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22/134)

6

가짜 신, 진짜 신

레드라인 후작은 말을 잃었다.

나는 차분히 기다렸다.

후작은 머리가 나쁜 인물이 아니다.

금방 내가 의도한 것을 깨달을 것이다.

레온하트 왕국의 전설.

“왕국이 위험에 처했을 때,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나타나서 도와줄 것이다.”

“상황이 딱 들어맞지 않습니까?”

왕국은 부패했다.

귀족들은 제 배를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으며, 왕권은 추락했다.

여기서, ‘레온하트의 수호자’라는 가상의 인물이 부패한 귀족을 척결한다.

“반발이 따를 걸세.”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겠지요. 자신의 입장만 이상해질 뿐입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무려 국왕의 목숨을 구한 전적이 있는 ‘정의의 편’이다.

왕국민들은 전설이나 밀러의 상품을 통해 수호자를 접하고 있다.

인지도도 상당할 것이다.

그런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살생부를 들고 나섰다.

반발한다는 것은 곧 찔리는 부분이 있다고 광고하는 셈이다.

“부패를 뿌리 뽑는다면, 자연스럽게 왕권은 강해지겠지요.”

“…….”

레드라인 후작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제시한 것은 대략적인 그림.

고려해야 할 부분은 당연히 많았다.

이를테면.

“무력시위로 번지면 걷잡을 수 없을 텐데.”

폭동이나, 쿠데타 같은 것들.

뿌리 뽑으려는 놈은 하나가 아니다.

대귀족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놈들도 몇몇 포함되어 있다.

모이면 상당한 힘이 될 것이다.

물론 레드라인 후작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레온하트의 최고 전력 둘이 이쪽에 있는데, 어쩌겠습니까?”

“둘?”

레드라인 후작은 인상을 찡그렸다가, 경악했다.

“자네, 설마.”

“적탑주, 발레리아 로안의 지지를 확보했습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대귀족이라고 해 봐야, 다수의 병력을 모으는 정도에 불과하다.

소드 마스터와 마탑주.

역사에 기록될 두 인물과 맞설 재량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어떻게?”

“개인적으로 친분이 좀 있습니다.”

“허, 허허허, 으허허허허!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보게.”

레드라인 후작은 미친 사람처럼 웃더니, 서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대조하기도 하고, 어딘가에 기록하기도 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레온하트의 수호자의 정체는, 자네겠지?”

“그렇습니다.”

“혹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죽어도 없습니다.”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좋아. 신원이 불분명하다는 걸 걸고넘어지는 놈들이 있겠지만, 수호자는 정체불명으로 남는 것이 메리트가…….”

레드라인 후작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췄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내게 이것들을 건넨 거지? 자네의 아버지, 라스도 있는데 말이야.”

“레드라인 후작께서는 힘과 신념이 있으시니까요.”

라스 마이어는 능력은 있지만, 힘이 없다.

철저하고 계산적인 성격을 생각하면 이 자료를 잘 써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 부패의 척결과는 조금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내 의도와는 다르다.

또한, 진정으로 레온하트를 위하는 인물은 몇 없다.

최적의 인물은 요하네스 레드라인이었다.

소드 마스터라는 명예와 무력.

왕의 곁을 지키는 충직함과, 올곧은 성격.

후작이라는 직위까지, 완벽했다.

“뭐 아버지는, 후작님께서 어련히 잘 챙겨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 변방에 있기는 아까운 친구니까. 그놈이 싫다고 해도 내 억지로 수도에 앉혀 놓을 걸세.”

레드라인 후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와 생각이 비슷했다.

변방에 웅크리고 있기에는 아까운 인재다.

“그래도 솔직히 납득하기 힘들군. 대뜸 이런 것을 넘긴다는 게.”

“의심되십니까?”

“아니. 이것들은 전부 진짜야. 내가 가지고 있던 소량의 정보와 완벽히 일치하거든.”

“그럼 뭐가 문젭니까?”

레드라인 후작은 잠시 고민했다.

결국 토해 내듯이 물었다.

“자네의 목적이 궁금하네.”

“말씀드렸잖습니까. 레온하트 왕국을 구하는 것이라고요.”

사실이었다.

나는 레온하트 왕국을 거점으로 삼았다.

팔베르크를 제국의 자리에 올려놓은 내가 말이다.

