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23/134)

7

레온하트 왕국 대청소

자신의 방에 들어온 시프는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세계수님…….”

시프 레온하트는 세계수에게 완전히 매료됐다.

이 감정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상 한편에 있던 종이와 펜을 들었다.

그는 오랜만에 글을 썼다.

‘넋이 나갈 듯한 아름다움과 만물을 품을 듯한 자애로움을 겸비한…….’

세계수의 민낯을 모르는 시프였기에, 기록과 실제 사이에는 매우 큰 간극이 있었다.

문득 불사의 교도와 관련된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태껏 자신을 구원할 신의 성유물이라고 믿어 왔던 것들.

시프의 눈에는 모두 쓰레기로 보였다.

‘방해다.’

불사의 교도와 관련된 것들을 싹 치워 버린 시프는 눈을 감았다.

다시 한번 감각을 곱씹었다.

하늘정원의 몽환적인 풍경.

그리고 세계수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의 충격.

단순히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세계수님이야 말로 내가 모셔야 할 신이다.’

시프는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았다.

세계수에게서 느꼈던 따뜻한 생명의 기운.

교리와 말로만 접한 불사의 괴물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럴 게 아니라, 엘비아로 가야 한다.’

시프는 벌떡 일어났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엘비아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시프도 익히 알고 있었다.

엘비아에 살아서 들어간 인간은 없었다.

멋모르고 들어가 봐야, 요정족 사냥꾼으로 몰려 숲지기들에게 죽임을 당할 뿐이다.

‘만약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레온하트 왕국과 엘비아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할 것이다.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세계수가 위험할 수 있었다.

시프는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엘비아로 갈 수 있을까.

그런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방해를 받은 시프가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냐?”

“나다.”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불분명한 목소리.

레온하트의 수호자, 지그문트였다.

시프는 곧바로 문을 열었다.

가면을 뒤집어쓴 지그문트가 방에 들어왔다.

“들어오시지요.”

“말투가 바뀐 것 같은데?”

“하하.”

시프는 정중하게 지그문트를 대접했다.

지그문트는 그에게 있어서 구원자와 같았다.

떡하니 시프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지그문트가 물었다.

“그래. 진짜 신을 만난 소감은?”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중에 가장 개탄스러운 점은 여태껏 제가 이교도였다는 것입니다. 큰 죄를 지었습니다. 평생 세계수님을 모시며 속죄…….”

“오케이, 됐어. 그만해.”

지그문트는 손을 내젓더니, 책상에 올려진 글을 보았다.

시프가 써 놓은 세계수에 대한 찬가였다.

‘무슨 소설을 써 놨군.’

가면 너머의 얼굴이 급속도로 구겨졌다.

글을 내려놓았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이 준비도 없이 신의 본체와 마주했다.

인생과 가치관을 송두리째 흔들 만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건 정도가 좀 심하긴 한데, 괜찮겠지.’

이 정도면 문제는 안 생길 것 같다.

시프의 존재는 레온하트와 엘비아 사이의 매듭이 될 것이다.

지그문트는 결정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세계수를 한 번 더 보고 싶니?”

“예.”

시프는 즉답했다.

확인차 다시 물었다.

“세계수를 모시고 싶니?”

“예!”

지그문트는 잠깐 고민하는 척을 했다.

비록 사이비에 빠지긴 했지만, 시프 레온하트는 나쁜 인물이 아니었다.

레온하트의 부패를 간파한 통찰력도 있었고.

고집이 있고 멘탈이 좀 약하지만, 인품이나 능력이 꽤 괜찮았다.

시프는 애절한 눈으로 지그문트를 보았다.

지그문트는 종이 한 장을 뜯어 글을 썼다.

간략한 소개장이었다.

“엘비아로 가라. 이걸 보여 주면 내치진 않을 거다.”

시프는 두 손으로 소개장을 받아 읽었다.

요정족의 언어로 쓰여 있어, 뜻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프는 감격했다.

어떻게 세계수를 만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지그문트가 별거 아니라는 듯 해결책을 제시해 준 것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됐고, 부탁할 일이 있는데.”

“뭐든, 말씀만 하시지요.”

“레온하트와 엘비아 사이에 동맹을 추진해 볼 생각이야.”

“아, 좋은 생각입니다! 구체화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세계수를 모시는 종교도 따로 만들 건데, 네가 한번…….”

지그문트는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시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렀기 때문이다.

지그문트는 조금 당황했다.

이렇게 격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왜 울어?”

“아니. 수호자님께 감격해서요. 진정으로 세계수님을 흠모하시는군요.”

지그문트는 그런 이유로 세계수의 신도를 모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신실한 신도는 미약하지만, 신에게 힘이 된다.

