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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익스퍼트 초급
단은 앞장서서 걸어가며 물었다.
“도련님, 도련님께선 자신의 능력을 수치화할 수 있으십니까?”
“수치화?”
“예. 이를 테면 힘은 어느 정도고, 전력으로 달리는 속도는 어느 정도인지 말입니다.”
“어. 가능한데?”
“당연히 불가능할 겁니다. 재 본 게 아니고서야, 자신의 능력을 명확히…… 예?”
나는 길가에 굴러다니던 나뭇가지를 하나 주웠다.
땅바닥에 나뭇가지를 슥슥 그어 표를 만들었다.
힘, 반사 신경, 검술, 악력, 체력 등.
그 외에도 항목을 서른 가지로 분류한다.
단은 떨떠름한 얼굴로 표를 보았다.
“……그게 왜 되십니까?”
“너 자신을 알라. 마법사에게 있어서 중요한 덕목이거든. 신체 능력은 체크해 놨지.”
“큼. 그, 그렇군요. 원래는 약점을 메꾸라고 할 셈이었습니다만.”
“보다시피, 부족한 부분이 조금 있긴 해.”
“아닙니다. 이 표대로라면, 오히려 균형이 잘 잡힌 편에 속합니다. 이 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요.”
단은 유심히 표를 들여다보았다.
원래 계획도 없이 남을 가르치는 일은 어려운 법이다.
나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생각을 정리한 단이 말을 이었다.
“도련님은 소드 유저십니다.”
“그렇지.”
“소드 유저(Sword User), 말만 놓고 보면, 검 사용자죠.”
직역하면 그랬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은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반면에 소드 익스퍼트(Sword Expert)는 검 숙련자이라는 뜻이죠.”
“그렇지.”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과, 그 도구에 숙달된 사람은 다릅니다.”
검을 마법으로 바꿔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 가는 말은 아니다.
마법사들은 마법을 사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마법사가 전부 마나의 전문가인 건 아니다.
마법만 다룰 줄 알지, 마법과 마나에 진정으로 숙달된 사람은 드물었다.
그렇기에 마도사의 경지에 오르는 사람이 극소수로 적은 거다.
“알 것 같기도 한데.”
“아직 설명 반도 안 했는데 말입니다. 벌써 아시면 제가 뭐가 됩니까?”
“내가 좀 똑똑해서.”
“……도련님께 부족한 건 깨달음이 아닙니다.”
단은 어물쩍 대답을 피했다.
“깨달음과 비슷해서 착각하신 겁니다.”
“뭐가 부족한 거지?”
“경험입니다.”
나는 바로 납득했다.
“도련님께선 검을 다시 잡으신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경험이 부족하다?”
“그렇습니다. 물론, 도련님께선 실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 건 아닐 것이다.
전생에 사소한 전투는 물론이고 전쟁도 몇 번이나 겪은 몸이니까.
“고블린 토벌 때도 그랬고, 경매장에서도 마찬가지셨죠.”
“그랬지.”
“하지만, 도련님께선 마법에 의지하고 계셨습니다.”
단의 말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나는 마법을 활용했다고 생각했는데.
마법에 의지했다고?
어감이 많이 달랐다.
“아, 다 왔군요.”
단은 엘비아 성벽 앞, 작은 공터에서 멈춰 섰다.
숲지기들의 훈련장인 듯했다.
단은 이미 몇 번 와 본 적 있는 듯, 익숙하게 다른 요정족과 인사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몸짓으로 어떻게든 통하는 모양이었다.
“자, 그럼.”
단이 내게 목검을 던졌다.
“오랜만에 마법 없이, 한번 겨뤄 보시겠습니까?”
검을 다룰 때, 나는 최대한 마법을 보조로 활용했다.
사용하는 마법은 기껏해야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는 레서 마나 번 정도.
나머지도 전술적으로 활용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내가 마법에 의지하고 있었다고?
“좋지.”
이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단과 나 사이에는 경지의 차이가 뚜렷했다.
하지만, 쉽게 지진 않을 것이다.
나라고 검에 대해 연구를 안 한 게 아니었다.
“선공은 양보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저돌적으로 움직였다.
속전속결.
파울 레드라인이 내게 했던 것처럼,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캉!
단은 너무 쉽게 내 검을 받아 냈다.
나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단은 무덤덤하게 평했다.
“힘과 신체 능력에 의존한 공격이었습니다. 원래 도련님의 방식은 아니군요.”
“그것도 보이나?”