왕국이 이따위로 돌아가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국력 강화는 제쳐 두고, 일단 썩은 부분을 도려내야 했다.

“정 이해가 안 된다면, 내단의 답례라고 생각하십시오.”

별 효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단 하나.

그것이 내게는 큰 도움이 됐다.

오러가 단전에 뿌리내리고, 성장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설령 레드라인 후작이 그럴 의도가 없었더라도, 도움이 된 건 사실.

“저는 선물을 받으면 몇 배로 돌려주는 타입이거든요.”

“내 제자가 되지 않겠는가? 지금이라면 가문의 비전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싫습니다.”

“또 차였군. 하하하하!”

레드라인 후작과 나는 진득한 대화를 나눴다.

부패의 증거가 털렸다는 걸 알아챈 귀족들이 움직일 것이다.

그 전에 먼저 움직여야 했다.

계획을 정리한 뒤, 레드라인가를 나섰다.

‘이제 남은 건 왕자뿐이군.’

게오르크 비옌트가 마지막으로 남긴 단서.

왕자.

레온하트 왕국에는 세 명의 왕자가 있다.

무능하지만, 적장자라는 명분을 가졌기에 왕세자로 유력한 첫째 왕자.

성품과 능력 면에서 왕의 재목이라 평가받아 많은 귀족의 지지를 산 둘째 왕자.

그리고 정보가 별로 없는 서자, 셋째 왕자.

‘세 명 중 누구려나.’

의심 가는 건 첫째와 셋째다.

첫째는 대놓고 무능해서 이용해 먹기 좋다.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도 첫째를 허수아비 삼을 생각으로 지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첫째를 지지하는 귀족은 대부분 부패해 있었다.

셋째는 서자라는 입장상 의심을 피할 수 있다.

다른 둘에 비해 접근하기도 편할 것이다.

너무 정보가 없어서 의심 가는 것도 있다.

‘둘째도 배제할 수는 없지.’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에 올라가는 법이다.

결국 셋 모두 용의선상에 있었다.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가진 것은 전부 전해 들은 정보일 뿐이다.

직접 만나서 추궁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우선, 첫째부터 차근차근 볼까.’

나는 가면을 뒤집어썼다.

* * *

“아버지께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첫째 왕자, 제임스 레온하트는 투덜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그 뒤를 따르던 수많은 시녀들은 입을 다물었다.

제임스는 서른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이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다혈질이기에, 기분에 따라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시녀들은 알고 있었다.

그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입을 닫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나와 시프가 사이가 안 좋은 걸 뻔히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그렇지 않더냐?”

제임스가 돌연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시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잠시간의 정적.

제임스가 대답을 바라고 있다는 걸 깨달은 시녀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명백히 겁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였다.

“전하의 말씀이 맞사옵니다.”

“……왜, 내가 무섭더냐?”

“아, 아니옵니다.”

제임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손을 들어 올렸다.

시녀는 눈을 질끈 감고 목을 움츠렸다.

탁!

누군가가 제임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제임스가 휙 눈을 돌렸다.

“어떤 미친 새끼가…….”

“아직도 그 손버릇, 못 고치셨습니까.”

“……시프.”

둘째 왕자, 시프 레온하트였다.

제임스의 시녀들이 그를 동경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임스 레온하트는 늘 시프와 비교되곤 했다.

키도 훤칠하니 크고, 외모도 빼어난 시프.

제임스는 너무나도 평범했다.

“제임스 형님.”

시프는 검술에도 재능을 보였고, 학구열도 있었다.

반면에 제임스는 어느 한 군데도 잘난 점이 없었다.

적어도 제임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제임스는 시프를 질투했다.

제임스는 시프의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놔라. 감히.”

“죄송합니다. 하지만, 레온하트라는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너 따위가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들어?”

“첨언이었을 뿐입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사과드리죠.”

제임스가 성을 냈지만, 시프는 꿈쩍하지 않았다.

시프 레온하트는 소드 러너.

힘으로 제임스가 시프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큭.”

자존심이 구겨진 제임스가 먼저 물러났다.

시프는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시녀는 꾸벅 시프에게 인사를 하고 제임스를 따라갔다.

“시프 형님.”

“루터, 오랜만이구나.”

시프는 셋째 왕자, 루터 레온하트와 마주쳤다.

