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21/134)

5

너두? 나두!

왕성, 국왕의 집무실.

국왕 파서벌 레온하트는 고민에 빠졌다.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해 오던 문제였다.

‘적탑주, 발레리아 로안.’

발레리아는 왕국의 최고 전력으로 평가받음에도 불구하고, 애매한 위치에 있다.

작위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실 마법사 자리도 마찬가지로, 정중히 거절했다.

“후.”

파서벌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발레리아는 레온하트 왕국에 적탑과 로안 아카데미를 세웠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안심하고 있었다.

안일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팔베르크 제국에게 눈 뜨고 빼앗길 뻔하니, 체감할 수 있었다.

레온하트 왕국은 발레리아 로안을 묶어 둘 수단과 명분이 일절 없었다.

‘심지어 친분이 있는 귀족조차 하나 없다니.’

발레리아는 완벽한 중립을 고수하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레온하트에 머물고 있긴 하지만.

언제 레온하트를 떠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가 이 사실을 안다면, 분명 그녀를 영입하려 할 것이다.

실제로 팔베르크 제국이 그랬다.

‘왕자와 약혼이라도 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외모? 마탑 주위를 서성이는 귀족 자제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들었다.

능력? 로안 아카데미의 원장이며, 적탑의 주인, 동시에 7서클 마도사다.

가문? 대마법사의 성을 따른 유일한 인물이다.

혼기가 조금 지난 것만 제외하면 흠잡을 점이 없었다.

‘그럴 일이 실제로 일어날 리 없지.’

발레리아 로안은 그런 쪽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파서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방법을 고려할 정도로 발레리아를 묶어 둘 방법이 없었다.

그녀의 환심을 살 만한 것이 레온하트에는 없었다.

똑똑.

문 너머에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알현을 청하는 분이 있사옵니다.”

“이 시간에 말이냐? 적탑주라도 온 것이 아니라면, 물리도록 해라.”

발레리아 로안은 직접 왕성에 발을 들인 일이 드물다.

처음 레온하트 왕국에 왔을 때 한 번, 건국제 파티 때 한 번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용무만 마치고 사라져 버렸다.

왕실과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

그런 발레리아 로안이 직접 찾아올 리 만무했다.

문 너머의 내관이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적탑주님이 맞으십니다.”

“뭐라?”

“적탑주님께서, 알현을 요청하셨습니다.”

* * *

“지그문트 마이어!”

여관 서풍.

1층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던 손님들이 화들짝 놀란다.

파울 레드라인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이다.

사람들의 표정은 대체로 비슷했다.

저 망나니가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시작이구나.

파울 레드라인은 성난 얼굴로 1층을 둘러보았다.

“귀청 떨어지겠네. 나도 내 이름 안다.”

자리에 앉아 파울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파울은 내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금방이라도 사람 하나 찢어 죽일 법한 기세였다.

“죽고 싶나?”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냐.”

“왜 내게 그런 폭탄을 떠넘기고 간 거지?”

“폭탄?”

“……적탑주 말이다.”

파울은 짜증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폭탄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넌 적탑주와 무슨 관계지?”

“사제 관계.”

“그 여자를 스승으로 두고 있다고? 마법이라도 배웠나?”

“아니? 내가 가르쳤는데.”

“재미없는 농담이군.”

파울은 내 말을 간단하게 일축했다.

억울하다.

진짠데.

“그 여자가 나를 어떻게 부려먹었는지 아나?”

“대충 들었어. 뭐 하수구 들어가고 그런 것 때문에 그러냐?”

“그게 다가 아니다. 일이란 일은 전부 내게 떠넘겼단 말이다!”

“네 성격에 하라고 했다고 전부 했을 것 같진 않은데.”

파울 레드라인은 망나니다.

소드 마스터인 아버지에게 반발할 정돈데, 적탑주라고 안 했을 리 없다.

뭔가 떠올랐는지, 파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 갈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혹시나 싶어 물었다.

“서열 정리 당했냐?”

