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9/134)

3

불사의 신자들

엘비아를 떠나기 전.

리옐은 세계수를 걱정했다.

마리나에게서 전해 들은 바로는 거의 하루 종일 성역 입구 근처를 서성거렸다고 한다.

세계수를 구하러 갈 거라고 하니, 그제야 의욕을 보였다.

-엄마! 아프지 말고 아빠랑 나 올 때까지 기다려야 돼?

리옐은 세계수의 화신체, 거대한 신목을 끌어안았다.

요정족들은 불안 속에서 그런 리옐의 모습을 보고 조금 위안을 받았다.

나는 땅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세계수와 리옐은 양립할 수 없는 존재다.

리옐이 세계수를 구하는 것은 곧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곧 선택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아빠, 피 나.”

혀끝에서 비릿한 철 맛이 났다.

어느새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내게 다가온 리옐이 까치발을 들었다.

안아 달라는 뜻이었다.

리옐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심 불안할 것이다.

“쯧.”

나는 한동안 세계수를 보다가, 등을 돌렸다.

엘비아의 성문 앞.

떠날 준비를 마친 마리나와 단이 보였다.

르네와 레골라스를 비롯한 요정족 장로들도 나와 있었다.

-마차가 뭐 이러냐?

척 봐도 재주 좋은 드라이어드가 만든 듯한 나무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레온하트 왕국으로 가져가면 예술품으로 팔아 치울 수 있을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레골라스가 은은하게 웃었다.

-세계수님의 부군과 따님을 모시는 마차인데, 이 정도는 준비해야지요.

-아니라니깐.

-아빠가 숫총각이라 맨날 부끄러워하는 거야.

-풉.

리옐의 한마디에, 마중 나왔던 요정족 몇 명이 돌연 고개를 숙였다.

몸을 떨고 있는 것이, 명백히 웃음이 터진 것 같았다.

리옐은 세계수가 그랬던 것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 맹랑한 녀석 좀 봐라.

-누가 그런 말 가르쳐 줬어?

-절대 말할 수 없소!

리옐은 고개를 돌려 대답을 피했다.

누가 보면 적군에게 붙잡혀 결의를 마친 레지스탕스라도 되는 줄 알겠다.

리옐의 볼을 꼬집었다.

찹쌀떡처럼 말랑한 볼이 쭉 늘어났다.

악랄한 고문에 버티지 못한 리옐이 실토했다.

-으에에에. 엄마가 그렇게 말했어요.

-씁, 그럴 것 같더라.

레골라스는 눈을 깜빡였다.

-숫총각이셨습니까? 한데 어찌…….

-닥치지 않으면 세계수고 엘비아고 다 뒤집어엎을 거다.

-…….

진심이 느껴졌는지, 레골라스가 입을 닫았다.

나는 눈을 감고 화를 삭였다.

애한테 뭘 가르치는 건지 모르겠다.

르네가 내게 다가왔다.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겨우 참는 기색이었다.

-어디로 가실 예정인가요?

-네르갈. 내 제자가 불사의 괴물을 따르는 미친놈들을 추적하고 있거든.

-그럼 저는 일러주신 대로 움직이면 될까요?

-그래. 변수가 몇 개 있을 수도 있는데, 그때는 내가 연락하마.

-알겠습니다.

할 거리가 많아졌다.

레온하트 왕국의 계획이 실패했으니 제국이 조용한 걸 수도 있었지만.

황제는 그럴 놈이 아니다.

웅크리고 있더라도, 날카로운 칼을 몇 개나 벼려 놓을 놈이었다.

무엇보다, 꿈처럼 스쳐 지나간 기억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이번에 움직이면서 해결을 해야겠지.

-나는 자네가 꽤 마음에 들었다네.

“나는 자네가 꽤 마음에 들었다네.”

“감사합니다.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옆에서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오벨의 말을 리옐이 느낌을 살려 번역한다.

단의 대답을 또 그대로 전한다.

웃음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오벨이 손을 슥 내밀었다.

숲지기들 사이에서 살짝 소란이 일었다.

인간에 배타적인 느낌을 많이 보이던 오벨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먼저 손을 내밀 정도로 단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단은 기꺼이 손을 마주 잡았다.

“단 록벨런입니다.”

-오벨일세. 나중에 또 보세나.

짧은 인사가 끝나고, 리옐이 훌쩍 마차에 올라탔다.

몇몇 요정족은 리옐이 엘비아에서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리옐 본인이 함께 가고 싶어 했기에, 말릴 수 없었다.

차기 신과 같은 존재의 의견을 부정할 요정족은 없었다.

“히히.”

내 허벅지에 앉은 리옐이 그곳이 제자리라는 듯 뒤통수를 배에 문질렀다.

마부석에는 단이 앉았다.

숲지기들이 호위를 나선다고 했지만, 내가 말렸다.

최소한의 길잡이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한 숲지기가 자원해서 나섰다.

“가자.”

마차가 출발했다.

단은 생각보다 마차를 잘 몰았다.

듣자 하니 종기사 시절에 몇 번 몰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리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절하듯 잠들었다.

마리나가 창밖을 보았다.

“아직도 잘 믿기지 않네요. 제가 엘비아에 다녀왔다니.”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엘비아에 들어가는 방법이 생겼다고 생각한 요정족 사냥꾼들이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찾을 테니까.”

“아.”

마리나는 조금 아쉬운 듯 보였다.

리옐에게 눈을 돌렸다.

“그럼 리옐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죠?”

“뭐 어디서 주워왔다고 대충 둘러대면 되지.”

“음, 하지만…….”

마리나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리옐의 정수리 위로 솟아난 작은 새싹.

아는 사람은 드라이어드라는 걸 단번에 눈치챌 것이다.

나는 일루전(Illusion)을 사용했다.

“어?”

“됐지?”

그러자 리옐의 새싹이 머리카락 모양으로 바뀌었다.

