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14/134)

5

사냥꾼 사냥

“제자야.”

“네. 스승님.”

“내가 분명 화분이 제멋대로 흔들리는 걸 본 것 같은데.”

“우연이네요. 저도 본 것 같은데.”

상식적으로 화분이 움직일 리가 없다.

나는 발레리아를 추궁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면 용서해 주마.”

“뭘요?”

“너, 씨앗에 무슨 짓 했지?”

“아니에요!”

발레리아는 정말 억울해 보였다.

“스승님 말씀대로 햇빛 잘 드는 곳에 두고, 건드리지도 않았는데요!”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았다.

발레리아는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니까.

화분을 확인했다.

원장실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평평하게 정리된 흙만 보였다.

“어?”

다시 한번, 화분이 흔들렸다.

이번에는 눈에 확실히 보일 정도였다.

발레리아가 유추했다.

“음, 혹시 물을 달라는 게 아닐까요?”

“물?”

“햇빛도 있고, 흙도 있는데. 물은 준 적 없잖아요.”

“희귀하긴 하지만 물을 먹으면 죽는 식물도 있거든. 혹시 몰라서 안 줬는데.”

발레리아는 허리를 숙여 화분과 눈높이를 맞췄다.

마치 어린이라도 대하는 것 같았다.

“혹시 물이 마시고 싶은 거야?”

화분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앞뒤로 흔들렸다.

“그렇대요.”

“…….”

꽤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씨앗이 의사를 표현하는 건 처음 봤다.

나는 허공에 주먹 크기의 물방울을 만들었다.

“속성 마법이네요? 3서클은 또 언제 만드셨어요?”

“좀 전에.”

“아하.”

정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발레리아였다.

나는 물방울을 화분 위로 띄웠다.

화분이 기대하듯 좌우로 흔들렸다.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어떻게 본 걸까.

“가만히 있어. 정신 사나우니까.”

내 말에, 화분이 움직임을 멈췄다.

진짜 알아듣네?

나는 흙 위로 적당량의 물을 흩뿌렸다.

기분 좋다는 듯, 화분이 떨렸다.

“야, 얘가 너보다 말 잘 듣는데?”

“제가 스승님 명령 지키려고 얼마나 동분서주를 했는데!”

“그럼 내 말을 잘 듣는다, 이 말이지?”

나는 화분을 챙겼다.

발레리아는 호기롭게 대꾸했다.

“그럼요! 뭐라도 시켜만 주세요!”

“여기 남아라. 내가 일러준 대로 하고. 팔베르크 제국도 잘 막고.”

“네! 으, 응?”

“간다.”

나는 의문에 빠진 발레리아를 두고 원장실을 나갔다.

* * *

출발은 순조로웠다.

인원은 나와 단, 마리나, 그리고 마부가 전부였다.

네르갈을 빠져나간 마차는 길을 따라 달렸다.

마차 안, 나는 화분을 내려다보았다.

흙 위에는 어느새 작은 떡잎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물을 주자 갑자기 자라난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내 허벅지 위에 놓인 화분은 자꾸 멋대로 흔들렸다.

물은 이미 충분히 줬다.

마차가 덜컹거려서 그런가 싶어서 마차를 잠깐 세워 보기도 했다.

하지만 화분은 멈추지 않았다.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해라.”

말을 못 하니까 이러지!

그런 의미를 담긴 듯한 몸통 박치기가 되돌아왔다.

아기를 키우는 기분이었다.

의사소통이 안 된다.

원하는 걸 짐작해서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발아를 시작한 이상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지도 못하니.

마리나가 관심을 보였다.

“그게 뭔가요?”

“골칫덩이.”

내가 왜 골칫덩이야!

화분이 다시 내 몸을 쳤다.

별로 아프진 않았지만, 거슬렸다.

나는 화분을 노려보았다.

“한 번만 더 쳐 봐라. 길바닥에 버리고 갈 거니까.”

으름장을 놓자, 화분이 조금 얌전해졌다.

마리나와 단이 신기하다는 듯 구경했다.

“말을 알아듣네요.”

“화분 안에 뭐가 들어 있는 겁니까? 동물입니까?”

“나도 잘 몰라. 아마 식물일걸? 네가 좀 관리해라.”

나는 단에게 화분을 떠넘겼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화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 손에 있을 때보다 심했다.

안에 있던 흙이 밖으로 튈 정도였다.

얼굴에 흙 폭격을 맞은 단은 난감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제가 잠깐 봐도 괜찮을까요?”

“그래.”

마리나가 화분을 받았다.