“방심했을 뿐이다.”

아무리 이놈이 검을 잘 써도, 국가 최고 전력과 비할 바는 아니다.

태초의 숲에서 발레리아와 통신했을 때가 떠올랐다.

파울은 처맞고 기절해 있었다.

아무래도 확실히 서열 정리를 끝마친 모양이었다.

파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지긋지긋한 짓도 오늘로 끝이다.”

파울은 레온하트의 수호자 가면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깨끗했던 수호자 가면은 온데간데없었다.

곳곳이 그을려 있었고,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도 있었다.

“네놈에게 받은 굴욕을 갚기 위해, 다시 검을 들었다.”

파울 레드라인은 노력하지 않는 천재였다.

검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술에 빠져 검을 게을리했다.

그러나 파울 레드라인은 다시 검을 들었다.

오로지 내게 설욕하기 위해서.

‘착실히 레온하트의 전력이 되고 있군.’

아직은 이르지만, 나중에 유용한 패가 될 것이다.

잘만 써먹으면 제국의 전력을 분산시킬 수 있겠지.

확실히 전보다 조금 더 날카로워진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사나운 인상인데, 지금은 거의 한 자루 칼을 보는 것 같았다.

“인제 와서 내뺄 생각은 아니겠지?”

“설마, 약속은 지킬 거야.”

한 달 동안 레온하트의 수호자 행세를 하면, 결투를 해 주겠다.

파울 레드라인은 조건을 만족했다.

이상한 부분에서 정직한 놈이다.

“또 처형식인지 뭔지 해서 사람 부를 거냐?”

“아니, 시간 아깝다. 따라와라.”

파울 레드라인은 나를 레드라인가로 끌고 갔다.

나는 순순히 파울을 따라갔다.

어차피 레드라인 후작에게 볼일도 있었다.

저택 앞에 도착하자, 문지기 둘이 내 앞을 막아섰다.

“도련님, 이분은 누구십니까?”

“……결투 상대다.”

결투 상대라니.

거참 정 없는 녀석일세.

“친구라고 하면 되는 걸, 굳이 어렵게 말하고 그러냐.”

“치, 친구요?”

문지기가 깜짝 놀랐다.

파울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태연할 표정으로 파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파울은 팔을 쳐 냈다.

“돌았군.”

“부끄러워하긴.”

문지기는 경악을 넘어서 질겁했다.

두 문지기는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문지기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갔다.

“이 기쁜 소식을 어서 전하겠습니다!”

“야! 이 미친놈아!”

파울이 악을 썼지만, 문지기는 이미 저택 안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과연 레드라인가라고 해야 하나.

평범한 문지기라고 생각했는데, 달리기 속도가 장난 아니다.

파울이 내 멱살을 잡았다.

“미쳤나? 내가 언제부터 네 친구가 된 거지?”

“우리 관계가 좀 복잡하잖아. 그냥 친구라고 하면 편하지 않겠어?”

남아 있던 문지기의 동공이 확장됐다.

“보, 복잡한 관계? 설마, 도련님…….”

파울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젠장맞을.”

* * *

레드라인의 연무장에 들어서기도 전에, 나는 질문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진짜 친구 맞으신 거죠?”

“그럼. 둘도 없는 친구지.”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서풍에서 한 판 떴어. 내가 이겼고.”

“아, 지그문트 마이어 님 맞으시죠? 자신보다 강한 사람만 친구로 삼는다. 그런 건가?”

별생각 없이 장난친 건데, 생각보다 반응이 격했다.

재밌으니까 계속하기로 했다.

뒷전이 된 파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사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어이어이, 믿고 있었다고!”

“술을 끊으셨을 때, 알아봤습니다. 우리 도련님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구나! 크!”

“친구, 친구, 난생처음 아닙니까?”

“파티라도 해야죠? 파울 도련님이 무려 첫 친구를 사귀셨는데.”

레드라인가의 사람들은 유쾌했다.