머리카락 정돈이 안 된 것처럼 삐죽 솟아 있었지만, 의심하진 않을 것이다.

마리나는 신기하다는 듯 리옐의 머리를 살폈다.

4서클에 오르면서, 마나에 여유가 생겼다.

당분간은 내가 마법을 유지하고, 돌아가서 눈속임용 마도구를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드라이어드는 눈에 띌 수밖에 없으니까.

마리나는 두 손을 모으고 감탄했다.

“꼭 마법 같네요!”

“마법 같은 게 아니라, 마법 맞아.”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마차가 멈췄다.

뭔가 싶어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단?”

마부석에서 내린 단이 검을 뽑아 들었다.

내 옆까지 뒷걸음질 쳐 온 단이 속삭였다.

“도련님, 조용히 마차에서 내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왜?”

“몬스텁니다.”

“처리하면 되잖아.”

숲지기와 소드 익스퍼트 초급의 기사.

소수긴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적어도 태초의 숲 바깥쪽에는 둘을 상대할 만한 몬스터가 없을 텐데.

나는 리옐을 마리나에게 맡기고 마차에서 내렸다.

숲지기가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릉.

정면에서 목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거였다.

숲지기는 자세를 바짝 낮췄다.

오거의 모습은 흉측했다.

온몸은 흉터투성이였다.

몸 곳곳에 굳은 피 때문에 더 흉악해 보였다.

하지만 붉은 눈동자는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나가 아니다……!

숲지기가 뒤를 보았다.

그의 말대로, 마차 너머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워베어였다.

놈은 오거만큼 상처가 많진 않았다.

대신 팔 하나를 밑으로 늘어트리고 있었는데,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쿠어어…….

“사이에 낀 건가?”

-이런. 좋지 않군.

숲지기가 마차를 살폈다.

워베어와 오거 양쪽 모두 완력만으로 철골도 가볍게 부러트리는 괴물이다.

마차 정도야 쉽게 찌그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단이 침을 삼켰다.

“제가 버틸 동안, 두 분께서 한 놈을 처리하고 지원을.”

“그럴 필요 없어.”

나는 오거의 앞으로 다가갔다.

오거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숲지기가 경악했다.

-미, 미쳤어! 돌아오십시오!

오거와 눈이 마주쳤다.

오거는 자신의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원래 쓰던 것이 아니라, 오크가 쓰는 것과 비슷한, 조잡한 몽둥이였다.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서 눈을 부라려. 눈 안 깔아?”

오거의 몽둥이가 아래로 내려왔다.

쿵.

흙먼지가 일었다.

“도련님!”

“왜?”

단이 눈을 부릅떴다.

오거가 몽둥이로 땅을 짚은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오거는 상당히 지능에 높은 축에 속하는 몬스터다.

생긴 게 이렇고, 워낙 성질이 포악해서 사람들이 잘 모를 뿐이다.

쿵.

워베어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내게 가까이 다가온 워베어는 리옐처럼 얼굴을 내 몸에 문댔다.

숲지기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무기를 내렸다.

-이게 어떻게 된…….

“마법입니까?”

“아니?”

“그럼 뭘 했길래 이 폭군 같은 놈들이 이렇게 순하게 구는 겁니까?”

폭군 같다.

정확한 말이었다.

지금이야 순해 보이지만, 좁은 지역을 지배하에 둘 수 있는 흉포한 괴물이었으니까.

내가 오거와 워베어를 길들인 방법은 간단했다.

“존나 팼다.”

“……예?”

나는 놈들을 가리켰다.

오거의 몸에 난 무수한 상처들.

워베어의 덜렁거리는 팔.

“도련님이 하신 겁니까?”

“어.”

처음에는 오거와 싸웠다.

검술과 전술을 시험해 보고 개량하면서.

나중에는 몸을 추스른 워베어가 합류했다.

나와 워베어, 오거는 난전을 벌였다.

끝내 승리를 거머쥔 것은 나였다.

“처음에는 차라리 죽이라고 덤벼들더라고.”

그래서 정말 죽기 직전까지 팼다.

오거는 과다출혈로 죽을 뻔했고, 워베어는 팔 하나를 으스러트렸다.

그다음, 치료해 줬다.

싸움 뒤에 우정이 싹튼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내 얘기를 들은 단이 고개를 기울였다.

“겨우 그걸로 이 괴물 같은 것들이 굴복했단 말입니까?”

알아듣기라도 한 듯, 워베어가 단을 보고 으르렁거렸다.

리옐 앞에서는 그렇게 순하게 굴다니.

나는 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워베어는 정강이를 붙잡고 끙끙거렸다.

“당연히 그런 걸로는 굴복 안 하더라.”

“그러면…….”

“더 팼지.”

패고, 치료하고, 패고, 치료하고를 반복했다.

약초학과 내 의료 지식, 심지어 샘물까지 조금 동원해서.

주변의 오크들이 지리면서 도망칠 때쯤, 놈들은 거의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다시 치료해 주니, 이렇게 나를 따르게 됐다.

“원래는 검술 시험용이었는데. 잘 생각해 보니까 쓸데가 있을 것 같더라고.”

엘비아에 발을 들이는 모든 인간을 공격하라고 교육시켜 놓았다.

요정족 사냥꾼이나, 혹시 제국이 수작을 부릴 수도 있었다.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겠지만, 이놈들이라면 걸림돌 정도는 될 것이다.

오거는 충직한 기사처럼 무릎을 꿇고 있었다.

워베어는 계속 애교를 부렸다.

손을 휘휘 젓자, 둘 모두 뒤로 물러났다.

“너희끼리 싸우지 말고,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놈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의 동공이 확장됐다.

“……알아듣는 겁니까? 인간 말을?”

“아니? 말에 마나를 담은 거야. 정확히 언어를 전달할 수는 없지만, 의지 정도는 느낄 수 있지.”