“저는 도련님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단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검은, 도련님보다 오래 잡았습니다.”
곧바로 공격이 들어왔다.
내가 했던 것과 비슷한, 찍어 누르는 형식에 휘두르기.
나는 기꺼이 그 검을 받았지만.
“큭!”
밀렸다.
날이 부딪치자마자 알았다.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단이 쉽게 해냈다고 해서, 나도 쉽게 할 수 있을 거라는 게 착각이었다.
검을 흘리자, 두 번째 공격이 이어졌다.
다시 막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막을 수 있는 공격이었다.’
레서 마나 번을 사용해 신체 능력이 강화된 상태였다면 말이다.
그제야, 단이 했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마법으로 강화된 신체 능력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였지?’
원래는 힘에 의존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체 능력이라는 약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수비적으로 움직였다.
마나에 여유가 생긴 후로 달라졌다.
캉!
‘내 잘못인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한다.
그래야만 했다.
마나의 힘을 빌리지 않고선 어쩔 도리가 없는 급박한 상황이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나는 기사가 아니라 마법사니까.
‘잘못은 아니지만.’
내 성장의 발목을 붙잡은 것도 사실이었다.
단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며, 뼈저리게 체감했다.
나는 퍽 강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레서 마나 번을 전제로 둔다면, 단은 이길 수 있다.
그러나.
‘확실히, 기사로서는 어중이떠중이군.’
이론과 검술이 무슨 소용이랴.
무식하게 강화된 신체 능력에 의존하고 있었으면서.
챙!
“흠!”
무언가를 느낀 건지, 단이 발을 뺐다.
“여태까지 내 방식이 아니었단 말이지.”
나는 검을 꼬나 쥐었다.
내 장점은 신체 능력 같은 게 아니다.
내가 휘두를 수 있는 최고의 검은 정직한 검이 아니다.
무심코 편한 길을 찾아온 것이다.
마법사답지 않게.
“검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단은 마이어가의 검술대로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설령 같은 것을 배웠다고 하더라도.”
나는 마이어가의 검술은 완전히 꿰뚫고 있다.
그래서 보였다.
단의 검로가 조금 틀어진 것을.
한 발이 조금 틀어져, 단이 선보이는 수비적 검술에 최적화된 자세로 바뀐 것을.
“펼치는 검은 다릅니다. 통상 마법이 아니라, 고유 마법처럼 말입니다.”
“비유가 좋군. 좋은 선생감이야.”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이론 그대로 검술을 펼쳤다.
머릿속으로 외운 검을 휘둘렀고.
파울 레드라인의 검을 따라했다.
‘마나를 빼고, 검에 한해서.’
자세를 틀었다.
발끝을 옆으로 두고, 검을 두 손에서 한 손으로 바꿔 잡는다.
‘내 방식은, 뭐지?’
의문에 대해 깊게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단이 달려들었다.
‘깊숙이 들어오는 게 아니다. 찌르기를 통한 견제.’
검 끝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오른쪽 어깻죽지를 노린 찌르기.
살기는 없었지만,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오른쪽 어깨를 뒤로 젖혀 몸을 틀었다.
무리한 회피에, 중심을 잃고 앞으로 몸이 기울었다.
턱.
넘어지기 직전, 단의 손이 내 가슴을 받았다.
나는 중심을 잡고 섰다.
패배였다.
단이 넌지시 물었다.
“보이셨습니까?”
“어.”
독자적인 길을 개척한다.
마법사에게 있어서는 선택 사항이었다.
물론 높은 서클의 마도사는 자신의 고유 마법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통상 마법도 제대로 못 쓰는데 고유 마법이라니.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검술은 달랐다.
‘정해진 술식을 따라가지 않아도, 검은 적을 꿰뚫을 수 있다.’
감이 잡힐 듯 말 듯했다.
단의 말대로, 경험이 아쉬웠다.
만약 이렇게 검을 휘두른 경험이 많았다면.
벽을 넘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단.”
“예.”
“나 나갔다 온다.”
“예?”
나는 성문을 향해 뛰어갔다.
이 감각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문 열어!
* * *
태초의 숲에는 꽤 많은 종류의 몬스터가 분포하고 있다.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자연적인 생태계.
먹잇감이 풍부하고 천적이 없는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타고난 번식력으로 인해, 태초의 숲 내의 몬스터 개체 수는 크게 늘었다.
얼마 전부터 숲지기들이 사태를 인지하고 간헐적으로 토벌을 보내고 있긴 했다.
