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델 로안의 기억
“여기가 세 번째 층입니까? 어둡군요.”
“세 번째 층이 아니라 대기실, 그러니까 2.5층 정도 되는 곳이야. 마리나, 있냐?”
“있어요.”
“리옐?”
“응!”
우리는 어두운 방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목소리로 단과 마리나, 리옐까지 전부 있다.
나는 두 손을 들었다.
“눈 감아. 밝아진다.”
짝!
손뼉을 치자, 주위가 밝아졌다.
단은 빛에 적응하려는 듯 눈을 연신 깜빡였다.
2.5층은 그야말로 방이었다.
고급스러운 거로 따지자면 서풍의 특실보다 낫다.
쉴 수 있도록 침대와 소파, 안락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한쪽에 전시되어 있던 와인을 땄다.
“한잔할래?”
“그거, 괜찮은 겁니까?”
“그래. 꽤 괜찮은 술이야.”
“그런 뜻으로 물어본 게 아닌데 말입니다.”
나는 손수 잔을 채웠다.
투명해서 언뜻 보기에는 물 같았다.
마리나가 내 주변을 기웃거렸다.
라벨을 보더니 미간에 얕은 주름이 파였다.
“읽을 수 없네요. 술은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고대어니까.”
“흥미가 가긴 하지만…… 아무래도 상하지 않았겠습니까?”
“안 상했어. 자.”
“아, 감사합니다.”
단은 건네받은 와인을 홀짝였다.
시음하듯 입에 머금고 있다가 삼킨다.
목울대가 움직이며 와인이 넘어갔다.
단이 나지막이 감탄했다.
“오, 저는 솔직히 맥주파입니다만, 이거라면 얘기가 다르겠군요.”
“괜찮지?”
“예. 정말 맛있군요. 말재주가 없어서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만든 거야.”
“도련님께서요?”
“그래. 옛날에 취미 삼아서.”
“저도 궁금하네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한 잔 받을 수 있을까요?”
“나도!”
마리나와 리옐이 흥미를 보였다.
한 잔 따라 주자, 맛을 본 마리나가 깜짝 놀랐다.
단과 마리나 모두 와인을 마음에 들어 하자, 리옐도 달라고 보챘다.
아무리 그래도 얘는 아니다.
“너 태어난 지 1년도 안 되지 않았냐?”
“우우.”
“안 돼.”
샌드 웜과의 전투 이후 곧장 이곳으로 온 것이다.
넷 모두 지쳐 있었다.
우리는 잠시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휴식도 취하고, 마나도 보충했다.
검을 닦던 단이 깜빡하고 있었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도련님, 세 번째 층에는 왜 대기실이 있는 겁니까?”
“앞에 누가 들어갔거든. 아마 제국, 할리온 남작이겠지.”
“그거 큰일 아닙니까? 아티팩트를 들고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그럴 일 없어.”
나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와인 잔을 흔들었다.
무릎에 앉은 리옐이 생선을 노리는 고양이의 눈으로 와인 잔을 주시하고 있었다.
살짝 틈을 보이자, 어김없이 손을 뻗는다.
“본인 방금 와인 마시는 상상함!”
“어림도 없지.”
손을 들어 가볍게 막았다.
내 손바닥에 얼굴을 박은 리옐이 버둥거렸다.
남은 와인을 비워 냈다.
“아아! 내 와인!”
“어디까지 말했더라? 이 던전에 숨겨진 아티팩트는 ‘기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거든.”
나는 이 던전을 만들 때, ‘기억’이라는 키워드를 의식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심심해서 그랬던 것 같다.
내 기억은 던전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첫 번째 층에는 기념비적인 ‘첫 실험체’를.
두 번째 층에는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억’을 배치했다.
설명을 들은 단은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럼 세 번째 층에는 뭐가 있습니까?”
“세 번째 층에는…….”
* * *
중력이 어그러진 듯한 공간이었다.
물이 옆으로 떨어지고, 나무가 위에서 아래로 솟았다.
작은 섬 같은 땅덩어리들이 제각각의 방향으로 천천히 부유했다.
할리온 남작은 그 땅덩어리 위에서 정신을 차렸다.
“여긴 어디지?”
정신이 멍해졌다.
분명 두 발은 땅을 밟고 있었으나, 단단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펼쳐진 풍경은 진실이라기에는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기억을 되짚었다.
‘분명 대마법사의 아티팩트로 보이는 목걸이를 붙잡고……’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꽉 쥐어진 주먹을 내려다봤다.
