대마법사의 던전을 돌파하고, 제국의 계획을 저지하고, 되살아난 신을 죽였다.
별일이 아니면 뭐겠는가.
레드라인 후작은 당황했으나, 파서벌은 개의치 않았다.
“그래. 항상 고마울 따름이야.”
파서벌은 지그문트가 레온하트 왕국을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그문트는 속으로 잠깐 고민했다.
목오 사막으로 간 것은 딱히 레온하트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제국의 계획을 막았으니, 전쟁이 늦춰졌다.
결과적으로는 레온하트 왕국을 위해서 일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한데,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요하네스에게 듣지 못했는가?”
“알려 주시지 않으시더군요.”
레드라인 후작은 고개를 숙였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자신보다 국왕의 말에 조금 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군. 다름이 아니라, 공식 석상에서 얼굴을 한번 비춰 줬으면 하네.”
“공개적인 장소에서 가면을 벗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아닐세.”
파서벌은 쓰게 웃으며 부정했다.
레드라인 후작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를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는 걸세.”
“아.”
지그문트는 바로 이해했다.
현재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설화나 민담 속의 영웅 같은 존재다.
목격한 귀족들이 몇 있으며, 그 이야기는 왕국민들에게도 퍼져 있다.
하지만 수호자가 그 모습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드러낸 적은 없었다.
건국제 파티에서, 혼란한 와중에 한 번.
그리고 부패한 중앙 귀족들 걸러 낼 때 정도다.
둘 모두 왕성에서 있었던 일이다.
평범한 사람은 레온하트의 수호자를 볼 기회가 없었다.
‘확실히 입지를 다져 달라는 얘기군.’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존재만으로도 국왕에게 큰 힘이 된다.
그 존재가 명확해지고 입지가 단단해질수록 좋다.
파서벌은 종이 한 장을 지그문트에게 건넸다.
공고문이었다.
그것을 읽은 지그문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검술 대회에 출전하라는 말씀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