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가문의 대마법사 3권
글쓰냐 퓨전 판타지 장편소설
목차
신 살리기
소드 익스퍼트 초급
불사의 신자들
또 보네?
너두? 나두!
가짜 신, 진짜 신
레온하트 왕국 대청소
신경전 (1)
1
신 살리기
엘비아의 귀빈실.
나는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발레리아에게 받은 것이었다.
마나만 불어넣으면 한 쌍인 수정구와 연결된다.
원거리 통신 마법, 샌딩(Sending)을 응용한 것이었다.
곧 수정구에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스승님!”
눈에 확 띄는 붉은색 머리카락.
발레리아였다.
뭘 하고 있었는지, 얼굴에 피가 튀어 있다.
발레리아가 호들갑을 떨었다.
“존경하시는 스승님께서 친히 통신을 해 주시다니.”
“너 뭐 잘못했지?”
“……전혀요?”
“주변 비춰 봐.”
발레리아는 뜨끔한 표정으로 수정구를 천천히 돌렸다.
아카데미 원장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곧 뭔가 이상한 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손?’
책장 아래로, 축 늘어진 손이 보였다.
“아래.”
“에헴. 크흠.”
발레리아는 머쓱한 듯 헛기침을 하며 슥 아래를 비췄다.
원장실 바닥에는 파울 레드라인이 널브러져 있었다.
바닥에 엎어진 파울 레드라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황급히 제 얼굴 쪽으로 수정구를 돌렸다.
발레리아의 새하얀 볼에 묻은 피가 눈에 들어왔다.
“죽였냐?”
“왜 제가 그랬다고 생각하세요? 혼자 갑자기 현기증 난다면서 쓰러진 건데.”
“얼굴에 피나 닦아라.”
“앗.”
발레리아가 다급히 볼을 문질렀다.
피가 묻은 쪽과 반대쪽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애를 패고 그래?”
“이 싸가지 없는 놈이 자꾸 스승님 욕을 하잖아요!”
“너도 같이했을 거 아니냐.”
“그래도, 정도가 있죠!”
“하긴 한 모양이구나.”
움찔한 발레리아가 어색하게 딴청을 피웠다.
파울과 발레리아를 붙여 놓았을 때부터 대충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성격이 안 맞을 줄이야.
파울이 나와의 결투를 포기하고 발을 뺄까 걱정이 됐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깊게 개입하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일은?”
“스승님 말씀대로 제국과 내통하고 있는 귀족들이 몇 있었어요.”
“총 몇 명이더냐?”
“지금까지 색출해 낸 건 여섯이에요. 전부 그리 대단한 놈들은 아니던데요.”
“큰 거 하나 있을 거야. 계속 찾아봐.”
“알겠어요. 잔챙이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고개를 끄덕인 발레리아가 눈을 굴렸다.
“아직도 태초의 숲이신가 봐요? 슬슬 이동하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못 했던 일이 벌어져서, 조금 더 머물게 됐다.”
“예상 못 했던 일이라니요?”
“불사의 잔재들이 깨어났거든.”
“으음.”
발레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애가 내 앞에서는 조금 허술해서 그렇지, 머리는 좋다.
아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 짐작했을 것이다.
“그래서 불사의 신자들을 좀 처리해야 할 것 같다. 왕국에 있을 수도 있으니, 찾아봐.”
“불사의 괴물을 신으로 떠받드는 그놈들 말씀이시죠?”
“그래. 일단 싹 다 털어 봐.”
봉인이 풀리고 있다.
자연적인 것은 아닐 테고, 아마 개입한 놈들이 있을 것이다.
의심 가는 놈들이 몇 있었다.
불사의 신자들은 가장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였다.
죽음을 두려워해, 불사의 괴물을 신으로 받드는 미치광이들.
발레리아가 팔짱을 꼈다.
“분명 스승님께서 몇 년 전에 전부 잡아다가 족쳤다고 하셨던…….”
“씁, 말 좀 가려서 해라. 교화시킨 거야.”
“……전부 교화시켰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워낙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니, 아직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다.”
“하지만 당했던 적이 있으니 꼭꼭 숨어 있을 텐데요.”
발레리아는 적탑 이외의 세력을 구축하지 못했다.
혼자서 단서도 없이, 꼭꼭 숨어 있는 이단들을 찾는 건 어려울 것이다.
파울 레드라인에게 큰 조력을 기대하긴 어렵다.
“빈민가에서 밤말을 듣는 쥐를 찾아. 내 지금 이름을 대면 될 거야.”
“밤말을 듣는 쥐? 정보상이랑은 또 언제 연을 트셨어요? 일단, 알겠어요.”
그때,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리옐이었다.
리옐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내게 달려왔다.
-아빠!
재주 좋게 허벅지를 잡고 올라와 앉는다.
마치 그곳이 제자리라는 듯, 풀어진 얼굴로 배에 뒤통수를 문댄다.
리옐은 책상 위의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응?
“어라.”
리옐과 발레리아의 눈이 마주쳤다.
분명 수정구 너머일 텐데, 둘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스승님?”
“왜?”
“저 드라이어드 아이가, 스승님 보고 아빠라고 한 것 같은데요?”
“요정족 언어는 또 언제 배웠어?”
“스승님이 가르쳐 주셨잖아요.”
“그랬지. 그랬던 것 같다.”
“저 아이는 도대체 누구인가요? 설마, 숨겨 둔 자식이라든지.”
발레리아는 리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리옐은 리옐대로 발레리아를 주시하고 있었다.
둘은 눈싸움이라도 하듯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묘한 경쟁 구도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빠, 내가 엄마한테 재밌는 거 배워 왔어.
나는 수정구에서 마나를 뽑아냈다.
발레리아의 모습이 흐려졌다.
“내가 아직 마나가 부족한 모양이다. 생각보다 마나 소모가 크네. 마나 탈진 걸리겠군.”
“스승님? 거짓말! 잠깐! 엄마는 또 누구……!”
뚝.
통신이 끊기자마자 수정구에 불이 들어왔다.
발레리아가 통신을 건 것이다.
나는 불 들어온 수정구를 아공간 주머니에 던져 넣었다.
어째선지 숲의 거신과 불의 골렘이 싸우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 위에는 각각 리옐과 발레리아가 타고 있었다.
고개를 저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털어 냈다.
-우음.
리옐은 내가 으레 하던 것처럼 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고 있었다.
머리 위의 새싹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설마 그럴 일이 벌어질 리 없지.
……없겠지?
* * *
곰팡내와 약초의 냄새가 섞여 말로 표현하기 힘든 쓴 내가 났다.
어두컴컴한 방 한구석에는 엘프가 있었다.
목이 거북이처럼 굽어 있고, 흰 수염이 덥수룩했다.
엘프는 뭐라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이번엔 성공할 거야!
엘프가 히죽 웃었다.
눈에는 광기가 들어차 있었다.
한참 중요한 연구 도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엘프는 문을 흘긋 보았다.
어찌나 오래 전에 열렸는지, 문틈으로 버섯이 자라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손님이지만, 들일 수는 없다.
연구에도 흐름이 있다.
이 흐름이 끊기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
쿵쿵쿵.
손님인지 잡상인인지도 모를 일이다.
엘프는 없는 척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것이다.
한동안 책을 보며 가만히 있자, 노크가 멈췄다.
엘프는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쾅!
뜯어진 문짝이 날아와 벽면에 부딪혔다.
화들짝 놀란 엘프가 고개를 돌렸다.
어두웠던 방에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문 앞에는 누군가 서 있었다.
역광 때문에 제대로 식별하긴 힘들었다.
-누, 누구냐?
말라붙은 입술을 겨우 떼어 내, 물었다.
문 앞의 남자는 엘프에게 뚜벅뚜벅 걸어왔다.
엘프는 남자의 귀를 확인했다.
뭉툭한 귀.
인간이었다.
-나다.
그의 머릿속에 오래전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재수 없는 말투.
엘비아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인간.
놈이 분명했다.
분명 죽었다고 들었는데.
엘프는 황급히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왜 없는 척을 해. 문짝은 다시 달아 줄 테니까…….
남자, 지그문트가 방에 걸어 들어왔다.
대답이 없었다.
지그문트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라이트(Light).”
작은 빛무리로 책상 아래를 비춰 보았다.
책상 아래에는 땅굴이 나 있었다.
이날이 올 줄이라도 알았다는 듯, 비상구까지 준비해 놓았다.