신살로 죽어 가는 세계수를 조금 도울 생각이었다.

시프는 제 입맛대로 지그문트의 뜻을 왜곡했다.

“세계수를 흠모하진 않는데.”

“부끄러워하실 거 없습니다.”

“뒈질래?”

지그문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됐고, 이거 들고 엘비아로 꺼져.”

“예. 알겠습니다.”

“아, 맞다. 요정족 언어 모르지?”

“가르쳐 주실 겁니까?”

“바빠.”

“지금 당장 요정족의 언어를 아는 언어학자를 수배해 보겠습니다.”

* * *

“정말 수호자 경의 말마따나 총체적 난국이군.”

“이것들이 귀족인지 세금 도둑인지 조금 헷갈리는데.”

“개 먹이로 던져 줘도 모자랄 놈들이지요.”

“이런 거 먹이면 배탈 나지 않을까요?”

왕의 집무실.

주연 배우가 한자리에 모였다.

국왕 역, 파서벌 레온하트.

소드 마스터 역, 요하네스 레드라인.

적탑주 역, 발레리아 로안.

레온하트의 수호자 역, 나.

나 빼고는 다 본직인 것 같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파서벌 레온하트는 서류를 확인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발등이 너덜너덜하군.”

“믿었던 도끼가 많나 봅니다.”

“전부 중앙 귀족 아닌가. 게다가 대부분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이들이야.”

“거물이라고 할 만한 놈들만 골라 털었으니까요.”

“증거가 이리 명확하니, 발뺌할 수도 없겠어.”

파서벌은 심호흡하며 스스로 화를 삭였다.

“귀족이라는 작자들이 명예를 버리고, 제 배를 더 불릴 궁리만 하고 있었구나.”

“국왕 폐하께서 너무 온건하게 움직이시니, 밥버러지들이 전하를 만만히 본 것입니다.”

내 말에, 레드라인 후작이 질겁했다.

제정신으로 하기 힘든 첨언이었다.

당장 왕실 모독죄로 잡혀가도 할 말이 없었다.

새삼스러운 일이다.

왕자 뒤통수도 때렸는데 뭔들 못 하겠는가.

‘어떻게 반응하려나.’

여기서 파서벌의 반응에 따라, 레온하트의 운명이 갈릴 것이다.

만약 파서벌 레온하트가 구제불능이라면.

레온하트를 떠나거나, 왕위 계승을 앞당길 생각이었다.

파서벌은 쓰게 웃으며 수긍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군. 결과가 짐의 앞에 있지 않나.”

“폐하…….”

나는 가면을 고쳐 썼다.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나쁘지 않은 반응이다.

충고와 쓴소리를 받아들이는 시점에서, 파서벌은 그럭저럭 합격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는 왕의 자질이 부족합니다.”

“자네! 말을 가려서…….”

레드라인 후작이 주의를 줬다.

조금 강하게 나간 면이 있었다.

왕에게 왕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했으니.

사형감이다.

파서벌 레온하트가 손을 들어 레드라인 후작을 제지했다.

“계속해 보게.”

“귀족들에게 얕보이고 있는, 힘없는 왕. 처음부터 이렇진 않았을 겁니다.”

내가 한참 팔베르크를 제국으로 만들 당시, 레온하트 왕국은 왕권이 강한 나라였다.

전 국왕은 힘을 쓸 줄 아는 왕이었다.

“폐하께선 스스로 힘을 내려놓으셨지요.”

파서벌 레온하트는 그 힘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감당할 자신이 없었는지, 어리석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그 결과.

부패한 귀족들이 활개를 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파서벌 레온하트는 침통한 얼굴로 주억거렸다.

“팔베르크 제국의 현 황제는 패왕입니다.”

황제는 패왕이다.

패도를 걷는 왕.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현 황제에게는 그런 자질이 있었으니까.

파서벌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나 궁금한 얼굴이었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폐하께서는 패왕이 되지 못할 겁니다.”

파서벌 레온하트는 패왕의 재목이 아니다.

위엄도, 힘도, 지략도, 무력도, 모든 면에서 황제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대신 다른 길이 있습니다.”

“다른 길?”

“성군이 되셔야 합니다.”

“성군.”

파서벌 레온하트는 온건하다.

변화보다는 유지를.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보다는 안정된 삶을 추구한다.

그래선 안 된다.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잡는 것이 현명한 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 있는 이름. 전부 쳐 내야 할 겁니다.”

레온하트 왕국은 오랫동안 고여 있던 연못이다.

악취가 나고, 녹색 이끼가 둥둥 떠 있는 연못.

지금은 물갈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벌레 사는 물을 전부 버리고, 새로운 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못 주인이 결단을 내려야 했다.