“신기하군요. 그렇다면 모든 마법사는 몬스터에게 의지를 전달할 수 있는 겁니까?”

“당연히 아니지. 이거 겁나 어려워.”

“…….”

작은 소동이 지나가고, 나는 다시 마차에 올랐다.

마리나가 리옐의 머리를 쓸어 주며 속삭였다.

“저, 도련님.”

“왜?”

“아까부터 저 구슬 같은 게 깜빡거려서요.”

의자에 놓아둔 통신용 수정구였다.

발레리아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수정구에 하얀 가면이 떠올랐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가면이었다.

언뜻 뒤로 보이는 풍경은 어둡고 칙칙했다.

하얀 가면이 수정구 쪽을 내려다보았다.

“스승님?”

발레리아의 목소리였다.

“너 어디냐?”

“아, 여기가 어디냐면…….”

챙!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어디선가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레리아의 등 뒤에서 또 다른 하얀 가면이 보였다.

체구나 검술을 볼 때, 파울 레드라인인 것 같았다.

파울은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파울이 구석에 몰리자, 발레리아가 뒤를 보고 팔을 뻗었다.

웅.

순식간에 쏘아진 파이어 애로가 파울의 상대를 꿰뚫었다.

파울이 뭐라 악을 썼지만 들리지 않았다.

곧바로 다른 상대가 파울에게 달려들었다.

“저거 도와줘야 되는 거 아니냐?”

“알아서 살겠죠, 뭐.”

“그건 그래.”

뒤에서 파울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파울의 목소리를 깔끔하게 무시한 발레리아는 심각한 기색으로 말했다.

“스승님 말씀대로, 불사의 신자들의 뒤를 밟았어요.”

“그런데?”

“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당한 거물이 개입한 상태예요.”

한 놈이 발레리아의 등 뒤에서 달려들었다.

발레리아는 뒤도 안 돌아보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덤벼들었던 놈의 몸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발레리아의 고유 마법, 이그나이트(Ignite)였다.

“끄아아아아아악!”

작열통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이다.

온몸에 불이 번진 놈은 처절하게 절규했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태워 버리는 모습에, 발레리아를 노리던 놈들이 주춤 물러섰다.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이윽고 만만한 파울에게 달려들었다.

파울은 괴성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그래도 검의 천재라고, 많은 인원을 혼자서 전부 상대해 냈다.

“혹시 아직 엘비아이신가요?”

“지금 네르갈로 가는 중이다.”

“그럼 만나서 말씀드릴게요. 저대로 두면 그래도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 조심해라.”

“괜찮아요. 제 몸 하나 건사할 정도는 되니까요. 맞다. 스승님, 저번에 그 드라이어드 아이는…….”

뚝.

통신을 끊었다.

수정구를 아공간 주머니에 던져 넣었다.

정확한 정황은 가서 들으면 된다.

바빠 보이는데 오래 붙잡고 있는 것도 그랬다.

발레리아와 파울 정도면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며칠 후.

태초의 숲을 빠져나가는 길을 안내해 준 숲지기는 엘비아로 돌아갔다.

리옐은 아쉬운 듯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멀어져 가는 태초의 숲이 보였다.

리옐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빠, 엄마 꼭 고쳐 줘야 돼?

나는 리옐의 머리를 헝클어 놓았다.

머리를 감싼 내 손을 붙잡은 리옐이 금세 배시시 웃었다.

억지로 밝은 척하던 세계수와 그 모습이 겹쳐 보였다.

* * *

“도련님, 네르갈이 보입니다.”

단의 말에 밖을 보니 과연 네르갈의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서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마차를 몰고 간 단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

“아,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긴! 벌써 몇 번짼데!”

남자가 씩씩거렸다.

경비병은 난처한 얼굴로 마차를 살폈다.

나는 마차 창문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무심한 눈으로 경비병을 바라보았다.

오만한 귀족 연기였다.

경비병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고급스러운 마차까지 타고 있으니, 고위 귀족의 자제라고 생각한 것이리라.

단이 대신해서 물었다.

“몇 번째라니?”

“며칠 전부터 네르갈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서 말입니다.”

“현상이라…… 설명해 줄 수 있겠나?”

“땅이 조금 흔들리고, 큰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습니다.”

“지진 같은데.”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간격이 점점 짧아지더군요.”

“흠, 위치는?”

“네르갈 중심부입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웅성거렸다.

불안해서 네르갈의 외곽까지 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씩씩거리던 남자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땅바닥이 뜨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나?”

내 물음에 남자의 눈이 커졌다.

“마, 맞습니다! 땅이 흔들릴 때마다 땅에서 열기가 느껴졌습니다. 저번에는 공터의 땅이 무슨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기도 하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렇군.”

대충 경위가 짐작이 갔다.

땅 울림, 지면의 열기.

발레리아가 지하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수정구로 통신할 때도 지하 같은 곳에 있었다.

경비병은 간단하게 신원을 조회한 후, 성문을 열었다.

“들어가시죠.”

네르갈에 들어선 나는 곧바로 여관 서풍에 방을 잡았다.

경매장에서 정당하게 얻은 돈이 있다.

이 정도 사치는 부릴 수 있었다.

카운터에 있는 것은 저번에 바가지를 씌우던 직원이 아니었다.

넌지시 물어보니, 저번 사건 때 몰래 돈을 챙긴 것이 들통나 잘린 모양이었다.

“여기 잠깐 있어.”

마리나와 단, 리옐은 방에서 쉬도록 했다.

태초의 숲과 네르갈 사이는 그리 가깝지는 않았다.

며칠 동안 마차에서 보냈으니, 말은 안 해도 여독이 쌓였을 것이다.

좋은 복지가 생산적인 능률을 끌어오는 법이다.

쉬는 것도 필요했다.

방을 나가는데, 리옐이 꾸벅 배꼽 인사를 했다.

“다녀오세요!”

나는 곧바로 적탑을 찾아갔다.