지그문트는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허억. 허억. 허억.
비상 통로를 통해 탈출한 엘프는 수염을 휘날리며 도망쳤다.
엘비아를 가로지르던 엘프는 한 가게로 들어갔다.
잡화를 파는 상점이었다.
-허억, 아무도 없나?
-누구세요?
-나, 나 좀 숨겨 줄 수 있겠나?
엘프는 그렇게 잡화 상점으로 숨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길로 지그문트가 걸어왔다.
지그문트는 엘프가 들어갔던 잡화 상점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
-어머머, 우리 아들을 찾아준 인간 청년 아니야?
잡화 상점 주인이 지그문트를 반겼다.
경매장에서 구출한 엘프의 친모였다.
지그문트는 진열된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상점 주인은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밖을 살폈다.
-여기 좀 있어. 무서워 죽겠네.
-왜요?
-아까 무슨 수염 난 엘프가 도망쳐 오더라고. 무슨 일이 났나 봐.
지그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길 지나가긴 했나 보군.’
그거면 충분했다.
상점에는 더 볼 일이 없었다.
지그문트가 나가려는데, 상점 주인이 그를 잡았다.
-여기 좀 있으라니깐.
-저는 할 일이 있는데요. 왜 그러십니까?
-그 수염 난 엘프를 쫓는 놈이, 여기까지 오면 어떡해?
-그놈이 여긴 왜 옵니까?
주인은 흘긋 상점 안쪽, 방을 보았다.
비밀을 속삭이는 듯, 은근한 말투로 말했다.
-그 엘프가 여기 있다니깐?
* * *
-히익.
수염 난 엘프가 뒷걸음질 쳤다.
나는 상점 주인아주머니에게 받은 망치를 들고 녀석에게 걸어갔다.
그는 지나치게 나를 두려워했다.
꼭 살인마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렇게까지 무서워할 정도는 아닌데.
-이봐, 필립.
나는 엘프, 필립과 눈을 맞췄다.
-왜 도망쳤어?
-너, 너, 맞지? 델 로안!
-이야. 내 제자도 한 번에는 못 알아보던데. 역시 신뢰로 엮인 관계라 다른 건가?
-신뢰는 무슨. 빚과 채무로 엮인 관계겠지!
방구석에 주저앉은 필립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필립은 내게 빚이 있었다.
전생에 내가 직접 나서서 한 가지 일을 도와줬기 때문이다.
상태를 보니, 지금 필립이 그 빚을 갚는 건 무리였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용의 눈물을 꺼냈다.
-서, 설마 그 술병으로 내 머리를 깨려고?
-뭔 소리야. 내가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술에 취해서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누구 머리를 깼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필립을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은, 환영인가?
-그건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됐고, 이거. 풀 수 있어?
-헤라클레스의 저주? 고작 이런 저주를 네가 해주 못 했다고?
필립이 술병을 받아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해주 하나에는 일가견이 있는 놈이다.
그는 술병을 자세히 살피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해주하지 못할 만도 하군. 마녀가 직접 건 저주. 상당히 공을 들였어.
-맞아.
필립은 한참 끙끙거리며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무리다. 아무리 나라도 마녀가 직접 건 저주를 해주하는 건 불가능해.
나는 검지를 들어 올렸다.
-이자 삭감. 빨리 처리하면 원금도 깎아 주지.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지. 나만 믿고 기다리게.
필립의 연구실에서는 쿰쿰한 냄새가 진동했다.
좀 전에도 느꼈지만,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싶었다.
필립 본인도 방의 상태와 별다를 바 없이 더러웠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지저분했고, 얼굴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좀 씻고 다녀라. 집에 따뜻한 물 안 나오냐?
-연구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이…….
-거참 진부한 변명이군.
-어디 보자. 여기 어디 있을 텐데.
필립이 말을 돌렸다.
난잡한 책상을 뒤졌다.
계산식, 이론 서적, 짓이긴 약초 따위가 흩어져 있었다.
돌팔이처럼 보여도, 필립은 평생 해주만을 연구한 인물이다.
해주에 있어서만큼은 나보다 나을 것이다.
-하! 여기 있었군! 내 눈을 피할 순 없지!
필립은 방 구석구석에서 해주를 위한 재료를 찾았다.
심지어는 문틀에 피어 있던 버섯까지 채취했다.
저거 설마 일부러 기른 건가?
하여튼 이놈도 상당한 괴짜다.
몇 가지 재료를 찾은 필립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나를 흘긋 보더니, 한숨을 내쉰다.
-크흑. 이건 정말 쓰고 싶지 않았는데.
필립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뜯었다.
숨겨진 금고가 드러났다.
금고를 열자, 잡다한 재료들이 보였다.
대부분 귀한 약초였다.
탐나는 것들도 몇 개 보였다.
-저런 거 모을 돈으로 빚 갚을 생각은 안 해 봤나?
-네가 죽었다고 들었거든.
-이 골방에 틀어박혀 있었으면서, 어떻게 소식은 접했나 보군.
-당연히, 난 죽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니. 죽은 거 맞는데.
-그럼 여기 있는 너는 언데드라도 된단 말인가?
-언데드는 아니지. 죽음에서 돌아왔다는 면에선 비슷할지도 모르겠어.
-괴물 같은 놈.
필립은 질렸다는 듯 혀를 찼다.
잡담을 하는 와중에도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약초를 빻고, 중탕하고, 배합한다.
매우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얼마나 걸리지?
-좀 걸릴 걸세. 그래도 마녀의 저주니, 기운을 빼는 데 꼬박 며칠은 필요하겠지.
-빠르게 할수록 빚도 줄어들 텐데.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하루 안에 끝내 보도록 하지.
어차피 영약을 제조할 시간도 필요했다.
하루면 얼추 중요한 것들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방을 대충 치우고 자리를 잡았다.
-그럼 넌 해주를 해라. 나는 영약을 만들 테니.
나는 머리 위에 라이트(Light)를 띄워 놓고, 영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4서클 이상의 마법사는 마도사라고 불린다.
4서클부터는 아예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3서클과 4서클 사이에는 큰 벽이 있다.
마법사 중 열에 아홉은 그 벽을 넘지 못하고, 마나의 길을 포기한다.
노력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지였다.
‘오러 쪽도 비슷했지.’
소드 유저와 소드 익스퍼트 초급은 취급이 전혀 다르다.
소드 유저는 어중간한 기사.
소드 익스퍼트 초급부터는 확실히 전력에 보탬이 된다고 평가받는다.
그만큼, 소드 익스퍼트 초급의 기사는 드물었다.
당연히 소드 유저에서 익스퍼트 초급으로 올라가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내 앞에는 거대한 벽이 두 겹으로 있는 것이었다.
‘마나 서클 쪽은 크게 걱정하지 않지만.’
4서클이나 5서클 정도는 졸면서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오러였다.
먼저 오러를 담을 그릇, 신체 능력을 끌어올려야 했다.
수련을 해서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기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영약을 통해서 신체 능력을 활성화할 생각이었는데.
‘영약만으로 신체 능력을 어디까지 당겨올 수 있을까?’
나는 거의 일주일 간격으로 영약을 하나씩 먹고 있다.
원래 영약은 이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살며 하나만 건져도, 큰 기연이다.
그것도 대부분 어중간하거나 품질이 애매한 것들.
운 좋은 사람들은 겨우 그거 하나 먹고 수련을 해, 크게 성장한다.
그러나 내게 수련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그러니까, 약발로 밀어붙이는 거다.
영약을 먹는다.
그리고 영약을 먹는다.
그다음에는 영약을 먹는다.
좀 쉬었다가 영약을 더 먹는다.
이것이 내가 오러를 늘린 방법이었다.
원래는 영약을 한 번 먹을 때마다 수련을 해 줘야 효과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처럼 영약이 넘쳐난다면 이만큼 효율적인 방법이 없었다.
실제로 나는 고작 한 달 반 만에 소드 유저의 경지에 올랐다.
재능 있는 소드 비기너가 소드 유저까지 성장하는 데에는 5년.
길게는 10년까지도 걸린다고 한다.
폭발적인 속도였다.
그러나.
‘부족해.’
소드 유저에 3서클 마스터.
이 정도면 적어도 밖에서 맞고 다닐 일은 없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것들은 이런 힘으로는 상처 하나 내기 어려웠다.
레온하트 왕성에서 광전사들이 날뛰었을 때, 나는 무력했다.