성군은 자애롭지만, 결단력 또한 겸비해야 한다.

“이들을 한 번에 모두 낸다면, 왕국이 흔들릴 걸세.”

“비 온 뒤 땅이 더 단단해지는 법이지요.”

“흠.”

파서벌 레온하트는 지금 당장 국정에 필요한 귀족들을 쳐 내지 않으려 했다.

무척 현실적인 결론이었다.

당장 이 모든 대귀족들을 쳐 내면, 파사벌의 말대로 왕국이 흔들릴 것이다.

“결정은 폐하의 몫입니다.”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면, 리턴도 없다.

파서벌은 침음을 흘렸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왕가 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왕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것이 왕의 일이다.

“짐에게 왕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했지.”

“확실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 묻겠네.”

파서벌은 가면 너머의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짐은 자질이 부족한,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왕이 맞네.”

“폐하.”

“한데 수호자 경은 어찌 짐에게 성군이 되라 하는가?”

파서벌 레온하트가 여러모로 부족한 건 사실이다.

혈통이라는 명목으로 왕좌에 앉아 있는, 허수아비 왕.

현왕은커녕, 진짜 왕조차 되지도 못할 수 있었다.

“왕에게는 여러 덕목이 있지요.”

결단력, 화술, 연기력, 그 외에도 수많은 덕목이 필요한 것이 왕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가진 왕은 없다.

팔베르크의 황제조차도 부족한 점은 있다.

“폐하께서는 어쩌면 왕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왕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인복이 있으시잖습니까.”

레드라인 후작과 마이어 남작은 제국에서도 찾기 힘든 인재였다.

발레리아 로안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지금은 다른 탑주보다 실력은 떨어지지만, 그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서벌 레온하트가 인복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내가 왕을 지지한다.’

소국을 십수 년 만에 제국의 자리에 올려놓은, 내가 파서벌 레온하트를 지지한다.

파서벌이 두려워할 이유는 하등 없다.

파서벌 레온하트는 레드라인 후작과 나, 발레리아를 차례로 보았다.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던 대답이 나왔다.

“판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무대도, 소품도, 이제는 주연 배우도 완벽히 준비됐다.

남은 건 본무대뿐이다.

“일단 허수아비에서 벗어나, 진짜 왕이 되는 것부터 시작하지요.”

얼마 뒤, 중앙 귀족들이 왕성에 소집됐다.

왕성 부지 내의 훈련장.

레온하트의 왕실 근위기사들은 뒷짐을 진 채 일렬횡대로 섰다.

땡볕 아래 완전 무장을 한 기사들은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근위대장이 앞으로 나섰다.

“일동, 차렷!”

척!

미동도 없이 서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발을 붙였다.

파서벌 레온하트가 훈련장에 들어섰다.

근위대장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국왕 폐하께! 경례!”

“레온하트의 하늘을 뵙습니다!”

파서벌은 편히 있으라는 뜻으로 손을 저었다.

그러나 근위기사들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건국제에서 근위기사 하나가 광전사화 했다.

앞장서서 국왕의 방패가 되어야 할 왕실 근위기사가, 국왕의 목을 노린 검이 된 것이다.

근위기사들은 매우 자책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적절하게 개입하지 않았다면.’

파서벌 레온하트는 근위기사의 손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근위기사들은 만회의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국왕이 직접 근위대를 찾았다.

근위대장은 생각했다.

‘이건 기회야. 국왕 폐하께 깊은 인상을 남겨 주는 거야. 난 할 수 있어.’

국왕의 말 한마디에 곧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몸을 긴장시킨다.

파서벌은 근위기사들을 슥 둘러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파서벌이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 레온하트의 중앙 귀족들이 왕성에 모일 걸세.”

파서벌 레온하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폭탄선언을 했다.

“그리고 오늘에 한하여, 왕실 근위대의 명령권을 완전 양도하겠네.”

“예?”

근위대장은 무심코 되물었다.

귀가 잘못되었나 싶었다.

오직 국왕만이 왕실 근위대에게 명령할 수 있다.

이따금 근위기사 중 일부가 차출되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런데 왕실 근위대의 명령권을 완전히 양도한다니.

전쟁 때나 가끔 있는, 극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근위대장은 혼란에 빠졌다.

“들어오게.”

가면을 뒤집어쓴 지그문트가 들어왔다.

근위대장의 눈이 커졌다.

그뿐만 아니라, 근위기사들도 조금 동요했다.

근위기사 중 상당수가 건국제 당시 지그문트를 목격했다.

그들은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야, 오랜만이야?”

근위대장과 눈이 마주친 지그문트는 천연덕스럽게 알은체를 했다.

근위대장은 건국제 당시, 지그문트와 합을 맞춘 적 있다.

