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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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1)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발뺌해도 소용없다. 이미 요하네스에게 다 들었으니.”

머리가 돌아갔다.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이 아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다.

내가 레온하트의 수호자라는 것 정도.

그건 라스가 알아도 크게 상관없는 정보였다.

내심 긴장했다.

라스는 의외로 엉뚱한 이야기를 내놓았다.

“검술 수련을 위해 서대륙을 돌아다닌다던데. 아니더냐?”

“아, 그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

아무래도 요하네스 후작이 잘 얼버무린 모양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검에 관심도 없던 지그문트다.

그런데 돌연 소드 익스퍼트 초급의 경지에 도달했으니.

이상하지 않을 얘기다.

나는 대충 맞추기로 했다.

괜히 설명하려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요하네스의 아들을 때려눕혔다지.”

“두 번 이겼습니다.”

“잘했다.”

라스는 어딘지 모르게 흡족한 표정이었다.

경쟁심이 발동한 모양이다.

자식이 어디 가서 맞고 다니길 원하는 부모는 없다.

차라리 때리면 때렸지.

“영지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루이스에게 맡겨 두었다. 윌리엄이 붙어 있으니, 아마 괜찮을 거다.”

근황 같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라스의 무릎에 앉아 있던 리옐이 불편하다는 듯 꼬물거렸다.

그에 조심스럽게 자세를 바꾸는 라스였다.

오늘 의외의 일면을 여럿 보는 것 같았다.

라스가 입을 열려는 순간, 리옐이 라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할아부지, 아빠 힘들어.”

“……그렇군. 이만 말을 줄이지.”

“괜찮습니다.”

“아니다.”

나야 좋았다.

솔직히 조금 피곤한 것이 사실이었다.

신성을 받아들이며 생긴 몸의 변화를 연구하고 싶기도 했다.

라스는 몸을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옐을 안아 든 채로.

“가 보거라.”

“혹시 단과 마리나가 오지 않았습니까?”

“3층에 있을 거다.”

나도 몸을 일으켰다.

리옐이 라스의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듯 바동거렸다.

라스는 명백히 서운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나는 샌딩(Sending)을 보냈다.

-좀 더 있다 와.

리옐과 짧게 눈빛을 교환한 나는 방을 나섰다.

* * *

다음 날, 서풍의 객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리옐이 내 배에 늘어져 자고 있었다.

단은 체력 단련을 한다고 안뜰로 나갔고, 마리나는 리옐에게 필요한 것을 사러 갔다.

‘졸리군.’

요새 제대로 쉬지 못한 탓인지, 눈이 자꾸 감겼다.

평화로운 오전에 휴식을 취하는 한량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니다.

나름대로 신성에 대한 고찰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목오의 신성이 내게 들어온 이유.

처음에는 목오를 죽여서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신을 죽인다고 해서 신성을 뺏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목오는 오래 전 죽은 신.

만약 신을 죽임으로써 신성을 빼앗을 수 있다면.

‘불사의 괴물이 신성을 획득했겠지.’

그렇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놈이 무차별적으로 땅에 사는 신을 죽이고자 하는 것도 설명됐다.

하지만, 아니었다.

애초에 불사의 괴물은 신성을 모을 이유가 없었다.

‘내게 신성이 들어온 건 목오의 의지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나는 목오가 죽기 전에 사막을 빠져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신성이 깃들었다는 것.

그리고 신성이 인간의 몸에 들어가기 적합하게 봉인되었다는 것.

여러 방면으로 볼 때, 목오가 내게 신성을 줬다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왜?

떠오르는 이유는 하나였다.

‘세계수.’

자신의 후계자를 나로 삼은 건 아닐 테고.

아마 세계수를 도우라는 얘기겠지.

그만큼 서대륙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세계수였으니.

‘모르겠네.’

처음에는 조금 두려웠다.

오러와 마나, 두 힘도 담아내기 힘든 것이 인간의 신체.

거기에 신성까지 들어왔으니, 폭발이라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의외로 멀쩡했다.

신성은 오러와 마나를 분리하는 데 도움을 줬고, 지금은 가만히 웅크려 있었다.

‘생각한들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군.’

일단 안전하다는 건 확인되었으니, 신경 끄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신인데, 알아서 잘 조치했겠지.

연구라도 할 수 있으면 모를까.

신성이 웅크리고 있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설마 죽겠는가.