‘일단 마도사의 영역에 오른 다음, 부족한 부분은 급한 대로 아티팩트로 보충한다.’
이렇게 영약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영약 하나하나가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것도 일정 수준까지다.
내가 전생에 용의 눈물을 마셨을 때가 8서클 때였는데, 기별도 안 왔었다.
아껴서 버릴 바에야, 지금 영약을 전부 욱여넣는 게 나았다.
-미친놈, 어떻게 딴생각하면서 영약을 만들지? 그것도 저런 수준으로…….
-뭐?
-아니. 아니야.
몇 시간 후.
-다 됐다!
퀭한 눈의 필립이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멍하니 영약을 만들고 있던 나는 놀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놈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말았다.
퍽!
-컥!
-예고 좀 하고 얼굴 들이밀어라.
-쿨럭. 억울하다.
필립은 유언 비슷한 말을 남기고 기절했다.
쉴 계기가 생기니 그냥 정신을 놓아 버린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도 꽤 피곤해 보였는데 해주로 꼬박 밤을 새웠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정신을 잃은 필립의 손에서 용의 눈물을 빼냈다.
“흠.”
용의 눈물을 체크해 보았다.
헤라클레스의 저주는 깔끔하게 해주되어 있었다.
용의 눈물에도 영향이 일절 가지 않았다.
과연 해주 전문가다운 솜씨였다.
“좋아.”
마개를 땄다.
은은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영약이자 명주.
전에 마셨을 때는 조금 취하긴 했으나,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마실 거 지금 마시기로 했다.
나는 용의 눈물을 병째로 들이켰다.
꿀꺽. 꿀꺽.
뜨거운 액체가 목을 긁고 지나간다.
순식간에 용의 눈물을 비워 냈다.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술에 강하긴 했다.
취해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으니까.
“어라?”
뭔가 이상했다.
바닥이 울렁거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시야가 어지러웠다.
“이거 혹시.”
인상을 찡그렸다.
이 불쾌하게 정신이 고양되는 감각.
저주는 아니다.
단순하게, 취한 것이었다.
‘이런.’
이 몸은 그렇게까지 술에 강하진 않은 모양이다.
오러를 끌어 올렸다.
파울 레드라인이 했던 것처럼, 오러로 취기를 몰아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통제에서 벗어난 오러는 다시 단전으로 돌아갔다.
“어…….”
뚝.
* * *
“만약 서대륙을 통일한다면, 가장 먼저 점령해야 할 곳이 어디겠습니까?”
“그야 트리옌 왕국 아니겠나?”
노인은 내 말에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지도의 중앙을 짚었다.
트리옌 왕국은 서대륙 중심에 위치한 왕국이다.
레온하트 왕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와 맞닿아 있다.
확실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긴 하다.
“틀렸습니다.”
“음? 트리옌 왕국이 아니라면 어디란 말인가?”
나는 대답하는 대신 서대륙의 북동쪽을 짚었다.
내 손가락 끝을 본 노인이 고민했다.
무언가를 계산하듯이 허공을 보더니, 눈을 감았다.
“감이 안 잡히는군.”
“그렇게 중요해 보이진 않을 겁니다. 오히려 우선순위에서 많이 밀려 있겠지요.”
“대공의 말대로라네.”
나는 웃었다.
이곳을 지리적으로 큰 이점을 가지고 있진 않다.
기껏해야 북쪽의 산맥과 맞닿아 있다는 것과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뿐.
트리옌 왕국이 훨씬 중요해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이곳에는 ……가 있습니다.”
“……말인가?”
“예. 거기에 더하여, 제가 ……을 숨겨 두기도 했습니다.”
노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좀처럼 보기 힘든 동요였다.
“하지만 왜 그런 것을 거기에 둔 건가? 차라리 황궁에 두면 될 것을.”
“혹시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라. 확실히 그렇군.”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분명 내가 말했고, 제대로 들은 것 같은데.
왜 이상하게 구멍이 나 있는 것 같을까.
노인은 깊은 고민에 빠져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첨언했다.
“그리고 이런 점도 주의하셔야 합니다. 만약…….”
“그렇군. 혹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어.”
“하지만 제가 있으니, 그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든든하군.”
벌컥.
한창 의견을 주고받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두 명의 아이들이었다.
이쪽으로 다가온 소년이 책상 위를 보기 위해서 낑낑거렸다.
소녀가 그런 소년의 엉덩이를 밀어주었다.
소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책상 위로 올라온 소년이 밝게 미소 지었다.
나는 흐뭇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황자께서 나랏일에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소년, 황자가 내게 다가왔다.
작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푸확!
돌연 황자의 손이 내 가슴팍을 꿰뚫었다.
황자와 눈이 마주쳤다.
소년이었던 황자는 순식간에 성장하더니, 이내 청년이 되었다.
그 머리 위에는 화려한 왕관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대공.”
황자, 아니, 황제가 말했다.
심장을 감싼 황제의 손이 느껴졌다.
차가웠다.
* * *
-아빠. 일어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일어나 봐!
눈을 떴다.
엘비아의 귀빈실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리옐이 내 배에 앉아 나를 흔들고 있었다.
분명 무슨 꿈을 꾼 것 같았다.
그것도 무진장 기분 더러운 꿈이었던 것 같은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용의 눈물을 마시고, 취해서 잠든 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긴 했다.
배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감각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 배에 얼굴을 묻고 있던 리옐이 고개를 들었다.
-뭐야. 왜 울고 있어?
리옐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얼굴이 엉망이었다.
나는 리옐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리옐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계속 히끅거리며 울기만 했다.
한참 후.
조금 진정한 리옐이 입을 열었다.
-아빠. 훌쩍. 어떡해?
-왜 그러는데?
-엄마가, 엄마가.
목이 멘 건지, 리옐은 겨우 침을 삼키고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엄마가 안 일어나.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아, 세계수님께서 어찌!
요정족들이 침통한 얼굴로 세계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생기가 가득했던 푸른 잎이 노랗게 말랐다.
나무껍질이 갈라지고 있었다.
머리 위로 낙엽이 내려앉았다.
세계수는, 죽어 가고 있었다.
-아빠…… 엄마 아파?
리옐이 내 목을 꽉 끌어안았다.
불안감에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리옐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르네가 다급히 내게 달려왔다.
-로안 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셔서.
르네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곧바로 르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이랬지?
-몇 시간 전부터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게 악화되었어요.
-세계수가 남긴 말은 없었나?
-네.
인상을 찡그렸다.
이런 일이 발생할 걸 알았다면, 세계수는 하이 엘프인 르네에게 미리 귀띔을 했을 것이다.
매사에 걱정이 많은 세계수가 그러지 않을 리 없다.
지금 같은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아무 말도 없었다.
르네에게 언질할 새도 없이 상황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는 뜻이었다.
-회의를 지금 소집하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허비할 시간 없다. 바로 성역으로 가지.
나와 르네는 성역 입구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성역 입구인 문틀에 도착한 르네가 깜짝 놀랐다.
-어찌 이런…….
-쯧. 닫혔군.
성역의 입구는 굳게 닫혀 있었다.
이 출입구는 세계수가 자신의 힘으로 지상과 성역을 이어 놓은 통로.
세계수가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지금, 입구가 유지되고 있을 리 없었다.
엘프 장로 하나가 문틀을 살피고 있었다.
-레골라스 장로님?
-아, 르네 님.
-왜 성역으로 가는 통로가 막힌 거죠?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연결이 끊긴 것 같습니다.
-연결이 끊겼다니…… 어머니께서 일부러?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소멸이었습니다.
세계수가 지쳐 감과 동시에, 문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 것 같았다.
르네는 초조한 듯 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레골라스가 문틀에 가루를 뿌렸다.
마법의 촉매로 사용되는 순수한 은이었다.
-지금 통로를 열어 볼 생각입니다.
-이쪽에서요? 하지만.
-해 볼 수 있는 건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르네를 진정시키려는 듯, 레골라스는 쓰게 웃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무모한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통로를 새로 여는 건 불가능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성역과 이어지는 통로를 만들 때는 그 성역의 주인되는 신의 신성력이 필요하거든.
-해 보지도 않았는데, 모르는 일 아닙니까?
말릴 생각은 없었다.
해 보라고 손짓하자, 레골라스가 조금 불쾌하다는 듯 문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계속 불어넣었다.
레골라스의 볼을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허억.
뭔가 잘 못 됐다는 걸 느꼈는지, 레골라스가 손을 뗐다.