파울 레드라인이 망나니짓을 하고 다녔다지만, 대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레드라인 후작이 일부러 이런 사람들만 골라서 고용한 것 같았다.

“그만해! 이 미친놈들아! 안 꺼져?”

“헉, 화나셨다.”

“튀어!”

“가주님께 이 기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오우. 치고 빠지기 좀 할 줄 아는 놈들인가?

파울이 성를 내자, 시종들은 날렵하게 도망쳤다.

저 성격을 감당하고 살았으니 이미 익숙해졌을 것이다.

“지그문트 마이어어!”

사자가 포효하는 듯한 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성량도 크다.

나는 한쪽 귀를 막고 인상을 찡그렸다.

“왜?”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왜 그런…….”

“친구, 이런 일로 화내면 금방 늙어.”

“결투고 뭐고, 당장 처죽여 버리고 싶은 걸 참는 중이니까 그 입 다물어라.”

무려 나와 친구가 될 기횐데, 걷어차다니.

뭣도 모르는 놈이다.

파울은 연무장으로 향했다.

이미 한 번 와 본 적 있었기에, 낯설진 않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구석에 너덜너덜한 허수아비들이 쌓여 있었다는 것.

부러진 검도 한쪽에 쌓여 있었다.

파울 레드라인의 작품인 듯했다.

“전과 동일하게 진검 결투, 오러는 쓰지 않는다.”

“오러 써도 상관없는데.”

“오만하군. 지그문트 마이어. 네 검술 실력은 인정한다.”

파울 레드라인은 자신의 검을 뽑았다.

붉은 오러가 나타났다.

“하지만 너는 고작 소드 러너 아닌가?”

확실히 네르갈에 만났을 때만 해도, 나는 소드 러너였다.

파울 레드라인은 조금 불안정한 소드 익스퍼트 초급이었고.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단하군.’

고작 한 달이다.

검의 감각을 되찾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성장까지 했다.

불안정했던 파울의 오러는 확실히 안정을 찾았다.

파울 레드라인이 얼마나 설욕을 준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오러를 사용하면, 일방적인 처형이 될 뿐이다. 나는 소드 익스퍼트 초급이거든.”

“너두?”

“뭐?”

“나두!”

나는 검을 뽑았다.

파울처럼 오러를 검 위로 씌웠다.

소드 익스퍼트 초급 수준의 오러.

파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결국 결투에서 오러는 배제하기로 했다.

자칫하면 목숨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파울 레드라인은 내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여기서 승리해도 1승 1패.

아마 완벽한 설욕을 위해서, 한 번 더 결투를 신청할 것이 분명했다.

‘져 주진 않을 거지만.’

첫 번째 승리는 운이 크게 작용했다.

파울 레드라인은 술에 절어 검을 좀처럼 들지 않았다.

나를 업신여겨 방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레드라인가의 천재가, 전력으로 들어온다.

나는 발목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시작 신호는?”

“거기!”

파울이 저택 창문을 보며 소리쳤다.

창문에 다닥다닥 얼굴이 붙어 있었다.

시종들이었다.

파울이 창문을 보자, 얼굴들이 질겁하며 쑥 들어갔다.

“유쾌한 식솔들이군.”

“닥쳐라.”

파울 레드라인은 구경하던 시종 하나를 끌고 왔다.

시종이 할 일은 단순했다.

바닥에 단검을 떨어트려, 신호를 보내는 것뿐이다.

시종은 눈을 빛냈다.

“이걸 떨어트리면 되는 거죠?”

“그래.”

“맡겨만 주세요. 그럼, 바로 떨어트립니다?”

나와 파울은 거리를 벌렸다.

시종이 나와 파울을 번갈아 보더니, 단검을 떨어트렸다.

연무장이 잘 보이는 창문에 자리 잡은 시종들이 웅성거렸다.

파울 레드라인이 처음으로 데려온 친구, 지그문트 마이어.

둘의 대련은 당연히 관심을 살 수밖에 없었다.

“누가 이길까?”