거짓말처럼 화분이 멈췄다.

“어머, 착한데요?”

단이 흙을 털어 내며 투덜거렸다.

“불공평하군요.”

“인생이 원래 그래.”

결국 화분은 마리나가 도맡아서 관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태초의 숲은 어쩐 일로 가시는 겁니까?”

“친구가 살아서.”

“태초의 숲은 인간이 살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어. 맞아.”

태초의 숲은 인간의 출입이 금지된 요정족의 성소다.

단이 의문을 가질 만도 했다.

“혹시, 도련님의 친구분께선 엘프십니까?”

“아닌데.”

“그럼 드라이어드 입니까?”

“음, 비슷한가? 그래. 그렇게 볼 수 있겠네.”

단과 마리나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요정족 중에서도 드라이어드는 특히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종족이다.

일반인은 평생을 살면서 한 번 보기도 힘들었다.

“드라이어드는 평생을 숲에서 산다고 들었는데요.”

“맞아.”

“영지에서 만나신 겁니까?”

“아니. 전생에.”

화분을 관찰하던 마리나가 귀를 쫑긋 세웠다.

“전생이라뇨?”

“내가 전생에 대마법사였거든.”

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마리나도 조금 안쓰럽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속고만 살았냐? 마리나, 나 못 믿어?”

“미, 믿어요.”

마리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마리나는 그렇다고 치자.”

얘 앞에서 마법을 쓴 적은 아직 없었으니까.

내가 알려 주기 싫어서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근데 단, 너 이 자식, 넌 그러면 안 되지.”

“도련님께서 마법을…… 큼, 많이 특별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쯧. 충성을 바친다더니.”

나는 내 사람에게 정체를 감출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얘네가 그런 걸 떠들어 댈 성격이 아니라는 건, 진작 파악했다.

그래도 여태껏 안 믿을 줄은 몰랐는데.

하긴, 나라도 누가 ‘나는 대마법사의 환생이다’라고 하면 못 믿겠지만 말이다.

“됐다. 믿든 말든, 니들 맘대로 해.”

* * *

내가 다음 목표를 태초의 숲으로 정한 가장 큰 이유는 거리였다.

태초의 숲은 레온하트 왕국과 상당히 가까이 있었다.

“얼마나 남았나?”

“이제 인근에 접어들었습니다. 하루 이틀이면 되겠군요.”

휴식을 최소화하고 일주일간 달렸다.

거의 다 온 모양이었다.

마리나는 조금 지친 것 같았다.

“이 근처에 마을이 하나 있을 텐데.”

“예.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작은 마을이 하나 나옵니다.”

“거기로 가지. 하루쯤은 쉬어야 할 것 같으니.”

태초의 숲으로 들어가기 전에 준비할 것도 있었다.

내 말에, 마부가 방향을 틀었다.

“저기 보이는군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집 몇 채가 모여 있는, 마을이라고 하기도 뭐한 곳이었다.

다행히 여관은 있었다.

마차를 세우고, 여관에 들어섰다.

“어서 오십쇼.”

의외로 사람이 꽤 많았다.

무장을 한 걸 보니 용병으로 보였다.

단이 주인장에게 다가가 말했다.

“방 네 개. 1박에, 식사도 준비해 줬으면 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빈방이…….”

나는 은화 한 닢을 책상에 올렸다.

주인장은 은화를 보더니, 눈을 감았다.

고개를 저었다.

“손님. 이러시면…….”

은화 다섯 닢을 더 올렸다.

완고해 보였던 주인장의 표정이 녹아내렸다.

그는 간신처럼 손을 비비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러시면, 정말 감사합니다. 헤헤. 잠시만 기다리시죠.”

주인장은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다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다시 내려온 주인장은 미소를 지었다.

“올라오시죠.”

역시 돈이 최고다.

라스 마이어가 어느 정도 여비를 챙겨 준 덕분에, 부족하진 않았다.

짐을 풀고 내려온 뒤, 식사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마리나는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지그문트 마이어는 귀족가의 도련님이었다.

이런 후줄근한 곳에서 식사해 본 적이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괜찮아.”

이 여관은 정말 괜찮은 편에 속했다.

조금 낡았지만 더럽진 않았다.

손님들이 먹고 있는 음식도 꽤 괜찮아 보였다.

주인장이 우리 식탁 쪽으로 다가왔다.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메뉴판이 있었지만, 굳이 볼 필요는 없었다.

제일 비싼 게 제일 맛있겠지.

“제일 비싼 거로 네 개 주게.”