나는 쯧쯧 혀를 찼다.
-그래도 신이 만든 문인데. 그렇게 쉽게 재현할 수 있겠어?
-쿨럭. 과, 과연.
-그럼 방법이 없단 말입니까?
-아니. 그래도 쟤 말이 틀린 건 아니야. 해 볼 수 있는 건 해 봐야지.
나는 리옐을 르네에게 맡겼다.
손을 풀고, 문틀을 쓸었다.
출입구가 닫힌 지 얼마 안 된 상태.
통로는 끊어졌으나, 그 통로가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통로를 새로 열 게 아니라, 끊어진 연결을 이어 줘야지.
지상과 성역을 잇는 통로.
아마 신성력이 조금은 남아 있을 것이다.
신성력 쪽은 그 잔재에 의지하고, 마나로 접합하는 수밖에 없었다.
‘되려나 모르겠군.’
공간 이동은 고서클 마법에 속한다.
단거리 이동 마법인 블링크(Blink)만 해도 5서클은 되어야 쓸 수 있다.
더하여, 술식과 계산 또한 다른 마법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복잡하다.
그 때문에 서클이 충분하나 공간 이동 마법을 못 쓰는 마도사도 왕왕 있었다.
‘술식 계산은 문제가 안 되지만.’
문제는 내가 운용할 수 있는 마나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내 마나 서클은 아직 세 개.
따라서 한 번에 운용할 수 있는 마나도 딱 거기까지다.
당장 4서클을 만들더라도, 마나가 압도적으로 부족할 것이다.
전생에는 마나의 총량 같은 것으로 고민해 본 적 없는데.
혀를 찼다.
마나를 저장할 수 있는 마도구 같은 것이라도 만들어 뒀다면.
‘……잠깐, 마나라.’
나는 레골라스를 바라보았다.
레골라스의 눈에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 * *
인간 중에서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채 1%가 넘지 않는다.
개중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재능을 개화시키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요정족은 다르다.
요정족은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종족.
마나가 풍부한 태초의 숲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이가 꽤 많을 것이다.
내 예상대로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요정족은 상당히 많았다.
성역의 문 앞.
소집된 요정족들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웅성거렸다.
무작정 급하게 모았는데도 이 정도인 걸 보면, 확실히 많긴 많았다.
제대로 가르치기만 한다면 꽤 강력한 마법 부대를 양성할 수 있을 텐데.
-로안 님.
-응?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르네가 요정족들을 둘러보았다.
숨길 것도 없었기에, 까놓고 말했다.
-마나 링크를 하려고.
-마나 링크? 당신, 미쳤소?
-오, 알고 있어?
대화를 듣던 레골라스가 격하게 반응했다.
마나 링크는 일시적으로 마나 서클의 소유권을 넘기는 고대 마법이다.
자신의 마나 서클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해, 대신 사용하도록 해 주는 것이다.
실제로 쓰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당신에게 목숨을 맡기라는 말 아닙니까.
마나 링크는 위험한 마법이다.
마나 서클을 내주는 쪽은, 받는 쪽에게 목숨을 맡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서클을 양도한다고 해서, 서클이 양도받은 이에게 가는 것이 아니다.
서클을 온전히 자신의 몸에 남는다.
대신 자신의 심장을 둘러싼 마나 서클을, 다른 사람이 조종하는 것이다.
-마나 서클이나 심장에 손상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나 서클을 다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괜찮아. 안 죽어.
-그런 말로 저를 납득시킬 수 없습니다.
-이번 일은 동의를 받아야 하니, 입을 좀 털어야겠지.
나는 마나로 주변을 장악했다.
여기 모인 요정족들은 전부 마나를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들.
본능적으로 내게 시선이 모였다.
그들을 내려다보며 목소리에 마나를 실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 본론만 말하겠다.
웅성거림이 멈췄다.
나는 말을 이었다.
-세계수가 죽어 가고 있다.
-뭐, 뭐…….
-그럴 리가 없다!
-저 인간이.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대부분은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평생을 믿으며, 항상 곁에 있던 신이 죽어 가고 있다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하물며 그 말을 한 게 낯선 이방인이니.
-로안 님.
르네가 걱정스럽다는 듯 앞으로 나서려 했다.
나는 르네를 제지했다.
뒤에서 수를 써서 여론을 돌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현실을 귓구멍에 때려 박는 수밖에 없다.
-너희들,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뭐라고?
-아무리 세계수님의 손님이라지만, 그런 막말은……!
나는 성역의 입구를 가리켰다.
-성역의 입구가 닫혔다.
이어서 뒤에 놓인 세계수를 가리켰다.
-거기에, 세계수는 시들어 가고 있다. 눈에 띌 정도로. 이게 뭘 뜻하는지 이해 못 하는 멍청이가 있다면, 그냥 꺼져라.
-…….
-큭.
요정족들은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이해하기 싫었을 것이다.
숭배하던 대상이 죽어 간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내가, 살릴 수 있다.
-그게 정말입니까?
-완쾌시킬 수는 없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응급처치 정도는 가능해.
치료비는 청구할 거다.
바가지로.
요정족들이 흥분했다.
-그럼 지금 당장!
-당장 조치를 취해야겠지. 한시가 급하니. 근데, 성역의 문이 닫혔다.
나는 다시 한번 뒤에 있는 성역의 문을 가리켰다.
-이걸 열어야 본신에 접근이라도 할 수 있는데, 나 혼자서는 무리거든.
-우리가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그래.
나는 씨익 웃으며 손을 움켜쥐었다.
-너희들의 마나가 필요하다.
-헉.
-히익.
몇몇 요정족이 공포에 질렸다.
내가 여유롭다는 것을 상기시키려고 웃은 건데.
조금 의도가 엇나간 모양이다.
르네까지 딴지를 걸어왔다.
-로안 님, 방금은 조금 마왕 같으셨습니다.
-크흠.
나는 헛기침을 했다.
-이번 일은 위험하다. 마나 링크를 할 거거든.
-마나 링크?
설명하기 귀찮아, 레골라스의 등을 떠밀었다.
마나 링크는 고대 마법이다.
모르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레골라스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마나 링크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이 끝나자, 다시 앞으로 나섰다.
-장로…… 레골라스가 말한 대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명백한 사실이었다.
실제로 마나 링크를 시도하다가 죽는 경우는 꽤 있었다.
다른 사람의 마나 서클을 다룬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마법사가 자신의 마나 서클에 익숙해져 있다.
낯선 서클을 완벽히 컨트롤하지 못해, 마나가 폭주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물론 너희는 안 죽는다.
세계수가 자식처럼 아끼는 애들이다.
죽이면 잔소리 듣는다.
나는 말을 마치고 대답을 기다렸다.
요정족들은 고민했다.
한 엘프가 대표로 물었다.
내가 아니라, 요정족의 장로에게.
-레골라스 장로님, 저 인간의 말이 사실입니까?
레골라스는 눈을 감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금 비통하게 느껴졌다.
-내 힘으로도 문은 열 수 없었다. 유일하게 방법을 알고 있는 건, 아마 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요정족들이 침음을 흘렸다.
-일면식도 없는 인간에게 마나 서클을 맡기라니.
-그래도 우릴 도와준 적도 있다지 않나.
-불안한 건 사실이지만, 세계수님께서…….
어차피 그들이 내릴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소집된 요정족은 하나도 빠짐없이 자신의 마나를 맡기기로 했다.
이 정도의 위험은 기꺼이 감수할 거라고 생각했다.
요정족들에게 세계수는 자신의 창조주인 동시에, 부모와 같은 존재다.
-저흰 뭘 하면 됩니까?
요정족들의 눈에는 결의가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손을 비볐다.
-배터리.
나는 성역의 입구, 문틀을 툭툭 두드렸다.
-끊어진 통로를 연결하는 데에는 한두 명분의 마나로는 부족하다.
레골라스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내 마나로는 절반, 아니 반의반도 안 찬 느낌이었지.
성역과 지상을 잇는 통로.
공간 마법의 일종이지만, 그 규모가 다르다.
다른 차원을 연결하는 문.
겉보기에는 조잡해 보이지만, 이 작은 문을 형성하는 데에는 대마법급의 마나가 필요하다.
-여기 있는 요정족들 전부, 마나 탈진 정도는 각오해야 할 거야.
한 요정족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단순히 마나를 쏟아붓는 거라면, 링크는 필요 없는 거 아닙니까?