떨리는 마음으로 손을 펼쳤다.
손바닥에는 목걸이가 있었다.
화려한 장식 대신, 세 개의 작은 보석이 달린 것이 전부인 목걸이였다.
황제가 말했던 외관과 정확히 일치했다.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다소 희생이 따르긴 했지만, 목적은 달성했다.
대마법사 델 로안의 아티팩트를 획득한 것이다.
할리온 남작은 품속에 숨겨 뒀던 스크롤을 꺼냈다.
“후우.”
대마법사의 텔레포트 스크롤.
스크롤을 찢기만 하면, 곧장 팔베르크의 저택으로 이동될 것이다.
노크와 마법사는 조금 아까운 감이 있었다.
그래도 임무가 우선이었다.
심호흡한 할리온 남작이 스크롤을 찢었다.
찌익.
우웅.
스크롤에 새겨진 마법진과 복잡한 문자가 빛을 발했다.
빛은 그대로 할리온 남작의 몸을 감쌌다.
할리온 남작은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면, 이 지긋지긋한 던전과도 작별이었다.
몸을 감싸고 있던 기묘한 감각이 사라졌다.
할리온 남작은 눈을 떴다.
“……음?”
풍경은 그대로였다.
던전의 세 번째 층이 분명했다.
아직 스크롤의 효과가 발동되지 않은 걸까.
찢어진 스크롤을 확인했다.
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뭐지?”
텔레포트 스크롤은 이미 작동이 확인된 물건이다.
그 대마법사가 만들었는데, 불량품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할리온 남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혀를 찼다.
이 공간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긴 했다.
“빌어먹을.”
할리온 남작은 목걸이, 기억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 공간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였다.
쿵.
할리온이 밟고 서 있던 땅덩어리가 우뚝 멈췄다.
아니, 주변의 모든 것들이 동작을 정지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세계에서, 오직 할리온만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땅덩어리들이 폭발적으로 넓어지기 시작했다.
“허억!”
땅덩어리들은 서로 이어지더니, 이윽고 단단한 땅이 되었다.
흙바닥에서 잔디가 자라고, 무수한 풀과 꽃이 자라났다.
살짝 머리를 내민 새싹은 순식간에 자라나 나무가 됐다.
열매를 맺은 나무가 시들고, 그 자리에 또 다른 나무가 자랐다.
일출과 일몰이 빠른 속도로 반복됐다.
세계가 만들어지는 듯한 광경.
할리온은 넋을 놓았다.
“어?”
어느 순간.
할리온은 로브 차림의 남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할리온이 두리번거렸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돈을 갈아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식들.
백금화 가치의 예술품들이 보란 듯이 전시된 홀.
팔베르크 황성의 홀이었다.
옥좌에 앉은 남자는 따분하다는 듯 턱을 괴고 있었다.
로브 그림자에 가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
할리온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브 남자를 경계하며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첫 번째 층에도 그랬고, 두 번째 층에도 그랬다.
이 던전에는 각 층마다 괴물 같은 것이 있었다.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없다네. 젊은이.”
할리온 남작은 빠르게 로브 남자를 분석했다.
결코 젊다고 부를 수 없는 나이의 할리온이었다.
목소리도 그렇고, 로브를 입은 것은 노인이 분명했다.
발음이 유창하고, 목소리에 힘이 있다.
평민이나, 사람 말을 따라 하는 몬스터는 아닐 확률이 높았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누구냐?”
“말은 가려서 하는 게 좋을 걸세.”
명백히 심기가 불편함을 드러내는 어조였다.
노인의 손가락이 옥좌의 팔걸이를 톡 쳤다.
아주 사소한 동작.
하지만 할리온은 절대 사소하지 않은 것을 느꼈다.
“……!”
다리에 힘이 풀린 할리온이 풀썩 주저앉았다.
온도가 돌연 내려간 듯한 기분이었다.
오한이 온몸을 감쌌다.
무심한 시선이 소름 돋았다.
심장은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한계에 달한 공포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건……!’
할리온 남작의 눈동자가 점점 위로 올라갔다.
발작하듯이 몸이 떨리며, 손발이 뒤틀렸다.
홀의 바닥에 얼굴을 박고 고꾸라졌다.
그때, 노인의 손가락이 옥좌 팔걸이에서 떨어졌다.
“허어억!”
할리온 남작은 자신의 목을 양손으로 붙잡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온몸을 누르던 압박감과 공포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떨리는 눈으로 노인을 올려다봤다.