광전사를 상대했던 방패 근위기사.

그가 현 근위대장이었다.

파서벌은 지그문트의 등을 두드렸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경일세. 익히 알고들 있겠지?”

“물론입니다!”

“오늘 하루, 근위대의 명령권은 수호자 경에게 양도하겠네.”

“예, 알겠습니다!”

“수호자 경을 실망시키지 말게나.”

국왕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지그문트는 가면을 고쳐 썼다.

“낙하산도 이런 낙하산이 없네. 그지?”

“…….”

“걱정 마라. 하루뿐이니까. 아, 폐하 옆에는 레드라인 후작님이 있으니까 안심하고.”

근위대는 묵묵히 지그문트를 응시했다.

근위기사들은 하나하나 상당한 강자였다.

이 중에 소드 익스퍼트 아래의 기사는 없다.

기세에 눌릴 법도 한데, 지그문트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소드 마스터, 드래곤, 심지어 신 앞에서도 멀쩡한 지그문트다.

이런 기세에 눌릴 리 없다.

근위기사들은 나름대로 지그문트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동요조차 없다. 상당한 강자.’

‘실력을 가늠하기 힘들군.’

‘거대한 뱀도 부렸었지.’

지그문트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종이 다발을 꺼내 근위 기사들에게 하나씩 넘겼다.

종이를 받은 근위 기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종이를 봤다.

“이건…….”

“대본이다. 조만간 극 하나를 올릴 예정이거든.”

근위 기사들은 대본을 확인했다.

지그문트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각자 역할 다르니까, 동선 외워라. 대사 있는 놈들도 있으니까, 주의하고.”

* * *

그날 저녁.

레온하트의 중앙 귀족들이 왕성에 모였다.

영문도 모르고 소집된 그들은 대화를 나눴다.

“갑자기 소집이라니.”

“폐하께서 이리 급하게 귀족들을 소집한 건 처음 아닙니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요.”

“중대한 사항이라면 언질이 있었겠지요.”

그들은 안내에 따라 왕성의 홀로 향했다.

왕실 근위기사 둘이 홀의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사뭇 근엄한 얼굴로 선 근위기사는 감정 없는 눈으로 귀족들을 보았다.

몇몇 귀족은 눈살을 찡그렸지만, 면전에 두고 뭐라 하진 못했다.

대신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근위대가 원래 저런 느낌이었던가?”

“글쎄요. 오늘따라 힘이 들어간 것 같긴 하군요.”

“건국제 때는 무능의 극치를 보인 놈들이. 쯧.”

광전사들을 보자마자 냅다 도망친 귀족들이 할 말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온 귀족이 홀에 들어섰다.

그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끼익- 쿵!

근위기사 둘이 문 앞으로 다가와 섰다.

꼭 나가지 못하게 막는 모양새였다.

눈치 빠른 소수의 귀족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어쩐지 평소와 다르지 않습니까?”

“보안이 철저해진 것 같긴 하군.”

“왕성 내부에서 한 번 테러가 일어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벽을 등지고 선 근위기사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앞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이윽고 국왕, 파서벌 레온하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드라인 후작과 함께였다.

귀족들이 경의를 표했다.

“레온하트의 하늘을 뵙습니다!”

파서벌 레온하트는 담담한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왕좌에 앉았다.

레드라인 후작은 왕좌의 오른쪽에 섰다.

“폐하! 어쩐 일로 귀족들을 소집하셨는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먼저 입을 연 것은 대귀족, 멜든 공작이었다.

레드라인 후작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국왕의 허락을 구한 것도 아니고, 대뜸 왜 불렀냐고 질문하고 있었다.

국왕이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심지어 다른 귀족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왕권이 땅에 떨어졌구나.’

이들 중 반절 이상이 왕가를 지지하는 왕당파다.

첫째 왕자파와 둘째 왕자파가 나뉘면서, 이런 경향이 강해졌다.

실제로는 새로운 허수아비를 세워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려는 속셈을 숨기고 있었다.

레드라인 후작은 흘긋 파서벌에게 눈을 돌렸다.

파서벌 레온하트는 왕좌의 손잡이를 꽉 잡고 있었다.

“멜든 공작.”

그때, 왕좌 뒤에서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반신반의했건만, 진실이었나.”

레온하트의 수호자 차림을 한 지그문트였다.

지그문트는 파서벌의 왼쪽에 서 멜든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지금 떠드는 놈들. 전부 입 닥쳐라.”

웅성거리던 귀족들은 눈을 깜빡였다.

이목이 지그문트에게 쏠렸다.

지금 저놈이 뭐라고 말한 거지?

지그문트는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이어서 말했다.

“뭘 꼴아 봐?”