건국제가 끝나고 몇 주가 지났다.

그사이 무너진 적탑은 거의 다 복구되어 있었다.

마법 처리는 아직 덜한 것 같았지만, 적어도 외관은 멀쩡했다.

‘암국도 한번 찾아가야 하긴 하는데.’

그것보단 발레리아와의 접선이 먼저다.

마탑이 완공되었으니 아카데미가 아닌 마탑에 머무르고 있을 것이다.

인식 방해를 응용해서 대충 정체를 감췄다.

그런데,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응?’

처음에는 평범하게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잘 보니, 각각 다른 동선으로 마탑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이따금 마탑에 들어가는 사람을 확인하기도 했다.

관심을 두고 보지 않는다면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내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염탐꾼이군.’

하는 짓을 보니, 전문가가 분명했다.

적탑에 염탐이 붙는 건 이상하지 않다.

왕국 최고 전력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 발레리아가 머무는 곳.

거기에 실력 있는 마법사도 깨나 모여 있으니까.

‘어디서 보낸 놈이려나.’

용의선상에 오를 수 있는 세력이 너무 많았다.

팔베르크, 레온하트, 암국일 수도 있고, 제3세력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불사의 신자?’

발레리아는 내 명령에 따라 불사의 신자들을 추적하고 있다.

설마 정체를 간파당한 건가?

어느 쪽이든 간에, 염탐꾼은 처리해야 했다.

나는 놈에게 다가갔다.

“…….”

놈은 나를 경계하지 못했다.

인식 방해를 쓰고 있는 데다가, 나는 기척을 죽이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인비지빌리티(Invisiblity)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배운 적이 있다.

조용히 놈에게 다가간 나는 놈의 뒤통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슬립(Sleep).

일단 잠들게 한 뒤, 적당한 곳에서 가볍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터졌다.

나는 손끝에서 정전기처럼 마나가 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파직.

놈의 왼쪽 귀에 달려 있던 작은 귀고리가 깨졌다.

저위 정신 마법 파훼.

마도구였다.

놀란 놈이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젠장.’

곧바로 제압을 시도했지만, 놈이 한발 빨랐다.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더니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염탐은 조금 어설픈 감이 있었는데, 발 빼는 건 정말 빨랐다.

놓치면 안 됐다.

놈은 부지불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언제든지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정도로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는데.’

정신 마법을 파훼하는 마도구는 구하기 어렵다.

저런 일회용이라도 상당한 방비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긴 마탑을 염탐하려면 저 정도는 준비해야겠지.

손가락을 움직였다.

슬립은 파훼 됐지만, 마법이 깨지면서 흘린 마나의 흔적이 놈의 목덜미에 묻었다.

그것을 따라 추적하면 된다.

틱.

손끝으로 마나의 실이 뻗어 나왔다.

멀리 늘어진 마나의 실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나는 실을 꽉 잡고 씩 웃었다.

뛰어 봤자 벼룩이다.

* * *

“헉, 헉.”

염탐꾼은 도망쳤다.

빈민가에서 나고 자란 그는 손재주가 없었다.

그러나 기척을 숨기고 사소한 정보를 기억하는 데 재능을 타고 났다.

인상도 평범해 염탐이나 위장 잠입에 제격이었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다.

들킨 적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설령 들키더라도, 빠른 발과 판단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뭐냐고!’

분명 정신 마법을 파훼하는 귀고리가 부서졌다.

말인즉슨, 염탐을 눈치챈 상대는 마법사라는 뜻이다.

마법사가 추적에 능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목덜미에 칼이 들어온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팔뚝과 등에 소름이 돋았다.

‘도망쳐야 한다. 어떻게든 도망쳐야 한다.’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오랜 감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도망치지 않으면, 결코 무사하진 않을 거라고.

염탐꾼은 더 빠르게 발을 놀렸다.

흔적을 지우고, 평소보다 더 동선을 꼬았다.

“젠장, 젠장, 젠장!”

악마의 거대한 손에서 헛걸음만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도망쳤다.

네르갈의 골목이란 골목은 전부 알고 있었다.

지형을 잘 활용하면,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

염탐꾼은 발을 멈췄다.

뭔가 이상했다.

‘……여기에 벽이 있었나?’

도망칠 때 자주 사용하는 좁고 어두운 골목.

어쩐지 그 끝이 벽으로 막혀 있었다.

새로 만들어진 거라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마치 자신의 퇴로를 틀어막듯이 골목 중간에 만들어져 있었으니까.

터벅. 터벅.

발소리가 울렸다.

염탐꾼이 뒤를 돌아보았다.

소리가 들린 방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 들었다.

눈동자가 굴러갔다.

‘어떻게?’

완전히 동선을 간파당했고, 순식간에 추적당했다.

마치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으로 한 방 먹여야 했다.

당황한 틈에 도망친다.

유일한 살길이었다.

“후.”

염탐꾼은 무심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군가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주머니칼을 휘둘렀지만, 애꿎은 허공만 베어 낼 뿐이었다.

“뭐, 뭐야……!”

머리 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쳐들었지만, 당연히 하늘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높게 솟은 건물의 벽면만 보일 뿐이었다.

염탐꾼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완전히 가지고 놀고 있었다.

“젠장!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공포를 지워 내기 위해 악을 쓰며, 주머니칼을 휘두른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지막하고, 졸린 듯한 낮은 목소리.

그러나 바로 귓전에서 말하는 것처럼 똑똑히 들렸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모, 모욕감?”

“그러게 얌전히 한 번에 잡혔으면 얼마나 좋아?”

염탐꾼이 인식할 틈도 없이, 시야가 암전됐다.

어두운 골목.

염탐꾼을 묶어 놓은 지그문트는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휘파람을 불며 여러 도구를 꺼냈다.

작고 날카로운 칼, 비커와 플라스크, 집게, 망치, 줄 톱, 송곳.