“제일 비싼 것으로 넷, 말씀이십니까?”

“그래.”

주인장의 눈이 어쩐지 묘했다.

“손님이셨군요.”

“손님이지. 그럼 뭐로 보이나?”

“처음 오셨습니까?”

“어.”

“알겠습니다.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제일 비싼 게 뭐길래 저렇게 유난을 떠는 건지.

메뉴판을 보았다.

메뉴는 고작 다섯 개였다.

개중에 제일 비싼 것은 소고기 스튜.

가격이 꽤 있었지만, 바가지는 아니었다.

“도련님,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군요.”

단이 넌지시 속삭였다.

그 말대로, 여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식사하거나 얘기를 나누던 손님들은 우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자,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이 근처에서 귀족을 볼 일이 별로 없어서 그런 거겠지.”

몇 분 후.

주인장이 다가왔다.

손은 비어 있었다.

음식을 가져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재료가 떨어졌나?

그는 뭔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것처럼 속삭였다.

“따라오시죠.”

음식을 주문했는데, 갑자기 따라오랜다.

레온하트에 이런 전통이 있었나?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리 과정이라도 보여 주려고 그러는 걸까요?”

“모르겠군.”

주인장은 우리를 여관 뒤쪽으로 안내했다.

설마 정말 소 잡는 걸 보여 주려는 건 아니겠지?

주인장이 발로 바닥을 쿵쿵 쳤다.

“이봐! 손님이야!”

드드득…….

바닥이 열렸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주인장은 어디선가 횃불을 가져와 단에게 건넸다.

“통로를 따라 쭉 가시면 됩니다.”

“음. 자네는 안 가나?”

“다른 손님이 오실 수도 있으니까요.”

내가 눈짓하자, 단이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좁은 땅굴이 나왔다.

덩치가 큰 단은 지나가기도 힘들 만큼 좁았다.

나 또한 머리가 천장에 닿아 살짝 허리를 굽혀야 했다.

“도련님, 뭔가…….”

“알아. 조용히.”

아무래도 내가 했던 말이 걸렸다.

‘가장 비싼 거로 달라.’

그 말을 한 후부터 주인장도, 손님들도 조금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마 그 말이 어떤 암호였을지도 모른다.

의도하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는 일행에게 조용히 명령했다.

“말 아껴라. 동요도 최대한 숨기고. 내가 대처할 테니까, 가만히 있어.”

“네.”

“알겠습니다.”

얼떨결에 따라온 마부가 침을 꿀꺽 삼켰다.

횃불에 의지해 땅굴을 통과하자, 빛이 보였다.

땅굴 끝에는 큰 공동이 있었다.

사람이 사는 듯, 여기저기에 가구가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고객 여러분.”

의자에 앉아 있던 한쪽 눈에 안대를 쓰고 있는 남자가 인사했다.

책상에는 숫자가 가득한 서류가 놓여 있었다.

회계 서류 같았다.

“어떤 상품을 보고 오셨습니까?”

남자는 본능적으로 내가 제일 높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본 듯했다.

나는 심드렁한 투로 대꾸했다.

“제일 비싼 거.”

“좋은 시기에 찾아오셨군요.”

남자는 공동 한쪽으로 갔다.

벽면에 철문이 여럿 있었다.

땅굴에 철문이라.

철문은 여섯 개의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열쇠 꾸러미를 꺼낸 남자가 자물쇠를 땄다.

철컥. 철컥.

문이 열렸다.

“자, 모쪼록 마음에 드시는 상품이 있었으면 합니다. 골라 보시죠.”

“흠.”

나는 문을 지나 넓은 방에 들어섰다.

수십 개의 짐승 우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요정족들이 갇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요정족 사냥이 성행했던 시기가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요정족 노예가 유행했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긴 수명을 가진 노예.

귀족들은 누구의 노예가 더 아름다운가를 두고 경쟁했다.

비싼 사치품을 자랑하듯이 말이다.

‘태초의 숲에 인간 출입을 금지된 것도 그 시기 이후였지.’

오래전에 근절된 줄로만 알았던 요정족 사냥이, 지금까지 이루어지고 있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 여관은 그 암거래처인 모양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태초의 숲과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저, 고객님, 혹시 마음에 드는 상품이 없으십니까?”

“입 닥쳐. 보고 있는 중이니까.”

“……송구합니다.”

나는 방을 살폈다.

다양한 요정족들이 우리에 갇혀 있었다.

엘프, 페어리, 심지어는 드라이어드까지 보였다.