“무례하군. 어전이다.”

“폐하께서 입을 여시기도 전에 아가리 터는 놈보단 예의 있지 않나?”

반박하려던 멜든 공작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사실이었다.

지그문트는 멜든 공작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근처에 있던 귀족들은 주춤 물러서며 길을 열었다.

멜든 공작 앞에 선 지그문트는 얇은 책 한 권을 꺼냈다.

“어디 보자. 멜든, 멜든…….”

팔락팔락 페이지를 넘기다가, 어느 한 부분에서 멈춰 섰다.

“여깄군. 쯧쯧쯧. 많이도 해 처먹었네.”

“무슨……?”

근위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그문트는 목을 가다듬더니 읊었다.

“재산 허위 신고로 조세 부담 회피, 뭐 이거야 기본 옵션이군. 관직도 팔았고, 꿍쳐 둔 비자금은…… 어우야, 뭐 성이라도 사게?”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증거도…….”

“내가.”

책을 보던 지그문트가 고개를 들어 멜든 공작을 쏘아보았다.

“입 닥치라고 했지.”

멜든 공작의 입이 저절로 닫혔다.

항변하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지그문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근위기사 둘이 멜든 공작의 양옆에 섰다.

완전 무장한 근위기사는 멜든 공작이 날뛰기라도 하면 바로 제압할 기세였다.

“아직 안 끝났으니까 들어. 무고한 왕국민을 살해, 은닉한 횟수만 스무 번이 넘어가고, 사병도 지랄 맞게 많이 모았네. 이 정도면 왕국 법 위반이거든. 또…….”

지그문트는 멜든 공작의 부패를 줄줄이 읊었다.

멜든 공작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단 하나의 오차도 없는 진실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증거 있냐고? 있지.”

툭. 툭.

비자금 장부, 기록의 불일치, 사유 재산 목록, 증언이 담긴 서류.

지그문트는 부패의 증거를 꺼내 멜든 공작의 발치에 내던졌다.

“이래도 못 믿겠어? 그럼 자백도 한번 받아 볼까?”

“푸하!”

지그문트가 말을 마친 순간, 멜든 공작의 말문이 트였다.

멜든 공작은 증거들을 보더니 손을 덜덜 떨었다.

“폐하! 모함입니다! 이것들은 전부 조작된 것들입니다!”

“말 골라서 해야 할 거야.”

“저는 단 한 번도 ……!”

다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그문트의 옆에서 발레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비지빌리티(Invisibility)를 통해 숨어 있던 것이다.

“적탑주?”

“어째서 여기에……?”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발레리아는 멜든 공작의 등에 손을 얹고 있었다.

“터치 오브 트루스(Touch of Truth). 고대 마법인데, 혹시 아시나요?”

통상 마법도 아니고, 고대 마법을 귀족들이 알 리가 없다.

발레리아는 조곤조곤 마법의 효과를 설명했다.

“이 마법을 발동시킨 마법사와 맞닿은 대상은, 거짓을 말할 수 없답니다.”

발레리아가 지그문트를 만났을 때 사용한 마법.

지그문트는 가면 너머에서 조소를 지었다.

인간 거짓말 탐지기가 여기 있다.

“무슨 사술을 부린 거냐! 왕성에서는 마법을 쓸 수 없을 텐데……!”

“폐하께서 들고 계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멜든 공작은 발레리아의 말에 따라 파서벌에게 눈을 돌렸다.

파서벌 레온하트는 왕의 지팡이, 왕홀을 들고 있었다.

레온하트 왕국의 국보.

왕성 내의 모든 마법을 차단하는‘사자의 왕홀’이었다.

왕홀의 끝에는 마법의 차단을 뜻하는 빛이 꺼져 있었다.

‘거짓을 말할 수 없다고?’

터치 오브 트루스는 ‘거짓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법’.

멜든 공작은 머리를 굴렸다.

개인의 의견을 말하거나, 교묘하게 진실을 말하면 파훼할 수 있다.

멜든 공작은 모르고 있었다.

그 수를 차단하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그럼 내가 말하는 그대로 따라 해 볼까? 이 증거는 조작된 것이며,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한 말은 모두 거짓입니다.”

“내가 왜……!”

“진실이라면,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멜든 공작은 푹 고개를 숙였다.

지그문트가 턱짓했다.

“끌고 가.”

대기하고 있던 근위기사 둘이 멜든 공작을 연행했다.

근위기사에게 붙잡힌 멜든 공작이 입을 열었다.

“……다 먹고살자고 한 짓이다.”

발레리아는 두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저게 제정신으로 한 변명이란 말인가.

지그문트는 뒤를 돌아 멜든 공작을 직시했다.

“멜든 공작, 음식이 부족해서 굶어 본 적은 있나?”