-아니.
대답한 건 레골라스 장로였다.
-단순히 마나를 쏟아붓는 게 아니다. 끊어진 부분과 맞는 술식으로 메꿔 줘야 하지.
끊어진 다리가 있다고 치자.
다리의 끊어진 부분에 흙이나 돌 같은 재료를 쏟아붓는다고 다리가 원상 복구되는 게 아니다.
끊어진 부분에 새로운 다리를 만들어야 한다.
내가 할 일은 요정족의 마나라는 재료로 다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렇군요.
그래도 마나를 쓰는 이들이라 그런가.
이해가 빨랐다.
나는 요정족들이 서로 손을 잡도록 했다.
레골라스가 눈을 깜빡였다.
-지금…… 뭐 하는 건가?
-마나 링크 준비.
-링크는 한 명씩 연결해야 할 텐데.
레골라스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한 명 분의 마나를 쓰고, 다시 한 명 분의 마나를 쓴다.
그렇게 이어달리기식으로 마나 링크를 진행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워 넣는 방법이 뭔지 아냐?
-밑 빠진 독에 물을 어떻게 채운단 말인가?
-물이 빠지기 전에, 더 많은 물을 욱여넣으면 돼.
한 명 한 명씩 마나를 쓰면, 저 통로를 메꿀 수 없다.
소모되는 마나가 부가되는 마나보다 크다.
단번에 쏟아부어야 한다.
내 말을 들은 레골라스는 한참 고민하다가, 경악했다.
손을 맞잡은 요정족들을 본다.
-지금, 이 많은 인원을 전부 링크하겠다는 건가? 동시에?
-어.
-미쳤군!
르네가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무슨 문제 있나요?
-문제 정도가 아닙니다. 이 인간은 지금 우리를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안 죽어.
레골라스는 짧게 심호흡하고 설명했다.
-백이 넘는 인원입니다. 그 인원의 모든 술식을 전부 혼자서 통제하겠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할 수 있어.
-자네는 머리가 백 개가 넘나 보지?
-한 개지만, 백 명 분보다 낫지.
나는 레골라스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레골라스는 매우 불안한 눈으로 요정족을 둘러보았다.
르네는 쓰게 웃었다.
-괜찮아요. 장로님.
-하지만!
-허튼말을 하신 건 아닐 겁니다.
레골라스는 찝찝한 눈치였지만, 결국 납득했다.
지금도 세계수의 상태는 악화되고 있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 * *
레골라스는 지그문트의 등에 손을 얹었다.
그의 뒤에는 소집된 요정족들이 원을 이룬 채 서로 손을 잡고 있었다.
문틀에 손을 올린 지그문트가 신호했다.
마나 링크(Mana Link).
레골라스는 결의를 다지고 눈을 감았다.
불안했다.
오만인지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백 명 분의 마나 서클을 동시에 다룬다니.
드래곤이 와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철컥.
첫 번째로, 지그문트와 레골라스의 마나 서클이 링크됐다.
이어서 모든 요정족들의 마나 서클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그 수가 많아질수록, 레골라스는 두통에 인상을 찡그렸다.
여러 정신이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희미하게 구토감까지 느껴졌다.
다른 요정족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 안색이 파리해져 있었다.
단순히 연결된 것만으로도 이 정도의 과부화를 받는다.
마나 서클을 전부 통제하에 둬야 하는 지그문트는, 머리가 터질 지경일 것이다.
레골라스는 겨우 눈을 뜨고 지그문트를 바라보았다.
‘……뭐지?’
지그문트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지금 이 상황이 재밌다는 것처럼.
레골라스는 이 인간이 과부화를 버티지 못하고 미친 게 아닐까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시작한다.
레골라스는 자신의 서클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지그문트가 링크된 마나 서클들을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우우웅.
서클이 돌아간다.
레골라스는 이물감을 참기 위해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음?’
편안했다.
링크로 인한 과부화는 여전했다.
그러나 마나 서클은 꼭 자신이 다루는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나았다.
마나 링크를 하면 마나 서클의 통제에 이물감이 들기 마련인데.
‘자연스럽다? 내가 다루는 것도 아닌데?’
마나 서클은 기계처럼 정교하게, 장인의 손처럼 세밀하게 움직였다.
누군가 움직임을 통제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레골라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마나에 대한 이해도 면에서, 너무나도 큰 간극이 있었다.
지그문트를 보았다.
지그문트는 조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딱 그 정도였다.
전력이 아니라는 뜻.
‘말도 안 된다.’
더욱 놀라운 점은, 지그문트가 다루고 있는 서클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레골라스뿐만 아니다.
링크된 모든 요정족의 모든 마나 서클을 동시에 다루고 있었다.
제각각의 방법으로, 같은 술식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파도 같기도 했고,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같기도 했다.
‘이런 일이 가능할 리가!’
악마적인 재능.
아니, 재능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이건 재능 따위가 아니었다.
레골라스는 압도적인 벽을 보았다.
너무 높고 너무 두꺼워서, 넘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거대한 벽이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역시 이자는……!’
* * *
통로를 연결하는 건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요정족의 마나를 전부 끌어와도 넉넉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부족했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써야만 했다.
-허억.
등 뒤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서클이 적은 요정족들은 지금쯤 마나 탈진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서클이 낮은 요정족들과는 링크를 해제하고, 작업을 이어 나갔다.
마침내 레골라스 장로마저 마나 탈진에 다다랐을 때.
“됐다.”
작업이 끝났다.
성역으로 가는 문이 열렸다.
링크를 해제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컥. 케흑. 흐흐…….
-흐억, 헉. 큭.
마나 탈진에 걸린 요정족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마 당분간은 손가락 하나 까딱이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몇몇 요정족이 허허롭게 웃고 있었다.
깨달음이라도 얻은 모양이었다.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수업료를 요구할 생각도 없었다.
나도 이득은 얻었으니까.
-통로는 완전히 열린 건가요?
-아니. 일단 드나들 수는 있게 해 놨지만, 대신 횟수 제한이 걸렸어. 한 번 들어갔다가 나오면 통로가 다시 무너질 거야.
-그런…….
그 정도 페널티는 감수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마나로 통로를 유지하는 건 불가능 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앞으로 나섰다.
시간이 없다.
바로 성역으로 갈 생각이었다.
-아빠, 같이 가요.
-음.
르네에게 붙어 있던 리옐이 내게 손을 뻗었다.
같은 신목이다.
없는 것보단 낫겠지.
나는 리옐을 안아들고 성역으로 들어섰다.
시야가 뒤집히더니, 다시 돌아왔다.
세계수의 정원이었다.
-아빠, 여기 엄마 집 맞아?
-인테리어를 바꿨나 보네.
밝고 아름다웠던 정원은 온데간데없었다.
꽃과 나무는 시들어 가고 있었다.
흙이 축축하고 비린내가 나는 게, 방금 전까지 비가 내린 것 같았다.
하늘에는 빛 한 점 없이 어두웠다.
공기는 조금 차가웠다.
리옐이 옷깃을 잡아당겼다.
-저기.
리옐이 가리킨 것은 아그나였다.
다 녹아내린 아그나 한 마리가 땅바닥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성역까지 들어왔지?’
불사 괴물의 잔재.
본능적으로 신목을 해하고자 하는 조건부 불사의 찌꺼기.
그어어어…….
나는 놈을 툭툭 걷어찼다.
물로 흠뻑 젖은 놈은 죽기 직전이었다.
근처에도 비슷한 꼴인 아그나가 많이 있었다.
‘세계수가 한 건 아니다.’
아무리 제 상태가 아니더라도, 신은 신이다.
손가락 한 번 까딱하면 아그나 정도는 소멸시켜 버릴 수 있다.
불완전하지만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다른 누군가가 제압했다는 뜻이다.
아그나는 리옐을 향해 맹목적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것들, 신목에 맹목적인 적의를 가지고 있었지.’
저번에도 그랬다.
신목인 리옐을 보고 적의를 드러냈었다.
어쩌면 위치 추적도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실험체 1호를 끄집어 냈다.
……아아!
빛을 본 실험체 1호가 환희했다.
물에 땅이 젖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쁘다는 듯 땅을 구른다.
실험체 1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리옐을 보고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그극…… 켁!
나는 놈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나를 본 실험체 1호가 벌벌 떨었다.
뭐라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는데, 너무 작아서 안 들렸다.
-신목, 느낄 수 있지?