유일한 서자로, 별궁에서 생활하고 있는 루터 레온하트다.

만날 일은 적었지만, 시프와 루터는 그리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인 루터 레온하트는 두 형제와 마찰이 없었다.

제임스 또한 서자인 루터에게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너도 왔구나.”

“과분하게도 말입니다.”

“아니다. 너도 적법한 레온하트의 왕자 아니더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시프 형님뿐일 겁니다.”

루터는 쓰게 웃었다.

시프는 내심 긴장했다.

서자인 루터까지 불렀다.

중요한 안건을 두고 모이라 한 것이 분명했다.

‘혹, 왕세자 책봉 건 때문인가?’

시프가 생각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파서벌은 공식적으로 왕세자를 책봉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서벌이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준다면, 상황이 급변할 것이다.

‘모르겠군.’

시프는 심란한 마음을 안고 걸음을 재촉했다.

* * *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어서오너라. 제임스, 시프, 그리고 루터.”

국왕, 파서벌 레온하트는 상석에 앉아 있었다.

왕자들은 동작을 멈췄다.

그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왕성과 어울리지 않는, 붉은 로브 차림의 여자.

“안녕하십니까. 레온하트의 왕자님들. 발레리아 로안이라고 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발레리아가 우아하게 인사했다.

수년간 예법만을 익힌 귀족 영애들보다 몇 배는 더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구구절절 꾸며 내는 말도 없는 것이, 오히려 왕자들에게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왕자들의 반응은 각각 달랐다.

“호오…….”

제임스는 넋을 놓았고.

“명성이 자자한 적탑주님이셨군요. 반갑습니다. 시프 레온하트입니다.”

시프는 인사했으며.

“저, 적탑주라면 그…… 반갑습니다!”

루터는 말을 더듬었다.

반응은 모두 달랐으나, 거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적탑주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왕실이 하사한 귀족위를 거부한 발레리아다.

그런데 왕실과 사적인 자리를 가지다니.

왕자들의 신경이 곤두섰다.

“자, 앉거라.”

왕자들이 자리에 앉자, 시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시작됐다.

에피타이저가 나오기도 전에, 먼저 나선 것은 제임스였다.

“한데, 발레리아 경께서는 어쩐 일로……?”

시프는 눈을 감았다.

제임스는 딱히 생각 끝에 입을 연 것이 아니다.

별생각 없이 잔잔한 호수에 돌덩이를 던진 것이다.

파서벌과 발레리아의 눈치를 보았다.

발레리아의 눈이 어느 한 곳으로 돌아갔다.

‘음?’

분명 빈자린데, 식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도 파서벌 레온하트의 맞은편에.

게오르크 비옌트는 불사의 잔재, 아그나와 비슷한 괴물로 변했다.

괴물로 변한 게오르크, ‘게오르크였던 것’은 동족인 실험체 1호의 일부를 먹었다.

그리고 죽었다.

게오르크였던 것이 죽고 남은 것.

그것은 실험체 1호의 살덩어리와.

“이게 뭐죠?”

“스테이크.”

“스테이크요?”

반쯤 소화된 스테이크였다.

나는 따로 스테이크를 분석했다.

스테이크는 실험체 1호의 일부와 같은 성분이었다.

즉, 아그나의 고기였던 것이다.

게오르크 비옌트는 아그나를 요리해 처먹은 미친놈이었다.

‘이게 원인이라는 건데.’

렘브란트 님푸스는 어떤 방법으로 게오르크의 몸속에 있는 아그나의 살점을 자극했다.

그 결과, 게오르크 비옌트는 불완전한 아그나로 변했다.

의문스러운 점은 있었지만, 단서를 잡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평범한 사람을 아그나로 바꿔 버리다니.

‘어떤 면에서는 독보다 더하군.’

고기를 먹은 사람은 괴생명체가 되어 죽는다.

끔찍했다.

만약 왕국민들이 모두 아그나 고기를 먹었다면?

하다못해 레드라인 후작 같은 중요 인물이 그것을 섭취했다면?

그리고.

‘왕자가 그것을 섭취했다면?’

공개적인 장소에서 왕자를 괴생명체로 바꾼다.

왕실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상대는 황제였기에, 노림수는 그것뿐만이 아닐 것이다.

‘왕자 중 하나가 게오르크와 접선했다면, 아그나를 먹였을 확률이 높다.’