멜든 공작은 대답하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그문트는 멜든 공작의 앞으로 다가갔다.

손가락으로 멜든 공작의 부른 배를 쿡 찔렀다.

“먹고살자고 한 짓? 이만큼 처먹으면 배 터져 죽겠다. 이 새끼야.”

“새, 새끼? 나는 엄연한 레온하트의 귀족이다!”

“네가 말하는 귀족이 도대체 뭐지? 내세울 거라고는 가문의 이름밖에 없는 버러지를 귀족이라고 하던가?”

멜든 공작은 부들부들 떨다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나는 명예로운……!”

“명예? 추하게 자기 잘못을 부인하고 살 궁리만 하고 있는 놈이, 명예? 깔끔하게 인정하고 뒈지는 게, 네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명예라고 생각한 적은 없나?”

“네 이놈! 감히!”

퍽!

멜든 공작이 움직이자, 지그문트는 공작의 복부를 걷어찼다.

배를 정통으로 차인 멜든 공작은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근위기사들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런 공작을 붙잡고 있었다.

“쿨럭!”

“살살 찼으니까 환자인 척하지 마라. 환자인 척하는 정치인들만 보면 아주 병신을 만들어 버리고 싶거든.”

지그문트는 근위기사들에게 턱짓을 했다.

멜든 공작은 근위기사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지그문트는 좌우로 목을 꺾으며 다시 책을 폈다.

귀족들은 눈치챘다.

저 책은 그냥 책이 아니라, 살생부였다.

“쯧. 입 다물고 조사 받는 게 살 가능성이라도 찾을 유일한 길인데, 꼭 한마디가 많아.”

공작 위에 있던 중앙 귀족이, 한순간에 몰락했다.

찔리는 점이 있었던 귀족들은 공포에 질렸다.

지그문트는 그런 귀족들을 보며 혀를 찼다.

“얘들아, 쫄리면 자수해서 광명 찾자. 이른바 명예로운 죽음을 당하는 거지. 어때?”

내가 살생부를 덮었을 때, 홀이 한층 휑하게 변한 상태였다.

절반 가까운 귀족들이 근위기사에게 끌려갔다.

대청소는 끝났다.

준비가 철저했던 만큼, 귀족들은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잡혀간 귀족들의 자택은 이미 근위기사들에게 점거되었다.

도망치지도 못할 것이다.

“수고했네.”

“제 본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파서벌은 대본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

“예. 폐하.”

“수도 밖의 귀족들을 소집하게. 임시로 직책을 맡을 만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명을 받들겠습니다.”

“발레리아 로안 경.”

“예. 폐하.”

“당분간 감사를 맡아 주게.”

“물론입니다.”

홀에 남은 귀족들은 숨을 삼켰다.

부패한 귀족들을 모두 한 번에 잡아들였다.

레온하트 왕국의 최고 전력 둘이 왕을 따른다.

거기에 전설에서나 나오던 레온하트의 수호자까지 있다.

왕을 허수아비로만 생각하던 놈들에겐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수호자 경,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네.”

“하문하시옵소서.”

“여기 남은 이들은, 모두 청렴결백한 이들인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나는 남은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정말 청렴결백하다고 할 만한 귀족은 몇 없었다.

나머지는 죄질이 아주 경미한 이들뿐이었다.

“적어도 백성들의 고혈을 뜯어먹는 벌레는 아닐 것이라 사료됩니다.”

귀족들이 다급히 허리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어쩌면 운 좋게 살아남은 놈이 하나쯤 섞여 있을 수도 있다.

뇌가 있다면 알아서 사리겠지.

당분간 업무라는 연옥에 갇힐 불쌍한 놈들이다.

지금 잡혀간 대귀족들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

잘 잡는다면 유례없을 특진을 이뤄 낼 수 있을 것이다.

“경들이 잠깐 고생해 줘야겠소.”

“예, 폐하!”

귀족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한층 기합이 들어갔다.

여기가 중요하다.

파서벌 레온하트는 부패한 귀족을 대거 잡아들인 상태.

갑작스러운 물갈이에 당황할 것이다.

그는 폭군이 아니라 성군이, 패왕이 아닌 현왕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근위대.”

근위대장을 비롯해 남아 있던 근위 기사들이 자세를 바로 했다.

“조사가 끝나는 대로 죄가 밝혀진 이들의 전 재산을 몰수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죄질이 심각한 귀족은 작위를 폐할 것이다. 또한, 임시로 직책을 맡긴 귀족 중 훌륭한 능력을 보인 이들은 중앙으로 진출시키겠다.”

신상필벌이다.

그것도 상당히 파격적인.

파서벌은 남은 귀족들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경들도 명심하길 바라오.”