“그야 파울 도련님이시지.”

“그럼. 나도 파울 도련님께 한 표.”

파울의 승리를 예측하는 시종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레드라인가의 시종들인 만큼, 그들은 파울을 잘 알고 있었다.

재능에 있어서만큼은 가주, 레드라인 후작을 넘어선다고 평가를 받기도 하는 파울이다.

시종 하나가 의문을 제시했다.

“확신은 못 하지. 듣자 하니, 마이어 도련님께 한 번 패배했다던데?”

“그때와는 다르다고. 그때와는.”

“그놈의 술이 원수지.”

“그래도 술 끊으신 뒤로는 새사람이 되셨잖아. 당신도 끊을 수 있습니다.”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아무튼,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지.”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시종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뒤에서 레드라인 후작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결투에 관심이 팔려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후, 후작님.”

“뭘 그리 재밌게들 보고 있는 거지? 파울? 맞은편에는…… 지그문트로군.”

“결, 대련하신다고 하여, 보고 있었습니다.”

“이것들이…… 하라는 일은 안 하고.”

후작의 말에, 시종들이 움찔 몸을 움츠렸다.

근무 태만이라고 질책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레드라인 후작은 씩 웃었다.

“이런 재밌는 걸 너희끼리만 보고 있었냐?”

“역시 후작님이야! 믿고 있었다고!”

시종들이 환호하며 레드라인 후작에게 찬사를 보냈다.

어차피 승부는 한순간이다.

그 짧은 시간의 일탈을 허용 못 해 줄 정도로, 레드라인 후작은 속 좁은 성격이 아니었다.

후작을 따르던 기사들도 관심 있게 파울과 지그문트를 지켜보았다.

“후작님께선 어느 쪽이 승리하실 것 같습니까?”

“당연히 파울 도련님이시지요?”

“글쎄다.”

기사들은 깜짝 놀랐다.

당연히 파울이라고 단언할 줄 알았다.

레드라인 후작만큼 파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레드라인 후작은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승리를 점치기 어렵다는 말씀이십니까?”

“파울은 본능에 의존한 검을 사용한다.”

레드라인 후작이 파울에게서 가장 높게 평가하는 부분은, 검술이 아니었다.

바로 본능.

파울은 동물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

완벽히 시야 밖에서 휘두른 검을 본능만으로 피해 낸다.

타고난 능력이고, 재능이었다.

“그에 반해 지그문트는…… 상당히 계산적이지.”

레드라인 후작은 지그문트가 직접 검을 휘두르는 걸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를 시험해 봤을 때 느꼈다.

파울이 본능 파라면, 지그문트는 이론파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최선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머릿속으로 계속 수 싸움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어. 아마 재밌는 구도가 펼쳐질 거다.”

“하지만 무력만 두고 보면.”

“파울이 위겠지.”

레드라인 후작은 단언했다.

검술에 있어서는, 파울 레드라인이 위일 수밖에 없다.

검을 잡은 절대적인 시간이 너무 차이가 났다.

더군다나 지그문트는 육체 능력의 부족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승패는 알 수 없다.’

한때 자신과 함께 차기 소드 마스터라고 불리던, 라스 마이어의 아들이다.

검을 잡은 지 1년도 되지 않아 몇 단계를 성장한 괴물.

자신의 시험을 아주 당돌한 방식으로 받아치기까지 했다.

분명 어떤 변수가 있을 것이다.

‘치열할 것 같군. 재밌겠어.’

레드라인 후작의 입꼬리가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연무장의 둘이 자세를 잡았다.

불려 나간 시종의 신호에 따라 결투가 시작됐고.

“어?”

예상을 깨고 단 한 합 만에, 승패가 정해졌다.

* * *

나는 숨을 내쉬었다.

마나의 잔재가 흘러나왔다.

“후.”

결투가 시작하자마자, 마나 번(Mana Burn)을 사용해 신체 능력을 대폭 끌어 올렸다.

대폭 상승한 신체 능력을 기반으로 공격.