리옐을 가리키며 말을 하자, 급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몸짓을 보고 내가 원하는 바를 눈치챈 모양이다.
원래 불사의 몸을 가지고 있으면 생존 본능이 쇠퇴하기 마련인데.
이놈은 죽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있는 것 같았다.
나한테 하도 많이 죽어서 그런가?
모를 일이다.
-찾아. 못 찾으면…….
그, 그어어!
실험체 1호가 어기적거리며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나는 리옐과 함께 실험체 1호를 따라갔다.
정원은 넓었다.
내가 일전에 본 분수나 벤치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생기를 잃은 식물들만 보였다.
곳곳에 널브러진 아그나의 사체 때문에, 더 우중충해 보였다.
이윽고 실험체 1호가 발을 멈췄다.
꽃이 간신히 펴 있고, 나무에 나뭇잎이 아직 남아 있는 작은 공간.
그어어.
엉클어진 수풀 속에 동굴이 감춰져 있었다.
나는 실험체 1호를 밖에 두고, 리옐과 함께 동굴에 들어섰다.
-큭……!
무언가가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물로 만들어진 화살이었다.
나는 마나를 조작해 화살을 부쉈다.
펑!
공중에서 부서진 화살이 바닥에 흩어졌다.
누군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은방울꽃의 드라이어드.
성역의 정원사였다.
꼴이 말도 아니었다.
눈가는 퀭했고,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한 손에 든 화분, 탄생초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정원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풀썩 쓰러졌다.
‘혼자 아그나 무리를 막아 낸 건가.’
정원사가 파르르 떨었다.
숨을 들이쉬더니, 겨우 입을 열고 말했다.
-어머니께선, 안쪽에 계십니다.
-금방 돌아오지. 좀 쉬어라.
나는 정원사를 지나쳐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수를 만날 수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나무 덩굴로 이루어진 의자에 앉은 세계수가 보였다.
의식은 없는 것 같았다.
발치에는 싱그러운 꽃이 피어 있었는데, 점점 힘을 잃고 시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세계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팔걸이에 올린 왼쪽 팔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종양 같은 상처는 팔을 타고 올라와 세계수의 목전에 다다른 상태였다.
‘돌겠군.’
이대로라면 세계수는 썩어 문드러져 죽고 말 것이다.
세계수가 자신의 입으로 말했던 것처럼.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나는 리옐을 흘끔 보았다.
-엄마, 엄마…….
리옐은 가까스로 울음을 참고 있었다.
내 옷 소매를 꽉 틀어쥔다.
내가 어떻게든 해 줄 거라는 걸 믿고 있다는 듯.
한숨이 절로 나왔다.
리옐은 아직 세계수의 자리를 대체할 정도로 성장하지 못했다.
‘후예가 있다고, 멋대로 죽어 버리면 곤란하다.’
애써 밝은 척하며, 되지도 않는 장난을 치던 세계수다.
숨을 길게 뱉었다.
환부에 손을 얹었다.
신조차 어쩔 도리가 없는 상처.
아니, 신이기에 치명적인 상처.
‘신살(神殺)의 흔적.’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파편 같던 기억이 맞춰졌다.
불사의 괴물은 땅에 사는 모든 신을 죽이고자 했다.
신목, 세계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수를 죽인 불사의 괴물은 다음 타깃을 세계수로 삼았다.
그 시도는 저지되었으나, 세계수는 상처를 입었다.
내겐 별거 아니라고 했지만.
‘거짓말이었군.’
불사의 괴물은 일찍이 땅에 사는 신 하나를 죽였다.
그때 보았던 상흔과 똑같았다.
퍼지는 방식이 조금 달랐지만, 확실했다.
같은 상처를 입고, 고통 속에서 바스러져 가던 신의 절규가 들려왔다.
자그마치 신이나 되는 존재를 고통 속에서, 무력하게 죽게 만든다.
괴로웠을 것이다.
누구에게 기대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여태껏 홀로 고통을 감내하며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미련한 년.’
눈을 감았다.
주먹을 꽉 쥐었다.
환자가 아니라면 뒤통수라도 후려쳤을 것이다.
혼자 참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다.
‘살린다.’
머리가 차가워졌다.
냉정이 돌아왔다.
한시가 급했다.
신살의 흔적은 지금도 구렁이처럼 세계수의 목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환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완전 치료, 불가능.’
완전 치료는 빠르게 포기했다.
속단은 아니었다.
신살에 대해 아는 바가 너무 적었다.
불사의 괴물이 사용하는 권능이라는 것.
그리고 일찍이 또 다른 신이 이 권능에 죽었다는 것.
그뿐이었다.
연구가 부족했다.
그러니, 완전 치료는 포기하고 시작한다.
‘세계수가 고려했을 것 같은 방법도 모두 포기한다.’
절단, 해주 같은 방법을 전부 논외로 뒀다.
세계수라고 치료를 시도하지 않았을 리 없다.
애초에 세계수는 신이다.
통상적인 치료가 통할 리가 없다.
‘내가 해야 할 건 응급처치. 시간을 벌어야 한다.’
완벽한 치료법을 찾을 때까지.
그때까지는 살려 둬야 한다.
나는 마나 서클을 회전시켰다.
곧바로 네 번째 서클을 만들었다.
우웅.
고작 세 개의 서클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세계수의 본체에 마나가 닿기도 전에 사라질 것이다.
최소한 4서클.
마도사의 경지는 이뤄야 한다.
오러도 수준에 맞춰 끌어올려야 했지만.
“에이씨.”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
아공간 주머니에 있던 영약을 입에 넣고 씹었다.
원래 영약에는 복용 순서나 방법이 있다.
그에 맞춰야 최대한의 효율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런 순서 따질 시간은 없었다.
‘나중에 치료비 명목으로 그만큼 뜯어 가면 되니까.’
나는 영약을 씹으며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맛은 기괴했다.
섞여서 그런가, 더 그랬다.
영약이라는 것들은 왜 다 이딴 맛인지 모르겠다.
파인애플을 올린 피자에 민트향 초콜릿을 듬뿍 찍은 느낌이었다.
그것도 뜨거운 피자에, 차가운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양기와 한기를 머금은 영약이었지.’
구토감이 몰려왔지만, 인상을 쓴 채 씹었다.
몸에 좋은 약은 쓴 법이라더니.
이 약은 몸에 무진장 좋을 게 분명했다.
“큭.”
겨우 영약을 삼켰다.
몸속에 뜨겁고 찬 기운이 몰려왔다.
영약을 먹으면 원래 몸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용의 눈물 덕분에, 영약은 곧바로 내 몸에 흡수되었다.
“컥.”
몸속에서 불과 얼음이 맞부딪치는 것 같았다.
고통에 신음을 흘리긴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네 번째 서클이 만들어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철컥.
‘됐다.’
마나 서클이 형성되자마자,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세계수의 환부에 양손을 얹었다.
마나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처다.
그래서 나는 세계수에게 저주를 걸기로 했다.
* * *
-으음.
세계수가 눈을 떴다.
그녀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더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허벅지에 얼굴을 묻은 채 잠든 리옐이 있었다.
세계수는 희미하게 웃으며 리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오래전부터 그녀를 괴롭혀왔던 신살의 상처.
그로 인한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세계수는 자신의 목을 더듬다가, 팔로 시선을 돌렸다.
상처는 그대로였다.
그런데 어떻게?
-일어났냐?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리더니, 지그문트가 걸어왔다.
동굴의 풍경이 일순간 병실로 바뀐다.
세계수는 창밖을 보았다.
나뭇가지 끝에 아스라이 걸린 나뭇잎 하나를 보고 쓸쓸하게 웃었다.
-여보. 나, 시한부래.
-염병. 괜히 살렸군.
지그문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세계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지그문트는 병실의 빈 침대에 업고 온 누군가를 던졌다.
정원사였다.
세계수의 얼굴이 굳었다.
-그 아이는…….
-무능한 신이 정신을 잃었던 동안, 불사의 잔재를 막아 냈더라. 아그나랑 그 상위종까지 전부 말이야.
지그문트는 세계수 옆에 배치된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인상을 쓰며 의자를 두드렸다.
-그리고 이딴 거에 힘쓰지 마라. 간당간당하게 붙든 목숨이니까.
-어떻게 한 거야?
-그게 중요하냐?
-중요해. 이 상처는 치료할 방법이…….
-상처 치료 못 했어.
지그문트는 세계수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세계수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저주를 걸었지.