경고와 독려, 두 가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지금 잡혀간 놈들처럼 헛짓거리하면 뒈진다.

대신 일을 잘하면 파격적인 특혜를 주겠다.

본보기를 보여 줬으니, 남은 귀족들은 이 말 한마디를 뼈에 새길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파서벌은 홀에 남은 귀족들에게 중요한 직책을 추가로 부여했다.

능력 있는 인물을 골라 중앙으로 불러들일 것을 명령했다.

내 의견이 포함된 리스트가 따로 있었다.

마이어 남작은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제국에서 요주의 인물로 설정했거나, 경계하고 있는 변방의 귀족들도 알고 있었다.

변방에 있다가는 제국에게 노려질 인물들.

그들을 전부 중앙으로 진출시켰다.

‘또 네르갈을 노리긴 어려울 테니.’

제국이 네르갈에 심어 놓은 첩자들은 발레리아가 제거한 상태다.

귀족들이 활개를 치던 시대는 끝났다.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왕은 진짜 왕이 됐다.

능력 있는 인물들이 그 주변을 채울 것이다.

아마 전처럼 은밀하게 공략하기는 상당히 까다로울 것이다.

국왕에게 넌지시 제국에 대한 주의도 줬으니, 전쟁이라도 일으켜야 할 것이다.

‘황제 놈이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전쟁을 벌일 리는 없다.’

레온하트는 제국의 대항마가 되어야 한다.

물론 그 정도로 세력을 불리긴 힘들겠지만.

적어도 최후의 보루는 되어야 했다.

이 정도도 안 되면 곤란했다.

‘엘비아와 동맹까지 체결한다면 상당히 진전이 있을 거야.’

레온하트는 더 강해질 여지가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근엄하게 명령을 내리는 파서벌 레온하트를 올려다보았다.

황제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래도 이젠 퍽 진짜 왕의 폼이 나오는 것 같았다.

* * *

“정말 괜찮겠습니까?”

“중요한 건 신상필벌이라고 하지 않았나. 훈공이 있는 자에게는 상을 줘야겠지.”

“저는 레온하트의 수호자입니다. 제 본분을…….”

“어허, 줄 때 받게.”

레온하트 왕국의 보물전.

나는 그 앞에 있었다.

파서벌 레온하트는 내게 무려 보물전의 보물 하나를 내리겠다고 선언했다.

파격적이지 않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보물전의 보물들은 국보다.

내가 만든 아티팩트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사자의 왕홀’처럼 괜찮은 물건들이 꽤 있다.

‘사자의 왕홀은 필요 없지만.’

사자의 왕홀은 레온하트의 왕성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다.

더군다나 그 효과가 마법을 제한하는 것이니.

발레리아의 마법을 상쇄할 만큼 대단한 물건이긴 하지만, 내겐 계륵이나 다름없었다.

파서벌은 보물전의 문에 열쇠를 꽂아 넣고 돌렸다.

철컥. 끼익.

보물전의 문이 열렸다.

레온하트 왕국은 부유한 국가가 아니다.

하지만, 역사와 전통이 깊은 나라였다.

그만큼 오래된 물건들이 많았다.

파서벌은 보물전에 들어서며 물었다.

“생각보다 별 볼 일 없어서 실망했나?”

보물전은 단출했다.

번쩍이고 화려한 것을 기대했다면, 확실히 실망했을 것이다.

목걸이 같은 장신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오래된 항아리, 램프 같은 것들도 보였다.

관리 상태는 좋았다.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보물이라기보다는 유물처럼 보일 것이다.

금화 같은 것도 없어 시각적 즐거움은 확실히 덜 했다.

“그럴 리가요.”

하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사자의 왕홀에 버금가는 보물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램프였다.

어두운 보물전을 비추고 있는 램프.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조명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저것도 엄연한 보물이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이군. 여기 있었나.’

여러모로 흥미가 가는 물건이었지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보물전을 면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레온하트의 보물전에 대한 정보는 팔베르크에게도 없었다.

그만큼 경계가 철저한 곳이다.

애초에 열릴 일이 별로 없다고 들었다.

‘레온하트의 국보 중 드러난 것은 고작 둘이었지.’

하나는 국왕 파서벌 레온하트가 사용하는 사자의 왕홀.

두 번째는 레드라인 후작이 전 국왕에게 하사받았다는 검이었다.

절대로 날이 닳거나 부러지지 않는 검이라고 들은 적 있다.

‘나도 검이나 하나 챙길까.’

내 아티팩트 목록을 생각했다.

완드 ‘탄생’은 리옐이 됐다.

남은 건 로브와 목걸이, 장갑이었다.