알고 먹었든, 모르고 먹었든 간에.

왕자가 괴물로 변하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아그나를 먹었을 거라고 추정되는 왕자를 찾아내야 했다.

찾아낼 방법은, 이미 생각해 뒀다.

* * *

‘저게 왕자들인가.’

왕성.

나는 리옐을 안아 들고 홀에 들어선 왕자들을 관찰했다.

인비지빌리티(Invisibility)의 효과로, 나와 리옐은 투명해진 상태였다.

원래 레온하트 왕성에선 마법을 쓸 수 없다.

마법을 봉쇄하는 레온하트 왕가의 아티팩트, 사자의 왕홀 때문이었다.

‘왕이 허락해서 다행이야.’

사자의 왕홀은 레온하트의 국왕만이 다룰 수 있다.

파서벌의 협조를 얻어 내는 건 필수였다.

발레리아가 설득한 끝에, 왕은 이 홀에만 잠시 효과를 차단했다.

나는 리옐과 눈을 마주쳤다.

“구분할 수 있겠어?”

“응!”

내게 안긴 리옐은 자신감 넘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사의 잔재는 본능적으로 세계수를 해하려고 한다.

반대로, 신목 또한 잔재를 느낄 수 있다.

리옐은 태초의 숲에서 아그나를 보고 ‘싫다’고 정확히 말한 적 있다.

내가 신목이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세계수의 말에 따르면 육감적으로 꺼리게 되는 감각이 있다고 한다.

리옐이 킁킁 냄새를 맡았다.

“저 사람?”

리옐이 가리킨 것은 첫째 왕자, 제임스 레온하트였다.

나는 확인차 다시 한번 물었다.

“저 사람한테서 그 기분 나쁜 느낌이 드냐?”

“으음, 아닌가?”

리옐은 기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불사의 잔재도 아니고, 그 일부.

그것도 사람 몸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다.

모호한 것이 당연했다.

나는 리옐이 알기 쉽게 왕자들에게 접근했다.

“흠.”

제임스는 발레리아에게 끈적끈적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리옐은 다시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 귀에 입을 가까이하고 속삭인다.

“아빠, 아니야. 그냥 냄새가 이상한 거야.”

“그러네.”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질 정도로, 향수 냄새가 너무 진했다.

제임스는 발레리아를 보며 침까지 흘리고 있었다.

실실 웃는 낯이 재수 없어서 뒤통수를 한 대 때렸다.

빡!

“끄악!”

제임스가 접시에 머리를 박았다.

깜짝 놀란 이들이 제임스를 보았다.

제임스는 뒤통수를 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냐!”

제임스의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프와 루터, 파서벌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제임스를 봤다.

발레리아는 눈치챈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 제임스가 씩씩거렸다.

“누, 누가 분명 내 뒤통수를 때렸는데…….”

“제임스 형님.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억울……!”

“제임스, 손님 앞에서 무슨 추태더냐.”

국왕이 점잖은 말투로 핀잔을 주자, 제임스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이어서 루터와 시프에게 다가갔다.

신중하게 냄새를 맡은 리옐이 확신했다.

“아빠, 이 사람이야.”

* * *

제임스는 아픈 코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저희가 이렇게 기다려야 합니까?”

왕족 넷에, 적탑주가 한 인물만 기다리고 있었다.

발레리아는 그 인물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기에, 제임스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문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셨군요.”

“누구길래…….”

시녀들이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루터가 눈을 깜빡였다.

곧,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흰색의 가면을 쓴 인물.

레온하트의 수호자, 지그문트 마이어였다.

파서벌 레온하트는 이미 언질을 받았기에, 태연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왕자들은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전설 아니었나?’

레온하트가 위기에 빠졌을 때 나타나, 왕가를 지킨다는 수호자.

지그문트는 수호자를 연기했다.

왕자들은 본 체도 하지 않고 왕에게 다가간다.

가슴에 손을 올린 뒤, 허리를 숙이고 인사한다.

왕은 흡족한 듯 웃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다들 들어 본 적 있겠지?”

“놀랍군요. 전설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요새 평민들 사이에서 가면이 유행한다는 걸 들었습니다.”

시프를 시작으로, 왕자들은 곧 평정을 되찾았다.

왕가에서 자라며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이다.