그들의 눈은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엘프나 페어리는 그렇다 치고, 드라이어드는 어떻게 사로잡은 거지?”

“탄생화를 빼앗았습니다.”

드라이어드가 태어난 꽃을 탄생화라고 한다.

드라이어드는 자신의 탄생화와 운명을 함께하는 요정족.

탄생화는 그들의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나무의 드라이어드는 없겠군?”

“있긴 합니다만, 아직 어린 것들뿐입니다. 보여 드릴까요?”

“아니. 됐어.”

어깨에 해바라기가 피어난 드라이어드를 살폈다.

드라이어드는 몸 어딘가에 자신의 탄생화와 같은 꽃이 피어 있었다.

그 꽃을 보면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해바라기는 거의 시들어 있었다.

나는 쯧 혀를 찼다.

“드라이어드는 원래 취급 안 했나 보군.”

“예. 이번에 처음 들어왔습니다.”

“탄생화는 따로 관리하는 중인가?”

“맞습니다. 비싼 값에 약재로 팔리기도 하니까요. 관심 있으십니까?”

“아니. 그건 됐고, 탄생화는 우리 근처에 두는 게 좋을 거야.”

“예?”

나는 우리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 있는 드라이어드를 가리켰다.

“드라이어드는 탄생화랑 멀리 떨어질수록 힘을 잃거든.”

“아, 그래서 이것들이 다 죽어 갔던 거로군요.”

“아예 드라이어드랑 같이 팔거나, 팔리기 전까지는 근처에 둬.”

“음…… 하지만.”

“다 죽어 가는 것보다, 생기 넘치는 상품이 더 잘 팔리지 않겠나.”

“상품은 신선하게…….”

안대 남자는 한 수 배웠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하는 게 좋겠군요. 조언 감사합니다.”

“이 암시장,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 같군. 자네도 원래 회계를 맡는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정확하십니다. 급하게 팔 상품이 들어와서, 얼마 전 임시로 만들어진 곳입니다.”

예상대로였다.

아무리 간이 커도 태초의 숲 근처에 암시장을 만들 리 없다.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급하게 팔 상품이라는 건 뭔가?”

“으음.”

안대 남자는 조금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는 금화 한 닢을 튕겼다.

안대 남자가 금화를 낚아챘다.

금화를 깨물어 보더니, 헤벌쭉 웃는다.

“모시겠습니다. 나리.”

어느새 호칭도 고객님에서 나리로 바뀌었다.

안대 남자는 공동의 깊은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몇 중으로 된 철문을 지났다.

길 곳곳에는 무장한 경비가 배치되어 있었다.

어림잡아도 수십은 될 것 같았다.

안대 남자가 자물쇠를 따며 말했다.

“나리께선 정말 운이 좋으신 겁니다.”

“왜지?”

“이 상품이 아직 있을 때, 이곳을 찾으셨으니까요.”

안대 남자가 마지막 철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따로 철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엘프?”

철창 너머 의자에는 여자 엘프가 홀로 앉아 있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엘프가 고개를 들었다.

단과 마리나가 무심코 탄성을 흘렸다.

“허.”

“와.”

대단한 미색이었다.

두 눈을 감고 있었는데, 감고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흠.”

나는 침음을 흘렸다.

“하이 엘프군.”

“안목이 좋으시군요.”

“하이 엘프는 다른 엘프들에 비해 귀가 좀 더 위로 올라가 있거든.”

이건 나도 놀랐다.

설마 급하게 팔 상품이라는 게 하이 엘프였을 줄이야.

하이 엘프는 인간으로 치면 성녀나 성자와 같은 존재였다.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 엘프들의 존경을 받는다.

“잠시 얘기를 나눠 봐도 괜찮겠나?”

“얘기요? 허. 나리, 요정족의 언어도 아십니까?”

“조금.”

“으음. 대답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괜찮겠지요.”

안대 남자는 순순히 허락해 주었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하이 엘프에게 말을 걸었다.

-내 말 알아들을 수 있겠나?

하이 엘프가 천천히 끄덕였다.

-예.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별로 놀라진 않는군?

-어머니께 언질을 받았으니까요.

하이 엘프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델 로안 님. 르네라고 합니다.

-그래. 반갑다. 상황은 영 그렇지만 말이야. 어쩌다가 잡힌 거지?

하이 엘프의 경호는 철저하다.

고작 요정족 사냥꾼 나부랭이들이 뚫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부러 숲 밖으로 나가, 잡혔습니다.

르네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형제자매들을 구출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위험한 짓을 했군. 그 녀석이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독단이었습니다. 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지요.