만약 노인이 1초만 더 쳐다보고 있었다면.
할리온 남작은 미치거나, 쇼크사했을 것이다.
‘괴물!’
샌드 퀸을 마주했을 때도 빠른 판단으로 살아나갈 수 있었던 할리온이다.
하지만 할리온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샌드 퀸이나 고블린 암살자에 비할 존재가 아니었다.
더욱 무서운 점은, 노인이 다시 평범해 보였다는 것이다.
범상치 않은 기운 같은 것은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 주길 바라네.”
“……명심, 하겠습니다.”
가까스로 대답할 수 있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또다시 그 감각이 찾아올 것 같았다.
노인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할리온 남작은 노인의 턱이 가리킨 대로, 원래 자리에 앉았다.
노인의 맞은편이었다.
“첫 손님인데, 이리 푸대접해서 미안할 따름이군.”
돌연 공중에서 병이 나타났다.
병은 스스로 몸을 기울여 할리온 앞에 놓인 잔을 채웠다.
둥둥 뜬 채로 노인의 근처로 갔다.
노인의 잔이 채워졌다.
“들게.”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할리온 남작은 약간의 이성을 되찾았다.
독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놀랐다.
“음!”
“괜찮지?”
“혀를 감싸는 듯한 부드러움입니다. 그러면서도 너무 진하진 않군요. 이건 정말…….”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극찬을 하다가, 결국 말문이 막혔다.
와인은 남작이 마셔온 그 어떤 술보다 맛있었다.
노인에 대한 공포와 경계심이 눈 녹듯이 사라질 정도였다.
노인은 평범한 할아버지처럼 껄껄 웃었다.
“내 궁금해서 그런데, 괜찮다면 바깥 이야기 좀 해 줄 수 있겠나?”
“바깥 이야기 말입니까?”
“그래. 나는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던지라, 바깥의 일을 모르거든.”
“좋습니다.”
할리온 남작의 판단은 빨랐다.
상대가 원하는 바만 들어주면, 무사히 나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노인은 할리온이 만났던 그 누구보다 초월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할리온은 자신이 아는 대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저는 팔베르크 제국의 할리온 남작입니다. 제가…….”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말할수록, 노인에 대한 의심이 점점 사라졌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골라서 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계획이나, 사소한 감정까지 전부 말하게 됐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술술 말이 나왔다.
결국엔 기밀 사항과 자신의 부정부패까지 털어놓기에 이르렀다.
말할수록 이상하리만치 속이 시원했다.
“……그렇게 대마법사의 유산을 찾기 위해, 이곳에 다다르게 된 겁니다.”
할리온이 이야기를 마쳤다.
가만히 얘기를 듣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롭군. 그러니까…….”
노인은 로브의 후드 부분에 두 손을 넣었다.
후드를 젖히자, 보이지 않던 얼굴이 드러났다.
할리온 남작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노인, 대마법사 델 로안은 예의 무심한 눈으로 할리온을 내려다봤다.
“내가 죽었다. 이 말인가?”
“허억!”
할리온 남작은 뒤로 주춤 물러섰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로브 차림의 노인, 델 로안이 옥좌에서 일어났다.
‘내가 홀렸구나!’
아연실색한 할리온 남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무슨 술수를 쓴 것이 분명했다.
델 로안이 살아 있을 리 없었다.
황제도, 흑탑주도 확정한 사항이다.
심지어 할리온 남작은 그 시체까지 확인했다.
스릉.
검을 뽑아 들었다.
다른 존재가 델 로안을 사칭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외형을 따라 하는 몬스터인 도플갱어.
변장에 능한 악마.
혹은 환상일 수도 있었다.
델 로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할리온에게 다가왔다.
“애석하지만 난 도플갱어도, 악마도, 환상도 아니라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할리온은 위협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델 로안은 움츠러들기는커녕, 태연하게 사정거리까지 걸어 들어왔다.
할리온 남작은 생각했다.
기회다.
비록 기사라고 부를 수준은 아닐지라도, 소드 러너다.
도플갱어 같은 몬스터라면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일이 뭔지 알고 있나?”
할리온 남작의 머리에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올라가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가족, 동료, 부하를 모두 버렸다.
황제의 개가 되어,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서 했다.
이 던전에서만 살아남으면.
그토록 원하던 부와 명예가 자신의 손으로 들어올 터.
델 로안은 그런 할리온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나는, 내게 덤비는 것이 제일 멍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네.”
* * *
순간적으로 할리온의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델 로안의 형체가 흐려졌다.