제임스는 의자 팔걸이에 기대고 말했다.

“하나, 무례하군. 왕가를 앞에 두고 가면 같은 걸 쓰다니.”

“제임스 형님.”

제임스도 원래 이런 성격은 아니다.

자신의 대담함을 발레리아에게 어필하고 싶은 마음에, 더 나선 경향이 있었다.

수호자, 지그문트가 제임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임스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관심을 끈 모양이군. 그래. 왕의 재목이라면 이런 담대함도 있어야……’

제임스에게 다가간 지그문트는 제임스의 뒤통수를 슥슥 문질렀다.

제임스는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가만히 있었다.

‘무슨 의식 같은 건가?’

지그문트는 자신의 손바닥에 후 입김을 불었다.

빡!

지그문트의 손이 제임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방심한 제임스는 그대로 엎어져 식기에 이마를 박았다.

쿵!

루터와 시프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왕성에서, 왕자의 뒤통수를 때리다니.

그것도 국왕이 지켜보는 앞에서!

제임스가 벌떡 일어났다.

“이 새끼가!”

지그문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제임스와 눈을 마주쳤다.

지그문트에게 달려들려고 했던 제임스가, 동작을 멈췄다.

“어, 어?”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본능이 강렬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지그문트가 사용한 마법 때문이었다.

레서 피어(Lesser Fear).

드래곤 피어에서 착안한 마법, 피어의 열화 버전.

약자를 압도하는 기운이 퍼졌다.

요르문간드가 단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것과 같은 원리.

“허억!”

제임스는 헛숨을 삼켰다.

폐를 짓누르는 듯한 감각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손끝이 떨렸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그문트는 주의를 주듯 제임스의 미간을 툭 쳤다.

그러자.

“컥! 쿨럭!”

압박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제임스는 공포에 질렸다.

난생처음 마주한, 강대한 존재.

레드라인 후작이나 발레리아라면 비슷한 느낌을 낼 수 있겠지만.

그들은 기운을 잘 갈무리하고 있었다.

왕자를 위협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임스는 착각했다.

‘괴물이다!’

그가 레드라인 후작이나 발레리아보다 월등한 강자라고.

셋째 왕자, 루터 레온하트도 그렇게 생각했다.

검을 배운 시프만이 어렴풋이 의문을 가질 뿐이었다.

제임스는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국왕은 지그문트를 제지하지 않았다.

발레리아가 이미 설득을 끝냈기 때문이다.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무례하게 구는 이유는, 왕자를 살리기 위해서다.’

국왕 파서벌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파서벌은 이미 한 번 지그문트 덕분에 목숨을 건진 적 있었다.

거기에 발레리아의 호언장담까지 더해지니,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고만장했던 제임스를 친히 교육시켜 주니,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군.’

제임스가 향락에 빠져 사는 건 파서벌도 익히 알고 있었다.

지그문트는 말없이 다른 왕자에게 다가갔다.

루터 레온하트는 겁에 질린 듯 뒤통수를 감쌌다.

지그문트는 속삭였다.

“연기는 그만두시지요.”

큰 충격을 받은 듯, 루터의 눈이 커졌다.

지그문트는 그런 루터를 지나쳐 시프에게 향했다.

시프는 내심 긴장했다.

지그문트는 시프의 손을 잡아 올렸다.

시프는 불안해하면서도 순순히 손을 내주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시프의 손바닥에 그림을 그린다.

‘이건…….’

역삼각형에 그어진 선.

불사의 표식이었다.

시프는 질겁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지그문트는 손목을 단단히 잡고 놔주지 않았다.

지그문트가 중얼거렸다.

“가짜 신에 빠졌으면.”

시프의 손에는 어느새 나뭇잎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척 봐도 범상치 않은, 푸른 기운을 내뿜는 나뭇잎.

“진짜 신을 만나 봐야겠지.”

지그문트는 나뭇잎을 시프의 손에 억지로 쥐여 줬다.

그 순간, 시프의 의식이 까무룩 멀어졌다.

* * *

시프 레온하트는 레온하트 왕국의 두 번째 왕자다.

“어머. 시프 왕자님, 지금 책을 읽으시는 건가요?”

“응!”

어렸을 때부터 시프 레온하트는 남달랐다.

어린 나이에 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검에 재능을 보였다.

그를 가르친 선생도 때때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시프는 마냥 좋았다.