그러나 그것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발길이 뜸해졌다.
태초의 숲, 가장 어두운 자리.
쿠어엉!
워베어가 바닥에 엎어졌다.
곰의 주둥이와 손이 몬스터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제 영역을 침범한 몬스터들의 피였다.
그 증거로, 주변에는 처참하게 찢긴 몬스터의 사체가 가득했다.
워베어는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용병들마저 잘 건드리지 않는 흉악한 동물이다.
팔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사람은 물론 맷집이 튼튼한 오크마저 죽일 수 있다.
숙련된 용병들이 팀을 이뤄 토벌 작전을 세워도 공략하기 힘든 게 워베어다.
그런데.
크륵, 크릉.
그런 워베어가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코를 벌름거리고 있었다.
그 뒤통수를 거대한 발이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워베어는 몸부림쳤지만, 돌아오는 건 발길질이었다.
그것도 워베어의 팔뚝만 한 크기의, 거대한 발.
퍽!
워베어가 바닥을 뒹굴자, 주변에 있던 오크들이 콧김을 내뿜었다.
가장 어두운 자리의 지배자로 군림하던 워베어.
놈이 완벽히 패배한 것이다.
워베어는 비틀거리며 몸을 세웠다.
이미 전투는 불가능한 상태다.
엉망이 된 몸으로는 도망도 힘들었다.
남은 건, 승리를 명확히 하기 위한 처형뿐이었다.
쿵!
워베어의 코앞에 거대한 몽둥이가 꽂혔다.
아니, 몽둥이라기에는 그것은 너무 거대했다.
나무줄기였다.
놈은 나무를 통째로 뽑아 자신의 무기로 삼고 있었다.
곧 저 거대한 나무는 워베어의 머리를 부술 것이다.
흥분한 오크들이 발을 굴렀다.
그때였다.
뀌익!
어디선가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너무 희미해서, 발 구르는 소리에 묻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돼지 멱따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꿰액!
크헝!
케헥!
워베어의 머리를 으깰 심산이었던 놈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가 이곳을 향해 오고 있었다.
이미 가장 어두운 자리는 오크들로 들어찼는데.
어떤 겁 없는 세력인진 몰라도, 상관없다.
오크들은 겁먹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워베어를 힘으로 이긴 우두머리가 있었으니까.
서걱!
그 방향에 있던 오크 한 마리가 죽었다.
깔끔하게 목이 날아간 것이다.
하늘로 솟구쳤던 녹색 피가 비처럼 후두둑 쏟아졌다.
“아, 이것도 아닌데.”
오크 무리를 향해 걸어온 것은 조그마한 형체.
지그문트 마이어였다.
피 칠갑을 한 지그문트는 홀로 중얼거리며 검을 닦았다.
눈은 오크들을 향하고 있지만, 초점은 흐려져 있었다.
마치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씁, 너무 약해서 그런가? 느낌이 안 사네.”
지그문트에게 있어 오크는 대단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다 못해 레드캡은 어느 정도 머리라도 쓴다.
그러나 오크는 태생부터 힘과 맷집만 좋은 몬스터.
행동 패턴이 너무 단조로웠다.
그륵.
거대한 그림자가 지그문트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지그문트가 시선을 들었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여기서 오거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오거는 아주 드물게 보이는 몬스터다.
언뜻 보기에는 거대한 오크, 오크 챔피언과 비슷한 생김새.
그러나 피부색이 누렇고, 아래쪽 어금니가 도드라지게 크다.
피부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목에는 이빨이 달린 목걸이를 걸고 있다.
‘게다가, 성체라니.’
오거 어미는 자신의 새끼를 어렸을 때부터 서로 죽이도록 종용한다.
죽이고 승리한 새끼만 먹이를 먹을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기꺼이 형제를 죽인다.
애초에 오거라는 것들이 피와 싸움에 미친 것들이기도 했으니까.
여섯 개의 어금니로 만들어진 이빨 목걸이는 오거가 형제자매들을 죽이고 취한 전리품이었다.
성체가 된 오거는 치열한 혈전 속에서 살아남은 최악의 개체였다.
그 힘은.
크릉.
오크도 가볍게 때려죽이는 워베어를 아득히 능가한다.
새끼 때부터 목숨을 걸고 싸워 온 몬스터.
힘이나 생존 본능도 뛰어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오거는 전투를 한다.
오크처럼 힘만 믿고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게 아닌, 진짜 전사처럼 움직인다.
‘혼자서 이기기는 어려운 몬스터다.’