하지만 할리온 남작은 멈추지 않았다.
전력을 다해 검을 내질렀다.
이토록 간절하게, 힘을 담아 검을 찌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마음이 통한 걸까.
푸학!
할리온의 모든 오러를 담은 검은 델 로안의 몸을 꿰뚫었다.
델 로안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검을 뽑은 할리온은 거친 숨을 내쉬며 쓰러진 델 로안을 살폈다.
외형이 꿈틀거리며 흐려졌다.
이목구비가 흐릿한, 녹아내리는 듯한 괴물.
도플갱어였다.
‘역시!’
역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델 로안이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도플갱어의 연기였던 것이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으나, 이 던전은 대마법사의 던전.
마도구나 던전 자체에 걸린 마법 때문이었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대충 정리가 끝나자, 분노가 치밀었다.
할리온 남작은 도플갱어의 복부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이런 개 같은! 감히! 나를! 농락해!”
퍽! 퍽! 퍽! 퍽!
발끝이 아팠다.
하지만 고통보다 희열이 더 컸다.
죽은 도플갱어를 흠씬 두들겨 팬 할리온 남작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광소했다.
“흐흐…… 으하하하하! 하하하하!”
* * *
“쯧쯧.”
델 로안은 그런 할리온 남작을 보며 혀를 찼다.
할리온 남작은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를 검으로 찔렀다.
의자를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마구 걷어찼다.
마지막에는 하늘을 보며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헤헤헤…… 농락…… 도플갱어…….”
“정신이 나갔나 보군. 이렇게 심약해서야.”
델 로안은 할리온에게 마법을 쓰지도, 저주를 걸지도 않았다.
감추고 있던 격을 아주 잠깐 드러냈을 뿐이다.
정면으로 델 로안을 마주한 할리온은 미쳐 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있었다.
환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자기합리화를 하는 것이다.
델 로안은 눈을 감았다.
‘바깥의 내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죽은 척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 죽은 걸까.
전자라면 별 상관없다.
문제는 후자다.
‘곧 찾아오겠지.’
환생(Reincarnation)이 발동했을지는 미지수다.
완성되지 않은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마법이 완성됐고, 자신이 정말 죽었다면.
머지않아 기억을 회수하기 위해 던전을 찾아올 것이다.
그동안 델 로안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정신이 나간 할리온 남작 머리에 손을 올렸다.
우웅.
푸른 마나가 할리온 남작의 머리를 감쌌다.
* * *
“시간이 됐군.”
방의 형태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대기실의 모습이 바뀌고 있었다.
가구가 사라진다.
발에 닿는 감각이 바뀐다.
단과 마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욱.”
“괜찮으세요?”
단은 또 헛구역질을 했다.
체질이 공간 이동과는 안 맞는 모양이었다.
간혹 심하다 싶을 정도로 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감각이 태생적으로 예민한 이들이 그랬다.
단은 구석 쪽으로 달려갔다.
턱. 턱.
마리나가 단의 등을 두드려 주는 사이, 풍경이 바뀌었다.
화려한 장식이 눈을 끌었는지, 리옐은 신기하다는 듯 두리번거렸다.
간신히 진정한 단은 팔뚝으로 입을 닦으며 다가왔다.
“화려하군요. 이곳이 세 번째 층입니까?”
“그래. 정확히는 팔베르크 제국 황성의 홀이지.”
“……그러고 보면 도련님께선 전생에, 제국 소속이셨지요.”
“이거 만들 때는 아니었어. 아마 할리온 남작의 기억의 일부가 재현된 거겠지.”
세 번째 층의 있는 ‘나’는 이 던전을 만든 직후의 델 로안이다.
이 던전을 만들 때 나는 팔베르크 제국 소속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 당시의 팔베르크는 제국이 아닌 소국이라고 부를 만한 나라였다.
리옐은 마리나의 손을 잡고 홀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반짝거려!”
“반짝거리네요.”
“비싸겠지?”
“비싸겠죠.”
“챙길까?”
“챙기…… 네?”
누가 가르쳤는지, 참 잘 가르쳤다.
어차피 실물이 아니라 챙겨 봤자 의미가 없지만.
내가 흐뭇하게 리옐을 보고 있으니, 마리나가 조금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언제 이렇게 교육시켜 놓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고놈 참 똑똑하군.”
그때, 옥좌 근처에서 로브 차림의 노인이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노인의 등장에, 단이 검을 뽑아 들었다.
마리나도 조금 물러섰다.