배우는 것이 재밌었다.

다른 사람이 칭찬해 주는 것이 듣기 좋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아, 아……!”

다섯 살 무렵 겪은 암살 위협.

다행히 호위기사가 암살을 막았지만, 시프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범인이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돌봐 주던 보모였기 때문이다.

보모는 시프를 목 졸라 죽이려고 했고, 호위기사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주변인의 죽음과 배신을 동시에 겪은 시프는 매우 심약해졌다.

“왕자님.”

“괜찮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시프는 유독 많은 암살 기도를 겪었다.

성장한 이후에도 시프의 마음속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시프에게는 죽음이 트라우마처럼 남은 것이다.

그러던 도중, 그는 게오르크 비옌트를 만났다.

“불사?”

시프는 게오르크 비옌트에게 금방 매료됐다.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시프에게 있어서, 불사란 너무도 고혹적이었다.

사랑하는 누구도 죽지 않는 세상.

게오르크는 시프에게 이상향을 제시했다.

“……여긴.”

시프는 눈을 떴다.

은은한 꽃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몸을 일으킨 시프는 머리를 짚었다.

‘분명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기억이 희미했다.

술에 취한 것처럼 몽롱했다.

고개를 저어 정신을 다잡았다.

그리고 마주한 풍경에, 넋을 놓았다.

“여긴…….”

“어서 와.”

레온하트의 수호자 차림을 한 지그문트 마이어가 나타났다.

지그문트는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 듯 소개했다.

“성역은 처음이지?”

성역.

신이 거주하고 있는 신성한 장소.

시프 레온하트는 지그문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발치로 하얀 구름이 스쳐 지나갔다.

시프는 홀린 듯이 정원의 끝자락으로 다가갔다.

까마득한 높이 아래로 희미하게 숲이 보였다.

“하늘 위에 있는 정원이라니.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육체가 아닌 정신체 상태니, 꿈이라고 봐도 무방하겠군.”

“레온하트의 수호자.”

시프는 지그문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가면을 뒤집어쓴 의문의 인물.

마른 몸에 큰 키 때문에 여자인지 남자인지 헷갈렸다.

목소리는 마법으로 변조한 것인지, 여러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너는 누구지?”

“방금 네가 말했잖아. 레온하트의 수호자라고.”

“사람이 아닌 건가?”

“그런 소리를 종종 듣긴 해.”

“수호자라는 것이 만약 있다면, 대대로 레온하트를 섬기는 가문일 것이라고 생각했거늘.”

“그렇게 치면 레온하트의 귀족들은 왕가를 섬기니, 죄다 수호자겠군.”

“섬긴다?”

시프 레온하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겉으로는 섬기는 척하면서, 어떻게 하면 왕국민들의 고혈을 잘 빨아먹을 수 있을까만 고민하는 빈대들이 태반인데 말이야.”

“오, 잘 아네? 그런데 사이비를 섬기는 왕자도 별 다를 바 없는 것 같지 않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거짓말에 소질이 없어. 왕자 아니었으면 정치판에서 소리 소문 없이 묻혔을 거야.”

지그문트는 적당한 나뭇가지로 흙에 표식을 그렸다.

불사의 표식.

그에 그치지 않고 아공간 주머니에서 불사의 신자와 관련된 물건을 쏟아 낸다.

“다 알고 왔다. 너, 불사의 신자잖아.”

“맞다. 나는 불사의 신을 모시는 신자다.”

시프는 인정했다.

동시에 부정했다.

“하지만 사이비는 아니야. 불사의 신께서는 실존하신다.”

“실존하긴 하지. 신은 아니지만.”

“무례하군.”

“게오르크 비옌트가 꼬셨지?”

“…….”

시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게오르크 비옌트를 통해서 불사의 교도와 처음 접한 것은 사실이었다.

지그문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걔, 팔베르크 제국이랑 연루되어 있었다.”

“팔베르크 제국?”

“그래. 제국 손에 놀아난 거라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는군.”

“대뜸 자신이 믿어 왔던 걸 거짓이라고 하면, 믿지 못할 만도 하지. 증거를…….”

그때였다.

푸확!

나무뿌리가 흙을 뚫고 튀어나왔다.

창처럼 날카롭고 꼿꼿한 나무뿌리의 끝은 지그문트와 시프의 목을 겨눴다.