머리가 판단을 마쳤을 때쯤, 오크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내 몸에 묻은 피 냄새 때문에 흥분한 모양이었다.
곧바로 검을 내질렀다.
마법은 담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서 가장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검로를 따라, 검을 그었다.
크릉?
조잡한 몽둥이를 쥔 오크의 어깻죽지가 깔끔하게 절단된다.
자신의 어깨가 잘린 걸 뒤늦게 인식한 오크가 울부짖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몇 번이나 시험해 본 기술이다.
효과는 매우 좋았다.
그러나 검을 휘두르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이건 내 방식인가?’
아니다.
이런 의문이 드는 것부터 내 방식이 아니라는 반증이었다.
환생했을 때까지만 해도 오러를 키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서걱!
이어서 오크의 목을 잘라 냈다.
군더더기 없는 최소한의 동작.
오크의 움직임이 뻔하고 익숙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상대가 오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하는 건 힘들었다.
그래서 오크에겐 별로 관심 없었다.
“따까리 말고, 대가리.”
오거라면 좋은 상대가 될 것이다.
원래 자기보다 약한 상대보단 강한 상대를 싸울 때 성장의 단초를 잡는 법이다.
마법을 쓰지 않는 나는 분명 오거보다 약하다.
오거를 응시했다.
그러나 오거는 콧김을 내뿜을 뿐이었다.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느낌이었다.
오거가 턱짓했다.
그 사소한 동작에 오크들이 전부 몽둥이를 쳐들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오거는 완전히 오크 무리를 통제하고 있었다.
“따까리 다수도 나쁘진 않지.”
용병들은 오크를 고블린보다 높게 평가한다.
내 생각은 달랐다.
멍청하고 맷집과 힘만 좋은 몬스터보단, 조금이라도 머리를 쓰는 허약한 몬스터가 낫다.
“……좀 많긴 하네.”
오크도 한둘이 아니라 수십이 넘어가니, 꽤 위압감이 있었다.
일 대 다수로 싸운 경험은 수도 없이 많았다.
마법사는 혼자 다수를 상대하기에 특화된 직업이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 마법사로서 싸울 생각이 없다.
검을 내려다보았다.
마법 없이, 오로지 검으로만.
“흡!”
둘러싸이기 전에 먼저 들어갔다.
검은 다수를 상대하기 좋은 무기가 아니다.
마법과 달리 한 놈 한 놈 처리하는 수밖에 없다.
푸확!
내지른 검이 오크의 목을 꿰뚫었다.
검을 뽑아내자,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동맥을 정확히 잘라 낸 것이다.
오크의 신체 구조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발로 땅을 딛고, 곧바로 다음 동작의 연결을 준비한다.
쿠어어!
다른 놈이 뒤에서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왜 기습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건지 모르겠다.
전쟁 중에 약혼자의 사진이 담긴 펜던트를 보며 ‘나, 이번 전쟁이 끝나면 결혼할 거야.’라고 중얼거리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었다.
기척을 숨기지도 않아 기습이라고 보기도 모호했다.
몸을 뒤로 돌려, 검을 휘두른다.
스릉!
서클도 오러도 없던 때라면 모를까.
나는 검을 못 다루는 게 아니다.
오히려 어중간하게 수련하는 같은 수준의 기사보단 잘 다룰 자신이 있다.
검술도 어느 정도 익혔고, 오러에 대해서도 꽤 연구했다.
실전 경험은 단의 말대로 부족했지만, 어디까지나 검에 한해서.
전투 경험이야 차고 넘쳤다.
서걱! 서걱!
상대가 많을 때는 체력 보존이 우선이다.
나는 최소한의 동작으로 오크를 하나씩 베어 나갔다.
어울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오거를 상대할 체력은 남겨 둬야 했다.
이윽고 오크들이 주춤거리며 망설이기 시작했다.
너무 허무하게 죽어 나가자,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놈들은 오거의 눈치를 보았다.
쿵.
워베어를 깔고 앉아 관망하던 오거가 앞으로 나섰다.
발을 딛는 것만으로 주변에 있던 오크들이 뒷걸음질 쳤다.
오거는 콧김을 내뿜으며 내 앞에 섰다.
“음.”
막상 오거와 마주하자,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검으로는 저 단단한 가죽을 못 뚫는다.
오러를 담으면 베어 낼 수는 있겠지만, 부러질 것이다.
텅그렁.
검을 버렸다.
오거가 바닥을 구르는 검을 보았다.