노인, 델 로안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내 그렇게 수상한가? 만나기만 하면 경계부터 하는군.”
눈살을 찡그린 단은 노인과 나를 번갈아 살폈다.
주춤주춤 내 옆으로 다가와서 속삭였다.
“도련님, 혹시 저분께서…….”
“그래.”
“음.”
이미 애들에게는 모든 설명은 마친 후였다.
저 노인이 델 로안이라는 것.
그리고 실제가 아니라, 이 던전을 만들 당시의 내 기억과 같은 개념이라는 것까지.
자세히 설명하면 끝도 없지만, 대충 알아듣기만 하면 상관없었다.
델 로안은 천천히 우리를 살폈다.
“좋은 종자들이구나.”
“…….”
“저 아이는, 음?”
델 로안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더니, 마리나의 옆에서 출현했다.
마리나가 리옐을 뒤로 숨겼다.
리옐은 마리나의 다리 옆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괜찮아.”
내가 허락하자, 마리나가 주춤 물러났다.
리옐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델 로안과 리옐의 시선이 부딪쳤다.
둘 다 조금 묘한 눈초리였다.
“평범한 나무의 드라이어드라고 생각했건만. 이제 보니 신목의 아이로구나.”
“아빠?”
“……지금 내게 말한 것이냐?”
리옐은 나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갸웃 기울이더니, 혼란스러운 얼굴이 됐다.
“아빠가 왜 두 명이야?”
“뭐라?”
델 로안이 나를 봤다.
눈이 마주쳤다.
아마 바로 알아본 듯싶었다.
입이 점점 벌어졌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리옐을 가리킨다.
“지금 이 아이가 하는 말이.”
“아마 진짜일걸.”
* * *
리옐의 친화력은 대단했다.
어느새 델 로안의 수염을 자신의 머리에 얹으며 놀고 있었다.
낯가림은 찾아볼 수 없었다.
델 로안은 내 어깨를 붙잡았다.
“혹시 미쳤더냐?”
“뭐.”
“건드려도 하필!”
“안 건드렸거든?”
“환장하겠군.”
내 환생보다 리옐이 더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델 로안은 나를 짤짤 흔들다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팔자에도 없는 애까지 생기다니.”
나와 비슷한 감상이었다.
하나 더 있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이 당시에만 해도 마법과 관련된 일 외에는 회의적이었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만, 많이 완화된 것이다.
“히.”
제 얘기를 하는 걸 알고 있는지, 리옐이 웃었다.
델 로안은 수염을 가지고 노는 리옐을 내려다보았다.
리옐은 해맑게 웃으며 두 팔을 뻗어 왔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델 로안이 나를 봤다.
나는 행동을 해석해 줬다.
“안아 달란다.”
“……하아, 오냐. 그러려무나.”
“늙은 아빠!”
“사실이지만, 영 탐탁지 않구나.”
델 로안은 매우 떨떠름한 표정이 됐다.
그러면서도 리옐을 안아 들었다.
마리나가 조용히 내게 속삭였다.
“평범한 할아버지 같으시네요.”
“어떻게 생각했는데?”
“좀 더, 엄청 위압감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틀린 건 아니지.”
기억의 일부라고 해도, 나는 나다.
저 노인, 델 로안은 지금의 나보다 수십, 수백 배는 강하다.
9서클까지는 힘들겠지만, 7서클 마스터 수준의 마법은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 이 공간에서 나갈 수 없다는 제약이 있었다.
“격을 숨기고 있는 거야.”
“힘을 숨기는 것과 비슷한 겁니까?”
단이 되물었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개념이다.
일정 수준에 도달한 강자는 가만히 있어도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느낌을 준다.
조금 극단적인 예로 드래곤 피어를 들 수 있다.
“비록 힘은 제한되어 있더라도, 격은 반신급이니까.”
“반신…… 도련님께선 대단한 분이셨군요.”
“대마법사였다고.”
단과 마리나는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하여튼 종자라는 것들이.
혀를 차며 델 로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영락없이 손주와 놀아 주는 할아버지였다.
“그러고 보니, 할리온이라는 멍청한 놈 하나가 찾아왔다.”
“알고 있어. 어떻게 처리했지?”
“내게 덤비더군.”
“멍청한 놈이네.”
“멍청한 놈이지.”
자문자답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델 로안도 마찬가지인지,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지. 일단, 진짜 죽은 것이 사실이었군.”
“그래. 나 뒈졌다. 환생했고.”
“여기에 왔다는 건, 기억을 찾기 위해서겠지?”