시프는 질겁한 반면, 지그문트는 태연한 기색이었다.

곧 은방울꽃 화분을 든 드라이어드가 걸어왔다.

하늘정원의 정원사였다.

-누구…… 지그문트 님?

-어. 오랜만이야.

홀로 세계수를 지키다가 크게 다쳤는데.

그새 많이 나아진 듯 보였다.

나무뿌리가 스르륵 땅속으로 들어갔다.

시프를 겨눈 뿌리는 그대로였다.

-성역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저주도 갱신할 겸, 들렀지.

-그렇군요. 이자는 손님입니까?

-그래.

시프의 목을 노리고 있던 나무뿌리가 도로 들어갔다.

시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원사는 꾸벅 인사했다.

-경황이 없어서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어머니를 구해 주시고, 저까지…….

-감사하면 나중에 영초나 뜯어 줘.

-물론입니다. 최상급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세계수님께 가시는 거라면, 안내해 드릴까요?

-괜찮아. 내 알아서 가지.

정원사는 뭔가를 찾는 듯 내 뒤를 살폈다.

시프 주위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왜?

-그, 리옐 님께선…….

-음, 다음에는 같이 올게.

-아쉽군요.

정원사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리옐을 꽤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나와 시프는 세계수 잎을 통해 성역과 정신만 연결한 상태다.

완전히 성역에 들어선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동시에 이동할 수 있는 인원은 기껏해야 둘이 한계다.

그것을 아는 듯, 정원사는 시프를 조금 쏘아 보았다.

정원사가 물러났다.

시프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당신은 요정족인가?”

“미친 소리, 따라오기나 해.”

“어디로 가는 거지?”

“말했잖아. 진짜 신 보러 간다고.”

시프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왕성에는 사자의 왕홀이 상시 발동 중인 상태.

환상 마법일 가능성은 없었다.

시프는 지그문트를 따라갔다.

지그문트가 발을 멈춘 곳은 수풀 앞이었다.

나무와 덤불이 몸을 기울여 길을 만들었다.

“잠깐.”

돌연 멈춰선 지그문트는 시프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시프는 슬며시 뒤통수를 감싸며 물었다.

“뭘 한 거지?”

“코팅.”

“코팅?”

“비록 정신체지만, 신을 직접 본다는 건 꽤 부담이 가는 일이거든.”

“부담이라면…….”

“눈이 멀거나, 정신이 나가거나, 심하면 죽기도 하지. 괜히 신들이 선택받은 사람들과만 대화하는 게 아니야.”

시프는 침을 삼켰다.

그는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시프에게 있어서 유일한 신은 불사의 신이었다.

‘이건 시험이다.’

시프는 결연한 마음을 가지고 동굴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마음은, 불과 몇 초도 가지 않아 깨졌다.

지그문트를 따라서 간 시프는 진짜 신과 마주했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세계수.

시프는 큰 충격을 받았다.

“허억!”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그문트는 시프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신을 만났을 때, 일반적인 사람의 반응이었다.

시큰둥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세계수의 이마에 그려진 저주의 표식이 지워진다.

세계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쿨럭. 쿨럭.”

각혈을 하는 시프를 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지그문트에게 눈을 돌렸다.

가면을 썼지만, 세계수는 그가 지그문트라는 것을 알았다.

세계수는 방긋 웃었다.

-나 보고 싶어서 일찍 온 거야?

-지랄.

지그문트는 혀를 찼다.

세계수는 그런 반응이 재밌다는 듯 쿡쿡 웃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심장을 두드리고 있는 시프를 본다.

-저 아이는?

-불사의 괴물을 신으로 착각하고 섬긴 머저리.

-그런 것치고는 고귀한 혈통 같은데.

-레온하트의 왕자야.

-아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세계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그문트는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시프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세계수가 시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프는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죄와 걱정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세계수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시프에게 손을 뻗었다.

-그런 사이비 말고, 절 믿으시는 건 어떨까요?

멍하니 세계수를 보던 시프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무려 신의 진언을 직접 들은 것이다.

지그문트가 코팅을 했다지만.

정신에 적잖은 영향이 갈 것이 분명했다.

지그문트는 세계수의 미간을 눌러 제자리에 앉혔다.

-누가 포교하랬냐?