-하여튼 어린 것들이 무모하기 짝이 없단 말이야. 자기 몸 아낄 줄 모르고.

르네가 입을 가리고 살짝 웃었다.

-어머니께 듣던 것과 똑같으시군요.

-그래. 뭐라고 욕하디?

-안 하셨습니다.

-정말?

-사실 조금 하셨답니다.

하긴 한 모양이군.

-계획이 뭐냐?

-나무들에게 말을 해 놓았습니다. 곧 숲지기들이 이곳을 찾아올 겁니다.

-내가 할 일은 별로 없겠군.

숲지기는 태초의 숲을 지키는 정예 엘프를 일컫는 말이다.

그들의 무력이라면 이 정도 경비는 쉽게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안대 남자의 표정을 흘긋 살폈다.

-얘기가 너무 길어지면 의심할 거다.

-알겠습니다.

내가 말을 마치자, 안대 남자가 궁금하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뭐라고 합니까?”

나는 대충 꾸며 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모양이야. 하이 엘프는 특히 예민하니, 주의해서 관리하게.”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상품은 신선해야 하니까요.”

“이건 경매로 팔 생각이겠지?”

“그렇습니다.”

다른 요정족도 아니고 하이 엘프다.

따로 경매를 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사기 위해서 금화를 상자째 들고 오는 머저리들이 있을 테니까.

“언제지?”

“3시간 후입니다.”

얼마 안 남았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화를 한 닢 더 튕겼다.

금화를 잡아챈 안대 남자는 비굴하게 굽실거렸다.

“좋은 자리로 맡아 두겠습니다.”

“그래. 조금 이따 오겠네.”

* * *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뭐를 어떻게 해? 경매에 참여해야지.”

나는 방의 구조를 파악했다.

창문으로 밖을 보니, 뒤뜰에 천막이 세워지고 있었다.

아마 임시로 경매장을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그 좁은 공동에서 경매를 진행하는 건 힘들 테니.

“곧 사냥꾼 사냥이 시작될 거다.”

“사냥꾼 사냥이요?”

“그래. 숲지기들이 온다더군.”

요정족을 납치하고 거래까지 하는 사람들이다.

숲지기들이 살려 둘 리 없다.

아마 저 천막은 피로 물들 것이다.

“구조대가 올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러고 보니 도련님, 요정족의 언어도 사용하셨죠?”

화분을 든 마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은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살폈다.

“도련님.”

“왜?”

“설마, 진짜로 전생에 대마법사셨습니까?”

“……뒈질래?”

무의식적으로 뒤통수를 후려칠 뻔했다.

가까스로 참았다.

“그런데 어째서 경매에 참여하는 겁니까?”

숲지기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내가 경매에 참여할 이유는 없었다.

“머저리들 돈 챙기러.”

요정족을 구입하기 위해 온 머저리들.

하이 엘프에 대한 걸 알고 있다면, 꽤 두둑이 들고 있을 거다.

“엘프들은 인간의 화폐에 관심이 없거든.”

사람은 죽을 것이고, 돈은 남을 것이다.

그 돈은 국가나, 어느 운 좋은 놈이 전부 가져가겠지.

당연히 그 운 좋은 놈은 나였다.

“으음?”

마리나는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러나 단은 아닌 것 같았다.

입이 벌어졌다.

“혹시 전생에 대마법사가 아니라, 악마 아니셨습니까?”

* * *

몇 시간 후.

방의 창문을 통해 천막을 감시하던 단이 내게 신호했다.

창문을 보니, 뒤뜰에 화려한 마차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요정족을 사들이려는 부호들이 경매장을 찾은 것이다.

천막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이제 슬슬 시작하려나 보군.”

“저흰 언제 들어갑니까?”

“상황이 정리된 후에.”

굳이 돕지 않아도, 엘프들은 알아서 잘할 것이다.

우린 하이에나처럼 남은 시체만 뒤지면 된다.

똑똑.

“……누구냐?”

“나리, 접니다.”

나는 단에게 눈짓했다.

단이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안대 남자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곧 경매가 시작된다는 걸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알겠으니, 가 봐.”

“아닙니다. 먼저 자리를 안내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안대 남자는 난처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었다.

“경매에서 일을 떠맡게 돼서 말입니다.”

“알아서 찾아갈 수 있는데.”

“경매장이 상당히 혼잡합니다. 안내 없이 자리를 찾는 건 힘드실 겁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이놈이 사라진다면, 경매장 쪽에서 뭔가 눈치챌 수 있다.