“잘 아네. 내놔.”
델 로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억은 줄 수 없다.”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다.”
델 로안은 재주 좋게 머리 위로 올라간 리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겼다.
딱!
돌연 홀이 들판으로 바뀌었다.
델 로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들어 올렸다.
우웅.
대기 중의 마나가 진동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잔디에 맺혀 있던 이슬이 굳어 얼음이 됐다.
일전에 렘브란트 님푸스가 한번 시도했던 7서클 마법.
블리자드(Blzard)가 상공에 출연했다.
렘브란트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연산 속도였다.
쩌저적!
“이게 무슨……! 뒤로!”
단은 마리나와 리옐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좋은 판단이다.
나는 델 로안과 마주보았다.
델 로안은 감정이 빠져나간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나보다 약한 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
“…….”
“기억을 원한다면, 나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염병하지 말고, 그냥 주면 안 되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텐데.”
“알지. 너는 나니까.”
과거의 델 로안은 내게 전투를 제안하고 있었다.
이유는, 내 성장 부족이다.
전투로 내가 챙길 수 있는 이득은 꽤 많다.
나는 마리나와 리옐 앞에 선 단을 흘겨봤다.
‘단과 대련을 자주하긴 하지만.’
한계가 있다.
같은 소드 익스퍼트 초급이긴 하지만, 나는 네 개의 마나 서클이 추가로 있다.
내가 검만 사용한다면 모를까.
마법까지 사용하면 실력 차이가 심했다.
파울과의 재전에서 한 수에 끝냈던 것처럼, 손쉽게 이길 수 있다.
결국 단과의 대련에서는 검술만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과 검의 조합. 실험해 보고 싶긴 했는데.’
이번에 샌드 웜을 사냥하면서 몇 가지 실험해 본 것이 있긴 했다.
인간을 상대로 전력으로 부딪쳐 보고 싶긴 했다.
수가 전부 읽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과거의 나.
“난이도가 너무 높은데?”
“무얼. 상대도 안 되는 것이 당연한 일.”
과거의 델 로안은 7서클 대규모 공격 마법을 간단하게 사용했다.
아마 7서클 마스터 수준일 것이다.
렘브란트 님푸스, 제국의 최고 전력 중 하나와 같은 힘.
지금의 내가 달려든다면?
상처도 못 낸다.
“그러니, 나는 블리자드(Blizard)의 캐스팅을 유지하면서 싸우도록 하지.”
“흠, 여전히 내가 불리하긴 한데.”
“언제까지 유리한 싸움만 할 수는 없지 않나?”
“알아.”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꽤 큰 핸디캡이었다.
델 로안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야말로 자신과의 싸움이군.”
“다른 사람을 넘어서는 것보다, 나를 넘어서는 게 힘들다는 말이 있는데.”
“핸디캡이 더 필요한가?”
“꺼져.”
“그냥 해 본 말이었다.”
신호는 필요 없었다.
델 로안이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손을 올렸다.
마나 서클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영창이 이어졌다.
“전 원소 저항(Resist All Element), 마나 아머(Mana Armor), 서클 부스트(Circle Boost).”
“전 원소 저항(Resist All Element), 마나 아머(Mana Armor), 마나 번(Mana Burn).”
역시 나는 나다.
전투 스타일이 비슷했다.
다른 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전반적인 신체 능력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 마나 번을.
델 로안은 서클 회전을 가속하는 서클 부스트를 사용했다.
‘서클 회전을 가속시키면 마법 시전 속도가 빨라지지만, 동시에 마나 소모도 빨라진다.’
블리자드의 캐스팅을 유지하고 있는 델 로안이다.
지금도 엄청난 집중력과 마나를 소모하고 있을 것이다.
장기전으로 갈수록 불리하니, 빠르게 끝내겠다는 뜻.
델 로안이 손을 뻗었다.
“시작은 가볍게 하지.”
치직.
손끝에서 섬광이 튀었다.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ning).
나는 황급히 마나 배리어(Mana Barrier)를 캐스팅했다.
작은 낙뢰가 쳤다.
꽈광!
낙뢰에 부딪힌 배리어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공격을 허용했을 것이다.
캐스팅 속도가 다른 마법사보다 현저하게 빠르다.
여기서 생각을 멈춰선 안 된다.
연기에 시야가 가려진 상태.
‘나라면.’
곧장 뒤를 돌아보았다.
공중에 살짝 떠오른 델 로안이 내 머리를 향해 손을 얹으려 하고 있었다.