수술에 쓰이는 온갖 도구들이었다.

그것을 보기 좋게 늘어놓은 지그문트는 염탐꾼에게 다가갔다.

기절한 염탐꾼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긴다.

딱!

각성(Awaken).

염탐꾼이 번쩍 눈을 떴다.

재빨리 주변부터 살피며 상황을 파악한다.

지그문트와 눈이 마주쳤다.

“읍읍!”

염탐꾼은 살려 달라고 소리쳤지만, 재갈을 물고 있었기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그문트는 수술용 칼이 잘 드는지 확인했다.

시몬 밀러에게 부탁해서 공수한 제품.

전생에 쓰던 것보다는 그 예리함이 떨어졌으나 이 정도면 고급품이다.

“으으읍!”

염탐꾼은 몸부림치며 발광했다.

깨어나자마자 밧줄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밧줄은 단단히 묶여 풀리지 않았다.

마법 처리까지 한 것이니, 당연했다.

지그문트는 허공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다.

“요즘 들어 좀 바빠서, 느긋하게 연구할 틈이 없었는데.”

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로였다.

지그문트는 연습을 하듯 칼을 슥슥 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예전에 했던 해부는 영 마음에 안 들어. 절단면도 말끔하지 않았고.”

이제는 자신 있었다.

손 떨림도 사라졌고, 검도 익히고 배웠다.

적어도 전보다는 훨씬 능숙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그문트의 무심한 눈을 확인한 염탐꾼은 공포에 몸을 떨었다.

‘저, 저 미친 새끼!’

염탐꾼의 눈은 본능적으로 탐지했다.

칼을 휘두르는 거나, 경로를 그리는 데 어색함이 없었다.

‘위협 같은 게 아니라, 진짜잖아!’

정말 생체 실험을 당할 판이었다.

그것도 의식이 있는 상태로.

염탐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지그문트는 염탐꾼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손가락으로 염탐꾼의 배에 선을 긋는다.

“잠깐만 열었다 닫을게. 괜찮아. 안 죽어.”

“흡! 으흡! 으흐읍…….”

“야, 우냐? 울어?”

지그문트가 돌연 염탐꾼의 재갈을 풀었다.

염탐꾼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바로 눈치챘다.

지그문트가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고 있다는 것을.

입을 열었으나, 공포에 목이 잠겨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허억. 어억.”

짧은 순간.

염탐꾼은 갈등했다.

재갈을 풀어 준 것을 볼 때, 지그문트가 원하는 건 정보가 분명했다.

그러나 정보를 준다면, 염탐꾼에게는 또 다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것이다.

염탐꾼은 듣는 자.

말하는 자가 아니었다.

입을 놀리는 염탐꾼은 사냥당한다.

그것이 룰이었다.

염탐꾼은 눈을 꽉 감았다.

‘지랄! 산 채로 해부당하는 것보단 도망칠 기회라도 잡는 게 낫지!’

염탐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게 무조건 나은 선택이라고.

저 남자에게서는 절대 도망칠 수 없다.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여기서 입을 닫으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기다릴 것이 확실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됐다.

‘모아 둔 자금도 있겠다.’

한적한 곳으로 도망친다.

숨을 죽이고 살다 보면, 잊힐 가능성도 있었다.

뭐가 됐든 산 채로 해부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마른침을 삼켜 목을 축인 염탐꾼이 눈을 들었다.

“……아는 것을 전부 말한다면,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살려는 드릴게.”

* * *

나는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원래 목적이었던 마탑으로 향했다.

전에 봤을 때와는 달리, 마탑의 1층에는 사람이 꽤 있었다.

오랫동안 기능을 멈춰서인지, 줄까지 서 있었다.

줄 끝에 섰다.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여자 마법사와 눈이 마주쳤다.

건국제 기간 당시 홀로 1층을 지키고 있던 수습 마법사였다.

인식 마법을 풀고 있었던 덕분에, 그녀는 나를 단번에 알아봤다.

수습 마법사가 다가왔다.

“혹시, 탑주님의…….”

나는 검지를 들어 입술에 올렸다.

탑주라는 단어에 사람들이 반응했기 때문이다.

수습 마법사는 주변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수제자분, 맞으시죠?”

그러고 보니 그런 오해를 하고 있었다.

해명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관계만 일치하면 됐다.

수습 마법사는 나를 구석 쪽으로 끌고 갔다.

“탑주님을 뵈러 오신 건가요?”

“그래. 지금 탑에 있나?”

“네. 외부 수리가 끝난 뒤로, 다시 마탑에 머무르고 계시거든요.”

“잘됐군. 탑주……님께 말 좀 전해 줄 수 있겠어?”

“수제자님이 찾아왔다고 전해 드리면 될까요?”

“아니. 흑염의 대마법사가 왔다고 전해 줘.”

“풋, 흑염의 대마법사요? 유치한 이름이네요. 무슨 암호 같은 건가? 어쨌든, 여기 잠깐만 계세요.”

수습 마법사는 웃음을 머금은 채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배치된 의자에 걸터앉았다.

몇 분 후, 수습 마법사가 삐걱거리며 어색한 동작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안색이 새파래져 있었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서 조심스레 물었다.

“저, 수제자님?”

“왜?”

“탑주님 반응이 조금 이상하셔서요.”

“어땠는데?”

“창문에 플레임 스피어를 날리시던데요. 일단 올라오시라고 하시긴 하셨는데.”

“수고했어. 고맙다.”

나는 계단을 올라갔다.

마탑주의 방 앞에 서자 열기가 느껴졌다.

방문을 열었다.

눈앞으로 검은 불길이 치솟았다.

화악.

겉으로만 그럴 듯한 마법이었다.

마나로 방벽을 만들어 막았다.

예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 나는 4서클.

플레임 스피어도 아니고, 이런 조잡한 마법에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나의 방벽에 막힌 검은 불길이 곧 사그라졌다.