파울은 괴물 같은 반사 신경으로 공격을 막았다.

나는 파울이 ‘검을 부수는 검’을 쓸 틈도 주지 않고, 힘으로 밀어 버렸다.

그 결과.

“이게 지금 어떻게 된…….”

파울은 검을 놓쳤고, 승패가 갈렸다.

내 승리였다.

파울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자신의 빈손을 보다가, 저만치 날아간 검을 본다.

그리고 나를 올려다본다.

“너……?”

파울 레드라인은 강해졌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처형식 때에 비하면 배는 강해졌을 것이다.

‘아슬아슬한 상황을 연출할 수도 있었지만.’

마나 번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호각이었을 것이다.

한순간이지만, 내 공격을 막은 파울의 반사 신경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과연 검의 천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상황을 연출하지 않았다.

일부러 마나 번까지 사용해 가면서, 압승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파울 레드라인에게는 패배가 결여되어 있다.’

파울은 검의 천재다.

머지않아 왕국의 큰 전력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제국은 그보다 빨리 움직일 것이다.

성장의 촉진이 필요했다.

그를 위해서 내가 선택한 것은 파울의 패배였다.

‘레드라인 후작에게 숱하게 패배했겠지. 하지만, 또래와 결투에서 패배한 적은 없어.’

이미 한 번 내게 패배한 적 있지만, 파울은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검을 잠깐 놓아서라고.

오만한 생각이었다.

하늘 위에는 하늘이 있는 법이다.

“내가 좀 세졌어.”

“…….”

“아니꼬우면…… 아시죠?”

파울 레드라인은 더 강해져야 한다.

가만히 둬도 알아서 강해지겠지만, 나는 파울을 아주 떠밀기로 했다.

이런 거로 좌절할 놈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파울이 벌떡 일어났다.

저만치 날아간 검을 줍는다.

“한 번 더.”

“응, 안 해.”

파울이 부들부들 떨었다.

좀 억울하긴 할 것이다.

그토록 고대하던 승부였는데, 이토록 싱겁게 끝나 버렸으니.

그것도 자신이 원하지 않던 결과로.

나는 검지와 중지를 펴 보였다.

“한 달.”

레온하트의 수호자 노릇이나 해라.

그럼 한 번 더 싸워 주마.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파울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 짓을 한 달 더 하란 말이냐?”

“두 달.”

“뭐?”

“세 달.”

“하겠다.”

“좋아.”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울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검을 연무장 바닥에 꽂았다.

파울도 느꼈을 것이다.

격차를.

레드라인 후작이라는 강자와 숱하게 대련해 봤을 테니, 알 것이다.

파울이 물었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태초의 숲 앞 요정족 경매장에서 요정족 구해 주고, 엘비아 가서 불사의 잔재 잡고, 세계수 죽어 가길래 살려 주고, 영약도 먹고, 오거랑 워베어 좀 때려잡고. 아, 최근에 7서클 마도사랑도 한판 떴지.”

파울 레드라인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미친 사람 보는 눈이었다.

“혹시 정신분열증이라도 앓고 있는 건가?”

“왜 사람 말을 못 믿냐?”

“너는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니다. 지그문트 마이어.”

안 믿는데, 굳이 설득할 이유는 없다.

어깨를 으쓱였다.

파울 레드라인은 의외로 깔끔하게 결과에 승복했다.

다시 한 판 뜨자고 덤빌 줄 알았는데.

“여기, 가면 받아라.”

나는 파울이 반납했던 가면을 다시 건넸다.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럼 수고해.”

레드라인 후작에게 볼일이 있었다.

파울과 재결투는 겸사겸사 처리한 것이었다.

연무장을 나갔다.

파울은 의외로 순순히 나를 보내 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파울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젠자아아아아앙!”

쾅!

뭘 했는지 폭음까지 들려왔다.

남자는 폭발을 뒤돌아보지 않는 법.

나는 묵묵히 연무장을 나섰다.

“오랜만일세.”