휘말릴 가능성이 있더라도, 가는 게 맞았다.

단이 내 명령을 기다렸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가면 두 개를 꺼냈다.

밀러 상회에서 시제품으로 받은 ‘수호자 가면’이었다.

“써.”

단과 나는 가면을 썼다.

이런 경매에서 신원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쓰는 이는 많았다.

안대 남자가 우리를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경매장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관 주인장이 천막 앞에서 손님을 받고 있었다.

천막은 꽤 큰 편이었는데, 사람으로 가득했다.

안대 남자는 나를 사람이 적은 자리로 안내했다.

자리 사이의 간격도 넓고, 의자도 푹신한 고급품이다.

근처에는 척 봐도 돈깨나 있을 법한 놈들이 앉아 있었다.

“헤헤. VIP석으로 준비했습니다.”

“일 처리가 괜찮군.”

나는 의자에 앉았다.

단이 나를 호위하듯 뒤에 섰다.

“나리께선 4번입니다.”

“경매는 많이 해 봤으니, 설명해 줄 필요 없네.”

“아, 제가 괜한 오지랖을 부렸군요.”

안대 남자는 우물쭈물하며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쯧.”

나는 금화를 한 닢 더 꺼내 던져 주었다.

안대 남자는 그제야 꾸벅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어차피 곧 전부 회수할 예정이라, 아깝진 않았다.

곧, 무대에 조명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경매 진행을 맡게 된 패치스라고 합니다!”

무대로 올라온 경매 진행자는 안대 남자였다.

혼자서 하는 일도 많네.

나는 다리를 꼬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오래 기다리신 분들을 위해, 곧바로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대망의 첫 번째 상품은…… 언제나 인기 있는 품목이죠?”

무대로 여자 엘프 한 명이 끌려왔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고, 양손은 뒤로 묶여 있었다.

“이름은 실라! 구하기 힘들다는 젊은 엘프입니다!”

실라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밑 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의논하듯 웅성거렸다.

내 옆의 부호는 여유롭게 상품을 살피고 있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경매를 시작하기 전에, 한마디 들어 보겠습니다!”

패치스는 웃으며 실라에게 다가갔다.

실라의 재갈을 풀었다.

실라는 수치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큿, 죽여라!

언어학자가 실감나게 말을 번역했다.

그 말 한마디에, 관중석이 들끓었다.

“우어어어어어!”

“우리 업계에선 포상입니다!”

“산다! 내가 산다! 반드시!”

경매장이 광기와 탐욕으로 물들었다.

미친놈들.

실라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주춤 물러났다.

패치스가 실라에게 재갈을 물렸다.

그는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띄우고 있었다.

“자, 그럼 바로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금화 다섯 닢을 시작으로 금화 한 닢씩 호가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번호판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패치스는 번호판을 가리키며 가격을 올렸다.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치솟던 가격이 어느 순간 멈췄다.

아마 시세보다 약간 높은 가격이 이 정도인 듯했다.

“스물하나! 금화 스물한 닢에서 멈췄습니다! 입찰하실 분 더 없으신가요?”

스물하나를 제시한 건 조금 전 반드시 산다고 포부를 밝힌 남자였다.

나는 조금 고민했다.

남자는 그리 돈이 많아 보이진 않았다.

어쩌면 노예를 하나 사들인 뒤, 곧장 떠나 버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아직 숲지기들이 오지 않았는데.

“낙……!”

“쯧.”

숲지기가 오기 전까지, 전부 입찰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전부 회수할 돈이다.

나는 번호판을 들었다.

“4번에서 금화 스물두 닢 나왔습니다!”

“큭!”

“아, 굴하지 않습니다! 13번에서 스물세 닢!”

남자는 초조한 듯 손톱을 깨물었다.

얼마 못 가서 떨어지겠군.

“다시 4번에서 스물네 닢! 더 없으십니까? ……낙찰되었습니다!”

“……빌어먹을!”

남자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번호판을 바닥에 내던졌다.

벌써 저러면 곤란한데.

* * *

“다시 한번, 4번에 낙찰입니다!”

“또? 또 4번이야?”

“저 사람 도대체 누구야?”

나는 그 이후로도 경매에 나온 요정족들을 전부 사들였다.

시세가 대충 정해져 있는 건지, 사람들은 일정 금액이 되자 입찰을 포기했다.

옆에 앉아 있던 배 나온 중년 남자가 넌지시 말했다.

“벌써 여섯 번째군. 경매장의 물건을 다 쓸어 갈 생각인가?”

그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알은체를 했다.