그리고 내게 눈을 돌렸다.
실망했다는 듯 코를 벌름거린다.
포기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씁, 기다려 봐.”
나는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파울 레드라인과의 결투에서 사용했던 검을 꺼냈다.
발레리아가 만들어 낸 마도구.
검을 부수는 검을 파훼할 때 조금 망가졌다.
그래도 한 번의 전투를 버틸 정도는 됐다.
형형한 기운을 흘리는 검을 보자, 오거의 눈이 빛났다.
킁. 킁.
“그래. 빨리 뒈지고 싶다고?”
나는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원래 쓰던 검보다 더 가벼웠지만, 한 손으로 다루기엔 이게 더 좋았다.
오거가 나무를 들어 올렸다.
쿠어어어어어!
땅이 흔들렸다.
나무 위로 새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나는 오거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 * *
지그문트가 태초의 숲으로 나가고 이틀 후.
요정족의 훈련장.
단은 홀로 수련 중이었다.
늘 하는 체력 훈련 후, 숲지기와 대련을 한다.
이기면 또 다른 숲지기와 한 번 더 대련을 했다.
지면 부족한 점을 메꾸기 위해 노력한다.
“큭!”
챙!
검이 허공을 날았다.
승패가 결정됐다.
단의 패배였다.
단은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심장 소리가 귓전에서 울려 퍼졌다.
단을 상대하던 엘프, 오벨이 검을 집어넣었다.
-인상적인 솜씨군.
오벨은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다.
그러나 단은 그의 검을 몇 번이나 받아 냈다.
수비에 특화된 검을 가진 단이었지만, 그래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같은 소드 익스퍼트라도 초급과 중급의 차이는 크다.
수비에 온 신경을 쏟더라도,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단은 버텨 냈다.
오벨이 몇 번쯤은 대처하기 까다롭다고 생각할 정도로.
-적어도 소드 익스퍼트 초급 중에서는 손에 꼽을 거야. 곧 중급에 오를지도 모르겠어.
숲지기들은 부드러운 눈으로 오벨을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엘비아에 온 뒤로, 단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훈련장을 찾았다.
매번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였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노력가였다.
“음. 죄송하지만, 뭐라고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단은 숨을 고르며 난처하게 웃었다.
요정족의 언어를 몰라서 정말 아쉬웠다.
진지하게 지그문트에게 강의를 받을까 생각도 했었다.
“아저씨! 내가 통역해 줄게!”
훈련장 구석에서 마리나와 있던 리옐이 도도도 달려왔다.
리옐이 난입하자, 요정족들이 전부 훈련을 멈췄다.
혹시나 리옐이 다칠세라, 조심스럽게 길을 만들었다.
리옐은 세계수의 아이다.
요정족들에게 있어서는 공주와 성녀를 합쳐 놓은 듯한 위치에 있었다.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벨이 꾸벅 인사했다.
-황송합니다.
-아냐. 괜찮아! 뭐라고 말할 거야?
-정진한다면 금방 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고 전해 주십시오.
리옐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한껏 가슴을 펴고 있지도 않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제 딴에는 진중한 척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리옐이 가상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음, 열심히 한다면 금방 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단은 픽 웃었다.
오벨은 이어서 입을 열었다.
여태껏 궁금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못했던 질문이었다.
-무엇이 자네를 그렇게 간절하게 만드는 건가?
리옐이 말을 통역해 주자, 단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짧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마이어가의 연무장에서 지그문트가 검을 가르쳐 달라고 했던 기억.
그 이후로 적지 않은 일이 있었다.
“저는 제가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은 물집 잡힌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일찍 소드 익스퍼트 초급에 올랐습니다. 제가 살던 마을의 사람들은 저를 띄워 줬죠. 미래의 소드 마스터가 나왔다면서요.”
헛웃음이 나왔다.
“현실은, 그저 그런 기사 중 하나일 뿐인데 말입니다.”
지그문트와 함께하며, 단은 느꼈다.
자신은 그냥 조금 일찍 익스퍼트가 된 기사에 불과했다는 것을.
폭발적인 속도로 성장하는 지그문트 마이어를 봤을 때 느꼈다.
그건 분명 열등감이었다.
“제가 모시는 도련님께선 좀 많이 대단하십니다.”
단은 기사의 역할이 주인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이언트 골드 앞에서, 단은 오금이 저려 움직이지도 못했다.
정작 지그문트는 태연하게 그 괴물을 길들였다.
그런 무력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단은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방패 역할이라도 하려면, 죽도록 노력하는 수밖에요.”