-이건…… 영면(永眠)의 저주?
세계수는 그제야 몸의 이상을 깨달았다.
조금씩 졸음이 몰려왔던 것이다.
영면의 저주.
이름 그대로 대상을 영원한 잠에 빠트리는 저주였다.
오래전, 숲속에서 이 저주에 걸린 공주 일화는 유명했다.
간단하게 잠을 몰아낸 세계수는 고개를 저었다.
-여보, 지금 3서클 마법사 아니었어?
-4서클로 올렸다. 그리고 은근슬쩍 이상한 호칭 붙이지 마라.
-그래도 불가능한 일인데.
신의 몸에 저주를 걸었다.
용이 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그문트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그문트, 델 로안은 저주에 상당히 능숙한 편이다.
그는 마법에 조금이라도 관련된 지식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습득했으니.
하지만 결코 자신에게 저주를 걸 정도는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은 대마법사도 아닌 상태였으니까.
-불완전한 저주야.
-불완전하다고?
-저주면서 저주가 아니지.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으니.
영면의 저주에 걸렸건만, 세계수는 잠에 빠지지 않았다.
졸음이 몰려왔으나 의지만으로 충분히 밀어낼 수 있었다.
강제력이 없는 저주.
지그문트의 말대로, 저주면서 저주가 아니었다.
-그것도 영초 씹어 가면서 마나란 마나는 전부 때려 박아서 겨우 만든 거야.
지그문트는 리옐의 등을 쓸어 주었다.
리옐은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세계수의 허벅지에 얼굴을 비볐다.
-얘도 꽤 도움을 줬고.
-어머. 우리 아이가?
-어쨌든.
지그문트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정도 놀렸으면 신이고 뭐고 뒤집어엎었을 텐데.
환자라 참는 모양이었다.
조금 즐거워진 세계수가 속으로 웃었다.
-영면의 저주를 받아들여라.
-저주를 통해서 동면 형태를 취하라는 거지?
-내 제자와는 다르게 말을 잘 알아먹는군.
세계수는 그의 생각을 단번에 짚어 냈다.
신살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그문트라고 마땅한 치료법이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대신, 영면을 통해 그 진행 속도를 대폭 감소시키자는 것이었다.
시간 벌기였다.
세계수가 주억거렸다.
-동면에 들어가더라도 내 역할은 수행할 수 있으니까…… 합리적이네.
-그렇지.
-리엘이 완전히 성장할 때까지 버틸 수는 없겠지만…….
-신이 개소리를 하는군.
지그문트는 기어코 세계수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세계수는 난생처음으로 꿀밤을 맞은 정수리를 잡았다.
아프지도,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대신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난생처음 느끼는 감정이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세계수가 우물쭈물거리는데, 지그문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죽지 마라.
-응?
-기껏 살려 놨으니까.
지그문트는 진지했다.
세계수는 딱 한 번 저런 눈을 본 적 있었다.
다시 묘한 감정이 솟아났다.
세계수는 고개를 기울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그문트가 중얼거렸다.
-공짜는 아니야. 갑자기 불사의 괴물이 부활하는 게 석연찮은 구석도 있고, 리옐이 보채기도 하고, 어차피 사막이랑 해상 도시는 한 번 갈 예정이었으니…….
리옐이 뒤척였다.
지그문트는 리옐은 익숙하게 안아 들었다.
세계수는 기시감을 느꼈다.
그때도 그는 아이를 안아 들고 있었다.
‘머리도 붉은색이었고, 우리 아이가 더 귀엽긴 하지만…….’
지그문트에게서 오래전 델 로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세계수의 눈이 흔들렸다.
죽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한 바였는데.
미련이 생길 것 같았다.
-자고 있어. 치료법 구해 올 때까지 멋대로 죽을 생각하지 말고.
-응.
순순히 대답하자, 지그문트는 네가 웬일이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세계수는 재빨리 표정을 바꿨다.
-우리 여보 말인데, 착한 마누라가 들어줘야지.
-환장하겠군.
지그문트는 네가 그러면 그렇지라는 눈으로 피식 웃었다.
세계수는 병실을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리옐이 잠꼬대로 엄마를 찾았다.
세계수는 리옐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럼 난 간다. 저주가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테니, 종종 갱신하러 올 거야.
-알았어. 다녀오세요.
세계수는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지그문트는 리옐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하루라도 빨리 영면을 받아들여야, 신살의 진행이 늦춰지니까.
제 딴에는 배려한 것이다.
세계수는 지그문트가 했던 말을 다시 곱씹었다.
-죽지 마라.
지그문트, 델 로안은 세계수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필멸의 존재면서, 난생처음으로 허울 없이 가까워진 사람.
그만큼 소중한 벗이기에 어떤 장난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여보니 아이니 했지만, 솔직히 장난 반 진심 반이었다.
아이가 있는 건 사실이었으나, 정이 통한 건 아니니까.
그랬는데.
-자고 있어. 멋대로 죽을 생각하지 말고.
지그문트의 깊은 눈이 떠올랐다.
세계수는 붉게 달아오른 자신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뜨거웠다.
-어머. 나도 주책이네. 이제 와서?
감정의 정체를 깨달은 세계수가 발을 굴렀다.
혼자 웃기도 하고, 오그라든 손으로 몸을 감싸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동안 지그문트가 떠난 자리를 응시했다.
세계수는 의자에 몸을 뉘이고 눈을 감았다.
입가에는 불안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신뢰와 기대만이 섞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그럼 세계수님은…….
-적어도 당분간은 괜찮을 거다. 호전된 건 아니지만, 시간은 벌어 놨으니.
르네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정족 장로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내 얘기를 들은 레골라스 장로는 거목을 올려다보았다.
엘비아 중앙에 위치한 세계수의 화신체.
나뭇잎은 거의 다 떨어지고, 줄기에서는 껍질이 떨어져 나왔다.
하지만 더 악화되진 않았다.
-신살이라고 하셨지요.
레골라스의 말투는 어느새 존대로 바뀌어 있었다.
내 정체를 완전히 확신한 모양이었다.
다른 장로들은 조금 의아한 눈치였지만.
-어떻게 하면, 세계수님을 살릴 수 있는 겁니까?
-방법은 두 가지야.
나는 손가락을 두 개 펴 보였다.
먼저 중지를 접었다.
-첫 번째. 신살의 주체, 불사의 괴물을 완전히 재봉인시키는 것.
신살은 불사의 괴물에 의해 새겨진 상처다.
불사의 괴물이 완전히 재봉인되면, 자연히 그 권능도 사라질 것이다.
레골라스는 내 말을 그대로 되뇌었다.
-궁극적인 해결은 아니군요.
-그렇지. 봉인시키더라도 다시 풀려나면 결국 신살은 세계수의 몸을 좀먹을 테니까.
이것도 어찌 보면 시간 벌기에 불과했다.
르네는 숨 쉬는 것도 잊고 내 말을 경청했다.
나는 검지를 접으며 말했다.
-두 번째는 신살을 치료하는 거야. 병이 아니니 치료라고 하긴 뭐하지만, 어쨌든 신살을 세계수의 몸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거지.
-가능한 겁니까?
-모르지.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야.
치료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목오 사막.
태초의 숲의 대척점에 있는, 서쪽 끝의 대사막.
-그곳에 단서가 있다.
-웨스트 던이 있는 곳 말입니까?
-그래. 웨스트 던은 한참 전에 망했지만.
서대륙 전역을 여행한 적 있는 레골라스는 사막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거기에 세계수보다 먼저 신살에 당한 신이 있거든.
요정족 장로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는 절망 대신 희망이 떠올라 있었다.
또 다른 신이라면, 분명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곧바로 원정대를 꾸려야 하겠군요.
-그럴 필요 없다.
나는 단번에 의견을 묵살했다.
원정대를 꾸리자고 했던 요정족 장로의 얼굴이 구겨졌다.
르네가 담담하게 동의를 표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르네 님?
-지금 어머니께선 힘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십니다.
-그러니, 어서 회복할 수 있도록……!
-아직 말 안 끝났습니다.
싸늘한 목소리에 장로가 입을 닫았다.
지금까지 온건하기만 했던 르네였다.
장로들 사이에서도 의견을 제시한 적이 드물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달라졌다.
르네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장로들을 둘러보았다.
-어머니는 그 어떤 때보다,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취약한 상태십니다.
-으음.
-저희가 지켜 드려야 합니다.