‘다음은…… 용의 산맥.’

용의 산맥은 서대륙 북쪽 끝에 있는 거대한 설산이다.

숲, 사막, 이번에는 산맥이라.

서대륙 전역을 여행하고 다닐 때도 이렇게 다이내믹하게 움직이진 않았는데.

나는 계획을 정리했다.

목오는 드래곤에게 신살의 제거 방안을 모색시켰다고 했다.

목오를 살리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내가 아는 드래곤이라면, 연구를 포기했을 가능성은 적다.

드래곤은 꽤 집요하다.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은 이상, 연구를 이어 나갔을 것이다.

많은 진전이 있거나, 연구가 끝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차피 용의 산맥은 한 번 가야 했고.’

아티팩트 중 ‘장갑’이 용의 산맥에 있다.

친구에게 맡겨 뒀는데, 잘 가지고 있을는지 모르겠다.

드래곤들의 성질머리를 생각하면 위험하긴 하다.

나는 목걸이, 기억을 쥐었다.

남은 마법은 두 개.

잘만 활용한다면 여차할 때 몸을 뺄 정도는 된다.

문제는 팔베르크 제국이다.

‘제국이 슬슬 내 존재를 눈치챌 때가 됐는데.’

레온하트 왕국에서 두 번.

목오 사막에서 한 번.

심지어는 암국을 정리하는 일도 틀어졌을 것이다.

밤말을 듣는 쥐가 대처할 수 있도록 정보를 흘렸으니까.

이쯤 되면, 우연이라고 치부하기 힘들다.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건 눈치챘을 것이다.

그것이 나라는 건 특정하지 못했겠지만.

‘머리 아프군.’

세계수 살리기, 힘 키우기에 제국 견제까지.

아티팩트도 회수해야 한다는 걸 감안하면 할 일이 산더미다.

무엇보다, 황제의 변수가 걸렸다.

레온하트의 국왕을 암살하려고 했던 거나, 불사의 신자를 이용하는 등.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과감한 수를 두고 있었다.

이번에 목오를 언데드화하는 것도 성공만 했다면, 승부수가 될 수 있었다.

‘설마, 용의 산맥에도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

* * *

어두운 방.

“발락.”

“아, 왜 또!”

렘브란트 님푸스의 부름에, 발락 리빙데드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둘은 같은 팔베르크 제국 소속이었지만, 사이가 썩 좋지 않다.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렘브란트와 자신의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발락.

성격도 정반대인지라, 사이가 좋을래야 좋을 수 없었다.

“네 말은, 결국 실패했다는 것 아니냐.”

“내가 말했잖아. 미친 메테오라이트를 갈겼다고! 연결도 끊어졌어!”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해 도주한 발락은 느꼈다.

목오와의 연결이 끊어졌다.

언데드화한 목오가 활동을 정지했다는 뜻이었다.

렘브란트가 혀를 차며 핀잔을 줬다.

“무능하군.”

“지는. 레온하트 왕자 꼬드겼다가 실패한 주제에.”

“대마법사의 제자, 발레리아 로안이 개입했다.”

“그렇게 치면 나도……!”

“스무 살 남짓한 청년에게 당한 것과는 다르지.”

발락은 입을 닫았다.

사실대로 얘기했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하지만 거짓을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1원정대보다 먼저, 대마법사의 아티팩트를 탈취.

그것을 이용해 목오를 저지한 것은 스무 살 남짓한 청년이었다.

“그자가 분명 오러와 마나를 동시에 사용했다고 그랬지?”

“그래! 미친 거 아니냐? 특히 마법을 활용하는 솜씨가 상당했고.”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군. 불가능한 일인데…….”

“황제 폐하를 뵐 명목이 없어.”

계획이 틀어지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눈을 감았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손목을 치료하던 발락이 물었다.

“드래곤들 동태는 어떻지?”

“무슨 뜻이냐?”

“아니, 그렇잖아. 신을 되살렸을 정돈데. 드래곤들이 눈치채지 않았겠어?”

드래곤은 균형을 수호하는 종족.

웬만해선 용의 산맥을 벗어나진 않지만, 이번은 다르다.

죽은 신을 되살렸다.

서대륙까지 나와서 개입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드래곤 한 마리라면, 발락을 제압하고도 남았다.

렘브란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드래곤의 시선을 돌려놓았으니.”