리옐은 단의 말을 듣고 한동안 끙끙거렸다.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배우는 속도는 굉장히 빨랐지만, 아직 모르는 단어가 많았다.
이윽고 결론을 내린 리옐이 오벨에게 말했다.
-우리 아빠가 대단하대!
-……예?
-그래서, 아저씨는 노력해야 한대!
-아하.
단편적인 해석이었지만, 오벨은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천재라는 벽과 마주한 수재.
오벨도 그 감각을 모르는 건 아니다.
‘좌절하기 마련인데 말이야.’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면, 보통은 좌절한다.
그 재능을 시기하거나 어차피 따라잡을 수 없다며 포기한다.
그러나 단은 악착같이 그를 따라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인간만 아니라면 직속 부하로 뒀을 텐데.’
팔짱을 낀 오벨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인간에게 부정적인 오벨이었다.
적어도 단은 그 인식을 조금 바꾸는 데 성공했다.
“단 아저씨, 괜찮아?”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라고 부르면 안 됩니까?”
“아빠가 아저씨라고 부르랬으니까, 안 돼.”
“저택으로 돌아가면 제대로 된 가정교사를 초빙하자고 건의해야겠습니다. 반드시.”
단이 의지를 다지는 사이, 리옐이 고개를 돌려 성문 쪽을 보았다.
굳게 닫힌 성문에는 경비병 이외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리옐은 알 수 있었다.
“아빠다!”
엘비아의 문을 지키던 숲지기와 눈이 마주쳤다.
숲지기는 헛숨을 삼키고 문을 열었다.
“아빠!”
엘비아에 들어오자마자 작은 아이가 내게 돌진해 왔다.
리옐이었다.
가까이 달려온 리옐의 몸이 붕 떠올랐다.
“커헉!”
리옐을 받으려다가 머리에 복부를 얻어맞았다.
뒤로 쓰러졌다.
리옐은 내 배에서 얼굴을 문댔다.
눈을 감고 있자, 리옐이 동작을 멈췄다.
실눈을 떴다.
리옐은 심각한 얼굴로 내 맥을 짚고 있었다.
“죽었어…….”
“안 죽었거든.”
내가 완전히 눈을 뜨자 리옐이 꺄륵 웃으며 도망쳤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 뒷모습을 보았다.
마리나가 정리해 줬는지, 머리를 한데 모아 땋은 게 잘 어울렸다.
‘피곤하군.’
사흘 동안이나 숲을 떠돌았다.
서대륙 전역을 여행한 경험이 있지만, 그때는 마법이 있었다.
마법이 만능은 아니지만, 상당한 편의를 제공하는 건 사실이다.
이번에 나는 사흘 내내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죽도록 불편했지.’
선잠을 자며 주변을 경계해야 했고, 불을 피우기 위해서 나무를 비벼야 했다.
깨끗한 물도 구하기 어려웠다.
오거와 붙었을 때는 정말 죽을 뻔했다.
마법이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나쁜 기분은 아니야.’
검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한발 앞으로 나간 기분이다.
마법을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을까만 연구해 왔다.
마법을 아예 배제한 적은 처음이었다.
좋은 경험이었다.
머리 위로 단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오랜만이네.”
“사흘씩이나 밖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됐고, 한판 떠야지?”
“지금 그 상태로 말씀이십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꺾었다.
온몸이 쑤셨다.
“너도 훈련하다 온 거 아니야?”
“그건 맞습니다만…….”
“그럼 됐네.”
조건은 비슷하다.
나는 훈련장으로 단을 끌고 갔다.
단은 조금 내키지 않는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금 해야 했다.
아주 끝장을 보고, 하루 정도는 늘어지게 쉬고 싶었다.
단과 내가 훈련장에 들어서자, 숲지기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검 들어.”
“도련님.”
“나도 설욕전은 해야지.”
* * *
단은 지그문트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전에는 무심했다면, 지금은 즐겁다는 느낌이 있었다.
분위기부터 달랐다.
원래부터 자신감이 넘치는 지그문트긴 했지만, 지금은 자신감을 넘어 확신에 차 있다.
‘뭔가 있으신 것 같군.’
고작 사흘이다.
좋은 스승이 붙어 있던 것도 아니다.
훌쩍 혼자 숲으로 들어가더니, 사흘 만에 성장해 버렸다.
단은 팔뚝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밀러 영지에서 지그문트는 말했다.
그랜드 마스터 정도는 목표로 잡아야 한다고.