시야가 트였다.

자리에 앉은 발레리아가 부들부들 떨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환영 인사가 격하구나.”

“사일런스(Silence)!”

입이 강제로 닫혔다.

흥분했는지, 마나가 과하게 들어갔다.

좋은 버릇은 아니다.

나중에 지적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사일런스를 풀어내고, 말을 이었다.

“……흑염의 대마법사여.”

“아아아아아아! 안 들리는데요!”

발레리아는 자신의 두 귀를 틀어막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적탑의 꼭대기는 처음인데.

어쩐지 인테리어가 익숙했다.

예전에 제국에서, 발레리아가 지내던 방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발레리아는 책상에 머리를 박은 채 꿍얼거렸다.

“열심히 했는데, 칭찬은 안 해 주고, 놀리기나 하고…….”

“네가 애냐? 이런 걸로 삐지게.”

“스승님 나이 생각하면 갓난아이거든요?”

“난 이제 스무 살이다.”

“속은 할아버지면서!”

“너도 환생하든가.”

발레리아는 책상에 엎어져 우는 척을 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거물이 개입했다는 건 어떻게 된 거냐.”

“……아직 단편적인 정보밖에 없어요.”

입술을 삐죽 내민 발레리아가 대답했다.

책상에 있던 서류가 공중에 떠오르더니, 내게 날아왔다.

나는 서류를 잡아채 그 내용을 확인했다.

“내가 말해 준 정보상, 밤말을 듣는 쥐에게 의뢰는 해 봤냐?”

“네. 그런데…… 불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불가능?”

인상을 찡그렸다.

암국이 의뢰를 마다할 리가 없다.

전쟁 중에도 정보를 팔기 위해 뛰어다니는 놈들이다.

그런데 정보의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싼 것도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했다.

내가 암국과 계약을 맺은 걸 생각하면, 신용의 문제는 아니었다.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그 거물이라는 작자도 암국의 고객일 가능성이 높다는 건데.’

그렇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거물 수준이 아니었다.

암국이 인정할 정도로 몸집도 크고 정보력도 있는 놈.

그런 사람이 불사의 신자와 연루되어 있다니.

좋지 않았다.

“지하를 무작정 들쑤셔서 얻어 낸 것치고는, 그래도 나쁘지 않구나.”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지나가다 들었다. 요즘 땅이 흔들리고 열기가 올라온다고. 네가 한 짓 맞지?”

“맞긴 맞는데요. 기분이 왜 이상하지?”

발레리아는 지도를 펼쳤다.

네르갈의 지도였다.

군데군데 동그라미나 엑스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지하에서 그놈들 근거지를 몇 개 찾아내서.”

“찾아내서?”

“폭발시켰어요.”

“……그래?”

나쁜 선택은 아니었지만, 좋은 선택도 아니었다.

이렇게 쉽게 드러나는 건 기껏해야 꼬리 정도다.

꼬리를 자르는 것도 어쨌든 전력 약화긴 하지만, 상대의 경계를 살 수밖에 없다.

그래도 흔적을 남기는 것보단 훨씬 깔끔하긴 하다.

“잔챙이들은 별로 아는 게 없더라고요. 무작정 불사를 동경해서 신자가 된 머저리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결국 거물이라는 놈을 잡아야 하는데. 정보는 이게 전부냐?”

“아쉽게도 그래요. 이건 추정이긴 하지만, 사교계와도 연관성이 있는 것 같아요.”

“……그쪽까지 손을 뻗고 싶진 않은데.”

발레리아가 어찌어찌 모아오긴 했지만,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

암국이 고객의 정보를 감추려고 했을 테니, 이 정도만 끌어모은 것도 잘한 거다.

방법은 하나뿐.

직접 내가 발품을 팔아야 했다.

암국이라도 고객끼리의 충돌에 개입하진 않을 것이다.

어느 한쪽 편을 들어줄 수 없을 때는, 중립을 지키려고 할 테니까.

“아, 맞다. 스승님 말씀대로.”

발레리아가 아공간을 열었다.

아공간이 가득 차 있었는지, 무언가 우르르 쏟아졌다.

대량의 잡동사니였다.

책, 홍보물, 이상한 표시가 그려진 것들.

“일단 다 털어 왔어요.”

나는 박수를 쳤다.

짝짝짝.

“잘했다.”

“헤헤.”

일단 다 털어 와라.

나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발레리아는 내 지시 사항을 완벽하게 이행했다.

잡동사니 사이로 신도의 것으로 추정되는 속옷까지 보였다.

진짜 뼛속까지 털어 온 모양이었다.

나는 잡동사니를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물건에 새겨진 표식이었다.

“역삼각형 위에 선 하나 그어 놓은 걸 상징이랍시고 쓰고 있는 건가? 거참 직관적이군.”

역삼각형은 땅으로 돌아감, 죽음을 뜻했다.

그리고 선은 단절을 뜻하는 표시였다.

합치면 죽음의 단절, 즉 불사가 된다.

직관적인 표식이었다.

“이건?”

“자기들 말로는 성서라고 하더라고요.”

“읽어 봤냐?”

“읽다가 시력 감퇴할 뻔했어요.”

“공포감 조성, 달콤한 보상, 배교자 처벌. 날조된 성서가 빠질 리가 없지. 하여튼 사이비들은 패턴이 똑같다니까.”

교리라고 포장된 개소리가 적힌 책이었다.

대충 훑어봤다.

종말과 관련된 대목에서, 불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또한, 외관 묘사도 꽤 자세했다.

직접 본 건지 기록을 옮긴 건진 알 수 없지만.

내가 봤던 불사의 괴물과 거의 일치했다.

“적어도 이 사이비들의 대가리는 불사의 괴물에 대해 조금이나마 아는 모양이군.”

“그 말씀은.”

“이놈, 진짜일 확률이 높다.”

* * *

화려한 방.