남자의 발치에는 새장이 있었는데, 페어리가 갇혀 있었다.

“욕심을 부리는 건 좋지만, 하나둘 정도는 떨거지들에게 양보하는 게 매너라네.”

“신경 끄시지.”

“허허. 한 성깔 한다, 이건가?”

내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하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남자의 뒤에 있던 덩치 둘이 목을 꺾으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들은 족히 1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남자가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상대를 가려가면서 까불어라.”

단이 앞으로 나섰다.

덩치들은 단을 비웃었다.

“뭐야. 이건?”

단보다 머리 하나만큼 큰 덩치들이었다.

덩치 하나가 단이 안 보인다는 듯 능청스럽게 두리번거렸다.

“왜. 뭐가 있어? 난 안 보이는데.”

단은 덩치들을 올려다보았다.

“꺼져.”

단이 기세를 드러냈다.

조금 허술한 면이 있긴 해도, 단은 소드 익스퍼트 초급 기사다.

한낱 용병 나부랭이가 견줄 실력은 아니었다.

“큼.”

“흠.”

덩치들도 실력 차이를 어렴풋이 눈치챈 듯 입을 다물었다.

“그만.”

내 말에, 단이 물러났다.

“물건 사러 온 거지. 싸우러 온 게 아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단은 의외로 장단을 잘 맞춰 줬다.

나는 남자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상대를 가려 가면서 까불어.”

“큭……!”

남자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덤벼들진 않았다.

신경전이었던 모양이다.

만약 덤벼들었다면 내가 직접 죽였을 텐데.

남자는 모르겠지만, 목숨을 건진 것이다.

채 몇 분도 남지 않은 목숨이지만 말이다.

“자, 그럼 다음 상품을 소개하죠!”

패치스의 목소리가 경매장을 채웠다.

무대로 페어리가 끌려왔다.

“이익!”

줄에 묶인 페어리는 도망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남자는 눈을 빛내며 무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패치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페어리입니다! 그럼, 금화 스무 닢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번호판이 우르르 올라가기 시작했다.

페어리의 몸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5번에서 금화 마흔 닢 나왔습니다!”

금화 마흔 닢에 입찰을 한 건 내 옆의 배 나온 중년 남자였다.

그는 옅은 웃음을 흘리며 새장을 쓰다듬었다.

몹시 범죄자 같은 웃음이었다.

“페어리 하나에 마흔 닢이라니.”

“페어리 수집가잖아. 저 사람은 못 이겨. 이번 경매에서 페어리는 포기해야겠군.”

중년 남자, 페어리 수집가가 나를 흘긋 보았다.

나는 번호판을 들었다.

“4번에서 마흔한 닢 나왔습니다!”

수집가는 따라올 테면 따라와 보라는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번호판이 아니었다.

“아! 5번! 금화 쉰 닢을 제시합니다!”

단번에 금화 열 닢 가격을 올렸다.

취미가 고약한 놈이다.

“안 들어올 건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 미세한 감각이 느껴졌다.

천막 주위로 펼쳐놓은 마나의 실에 무언가 걸린 것이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왔군.”

내가 번호판을 들지 않자, 패치스가 수집가를 가리켰다.

“4번, 드디어 포기! 페어리는 5번에 낙찰되었습니다!”

그 순간.

찌익.

천막의 윗부분이 찢어졌다.

그 틈으로 두 명의 엘프가 떨어졌다.

머리에 가시나무 관을 쓴 엘프들.

숲지기들이었다.

“오긴 뭐가 왔다는…….”

그들의 첫 목표는 페어리 수집가의 호위인 덩치들이었다.

숲지기들은 덩치들 등 뒤에 사뿐히 착지했다.

한 손에 들고 있던 나무 송곳을 덩치들의 목에 꽂아 넣었다.

푹!

“컥.”

덩치들은 제 죽음을 인식하지도 못한 것 같았다.

너무나 깔끔한 암살이었다.

숲지기 둘이 동시에 나무 송곳을 비틀었다.

우득!

“……그륵.”

덩치들의 입술 사이로 피거품을 올라왔다.

쿵!

그들이 쓰러지는 것을 신호로,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됐다.

“뭐, 뭐야!”

“끄아아아악!”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출구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두 명이 끝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숲지기들은 그림자처럼 조용히 사람들의 숨통을 끊었다.

대부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도련님!”

“그래.”

잠시 자리를 피해야 했다.

여기에 있으면 휘말리기 딱 좋았다.

가면을 쓴 채 VIP석에 앉아 요정족을 사들이는 인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덩치를 죽인 숲지기 중 하나가 내게 달려들었다.