‘……자신감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사실일 수도 있겠어.’
몸을 긴장시키고 검 손잡이를 쥐었다.
숲지기와 전투로, 많은 걸 얻었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강점은 반사 신경과 타고난 센스다.
숲지기 중에서 지그문트와 비슷한 느낌으로 싸우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엘프의 종족 특성을 살린 검술.
까다롭고, 허를 찌르는 기습에 특화된 검이었다.
“저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닙니다.”
단은 한 발을 뒤로 뺐다.
여러 번의 대련에 걸쳐, 자신의 특기인 방어적인 검술을 극대화하는 데 성공했다.
단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엘비아에서 정말 많은 경험을 했고, 그만한 진보를 이뤘다고.
“알고 있어.”
하지만 왤까.
단은 지그문트를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명 아직 소드 익스퍼트 초급에 오르지 않은 게 확실했음에도 말이다.
지그문트는 여유롭게 검을 휘둘렀다.
단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다르다.’
며칠 전 대련을 했을 때와 달랐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검술은 다채롭다.
여러 자세를 응용했고, 그 완성도는 단도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뻔한 감이 있었다.
교과서 같다고 하는 게 딱 들어맞을 것이다.
실전이 아니라, 책을 보고 외운 것을 활용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분명 사흘 전까지만 해도 그랬는데.
‘성장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완전히 스타일을 바꾸신 건가?’
같은 검술을 배우더라도, 검은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이를테면 마이어가의 검술은 수비적인 검술이 아니다.
그러나 단은 마이어가의 검술을 수비적으로 구사한다.
단은 지그문트의 검을 살폈다.
‘지금까지는 정직한 검이었는데.’
어떻게 바뀌었을까.
솟아오르는 궁금증이 참을 수 없었다.
과연 자신의 검을 찾은 걸까.
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공은 양보하겠습니다.”
“후회하지 마라.”
지그문트는 호흡을 짧게 끊었다.
숨을 멈춘 순간.
순식간에 눈앞으로 달려들었다.
빠르다.
짧은 훈련량에 비해 기이할 정도로 신체 능력이 향상됐다.
단도 익히 알고 있었다.
지그문트가 일전에 자신의 입으로 말한 적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처할 수 있었다.
“큭!”
눈이 인식한 것보다 빠르게, 팔이 움직인다.
상대는 빠르고 날카로운 창.
단은 단단하고 두꺼운 방패다.
허를 찌르지 못한다면, 먼저 마모되는 쪽은 창이다.
공격하는 쪽은 수비하는 쪽에 비해 동작이 클 수밖에 없다.
수비로 체력을 빼놓고, 틈을 잡아 반격한다.
단의 기본적인 전투 패턴이었다.
그러나.
“어.”
수비를 위해 검을 세운 순간.
지그문트의 검로가 바뀌었다.
마치 단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있었다는 듯.
옆으로 휘두르던 검을 뒤로 뺀다.
시위가 화살을 밀어내듯, 다른 손으로 검 손잡이 끝을 눌러 찌른다.
콱!
찌르기는 베기보다 수비하기 까다로운 공격이었다.
대신, 자세의 특성상 반격당하기 쉽다.
단에게는 기회였다.
자세를 틀어 반격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단은 반격할 수 없었다.
‘뭔가 있다.’
드래곤의 아가리에 제 발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단은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캉!
“큭!”
판단이 조금만 늦었다면.
손목에 유효타를 맞고 검을 놓쳤을 것이다.
지그문트는 쉬지 않고 공격을 가했다.
챙! 챙! 챙!
‘뭐야?’
단은 가까스로 검을 막으면서 경악했다.
검로가 끊어지지 않았다.
한 번의 공격, 자세가 바뀌고, 사용하는 검술도 달라진다.
그리고 다시 공격이 들어온다.
그것이 유수처럼 빠르고 자연스러웠다.
‘어떻게?’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연결된 동작.
방어가 늦어질 때마다, 지그문트의 검은 더 빠르게 쇄도해 왔다.
미칠 노릇이었다.
여기로 검이 들어오면 대처하기 까다롭겠다고 생각하면, 그쪽으로 검이 들어온다.
단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반격은커녕 방어에 급급해졌다.
그에 따라 점진적으로 자세가 무너져 내렸다.
-저 인간, 대단하군.
대련은 관전하던 오벨이 중얼거렸다.
단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방어에 특화된 검술은 한 단계 위인 오벨조차 쉽게 뚫어 내기 어려울 정도로 단단했으니까.