문이 열리고,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로브에는 붉은색으로 선명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역삼각형을 잘라 내는 듯한 선.

불사의 신자들이 사용하는 표식이었다.

남자가 물었다.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방의 주인인 듯 보이는 청년은 침묵했다.

청년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창문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먼 곳을 바라보던 눈이 감긴다.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입을 열었다.

“결정은 제가 아닌, 신께서 하는 것이지요.”

청년의 목소리에서는 경건함과 신앙심이 묻어 나왔다.

로브 남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청년이 눈을 떴다.

“저는 따를 뿐입니다.”

“그럼, 준비된 것으로 알겠습니다.”

“예. 저는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로브 남자가 획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무언가를 꾹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 일만 성사된다면.”

“제 가족들 또한, 분명 구원받을 수 있겠지요?”

“물론이지요. 신께서는 형제님의 공을 높이 살 것입니다.”

“자비로우시군요.”

“필멸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저희에게, 불사라는 축복을 내려 주실 분이니까요.”

“이 모든 게 형제님을 만난 덕분입니다.”

“아닙니다. 형제님과 같이 신의 말씀을 따를 뿐이지요.”

* * *

구구절절 그럴싸하게 보이도록 늘려 놨지만, 성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신이 깨어나면 세상이 종말한다. 종말의 날, 신을 섬긴 신자들은 불사의 축복을 받는다.”

허술한 소설이었다.

세상이 종말 한 시점에서 신자들도 다 뒈진다.

설사 살아남는다고 해도, 종말 한 세상에서 불사를 가지고 있어 봤자 뭘 한단 말인가.

영원한 수렵 생활이 하고 싶다면 산이라도 들어가면 될 것을.

“이런 개소리에 넘어가는 멍청이들이 있다는 게 참 애석한 일이군.”

“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람을 노리는 것 같더라고요.”

발레리아는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쥐는 시늉을 했다.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요. 용병 같은.”

“그런 사람들뿐만이 아닐 거다. 원래 가진 사람들이 불사처럼 허무맹랑한 것에 빠지기 더 쉽거든.”

“그것도 맞아요.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섞여 있었어요.”

불사는 사람들을 끌어모으기에 좋은 소재였다.

죽음에 초연한 사람은 없으니까.

일전에도 불사의 신자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내 손에 공중분해 당하기 전까지는.

“요정족과 연관성은?”

“잔챙이를 잡아 족칠 때 얼핏 들은 건데, 이놈들, 요정족을 산 제물로 바치는 것 같더라고요.”

“산 제물이라. 또 들은 건 없나?”

“……음, 분명 경매장이라고 했어요.”

“경매장?”

“네. 그래서 레온하트의 경매장을 뒤져 봤는데, 꼬리는 못 잡았어요.”

머릿속에 바로 떠오른 것이 있었다.

태초의 숲 인근에 있던 요정족 경매장.

구매자 중에 불사의 신자가 섞여 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비슷한 표식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그건 처리했다.”

“네?”

“요정족 경매장이 있었어. 어떻게 된 거냐면…….”

사건의 경위를 설명해 주자, 발레리아가 짤막하게 감탄했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이지만, 결과만 좋으면 됐다.

문제는 이놈들이 왜 요정족을 원하냐는 것이다.

정말 산 제물을 바치는 건 아닐 거고.

아마 특수한 목적이 있을 텐데.

“모르겠군. 정보가 너무 부족해.”

“어떡하죠? 어떻게든 끌어모아 볼까요?”

“아니. 그래서는 한세월은 걸릴 거다.”

암국이 정보의 상당 부분을 차단하고 있을 것이다.

정보전으로 가면, 이쪽만 손해 볼 가능성이 높았다.

상대는 사이비 종교 집단.

발레리아의 습격도 있었으니, 당분간은 바퀴벌레처럼 숨어 있을 것이다.

찾아낸 근거지도 옮기거나 비웠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면…….”

“뭐 어쩌겠어. 의심 가는 놈들 전부 잡아다가 족쳐 봐야지.”

나는 발레리아가 작성한 서류를 흔들었다.

정갈한 필기체로 적힌 리스트.

거물이라고 불릴 만한, 레온하트의 주요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내 목표는 대가리지, 꼬리가 아니다.

불사 괴물의 봉인이나 신살에 대해서 알려면, 적어도 교주급은 확보해야 했다.

“너무 막무가내 아닐까요?”

“파도, 파도 미담만 나오는 놈들이 용의자로 선정되지 않았을 거 아니냐.”

“그건…… 그러네요.”

제국과 연루된 놈들은 이미 발레리아의 손에 정리된 상태였다.

하지만 내가 죽은 후에 투입된 놈이 없을 거란 보장은 없다.

검사도 할 겸, 불사의 신자도 찾고, 뒤가 구린 놈도 잡아내는 것이다.

일석삼조였다.

“나 바쁘다. 후딱 정리하자.”

* * *

어두운 밤.

나는 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채 저택을 주시했다.

두 명의 문지기가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문지기에게 다가갔다.

“누구…….”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을 올렸다.

문지기의 미간에 손가락을 대고, 마나 서클을 회전시켰다.

슬립(Sleep).

문지기 하나가 쓰러지듯 잠들었다.

“뭔!”

다른 문지기가 빠르게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돌연 문지기의 등 뒤에서 하얀 가면을 쓴 여자가 나타났다.

발레리아였다.

부드럽게 올린 손이 머리에 닿자, 그 또한 픽 쓰러졌다.

정문을 열고 저택 내로 들어갔다.

“영 허술하네.”

“침입자가 정문으로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거 아닐까요?”

“요즘 누가 창문으로 들어가냐? 찌질 하게.”

고개를 들고 호화스러운 저택을 올려다봤다.

본관과 별관이 따로 떨어진 구조로, 층은 총 네 개다.

맨 위층에는 아직 불 꺼지지 않은 방도 있었다.