마법사와 기사의 싸움은 기본적으로 거리 싸움이다.
거리를 좁힐수록 기사가 유리해진다.
그런데, 체인 라이트닝에서 피어오른 연기로 시야가 가려진 사이, 블링크.
마법사면서 기사에게 접근전을 걸어온 것이다.
아주 기본적인 상식이 있다면, 하지 않을 일.
‘이럴 것 같더라. 빌어먹을.’
나는 마법사 시절에도 접근전에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웬만한 기사는 찍어 누를 수 자신이 있었다.
손을 가까이했다는 건, 캐스팅하려는 마법의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뜻.
홀드(Hold), 슬립(Sleep) 혹은 모디파이 메모리(Modify Memory).
접촉을 필수로 하는 환상 마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나같이 치명적인 마법들이었다.
“큭.”
어쩔 수 없이 뒤로 넘어지듯 손을 피했다.
델 로안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몸이 지면에 닿기 전에, 한 손을 땅 쪽으로 향했다.
푸쉬(Push).
탕!
마나가 강하게 땅을 밀었다.
나는 그 반동으로 몸을 반 바퀴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부웅!
검이 원을 그리며 허공을 베었다.
델 로안은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블링크로 거리를 벌린 것이다.
만약 추가로 공격을 시도했다면, 한 방 먹일 수 있었는데.
델 로안이 여유롭게 마법을 준비했다.
“신중하지?”
“역시 나군.”
“자화자찬 아닌가?”
나는 그의 수를 읽을 수 있다.
델 로안도 내 수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쭙잖은 환상 마법이나 속임수는 절대 통하지 않는다.
마법으로 전면전은 당연히 밀린다.
최대한, 환생 이후의 전투 방식으로.
쿵!
발로 땅을 찍었다.
파일 벙커(Pile Bunker) 변환 마법.
리버스 아이언 메이든(Reverse Iron Maiden).
콰가가가가가!
내가 발을 찍은 부분부터, 송곳들이 일직선을 그리며 솟아올랐다.
델 로안의 몸이 붕 떠올랐다.
플라이(Fly)로 비행해, 송곳들을 간단하게 피해 낸 것이다.
델 로안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찡그렸다.
“이런 마법은 4서클 이상의 마법사에게 별 의미 없을 텐데.”
“알아.”
콰앙!
내 발밑에서 뭉툭한 송곳이 솟아오르며, 나를 밀어냈다.
나는 송곳을 밟고 뛰어올랐다.
델 로안을 향해 뻗은 송곳들을, 징검다리처럼 뛰어넘는다.
그 끝에는 델 로안이 있었다.
“빠르군.”
순식간에 델 로안의 앞까지 다다랐다.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공중에서 블링크는 사용하는 건 까다로운 일이다.
하지만 상대는 내 기억.
내 계산 능력이라면, 공중에서 블링크를 하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다.
블리자드 같은 대규모 공격 마법을 캐스팅하는 중이라면, 말이 조금 달라진다.
트리플 캐스팅에, 불안정한 공간이동.
내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다.
카앙!
당연히, 방어한다.
델 로안의 앞에서 나타난 푸른 장벽.
내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마나 배리어다.
이름 없는 검은 배리어를 뚫어 내지 못했다.
블리자드를 캐스팅하고 있더라고, 델 로안의 마나 수준은 7서클.
소드 익스퍼트 초급의 오러로 뚫어 내긴 힘들었다.
끼기기기긱!
델 로안의 손끝에서, 마법진이 하나 더 떠올랐다.
블리자드, 마나 배리어에 더해서 공격 마법을 추가로 사용한 것이다.
트리플 캐스팅.
눈이 마주쳤다.
“체크메이트 아닌가?”
“응. 아니야.”
나는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오러와 마나가 접하면서 일어나는 폭발.
샌드 퀸에게 이것을 실험하면서, 알아낸 점이 하나 있다.
비록 화력은 5서클 공격 마법, 익스플로전(Explosion)에 못 미친다.
그러나 마법을 파훼하는 데에는 아주 유효했다.
“뭐……!”
콰앙!
오러가 폭발하며, 나는 뒤로 튕겨 나갔다.
폭발을 어느 정도 막아 내긴 했지만, 이쪽에도 피해는 있었다.
이래서야 완전히 자폭기나 다름없었다.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폭발의 여파로 생긴 푸른 연기가 서서히 걷혔다.
“해치웠나?”
구경하던 단이 중얼거렸다.
나는 단을 노려보았다.