‘로브를 생각하면 방어구는 필요 없을 거고, 장갑이 있으니 화력도 필요 없으니.’

보물전에는 꽤 괜찮은 성능을 가진 완드가 보였지만, 별로 당기지 않았다.

완드의 역할은 마법의 보조다.

대마법사인 내겐 장신구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전생에는 지팡이 삼아 하나 가지고 다닌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검이 좋을 것 같은데.’

발레리아에게 뜯어냈던 검은 파울과 부딪쳤을 때 상당히 내구력이 떨어졌다.

검 하나 새로 장만할 때가 됐다.

나는 보물전의 검을 유심히 살폈다.

특별한 능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튼튼하고 가벼운 거면 됐다.

‘이건…… 좀 아니군.’

거대한 대검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이런 무식한 크기로 정교한 검술을 펼치는 건 무리가 있었다.

마나 번을 사용한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만.

검을 휘두를 때마다 마나 번을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다른 마법을 영창해야 할 상황이 있을 것이다.

‘튼튼해 보이긴 하는데, 아쉽네.’

롱소드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다른 보물들과 달리, 검은 꽤 화려한 것들이 많았다.

검 자루에 빛나는 마석이 박힌 것.

잡아 달라는 듯 검날을 부르르 떠는 에고 소드도 있었다.

그거나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검이 한 자루 있었다.

‘이건……?’

평범한 검이었다.

검 자루에는 화려한 장식도 없고, 검날도 평범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오래된 유물이냐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검 자루를 집었다.

“이 검의 이름은 뭡니까?”

“음? 아, 그 검 말인가?”

파서벌은 내가 든 검을 보더니 의외라는 얼굴로 설명했다.

“그것은 이름이 없네.”

“이름이 없다?”

“그래. 능력, 이름, 유례, 재질,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검일세.”

“흠, 그렇습니까?”

나는 검을 살폈다.

내게 말을 걸지도 않았고, 휘둘렀다고 뭔가 발휘되는 기색도 없었다.

가볍고 튼튼한, 좋은 검이었다.

딱 그것뿐인 것 같았다.

이건 둘 중에 하나다.

보물전에 우연히 흘러 들어온 그냥 평범하게 좋은 검이거나.

혹은 내 안목마저 속인 대단한 물건이거나.

“이걸로 하겠습니다.”

“의외군. 다른 좋은 검도 많은데 말이야.”

“왠지 이게 끌리는군요.”

이게 평범한 검이라면, 그것도 딱히 상관없었다.

적어도 가볍고 튼튼해 내 손에 잘 맞기는 했으니까.

나중에 마법을 부여해도 되는 일이었다.

* * *

“당황스럽군. 보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그건 아닙니다.”

왕의 집무실.

파서벌 레온하트는 말 그대로 심히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나는 지금 파서벌과 일대일로 알현 중인 상태였다.

그렇기에 말할 수 있었다.

“어째서 떠나겠다는 건가?”

“그래야 하니까요.”

불사의 신자들은 불사의 괴물을 신으로 착각하고 따를 뿐이었다.

봉인 해제와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아직도 나는 할 일이 많았다.

제국의 계획도 막고, 신살에 대한 단서도 잡고, 아티팩트도 찾고.

겨우 하나 해결하니 하나가 추가된 기분이지만, 어쩔 수 없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면서, 레온하트를 떠나겠다니.”

“수호자, 맞습니다. 레온하트가 위험하다면 언제든지 도울 생각입니다.”

레온하트 왕국은 내 거점이다.

위험에 처한다면 기꺼이 도울 생각이 있었다.

그래야 나중에 방패 역할을 해 주지 않겠는가.

“폐하, 왕은 스스로 서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래서야, 내가 섭정 역할을 하게 된다.

레드라인 후작이나 마이어 남작 등 여러 조력을 받는 건 상관없다.

그러나 결국 통치하는 것은 왕이어야 한다.

내가 더 나서면, 파서벌은 진짜 왕이 될 수 없다.

또다시 허수아비가 될 뿐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네.”

눈을 감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파서벌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한 적 있다.

비 온 뒤 땅이 더 단단해지는 법이라고.

중앙 귀족 상당수가 떨어져 나간 지금.

그렇게 느껴지진 않지만, 레온하트 왕국은 흔들리고 있었다.

잘 움직이던 시계의 톱니를 반절 넘게 빼 버린 셈이니.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품 교체만 성공적으로 한다면, 레온하트는 달라질 것이다.

발레리아도 남을 거고, 마이어나 레드라인 같은 인재가 있으니 걱정은 되지 않았다.

레온하트는 더 강해질 것이다.

“이건 개인적인 호기심인데, 어디로 떠날 생각인가?”

나는 눈을 감았다.

“죽은 신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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