지그문트 마이어는 그 방어를 뚫어 내고 있었다.
방패를 깎아 내는 게 아니라, 방패 뒤에 숨은 기사를 몰아붙인다.
정공 같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분명 경매장에서 봤을 때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성장한 거 아니겠습니까?
한 숲지기가 대꾸했다.
일전에 경매장에서 지그문트에게 제압당했던 숲지기였다.
오벨이 코웃음을 쳤다.
-며칠 만에 실력이 저토록 급격하게 늘었다는 말이냐?
-흠.
오벨의 말마따나, 검술은 갑자기 느는 것이 아니다.
꾸준한 훈련과 고찰, 경험이 동반되어야 한다.
벽을 넘기 위해선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한다.
오벨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추론은 하나였다.
-실력을 감추고 있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만약, 성장한 거라면요?
-그럴 리가 없지만, 정말 그사이에 저 정도로 성장한 거라면 둘 중 하나겠지.
오벨은 단을 몰아붙이는 지그문트를 응시했다.
-환생해서 두 번째로 인생을 살고 있거나, 불세출의 천재거나.
자신이 말하면서도 웃긴지, 오벨은 픽 웃었다.
아무리 불세출의 천재라도 불가능했다.
지그문트의 검에는 몇 년의 고찰이 담겨 있었다.
적어도 오벨이 보기에는 그랬다.
오벨은 몰랐다.
지그문트가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는 불세출의 천재라는 것을.
챙!
단은 코너에 몰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그문트의 공격은 정교했고,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에 반해 단은 자신의 균형이 붕괴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공격이 이어질수록 더 방어하기 까다롭고 날카로운 곳을 찔러 온다.
이러다간 창보다 방패가 먼저 부서질 것이다.
반격할 기회를 놓친 것이 조금 후회스러웠다.
그때 도박수를 던졌어야 했다.
‘틈을 노린다.’
단은 다급해진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눈을 똑바로 떴다.
지그문트의 검술은 예술적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검을 다루는 주체가 사람인 이상, 모든 것을 계산하고 정교하게 움직일 수는 없다.
틈이 있을 것이다.
동작의 연결 사이에, 미세한 틈이.
‘……지금!’
지그문트의 한쪽 발이 공중에 떴을 때.
찰나의 순간을 노린다.
단은 지그문트의 어깨를 노리고 검을 내질렀다.
검이 앞에 있으니, 수비는 불가능했다.
지그문트는 당황했는지 전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어깨를 뒤로 젖히고 무리하게 몸을 틀었다.
당연히 중심을 잃었다.
“아.”
지그문트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단은 승리를 확신했다.
덥석.
멱살을 잡는 손길을 느끼기 전까지는.
고개를 들었다.
지그문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자신의 멱살을 틀어잡은 채 웃고 있었다.
머리에서 경종이 울렸다.
‘당했다!’
무리한 회피로 중심을 잃었지만, 어쨌든 지그문트는 검을 피했다.
넘어질 듯 몸이 기울었지만, 완전히 넘어진 건 아니었다.
지그문트는 힘에 자신의 무게를 담아 단의 멱살을 잡아 내렸다.
“흡!”
단의 시야에 땅바닥이 가까워졌다.
승패가 갈렸다.
쿡.
뒷목을 찌르는 목검의 감각.
지그문트가 살짝 목검을 가져다 댄 것이다.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철퍼덕 땅바닥에 엎어진 단이 양손을 들었다.
“졌습니다.”
지그문트는 마법을 쓰지 않았다.
단은 느꼈다.
이런 검술을 쓰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내가 본 것 중 가장 정교한 검술이고, 전투였다.’
지그문트는 자신의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곧 소드 익스퍼트 초급에 오를 게 분명했다.
어쩌면 금방 자신을 넘어설지도 모른다.
눈앞에 굳건히 서 있던 벽이 더 거대해진 느낌이었다.
단은 이 감각을 딱 한 번 느낀 적 있었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아버지, 가주 라스 마이어에게서.
‘무섭군.’
무서웠다.
지그문트의 재능이.
두려웠고, 부러웠고, 억울했으며, 탐이 났다.
분명 지그문트는 자신의 모든 걸 보여 준 게 아니었다.
단은 웃었다. 자신의 주군은 그 누구보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기에.
아직은 웅크리고 있지만, 머지않아 서대륙을 뒤흔들 인물이 분명했기에.
‘기대된다.’
미래가 기다려져 견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