“이런!”

캉!

단이 숲지기의 공격을 막았다.

숲지기는 살짝 뒤로 물러섰다.

먹잇감의 틈을 찾는 사냥꾼처럼, 나와 단을 주시했다.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아군이다.

숲지기는 내가 요정족의 언어를 쓰자 조금 동요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적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고양이처럼 몸을 낮추고 피 묻은 송곳을 겨눈다.

-거짓말 마라. 요정족을 사들이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휘말릴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다.

역시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건 하이 엘프, 르네뿐인 듯했다.

나는 가면을 벗었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물었다.

-하이 엘프. 르네가 나에 대해 말하지 않던가?

-그 더러운 입, 닫아라. 인간. 내가 속을 것 같나?

숲지기는 나를 완전히 적으로 단정 짓고 있었다.

적과 협상하지 않는다.

숲지기의 규율 중 하나였다.

어쩔 수 없다.

단에게 눈짓했다.

숲지기를 죽이면 본말전도다.

르네가 구출되기 전까지, 최대한 제압하는 방향으로.

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어라.

숲지기가 달려들었다.

단이 그녀를 막아섰다.

숲지기의 뒤에서 기다렸다는 듯 인영 하나가 더 튀어나왔다.

또 다른 숲지기가 페어리 수집가를 죽이자마자 내게 달려든 것이다.

“도련님! 위험합니다!”

송곳이 내 목을 꿰뚫기 직전.

나는 마나를 활성화했다.

홀드(Hold).

내 목을 노리던 숲지기가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췄다.

나는 숲지기의 손목을 잡아챘다.

홀드는 일시적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저지하는 마법.

그 안에 제압해야 했다.

숲지기의 눈이 커졌다.

-마법……?

쿵.

숲지기의 팔을 등 뒤로 꺾고, 벽면에 밀어붙였다.

-큭!

내게 제압당한 숲지기가 몸을 뒤틀었다.

팔의 뼈가 어긋나더라도 빠져나오려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슬립(Sleep).

숲지기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팔을 놓았다.

힘이 빠진 숲지기의 몸이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든 것이다.

단과 싸우던 숲지기가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숲지기는 단을 제치고 내게 달려들었다.

내게 제압 당한 숲지기가 죽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곧바로 레서 마나 번(Lesser Mana Burn)을 발동시켰다.

시야가 맑아지며, 정신이 고양됐다.

-무슨 짓을……!

숲지기가 내 머리를 노리고 송곳을 휘둘렀다.

나는 머리를 옆으로 움직여 공격을 피했다.

숲지기의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너도 좀 자라.”

슬립을 발동시키자, 숲지기의 몸이 무너졌다.

단이 뒤늦게 달려왔다.

“면목 없습니다.”

“아니. 괜찮아.”

그보다 빨리 벗어나는 게 먼저였다.

-내 부하들을 제압하다니.

어디선가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숲지기가 서 있었다.

가시나무 관의 색이 바래 있었다.

말하는 걸로 보아, 숲지기의 대장 격인 듯했다.

-흥미로운 인간들이군.

숲지기는 날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진 검을 꺼냈다.

검날 위로 오러가 씌워졌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

어쩌면 최상급일지도 모른다.

단이 검을 뽑았다.

나도 전투태세를 갖췄다.

“……심상치 않군요. 강할 것 같습니다.”

“그러네. 이건 좀 힘들겠는데.”

내단을 먹고, 나는 확실히 강해졌다.

소드 익스퍼트 초급인 단과 비등한 숲지기들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 소드 익스퍼트 상급까지는 무리였다.

같은 소드 익스퍼트더라도, 초급과 상급 사이의 간극은 엄청났다.

‘도망은…… 불가능하겠지.’

레서 마나 번으로 신체 능력을 강화하더라도 도망은 어려웠다.

-나는 아군이다. 안 믿어 줄 거지?

-호오, 요정족의 언어까지 쓰다니.

숲지기가 살기를 흘렸다.

협상의 여지는 보이지 않았다.

르네가 올 때까지 최대한 버텨 보는 수밖에.

-아빠!

-음?

그때였다.

나와 숲지기 사이로 대여섯 살로 보이는 아이가 끼어들었다.

난생처음 보는 아이였다.

숲지기의 아이인가?

숲지기를 보았지만, 그의 눈에도 의문이 가득했다.

양팔을 벌리고 내 앞을 막아선 아이는 내가 아닌, 숲지기에게 소리쳤다.

-우리 아빠 괴롭히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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