-왜? 얘 사이비에서 빼내려고 나한테 데려온 거 아니야? 그리고 인간 신도 한 명 있으면 좋지.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뭐, 상관없겠지.

* * *

나는 세계수에게 다시 저주를 걸고 동굴을 빠져나왔다.

세계수는 조금 어색하게 나를 보내 줬다.

시프 레온하트는 멍한 얼굴로 나를 따라왔다.

세계수를 만난 후로 시프 레온하트는 바뀌었다.

조금 광적으로.

“정말 아름다운 날입니다.”

“뭐?”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이런 날에는…….”

시프는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신을 직접 만나고, 진언까지 들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심지어 진언이 자신을 믿으라는 내용이었으니.

그렇다.

시프는 세계수의 광신도가 됐다.

“이걸 의도한 건 아닌데.”

“정말 감사합니다.”

“왜.”

“어리석은 저를 가엽게 여기어, 진짜 신을 만나게 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

“아아, 감사합니다.”

불사의 괴물을 믿는 것보단 나았다.

그래도 이건 그렇게 긍정적인 상황은 아닐지도 모른다.

시프 레온하트는 왕위고 뭐고 순례라도 떠날 기세였다.

나는 조금 고민했다.

‘둘째 왕자는 세계수의 신자가 됐다.’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

잘만 하면 재밌는 구도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온하트 왕국과 엘비아의 동맹 관계.

내가 조금만 나선다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한번 추진해 봐야겠군.’

엘비아 측에서 어떻게 반응할진 모르겠다.

적어도 하이 엘프, 르네는 인간에게 호의적인 편이다.

나와 단 덕분에 요정족들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일 테니.

‘여태껏 엘비아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이었다.’

레온하트 왕국은 중립을 지키고 있어, 이렇다 할 동맹국이 없었다.

여기서 레온하트 왕국이 엘비아와 교역의 물꼬를 튼다면.

더 나아가 동맹 관계까지 형성해 버린다면.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성역에서 벗어났다.

시프가 눈을 떴다.

“여긴.”

왕성,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세계수의 나뭇잎을 회수했다.

실제로는 짧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루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시프 형님, 괜찮으십니까?”

“루터? 아니. 괜찮다. 그래. 아주 상쾌한 기분이야.”

시프는 식탁에 올려져 있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치이이익…….

내가 나서기도 전에, 시프는 몸속의 아그나를 스스로 제거해 버렸다.

불사의 교리 중에 그런 대목이 있다.

배 속에 신의 일부를 품고 있으면 불사에 가까워진다.

신의 일부를 품고 있을 때는 물을 마시면 안 된다.

아그나의 살코기는 순수한 물에 닿으면 녹아 버리기 때문이다.

‘끝났군.’

성역에 나오기 전에, 시프는 고백했다.

게오르크의 말에 따라, 태초의 숲 쪽으로 영토를 넓히는 것을 추진할 계획이었다고.

즉, 제국은 레온하트 왕국과 엘비아를 싸움 붙일 생각이었다.

‘그렇겐 안 되지.’

나는 레온하트 왕국과 엘비아를 싸움 붙일 생각이 없다.

대신, 동맹을 제안할 생각이다.

발레리아가 조금 바쁘게 움직여야겠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국왕, 파서벌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끝났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군. 내 아들은 이제 괜찮은 건가?”

나는 흘긋 시프 레온하트를 보았다.

두 눈을 감은 시프는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있었다.

부작용이 다소 있겠지만, 아그나로 변해서 죽는 것보단 낫다.

어쨌든 죽음으로부터 구해 낸 건 맞다.

“예. 폐하께선 준비되셨습니까?”

“후작에게 연락을 받았네. 내일이면 준비가 끝날 걸세.”

“그렇군요.”

아직 레온하트 왕국에서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부패한 귀족들을 잡아내는 것.

지체할 생각은 없었다.

머지않아 귀족들은 뒷덜미를 잡혔다는 것을 알아낼 것이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겠지.

그 전에, 터트린다.

‘재밌는 연극이 되겠어.’

주연 배우는 국왕과 나.

조연은 발레리아와 레드라인 후작.

엑스트라로 부패한 떨거지들이다.

내용은 대충, 주연과 조연이 엑스트라를 조지는 내용이다.

‘물갈이는 필요하니.’

제목은 레온하트 왕국 대청소가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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