“한 달 정도밖에 안 됐는데 말입니다.”

바로 레드라인 후작과 마주쳤다.

우연인가?

레드라인 후작은 그윽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직도 제자가 될 생각은 없는가?”

“없습니다.”

“또 차였군. 차인 김에 차나 한잔 들지.”

“…….”

“끙. 회심의 유머였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별로 안 좋아하는군.”

레드라인 후작은 유머 감각이 영 별로였다.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했다.

후작은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는 듯 허허 웃으며 나를 응접실로 데려갔다.

자리에 앉자 시종이 차를 내왔다.

“파울과 대련하는 것을 보았네.”

“역시 보셨군요.”

후작은 눈을 감았다.

“자네, 지금 어디에 있는가?”

“최근에 소드 익스퍼트 초급이 됐습니다.”

“……허.”

레드라인 후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파울에게 압승을 거둔 시점에서, 대략 예상했을 것이다.

소드 익스퍼트 초급, 혹은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했을 것이라고.

“후작님께서 주신 내단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내단 말인가? 그저 몸에 좋은 약 정도 되는 물건이었다만.”

“저한테는 기연이었습니다.”

“혹 그것이 기연이 되었다고 해도, 단시간에 이토록 급성장하는 건 불가능하네.”

레드라인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정확한 추측이었다.

내단 덕분에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리긴 했다.

하지만 내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건 내단 덕분이 아니었다.

전생에 살아온 수백 년의 시간.

그동안 쌓인 지혜와 지식, 경험, 인연이 있었다.

이제 갓 태어난 것들과 같은 성장세를 보이면 이상한 것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행운의 여신에 씌기라도 했나?”

“행운의 여신과는 데면데면한 사이입니다. 제 운이 강했죠.”

“강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능력이지.”

레드라인 후작은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수긍했다.

이런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여기에 온 이유가 뭔가?”

“레온하트 왕국이 무너질 것 같아, 구하러 왔습니다.”

“왕국을 구하러 왔다고?”

후작은 껄껄 웃더니 창가로 걸어갔다.

“자네 말대로, 왕국은 위태로운 상태일세. 겉보기에는 평화롭지만, 안은 썩어 있는 상태지.”

레드라인 후작도 알고 있었다.

왕국의 귀족가가 상당히 부패해 있다는 것을.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레온하트 왕국인 만큼, 안은 썩어 있을 수밖에 없다.

후작은 쓸쓸하게 웃었다.

“갈아엎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애석하게도 내가 가진 건 무력뿐일세. 썩은 부분을 도려낼 능력은 없어.”

레온하트 왕국은 왕의 힘이 극단적으로 약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귀족들이 힘을 키웠기 때문이다.

현왕, 파서벌 레온하트의 온건한 성격도 한몫했다.

“부패의 증거가 있다면 또 모르겠군. 이를테면 비자금 장부라든지, 탈세 기록 같은 것들 말일세.”

“그렇군요.”

“하지만 그런 걸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설령 찾는다고 해도, 문제 삼을 일이 너무 많네.”

“저택 무단 침입이니 뭐 그런 것들 말이군요.”

“그래. 마음 같아선 전부 쓸어 버리고 싶지만, 나도 입장이라는 게 있어서 말이야.”

“그렇다면.”

나는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부패의 증거를 확보했고, 그것을 털어 온 것이 정당한 인물이라면.”

수두룩한 부패의 증거들을 책상에 올렸다.

탁 소리에, 레드라인 후작이 뒤를 돌아본다.

“레온하트 왕국의 부패를 완전히 도려낼 수 있는 겁니까?”

레드라인 후작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

눈이 점점 커지고, 입이 벌어진다.

“자네, 이걸 어디서…… 아니, 설령 이것이 모두 증거라고 한들…….”

“레온하트 왕국의 부패를 보다 못한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부패를 척결했다.”

레온하트 수호자 가면을 꺼내 증거 더미 위에 올렸다.

“꽤 괜찮은 시나리오 아닙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