-원정대에 전력을 쏟자는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병력을 잘 분배한다면.
-솔직히 말씀드리죠. 저희는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르네의 말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요정족이 약하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요정족 하나하나는 분명 강하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적다.
-지금은 방어에 충실해도 모자랍니다.
-누가 쳐들어올 거라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없습니다. 어쩌면 장로님 말씀대로 원정대를 파견할 여유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지금은,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르네 님 말씀이 맞습니다.
-레골라스 장로님?
레골라스가 르네를 두둔하고 나섰다.
-태초의 숲이 불가침 영역이었던 건, 세계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걸 몰라서…….
-혹 요정 사냥꾼이 지금 세계수님의 화신을 본다면, 그 간악한 놈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장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정보는 돈이 된다.
더욱이 세계수가 무력화 됐다는 것은 S급 정보다.
사냥꾼은 그 정보는 팔아 치울 것이고.
-그렇군요.
태초의 숲을 넘어서 엘비아까지 마수가 뻗칠 확률이 크게 높아진다.
그게 정규군이 됐든, 대규모의 사냥꾼이 됐든 간에 말이다.
장로는 결국 수긍했다.
-이해했습니다. 제가…… 말만 앞섰군요.
-아닙니다. 급한 마음,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에, 르네가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무른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머리도 잘 돌아가고, 의견도 피력할 줄 안다.
말재주도 괜찮다.
레골라스 장로도 꽤 든든했다.
이 정도면 어련히 알아서 잘 지킬 것이다.
-그렇다면, 원정은 방어선이 구축된 후에 시작하는 겁니까?
-예. 그 외에도 여기 계신 지그문트 님께서 따로 움직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르네에게 계획을 어느 정도 전달했다.
세계수를 살리겠다고 엄포를 놓았으니, 살릴 것이다.
한 입으로 두말할 수도 없었으니까.
‘바빠지겠군.’
레골라스는 고개를 들었다.
-세계수님을 살려 주신 것에 모자라, 직접 움직여 주기까지 하시다니.
-그래. 좀 고마워해야 돼.
-비록 인간의 몸을 하고 있으나, 세계수님의 부군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왜 잘 나가다가 엄한 곳으로 새는 거지?
이게 다 세계수 때문이다.
이를 빠드득 갈았다.
하여간 왜 이상한 농담을 해서.
그나저나 레골라스의 느낌이 전과 조금 달랐다.
-벽을 깼나?
-지그문트 님 덕분입니다.
마나 링크로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었다.
레골라스는 전보다 마나 서클이 하나 더 늘어 있었다.
나에 대한 존경이 무럭무럭 샘솟는 이유가 이거였군.
-축하해.
-재차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제, 감사는 됐고.
나는 쪼그려 앉아 레골라스와 눈높이를 맞췄다.
-진짜 보상을 받아 볼까?
* * *
태초의 숲은 자연의 보고다.
비단 세계수의 정원이 아니더라도, 널린 게 영초였다.
세계수에게 영면의 저주를 걸면서, 영초를 많이 소모했다.
마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영약으로 가공하지 않은 영초를 씹으며 억지로 마나를 보충했다.
그 결과, 세계수의 목숨 줄을 붙잡긴 했지만.
‘내 영초값은 받아 내야지.’
그밖에도 받아 낼 것들이 많았다.
정신적 피해 보상, 치료비, 간접적 강의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물가를 거닐었다.
“여길 진짜 들어오는 날이 올 줄이야.”
요정족의 보고.
생명의 샘.
전생에도 이곳에 들어오려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요정족 전체가 나서서 나를 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적당한 명분을 만들 걸 그랬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수통 가득 샘물을 담았다.
마음 같아선 샘물을 통째로 드러내고 싶었으나, 내게도 상도덕이라는 게 있다.
샘을 관리하는 페어리가 불안한 듯 내 주위를 떠돌았다.
-얼마나 떠 가실 생각이세요?
-걱정 마. 딱 내가 지금 가진 수통을 다 채울 정도면 되니까. 그 정도는 괜찮지?
-네. 물론이죠.
페어리는 안심한 듯 활짝 웃으며 날개를 팔락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샘을 관리하는 페어리가 허락했으니, 괜찮겠지.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와르르르.
그 안에 꽉 들어차 있던 수통이 튀어나왔다.
실험체 1호가 안에서 울부짖었다.
아공간 주머니를 도로 닫았다.
-딱 내가 가진 수통만 채워 갈게.
-…….
-설마 요정족이 거짓말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수통 뚜껑을 열었다.
페어리가 부르르 떨었다.
-속이다니……!
-내가 언제 수통이 하나라고 한 적 있냐?
-이런 극악무도한!
-다 쓸 곳이 있어서 그런 거야.
페어리는 억울하다는 눈으로 르네를 보았다.
르네는 난처한 듯 웃었다.
-은인이십니다. 어머니를 구하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드려야지요.
-하지만 르네 님! 너무 많습니다!
-어차피 다시 나오잖아. 쩨쩨하게.
-나오긴 나오지요! 100년에 한 번!
분을 참지 못한 페어리가 제 가슴을 쳤다.
원체 얇아 부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시위를 한들 이 샘물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챙길 수 있는 한 챙겨야 했다.
보험이니까.
-다 담았다.
-바로 떠나실 건가요?
-아니. 잠깐 검 좀 휘두르다가.
-검요?
나는 세계수에게 저주를 걸기 위해 급한 대로 4번째 서클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직 소드 익스퍼트 초급에 오르진 못했다.
마나와 오러 간의 균형이 어그러진 상태.
상대적으로 힘이 강해진 마나가 오러를 끌어당기고 있다.
오러와 마나가 맞닿으면, 몸이 폭발할 거고.
‘그래도 며칠은 여유가 있다.’
용의 눈물의 효과였다.
두 힘은 전보다 많이 안정되어 있었다.
며칠 안에, 소드 익스퍼트 초급에 올라야 했다.
물론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능할까 모르겠군.’
내가 소드 비기너에서 소드 러너가 되는 데 한 달이 걸렸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넘어야 할 벽이 높고 두꺼워지는 건 당연지사.
소드 익스퍼트 초급으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몸이 내부에서부터 터져 죽는 끔찍한 최후는 원하지 않으니까.
생명의 샘물을 어느 정도 확보한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신체 능력도…… 어떻게든 끌어올렸다.’
용의 눈물과 영약들 덕분에 결점이었던 신체 능력은 많이 올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른 편이지만, 그 속에는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몸이 커지지 않은 것은 내가 영약만으로 신체 능력을 올렸기 때문이다.
꾸준한 훈련을 동반했다면 단처럼 외적으로 드러났겠지만.
중요한 건 외관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건 깨달음인데.’
마법사가 마법과 마나를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듯.
기사는 검과 오러를 이해해야 한다.
마이어가에서 읽었던 책들을 떠올렸다.
‘이론은 다 외웠는데 말이야.’
서재에 있던 책은 전부 외웠다.
깨달음에 도움이 될 만한 구절도 몇 개 있었다.
하지만, 본질적인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나는 곧바로 단을 찾아갔다.
“단.”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이제 떠나는 겁니까?”
“아니. 아직.”
단은 소드 익스퍼트 초급이다.
그 경지에 다다른 지도 꽤 되었지만, 아직 감각을 기억하고 있겠지.
“내가 소드 익스퍼트 초급에 올라야 하는데.”
“……예? 지금 소드 러너 아니십니까?”
“소드 유저야. 내가 말 안 했던가?”
“안 하셨습니다. 것보다, 무슨 속도가…….”
단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검을 잡았다.
그도 수련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다.
야영 도중에도, 엘비아에서도.
단은 틈틈이 검을 휘둘렀었다.
그저 내 속도가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아무튼, 소드 익스퍼트 초급과 소드 유저 사이에 간극이 꽤 크더라고.”
“그렇습니다. 확실한 차이를 보이는 단계니까요.”
소드 익스퍼트는 초급, 중급, 상급, 최상급으로 나뉜다.
괜히 ‘소드 익스퍼트’에 단계가 많이 나누어져 있는 게 아니다.
그만큼 오르기도, 마스터하기도 어려운 경지라는 뜻이었다.
“내가 느끼기엔 깨달음이 아직 부족한 것 같은데. 뭐 힌트 같은 거 없냐?”
“하, 무섭군요. 정말 따라잡힐 것 같아서.”
단은 검을 잡았다.
“따라오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