“드래곤의 시선을 돌렸다고? 어떻게?”

“방법이 있지.”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그래. 그나저나, 그 미친놈은 어디 있어?”

“글쎄. 레온하트 왕국에 간다고 하는 것 같더군.”

발락은 흥미를 보였다.

“레온하트라. 그러고 보니, 그 대단하신 흑탑주님께서도 레온하트 왕국에서 대마법사의 제자, 그 꼬맹이에게 털리고 왔다는 소문이 있던데.”

“폐하께서 발레리아 로안은 건드리지 말라고 명하셨던 걸 벌써 잊었나?”

“맞다, 참. 폐하도 이상한 집착이 있다니까.”

“말조심해라. 죽고 싶지 않다면.”

* * *

나는 레드라인가의 저택을 찾았다.

이미 두 번이나 방문한 적 있었기 때문에, 가는 길은 외워놓았다.

문지기들은 나를 알아보았다.

“지그문트 님 아니십니까!”

“이야! 어서 오십시오!”

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를 저택 내부로 들여보냈다.

심지어는 안쪽으로 따라오며 안내까지 해 줬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문지기가 옆에서 떠들었다.

“저는 지그문트 님께서 파울 도련님과 절교하신 줄 알았지 뭡니까!”

“자주 찾아오십시오! 파울 도련님 섭섭하시겠습니다.”

“잠깐 어디 좀 다녀왔거든. 가끔 들르지.”

“지그문트 도련님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레드라인 후작을 만나러 왔다고 말하자, 응접실로 안내했다.

지나가던 시종들도 나를 알아보고 환대해 줬다.

“어! 지그문트 님!”

“오랜만입니다!”

“파울 도련님 만나러 오셨습니까? 대련입니까?”

유쾌한 시종들이었다.

단순히 파울의 친구라고 이 정도로 환영해 주다니.

파울도 나름 인망이 있는 것 같았다.

응접실에 다다르자, 차를 내온 시녀가 꾸벅 뒤로 물러났다.

“후작님께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시녀가 물러났다.

차를 막 입에 가져가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이었다.

빠르다.

이게 소드 마스터의 속돈가?

“오랜만이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후작님.”

“일어나지 말게.”

내가 일어나려 하자, 레드라인 후작은 만류했다.

내 맞은편에 앉자, 시녀가 차를 내왔다.

레드라인 후작은 예전보다 훨씬 얼굴이 밝아져 있다.

“신수가 훤해지셨습니다.”

“그런가? 하하, 다 자네 덕분이라네.”

레드라인 후작은 레온하트 왕국의 근황에 대해서 얘기했다.

부정부패가 발각된 관료들이 받은 처벌.

변방의 귀족들이 오히려 중앙 귀족보다 더 낫다는 것.

발레리아나 라스 마이어의 유능함 같은 이야기였다.

‘알아서 잘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군.’

레온하트 왕국 대청소 이후로, 파서벌 레온하트는 달라졌다.

자신의 인재를 확실하게 활용하고, 이따금 필요에 따라 직접 나서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온건한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대신 위법 시 처벌 수위가 상당히 높아졌다고 한다.

“이런. 내가 너무 내 얘기만 했군. 미안하네.”

“후작님 얘기는 거의 없었습니다. 거의 왕국의 근황이었지요.”

“그랬나? 하하. 그만큼 왕국의 상황이 아주 좋아졌거든.”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쓰레기들이 사라졌다.

그에 따라 국가 예산이 상상 이상으로 늘어나고, 왕국민의 복지가 좋아졌다고 한다.

왕국민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국왕의 지지도는 높아지고, 자연히 왕권은 강화된다.

레온하트 왕국은 아주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곧 안정되겠군요.”

“이제 막 중앙으로 진출한 귀족들이 일에 적응만 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희소식입니다.”

레드라인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으로 왕국을 생각하는 귀족.

거기다가 무력에 능력까지 갖췄다.

파서벌 레온하트가 인복 하나는 타고났다.

“이런 사담하자고 나를 찾아온 건 아닐 테고. 어쩐 일인가?”

“아, 한 가지 부탁을 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부탁이라. 자네가 해 준 것이 얼만데, 못 들어줄 것도 없지. 무엇인가?”

레드라인 후작은 흔쾌히 승낙했다.

나는 레드라인 후작의 눈을 직시했다.

“저와 한번 붙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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