“별관은 맡기마.”

“제가 본관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효율을 생각하면, 정리가 느린 쪽이 별관으로 가는 게 맞다.

별관은 본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았으니까.

발레리아는 내가 효율을 중시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자신이 본관을 맡는다고 한 걸 테고.

“내가 본관이다. 마법은 상당히 제한됐지만, 다른 걸 얻었거든.”

높은 서클의 마법은 쓸 수 없다.

대신 숱한 경험과 신체 능력이 있다.

잘만 응용한다면 발레리아보다 일찍 정리할 수도 있었다.

발레리아는 별관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다 정리하고, 거기서 봬요.”

“그래.”

마나가 격렬하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발레리아의 모습이 사라졌다.

별관 위쪽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는 발목 손목을 돌리며 숨을 들이쉬었다.

약해졌다고는 하나, 제자에게 밀릴 수는 없다.

본관으로 진입했다.

‘사치스럽군.’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사치스럽다.

일정한 간격으로 자신의 부를 과시하듯 사치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대충 가격을 매겨도 값이 꽤 나가는 것들이었다.

이런 걸 복도에 전시해 놓는 사람은 크게 셋이다.

멍청한 놈, 돈 많은 놈, 과시로 우월감을 느끼는 놈.

아마 이 저택의 주인은 셋 모두에 해당하는 것 같았다.

‘밀러 자작도 비슷하게 전시해 놓긴 했지.’

하지만 이놈과는 경우가 조금 다르다.

밀러 자작의 저택에 있던 전시품들은 모두 거래 품목들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사치품들이 아니었다.

나는 전시된 것들을 구경하며 복도를 지나갔다.

로케이트(Locate).

1층과 2층을 훑었지만, 불사의 표식은 발견되지 않았다.

응접실이나 서재에서도 특별한 것을 찾을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허술하게 감춰 놓은 비자금 장부가 전부였다.

서재에 이상하리만치 숨겨 놓은 책이 있길래 봤는데, 정답이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하게 정리된 장부.

대충 훑어봤음에도 정말 많이도 해 먹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금 도둑이 따로 없어.’

불사의 신자들은 네르갈 전역에 퍼져 있었다.

그렇게 지부를 여럿 둘 정도면 자금줄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발레리아가 용의자로 추려 낸 놈들은 대체로 이런 놈들이었다.

이상한 곳에서 돈이 사라지는 놈들.

나는 위층으로 걸어 올라가며 장부를 읽었다.

빼돌린 돈은 대부분 유흥이나 사치품에 쏟아부었다.

‘쯧. 결국 꽝이라는 얘기잖아.’

불사의 신자들에게 자금을 대고 있다면, 이렇게 돈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위장일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배제했다.

위장이라기엔 전시해 놓은 사치품들이 너무 많았다.

이렇게 대놓고 전시해 놓았다는 건, 꼴에 연줄도 있다는 거겠지.

레온하트는 생각보다 총체적 난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 국왕의 온건한 성격이 문제였다.

‘세금 축내는 쓰레기 하나 청소했다고 생각해야겠군.’

침실과 집무실까지 확인했으나, 역시 불사의 신자와 연관 점은 찾을 수 없었다.

비자금 장부만 들고 나가기로 했다.

혹시나 싶어 증거가 될 만한 사치품도 하나 챙겼다.

다시 만나기로 한 골목으로 가니, 발레리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막 도착했는지, 희미한 마나의 잔재가 느껴졌다.

“어땠어요?”

“꽝이야. 비자금 장부를 찾긴 했는데, 그냥 제 돈 쓰는 멍청이 같더라고.”

“별관 쪽은 깨끗했어요. 창고에 사치품이 쌓인 정도?”

“더 있다고? 그 정도면 비자금 장부 하나 더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많이 해 먹었다는 건데.”

“아마 리스트에 있는 귀족들 대부분이 이런 놈들일 거예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은 없다.

먼지 대신 악취 섞인 오물이 나오는 놈들이 문제였다.

나는 장부를 아공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바로 터트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 변명거리를 만들 시간 주면 귀찮아지니까.”

우리에겐 청소하다가 주운 쓰레기.

그러나 레온하트의 귀족들에겐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공표한다면 적어도 이 장부의 주인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연루된 놈들도 줄줄이 엮어 나올 것이고, 털렸다는 걸 알면 곧바로 대처하려 들 테니, 바로 터트려야 했다.

“불사의 신자 잡으려다가 레온하트에 자원봉사 하는 셈이 됐군.”

“레온하트를 거점으로 삼으신다고 하셨으니, 결과적으로는 괜찮지 않을까요?”

“이런 건 원래 왕가에서 해야 할 일이야. 계속 도와주다 보면 무능해진다.”

나는 리스트를 꺼냈다.

지금 턴 귀족의 이름에 선을 그었다.

아직도 남은 귀족은 많았다.

내가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한 놈들도 몇몇 있었다.

이 중에 하나는 불사의 신자.

나머지는 부패한 세금 도둑이다.

‘레드라인이나 마이어가 없어서 다행이군.’

레드라인 후작마저 부패했다면 레온하트를 버릴 생각이었다.

파서벌 레온하트 국왕은 모를 것이다.

레드라인 후작이 청렴한 덕분에, 내가 레온하트를 살리기로 했다는 것을.

땅에 머리 박고 절해도 모자랄 일이었다.

내가 손을 놓는다면, 팔베르크가 레온하트를 집어삼키는 건 한순간이었다.

‘발레리아 말고도, 제국에 대한 대응책을 만들긴 해야 하는데.’

파울 레드라인이 있긴 하지만, 아직 그놈은 철부지다.

무력은 있으나 직접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진 못한다.

레드라인 후작이나 라스 마이어 남작을 밀어주는 걸 고려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나머지도 처리하자.”

나는 다시 가면을 뒤집어썼다.

밤은 짧고, 쓰레기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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