하필 그 대사를 하다니.
아니나 다를까, 델 로안은 멀쩡했다.
그 앞에는 푸른색의 마나 배리어 대신, 흰색의 장벽이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7서클 방어 마법, 앱솔루트 배리어(Absolute Barrior).
절로 욕이 나왔다.
“야이 씨, 7서클 마법을 더블 캐스팅하면 내가 어떻게 이겨.”
“나도 부담이 안 오는 건 아니다.”
“미치겠군. 7서클 마스터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을 과소평가하는군.”
웅.
앱솔루트 배리어가 사라졌다.
델 로안은 사납게 웃으며 뚜둑 목을 꺾었다.
“계속하지. 이번 공격은 좀 재미있었거든.”
“마나 아직도 다 안 떨어졌냐?”
“넘친다.”
“더럽게 세네.”
“반대로 너는 약하군. 검을 너무 보조적으로 쓰는데. 방어 수단 같은 느낌이야.”
“난 마법사야.”
“이젠 아닐 텐데.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 봐라. 지금처럼 잘 조합시킬 수 있잖나.”
“맞는 말이라서 짜증 나는군.”
검을 다시 움켜쥐었다.
아직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
2라운드가 시작됐다.
* * *
조금 떨어진 곳.
단과 마리나, 그리고 리옐은 둘의 전투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도 전투는 조금 이상한 감이 있었다.
지그문트가 새로운 방식의 공격을 하면, 델 로안이 받아 주는 느낌이었다.
“전투라기보다는 대련이군요.”
그렇게 평가한 단은 싸움을 유심히 지켜봤다.
지그문트의 동작에서 많은 힌트를 얻고 성장한 단이다.
그런데 지금 지그문트는, 전과 차원이 달랐다.
자신과 전투를 할 때 얼마나 봐줬는지 알 수 있었다.
마리나가 중얼거렸다.
“너무 다른 세계 같네요…….”
“그 느낌. 알 것 같습니다.”
쾅! 쾅!
불덩어리가 서로 부딪친다.
땅이 솟아오르고, 폭풍이 이는가 하면, 번개가 친다.
축소판 자연재해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법사가 봤다면 거품을 물며 기절할 것이다.
둘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단과 마리나는 마법에 대해 잘 모른다.
대단히 고차원적인 전투일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도련님, 강하시네요.”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보니 저와는 확실히 수준이 다르군요.”
단과 마리나는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듯한, 무력감.
다른 세계에 동떨어져 있다는 감각.
그들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리옐이 불쑥 튀어나왔다.
“마리나 언니?”
“……네?”
“혹시 아빠한테 반했어? 너무 멋있어서?”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불륜은 안 돼!”
마리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리옐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말이야. 아빠랑 아빠 중에 누가 이길까?”
“어…… 예?”
“솔직히 아빠가 이기겠지? 단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해?”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단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자 리옐이 허리에 손을 얹고 씩씩 화를 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예?”
“그럼 지금 아빠가 지는 건 당연한 결과라는 거야?”
“아, 아닙니다.”
“사과해!”
“죄송합니다……?”
“좋아. 이번 한 번만 봐주도록 하지. 앞으로 잘해.”
리옐은 지그문트가 그러듯 넓은 아량을 가진 척 뒷짐을 지었다.
단이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마리나 언니도.”
“네. 네.”
“히.”
리옐은 그제야 흡족한 얼굴로 둘 사이에 파묻혔다.
분위기가 조금 나아졌다.
단이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원래 건빵 같은 비상식량을 담는 주머니였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것이 담겨 있었다.
“튀긴 옥수수라도 드시겠습니까?”
“이건…… 도련님께서 자주 드시던 거네요.”
“뭐 보면서 먹으면 그렇게 맛있다더군요.”
콰쾅!
“야이 씨! 반칙!”
“싸움에 반칙이 어딨냐! 이제 좀 죽어라!”
“죽어라? 이 자식이 진짜!”
지그문트와 델 로안의 전투는 점점 격화되고 있었다.
공격이 계속 막히자, 지그문트는 점점 말도 안 되는 수를 두기 시작했다.
델 로안은 여차하면 블리자드를 떨어트릴 기세였다.
“정말 궁금하군요. 누가 이길지.”
“저는 도련님을 응원해요.”
“도련님의 전생…… 대마법사께서 압도적으로 강한 것 같긴 합니다.”
리옐은 튀긴 옥수수를 오물거리며 한마디 했다.
“어차피 이기는 건 우리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